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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죽음의 무도

2009.07.31 22:5007.31

1.
태양이 황갈색 대지를 충동질하자 때 이른 시각이건만, 사위를 에워싸고 있던 안개가 허공 속으로 녹아들었다. 안개가 물러선 자리로 병사들이 유령처럼 미끄러져 들어왔다. 망루 안에서 선잠에 빠져 있던 보초병의 몸이 짧게 경련을 일으켰다. 멍하게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 희멀건 그의 눈동자 위로 일사불란하게 적군이 지나갔다. 그가 밤새 부여잡고 있던 피 묻은 밧줄을 흔들자, 밧줄은 파르르 떨며 종을 울렸다. 피처럼 자지러지는 종소리가 성안을 달음박질쳤다. 몸을 웅크린 채 서로의 체온을 이불 삼아 잠들어 있던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제각기 뛰었다. 보름 넘게 이어진 싸움에 지친 몸이 아우성쳤다. 치잉 거리는 쇳소리를 끌며 각자 위치에 선 병사들은 성곽 아래로 달려드는 적군을 매섭게 노려 보았다. 노려보는 눈은 성곽으로 달려드는 눈보다 그 수가 확연히 적었다. 듬성듬성 비어 있는 옆자리를 확인하며 병사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이야말로 마지막을 보게 될 것이라는 건 성 안도 성 밖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그 시기를 저울질할 틈도 없이 쇠를 부딪쳐야 했다.
성곽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던 고함이 시가까지 꿰차고 들어와 똬리를 틀었다. 소리가 공기를 먹어치우며 증식하고 성안 여기저기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성곽 너머에서 쏘아 올린 눈먼 화살들이 사방으로 날았다. 단말마 비명과 함께 병사들이 죽었다. 그 붉은 외침에 사흘을 굶은 몸이 떨렸다. 몸을 떨던 사람들은 도끼 눈으로 성곽 쪽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몸을 세우더니 낫을, 도리깨를, 도끼를 집어 들었다. 집어 들 연장마저 없는 사람들과 아이들은 자기 주먹보다 큰 돌멩이를 움켜쥐었다. 포위된 성곽 안, 이미 달아날 곳 없이 갇혀 있던 사람들은 이글거리는 죽음을 움켜쥔 채 성곽을 향해 걸어갔다. 죽이리라, 너희가 나를 죽이는 것처럼 나도 죽기 전에 단 한 명이라도 죽이리라 다짐한 그들의 뒷모습은 비루했지만 옹골찼다.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텅 빈 거리로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쓸린 흙먼지가 뿌옇게 휘몰아쳤다. 떨어져 나간 문짝 너머로 연은 흙먼지를 바라보았다. 흙먼지에 뿌리던 시선을 방안으로 거둔 연은 방 한가운데 곧게 누워있는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연은 다시 한 번 사내의 이름을 부르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밖으로 나섰다. 사내는 멀어지는 연의 등을 바라보지도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사내는 어젯밤 저승강을 건넜다. 하나뿐인 핏줄마저 저승으로 올려 보내던 밤, 연은 울지 않았다. 나흘 전에는 평생을 걸고 지켜주마 했던 님을 떠나 보냈다. 그는 시신으로도 돌아오지 못하고 성 밖 들판 위에서 홀로 풍장을 치렀다. 돌아오지 않는 님을 위해 울던 날, 이제 막 사내 티를 내던 남동생은 성곽을 올랐다. 성곽 위에 오른 남동생은 아스라이 누나의 이름을 부르며 떨어졌다. 이태 전엔 신모(神母)를 떠나 보냈고 다섯 살 되던 해에 한 살배기 남동생을 끌어안고 부모를 떠나 보냈다. 서럽게 울며 쇠에 쫓겨 소도를 나오던 밤, 신모는 연에게 춤을 부여잡고 살라 했다. 그리 살면 살아 지니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몸을 비척거리며 연은 목적 없이 거리를 걸었다.
'살아라, 살아 지니라 하셨지요. 이리 살아남았으니 업인 양 춤을 춰야겠지요.'
연은 비척거리는 몸을 곧추세우고 손에 든 흰 천을 꽉 움켜쥐었다. 추수 후 쌓아올린 볏단처럼 마른 몸은 쩍 갈라진 마음에 이끌려 성곽으로 곧장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하는 막사 천을 걷어 올리며 밖으로 나왔다. 거친 쇳소리와 병사들의 고함이 귓가에 진동했다. 성곽을 바라보고 있던 사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뒤따라 나와 옆에 선 교위(校尉)가 사하의 기색을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군사님? "
"언뜻 아이를 본 듯하였다."
알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사하는 교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황이 박하니 아이까지 동원한 듯합니다."
"동령(冬蛉)땅의 기질이 난잡하다더니 사람들의 성정이 낮 도깨비와 다를 바 없구나."
"동령의 씨를 모두 베라 하셨던 왕의 참뜻을 이제 알았습니다."
교위가 품고 있던 의구심을 들은 사하는 마치 농인 듯 말을 던졌다.        
"허면, 여태 마음에 독을 품고 있었더냐?"
순간 당황한 교위는 곧 평정을 되찾았으나 부끄러움을 감추지는 못했다.
"아이까지 베는 것은, 차마."
전장에서 뼈가 굵은 교위의 대답치고는 하릴없이 순박했다.
"그 마음은 어여쁘나 무인의 도는 아니다."
"송구합니다."
머리 숙여 사죄하는 교위를 두고 사하는 막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기서 내가 더 볼 것은 없느니, 그만 들어가자."
사하가 뚜벅뚜벅 걸어가고 교위가 그 뒤를 따랐다. 말이 없는 등, 변함없이 강건한 등. 교위는 언제나 속내를 알 수 없는 사하의 얼굴처럼 무표정한 등을 보며 그에게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등이 천막 안으로 사라졌다. 등을 따르던 교위의 마지막 발자국을 천막이 쓸어내렸다. 두 사람이 천막 그림자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전장의 울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쇠가 피를 잡아먹는 소리가 들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소리가 뒤를 따랐고 그 위를 덮으며 당차가 성문을 짓이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우성치던 소리가 점차 가라 앉았다. 마치 파문처럼 침묵이 퍼져나가는 형국이었다. 사방이 숨을 삼키자 정적이 찾아들었다. 때 이른 침묵에 사하는 막사 밖으로 달려나왔다. 뒤이어 쫓아 나온 교위가 망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것이 어찌 된 영문입니까?"
병사들의 시선이 홀린 듯, 한 곳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사하는 그들과 같은 곳으로 눈을 돌렸다. 상층 일부가 허물어진 성곽 위에서 한 여인이 몸을 놀리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사하가 그 여인의 몸놀림을 따라 읽었다.
"춤을 추고 있다."
교위는 사하가 농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춤, 이라 하셨습니까?"
사하는 손을 뻗어 여인을 가리키며 매섭게 되물었다.
"저것이 춤이 아니면 뭐란 말이더냐?"
사하의 손끝을 따라간 교위는 그곳에서 춤을 보았다.


연은 손에 잡힌 모든 것을 집어던지는 사람들 옆을 지나 무너진 성곽을 밟고 섰다. 성곽 위에 선 연은 눈에 새겨넣기라도 하듯 성 안과 밖을 찬찬히 보았다.
'님 죽은 자리가 저기쯤, 내 피붙이 떨어진 곳은 저기쯤, 내가 서 있는 곳은 여기로구나.'
천 길 낭떠러지 같은 성곽 위에선 발을 조금만 잘 못 놀려도 아래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이제 와 떨어짐을 걱정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연은 나흘 만에 웃었다. 마음을 다잡으며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며 연은 발을 내디뎠다. 손끝에 붙들린 흰 천이 바람에 나부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녀를 보지 않았다. 죽이리라 작정한 사람들과 죽이는 것만이 허용된 병사들은 서로 죽이는 거 외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변함없이 내어줄 여유가 없었으나 어느새 연의 춤에 시선이 끌려갔다. 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끌려간 눈은 그 자리에 못 박혔다. 시선은 이제 연의 몸이 움직이는 데로 춤을 췄다. 무기를 집어 든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미끄러진 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돌멩이가 굴렀다. 활은 더 날아오르지 못했고 투레질하며 말이 멈춰 섰다. 얼어붙은 듯 조용한 세상 속으로 낭창 한 목소리가 울렸다.

  동령 간데없는 시간
  백산성 끝자락서
  사고무친 연이 고합니다.
  흐드러진 부정(不淨)
  땅에 박고 하늘 덮어
  마디마디 얽힌 부정
  하얀 날개 위에 실어
  오제오령 부리시는
  삼신께 보내나니
  부정을 삼켜 정(淨)으로
  환하소서.

  연의 몸의 사라락 미끄러졌다. 왼발을 내디뎌 발꿈치를 땅에 대었다. 체중을 실어 발끝을 바닥에 붙이고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흰 천과 함께 휘리릭 몸을 돌렸다. 주저앉을 듯 내려가다가 위로 솟구치며 머리 뒤로 손을 꺾어 올렸다. 갈피를 못 잡은 흰 천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떨어졌다. 연의 몸이 빠르고 느리게 움직이며 춤을 추었다.
'마음을 다해 춤을 추어야 한다. 네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춤이 너를 추게 하여라. 그리하면 길 잃은 넋이 네가 열어 놓은 길을 따라 저승으로 오르니라.'
마음속에서 신모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목소리의 꾸짖음을 따라 연은 춤 속으로 깊이 침잠했다. 흰 천이 사방으로 길을 내듯 하늘거렸다. 연은 다시 몸을 돌리고 한 발 앞으로 내달았다.
'올라라. 갈 곳 몰라 헤매는 넋들아. 내 길을 따라 저승배에 올라라. 만선 되어 흔들리는 저승배를 내가 밀리라. 그리 밀다가 저승강 밑바닥에서 용솟음쳐 올라 저승배를 뒤집어엎으리라. 저승강 못 건너고 구천을 떠돌며 흐느끼는 원귀되어라. 내 너희 모두를 그렇게 죽일것이다.'
연의 마음이 한 치 앞을 헤매며 흐느꼈다. 다 잃었으니 더 잃을 것이 없는 여인의 춤은 서글펐다. 그 서글픔이 서슬 퍼런 입을 벌리고 사람들의 눈을 삼켰다.


사하의 목소리가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바람춤. 망자의 넋을 씻어 저승길로 올려 보내려는가."
그렇다면 이 위화감은 무엇인가? 사하는 분명히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저 망자를 위한 춤이라 하기엔 산 사람의 마음을 지나치게 붙잡는 춤이었다. 자꾸만 연에게 끌려가는 시선을 가까스로 돌린 사하의 눈에 순간 붉은 피가 솟구쳤다. 채 눈을 감기도 전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피가 솟아올랐다. 끌려가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자들이 스스로 목을 베는 광경에 사하는 숨을 삼켰다.
"군사님,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교위가 뒷걸음질쳤다. 보고도 믿기지 않은 듯 입을 벌린 교위의 목에서 쉰 소리가 올라왔다.
"화살이…."
교위가 몸을 던져 사하를 감싸 안은 채 땅바닥 위로 뒹굴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놀랄 새도 없이 사하는 목구멍을 넘어가는 먼지에 켁켁거렸다. 사하가 침으로 입을 적셔 먼지를 뱉어내는 동안 반쯤 몸을 일으켜 세운 교위가 멍하게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이게 무슨 짓인가, 교위?"
부릅뜬 눈으로 교위는 사하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힘겹게 몰아 쉬었다.
"어서, 어서 안으로 피하십…….화살이."
"화살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어디에도 화살은."
말을 멈추고 사하는 스스로 목을 베는 병사들과 허공을 부여잡은 채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교위를 번갈아 보았다. 교위는 목구멍으로 올라온 피를 뱉어내며 땅을 기었다. 사하는 거칠게 교위의 몸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꿈이다. 교울(蔚蔚)의 무인이 꿈에 잡혀먹힐 셈이더냐?"
하얗게 뒤집히는 교위의 눈을 보고 다급해진 사하는 힘껏 그의 뺨을 갈겼다. 교위가 헛바람을 삼켰다. 사하는 다시 한 번 교위의 뺨을 쳤다.
"정신차려라. 이건 꿈이다."
교위의 뒤집힌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교위는 불안한 듯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어디에도 상처는 없었고 화살 또한 없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사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뚝 선 사하는 연을 노려보았다.
'네가 산 자를 망령 취급하는 것이냐?'
'여기 산 사람이 있긴 하던가, 살아 있으니 곧 죽을 테지.'
'넋을 보듬어야 할 무녀가 생목숨을 틀어잡고 저승길을 열려 하는가?'
'길을 연것은 너요, 나는 길을 닦을 뿐이니.'
'내 손에 피가 닿지 않았음을 네 모른다 할 테냐?'
'내 손인들 피에 젖었을까.'
날이 선 사하의 기색에 질려 물러 서 있던 교위는 머뭇머뭇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사하가 몸을 돌리자 움찔하며 교위가 멈춰 섰다.
"군사님."
"대모달을 봬야겠다."
걸음을 떼려던 사하의 발이 묶인 듯 움직이질 않았다. 사방이 붉게 변하며 사하의 몸을 덮쳤다. 사하는 붉은 파도에 휩쓸려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붉은 것들이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숨마저 붉었고 허우적거릴수록 몸을 옭아매며 조여왔다. 사하의 몸이 꺾였다. 물러서 있던 교위가 달려와 사하의 몸을 붙잡았다. 교위가 사하를 부를수록 사하의 감각은 멀어졌다. 품 안에서 혼절한 사하를 안고 교위는 불안한 시선으로 춤추는 연 쪽을 바라보았다.  



성곽 위에서 춤추던 연은 매서운 시선을 밀어내며 몸을 돌렸다. 밀어내면서도 때늦은 시선에 허망하고 때 늦고서도 보지 못하는 시선이 야속했다. 상념이 피어나면 춤이 흔들린다. 연은 다시 춤을 품었다.

고개 떨어뜨린 꽃일랑 두고
새털 같은 나비되어
바람 곁에 몸을 실어라
눈을 감고 귀로 보고
귀를 닫고 입으로 들어라
저승배 뱃전에 오르면…

멀리서 갓난아기가 자지저리게 울었다. 아직 죽음을 모르는 아기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울었다. 아기를 품은 어미의 손이 빨라졌다. 토닥토닥. 눈앞에 덮친 것이 무서워 아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고 자지러지게 울다 아기가 죽었다. 넋을 놓은 어미는 제 아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채근하듯 아기의 좁은 어깨를 토닥였다. 토닥토닥. 더 먼 곳에서 한 사내는 실성한 듯 벌린 입 사이로 침을 흘렸다. 좋은 일도 없건만 실없이 킥킥거리며 사내는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좌로 우로 돌던 사내가 히죽거리며 주저앉았다. 주저앉아 침을 흘리며 사내는 죽었다. 불안하게 사내를 보고 있던 남자아이가 옆에서 우는 누이를 끌어안으며 울음을 삼켰다. 남자아이는 목까지 자란 풀숲을 헤매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누이를 안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절대 누이를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오라비의 손에 목 졸린 어린 누이는 숨이 막혀 바동거리다  죽었다. 누이가 죽은 뒤에도 남자아이는 한참 동안 누이의 목을 부여잡고 놓지 않았다.
죽어 또 하나의 넋이 저승길로 올라가는 사이 한 병사가 손에 든 창으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 기울어진 창대로 피가 흘렀다. 넉 달 전 계곡에서 벌어진 전투로 돌아간 한 병사는 적군을 피해 달아나다 이끼긴 돌을 밟고 미끄러져 죽었다. 달아날 기력도 꿈을 꿀 여력도 없는 한 병사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제 아무도 연의 춤을 보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자기 꿈에, 망령에 사로잡혔다. 문득 고개를 돌려 원망 어린 시선으로 연을 보던 한 병사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연을 본 순간 꿈이 더 커졌다. 커진 꿈을 주체하지 못한 병사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 목을 졸랐다.
성 밖에서 병사가 죽었다. 성 안에서 노인이 죽었다. 연은 춤을 추고 그들은 죽었다. 연의 춤이 이어지면 그들의 꿈도 이어졌다. 넋 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흰 천이 어지럽게 날았다. 연은 소리 없이 울었다.
'산천 흐드러지게 핀 꽃, 꽃길 따라오시던 내 님. 등에 매달려 까르르 웃던 고사리 손. 누가 너를 죽였을까? 누가 내 님을 꺾었을까?'
'살아라.'
'살아질 줄 알았으나 살아지지 않더이다.'
살라, 살라 그리 말해 주던 사람을 앞서 보내고 말라버린 눈물 흘리며 연은 쉼 없이 춤을 췄다. 바람이 눈물을 닦았다. 다시 눈물이 마르고 아득히 부서진 마음을 밟으며 연은 춤을 췄다. 모두 죽이리라.
'너희 피눈물을 볼 것이다. 네 업을 두고 누굴 탓할까? 내 업으로 네 업을 밀어올릴 것이다.'
태양이 중천을 향해 자리를 옮겼다. 파리한 사람들의 얼굴 위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쬈다. 일렁이는 대지와 함께 사람들이 타들어갔다. 사방이 넋을 놓아도 태양은 제 할 일을 했고 연은 목이 말랐다. 타들어가는 목을 침으로 축이며 연은 춤을 이어갔다.


2.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사하가 눈을 떴다. 걱정스레 지켜보던 교위는 넌지시 물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군사님?"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사하가 교위를 바라보았다.
"내가 정신을 잃었더냐?"
"제 방정에 잠시 어지러워지셨나 봅니다."
속 깊은 교위의 대답에 사하는 잠시 미소 지었다. 교위는 사하의 부끄러움을 덮으려 한발 물러섰다.
"그 여인은 어찌 되었느냐?
"아직 춤을 추고 있습니다."
"아직도?"
"대모달께서 친히 사람을 가려 뽑아 활을 겨누었으나 화살은 과녁을 멀리 빗나갔습니다."
"순리를 저버린 바람이 활을 밀어냈더냐?"
"궁사의 마음이 과녁을 겨누지 못한 듯합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사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가 좀 더 쉬기를 바랐으나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한 교위는 얌전히 사하의 뒤를 따랐다. 막사 밖으로 나온 사하는 전장을 둘러보았다. 지친 병사들의 마음이 여기까지 불어오는 것 같았다. 초기의 긴장이 많이 가라앉은 듯 자결하는 병사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발작도 오래가면 지치는 법이겠지."
"북을 쳤으나 진영으로 돌아온 자가 기백밖에 되지 않습니다. 병사의 오 할이 아침녘에 자결하였다 합니다."  
병사의 오 할을 잃을 동안 손 놓고 있었다는 사실에 사하는 가슴에 돌을 얹은 듯 무거워졌다. 무언가 수를 내야 했다. 자신의 자리는 그것을 위한 자리였다. 여기서 상황을 뚫지 못한다면 군사라는 이름을 더는 이고 살 수 없었다. 사하는 열다섯에 전장에 선 이래로 처음 초조함을 느꼈다. 두 배가 넘는 적 앞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건만 고작 한 여인의 춤에 발목을 잡히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교위는 사하의 초조함을 읽고는 아연했다. 그를 모신 오 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고 평생을 곁에 있어도 보는 일은 없다 여겼었다. 교위는 군사의 평정심을 흩어놓은 여인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차마 여인의 몸을 마주 볼 수 없었던 교위는 잠시 여인의 발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마주 볼 용기 조차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 하며 교위는 눈을 돌렸다.  
사하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여인을 노려보았다. 다시 붉은 파도가 몰아쳤으나 이번에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사하는 파도에 저항하듯 한 발 앞으로 걸어나갔다. 사하가 또 정신을 잃을까 걱정된 교위는 그를 말려야 하는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막사 안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교울의 대모달(大模達)은 불을 뿜듯 소리쳤다.
"말이 되는가? 사졸들 마냥 말객(末客)과 낭장(郞將)마저 저깟 계집의 춤에 휘둘리고 있으니, 이는 교울의 수치다."
차라리 다른 자처럼 전장에 남아 돌아오지 말 걸 싶어진 말객은 속으로 자신을 힐난하며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대모달. 청천벽력같은 일인지라."
사방으로 불을 뿜어내던 대모달은 의자 위로 엉덩이를 짓뭉갰다.
"군사는 아직도 깨지 않았는가?"
"좀 전에 깨어났다 합니다."
빠드득 이를 갈며 대모달은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객은 마음을 다잡았다.
"모셔 오라 할까요?"
"되었다. 방도가 있다면 제 발로 올 테지. 이 판국에 혼절이라니."
대모달은 코웃음 치며 혀를 찼다. 말객은 목석 같은 군사가 정신을 놓을 정도의 일을 맞아 대모달은 어떤 꿈을 꾸었는가 궁금했다. 자신 또한 지옥의 풍경을 보았다. 감정 기복이 심한 대모달이 꿈을 보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성정이 불 같으니 앞날이 걱정이다.'
말객의 불안을 아느지 모르는지 대모달은 꽉 쥔 주먹으로 연방 탁자를 내리치며 눈을 부라렸다. 꿈이 몰려오자 대모달은 다시 탁자를 내리쳤다.
'요망한 계집이다.'
피 칠을 한 병사가 코앞으로 달려들었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한 순간, 간신히 숨을 참으며 대모달은 멈칫했다. 앞날이 칠흑 같았다. 당장 눈앞에 다가올 듯싶었던 승리를 번번이 놓친 것이 벌써 보름이었다. 이젠 그 아른거리는 승리마저 장담할 수 없었다. 이 난국을 어찌 돌파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답이 없었다. 이대로는 왕을 뵐 낯이 없었다. 꿈이 마음을 헤집고 들어와 머리가 어지러웠다.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대모달의 안색을 살피다 마음이 번다해진 말객은 여인이 춤추는 성곽이 있다 여겨지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누런 막사 천이 녹아내려 금방이라도 여인의 모습을 비출 것 같았다. 말객은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어디를 보아도 마음이 편칠 않구나.'
순간 꿈이 찾아들었다. 말객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꿈인 것을 알면서도 꿈에 잠기는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너른 들판, 어디에도 길은 없고 그 들판을 끝없이 걷다가 갑자기 땅이 꺼졌다. 입을 벌린 땅에 삼켜진 말객은 어디로 이어진 길인지도 모를 외길을 따라 걸었다. 길 끝에 출렁이는 강이 보였다. 멀리서 배가 다가왔다. 표정 잃은 사람들이 뱃전에 앉아 있었다. 탈 것인가 말 것인가 정할 새도 없이 말객 앞에 배가 멈춰 섰다. 말객은 천천히 손을 뻗어 누군가의 손을 잡고 배에 올라서려 했다.
"쾅"
커다란 소리에 꿈이 뒤로 물러섰다. 정신을 차린 말객은 대모달이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객은 대모달의 팔 위로 불거진 핏줄의 떨림에 안도했다. 대모달은 자기 앞으로 달려드는 자를 베고 또 베었다. 그는 말객이 꿈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것을 모르고 자기 꿈과 힘을 겨뤘다. 달려드는 자를 다 베어 낸 대모달은 의자 위로 주저앉았다. 말객은 대모달이 자기 꿈과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 행여 있을 불상사를 막기 위해 말객은 언제든 대모달을 향해 달려들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도 꿈에 빠져 죽는 것과 대모달의 손에 죽는 것 중 어느 것이 먼저일까 가늠하며 난처해졌다.



태양이 자리를 옮기며 제 빛을 바꿨다. 자색이 감도는 주홍빛이 하늘 끝으로 퍼져 나갔다. 연은 이제 막 네거리를 끝낸 참이었다. 혼자서 망묵이 스물두 거리를 추는 것은 벅찼다. 아직 연이 소도에 있었을 때 네 댓 번 망묵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명을 받든 무녀 여섯이 신모와 함께 거리를 나눠 췄었다. 망자의 넋을 올려 보내는 매듭인 마지막 두 거리는 항상 신모의 몫이었다. 신모는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무녀들의 춤을 줄곧 지켜보았다. 망묵이가 끝나면 신모는 무녀들을 불러 바른 것은 칭찬하고 그른 것은 엄하게 일러주었다. 연은 칭찬만큼 꾸중도 많이 들었다.
'몸을 펴 올려라. 발끝에 더 힘을 주어야 한다. 춤이 바르지 않으면 망자가 길을 잃느니라.'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서 혼자 네 거리를 이어 추느라 몸이 자꾸만 흐트러졌다. 연은 마음을 가다듬고 신모의 말을 새기고 또 새겼다.
'연아, 네 춤이 아직 정갈하지는 않으나 망자의 마음을 만지는 신묘함이 있으니 장차 좋은 무녀가 될 것이다.'
목숨을 거둬 준 신모는 사사로이 춤추는 연을 보면 엄하게 꾸중할 것이 분명했으나 이제 와 춤을 멈출 수는 없었다. 도중에 그칠 거라면 시작하지도 않았다. 춤을 추리라. 온몸이 짓이겨진다 해도 스물두 거리를 추어 보이리라 다짐하며 연은 제게 몸을 놀렸다.
백 보쯤 떨어진 곳에서 연방 도낏자루를 만지작거리던 한 사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눈알을 사방으로 굴리면서 연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발은 더뎠고 축 늘어진 손에 들린 도끼날이 바닥을 끌며 소리를 냈다. 사내가 멈춰 섰다. 사방으로 구르던 눈알도 이제는 연을 응시했다. 불거진 눈에 핏발이 섰다. 사내가 도끼를 머리 위로 쳐들고 괴성을 지르며 연을 향해 내달렸다.
연이 몸을 돌린 순간 눈앞으로 도끼를 쳐든 사내가 툭 튀어나왔다. 연은 스치듯 사내에게 잠시 눈길을 던지고 마저 몸을 돌렸다. 이제 사내는 연의 등 뒤에 있었다. 사내는 힘껏 도끼를 내리쳤다. 도끼는 허공을 가르며 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연의 머리를 갈랐다 확신한 남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내의 웃음소리가 점차 바람 소리로 바뀌었다. 사내가 도낏자루에서 손을 떼자 도끼는 사내의 목 사이에 물려 매달렸다. 사내의 목에서 솟구친 피가 연의 흰 천 위로 올라 붉은 꽃을 피웠다. 사내의 몸이 허물어지며 성곽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연은 꽃 수 놓인 흰 천을 걷어 올려 얼굴로 쓸어올리듯 스치며 머리 뒤로 넘겼다.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어둠이 연의 몸을 삼켰으나 연은 춤을 멈추지 않았다.  



도끼로 제 목을 친 사내가 성곽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추락하는 사내의 궤적을 좇으며 교위가 신음을 흘렸다.
"궁사가 겨누지 못했다 했었지."
  사내가 그리될 줄 알았다는 듯이 사하는 덤덤했다.
'겨누었던 모든 것이 저리 비켜 난다면 아무리 군사라 해도 손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
  참담한 심경으로 교위는 사하의 옆모습을 보았다. 사하의 얼굴로 순간 옅은 미소가 흘렀다. 교위는 의아했다. 낙담한 얼굴은 아니더라도 낙담의 흔적, 무기력한 방관의 꼬리 쯤은 비추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사하는 분명 미소를 띠었다. 의아함은 곧 감탄으로 변했다. 사하의 미소는 분명히 자신감이었다. 사하가 상황을 돌파할 묘수를 찾았다 확신한 교위는 안도했다.
'역시 군사시다.'
연이 춤을 춘 이래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교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하는 말없이 서 있었다. 사하의 시선이 더는 여기 머물지 않음을 안 교위는 혹여나 잡소리를 내지 않도록 몸을 단속했다. 생각에 빠지면 사하는 가끔 만 하루를 말 없이 훌쩍 넘기는 때가 있었다. 사하에게 배속되어 얼마 동안 교위는 그런 습관을 파악하지 못해 몇 번인가 사하의 생각을 흩어 놓은 적이 있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나서 교위는 소리 없이 머무는 방법을 익혔다.  
서서히 하늘빛이 퇴색하고 사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교위는 사하의 생각을 따라잡아 보려 애썼으나 집히는 곳이 없었다. 사하의 머릿속을 짐작하는 것만으로 어지러움을 느낀 교위가 조심스레 시선을 옮겼다. 교위가 눈을 번쩍 떴다. 보름 동안 굳게 닫힌 채 열릴 줄 모르던 백산성의 성문이 움직였다. 헛것을 본다 여긴 교위가 눈을 비볐다. 몇 번을 고쳐 보아도 성문이 열린 걸로만 보였다. 초승달이라 밝지는 않았지만, 사물의 형태를 구분할 정도의 빛은 있었다. 아주 조금이었으나 분명히 문이 열렸다. 교위는 자신이 또 꿈에 빠진 것이 아닌가 여겼다. 그때였다. 열린 성문 틈으로 한 병사가 빠져나왔다. 성문 밖으로 나온 병사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한쪽으로 내달렸다. 병사가 멀리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을 때 성문 밖으로 이번에는 한 여인이 머리를 내밀었다. 주위를 살핀 여인이 슬금슬금 밖으로 나와 성벽을 따라 걸어갔다. 여인의 다리를 따라간 교위는 백산성 안뿐만 아니라 성 밖에 몸을 기댄 병사들도 간간히 어둠을 틈타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무단으로 전장을 이탈하는 병사들을 보며 교위는 혀를 찼다. 자신의 소리에 놀란 교위가 헛바람을 삼키며 서둘러 입을 막았다. 아차 싶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사하는 고개를 돌려 교위를 바라보았다. 입을 틀어막고 당황하는 교위의 모습을 보며 사하는 처음 그를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위의 수더분한 성격은 그대로였다. 십여 년 동안 쇠를 만지며 피를 보고도 그 성정을 유지하는 교위는 사람 냄새가 나서 좋았다.
"송구합니다."
교위가 몸 둘 바 모르며 고개를 숙였다.
"마음 둘 거 없다. 병사들이 싸우지는 않고 넋을 놓거나, 죽거나, 달아나기만 하니 대모달의 근심이 크겠다."  
"하오나 곧 군사께서."
입을 떼던 교위는 자신이 지레짐작으로 나설 일이 아니다 싶어 조용히 입을 닫았다.
"내가? 그 뒤에 올 말이 무엇이냐?"
자못 궁금하다는 듯한 사하의 추궁에 교위는 자신의 짐작을 비춰볼까 하다 사하가 언질을 줄 때까지 기다리자 마음먹고 말을 아꼈다.
"아닙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사하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돌려 연을 보았다. 뿌연 달빛 아래서 춤추는 연의 모습에 가슴이 껄끄러웠다. 뭔가가 뒷덜미를 움켜잡은 듯도 싶었다. 그 기묘한 기분에 사하는 진작부터 대모달을 찾아가고자 했으나 쉬 발을 옮기지 못했다.
'무녀야, 네 무엇이 나를 잡는 것이냐?'
사하의 상념은 날아오르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너울너울 춤추는 연의 흰 천이 뿌연 달빛 아래서 홀로 빛났다.
'어쭙잖은 적선이다. 너와 내 길이 다른데 마음은 둬 무엇할까."              
연을 외면하며 사하가 자기 마음을 재촉하듯 소리 내어 말했다.
"대모달을 뵈러 갈 것이다."

  

  바르르 떠는 촛불이 사람의 그림자를 일그러뜨렸다. 짙은 밤 막사는 홀로 불을 밝혔고, 얼어 붙은 정적을 깨며 홀로 소리냈다.
"쾅!"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대모달은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났다. 자기 꿈과 싸우면서 동시에 대모달을 지켜보느라 기진맥진한 말객은 눈을 찌푸렸다. 그 뒤로도 대모달은 연방 탁자를 내리치며 이를 갈았다.
"고약한 것."
빠드득 소리를 참다못한 말객은 애써 공손하게 말을 걸었다.
"예, 참으로 몹쓸 계집입니다."
대모달은 어이없다는 시선을 던지며 탁자를 내리쳤다.
"군사 말이다. 군사! 일이 이 지경이 됐으면 묘수가 있건 없건 나를 찾아와 의논해야 마땅하거늘 여태 제 막사에 눌러앉아 있다니, 아직 비릿한 것이 재주만 믿고는, 오만한 것."
"혼절했다 하더니 아직 몸이 좋지 않은가 봅니다."
혹여 자기에게 불똥이 튈까 싶어 말객은 자리를 피할 구실을 찾았다.
"제가 군사께 다녀오겠습니다."
"그리하라."
말객은 정중히 예를 갖추고 돌아서서 막사 입구로 걸어갔다.
"아니다. 얼마나 몸이 안 좋은가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대모달은 말객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막사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제 좀 숨이 트이나 싶었던 말객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온 말객은 갑자기 눈앞을 막아선 물체에 부딪쳤다. 몸의 균형을 잡으며 말객은 신경질적으로 앞을 살폈다. 그를 막아선 물체는 다름 아닌 대모달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나간 대모달이 장승처럼 서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대모달이 보는 풍경을 살핀 말객은 신음을 흘리는 대모달을 나무라는 대신 그에게 동조했다.
희뿌연 달빛에 비친 전장은 참담했다. 차라리 같은 숫자의 시체를 봤다며 이리 소름끼치지는 않았으리라. 이천여 명의 사람이 넋을 잃은 채 망령처럼 흐느적거리는 모습은 살풍경했다. 가끔 바람 소리에 섞여든 히죽거리는 것도 흐느끼는 것도 아닌 괴이한 목소리는 악귀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두꺼운 갑옷을 두른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대모달이 발을 내디뎠을 때 쇠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대모달과 말객은 동시에 소리 나는 방향을 보았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대모달은 묵직하게 침을 삼켰고 말객은 허리춤으로 손을 뻗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축 처진 손에 칼을 든 병사가 몸을 드러냈다. 좌우위에 소속된 별장(別將)이였다. 그를 알아본 말객이 안도하며 칼자루를 놓았다. 말객이 이름을 불렀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모달이 말객 쪽을 바라본 순간 별장이 대모달을 덮쳤다. 칼을 빼 든 말객이 대모달 앞으로 뛰어들어가 별장의 팔을 잘랐다. 잘린 팔과 함께 떨어져 나간 칼이 땅으로 떨어졌다. 별장은 허전해진 팔뚝에서 떨어지는 피를 멍하니 보았다.
"이 무슨 짓인가!"
별장은 말객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별장이 고개를 들어 말객 뒤로 물러선 대모달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희멀건 눈동자를 한 별장이 씩 웃었다. 별장은 괴이하게 뒤틀린 미소를 띤 채 대모달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말객이 별장을 베었다. 별장의 몸은 잘려나간 자신의 팔 옆으로 엎어졌다. 서너 번 꿈틀하던 별장의 몸짓이 완전히 잦아든 것을 확인하고 말객은 칼을 집어 넣었다.
"괜찮으십니까, 대모달?"
대모달은 죽은 별장을 노려보며 눈에서 불을 뿜었다. 칼자루를 움켜쥔 채 파르르 손을 떨던 대모달은 악귀를 쫓듯 손을 뿌리고 잰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교위는 온몸으로 한기를 느꼈다. 바람결에 들리는 사람 소리가 섬뜩했다. 마음이 흔들리자 옅은 꿈이 몰려왔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교위는 꿈을 떨쳐냈다. 교위는 사하의 발소리에 온 마음을 쏟으며 걸었다. 맞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교위가 재빨리 사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누구냐?"
교위의 목소리에 발소리가 멈췄다.
"네놈은 누구냐?"
날 선 목소리가 질문으로 응대했다. 다시 상대의 정체를 물으려던 교위는 목소리가 낯익다고 생각했다.
"대모달이십니까?"
"교위인가?."
목소리로 상대를 확인한 사람들이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사하와 교위는 곧 대모달과 말객의 얼굴을 마주했다.
"뵈러 가던 참이었습니다, 대모달."
말객의 예를 눈으로 받으며 사하는 대모달에게 공손히 몸을 조아렸다.
"그러한가? 내 좀 더 기다릴 걸 그랬군. 그래 날 보고자 한 연유가 무엇인가?"
사하는 가시 섞인 대모달의 말을 흘려보내며 가슴에 얹힌 말을 꺼냈다.    
"춤추는 여인에 관한 것입니다."
비뚜름한 시선으로 사하를 보던 대모달이 눈을 번쩍였다. 군사를 대하는 대모달의 어조에 마음이 쓰였던 말객과 궁금증을 억누르며 기다리던 교위도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좋은 수가 있는가?"
"저 여인을,"
사하가 갑자기 말을 멎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말할 기색이 보이지 않자 대모달은 진노했다.
"네놈이 정녕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냐?"
침묵이 흘렀다. 말객이 당장이라도 검을 빼들 태세인 대모달을 진정시키는 사이 교위가 나지막하게 사하를 불렀다.
"군사님. 군사님."
몇 번을 불러도 사하는 대답이 없었다. 교위는 다급하게 사하의 몸을 부여잡고 흔들었다. 사하의 몸은 교위를 따라 흔들릴 뿐 미동도 없었다. 교위는 멀어진 사하의 눈을 보며 그를 부르고 또 불렀다.



사하는 언덕에 서 있었다. 바람이 늘어진 긴 천처럼 몸에 감겨들었다 사라졌다. 바람이 사라지자 사방이 고요해 적막했다. 희미하게 사람 소리가 들려 사하는 소리 쪽으로 걸어갔다. 탁 트인 평원에 다다른 사하는 귀를 찢는 함성에 눈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난장으로 싸우는 병사들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사하는 전세를 읽기 시작했다.
'좌익을 버려야겠구나.'
"좌익을 버릴 것이다. 군사를 예정대로 협곡으로 보내 매복게 하라."
사하의 생각을 한 사내가 소리 내어 말했다. 사하는 고개 돌렸다. 군사(軍師)로 보이는 사내가 호위를 옆에 세운 채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군사는 전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뜩지 않느냐?"
"아닙니다. 다만,"
'좌익의 병사들이' 사하는 언젠가 교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제야 사하는 이곳이 만하평원이라는 것과 그날의 전투를 기억해냈다.
'저기 앉아 있는 것은 나다.'
바람이 불어 소리를 쓸고 갔다. 적막, 파리하게 마른 평원은 시체로 가득했다. 한 겹으로는 부족한 듯 두 겹 세 겹으로 켜켜이 쌓인 시체가 사하의 길을 막았다. 오도 가도 못한 채 볼 것이라고는 시체밖에 없어 사하는 시체를 내려다봤다.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 떼가 시체의 상처를 헤집고 살점을 뜯어 먹었다. 까마귀에게 제 살을 맡기던 시체들이 꿈틀대며 하나 둘 일어나 사하에게 다가왔다.
"네놈을 이제야 보는구나."
"저놈을 죽여. 죽이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사하는 말없이 눈을 감았고 되살아난 시체는 사하의 몸을 관통해 지나갔다. 밀물처럼 밀려와 썰물처럼 시체들이 지나가고 사하는 다시 눈을 떴다. 들판은 어느새 시간을 삼켰는지 시체들은 이제 해골이 되어 뒹굴었다. 먹을 것이 없어진 까마귀가 일제히 날아올라 하늘을 검게 덮었다. 사하는 바람 따라 흔들리는 해골을 가르며 앞으로 걸어갔다. 걷던 사하의 발에 뜨거운 액체가 닿았다. 고개 숙인 사하는 자신이 밟은 붉은 임리(淋漓)를 보았다. 땅을 거스른 피가 사하의 다리를 타고 올랐다. 옷이 피에 젖어들어 갔다. 임리를 다 빨아들여 붉게 변한 옷을 입고 사하는 다시 걸었다.
흰 천이 사하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천을 잡으려 손을 뻗은 사하는 애먼 허공만 움켜잡았다. 천잡기를 포기한 사하는 무녀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날 좌익을 버린 나는 적장을 베고 만하성을 얻었다. 교위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슬퍼 보였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사람 냄새가 났다. 검을 들고 수백의 목숨을 벤 그에게서 피가 아닌 사람 냄새가 나는 것이 나는 늘 신기하였다."
연은 사하가 거기 없다는 듯이 제 춤을 추었다.
"무녀야 내게서는 무슨 냄새가 나느냐?"
대답을 기다리진 않는 듯 사하는 허공을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나는 네게서 나는 냄새를 알고 있다. 내게서 나던 냄새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니."
연이 몸을 돌려 사하의 머리 위로 흰 천을 뿌렸다. 사하는 시야를 가리며 흔들리는 천을 손으로 더듬었다.
"무녀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무녀야 네 난 곳은 어디냐? 무녀야 네 떠나 보낸 이는 누구더냐? 무녀야 네."
사하는 어스름한 하늘 끝자락에 얼굴을 내민 태양빛에 취해 한동안 말이 없었다.        
"네 보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나는 보지 않을 것이다."
사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아련하게 자신을 부르는 교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 님. …사님, 군사님!"
떠오른 태양이 사방으로 빛을 뿜었다. 빛이 사하의 눈을 찔렀다. 부신 눈을 깜빡이며 사하는 신음처럼 교위를 불렀다.
"교… 위."
"군사님!"
교위는 돌처럼 굳었다 허물어지는 사하를 부축했다.
"정신이 드십니까?"
사하는 억센 교위의 팔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여태 꿈을 꾸고도 잠이 쏟아졌다.
"꿈을 꾸었다. 그뿐이다."
밤새 불안한 마음으로 사하의 곁을 지키던 교위는 편히 잠든 사하의 몸을 안고 막사로 걸어갔다.

3.
잠에서 깬 교위가 몸을 일으켰다. 뻐근한 목을 돌리던 교위는 사하의 침상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막사 밖으로 뛰어나갔다. 주위를 빠르게 훑어 내리던 교위는 여섯 자쯤 앞에 자리 펴고 앉아 있는 사하를 보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 나와 계십니까?"
"나 또한 그것이 궁금하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이제 와 걱정한들 무엇할까?"
선문답이라도 하는 듯한 묘한 기분에 교위는 헛기침하며 사하의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하의 앞에는 백지 한 장이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로 먹을 간 벼루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붓을 들고 있던 사하는 돌연 붓을 벼루 위에 얹고 교위를 올려다보았다. 사하의 눈은 처연했다. 맑고 당찬 기백으로 가득하던 사하의 눈만을 기억하는 교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처연함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으나 사하에게 어울리는 눈이 아니었다. 교위는 가슴 속에 싸한 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다.
'어찌하여 그런 참담한 눈을 하고 계십니까?'
묻고 싶은 것이 한가득 이었으나 교위는 차마 묻지 못했다. 교위의 마음을 읽었는지 사하는 쓰게 웃었다.
"늦어도 내일 해 질 녘에는 춤이 끝날 것이다."
사하의 그 미소에 시름이 깊어진 교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춤이 끝나면… … 모두가 죽을 것이다."
경악한 교위의 얼굴을 두고 사하는 연을 보았다. 사하의 말이 믿기지 않은 듯 교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간신히 끌어올린 말이건만 사하는 대답이 없었다. 움켜쥔 교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군사님!"
연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붓을 잡으려던 사하는 손을 내려놓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하는 교위의 분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할 말을 골랐다. 응대할 적당한 말을 찾던 사하는 끝내 말을 낚아 올리지 못하고 붓을 잡았다. 교위는 대답없는 사하의 등을 뚫어질 듯 보았다. 사하의 등이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그 등을 보며 교위는 결코 사하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붓을 잡은 사하는 미동도 없이 멈춰 있었다. 무언가 적고자 하는 마음과 그를 거부하는 마음이 서로 치고받았다.
'무엇이 무서워 글 한 자 적지 못하는 걸까?'
교위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물음에도 사하는 할 말이 없었다. 언뜻 할 말이 없으니 적을 말도 없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적을 말이 없다면 왜 종이는 펼쳤는지 의아했다. 사하는 숱한 물음에 답을 낼 수 없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하는 이런 자신이 낯설었다. 그 낯섦에 사하는 분개하며 굳은 마음으로 붓을 다잡았다. 종이 가득 연의 욕이라도 적자 싶었다.
'그리하면 마음이 좀 풀릴 것 같으냐? 시정잡배 같은 짓은 해 무엇할까.'
자신의 졸렬함에 속으로 혀를 차던 사하는 문득 교울의 수도이자 고향인 형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서 자란 땅, 어린 시절 마음껏 누비고 다녔던 형성 사거리.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달밤에 울고 있던 자신을 달래주던 형의 손이 그리웠다.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그 큰손이 좋아 사하는 부러 더 서럽게 울곤 했었다. 이제 다시 못 볼 것을 떠올리며 사하는 천천히 붓을 놀려 글을 적었다.



연은 춤을 추지 말고 춤이 되라는 신모의 말을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몸은 지쳤으나 춤사위는 신명을 더했다. 춤이 절로 몸을 끌고 가니 기력이 부친 연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동틀 무렵부터 몸에 감각이 없으니 더 그리 느끼는 듯도 했다. 연은 연유를 떠나 춤을 계속 출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춤은 어느덧 열두 거리를 넘어섰다.
죽은 아기를 토닥이던 어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새벽녘이었다. 채근해도 아기가 울지 않자 어미가 눈물을 흘렸다. 숨을 삼키는 어미의 목구멍에서 기괴한 소리가 올라왔다. 소리도 눈물도 더 참지 못하고 여인은 자지러지게 울었다. 울던 여인의 눈이 살기로 빛났다. 죽은 아기를 품에 꼭 끌어안은 여인을 성곽을 향해 달렸다. 길 곳곳에 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었고 산 사람도 제정신이 붙어 있는 자가 없었다. 여인은 누이의 목을 부여잡고 죽은 사내아이를 지나쳐 연 앞에 다다랐다. 아기가 죽고 더는 무서울 것이 없다 여겼던 여인은 연을 보자 오금이 저려 털썩 주저앉았다. 연을 코앞에 두고도 다가서지 못하자 여인은 악다구니하며 울었다.
"살려 내. 내 아길 살려내. 찢어 죽일 년."
죽음은 어리다 해서 비켜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나 그것을 체감한 현실은 서러웠다. 연은 마음이 착잡했다. 갓난아기가 자기 탓에 죽었다는 사실보다 아기가 먼저 죽고 어미가 뒤를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순서가 바뀌었다면 좋았을 것을.'
형체 없는 여인의 울음이 연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연의 손에서 흰 천이 떨어졌다. 연은 몸을 깊이 숙여 크게 회전하여 천을 집어올렸다. 흰 천은 다시 허공에서 춤을 췄다.
"살려 내에에-."
여인의 악다구니, 죽은 아기, 감각 없는 발, 갈증, 죽은 동생, 죽은 님, 갈증, 갈증, 아기, 여자, 갈증, 악다구니, 죽은, 죽은, 갈증. 연은 머리가 빙빙 돌았다. 억눌렀던 눈물이 흘러나오자 연은 주저앉은 여인을 후려치고 싶어졌다.
'어차피 죽을 거였으면서. 내 덕에 하루를 더 산 주제에. 제 것 제가 지키지도 못해놓고 왜 날 탓해.'
"살려 내에에-."
'거기 널브러져 있지 말고 그럼 날 죽여! 차라리 날 죽여!'
"살려 내. 억- 억-."
'그럴 용기도 없으면 죽어. 네 아기 따라 죽어버려!'
여인은 목이 멘 듯 꺼억거렸다. 숨인 막힌 여인은 죽은 아기를 움켜쥔 채 말라비틀어진 가슴을 두드렸다. 여전히 숨이 트이지 않자 여인은 아기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가슴을 세게 쳤다. 여인은 끝내 숨을 쉬지 못하고 죽었다. 여인이 죽자 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
연의 웃음은 흐릿하게 흐느낌을 타고 넘겼다. 흐느껴도 멈추지 않는 춤은 열세 거리를 목전에 두고 신명을 더해갔다.


사하의 어깨너머로 교위는 종이 위에 쓰인 글을 읽었다. 고향에 대한 향수가 묻어나는 글이었다. 글을 읽는 동안 교위는 가슴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군사답지 않으시다.'
교위는 군사를 일그러뜨린 여인에게 분노했다. 더는 여인이 군사를 망가뜨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제가 저 여인을 베겠습니다."
노기로 가득한 교위의 목소리에 사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무슨 수로 벨 것이냐?"
"어젯밤 성문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여인을 죽이러 간 자는 모두 여인이 아닌 자신을 죽였다. 너 또한 그러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느냐?"
교위는 비켜나간 활과 제 목을 찍고 떨어진 사내를 떠올렸다. 그와 함께 교위는 자신이 실패하리라 확신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교위는 여인을 죽이지 못한다면 자신을 죽어 변해버린 사하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었다. 가고자 하는 이유는 명확했고 실패한다 해도 상관은 없었다.
"시도라도 해보고 싶습니다."
사하는 교위가 가고자 하는 연유가 여인을 베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자신이 쓴 글을 읽고 또 읽은 사하는 자조했다.
"요망한 짓을 하는 계집입니다. 제가 저 계집을"
"나는, 나는 내 세 치 혀로 길을 내고 저 여인은 자기 춤으로 길을 낸다. 두 길이 부딪혀 내가 밀린 것을 두고 무엇을 탓할까?"
"그것이 어찌 같다 하십니까?"
"내일 해가 지고 만약 내가 실성하여 바닥을 긴다면 그땐 네가 날 베어라."
"군사님!"
"나는 교울의 군사로서 흐트러짐 없이 죽고 싶다."
"정녕 다른 방법이 없습니까, 어제는 분명."
교위는 '여인에 관해 할 말이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 소리치고 싶었다. 사하는 교위를 올려다봤다. 교위는 전에 없이 매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사하는 자신을 뚫을 듯한 그 눈이 무서웠다.
"없다."
교위는 질끈 입술을 깨물고 몸을 떨었다. 지고 말 일이라도 발버둥치고 싶었다. 자신의 바람을 매몰차게 잘라내며 그저 없다 선언하고 마는 사하가 교위는 미웠다. 미우면서도 그를 저버릴 수 없는 자신이 더 미웠다.
"군사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실 겁니다."
"고맙다."
교위의 대답에 사하는 안도했지만 무엇을 안도하는지는 자신도 잘 몰랐다. 생각은 멀었고 마음은 뒤엉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가?"
대모달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사하는 글이 적힌 종이를 말아 들고 일어나 예를 갖췄다. 시큰둥하게 인사를 받은 대모달은 딱 잘라 물었다.
"어제 못다 한 말을 내어라."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대모달의 가슴이 세차게 오르내렸다. 말객은 긴장하며 대모달의 불호령을 기다렸다.
"네놈이 앉은 자리가 무엇을 위한 자리냐? 이럴 때 써먹지도 못할 재주를 가지고 군사자리를 꿰차고 있었더냐?"
말객과 교위의 초조함은 아랑곳없이 사하는 무서울 만큼 차분했다. 곧게 몸을 편 사하는 덤덤한 시선으로 터질듯한 대모달의 심기를 받았다. 그 눈빛에 대모달은 분개하여 소리쳤다.
"네가 날 기망하느냐?"
"곧 죽을 몸, 무엇을 얻고자 그리하겠습니까? 내어 드릴 말이 없으니 없다 아뢴 것 뿐입니다."
대모달은 죽일 듯이 눈을 흘겼다. 무표정하게 대모달을 마주하고 있던 사하가 한순간 미간을 꿈틀했다. 사하는 전과 달리 달뜬 공기의 무게를 느꼈다. 교위 또한 묘하게 어깨가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사하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잘못 느낀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사하는 불안을 감추고 무표정하게 돌아섰다.  
'저 여인의 목숨과 수천의 목숨 중 어느 것이 무거운지 나는 이제 알지 못한다.'
사하가 등을 보이자 대모달은 칼을 빼 들었다.
"네가 정녕 죽고 싶으냐?"
교위는 대모달과 사하 사이로 끼어들어 사하의 몸을 가렸다. 당황한 말객이 대모달을 말렸다.
"진정하십시오, 대모달."
대모달은 말객을 뿌리치고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놔라. 내 저놈을 죽일 것이다."
"군사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교위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비켜라."
"차라리 제 목을 베십시오."
교위는 비장하게 간청했다. 간악한 군사를 감싸고 도는 교위의 행동은 대모달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더는 할 말이 없다 했습니다."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한복판으로 사하는 자신의 말을 밀어 넣었다. 차가운 사하의 한 마디에 눈이 뒤집힌 대모달은 말객을 밀어내고 내달려 몸을 일으켜 막아서려던 교위를 넘어서 사하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 사하는 등지고 서서 칼을 기다렸다. 대모달의 칼이 사하를 내리치려는 순간 간발의 차이로 사하를 밀어내며 말객이 몸을 굴렸다. 쓰러지면서 사하는 들고 있던 종이를 놓쳤다. 종이가 바람에 날아갔다. 온몸의 체중을 칼에 실은 대모달은 목표를 베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바닥과 부딪치며 손목이 꺾여 칼은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았다. 대모달의 몸이 솟아오른 칼 위로 넘어졌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대모달이 피를 토했다. 교위가 달려가 옆으로 무너지는 대모달의 몸을 붙잡았다. 몸을 일으킨 사하와 말객이 뒤늦게 달려왔으나 손쓸 새도 없이 대모달은 숨이 끊어졌다. 교위는 떨리는 손을 들어 아직 사하를 노려보는 눈을 감겼다. 망연자실한 사하와 말객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넋 놓고 앉아 있던 병사들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끓어오르는 피의 온도를 느꼈다. 싸늘한 바람에 살이 식어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몰랐다. 북쪽 하늘에서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끈적이는 공기와 싸늘한 바람에 이어 모습을 드러낸 먹구름이 비를 뿌리면 병사들의 살은 더 차갑게 식을 것이다. 그들은 주린 배와 식어가는 몸보다 묘하게 달뜬 피에 마음이 쏠렸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천천히 세력을 넓혀가는 흥분에 귀를 기울인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짓누르는 형체 없는 그 무엇이 불쾌했다. 누르는 압력이 커질수록 그들은 몸을 움츠렸다. 이따금 쌓인 압력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자결을 통해 달아났다. 아직 제 몸을 뜻대로 가눌 수 있었던 자들은 어둠을 틈타 달아났고 여기 남은 자들은 춤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순간을 기다리며 바닥을 향해 몸을 웅크렸다.
병사는 되는대로 뻗은 자기 발끝을 보고 있었다. 흙먼지로 얼룩진 발끝에 흰 종이가 날아와 걸렸다. 발끝에서 펄럭이는 종이가 어찌 되든 상관없었지만,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병사는 한 손으로 목을 긁적이며 다른 손으로 종이를 집어들었다. 글귀를 두어 번 반복해서 읽은 병사는 별 뜻 없는 향수 어린 글이 마음에 들었다. 여자의 춤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고 몸을 죄고 들어오는 기묘한 기분을 벗어던질 겸 그는 글에 가락을 붙이기로 했다.
애당초 자신이 음률에 소질이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형편없는 줄은 몰랐던 병사는 점점 짜증이 났다. 목을 긁는 손이 바빠졌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것이 좋은 거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결국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자장가의 선율을 조금 변형시켜 노래를 완성했다. 머릿속으로 몇 번 불러본 그는 자신의 노래에 만족했다. 변함없이 할 일이 없었던 병사는 이제 소리내어 노래를 불렀다.      

형성 네거리 꿈처럼 아득해라.
서쪽 하늘 머얼리 해 보내고
하얀달 암산에 드리우면
능선을 따라 흐르는 하얀달빛
풍등에 고이 매 날려보내리.

병사가 노래를 완성해 부르는 사이 먹구름이 비를 뿌렸다. 비에 젖은 땅이 흙냄새를 피어 올렸다. 한 치 앞을 못 볼 정도로 쏟아지는 비에 병사들의 몸이 빠르게 식었다. 빠져나가는 온기에 몸을 부둥켜 앉은 병사들은 빗물을 받아 마시며 목을 축였다. 빗소리에 노랫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비를 맞으며 몇몇 병사들이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그러다 소리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입을 벌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따라나왔다. 흩어지는 입김처럼 노래도 흩어져 멀리까지 퍼졌다.  


  대모달이 앉아 있던 의자에 걸터앉은 말객은 이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대모달은 죽었고 다른 말객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넋이 나간 군대를 통솔할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에 말객은 가슴이 답답했다. 천막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마음이 한층 울적해졌다. 술이라도 한 잔 걸치고 싶었으나 언감생심이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에 말객은 말을 잃었다. 그는 빗소리에 섞인 웅얼거리는 듯한 사람 소리만이라도 듣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 소리는 지휘관으로서 책임져야 할 병사들이 여기 있다고 말하는 소리로 들렸다. 마음과 달리 말객은 점점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이 싫었다. 웅얼거리는 병사들이 싫었고 어처구니 없이 죽어버린 대모달과 나 몰라라 돌아서는 군사도 싫었다. 무엇보다 아직도 성곽 위에서 춤추는 여인이 싫었다. 싫어도 소리는 끝없이 이어졌고 소리에 익숙해지자 말객은 그것이 노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분명히 노래였다. 말객은 지겹게 반복되는 노래를 듣다가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익숙한 교위의 목소리에 말객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천막을 걷어 올리며 안으로 들어온 교위의 몸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말객은 여전히 노래를 흥얼거리며 교위를 맞았다.
"청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저를 백산성으로 보내주십시오. 제가 성곽 위의 여인을 베겠습니다."
"그러…. 뭐라 했는가 지금?"
노래를 흥얼거리던 말객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교위를 보았다. 교위는 진지한 표정이었고 말객은 자신의 귀가 아닌 머리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여인을 베겠다고?"
"그러합니다."
말객은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썼다. 비에 젖어 말없이 서 있는 교위는 밤 도깨비 같았다. 말객은 자기 앞에 의자를 가리키며 앉기를 권했다. 잠시 망설이던 교위가 다가와 앉았다.
"군사께서도 알고 계신가?"
교위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십니다."
말객은 고지식한 교위가 군사의 허락없이 여기까지 찾아온 마음은 이해했지만 선뜻 승낙할 수는 없었다.
"그간의 일을 알면서 굳이 가겠다는 것인가?"
"말객께서는 다른 방도가 있으십니까?"
말객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자신 또한 여태 여인을 베러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싶었지만 이렇게 찾아온 교위를 보니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몰려들었다.
"대모달의 죽음은 분명히 사고였으나 그저 사고라 하기는 얄궂지. 또한, 군사께서는 원래 곁을 잘 내주지 않는 분이시나 어제오늘은 분명 과한 데가 있었네. 나는 이 모든 게 저 여인과 관련이 없다 단정 지을 수가 없네."
"넋 놓고 앉아 죽을 때만 기다릴 수는 없질 않습니까? 군사께서는 내일 해 질 녘에 저희 모두가 죽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뜻밖의 말에 말객은 소름이 끼쳤다. 그는 정 방도가 없다면 춤추는 여인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버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정녕 내일이라 하셨는가? 죽을 때는 아시면서 막을 방도는 없다 하시다니."
"부디 저를 보내주십시오. 힘닿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습니다."
말객은 이미 교위가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알았다. 말릴 수 없는 일이었고 만약 그가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성공하면 자신이 살 수 있었다. 말객은 자신의 생각이 무서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기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단호하게 명령했다.
"허락할 수 없네."
"말객!"
"자네는 군사께 매인 몸임을 잊지 말게."
실망한 표정으로 일어선 교위가 막사 입구로 걸어가는 사이 말객은 흔들리는 교위의 등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춤이 모두를 이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말객은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처럼 그도 형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막사의 천을 걷어올리던 교위가 노래를 듣고 멈춰 섰다.
"아까부터 부르시는 그 노래는 무엇입니까?"
"아, 밖에서 병사들이 흥얼거리는 걸 듣고 배운걸세."
대답 끝에 말객은 교위가 잘 들을 수 있도록 조금 큰소리로 한 소절을 불렀다. 교위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 머쓱했던 말객은 머리를 긁적였다. 말객의 노래를 듣던 교위의 표정이 씁쓸했다.
"아까 군사께서 적으시던 글귀입니다."
"군사께서?"
말객은 의아했다. 군사가 향수 어린 글을 적었다는 것도 의아했지만 아까 놓쳐버린 글이 병사들 손에 흘러가 노래가 되었다는 것도 묘한 일이었다.
"여인이 춤을 춘 이래로 묘한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네."
"저 또한 그런 생각이 듭니다."
교위는 고개 숙여 말객에게 인사하고 막사 밖으로 걸어나갔다. 교위의 발소리가 비에 묻혀 희미해져 갔다. 말객은 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한참을 흥얼거리던 말객이 불현듯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아직 교위가 멀리 가지 않았기를 바라며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4.
비가 오는 산속은 한층 어두웠다. 후드득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나무들이 밀려왔다가 뒤로 멀어지며 사라졌다. 교위는 오로지 자신의 감각만을 의지하며 어두운 길을 달렸다. 말과 교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에서 하얀 김을 뿜었다. 촉박한 시간이 교위의 몸을 채찍질했다. 숲을 헤치며 쭉쭉 달려나가던 교위가 갑자기 고삐를 움켜쥐었다.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한 말이 앞발을 들고 몸을 뒤틀었다. 미처 균형을 잡지 못한 교위가 진창으로 떨어졌다. 교위는 얼굴을 뒤덮은 흙탕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일어섰다.
'만약 말객께서 실수하시는 거라면 어찌 되는가? 차라리 돌아가 군사를 모시고 나오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두 눈으로 도망가는 자들을 보았고 나 또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이대로 춤추는 여인에게서 떨어져 나오면 내일 해가 진 이후에도 살 수 있을지 누가 아는가?'
교위는 쉬이 말 등에 올라타지 못한 챈 안절부절못했다. 말객의 말을 듣고 생각할 겨를 없이 뛰쳐나왔지만 백산성에서 멀어질수록 의구심이 솟구쳤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이럴 때 군사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고 싶었다. 군사라면 금방 풀었을 고민을 붙들고 노심초사하는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할수만 있다면 달려가 군사에게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교위는 고심했다.  
'만약 그렇다면 군사께서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군사께서 혹 놓치신 거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어찌하면 좋은가.'
  망설이던 교위는 말에 올라타 달려왔던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교위는 이제 백산성을 향해 달렸다. 군사를 데려오고자 달리던 교위는 다시 말을 멈춰 세웠다.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말객의 판단이 맞으면 어찌할 것인가? 해 질 녘까지 대자면 일각의 여유도 없다. 말객의 수가 틀렸다면 더더욱 시간 안에 돌아와야 한다. 군사께 드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죽어서 어찌 군사의 얼굴을 뵐 것인가.'
교위는 결심을 굳히고 말머리를 돌려 형성을 향해 달려갔다. 어차피 걸어 볼 것이라고는 이것 말고 없었다. 형성에 가서 말객의 말을 반드시 전해야 했다. 쓸데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버린 교위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점점 굵어지는 빗소리를 뚫고 말발굽 소리가 숲을 가득 메웠다.



아침에 눈을 뜬 사하는 막사 밖으로 나와 한참 동안 교위를 찾아다녔다. 교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좀 더 찾아볼까 하던 사하는 마음을 접고 막사로 돌아왔다. 막사 근처에 대충 자리 잡고 앉은 사하는 차라리 교위가 이대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사하는 성곽 위를 보았다. 비 갠 하늘은 맑았고 시야가 깨끗해 여인의 모습이 잘 보였다. 여인은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사하는 교위가 옆에 없어서 허전했다. 동시에 그가 옆에 없어 안도했다.
'무녀의 춤이 천 리 밖까지 닿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말객을 불러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을 데리고 퇴각하라고 말하자는 생각이 든 사하는 곧 고개를 저었다. 달아난다고 해서 무녀의 춤이 끝나고 죽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설령 죽지 않는다고 해도 달아난 자들이 제정신을 유지하리라는 보장은 더더욱 없었다. 만약 달아난 자가 미치게 된다면 자신까지 거기 더해 미친 군대를 형성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 수를 사용한다면, 그러면.'
사하의 속에서 불꽃이 일어 타들어갔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노린내에 역겨워진 사하는 입을 틀어막았다. 사하에겐 확신이 없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항상 모든 것이 명확했던 그였기에 지금이 버거웠다. 불명확한 것 사이에서 갈피 잡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무녀는 확신으로 넘쳤다.
'달아날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해 본 적은 없더냐? 여기 있는 자들의 생사는 불명확한데 네 죽음 만은 명확하니 억울하지 않으냐?'
사하는 무녀에게 그리 물으면 무엇이라 답할지 궁금했다. 춤을 춘 사흘 동안 무녀는 빗물 말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전에 이미 사흘을 굶었으니 총 엿새 동안 끼니를 거른 무녀는 춤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 자명했다. 문득 사하는 제 죽음을 정해두고 추는 춤이 서럽게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춤을 추어야 살아지는 무녀의 삶이 어땠는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것을 치워두고 사하는 큰손을 가진 형님을 떠올렸다. 스무 살, 꽃같이 절명한 형님에 이어 자신까지 죽고 나면 자식을 모두 잃은 어머니는 서럽게 울다가 쓰러질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군대를 몰살시킨 자식 탓에 무인으로서의 자긍심에 상처 입고 평생을 살아갈 아버지를 생각하자 씁쓸했다. 사하는 이제 마음을 돌려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다. 실성한 모습으로 비루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깨끗하게 목을 베어 주겠다고 약속한 교위가 사라졌으니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사하는 칼을 들고 있지 않았고 설사 칼이 있다 해도 한 번에 끝낼 수는 없을 거 같았다. 사하는 목을 매는 것과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을 두고 고민했다. 어느 쪽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 사하는 형님께 무예를 배워 두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무녀야 해지면 너는 죽겠지. 그리고 나 또한 죽을 것이다.'


사흘 동안 춤을 추느라 연의 발은 엉망이었다. 발바닥 전체가 물집이 잡혔다 터진 상처로 뒤덮였다. 상처에서는 진물과 함께 흘러나온 피가 덕지덕지 엉켜 있었다. 연이 밟고 지나간 성곽 위는 여지 없이 피가 스며 붉었다. 타는 목은 어젯밤 내린 비로 축였지만, 끼니를 거른 몸은 한계를 훌쩍 넘어 시체나 다름없었다. 연은 새벽녘부터 거의 정신을 잃고 있었다. 눈동자는 빛을 잃었고 시선은 이미 저승강에 닿아 있었다. 혼미한 정신에 연은 자신이 제대로 춤을 추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바르게… 춰야….'
연은 자신이 아직 바르게 춤을 추고 있기를, 바르지 않다고 해도 한 번만 눈감아 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어제 낮부터 감각이 전혀 없던 몸이 다시 아우성쳤다. 온몸이 칼에 찔린다면 이리 아플까 싶었다. 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듯한 통증에 이제 한 걸음 내딛는 것도 힘겨웠다. 연은 신모를 불렀다. 신모는 대답이 없었고 연은 절박하게 신모를 불렀다.
'신모님, 저를 불쌍히 여기셔요.'
'네 사사로이 추는 춤을 내가 어찌 받을까?'
서슬퍼런 신모의 목소리가 연의 몸을 내리쳤다. 연은 이를 악물었다. 매몰차게 돌아서는 신모의 모습을 쫓아 달려간 연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연은 신모가 자신의 손을 움켜잡고 떨쳐내자 무릎 꿇고 애원했다.
'이제 두 거리만, 딱 두 거리만 더 추면 끝납니다.'
신모가 발을 옮기자 연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신모는 연을 떼어내고 걸어갔다. 이제 연은 사정도 애원도 하지 않았다. 연은 신모의 몸에 달려들었다. 신모가 발버둥쳤으나 연은 부여잡고 놓지 않았다. 허물어질 듯 내려앉던 몸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발끝에서부터 신명이 올라와 전신을 휘감았다. 연은 피 묻은 흰 천 끝을 양손에 잡아 펴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연을 괴롭히던 통증이 사라져갔다.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 몸은 자유로웠다. 날 듯이 가벼운 몸으로 춤을 추던 연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연은 전장 위에 널브러진 시체 사이에서 붉은 나비 한 마리가 너울너울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연은 그렇게 저승으로 오르는 님을 보았다. 연은 자신도 곧 검은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꿈을 꾸었다. 잠시 스치고 사라지는 꿈과 함께 연의 몸이 살아 춤추는 사이 연의 정신은 죽어 몸을 떠났다. 연은 정신을 잃은 채 또 한 거리를 끝냈다. 이제 하직천수를 끝으로 곧 춤은 끝날 것이고 춤이 끝나기 직전에 만선 된 저승배는 강의 한가운데에서 뒤집힐 것이다.  


해가 저물어갔다. 죽음을 기다리던 사하는 초라한 몰골로 달려오는 교위를 보고 아연했다. 사하는 반가움을 숨기며 소리쳤다.
"왜 돌아왔는가?"
숨을 헐떡이며 교위는 대꾸했다.
"군사께 드린 약속을 두고 제가 어딜 갈 수 있겠습니까?"
사하는 지긋이 교위의 지친 얼굴을 눈으로 쓰다듬었다. 삶의 마지막을 교위와 같이 맞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 사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연을 보았다. 그녀의 춤이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전장에서 다시 피가 솟구쳤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붉은 물결 속에서 사하는 문득 익숙한 뒤태를 보았다. 그건 결코 여기서 보면 안 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사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나운 눈으로 교위를 보았다.
"네 어딜 갔다 온 것이더냐?"
교위는 사하의 서슬에 가슴을 베인 듯 움찔했다.
"어딜 갔다 왔나 묻질 않느냐!"
"말, 말객의 명으로 형성에…."
교위는 사하의 눈을 피하며 간신히 대답했다. 사하는 교위를 밀쳐내고 내달렸다. 교위는 반사적으로 사하를 쫓아 달려갔다. 병영 안을 날듯이 달리던 사하는 자기 쪽으로 달려오는 말객을 보고 멈춰 섰다.
"네 어찌 소월(素月)을 이리로 불렀는가?"
말객은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사람이 자신이 알던 군사가 맡는지 의심스러웠다.
"군사께서 그리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그리 말 한 적 없다!"
뒤따라 달려온 교위가 어안이 벙벙한 말객을 대신했다.
"형성 서천로의 하얀 달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라는 글을 적어 일러 주지 않으셨습니까?"
"뭐라?"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은 사하가 휘청했다. 교위가 손을 뻗어 사하의 몸을 부축했다. 사하는 부축하는 교위의 손이 벌레라도 되는 양 밀어냈다.
'내가 기어이. 교울의 군사 사하는 죽지 않았다, 증명하고 싶었더냐 너는.'
사하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말객과 교위는 사하가 꿈에 미친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하를 보는 교위의 눈이 축축해졌다. 흉한 표정을 지우며 일어선 사하는 연을 똑바로 겨냥한 채 편전(片箭)을 쏘아 올릴 준비를 끝낸 소월을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사하의 외침이 무색하게 편전은 날아올랐다. 바람을 뚫고 뻗어나간 화살을 정확히 연의 가슴을 관통했다. 성곽 위에서 연의 몸이 떨어졌다. 죽음에 한껏 짓눌려 있던 병사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백산성을 향해 돌진했다. 성 안에서 억눌려 있던 병사들과 사람들도 쇠를 움켜쥔 채 달려나갔다. 사방에서 피가 튀었다. 숨이 끊어진 자의 목을 베고 또 베는 병사의 머리를 한 사내가 돌로 찍어 내렸다. 사내가 돌을 들어 다른 병사를 내리친 순간 뒤에서 활이 날아와 등을 뚫었다. 활을 쏜 병사에게로 한 소년이 달려들었다. 소년은 병사의 옆구리를 물어뜯었다. 살점이 뜯겨 나가자 병사는 활을 들어 소년의 목에 박아 넣었다. 목을 관통한 화살을 부여잡고 소년이 비틀거렸다. 죽은 자가 또 죽었고 산 자는 아직 살아있는 자의 손에 죽었다. 보름이 넘게 버티고 있던 성안의 모든 사람이 죽기까지 채 이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성을 넘은 자들이 피에 취해 환호성을 질렀다.
"멈춰라. 그만 멈춰. 멈추라 하지 않느냐."
사하의 목소리가 흐느꼈다. 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흐느끼던 사하는 일어나 병영을 향해 걸었다. 사하 옆에 서 있던 교위는 손을 뻗어 사하를 잡으려다 힘없이 손을 내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는 사하의 등을 볼 수도 너덜너덜한 시체가 뒹구는 전장을 볼 수도 없었던 교위는 고개를 숙였다. 걸어가는 사하의 눈앞에서 연이 춤을 췄다. 사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춤추는 연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눈꺼풀 안에 연의 형상이 새겨진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떴다. 연은 여전히 눈앞에서 춤을 췄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연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떨리는 발로 간신히 땅을 디디던 사하는 돌연 몸을 돌려 교위를 향해 달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교위는 사하가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눈을 들었을 땐 이미 사하가 자신의 옆구리에 맨 칼을 뽑아 든 후였다. 교위가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사하가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의 발에 쓸린 흙 먼지가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교위는 성대를 다 긁어내기라도 할 듯이 소리쳐 사하를 불렀다. 사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뽑아 든 칼로 자신의 두 눈을 베었다.
"군사님!"
  비명같은 교위의 외침에 소월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었다.
"교위, 무슨 일인가? 사하님께 무슨 일이 생긴건가?"
사하의 눈두덩이에서 눈물처럼 피가 흘러 내렸다. 달려온 교위는 사하의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땅에 던졌다. 온몸에 힘이 빠진 사하가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사하의 눈두덩에서 흐른 피가 무릎 위로 방울방울 떨어져 옷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교위는 신음조차 흘리지 못한 채 털썩 주저앉아 피 흘리는 눈두덩을 보았다. 소리를 따라 달려온 소월이 손을 뻗어 주위를 더듬었다. 소월의 손은 곧 사하의 머리 위에 닿았다.
"사하님."
"소월아."
소월은 몸을 숙이며 사하의 얼굴을 더듬었다. 손은 곧 피흘리는 눈두덩이를 만졌다. 처음에 눈물인 줄 알았던 소월은 그것이 곧 피라는 것을 느꼈다. 사하의 눈두덩에 닿은 소월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어찌하여 이런, 이런…."
사하는 흐느끼는 소월의 손을 잡았다.
"소월아 네 보는 세상은 언제나 어두워서 텅 비어 있다 했었지. 내가 보는 세상은 사방이 넘치게 붉구나."
소월의 손을 밀어내며 일어난 사하는 돌아서서 걸었다. 날이 깊어져 하늘은 더욱 붉게 타들어갔다. 저무는 빛에 싸인 사하의 몸은 피가 밴 옷 탓인지 유달리 붉었다. 붉게 물든 세상 속으로 소리없이 걸어가는 사하의 눈꺼풀 안에서 흰 천이 길을 내듯 날아올랐다. 뒤이어 몸을 내민 연이 끝없이 끝없이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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