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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이중공생(二重共生)

2010.05.29 00:3705.29

실외에 흡연석을 마련한 카페의 자동문이 열리고, 이어폰을 낀 남자가 쟁반에 커피 두 잔과 냅킨을 담아서 조심스럽게 들고 나와 자리에 앉았다. 남자의 콧노래 소리에 여자는 테이블 위에 펼쳐졌던 책들을 정리하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여자가 남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자 이어폰을 낀 남자는 기꺼이 얼굴을 가까이 디밀었다. 여자는 남자의 귀에 꼽혀있던 이어폰을 살며시 뽑았다. 뭔가를 기대했었는지 남자는 살짝 찡그린 얼굴을 보이다가 피식 웃었다.
  “들어봐 오빠, 온통 그 노래야.”
카페 안팎으로 남자가 듣던 노래가 똑같이 흐르고 있었다. 대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여진 볼륨이지만 사람들은 불쾌해 하지 않았다.
카페 안쪽에서 가방을 챙겨 일어난 한 여자는 잘 들리지 않는 핸드폰에 귀를 바짝 붙이고서 밖으로 나섰다.
  “음 알아, 지금 음반가게에 가는 중이야. 그럼~ 당연히 소장가치가 있지.”
여자는 출입문에 온통 조서영의 브로마이드로 장식된 음반가게 문을 열었다. 교복차림 여학생들이 소란을 떨면서 조서영의 CD를 집어 들고 있었다. 여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조서영의 노래 ‘Come on my love’의 후렴부분이 좁은 매장을 가득 채웠다. 카운터 앞에서 전화를 받는 여자에게, 앳된 남자직원은 입모양으로만 ‘뭐 찾으세요?’하고 말했다. 여자는 통화하면서 한쪽 귀를 막고 있던 손가락으로 출입문의 브로마이드를 가리켰다. 몸에 붙는 검정가죽의상을 입고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조서영의 얼굴이, 뒤집힌 그림 속에서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집요하게 눌러대는 초인종 소리에 남자는 문을 열었다. 바로 옆집에 살면서도 마주치기 어려운 101호아줌마가 불편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멋쩍은 대면이었다. 아줌마가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노숙자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외모와 그 얼굴을 그대로 닮은, 쓰레기가 넘쳐나는 집안 환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01호 아줌마는 최근 집안에 갑자기 개미들이 들끓는데, 혹시 이집도 그러느냐고 물었다. 물론 아줌마는 철문을 사이에 얼굴을 반만 보이면서, 대화 도중 답을 찾았을 것이다. 혼자 사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남자는 101호아줌마가 자신에 대한 온갖 나쁜 소문을 단지 내에 퍼뜨릴 것이라 직감했다. 하굣길 아이들은 자신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경계를 할 것이고, 만약 주변에서 무슨 사건이 터진다면 용의자 1순위는 따놓았다고 확신이 들었다.
남자는 출입문을 닫고, 걸음을 조심스럽게 떼어 걸으며 거실의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먼지투성이 카펫 위를 무릎으로 기어가더니 소파 위에 놓여있던 돋보기를 집어 들었다. 101호와 마주한 벽 쪽에서 아줌마의 시끄러운 목소리와 알아듣기 힘든 남편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울려왔다. 남자는 돋보기로 바닥을 살폈다. 곳곳에 엉겨진 마른 먼지덩이가 구름처럼 굴러다니고 그 사이로 개미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이동했다. 흠집투성이  돋보기 테두리 안으로 개미가 여러 마리 담겼다. 개미들은 줄기차게 달리고만 있지 않았다. 어떤 녀석은 우뚝 멈춰서는 뒷다리 하나를 끌어다가, 마치 스트레칭 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더듬이를 머리 빗듯이 쓸어내리는 동작을 반복하기도 했다. 남자는 주먹과 무릎으로 기어서 열린 베란다 창문을 닫으려다가 에어컨 실외기에 앉아서 방정맞게 날개를 퍼덕이는 처음 보는 나방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그리고 다시 돋보기를 얼굴에 대고 바닥을 살폈다. 수도관의 좁은 틈으로 거침없이 빠져나가는 개미들의 뒤를 쫒다가, 반대로 달려 나오는 개미 중에 돋보기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녀석을 보았다. 그 개미는 다리 네 개로 버티고 서서, 앞다리 두 개를 더듬이와 함께 정신없이 휘저어댔다.
  “그래, 나도 그 아줌마 방금 전에 만났어.”
남자는 트레이닝복 주머니 속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것을 꺼내었다. 개미들이 다니던 길목위에 크래커 가루가 눈이 내린 것처럼 소복이 쌓였다.
남자는 발이 바닥에 디뎌질 때마다 마치 지뢰밭을 지나듯, 개미들이 다치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하면서 싱크대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의 움직임을 포착한 곱등이 한 마리가 긴 더듬이를 빠르게 흔들어대더니 싱크대 다리사이로 몸을 숨겼다. 곱등이가 머물러 있던 자리엔 면봉 세 개비와 쌀이 반 숟가락 분량,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바늘이 놓여 있었다. 남자는 엄지손가락으로 살며시 바늘을 눌러서 손가락에 붙은 바늘을 들여다보다가 실꾸리를 찾아 찔러 넣었다. 그리고 쌀을 손바닥 위로 모아서 주둥이가 말려 접힌 쌀부대를 열고 담았다. 쌀이 토르륵 가벼운 소리를 냈다. 다음으로 찬장 문을 열어, 면봉들을 올려두었다. 그 안엔 또 다른 면봉들과 이쑤시개, 0.7볼펜 스프링, 옷핀 등이 얌전히 담겨져 있었다.
남자는 TV를 켰다. 화면가득 처음 보는 벌레가 나무줄기에 빽빽하게 앉아있다. 크기는 알 수 없으나 두꺼워 보이는 갈색날개에 검은 점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버튼이 뻑뻑한 리모콘을 쥐어 볼륨을 높였다. ‘최근 중국에서 날아온 주홍날개꽃매미의 피해사례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주홍날개꽃매미는 주로 가죽나무와 포도나무의 수액을 빨아먹고 배설물로 인한 그을음병을 유발시키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조사에 따르면 피해를 입는 나무종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로, 농가의 심각한 피해가 예상됩니다. 천적 또한 없는……’
남자는 고개를 돌려서 베란다 밖, 에어컨 실외기 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남자는 받기 전에 화면에 뜬 발신자를 확인했다.
  “그래…… 조금만 참고 기다려봐…… 이번 꺼 아주 괜찮아. 며칠만 좀 믿고 기다려줘…… 아, 그렇다니까!”
남자가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소파 위로 던졌다. 푹신하게 탄성을 유지한 핸드폰이 카펫위로 떨어지면서 엎어져 놓였다. 벽을 타고 들려오는 101호 아줌마의 끊임없는 잔소리가 멀어지더니 아줌마의 성격을 닮은 청소기 소음에 묻혀 버렸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을 살피며 작은 방으로 걸어갔다. TV화면에선 어린이 성범죄를 놓고 집중 토론을 하기위해, 아나운서의 측면에 앉은 전문가가 문제점과 방안을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었다. 화면 하단엔 ‘주홍날개꽃매미 기승으로 전국 농가 피해우려’라는 자막이 지나갔다.
소파로 돌아온 남자의 손엔 통기타와 음악노트가 들려져 있었다. 소파 위에 통기타를 조심스럽게 누인 남자가 TV를 힘겹게 끄고, 투덜거리며 리모콘을 바닥에 던졌다. 작은 건전지 두 개가 튀어나와 바닥을 구르다 멈췄다. 남자는 다시 작은 방으로 가더니 접이식 보면대를 들고 왔다. 남자는 통기타를 끌어안고 음악노트를 보면대에 올렸다. 그리고 몇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고는 중간쯤에서 만난 어느 페이지에서 우뚝 멈췄다. 제목란에 굵게 적힌 ‘Come on my love’를 남자는 오래도록 뚫어지게 바라봤다. 남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현을 튕기면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음을 맞추어 줄감개를 살짝 조였다. 꺼진 TV의 회색빛 화면에 수염 가득하고 고민 많은 얼굴이 비쳤다. 남자는 음이 잘 맞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일어나 걸어가더니 디지털 조율기를 가져왔다. 털이 많은 남자의 무릎위에 납작한 조율기가 놓였다. 개방현 상태로 음을 조율하려 하지만 청소기소음 때문에 조율기가 통기타소리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통기타가 다시 소파에 놓이고 그 옆에 조율기가 던져졌다. 남자의 손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얘긴 없어? 뭐? 무슨 소리야 표절이라니! 누구? 미국 가수 애들이 어디 한 둘이야? 헨리스? 야, 넌 미국가수 다 아냐?”
남자는 PC를 켜고 헨리스를 검색했고 어렵지 않게 헨리스의 음악을 찾을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들어보니 도입부의 반복되는 리듬과 서서히 펼쳐지는 멜로디라인이, 후배가 일하는 기획사에 넘겼었던 자신의 곡과 정말 비슷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담뱃불을 종이컵에 비벼 껐다. 책상위로 지나가는 개미행렬이 보였다. 그중 한 마리가 담배꽁초가 담긴 종이컵 앞에서 서성이다가 남은 열기를 감지했는지 흠칫 놀라며 꽁지 빠지게 달아났다.
남자는 살금살금 소파로 돌아왔다. 청소기 소리가 멎었다. 남자는 다시 통기타를 안아들고 빠르게 조율을 마쳤다. 어느 날 뒤통수를 후려치듯이 순식간에 나타난 선율이 아닌, 그저 억지스레 밀어붙이는 현재의 곡은 예상했던 대로 작업시간이 더뎠다. 아직 반에 반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코드진행이 막막했다. 남자가 고개를 뒤로 젖혀 긴 한숨을 쉴 때, 베란다 방충망에서 뭔가가 달라붙어서 푸드득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동안 그것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슬며시 일어나 조심스럽게 바닥을 살피며 다가갔다. 방충망을 사이에 두고 남자의 얼굴과 곤충과의 거리가 주먹 하나 사이로 좁혀졌다. 남자는 눈을 곤충에게 고정한 채 한두 발짝 뒤로 물러나 돋보기를 집어 들었다. 잠시 후 돋보기의 시야 안에 들어온 곤충의 전신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던 곤충이 남자를 향해 활짝 열린 기문을 벌름거리고, 더듬이와 뻣뻣해 보이는 날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어댔다.
  “글쎄다……너희가 요즘 좀 유명해지긴 한 모양인데…… 직접 마주보니까, 나 역시 너흴 반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남자가 시선을 돌려 에어컨 실외기를 내려다보자 같은 녀석들이 듬성듬성 앉아있었다.
  “이놈들이었구나. 징그럽기도 하지.”
남자는 창틀에 거꾸로 붙어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개미에게 돋보기를 들이댔다.
  “여왕한테 전해줘. 나는 달가워하지 않더라고.”
바깥에 갇힌 주홍날개꽃매미는 방충망을 붙들고서, 자신을 힐끗 쳐다본 뒤 크래커가루를 바닥에 뿌리는 남자를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자의 손가락이 담뱃갑을 뒤적였다. 한 개비도 남아있지 않았다. 우그러진 담뱃갑이 방구석에 던져졌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엉긴 머리에 빗질을 하며 떨어진 식료품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그리고 모자를 눌러쓰고 문 밖을 나섰다.

바삐 움직이던 개미들 중에 한 부류는 열린 베란다 창문 밑을 지나다가 향긋한 냄새에 이끌려 본능적으로 진원지를 찾다가, 그것이 방충망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개미들은 흥분된 마음으로 더듬이 끝 감각을 최대한 활용해서 방충망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그리고 방충망을 붙들고 있는 주홍날개꽃매미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주홍날개꽃매미는 뭣이 우스운지 새된 소리로 킬킬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방충망 틈사이로 흉측한 다리들이 비죽이 나와 있었고 꽁무니에선 끈적이는 진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봐들, 우리 거래를 하는 게 어때?”
실외기에 앉아있던 똑같이 생긴 무리들이 날개를 펴올라 무질서하게 방충망에 붙었다. 개미들은 서로 마주보며 어찌해야할지 고민했다.

남자는 손에 들려진 검정 비닐봉투 속에서 담배를 꺼내어 책상 위로 던지고, 참치캔과 라면뭉치를 싱크대 위에 올렸다. 그리고 주둥이가 묶여진 얇은 비닐봉투를 꺼내 주둥이를 풀었다. 그 안엔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콩나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남자는 콩나물봉투 밑에 깔려있었던 건빵봉투를 찾아 뜯었다.
베란다 옆 수도관에서 달려 나오던 개미들 머리위에, 남자는 건빵을 으깨어 뿌렸다. 그리고 일어나는 남자의 눈에 방충망에 붙어있던 주홍날개꽃매미들이 들어왔다. 남자가 돋보기를 들이대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주홍날개꽃매미들 여러 마리가 또다시 날개를 떨어대며 모여들었다.
  “얘기 했을 텐데? 너희는 반갑지 않다고. 해충이건 어떻건, 그 이전에 생긴 것부터 맘에 안 들어.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
책상으로 간 남자는 서랍을 뒤져서 며칠 전 개미들이 물어다 놓은 고무밴드를 꺼냈다. 남자의 손은 고무밴드를 주홍날개꽃매미의 가슴팍에서부터 잡아 늘였다. 순간, 위험상황을 알아챈 녀석의 몸이 긴장하였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개미무리도 일제히 반응을 보였다. 남자의 눈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개미가 황급히 남자에게 행동을 멈춰줄 것을 요구했다.
남자는 냉장고 바닥과 장판이 만나지는 경계면에서 지휘부에 있는 개미들을 만났다. 무릎을 꿇고 궁둥이를 치켜든 불편한 자세로 타협은 빠르게 진행되어졌다. 개미들은 주홍날개꽃매미들의 달콤한 배설물을 포기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므로 가급적 수용해 주었으면 하는 입장을 보였다. 생각 끝에 남자는 개미들에게 쌀 공급량을 늘려줄 것과 방충망 한쪽에 충분한 구멍을 내어줄 테니, 흉측한 주홍날개꽃매미들의 활동 영역을 베란다까지로 제한하자고 협의했다. 물론 경계선 이내를 넘으면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과 그밖에 예측하지 못했던 공존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발생하면 모든 협의사항은 파기한다는 조건도 걸었다. 그리고 물량공급에 있어서 주홍날개꽃매미들이 흡족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차후 관계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고 전했다. 남자의 말에 개미들은 낯선 종(種)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지상에서 호흡하는 생명의 공동체로서 서로 이득을 주는 성숙된 방향으로 평화롭게 나아가자고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는 개미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진공청소기를 앞으로도 사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개미들을 배려하는 발언인 듯했지만 실질적으로 남자는 청소하기기가 귀찮았을 뿐이었다.    
개미들은 협의대로 약속을 성실하게 지켰다. 평소 어린아이의 주먹으로도 쥘 수 있을 만큼으로 놓여있던 쌀이 절반공기 가량으로 불어난 것이다. 대신에 자질구레한 이쑤시개 따위는 눈에 띄게 줄었다. 남자는 거실 구석마다 건빵가루를 뿌리고 베란다를 살펴보았다. 어디서 왔는지 주홍날개꽃매미의 수가 대충 봐도 스무 마리를 넘은 듯 했다. 개미들은 주홍날개꽃매미의 배설물에 유난히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움직임이 전보다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주홍날개꽃매미들은 베란다 안쪽으로 절대 넘어오지 않았다. 이들의 생활범위는 낮 동안 빌라단지주변 나무들의 수액을 빨아먹고서, 경계해야 할 방역차량이나 가로수에 살충제를 난사하는 인근의 상가 사람들, 그리고 비비탄총으로 위협하는 초등학생들로부터 안전한 남자의 집 베란다에 몸을 숨기는 것이 기본적인 패턴이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날이 밝도록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남자는 따끔거리는 팔 때문에 눈을 떴다. 털투성이 팔과 손등 위로 개미들이 앉아있었다. 남자는 다른 쪽 팔을 뻗어 돋보기를 들고서 개미들과 마주했다.  
  “응? 방역업체에서 약을 놓은 것 같다고?”
101호에 다녀온 개미들이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이미 많은 개미들이 교묘하게 먹이로 위장된 과립형 살충제에 중독 증상을 보인다는 것과 여왕마저도 마찬가지 증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책에서 얻은 것이 아닌, 개미들과 직접적인 소통으로 얻은 지식을 통해 알고 있었다. 개체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개미들은 당연하게도 음식을 나눠먹는 습성이 있고, 이점을 노려 개발된 방역업체의 개미살충제는 빠른 약효로 개미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것보다 완전 섬멸을 유도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쓰는 것이다. 101호에서 물고 온 약이 여왕을 비롯한 다른 개미들에게 전달되는 경로를 남자는 서서히 검토해 보았다.
남자가 싱크대 문을 열자, 포동포동한 곱등이가 기겁을 하며 달아났다. 남자의 눈에 비어있는 반투명한 플라스틱 김치통이 보였다.
빌라 정문 옆, 주인모를 고운 모래 앞에서 남자의 손이 돌을 골라내며 모래를 푸고 있었다. 주홍날개꽃매미 두 마리가 날아와 모래위에 앉고 날개를 퍼덕였다.
  “정성이라니? 개미들이 위험해지면 나도 공짜 쌀을 못 먹잖아.”
시험기간인지 아직 이른 시간에 여학생 둘이 걸어오다가 모래밭에 있는 남자를 발견하곤  재잘거림이 뚝 그쳤다. 주홍날개꽃매미들이 겉모래가 살짝 파이도록 빠르게 날갯짓을 했다.
  “너희들 주제에 수줍음 많은 여학생들의 마음을 알아? 적어도 난, 흉측하고 아무짝에 도움 안 되는 네놈들 같은 박멸대상은 아니야.”
남자는 모래가 반쯤 담긴 김치통을 신발장 위에 올리고 젖은 걸레로 닦았다. 그 안엔 튼실한 뒷다리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곱등이 두 마리가 그로기 상태로 누워있었다. 남자는 신발장 귀퉁이에 붙어있는 개미에게 말했다.
  “온전한 개미들은 모조리 여기로 이주하라고 여왕에게 전해줘.”
남자의 말에 개미는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김치통 안으로 기어 들어가, 사방에 플라스틱 높은 벽과 모래바닥을 더듬이로 훑다가 남자를 올려 보았다. 남자는 얼른 돋보기를 가져다가 개미를 살폈다.
  “뭐? 여왕도 죽고…… 생존개미는 절반이하……101호로 통하는 길도 봉쇄했다고?”
희생된 개미가 많다고 하지만 김치통으로 이주하여 우글거리는 개미떼는 그 수가 결코 적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남자는 싱크대 주변을 살피면 언제나 한두 마리씩 꼭 만나게 되는 곱등이를 종이뭉치로 내리쳐서 긴 더듬이를 잡고 김치통안에 넣어주었다. 개미들은 그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스스로 정하고, 심각하게 망가진 조직을 빠르게 재건하였다. 슬퍼하거나 생산적이지 않는 신세한탄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희생된 수많은 개미들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남자는 묻지 않았다. 개미들은 외부세계로의 통로이자 온갖 물품의 공급처였던 101호 대신에 주홍날개꽃매미의 배설물에 의존도가 높아졌다. 물론 남자는 과자가루를 여전히 흘려주고, 지독히도 운이 없는 그날의 곱등이를 잡아 개미들에게 주었다.
남자는 저녁준비를 했다. 냉장고를 열어, 며칠 전에 사다 넣은 참치캔과 콩나물 그리고 신 김치를 조합해서 찌개를 끓이려던 차에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후배는 기획사 사람들이 회식을 한다고 했다. 남자를 초대해도 좋다는 허락도 얻었다고 한다. 후배는 관계자들과 안면을 틀 수 있는 적절한 기회라고 남자에게 귀띔해 주었다. 남자는 즉시 가스레인지를 끄고 옷을 챙겨 입었다. 창문을 닫아걸었다. 주홍날개꽃매미들은 죄다 베란다로 들어와 있었다. 남자가 없는 동안 주홍날개꽃매미들이 안쪽경계선을 넘어올지는 오로지 녀석들의 양심에 맡겨야 한다. 서둘러 옷을 주워 입고 나가다가 보면대를 쓰러뜨렸다. 음악노트가 먼지투성이 카펫위에 풀썩하고 떨어졌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남자는 돌아왔다. 다리엔 힘이 풀렸고 바지부터 외투까지 주머니를 다 뒤져서야 열쇠를 찾을 수 있었다. 문이 힘겹게 열리고, 센서등 아래에서 신발을 간신히 벗었다. 문을 열면서부터 온 집안에 비릿한 냄새가 남자의 코에 감지되었다. 어두침침한 가운데 남자는 실눈을 뜨고 거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카펫위로 쓰러진 보면대가 보였다. 그리고 보면대 옆으로 가느다란 뭔가가 끊임없이 흩어져 있었다. 남자의 손이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켰다. 그리고 카펫 위의 풍경을 보고, 일시적으로 술이 과했다고 생각했다. 주홍날개꽃매미들은 베란다 한쪽 귀퉁이에서 서로 덕지덕지 엉겨서 꼼짝도 않았고, 신발장 김치통의 개미들은 몇 마리만 테두리 위를 마치 보초라도 서듯이 배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펫 위에는 비닐봉지에 담겨있어야 할 콩나물들이 넓게 펼쳐져서 여차하면 남자의 발에 밟힐 기세였다. 끝자락에 있는 콩나물 뿌리가 말라 비틀어져있는 상태로 봐서, 적어도 수 시간 전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남자는 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돋보기를 들고 개미들에게 묻고 싶었다. 얼른 김치통 테두리의 개미들에게 돋보기를 들이밀자 개미들은 후다닥 모래 속으로 몸을 숨겼다. 개미들은 평소 남자에게서 몸을 숨기는 행동은 보이지 않아서 남자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참 별일이다 싶어서 다시 뒤를 돌아, 펼쳐진 콩나물을 내려다보다가 그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남자는 콩나물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바닥에 떨어진 음악노트를 집어 들었다. 작업하다가 막혀서 오래도록 방치했던 ‘Come on my love’의 중단된 부분을 살피다가 바닥의 콩나물을 보았다. 이런…… 틀림없었다. 펼쳐진 콩나물들은 누군가가 악보를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남자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트림을 참으며 콩나물악보를 보고 음악노트에 옮겨 적었다. 남자는 연속적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콩나물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는 것과 온전한 것의 차이로 각 음표를 구분해 놓았고, 타이와 슬러까지 긴 콩나물을 꺾어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달세뇨와 코다 등을, 억지스레 구부려 길들인 콩나물 몸통으로 표기된 조악한 영문에 남자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가 악보를 옮겨 적는데 불편한 점은 단 하나, 음의 높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앞뒤 음표를 대조하면서 방법을 찾으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새벽 다섯 시경에 작업을 끝낸 남자는 돋보기를 들고 김치통을 들여다보았다. 개미들이 분주하게 모래 위에 숭숭 뚫린 굴을 정비하고 있었다. 몇 마리가 돋보기 앞으로 다가왔다.
  “고마워 얘들아. 노래가 아주 감각적이야.”
남자는 PC를 켜서 노트에 적은 악보를 악보 프로그램에 다시 옮겼다. 완성 후 재생을 클릭하며 속도를 살펴보았다. 알레그로로는 맛이 제대로 살지 않았다. 속도를 좀 더 높이고 클라이맥스를 두 번씩 반복하는 것으로 다시 손을 보자 노래는 완벽해져 있었다. 어딘가로 끊임없이 질주 하는듯한 느낌과 절제된 슬픔이 아리게 다가왔다. 남자는 악보와 소리파일로 변환한 파일을 만들어서 후배에게 메일로 전송했다.

남자의 직감대로 노래는 대성공이었다. ‘Come on my love’는 인기 아이돌그룹에서 독립한 조서영에게 싱글앨범 수록곡으로 주어졌다. 발표와 함께 인터넷 시장을 달구고 방송 순위차트에 진입과 동시에 1위를 차지하며 조서영을 제2의 전성기로 끌어냈다. 영화배우 정우선이 함께 출연한 뮤직비디오에서도 조서영은 속도감 넘치는 곡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어 ‘Come on my love’는 완벽하게 조서영 한 사람만의 노래로 굳어졌다. 대중음악 평론가들은 Come on my love가 우리 가요역사에 클래식 명곡으로 남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남자는 개미들이 만들어주는 또 다른 곡들을 수정하여 기획사에 보내고, 노래들은 연이어 히트행진을 이어 나갔다. 같은 기획사 소속의 가수들에게도 여러 곡이 주어지면서 급기야 기획사는 남자에게 전용 녹음실을 마련하겠다고 했으나 남자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했다. 유명연예프로그램으로부터 방문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지만 남자는 체질상 혼자만의 공간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고 둘러댔다.
얼굴이 많이 알려진 리포터와 빌라단지 옆 작은 공원에서 인터뷰를 했다. 리포터는 여러 가지 형식적인 질문들을 준비해 왔다. 가뜩이나 호감가지 않는 외모로 굳은 얼굴을 하고 인터뷰에 응하는 남자에게, 리포터와 카메라감독은 녹화를 중간마다 끊으며 남자의 제스처와 표정을 관리해 주었다. 녹화현장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남자는 군중 속에서, 며칠 전 자신이 모래를 푸고 있을 때 경계하며 지나쳤던 여학생들을 발견하고는 리포터에게 배운 그대로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두 여학생은 똥그래진 눈으로 서로의 어깨를 주먹으로 토닥이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간혹 주홍날개꽃매미들이 날아들어 사람들을 기겁하게 했지만 남자는 태연했다. 남자에게 일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주홍날개꽃매미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남자는 무척이나 오랜만에 도심 한복판을 걸었다. 혹시나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면도를 말끔하게 하고 모자를 눌러썼다. 바깥으로 흡연석이 마련된 카페에 앉아 길게 담배연기를 뿜었다. 카페는 안팎으로 사라브라이트만의 고운 음색이 바닥에 진동을 일으키며 넘실댔다. 맞은편 테이블에 젊은 연인이 앉아 테이블에 책을 펼치고 잡담을 했다. 잠시 후 여자가 이어폰을 낀 남자에게 팔꿈치로 툭 치고 턱짓을 하자, 이어폰을 낀 남자가 주문된 커피를 가지러 갔다. 그 사이 여자는 담배를 물었다. 사라브라이트만의 노래가 여운을 남기며 끝나고 조서영의 ‘Come on my love’가 흐르자 여자의 눈빛이 빛났다. 카페의 자동문이 열리고 이어폰을 낀 남자가 쟁반에 커피 두 잔과 냅킨을 담아서 조심스럽게 들고 나와 자리에 앉았다. 남자의 콧노래 소리에 여자는 테이블 위에 펼쳐졌던 책들을 정리하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여자가 남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자 이어폰을 낀 남자는 기꺼이 얼굴을 가까이 디밀었다. 여자는 남자의 귀에 꼽혀있던 이어폰을 살며시 뽑았다. 뭔가를 기대했었는지 남자는 살짝 찡그린 얼굴을 보이다가 피식 웃었다.
  “들어봐 오빠, 온통 그 노래야.”
카페 내부에서 핸드폰을 귀에 바짝 붙인 한 여자가 부리나케 일어나, 쓰레기로 변한 빈 컵을 쓰레기통에 밀어 넣고 급하게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여자는 종종걸음으로 남자의 등 뒤를 지나쳤다.
  “음 알아, 지금 음반가게에 가는 중이야. 그럼~ 당연히 소장가치가 있지.”

거울 앞에서 남자는 긴 머리를 앞으로 쓸어 올려 머리카락 끝을 잘게 여러 번 잘랐다. 뒤집어놓은 널따란 달력위에 남자의 머리카락들이 손톱 절반만한 크기로 떨어져 쌓였다. 남자는 달력 주변을 지나는 개미들에게 악기별 악보도 가능한지 물었다. 개미들은 어려울 것이 전혀 없고, 타브악보도 할 수 있다고 거드름을 피웠다.
개미들은 김치통 안에서 새 여왕을 선출했다. 젊은 감각을 지닌 새로운 여왕은 여전히 불안한 101호를 과감히 포기했다. 대신 창문 밖 외벽과 가스관을 타고 남자의 집 바로 윗집인 202호를 공략하기 위해 어린 개미들의 체력을 육성하면서 주홍날개꽃매미의 배설물섭취를 적극 권장했다.
남자는 개체수가 빠르게 불어나는 개미들을 위해서 김치통을 세 개 더 마련하고 김치통을 모조리 베란다로 옮겼다. 개미들은 단지가 조성된 새 주거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용감한 개미들 중 일부가 202호에서 처음으로 쌀을 물어 날랐다. 남자는 여왕에게 이제 더 이상 쌀을 가져오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음악작업만 적극적으로 도와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주홍날개꽃매미도 개체수가 전보다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남자는 주홍날개꽃매미들에게, 개미들만 아니었으면 진작 처리했을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말을 했다. 주홍날개꽃매미들은 자신들이 개미들에게 현재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남자에게 배짱을 부렸다.

남자는 기획사담당자를 만나기 위해서 외출을 하던 중 주차장에서 같은 동 반장아줌마와 마주쳤다. 반장아줌마는 건물 주변에 뉴스에서 봤던 것들하고 똑같은 주홍날개꽃매미가 많이 돌아다닌다고,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소탕작전을 벌여야겠다고 투덜댔다. 남자는 건성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식품점에 들러, 깨와 고심 끝에 벌꿀 한 병을 사들고 왔다. 남자는 돌아오자마자 반으로 잘라낸 종이컵 두 개에 자른 머리카락과 깨를 각각 담았다. 개미들은 남자의 생각을 빠르게 간파하고 곧바로 음악작업에 착수했다. 개미들은 잘린 머리카락과 깨알을 물고 음악노트 위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운반조와 작업조가 나뉘어 효율적인 작업진행이 이루어졌다. 남자는 나무젓가락을 가져와, 그것을 꿀병 속 깊이 담갔다 뺐다. 그리고 젓가락에 꿀이 묻지 않은 쪽을 아래로 해서 김치통마다 한 개씩 모래에 수직으로 꽂았다. 개미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꿀에 대해 본능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개미들은 악보를 옮기던 작업 중에 틈내어 김치통으로 들어가서 꿀을 마음껏 섭취했다. 이로써 주홍날개꽃매미들의 퇴출에 대한 명분은 확실해졌다.
남자는 자신의 인생을 전환시킨 ‘Come on my love’를 틀어놓고 흥겹게 콧노래를 불렀다.  머릿속엔 온갖 행복한 고민들로 넘쳐났다. 은행잔고는 이미 넉넉함을 넘어섰다. 덜덜거리는 중고차부터 외제 스포츠카로 바꿔야겠다. 대스타 작곡가답게 호화로운 아파트를 사서 이사해야겠다. 탄력 받았을 때 히트곡을 몇 개 더 남겨서 굳히기에 들어가야겠다. 남자는 앞날의 청사진을 그리며 커피잔을 들고 방충망 앞에 섰다. 인근 나무들에서 수액을 잔뜩 빨아먹고 온 주홍날개꽃매미들이 포만감으로부터 휴식하기 위해 실외기에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남자가 온 것을 알아보고 몇 마리가 방충망 위로 날아와 붙었다.
  “개미들은 예전부터 나한테 여러 가지 물품들을 제공해 줬어. 내가 가난할 땐 개미들이 가져다주는 쌀이 톡톡히 큰 역할을 했었지. 그리고 지금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동반자들이 되었어. 바로 음악작업에 절대적인 힘을 보태거든? 노랫소리 들리지? 바로 저 노래가 개미들이 나한테 선물한 거야. 헌데…… 너희들은 올 때부터 신경 쓰이더니만 역시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이 증명 되었어. 그래서…… 이젠 다들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단지에서 보는 눈도 있고 말이야. 만약에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할 수 없이 무력을 쓸 수밖에 없어. 알아들었으면 어서들 짐 싸서 가버려!”
음악노트 위엔 개미들이 섬세하게 올려놓은 깨알과 머리카락 악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하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모든 작업을 개미들에게 의존한 채 책상에 발을 올리고 다운받은 영화를 보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선가 푸덕거리는 힘겨운 날갯짓소리가 들리더니 책상위로 뭔가가 툭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작은 손톱깎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주홍날개꽃매미 네 마리가 착륙했다.
  “이것들이…… 왜 아직 안가고……그리고 베란다를 넘어오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지?”
여러 마리 중 한 마리가 앞다리를 세차게 움직였다. 남자는 돋보기로 그 녀석을 들여다보았다. 네 마리 다 체력이 바닥난 듯 보였다.
  “우리 정성이다. 그리고 음악작업이라면 우리도 충분히 도울 수 있다.”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네 마리를 내려다볼 때, 거실에서도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일어나 나가보았다. 거기엔 바닥에 낮게 붙어서 다리마다 경련을 일으키거나, 날개가 꺾여서 파김치가 된 주홍날개꽃매미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 옆엔 TV리모콘이 떨어져 있었다.
남자는 음악노트 한 페이지를 뜯어서 베란다 바닥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개미들이 작업하는 곳에서 머리카락과 깨알을 나누어 가져다 놓았다.
  “그래, 마지막 기회야. 어디 한 번 해봐!”
남자는 영화를 보다가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핸드폰은 미리 꺼두어 남자의 휴식을 방해할 것은 없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남자는 잠에서 깨었다. 개미들은 여전히 쉼 없이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가사도, 제목도 없는 노래를 대체 무슨 영감을 받아 만드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남자는 일어나 개미들을 격려하고 주홍날개꽃매미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개미들에 비해서 체격이 상대적으로 월등히 큰 주홍날개꽃매미들은 역시나 개미들처럼 섬세한 움직임이 쉽지 않았다. 기껏 작업해놓은 노트위에서 날개를 조심하지 못해, 머리카락을 흩트리거나 저들끼리 의견충돌을 일으켜 다투는 모습까지 보였다. 남자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껏 개미들에게서 받았던 노래들하고 대조해볼 때 확연히 다른 색채를 가졌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곡이 대체로 산만하고 투박하지만, 잘만 다듬으면 아주 개성강한 댄스곡이 탄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남자는 즉각 남은 달력을 뜯어서 주홍날개꽃매미들의 체격에 맞추어 직접 네임펜으로 오선을 그려 주었다. 어쩌면 또 한 번의 기적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고 남자는 기대에 차 있었다.
난데없이 창문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남자가 창문을 열었을 때, 주차장을 가로질러 서서히 다가오는 방역차량이 보였다. 차량 뒤를 따라 달리는 아이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굉음과 함께 빌라건물들의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순간 얼굴이 일그러진 남자는 황급히 창문을 모두 닫고, 김치통과 음악노트들을 안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한창 작업 중인 개미들과 주홍날개꽃매미들에게 안방으로 들어가라고 일렀다. 무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개미들을 찾아서 쓰레받기에 쓸어 담아 안방에 풀어놓았다. 하지만 창문 틈으로 새들어오는 가스를 완벽하게 막을 길은 없었다. 전전긍긍 애가 닳은 남자에게 주홍날개꽃매미가 허탈하게 한마디 했다.
  “저거…… 효과 없는데……”

남자는 새로운 노래들의 수정작업을 끝내고 기획사에 보냈다. 개미들의 곡은 이미 충분한 가능성이 검증되었지만 주홍날개꽃매미들의 곡은 다분히 실험적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적중했다. 기획사측은 개미들의 작품 세 곡을 묶어두고 주홍날개꽃매미들의 곡을 현재 가장 잘나가는 댄스그룹 ‘SDK’의 새 앨범 타이틀곡으로 지정한다고 알려왔다. 성인가요적인 요소가 살짝 섞인 전개부와 강한 비트감이 잘 어우러져, 여러 세대를 공략하기에 충분하며 또 한 차례 전국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 같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남자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막대한 수입과 명성, 그리고 조용필과 서태지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월등한 가요계의 역사로 남을 자신을 그려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곡 작업에 분주한 개미들과 주홍날개꽃매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개미들에게는 꿀까지 사주었지만, 여태 주홍날개꽃매미들을 천대했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남자는 구석에서 방치된 큰 화분을 꺼내서 정성들여 닦고, 밖에 나가 야구방망이만한 각목을 가져다 화분에 심었다. 그리고 각목에 꿀을 걸쭉하게 발랐다. 이제 주홍날개꽃매미들은 목숨을 걸고 밖에 나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주홍날개꽃매미들은 남자의 극진한 환대에 놀라워하며 각목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꿀을 빨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늦게까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남자의 핸드폰이 울어댔다. 발신자를 보니 후배였다. 남자는 귀찮아하다가 간신히 전화를 받았다.
  “형!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남자는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얘가 무슨 일 때문에 그런가 하고 생각했다. 남자는 뒷목 주변을 소리가 나도록 긁었다.
  “음?……왜? 무슨 일인데……?”
후배는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지금 당장 정신 차리고 PC를 켜보라고 난리를 쳤다. 남자는 주홍날개꽃매미들이 해냈구나 생각했다.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런 일로 자꾸 호들갑을 떠는 것에 대하여 스타의 삶은 참 귀찮다고 여겼다.
남자는 PC가 부팅되는 동안 거실과 베란다의 곤충동료들을 둘러보았다. 꾀부림도 없이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터넷을 접속하자마자 남자의 눈에 가장먼저 들어온 것은 인기검색어 1위에 랭크된 Dr-A였다. 그리고 2위엔 SDK가 있었고, 그 밑으로 Dr-A노래, SDK표절, 중국가수, SDK중국표절, SDK작곡가 등이 연이어 펼쳐졌다. 순간 남자는 정신이 들었다. 연예뉴스 홈에 ‘SDK신곡 중국Dr-A 표절의혹’ 이란 기사가 톱으로 실렸다. ‘중국노래라니 실망이다’, ‘어쩐지 짜장 냄새가 나더라니’, ‘내 그럴 줄 알았다’ 등 온통 비웃는 댓글들이 넘쳐났다. 남자는 후배에게 곧바로 전화했다. 후배는 인터넷 세상에 비밀이 통할 줄 알았느냐며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고 어이없어했다.
남자는 인터넷에 떠도는 Dr-A의 노래를 찾아서 들어보았다. 이미 어느 친절한 네티즌이 두 곡을 대조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판별할 수 있도록 동영상을 만들어 놓았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똑같았다. 남자는 앉은 채로 한숨을 길게 쉬었다. 모니터 옆엔 지난 날 주홍날개꽃매미들이 가져다 놓은 손톱깎이가 보였다. 남자는 손톱깎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린 창문이 있는지 살펴보고, 베란다로 향했다. 남자의 양손에 고무장갑이 끼워졌다.
주홍날개꽃매미들 한 무리는 음악노트에 모여 있고, 한 무리는 각목의 꿀에 붙어 있었다. 남자의 손이 방충망의 뚫어진 곳에 걸레를 밀어 넣어 완전히 막았다. 평소 잘 닫지 않던 베란다 안쪽 문을 닫았다. 그리고 각목에 손을 뻗어 주홍날개꽃매미 한 마리를 잡아 올려서 징그러운 여섯 개 다리를 손톱깎이로 짧게 잘랐다. 잡힌 놈은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을 쳐대고 상황을 파악한 다른 놈들이 일제히 퍼덕이며 날아올랐지만 도망갈 곳은 없었다. 남자는 손에 잡히는 대로 놈들을 잡아 올려 다리를 잘랐다. 남자의 집 베란다 안은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해갔다. 101호에서 리모콘을 찾는 아줌마의 남편을 나무라는 목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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