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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그림자 매듭

2010.03.27 02:3003.27

그림자 매듭

구십팔만 천칠백팔십사…….
구십팔만 천칠백팔십오…….
구십팔만 천칠백팔십육…….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입속으로 숫자를 중얼거린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한두 걸음 정도 차이나는 것이야 스승님이 아실 리 없겠지. 하지만 잘못하다 통째로 걸음수를 잊어 먹는 일이 생긴다면 큰일이다. 그럼 아마 스승님은 내가 기억하는 숫자만큼 나를 몽둥이질 할 것이다. 나는 에프라니아 여신의 달부터 마르헤아 여신의 달에 걸쳐 이 짓을 하고 있다. 이타카를 떠나 헬리오스로 오는 한 달 내내 말이다.
그렇다. 나는 한 달 동안 내 걸음 걸음마다 숫자를 세고 있다.
무거운 등짐을 메고 벌판과 황야를 지나 들판에서 야영을 할 때도 냇가를 건널 때도 나는 계속 내 발걸음의 숫자를 세고 있다. 비바람에 몸이 휘청거려 이가 딱딱 마주칠 때에도 세어 온 발걸음을 잊지 않기 위해 계속 중얼거렸다.
왜 그러고 있느냐고? 그게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다.

나의 스승님은 헬리오스의 제일가는 학자이자 측량사 이타카이오스다. 원래는 아명兒名과 신명神名, 도시에서 내리는 명예名譽名이 붙어 훨씬 더 긴 이름이지만 본인조차도 석판에 적어 놓은 것을 읽지 않는 이상은 외워서 말하기 곤란할 정도로 긴 이름이라 그냥 이타카이오스로 불리었다.
내 이름은 카무르.
성도 아명도 명예명도 없는 그냥 카무르이다.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카무르로 불리었고 다른 이름을 불러준 사람도 없으니 그냥 카무르다.
나는 이타카이오스의 첫 번째 조수이며 제자이다. 첫 번째 조수라는 의미는 다른 조수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조수라는 말이 아니다. 괴팍한 영감의 성질머리 때문에 조수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이들은 모두 한 달도 못 버티고 떠나고야 말았다.
나야 뭐, 젖먹이 때 버려진 동방 노예의 자식을 스승님이 거둬주시는 바람에 지금까지 최초이자 유일한 제자 겸 조수가 된 것이다. 스승님은 헤르티오무 출신의 학자였으나 헬리오스가 헤르티오무를 정복 한 이후로 헬리오스로 이주하게 되었다. 헤르티오무 시절부터 명망 있는 학자였던 스승님은 헬리오스의 신관들에 의하여 신분을 보장받고 정착하게 되었다. 스승님은 신관들의 요청이 있으면 토지를 측량하거나 신전 건축을 위한 공사 현장에서 일하셨다.
스승님 부부는 내가 나타나기 전에는 제법 행복하게 사셨던 듯하다. 직접 스승님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주 적지만, 성안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스승님 부부는 성안에서 존경받으며 평온한 삶을 살고 계셨다. 그러나 두 분은 사랑했던 아들 타키오네가 파르키온과의 전쟁에서 주검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행복’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우기 시작했다. 두 분은 아들의 흔적을 삶에서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삶에서 자신들의 흔적마저 지우기 시작했다. 먼저 사라진 것은 마나님 쪽이었다. 신전의 신녀가 ‘마음의 병이니 마르헤아 여신께 제물을 바치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한 때부터 꼬박 한해가 지난, 그러니까 다음해 마르헤아 여신의 달에 마나님은 돌아가셨다. 마나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 스승님의 삶은 무너졌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길에서 행패를 일삼았고, 신관의 명을 거부하고 신전 건축현장에 나타나지 않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었다. 스승님의 말에 따르면 내가 스승님과 만난 것은 그렇게 엉망으로 산지 어언 삼년이 지난 어느 봄이었다고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술에 취해 길바닥에 뒹굴며 자고 있었는데 그날이 마치 타키오네가 젖먹이이던 시절의 어느 날 아침처럼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스승님은 잠이 덜깬 채 ‘탈리아. 투키네(타키오네의 아명)가 울잖아.’라며 화를 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 시장 한쪽 구석의 공터에 멍하니 앉아 있는 스승님에게는 마나님도, 어린 타키오네도 없었다. 그곳에는 젖먹이였던 나뿐이었다.
스승님도 처음에는 모른 척 그냥 두고 집으로 올까 했었지만 어린 게 빽빽 울며 매달리는 걸 매몰차게 내버려두고 갈 수가 없어서 일단 집으로 데려오셨다고 한다. 숙취와 내 울음소리가 조금씩 잠잠해 질 때쯤에서야 한 사내가 스승님의 집을 방문했다. 사내는 쭈뼛거리며 집으로 와서는 나를 되돌려달라고 했다. 스승님이 무슨 소리냐고 묻자 사내가 답했다.
“저 아이는 도망친 동방 노예의 자식입니다. 원래는 이곳 시장에서 같이 팔려했다가 잃어버린 노예이니 만큼 아이를 돌려 주셔야겠습니다.”
애초에 얼결에 데리고 온 젖먹이니 별 말없이 돌려주려던 스승님은 사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곱게 돌려줄 마음이 사라졌던 모양이다. 스승님은 아이의 값으로 얼마를 받으려 했나 물었다.
“1크나리온입니다.”
“그럼 2크나리온 내시게.”
사내가 무슨 헛소리냐고 묻자 스승님이 답했다.
“자네는 이 아이를 잃어 버렸으니 1크나리온을 손해 본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되찾아 주었으니 손해 본 1크나리온을 벌게 해준 것이야. 그래서 각각의 합이 2크나리온. 돈은 거기 두고 가져가시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속을 인간이 어디 있겠냐고 했지만 정말 있었던 모양이다. 사내는 2크나리온은 어른 노예의 몸값이라며 나를 되가져가길 거부했다.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과정으로 스승님의 집에서 살게 된 나는 스승님에게 말과 글을 배우며 계산도 함께 배웠다.
스승님은 자애로운 아버지이지만, 자애로운 스승은 아니었다. 불같은 성격 덕분에 스승님의 몽둥이질을 피해 집밖으로 도망쳐 성안을 떠돌기 일쑤였다. 시간이 흘러 계산법과 글쓰기를 익힌 나를 스승님은 나를 조수로 데리고 다니셨다. 스승님은 헬리오스의 유일한 측량사였다. 토지를 정리하기 위한 측량이나 성벽을 증축하는 곳에는 늘 스승님과 내가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도시를 위한 일을 할 때마다 신전에서는 스승님에게 급료를 지불하였다. 일하지 않을 때도 적은 돈이지만 급료가 나왔다. 스승님의 측량 기술과 계산법이 다른 도시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한다는 조건이 붙은 급료였다. 그 조건은 한 푼의 급료도 받지 못하는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구십팔만 천칠백구십구…….
구십팔만 천팔백…….
이제 거의 다 와간다. 들판 너머로 헬리오스의 성벽이 보인다. 성문 앞에는 방문객들을 위압하려는 듯 팔을 내뻗고 있는 헬리오스 여신의 석상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서 있다. 파르키온의 침공 때 파괴되었던 석상을 조각가(라고는 하지만 나는 술또라이 영감이라고 부른다) 아큘레아스가 원래 있던 것의 두 배 크기로 세운 것이었다. 석상은 성벽 안쪽이 아닌 성벽 바깥에 세워져 있다. 이 때문에 부서진 첫 번째 석상은 파르키온 전쟁 당시 적군의 공성탑 역할을 하기도 했다. 새로 세울 당시에도 그때의 경험 때문에 성벽 안쪽이나 중앙 광장에 세우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헬리오스 여신상이 적의 침입을 막아주고 감히 헬리오스를 넘보지 못하도록 위용을 보이려면 성벽 밖에 있는 게 옳다는 신관들의 주장에 따라 도시의 수호신상이 성벽 밖에 세워지는 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멀리 지평선과 겹쳐져 흐릿하게 보이던 도시가 점점 또렷하게 보이자 내 발걸음도 저절로 힘이 났다. 이제 이 지긋한 발걸음 세기도 안녕이다. 들판과 밭, 야산과 언덕을 구분 않고 오직 일직선으로만 오기 위해 길이 아닌 곳을 걷다가 넘어지는 일도 이제 끝이다. 도시를 오가는 상인들이 마차에 태워주겠다는 친절도 거절하고 말없이 걸어야만 했던 생고생도 이젠 끝이다.
성벽까지 몇 걸음이나 될까? 어림잡아 오천 걸음? 오만 걸음이라도 상관없다. 헬리오스가 보이고 있으니까. 내 집이 있는 곳, 스승님이 계신 곳, 그리고 페리아가 있는 도시 헬리오스가 보이니까 상관없다.
‘페리아.’
숫자를 잊지 않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춰 서서 입속으로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단지 이름만을 부른 것이었는데도 입안에서 향긋한 들꽃의 향기가 퍼지는 것 같다.
지금 내 등짐 안에 들어있는 선물을 받아들면 그녀는 어떤 미소를 지어보일까 상상해보았다. 반달처럼 둥근 눈, 메네케아 산등성이처럼 반듯하게 솟은 콧날과 도톰한 입술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내 이름을 듣는 것을 상상해 본다. 잠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음미하며 길가에 서있는데 무언가 소리가 들려온다. 말발굽 소리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두 마리의 말이 나를 앞질러 가더니 길을 막고 멈춰 섰다. 말 위에는 신전의 병사 차림을 한 남자와 델파이오네스가 있었다. 병사가 말에서 내려 내 팔을 잡으며 부산을 떨었다.
“역시 신관님의 말씀처럼 일직선으로 걸어 왔나보네요! 이 녀석, 네놈 찾느라고 이타카와 헬리오스 사이의 온 들판은 다 뒤지고 다닌 것 같다!”
델파이오네스는 타키오네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와 또래가 될 정도의 남자였다. 헬리오스 신전의 젊은 신관중 하나로 무예도 뛰어나 미래의 대신관이라 불리는 남자다.
“이타카이오스 선생의 제자, 카무르……. 맞지?”
‘구십팔만 칠천구백구십구…….’
나는 속으로 이제까지 세어온 숫자에서 하나를 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델파이오네스는 체구나 용모에서 특이 할 것이 없는 남자였지만 사팔뜨기라는 점 때문에 사람들에게 묘한 불안감을 주는 존재였다. 왼쪽 눈동자가 다른 쪽 눈동자 보다 바깥을 향하고 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어도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그의 표정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는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지만 , 어느 순간에는 아무데도 보고 있지 않는 것 같다고 느꼈다. 어쩌면 그는 모든 곳을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자 매듭을 갖고 있지?”
델파이오네스의 물음에 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림자 매듭’이란 것 자체가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내가 우물쭈물 하고있자 델파이오네스의 표정에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 무언가를 확신할 때 짓는 미소였다.
델파이오네스는 안장 옆에 걸린 가죽가방에서 막대 하나를 꺼내어 보란 듯이 들어 보였다. 평범한 막대기이다. 부지깽이로나 쓸 법한 나무 막대기.
길이는 3규빗. 저것은 스승님이 갖고 계시던 막대기이며 나 역시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어허! 이놈이……. 어서 대답 못 해?”
내 팔을 붙잡고 있던 병사가 거칠게 채근했다.
나는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노끈일 뿐인데요?”
병사는 내 가방을 뒤지더니 아무렇게나 구석에 처박혀 있던 노끈을 꺼냈다. 노끈은 짐을 부릴때 쓰는 평범한 것으로 한쪽에는 한 뼘에 채 못 미치는 간격으로 두 개의 매듭이 지어져 있다. 그 매듭을 지은 것은 나였다.
나는 반항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헬리오스 성벽이 바라보이는 길가에서 고작 끈 하나 때문에 목숨을 잃기는 싫었다. 만약 내주지 않더라도 미래의 대신관大神官이 될 델파이오네스가 노끈이 갖고 싶어 헬리오스와 이타카 사이를 왕복하며 나를 쫓아 왔다면 그는 갖게 될 것이다. 내가 여기서 반항을 하든 말든.
말에서 내린 델파이오네스는 양손에 막대와 노끈을 각각 들고 있었다. 마치 헬리오스 신전에 바치는 고결한 제물처럼.  델파이오네스는 그것들을 내게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 매듭이 무엇인줄 아느냐?”
“제가 갖고 있던 노끈이기는 합니다만…….”
“그럼, 이 매듭의 의미도 아느냐?”
델파이오네스의 시선은 도대체 어딜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잘 모릅니다. 저는 무식한 노예라서…….”
아차, 실수다. 델파이오네스는 좀 전에 나를 물을 때 분명  ‘이타카이오스 선생의 제자’인지를 물었다. 그것은 곧 나를 도시의 측량관의 제자로서 대우해주겠다는 의미였다. 노예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학자의 제자에게 질문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나는 질문에 ‘노예라서 잘 모른다’는 식으로 회피한 것이다. ‘델파이오네스’의 시선이 이제 어디로 집중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젠장 , 영감이 한 말이 맞았구나.’
델파이오네스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오르다가 사라졌다. 그는 내 가방에서 꺼낸 노끈을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노끈의 양쪽 끝을 잡고 팔을 벌리고 있으라 했다.
“잘 잡고 있어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줄기 섬광이 눈앞을 스쳐갔다.
델파이오네스는 헬리오스에서 가장 빨리 검을 뽑는 남자였다. 그 동작이 하도 빨라 상대하던 적은 자신이 베였는지도 모를 정도라는 무용담이 떠돌았다.
바지에 오줌을 지리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던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양손에는 잘려진 노끈이 각각 들려 있었다. 그는 매듭과 매듭 사이를 정확하게 베어 내었다. 델파이오네스는 노끈을 잡고 있던 양팔 사이에 검을 넣어 마치 거리를 재듯이 내 두 손을 한 번씩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매듭의 간격을 이제 잊어버려야 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사라진 '간격'이다. 알겠느냐? 네 스승이 묻더라도 답하지 말거라. 그것이 너와 네 스승을 위한 길이이다.”
델파이오네스는 병사를 시켜 내 몸과 등짐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끈이나 매듭이 되어 있는 곳은 유심히 살펴보고, 밀병을 싼 포장지 대용의 잎사귀는 모두 열어 그 안을 확인했다.
병사는 안에든 옷과 야영 할 때 사용한 침구를 모두 펼쳐 그 표면에 무언가 표시된 흔적은 없는가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내가 입고 있는 옷과 신발끈까지 모두 살펴보았다.
“이건 뭐지?”
병사가 들고 있는 것은 목걸이였다. 이타카에서 산 페리아에게 줄 선물. 목걸이를 넘겨받은 델파이오네스는 상아로 만든 펜던트의 앞뒤를 살펴보고 줄의 길이를 가늠해보더니 병사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이것도 가져갈 수 없다.”
“무슨 소립니까! 그건 제 물건이라고요!”
“노예가 소유물을 가질 수 있던가?”
델파이오네스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그어졌다. 칼로 아무렇게나 그린 미소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곳은 더 이상 나와 스승님의 집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신전에서 보낸 몇 명의 병사들이 마차에 짐을 싣고 있었다. 마당 한편에는 먼저 도착한 델파이오네스와 스승님이 서있었다.
언뜻 보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스승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델파이오네스는 마치 스승님을 불장난을 치다 걸린 아이마냥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승님도 불장난 치다 걸린 어린애 같은 표정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다녀왔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나와 델파이오네스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표정을 살폈다. 공범자를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그래, 왔느냐. 고생이 많았다.”
잠시 멈추었던 ‘델파이오네스’의 말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큰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지긋이 억누르는 목소리였다. 위엄과 위협이 동시에 배어 나오는 목소리.
“선생님께서 하신 행동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곤경에 처할 지를 모르셨단 말씀이십니까? 카무르를 이타카로 보내기 전에만 알았어도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하지만…….”
스승님은 말을 못 잇고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매듭은 어찌 되었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나는 보일 듯 말듯 고개를 가로 젓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과 창고 사이에 내가 쓰는 방이 있다. 부엌은 더 이상 부엌이 아니었고 창고도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당황한 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던지고 다시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제야 병사들이 마차에 싣고 있던 짐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스승님의 모든 측량기구들이 그곳에 있었다. 측량기구 뿐만이 아니었다. 짐을 꾸릴 때 쓰는 노끈, 석판들, 필기용 석필과 석필을 대체할 수 있는 모든 물건들(하다못해 숟가락과 부지깽이까지)을 마차에 실은 것이다.
나는 잠시 병사들에게 가서 불평했지만 그들은 델파이오네스를 가리킬 뿐 다른 대답이 없었다.
델파이오네스는 집안의 모든 측량도구와 계산에 필요한 도구들은 죄다 쓸어갈 참이었다. 측량에는 기구가 필요하지만 계산에는 숫자를 쓸 수 있는 바닥과 막대기 하나면 족하다. 물론 막대기가 없다면 손가락으로도 충분하다. 델파이오네스가 손가락까지 빼앗으려 했다면 그는 정말로 그랬을지 모른다.

그림자 매듭을 델파이오네스에게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스승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스승님과 나는 어둑해진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서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
집은 폐쇄되었다. 대문의 양쪽에는 신전에서 보낸 병사 두 명이 지켜서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델파이오네스는 신전보수에 관련된 중요한 설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보안상 스승님의 집에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한다고 공표했지만 외부인의 출입뿐 아니라 나와 스승님 역시 집밖을 나갈 때는 몸수색을 받고 나가야만 했다. ‘델파이오네스’는 계산과 측량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남김없이 싣고 신전으로 가면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신전에 와서 신관들의 앞에서 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병사들은 수시로 집안에 들어와 나와 스승님이 무엇을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스승님이 바닥에 빗금 하나만 손가락으로 그려도 그 일을 신전에 보고 할 태세였다.
한참을 말없이 노을만 바라보던 스승님의 입에서 겨우 말이 떨어졌다.
“헤르메티카에 따르면 헬리오스 여신께서 우주를 잉태 하실 때 하늘의 해와 달도 모두 둥글게 만드셨다. 그런데 왜 그녀의 적자들이 사는 이 세상만 평평하게 만든 걸까? 그게 늘 궁금했다.”
나는 스승님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야 할 시점이 언제일까를 고민하며 마당 앞에 서있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둘은 다음 달에 있을 쥬네아 여신의 축제에 관한 이야기로 들떠 있었다.

세상이 둥글다는 스승님의 믿음은 이 년 전 이타카에서의 공사 때부터 시작되었다. 헬리오스와 동맹시인 이타카는 동맹의 표징을 굳건히 하자며 광장에 헬리오스 신상을 세우기로 했고, 스승님과 나는 그 공사를 위해 이타카에 갔었다. 이타카의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는 광장의 우물가에서 스승님은 신상을 보며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승님은 헬리오스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타카로 떠나기 며칠 전 스승님은 마당에서 부지깽이로 기다란 직선을 그렸다.
“봐라, 카무르. 이것을 땅이라고 하자.”
“하지만 이미 땅인데요, 스승님?”
스승님이 부지깽이로 나를 두들겨 패기 전에 나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은 한쪽에 수직선을 긋고는 멀리 떨어진 곳에 다른 수직선 하나를 더 그었다.
“이쪽을 헬리오스라고 하고 이쪽을 이타카라고 하자. 전에 이타카에서 신상을 세운 날, 내가 우물을 들여다보던 것을 기억하느냐? 그때가 정오였지.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으니까. 그러고 나서 신상을 보니 이상하더구나. 신상은 헬리오스의 것과 같은 크기로 만들어졌던 거 기억하느냐? 같은 크기의 신상인데도 그림자의 길이가 내가 기억하던 것과 달랐다. 헬리오스에서는 정오에 신상의 그림자가 아주 짧지. 거기에서 의문이 시작된 거란다.”
스승님은 조심스레 바닥에 그려놓은 선을 넘어 갔다. 부지깽이를 휘저으며 설명하는 스승님의 말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의 태양은 이 땅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헬리오스 여신께서 쥬메놈을 영원히 타는 불에 가두고 그 자식인 인간들에게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태양을 만드셨다고 하니 아마도 아주 먼 거리겠지. 그 웃음은 뭐냐. 바보 같은 소리란 건 나도 안다. 이놈아. 하여튼 먼 거리라면 햇빛은 거의 수직으로 이 땅에 내려 올 거다. 정오가 되었을 때 신상에 그림자가 가장 짧은 것도 그 이유겠지.”
“하지만 이타카에서는 그림자가 더 길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분명 이타카에서도 그림자는 마찬가지여야 한다. 하지만 같은 시각에 이타카의 신상에는 분명 그림자가 더 길었어. 그런 일이 생기려면…….”
스승님은 말을 멈추고 부지깽이로 바닥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세상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원안에 서있는 스승님은 흡족하다는 듯 이 양 팔을 벌리며 설명했다.
“우리의 눈에는 이 넓은 세상이 그저 평평하게 보일 뿐이지만 더 멀리서 본다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바닥에 수직으로 세워진 헬리오스와 이타카의 신상에서 그림자의 길이 차이가 나는 것은 무얼 의미하겠느냐?”
“둘 중 하나는 부실공사다?”
스승님은 이번에는 정말로 나를 때렸다.
“이 미련한 놈! 십수 년을 내 밑에 있었으면서도 그런 문제 하나 풀지 못하냐? 애초에 두 곳의 바닥이 태양을 바라볼 때 서로 다른 기울기를 가졌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스승님은 한참 동안 하나의 거대한 평야가 서로 다른 기울기를 갖는 모습이 되려면 왜 원형이 아니면 안 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결국 나는 열 몇 대를 맞아가며 세상이 둥글다는 스승님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스승님은 나에게 막대기를 하나 주시며 그걸 이타카에 가서 꽂아 본 뒤 정오에 그림자의 길이를 재어 오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리고 이타카로 가는 길이나 돌아오는 길에 이타카와 헬리오스 사이의 발걸음을 세어 보라는 명령도 함께 내리셨다. 이타카까지의 직선거리를 발걸음으로 세라니!
“발걸음을 세라고요? 이타카는 걸어서 한 달입니다. 마차나 노새도 없이 이타카까지 가는 것도 힘든 판에 발걸음을 세라니요? 그것도 길이 직선이 아니면 대로를 벗어나 들판이든 냇가든 그냥 건너라고요?”
스승님은 다시 역정을 내셨다.
“이 멍청한 쓸모없는 놈아! 직선으로 걷지 않고서 정확한 거리가 나오겠느냐?!”
스승님은 자신의 계획을 마치 시장에 가서 고기 두어 근을 사오는 심부름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지만, 막상 그 심부름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상황이 달랐다. 한 달을 꼬박 걸어야 하는 길을 발걸음을 세어가며 걸어야 하고 그렇게 간 이타카에서 나무막대기를 꽂고 그림자의 길이를 재어 노끈에 매듭을 지어 갖고 와야 했다. 그림자의 길이를 재는 것은 별 일도 아니지만 문제는 그림자의 길이를 재는 날이 스승님이 측정 하는 날과 같은 날 같은 시각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스승님은 이타카에서 정오에 그림자의 길이를 재는 날을 한 달하고 열흘 뒤로 결정했다. 내가 발걸음에 신경을 쓰며 걷다보면 그 기간은 무리라며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다만 돌아오는 기간은 넉넉히 와도 된다. 발걸음은 가는 길에 세어도 되고 오는 길에 세어도 되니까. 무조건 정해진 날짜에 이타카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였다. 쥬네아 축제 때까지는 아직 기일이 많이 남은 터라 두 도시를 오가는 상단商團도 뜸하여 가는 길에 마차를 얻어 타고 가는 것은 애초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 밖을 나갈 때는 때때로 짐과 몸을 수색받기도 한다. 측량사들의 물품은 신전의 공무라는 증명이 없는 한 석필 하나도 가져갈 수 없다. 더욱이 측량사의 노예이자 조수인 나는 언제나 성 밖을 나갈 때 몸수색의 대상이었다. 스승님은 내 짐을 직접 챙기며 그런 점을 유독 불안하게 여겼다.

해가 저물 무렵에 아큘레아스와 그의 딸 페리아가 집에 왔다. 아큘레아스는 신전 일을 할 때 늘 스승님과 짝을 이루는 석공이었다. 스승님과 같은 헤르티오무 출신인 그는 스승님의 술친구이자 말썽도 함께 저지르고 다니는 사이였다. 성 안의 사람들은 ‘낮에는 이타카이오스가 욕지랄, 밤에는 아큘레아스가 술지랄 한다.’라고 할 정도였다. 나는 아큘레아스를 잠시 노려보았다. 페리아에게 술동이를 지고 여기까지 따라오게 만든 게 괘씸해서였다. 하지만 곧 해질 무렵이라 어차피 여자 혼자 성안을 걸어 다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어야 하는 것은 내 일이 될 터. 이런 행운이면 저 술고래 영감도 쓸모가 있군.
병사들과 아큘레아스 사이에서 잠시 실랑이가 있었다. 육포를 말아온 천과 노끈이 말썽의 원인이었다. 무언가를 쓸 수 있거나 잴 수 있는 모든 물건의 반입이 허락되지 않은 집에 들고 들어올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아큘레아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페리아가 나를 곤란하다는 눈빛으로 쳐다 볼 때쯤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육포는 포장을 벗겨 그냥 손으로 들고 들어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식당에 술자리를 차려놓고 나서 내 눈치를 보던 페리아는 어머니의 일을 도와야 한다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아큘레아스에게 말했다. 육포를 뜯으며 신전에 대한 악담을 퍼부어낼 준비를 하던 아큘레아스는 예상대로 나에게 페리아를 집까지 바래다주라고 했다.

“피곤하지 않아? 이타카에서 막 돌아온 참 일 텐데.”
병사들의 몸수색을 마치고 큰길로 나설 때 쯤 페리아가 물었다.
“이타카로 가는 길은 지루했는데, 돌아오는 길은 괜찮았어요.”
“돌아오는 길이라고 다른 길로 온 것도 아닐 텐데 뭐가?”
“헬리오스로 돌아오는 길이니까요.”
앞에 ‘아가씨가 있는’이라는 말을 붙이려다 말았다.
“선물은? 출발할 때 이야기 했던......”
아악! 델파이오네스, 이 개자식!! 네놈이 자연사하는지 내가 두고 보겠다!
나는 더듬거리며 페리아에게 줄 목걸이를 빼앗긴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페리아는 흥미진진한 옛 모험담을 듣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더니 한숨을 쉬었다.
“카무르가 출발하고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에 신전이 발칵 뒤집혔었어. 모든 신관들이 소집되고 아버지도 대신관 앞에 나갔었지. 사정은 자세히 못 들었지만 이타카이오스 선생님이 헤르메티카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고만 들었어. 그러다 카무르를 찾겠다며 델파이오네스 신관까지 나서자 뭔가 큰일이 난게 아닐까 걱정했어. 신관들 사이에서는 이타카이오스 선생님을 이교도로서 처벌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나봐. 하지만 델파이오네스 신관이 나서서 자신이 해결 할 테니 일단 기다려 달라고 했어. 그 결과 선생님의 집이 난장판이 된 거지만. 카무르는 이타카에 왜 갔다 온 거야?”
달리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헤르메티카를 어기는 일이라면 그 일을 저지르기 전에 스승님이 먼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을 것이다. 델파이오네스는 나를 만났을 때 '그림자 매듭‘을 정확하게 지칭했다. 이타카에서 그림자의 길이를 노끈 매듭으로  표시해서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이타카에 갔던 목적과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신전에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누가 이야기한 걸까?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보나마나 스승님 자신일 것이다. 그 자랑쟁이 영감은 뭔가 새로운 계산법을 찾아내거나 하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게 일이니까. 보나마나 신관들에게 세상이 둥글다고, 곧 세상의 둘레가 몇 스타디온인지를 알아 낼 수 있다고 떠들어 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헬리오스의 성스러운 경전 헤르메티카와 어긋나는 사실임을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헤르메티카에 반하는 소리를 늘어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카무르?”
페리아가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본다. 언젠가 한 여행자는 페리아의 눈을 보며 흑해의 바다와 같다고 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여행자는 술에 떡이 되어 페리아를 안으려다가 나와 아큘레아스에게 곤죽이 되도록 맞았지만, 그 말만큼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흑해의 바다는 대체 어떤 빛깔이기에 저 눈처럼 아름답다고 한 것이었을까? 바다를 본적도 없는 나로서는 짐작도 되지 않는다. 흑해는 더군다나 이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먼 곳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
“죄송합니다. 잠시 스승님 생각을 했습니다. 아가씨.”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붉은 입술이 삐죽거린다. 보기 싫지 않다.
“네, 페리아.”
그녀의 등 뒤로 아큘레스가家의 대문이 보인다. 대체 신들은 무슨 조화를 부려 그녀의 집과 스승님의 집을 이렇게 가깝게 붙인 것일까? 신들은 왜 그녀와 내가 함께 걸을 때면 시간이 더 빨리 가고 거리가 더 짧아지는 마법을 부려 행복한 순간을 빼앗아 가는 걸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페리아가 문으로 들어선다. 저 문으로 같이 들어가고 싶다. 저 뒷모습을 매일 보고 싶다는 생각에 스승님의 집과 내가 서 있는 곳과의 거리는 더욱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대문으로 들어서던 페리아가 갑자기 홱 돌아선다.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킨다.
“목걸이는 받은 것으로 할게. 카무르가 무사히 돌아와 준 게 더 큰 선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고개 숙여 인사 한 다음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지도 못하고 뒤돌아 집을 향해 달려간다. 마음이 급했다. 스승님이 하려는 일이 어떤 바보짓인지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투키네가 수레에 실려 마당에 들어 왔을 때를 기억하네. 몸에 찔리고 베인 상처가 모두 열일곱 군데였어. 열일곱 군데. 탈리아는 그대로 마당에 쓰러져 울었지. 난 이해할 수 없었네. 어째서 아직도 하늘에 태양이 저리 빛나고 있는 건지. 어째서 아직도 바람이 불고 있는 건지. 어째서 새들이 아직도 노래하는 지를. 나와 탈리아는 이제 암흑 속에 던져졌는데.   세상은 어떻게 아무 일없이 돌아가고 있느냐고. 다음날이 되어 다시 아침을 맞이하며 나는 계속 화가 나있었네. 내 아들이 세상에서 사라졌는데도, 어째서 해가 다시 뜨는가 하고 말이야. 헬리오스 여신께서 진정 그 자식들을 사랑한다면 어째서 나와 함께 슬퍼해주지 않느냐고. 그래, 그럼에도 해는 계속 뜨고 졌지. 겨울은 어김없이 오고, 봄이 오지.
여신께서는 나의 슬픔을 모르는 척 하시는 것일까? 정녕 내가 쏟아낸 슬픔과 비통은 한 마디도 못 들으신 것인가? 듣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일까? 탈리아는 매일 같이 여신께 울부짖었네. 이 고통을 보아달라고, 들어달라고. 하지만 탈리아마저 죽고 난 다음 나는...... 깨달았네. 아침이 오고 밤이 오는 것은 여신과 무관한 일임을. 세상은 여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밤하늘의 별과 한낮의 태양. 그림자와 흐르는 물, 들판의 풀줄기, 모든 것의 주인은 그가 아님을. 그것은 각자의 길로 움직이며 조화되고 있음을. 난 그렇게 생각 했네. 세상이 헤르메티카의 가르침대로 평평한 대지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나는 측량해보고 싶었네. 둥글다면 그 둘레를 재어 보자고. 그것이 몇만 스타디온이든 그 이상... 이교도들의 숫자로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거리이든 간에. 난 그 거리를 알고 싶었네. 그리고 헬리오스 여신이 산다는 태양과 이 땅의 거리도. 탈리아와 투키네가 있는 곳과 이곳의 거리도......”

식당에 들어섰을 때 스승님은 이미 잠들어 식탁에 머리를 처박고 곯아떨어진 아큘레아스는 상관 않고 혼잣말을 하고 계셨다. 나는 중간에 행여 문밖의 병사들이 안에 들어와 스승님의 말을 듣지 않았었기를 바라며 스승님에게 다가갔다.
“왔느냐. 카무르.”
“네, 밖에는 아직 병사들이 있습니다.”
“그림자의 길이를 기억하고 있느냐?”
나는 양손을 들어 올려 델파이오네스가 잊으라고 했던 간격만큼 벌렸다. 불안과 망설임이 내 양 손을 떨게 한다. 그것은 스승님과 나에게는 삶과 죽음의 간격이다. 그러나 세상의 둘레를 재기에는 부정확한 길이이다. 스승님도 알고 나도 안다. 스승님은 내 어깨를 두들겼다.
“고생이 많았다. 이제 너도 쉬거라.”
  
스승님은 남은 술로 손을 적신다. 그리고 식당의 회벽 한 쪽에 커다란 원을 그린다. 원의 중심, 즉 세상의 중심에서부터 두 개의 선을 뻗어 그려본다. 이타카와 헬리오스. 두 지점의 그림자의 기울기를 계산해 낼 그림자 매듭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모두 몇 걸음이었느냐?”
스승님은 미약한 희망을 담아 묻는다.
“구십팔만 오천백칠십팔 걸음이었습니다.”
나는 망설이다 답한다.
스승님은 내가 떠나기 전 바닥에 석회가루를 바른 신발을 신고 마당을 몇 바퀴 돌게 했다, 그리고는 평균 보폭을 계산해 두었다.
술로 그린 회벽 위의 도형은 점점 말라 사라져 간다. 스승님은 회벽의 도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한 계산을 위해서라면 그림자 매듭과 각도자가 필요하다. 원을 겨우 72라디안 정도로밖에 못 나누는 헬리오스의 각도자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압수당한 360라디안까지 가능한 이교도의 각도자와 이교도의 숫자가 필요하다. 헤르메티카의 숫자로는 큰 계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교도의 숫자와 각도자를 이용해 세상의 둘레를 재어 보겠다는 것은 이단처형을 통해 자살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의 둘레를 알아내면 우리의 무엇이 바뀝니까?”
나를 돌아보는 스승님의 눈가는 젖어 있다. 그의 등 뒤로 회벽에 그린 세상은 말라가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것. 카무르야. 너는 그림자의 길이를 알고 있지 않느냐? 비록 그것을 표시한 매듭을 빼앗겼다 해도 네가 그 본 길이까지 빼앗긴 것은 아니지.”
“하지만 델파이오네스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저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가 빼앗을 수 있는 것은 네 목숨뿐이다. 1크나리온짜리 목숨. 네가 알고 있는 세상은 둥글다는 진리는 어쩌지 못해.”
스승님이 대답한다. 그는 지친 걸음으로 아큘레아스의 맞은편 자리에 다시 앉는다. 아큘레아스는 코를 골며 엎어져 있다.
나는 왼팔을 주무르며 회벽을 바라본다. 상처가 가렵다.
“제가 노예라는 사실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너는 세상의 참모습을 아는 노예가 될 테지.”
스승님은 주머니에서 1크나리온 은화를 꺼내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탁자위의 은화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바깥의 병사들을 확인한 다음 집안의 문을 걸어 잠근다. 욕실로 가 우물에서 길러온 목욕물을 채우고 옷을 벗는다. 왼쪽팔의 팔꿈치 위와 어깨에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각각 하나씩 있다. 미리 약초를 발라두어 곪지는 않겠지만 흉터는 남을 것이다. 욕조에 들어가 몸을 누인다. 아직은 쌀쌀하다. 그러나 2개월간의 피로를 씻을 만은 하다.
욕조 안에서 나는 스승님이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세상의 둘레, 태양과 이 땅의 거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델파이오네스가 그림자 매듭을 빼앗는다 하더라도, 머릿속에 기억한 그 간격만큼은 빼앗을 수 없다. 간격을 잊는다 하여도 세상이 둥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쥬네아 축제가 다가오고 있다. 성안의 모든 처녀들이 꽃과 향유로 치장하고 거리를 행진 하는 축제. 축제가 시작되면 성안의 경비는 전쟁 때만큼이나 삼엄해진다. 병력이 모자라 시민들 중 차출되어 임시 경비가 되는 인원도 발생할 테니 늙다리 측량사의 집에 붙일 병사는  없을 것이다. 쥬네아 축제까지만 기다리면 된다.
구십팔만 오천백칠십팔 개의 발걸음. 이타카의 광장에 꽂았던 3규빗짜리 막대기, 그리고 내 왼쪽 팔에 새겨진 두 개의 상처 사이 간격, 그 속에는 세상의 둘레가 담겨져 있다. 그 둘레의 길이는 신전에서 그토록 혐오하는 이교도의 숫자를 이용해 표현해야만 할 정도로 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저 고집불통 노인네가 입단속 하는 요령을 배울 때까지는 흉터를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스승님이 이교도에게 치르는 거열형을 자살방법으로 택하도록 놔두지 않겠다. 헤르메티카에서 뭐라 나불댔건 간에 세상은 둥글다. 그리고 우리는 곧 그 둘레의 길이를 알아 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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