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강원도 영월군 xx면의 한 야산에 한 무리의 외지인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떠들면서 땅에 몸을 숙이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카메라를 들고 제보자와 지역주민의 목격담을 취재하기도 했다.
"발견한 기는 여느 때처럼 등산을 하던 중이었어요. 아, 땅바닥에 이따마한 발자국이 눈에 떡 하니 띄잖아요. 보는 순간 아, 이기 호랭이 발자국이구나 싶어서 신고했지요."
"그래 보니 요 몇 년 전만 해도 산 속에서 피투성이로 물어 뜯겨 죽은 도야지가 자주 발견 됐지?"
"아, 내 젊었을 때도 호랭이 목격담이 제법 있었어."
"나도 전에 요 근처에서 커다란 놈을 봤었다니까. 줄무늬가 이래 나 있었으니까 호랭이가 틀림없어."
사람들이 어린 시절 목격담까지 자랑하는 데 반해, 그 중 손자로 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온 동네 할머니로 보이는 사람은 자꾸 반론을 재기했다.
"요즘 세상에 호랭이는 무슨! 호랭이 없어진지 얼마나 됐는데."
"아이고, 할머이, 그러면 이 발자국은 뭐래요?"
"뭐긴, 살쾡이나 표범 발자국이겠지. 아님 누가 장난 친 기나. 호랭이는 일제시대 때 일본 놈들이 다 잡아다가 죽였다니까."
"유명한 박사님 오셨다니까, 어디 한번 들어 보래요."
할머니가 사람들과 옥신각신 하는 모습을 할머니 손자로 보이는 어린 아이가 손을 꼭 잡은 채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떠드는 중에도 세 사람은 열심히 발자국을 관찰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인터뷰를 마친 기자가 그 중 가장 연륜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김 박사님, 어떻습니까?"
"이건 틀림없는 호랑이의 발자국입니다. 여길 보시면 매화무늬 발자국이 일직선으로 나 있지요? 보시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보행하는 것은 고양이 과 뿐입니다. 이 정도 크기의 고양이 과 동물은 호랑이 밖에 없어요." 김 박사가 발자국을 가리키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메라맨이 다가와 박사와 발자국을 화면에 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크기가 얼마나 되나요?"
"발자국이 대략 10 에서 12 cm 되고 보폭이 1 m 를 훌쩍 넘는 걸로 봐서, 꼬리를 제외하고도 1.5 m 가까이 될 것 같습니다. 현수야, 준비 다 됐어?"
"네." 김 박사와 함께 왔던 젊은이 중 한 사람이 대답하며 발자국이 있는 곳으로 왔다. 발자국 중 선명한 것에 두꺼운 종이 테두리를 두르더니 깡통에 담긴 하얀 액체를 부었다.
"석고본을 뜨는 건가요?" 기자가 묻자 김 박사가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약 30분 정도가 지나면 굳습니다."
그 때 저쪽에서 함께 온 다른 사람이 소리쳤다.
"박사님, 여기 호랑이 배설물로 보이는 것이 있어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박사와 기자들이 발자국을 피해 그쪽으로 갔다. 과연 똥 세 덩어리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었다.
"과연! 재원아, 채집해라."
"네." 처음 발견했던 재원이 주머니에서 꺼낸 비닐봉지에 똥을 담았다. 박사의 지시를 받으며 그 중 한 덩이를 가지고 온 비커에 미지근한 물을 넣어 풀자, 뼈 조각과 털이 흩어져 나왔다.
"과연, 이건 멧돼지 털이군요. 이건 새 뼈 같은데요." 박사가 비커를 들고 설명했다. 박사의 설명에 거 보래, 이기 호랭이 맞잖아, 하며 사람들이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오직 아이의 손을 꼭 잡은 할머니만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조용히 그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채집과 취재가 끝나자 그들은 부산스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할머니와 아이가 천천히 따라 갔다. 하지만 산을 다 내려왔을 때 그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둘은 산 속으로 도로 들어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아이에게 말했다.
"자, 잘 봤지? 답답하다고 함부로 돌아댕기다 저런 흔적을 남기면 절대 안 되는 기다."
"뭐, 별로 나쁜 사람들 같지 않든데?"
"증말로 잘 듣거라. 지들은 우릴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잡아다가 갑갑한 우리에 평생을 가둬 버리는 기라. 어떤 놈들은 몰래 총을 들고 와서 죽이려 들기도 하고. 어쨌든 사람들은 믿을 기 못 돼. 자유롭게 오래 살라믄 절대 모습을 보이거나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는 기라."
"네, 어머이."
깊은 산 속에 들어서자 허름한 옷을 입은 한 젊은이가 쭈그리고 앉아 그들을 맞았다.
"죄송해요, 부주의했었어요."
"똥도 니 꺼지?"
"네."
"그래, 니 냄새가 났었다. 앞으로 조심하거라. 이긴 니 목숨뿐만 아니라, 우리 전체의 운명이 달린 기라."
"네, 어머이." 젊은이가 죄송해 죽겠다는 동작을 보였다. 그는 아이의 이복형이었다.
"가 봐라." 할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뒤도 안돌아 보고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젊은이도 다른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좀 지나자 그들의 모습이 노란 바탕에 검은 줄무늬의 호랑이로 변했다.


호랑이 세 마리가 산 속을 조용히 걸어들어 간다.
한 마리는 저쪽으로, 다른 두 마리는 또 다른 쪽으로.


단군기(檀君記) 외전 - 어떤 호랑이 이야기
아주 먼 옛날, 환인의 아들 중 하나인 환웅은 하늘의 삶을 버리고 지상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를 설득하여 허락을 얻은 환웅은 그를 따르는 무리를 데리고 태백산으로 내려왔다. 처음 이들은 새와 인간의 모습을 섞은 듯하였으나, 지상으로 내려와 신성한 약초 일정량만을 빛이 들지 않는 굴속에서 100일 동안 먹으며 인내의 시간을 보낸 끝에 분명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하늘에서 보냈기에 그들의 움직임은 엉거주춤 불안정하였고 땅에서의 삶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그런 몸으로나마 오랜 세월 축적된 지식과 지혜가 있었기에 이전에는 없었던 찬란한 문명을 이루어 살 수 있었다. 산 속의 동물들은 그런 그들을 몰래 지켜보며 경계와 부러움의 눈빛을 보냈다.

어느 날, 비틀거리며 걷는 그들 앞으로 곰 몇 마리와 그 보다 적은 수의 호랑이 몇 마리가 다가와 그들처럼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은 다른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인간이 될 기회를 주자고 주장했다.
"어쩌면 원래부터 땅에 속한 동물로부터 화(化)한 인간과의 결합으로 우리도 땅에 좀 더 단단히 발을 디디고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다른 이들을 설득 시킨 환웅은 그들에게 인간이 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지금부터 내가 일러주는 약초 두 가지를 명심해서 찾아 일정한 양만을 뿌리째 뽑아 가지고 빛이 들지 않는 동굴로 들어가거라. 거기서 100일 동안 그것만을 먹으며 나오지 않으면 인간으로 화하리라."
곰 무리와 호랑이 무리는 각자 환웅이 일러 준 약초를 찾아 뽑아들고 어두운 동굴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호랑이들은 적은 양의 쓴 약초를 참아내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그에 반해 대부분의 곰은 잘 참아내어 인간으로 변할 수 있었다.

100일 째, 인간으로 변한 이들이 동굴로 나와 환웅의 마을로 찾아갔을 때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마리가 단 21일 만에 인간, 그것도 여자로 화하는 기적이 일어났었던 것이었다. 환웅은 이를 영험한 현상으로 여겨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환웅과 함께 온 이들은 둘 사이의 결합이 화를 부를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불길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환웅의 바람대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과연 땅 위에 단단히 발을 디디고 꼿꼿이 걸을 수 있었다. 이를 본 하늘에서 온 이들이 곰에서 화한 인간들과 기꺼이 결혼을 하였다. 그들은 땅에 완전히 속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곧 문제가 생겼다. 이를 본 여러 동물들이 환웅을 찾아가 저희들도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산 속의 균형이 깨질 것을 염려한 환웅은 이를 거절하며 그들을 산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이전에 인간이 되려다가 포기한 곰과 호랑이들을 찾아가 그 방법을 물었던 것이다. 그들 중 많은 수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고 곰에게 맞고 쫓겨났으나, 몇몇은 그 방법을 알아내 약초를 찾아다 동굴로 들어가 인간이 되어 나왔다. 그러자 인간이 되기를 포기했던 곰들도 그 참에 다시 시도하여 전부 인간이 되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환웅은 크게 노하여 호랑이들에게 인간이 되는 방법을 발설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더불어 신비한 약초를 모두 찾아 없애버렸다. 결국 사라진 그 약초는 형태가 비슷한 쑥과 마늘로 변형되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조금 전에, 다시 한 번 인간이 되리라 결심하고 홀로 약초를 가지고 굴속에 들어간 암컷 호랑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 호랑이는 큰 결심을 하고 들어간 만큼, 호랑이치고는 제법 잘 버텨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고통으로 비틀거리며 동굴에서 나온 때는 이미 약초가 모두 없어진 뒤였다. 다른 동물들로부터 환웅의 경고를 들은 호랑이는 몰래 자신이 머물렀던 굴로 들어가 남은 약초를 꺼냈다. 그는 다음을 기약하며 남은 약초를 몰래 비밀장소에다 잘 심고 입으로 물을 날라다가 뿌렸다. 약초는 시들하니 죽을 듯 했으나 곧 물을 먹고 햇빛을 받아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호랑이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그의 몸이 인간으로 변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중간에 긴 공백이 있었지만, 두 번의 도전 기간을 합치니 딱 100일이 되었다. 호랑이가 주로 밤과 새벽에 활동하는 야행성 동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적적인 일이다. 단, 하루 중 일부만 인간으로 지낼 수 있었고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호랑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 사실을 알아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호랑이는 이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인간의 모습으로 마을로 내려 온 호랑이는, 그러나 쉽게 의심을 샀다. 이미 마을 구성원들의 신원이 파악된 상태라 새로운 얼굴인 그를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마을에 오래 머물다간 정체가 탄로 나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조심스레 산 속으로 들어간 그는 다시 호랑이로 돌아가 그 속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의 새끼들도 그 영향력을 받아 인간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새끼들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킨 뒤, 언제 변해도 되는지 판단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절대 다른 동물이나 인간들에게 변하는 모습을 들키지 말 것. 특히 다른 호랑이와 인간들에게 들키지 말 것. 비록 인간으로 변할 수는 있지만 함부로 인간들 무리 속에 들어가지 말 것.
사실 이 능력은 특이한 능력일 뿐, 별 쓸모가 없었다. 심지어 다른 호랑이와 다르다는 사실이 불편하기까지 했다. 인간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아무 데도 속하지 못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의 새끼들은 그가 알려줘서 그 특이한 약초에 대한 지식도 익혔지만 무슨 쓸모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새끼들이 자라나 또 새끼를 낳았다. 역시 같은 증상을 보이는 새끼들에게 그들은 그가 가르쳐 준 것을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그러나 이들 중 수컷은 자기 새끼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줄 수가 없었다. 이 새끼들은 멋모르고 인간으로 변했다가 이를 본 어미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그것은 거의 불필요한 이상한 능력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총이 만들어지고 바다 건너 외지인들이 몰려들면서 인간들이 미친 듯이 호랑이를 잡아 기념사진을 찍어대는 때가 오고 말았다. 호랑이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어 점차 이 지역의 남쪽에는 호랑이가 사라졌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가 되었다. 이 속수무책의 밀렵 속에서도 살아남은 호랑이 대부분은 바로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호랑이의 자손들이었다. 그들은 그제야 이 능력의 소중함을 깨닫고 전해 내려온 전설을 따라 신비의 약초를 찾아내어 빛이 들지 않는 동굴 속에서 7일간 먹으며 그 능력을 보강하기 시작했다. 약초를 물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다른 동물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심하여 옮겨 심는 호랑이도 있었다.

외지인들이 물러났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고 땅 위에 선이 그어졌다. 그들은 옮겨 심어 놓은 약초를 비밀스레 지키며, 대대로 이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젖을 땐 새끼들은 보강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하루의 일부를 인간으로 지내면서 인간들의 문화를 익혀 의심받지 않으며 살 수 있도록 하였다. 간혹 호랑이의 발자국과 배설물,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제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생후 8주 남짓 지난 호랑이 새끼 이야기
"싫다!"
어머이는 우리 형제가 젖을 떼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 일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 일이란 우리를 햇볕이 들지 않는 동굴 구석에 하루 종일 두고서 적은 양의 쓰디 쓴 풀 두 종류만을 먹으며 7일간 버티게 하는 기를 말한다.
"싫다! 고기 먹을래!"
"나도! 이긴 아동 학대래!"
이제 막 고기 맛을 들인 우리는 그렇게 반항했다. 그러자 우리를 지켜보던 어머이가 엄하게 말했다.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우린 아직 어렸지만 본능적으로 이기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동굴 깊숙한 곳의 각자 마련된 자리로 조용히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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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색을 살린다고 사투리를 써 봤는데, 막상 찾아 쓰려니 어렵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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