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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Hotel California

2010.05.29 00:3605.29

Hotel California



사막은 넓고 더웠다. 남자는 눈앞에 안개처럼 뿌옇게 번진 모래바람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며 오른손으로 눈썹 위에 고인 땀방울을 훔쳐냈다. 오래도록 기어 스틱을 붙들고 있던 오른손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끈적한 느낌이 한결 가셔도 작은 먼지들이 두드러기처럼 들러붙은 얼굴이 화끈거려서, 지독한 열기는 쉽게 달래지지 않았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당신 말을 들을 걸 그랬어.
아내는 사막횡단 고속도로를 타기 전에는 반드시 자동차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괜한 노파심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총연장 만 오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사막횡단 고속도로에는 상, 하행선을 통틀어 휴게소가 네 개 뿐이고, 잠시 몸을 쉴 수 있는 곳이라고 해 봐야 세 시간에 한 번 꼴로 나타나는 무인 주유소가 고작이었으니까. 그나마도 낡은 냉커피 자판기와 파라솔 두세 개뿐인 휴게시설에 절망할 때쯤이면, 사막 먼 곳에서 발작처럼 모래폭풍이 일어나곤 한다. 허둥지둥 차 안으로 몸을 숨겨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쉰 목소리로 지껄이는 라디오를 들으며 한껏 시간낭비를 한 뒤에야 모래바람 때문에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사전점검을 아무리 충실히 한다 하더라도 이 고속도로를 타고 사막을 무사히 횡단하는 작업은 불가능하다. 자동차 상태를 점검하라는 조언은 사막여행자의 금과옥조로 삼기엔 지나치게 원론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가 굳이 아내의 충고를 떠올린 이유는, 그저 그것이 누군가의 유언으로 삼기엔 지나치게 건조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꼬박 팔 개월 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바람막이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거는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보며 짤막하게 물었다. 또 어디 가? 남자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양말을 벗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틀 후에. 사막을 건너야 될 것 같아. 출판기념회가 있어서. 아내는 오래도록 대답이 없었다. 속옷만 입은 남자가 수건을 들고 욕실로 향할 때, 들릴 듯 말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것이 마지막이었다. 차 끌고 갈 거면, 종합점검 받고 가. 남자는 샤워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을 때 까지도 아내가 단순히 잠들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팔 개월 만에 집을 찾은 남편을 고작 낮잠으로 반기는 아내의 태도에 적극적으로 분개하거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다만 냉장고에서 찾아낸 캔 맥주를 홀짝거리며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을 뿐이다.
해가 지자 남자는 잠들었고, 밤늦게 깨어난 후에야 아내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챘다. 눈을 부릅뜬 채 숨을 거둔 아내의 얼굴은 거의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질려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새벽이 깊어갔다. 형광등이 껌뻑이는 침실에서 남자는 덩그러니, 바싹 마른 아내의 입술을 매만졌다. 아직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남자가 울기 시작한 건 숨을 거둔 아내의 품에서 오래된 미라처럼 말라버린 갓난아기를 발견했을 때였다. 아내의 가슴팍에 필사적으로 달라붙은 아이는 꼭 아내와 한 몸 같아 보였다.
아이를 아내에게서 떼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갈퀴 모양으로 뻗은 채 말라버린 아이의 손을 꼭 말아주고, 껌뻑이는 불빛에 멍하니 고정된 아내의 눈을 감겨준 뒤, 남자는 침대 곁에 무릎 꿇은 채로 아내의 손을 꼭 쥐고 미친 사람처럼 오열했다. 이윽고 해가 다시 떠오르고 갈래진 햇살이 커튼 너머로 깊이 스며들 때 까지도 남자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장례는 하루 뒤에 치러졌다. 조문객은 한 사람이었다. 불이 꺼진 빈소로 찾아온 의사는 침대 아래에 쓰러져 기절한 듯 잠이 든 남자를 깨워 블랙커피와 아스피린을 건넸다. 의사는 두 달 전 미숙아를 출산한 뒤 기진한 아내를 틈이 날 때마다 살펴 왔다고 말했다. 의사는 아내를 외로운 죽음으로 내 몬 남자의 무책임함을 탓하지 않았고, 남자는 아내를 영양실조로 방치한 의사의 나태함을 추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내가 살아 있던 시절의 이야기만 힘없이 중얼거리며 거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말은 주로 의사가 먼저 꺼냈다. 바쁘셨나봐요. 예. 집필 중이라서. 혼자 있고 싶었어요. 그러셨군요. 아내 분께서 남편 얘기를 좀처럼 안 하셔서… 미혼모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았겠죠. 자기 얘기를 잘 안하는 사람이에요. 남부끄러운 얘기는 더더욱… 남자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커피를 홀짝이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의사의 얼굴, 혹은 허공이나 불길하게 껌뻑이는 침실의 형광등 같은 것을 바라보며, 말라버린 눈물 때문에 따끔거리는 볼을 긁적였다. 커피를 다 마시자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여기 일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의사는 황당하다는 듯 대답했다. 남편분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장례는 치러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자는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전…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몸을 일으킨 그는 의사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외투와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기까지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그대로 사막횡단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그 이후로, 남자는 밤을 새워 꼬박 8시간이 넘도록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이미 모래폭풍이 예보된 고속도로에는 아무런 인적이 없었다. 엔진이 비명을 지를 때까지 오른 발에 아무리 힘을 주어도, 하늘부터 땅 끝까지 같은 색으로 칠해진 뿌연 공간은 너그럽게 입을 벌려 남자의 자동차를 삼켜버리고, 그 끝이나 시작이 도대체 어디인지 보여줄 기색도 흘리지 않았다. 그동안 차 안의 공기는 그 아득한 공간 전부를 부지런히 집어삼키고는 폭발할 듯한 열기로 한껏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컨대, 사막은 넓고 더운 곳이었다.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만 오천 킬로미터를 완주해서 아주 먼 곳에 발을 디뎌야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척추를 타고 올라와 이마를 달구는 지독한 열기만은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에어컨을 고쳐줄 카센터나, 차가운 얼음물과 쾌적한 샤워시설을 제공할 호텔이 필요했다.
문득, 뿌연 먼지 속으로 붉은 색 입간판이 신기루처럼 스쳐 지나갔다.

- 호텔 캘리포니아, 4Km








모래바람은 호텔 정면의 주차장으로 들어설 때쯤 잠잠해졌다. 거짓말처럼 파랗게 갠 하늘을 등지고 서있는 5층짜리 갈색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물 외벽의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지고 빛이 바랜 것으로 봐서는 제법 오래된 건물인 것 같았다. 남자는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사막횡단 고속도로에 이렇게 그럴싸한 호텔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남자는 지도를 펼쳐 봤지만, 사막과 고속도로밖엔 없는 이 근방에는 이정표로 삼을만한 지형도, 건물도 없었다. 등고선이나 참조점 하나 찍혀 있지 않은 오만분지 일 지도는 그저 백지 위에 일직선 도로 하나만 그려 놓은 헝겊조각에 불과했다. 남자는 지도를 접어놓고 모래바람과 땀에 범벅이 되어 퍽퍽하게 헝클어진 머리칼을 벅벅 긁으며 호텔 현관으로 걸어갔다.
흙먼지가 곤충 떼처럼 들러붙은 호텔 현관문 앞에 나무 입간판이 서 있었다. '캘리포니아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1945' 남자는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고풍스러운 글씨체로 쓰여진 환영 문구를 한동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1945년이면 이 고속도로가 닦이기도 전인데.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입간판의 상태나 말라붙은 페인트칠이 뜯어지고 있는 글씨의 질감으로 보건데 정말 1945년에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 보였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밀었다. 문 틈새에 들러붙은 흙먼지들이 녹슨 경첩이 지르는 비명소리와 함께 눈앞에 쏟아졌다. 남자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법 넓은 호텔 로비에는 맑은 사막의 오후가 아늑한 태양빛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역시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제법 된 것처럼 보이는 호텔 내벽은 오래된 폐허와 조금 낡은 건물 사이에서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 건지 깊은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기분 나쁜 침묵이 제법 넓은 공간에 가득했다. 무엇보다,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남자는 현관에 우두커니 선 채로 자신이 혹시나 사막의 모래폭풍에 파묻힌 고대의 호텔 유적 같은 걸 발견한 건 아닐까 의심해 보았다. 그 경우에 가장 곤란해지는 건 역시 얼음물이나 샤워시설 같은 것은 기대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서려는 순간, 문득 기침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남자는 소리가 들려온 곳에서 고색창연한 목재 카운터를 발견했는데, 그 너머에는 사람의 것처럼 보이는 회색 머리칼이 일정한 박자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카운터로 다가갔다. 짐작은 정확했다.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낡은 턱시도를 입은 채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는 노인이었다. 그는 카운터에 노트 두 개와 오래된 금고를 올려두고는 퍽이나 편안한 자세로 졸고 있는 중이었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런 옷을 입은 채 이런 카운터에 앉아 있는 노인은 어쩐지 종업원이라고 부르기는 뭣하고, 지배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남자는 카운터 안쪽으로 몸을 뻗으며 지배인을 깨웠다.

“저… 방 있나요?”

지배인은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고 주름진 눈만 떠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방이 있다거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별 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역시 영업은 하지 않는 건가. 남자는 머쓱해진 얼굴로 지배인의 시선을 피했다.

"뭐… 여기 지금은 영업 안하는 모양이죠? 오는 길에 차가 고장 나서 그러는데, 근방에 카센터 같은 건 없나요?"

지배인은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럼 보험회사 사람이라도 불러야 될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디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요? 제가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까 주변에 뭐가 있는지 확인을 못해서…”
“우리 호텔은 지도엔 없습니다.”

쇳소리가 반 쯤 섞인 그 대답으로 짐작해 보건데, 지배인은 못 말리는 애연가가 아니면 퍽이나 오랫동안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남자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예. 저는 제가 못 찾은 건 줄 알았는데, 여기 지어진지 얼마 안 되는 모양이죠? 아니면 짓고 있는 중인 건가요?”
“아뇨. 너무 오래돼서 그렇습니다.”

지배인은 대답과 함께 몸을 일으켜 카운터 밖으로 나오더니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지배인을 쫓아가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이 호텔, 언제 지은 건데요? 지배인은 느릿한 걸음으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으며, 걷는 속도만큼이나 느지막하게 대답했다. 1945년입니다. 남자는 현관에 서 있던 낡은 입간판을 떠올렸다. 45년이면 사막횡단 고속도로가 뚫리기도 전인데요? 예. 지도 갱신작업도 고속도로 공사와 함께 진행했거든요. 이곳 부근을 조사할 때 마침 모래폭풍이 거세게 불어서 우리 호텔을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아… 그럼 지금 이 호텔 위치는 관공서에서도 모르고 있다는 건가요? 예. 어차피 수도나 전기 같은 건 우리 쪽에서 직접 공급하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런 걸 어떻게… 호텔 뒤뜰에 오아시스도 있고, 발전시설도 있습니다. 적은 양이긴 하지만 석유가 나는 곳도 가까워서 유용하게 쓰고 있지요. 그럼 전화는요? 전화할 일이 많진 않지만… 위성전화가 몇 대 있습니다. 인터넷도 위성으로 쓰시면 돼요.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도에도 없고, 관공서도 알지 못하는, 심지어 어떤 여행자도 언급한 적이 없는 호텔이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1, 2년도 아니고 60년이 넘는 시간동안 완전히 고립된 채로 ‘영업’ 이란 걸 해 왔다고? 남자가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지려는 순간, 지배인은 어떤 방 앞에 멈춰 서더니 문을 벌컥 열었다. 문틈에 끼어 있던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서 눈앞을 가렸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 묵으시면 됩니다.”

방 한가운데로 들어간 지배인은 남자를 돌아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싱글침대 하나가 들어가고도 다섯 사람쯤은 더 누울 만한 크기의 방 한 편에는 유리로 된 칸막이와 욕조가 있었고, 맑은 햇살이 한가득 들어오는 창문과, 목제 책상, 작은 TV,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냉장고도 있었다. 지배인은 창문을 열더니 TV를 켜고 냉장고도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냉장고 안에는 가지런히 줄을 맞춘 캔 맥주 다섯 개와 생수 한 통,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얼음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눈에 띄게 낡아 보인다는 점을 제외하자면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방 좋네요.”

지배인은 남자의 말을 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방 밖으로 걸어 나가며 남자에게 열쇠를 건네더니, 정중한 태도로 문 앞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짐 정리 다 끝나시거든 카운터로 내려오셔서 체크인 하시면 됩니다.”

남자는 중얼거렸다. 일처리는 신속한 사람이구나.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 하룻밤에 얼마나 하죠?”

지배인은 고개를 저었다.

“방은 많으니까 얼마든지 묵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네?”
“저희 호텔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편안한 휴식 되십시오.”

지배인은 그냥 허리를 살짝 숙인 것처럼 보였는데, 방문은 자동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르륵 소리를 내며 얌전히 닫혀 버렸다. 남자는 황당한 기분으로 닫힌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손님 없으니까, 그냥 공짜로 묵어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그게 이 호텔 지배인이 생각하기엔 이치에 맞는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치에 맞는다고 해도 어쨌든 꺼림칙한 일인 것은 분명했다. 지금이라도 그냥 가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며 남자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양이 지평선에 제법 가깝게 내려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방 안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열려 있는 냉장고 안에 있는 캔맥주와 얼음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사막은 매우 넓고 더운 곳이라는 점을 되새겼다.







주차장으로 돌아가 짐을 챙기고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마칠 때까지, 남자는 호텔 근처는 물론 안에서도 그 누구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사막의 해는 빠른 속도로 저물었다.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남자가 자기 말고 다른 손님은 없는 거냐고 물었지만, 지배인은 주름진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며 대답할 뿐이었다. 네. 빈 방은 많으니까 얼마든지 묵으셔도 괜찮습니다. 남자는 계단을 다시 올라와 짐을 정리할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질문을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손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은 없느냐고 물어봤어야 하는 것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에게 지배인은 인터폰을 걸어왔다. 저녁은 1층에 있는 식당에서 해도 되고 룸서비스를 불러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 음식은 도대체 누가 만드는 것이며, 식재료는 어디서 구해 오느냐고 묻자 지배인은 미묘한 비웃음을 머금은 말투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실 것 없지 않습니까? 지배인은 룸서비스는 물론 식당에서 먹는 저녁에도 추가 요금은 없다고 말했다. 방에 있는 맥주를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1층 로비에 설치된 위성전화나 위성인터넷을 사용하는 것도 무료라는 설명까지 듣고 나자, 남자는 오히려 냉장고에 있는 얼음 하나도 건드릴 자신이 없어졌다. 남자는 침대에 멍하니 누운 채 생각에 잠겼다. 이건 뜻밖의 행운이라기보다는 퍽이나 기분 나쁜 옛날이야기에 가까웠다. 지도에도 없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의 외딴 호텔에 묵게 된 남자. 자신 이외의 손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호텔 안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라곤 기분 나쁘게 늙은 호텔 지배인과 자기 자신뿐이다. 어느덧 밤이 깊어가고 TV에 잡히는 거라곤 철지난 영화만 줄기차게 틀어대는 위성 채널 뿐. 이런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낄 때쯤이면 꼭…
문득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을 일으켰지만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이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뒤늦게 소리쳤다.

“누, 누구세요!”

반응은 뜻밖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남자를 발견하더니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치다가 반쯤 열린 문에 걸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축축한 것이 질퍽하게 바닥에 떨어지고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당해진 남자가 문 뒤의 상황을 살펴봐야 하는 건가 생각할 무렵, 침입자는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젊은 여자였다. 긴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는 흥건히 젖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어쨌든 또 다른 사람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지만, 여자의 당황한 표정 때문에 불길한 기분은 영 가시질 않았다. 남자는 어색하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손님이세요?”

여자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 뭐, 일단 이 방을 쓰기로 했는데요.”
“내가 못살아, 진짜… 언제 오셨어요?”
“몇 시간 안 됐는데요. 그보다 누구신지…”
“뭐 먹거나 마신 건 없죠?”
“아… 네.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냥 자려고…”
“다행이네요. 빨리 가세요.”
“네?”

여자는 잠시 문 뒤로 사라졌다가 대걸레와 양동이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차리고 있는 모습이나 가져온 물건으로 짐작하건데 또 다른 손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양동이를 방 한가운데에 내려놓더니, 대걸레를 지팡이처럼 짚어 몸을 기댄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늘밤은 늦었으니까 일단 주무시고 가셔야겠네요. 단, 내일 아침 호텔을 떠나기 전까지 여기서는 어떤 음식이나 술도 입에 대선 안돼요. 여기 냉장고에 있는 맥주나 물도 마찬가지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머리가 지끈거리고 기분이 나빠졌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여자를 노려보다가 질문했다.

“도대체 누구신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좀 여쭤 봐도 될까요?”
“저요? 보면 몰라요? 저 여기서 일해요. 청소하러 온 거구요.”
“언제부터요?”
“그거야… 아실 거 없어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빨리 떠날 생각이나 하세요. 사막을 건너셨으면 꽤 피곤하실 테니까 어서 주무시는 게 좋겠네요. 빨리 주무셔야 빨리 일어나겠죠? 빨리 일어나야 빨리 떠날 수 있으실 테고?”
“여길 빨리 떠나든, 안 떠나든, 그건 제 사정이겠죠. 지배인 말로는 뭘 먹고 얼마나 지내든 공짜라던데요?”

여자는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남자에게 물었다.

“아저씬 가족도 없어요?”

어려운 질문이었다. 남자의 머릿속에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바싹 메말라 뼈대만 앙상했던 손목과, 투명하게 질린 채 모래바람에 씻겨 사라질 것처럼 위태롭던 입술, 보기 흉하게 찌그러진 가슴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있던 아이의 모습까지. 남자는 사막 저편에 던지고 온 불쾌한 기억들이 어째서 자신의 것이어만 하는지, 앞으로 몇 천 킬로미터를 더 달려야 ‘나는 이제 가족도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아직은 아닌 것 같았다. 남자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대답이 목구멍까지 힘겹게 기어 올라와서 울대를 간지럽혔다. 아뇨. 가족이야 있죠. 얼마 전에 다 죽어버린 게 흠이지만.
여자는 목을 쭉 빼서 남자의 표정을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요.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뭔가 사정이 있었겠죠. 일단은 혼자 있게 해 드릴게요. 고민 끝나시거든 얼른 짐부터 챙기시고 주무세요.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되도록 빨리 떠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 그리고…”

양동이를 들고 문을 나선 여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아직 닫히지 않은 문 뒤쪽까지, 찰랑이는 양동이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발자국처럼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꼭 어떤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는 호텔을 벗어나는 길, 멀게는 아내의 환영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는 길. 어느 쪽이던 간에, 지금의 남자에게는 무언가를 따라가는 게 중요했다. 끝없는 공간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뻗어 있는 고속도로라던가, 인기척도 없고 손님도 없는 호텔에서 처음 만난 종업원이 흘린 흔적이라던가. 하지만 그녀는 따라오라는 말 대신 떠나가라고 말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남자의 마음을 긁어댔다. 그러니까, 피하고 도망가고 떠나가야 할 것은 하나로 족했다. 아내에게서 도망치는 것만으로 남자는 충분히 머리가 아팠다. 여자는 아직 문 뒤에 있었다. 남자는 그저 그녀가 뭔가를 알려주고 자신이 따라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길 바랐다.
여자는 문 뒤에 몸을 숨긴 채 말했다.

“오늘 밤엔 무슨 일이 있어도 방 바깥으로 나와선 안돼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은 조심스럽게 닫혔다. 철퍽거리고, 찰랑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어둠이 내린 방 안에 스산한 냉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원래 사막의 밤이란 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법이다. 남자는 짐을 뒤져 노트북과 긴 옷들을 꺼냈다. 침대 맡의 스탠드를 켠 채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뒤적이던 남자는, 그제야 오늘밤에 자신의 첫 출판기념회가 계획되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집을 나와 사막을 건너 자리를 잡은 도시에서 팔 개월 만에 써 낸 작품이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며, 출판사 담당자는 일주일 뒤에 있을 출판기념회에는 아내도 꼭 데려오라고 이야기했다. 웃으면서 꼭 그러겠노라고 대답한 남자가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내기까지는 사흘이 더 필요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를 때 까지도 남자는 집에 전화 한 통 걸지 않았다. 어쩌면 공항에서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잡아타면서도 정작 집에 들어설 계획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남자가 집을 떠나던 날, 아내는 공항까지 따라와 울면서 화를 냈다. 슬픔과 분노의 극단을 오가며 남편을 붙잡던 그녀가 정작 뱃속의 아이에 대해선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던 건, 단순히 자신 때문에 일생의 꿈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남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아내가 혼자서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죽어가기까지 얼마나 숱한 감정들을 견뎌내야 했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아내가 숨을 거둔 자리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는 것은, 삶에 정직하게 맡서 본 적이 없는 이야기꾼일 뿐인 남자가 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호텔은 고요했다. 남자에게는 많은 생각으로 채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었지만 정작 쓸 만한 생각이라곤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 팔개월간 팽팽하게 당겨진 채 한결같은 긴장을 유지하던 무언가가 한순간에 끊어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어이없이 끊어져 버린 게 도대체 뭔지, 살펴보려던 남자는 무수한 자살충동만을 확인하고 좌절했다. 시간이 흘렀다. 창문을 타고 달빛이 습하게 스며들었다. 남자는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잠을 깬 남자는 창밖이 불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잠이 덜 깬 눈을 깜빡였다. 아코디언 소리, 기타 소리, 유리잔 깨지는 소리나 나무 같은 것이 삐그덕 대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제일 많이 들리는 것은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족히 수십 명은 넘는 사람들이 창밖에서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 밖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사막 가까운 곳까지 알 수 없는 불빛이 일렁거렸고, 그 불빛 가까운 곳에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갈래진 채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 하나하나를 분간해 내긴 힘들었다. 아무런 체계 없이 마구 뒤섞인 그들의 목소리는 그러니까, 큰 술집을 꽉 채운 사람들의 소음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창에 가까이 다가선 남자는 그 추측에 가장 걸맞은 장면을 확인하고 입을 딱 벌렸다.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호텔 뒤편의 작은 오아시스를 무대로, 여덟 개의 탁자로 꾸며진 파티장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악기를 들고 탁자에 걸터앉은 채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아예 한 탁자에 둥글게 모여서 거국적인 건배를 나누는 사람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 악사들 앞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이미 거나하게 취해서 쓰러져 버린 사람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까지 인파의 면면은 다양했고 연령이나 성별대도 그만큼 폭이 컸다. 게다가 그네들의 차림새를 살피고 보니,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가 만들고 입어온 거의 모든 의상들이 한 자리에 모인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것은 튜닉Tunic을 입은 여자와 카우보이 옷을 입은 남자가 술잔을 나누고 있는 이 파티장에는 할로윈 파티에나 느껴질 위화감 같은 것이 조금도 없다는 점이었다. 다양한 옷의 주인들은 모두, 정말로 그 옷을 입고 생활했을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남자는 그 기묘한 조화보다는 역시 조금 다른 점이 놀라웠다.
이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남자는 당장 인터폰을 들어 지배인을 부르려고 했지만, 파티장에서 손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든 채로 인파 사이를 미끄러지듯 돌아다니는 지배인을 발견하고 말았다. 좀 더 살펴보니 지배인을 포함해서 적어도 열 명은 되는 종업원들이 분주히 음식과 술을 나르고 있었다.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종업원들의 자취를 쫓았지만, 그들 가운데 저녁 무렵 방을 찾아왔던 젊은 여자는 없었다. 남자는 창틀에 손을 짚은 채 그녀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이런 밤과 이런 공기에 어울리는, 뻔한 터부. 사막을 건너려거든 자동차 점검을 받으라는 아내의 충고가 머릿속을 어지러이 오갔다.
오랜 고민 끝에 남자는 창밖의 상황엔 신경을 끄기로 결심했다. 아침이 밝거든 여자의 충고대로 호텔을 빠져나가 다시 고속도로를 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하나를 건너면, 다른 하나는 건너지 못하게 되는 게 세상의 이치인 법이니까.
창에서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를 보지 못했다면 남자는 계획대로 다음날 아침 호텔을 무사히 빠져나갔을 것이다. 어쩌면 무사히 도주에 성공해서 새로운 삶의 첫 발을 좀 더 일찍 디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짧은 순간, 남자의 눈엔 음악과 잡담과 폭소와 술기운으로 흥건한 파티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깡마른 얼굴, 가슴에 안긴 갓난아기. 제자리를 잘못 찾아온 사람처럼 흥겨운 파티장 한편을 슬픈 얼굴로 서성이는 그녀는, 다름 아닌 그의 아내였다.

“여보?”

혼자 멍하게 중얼거린 그는 이윽고 창문을 열고 목이 터져라 아내를 불렀다. 여보! 아내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내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남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무수한 잡음들 사이에 섞여 파티장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아내의 흔적을 쫓다가, 뒤돌아서 온 힘을 다해 방을 뛰어나갔다. 백열등만 드문드문 켜져 있는 복도에는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계단을 거쳐 로비로 달려 나가는 내내 파티장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남자의 귓가를 자극했다. 샹들리에가 침침하게 빛나고 있는 로비에서 뒤뜰로 통하는 문을 발견한 남자는 그 앞에 누군가 서 있다는 걸 알았다. 남자가 문 앞에 다가서자, 대걸레자루를 짚은 그녀는 수문장처럼 손을 뻗어 문을 가로막았다.

“아저씨. 제가 뭐라고 했죠?”
“저 사람들 다 누구야! 어디서 온 거야!”
“손님들이에요. 여기 죽 있었고요.”

여자는 빈정대듯 대답했다. 남자는 손을 뻗어 문 너머를 가리켰다.

“내 아내… 아내가 저기 있다고!”
“그래요. 그게 어때서요. 아내 분도 파티를 즐길 자격은 있잖아요?”

남자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상한 소리 그만 두고, 비켜.”
“가서 뭘 하시려고 그러는데요?”
“만나야지!”
“만나면 어쩌실 건데요?”
“얘기를 들어야 할 거 아냐!”

텅 빈 로비에 남자의 고함소리가 메아리 쳤다. 자기가 내뱉은 말을 다시 들으며, 남자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슨 얘기를 듣겠다는 거지? 아내는 아마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구절절이 늘어놓을 사람도 아니거니와, 남자 역시 그런 말을 일일이 듣는 걸 원하지도 않았다. 문득 정문으로 달려 나가는 게 현명한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속도로를 탈 때부터 도망치는 게 애초의 목적이었으니까.
문 앞에 선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듣지 마세요. 들으면 안 돼요.”
“그게 무슨…”
“위층에서 저 사람들 노는 꼴은 못 보신 거예요? 다들 완전히 취했어요. 어느 술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죠. 저희 아버지는 술자리가 저쯤 되면 무슨 얘기건 주고받는 게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고 그러시던데요. 집단적 독백상태에 빠졌다고 그러죠.”
“아기도 같이 있는데? 술을 마셨다는 거야?”
“글쎄요. 저희 호텔에선 술은 안 팔아요. 1969년부터니까 한 40년쯤 됐죠.”

이쯤 되면 할 말을 잃어야 정상인 것 같았다. 남자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내 아내는 죽었다고. 아이랑 같이. 내가 직접 눈을 감겨줬는데. 왜 저기 있는 거야. 저 사람들은 전부 어디서 나온 거고…”

여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해 봐야 믿지도 않으시겠지만… 죽은 사람이 왜 나타났겠어요? 못 다한 게 있으니까 다시 오는 거죠. 저도 자세한 설명을 들어 본 적은 없지만, 여기 오는 사람들은 주로 못 다한 말이 많은 사람들 같더라고요. 파티 분위기만 조성해 주면 술이라곤 한모금도 없어도 저렇게 자기들끼리 모여서 논다니까요. 하지만 잘 들어 보면 다들 자기 얘기 늘어놓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죠. 내가 살아있을 때에는… 운운하면서. 파란만장하게 살아오신 노인네들이 나 젊을 때는, 하면서 늘어놓는 말이랑 비슷하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데 뭐, 자기들끼리 그러고 있어봐야 한이 풀릴 리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영원히 저러고 있는 거에요.”
“유령… 들이라는 거야? 저주라도 받은?”
“오해하지 마세요. 아무도 저주 같은 걸 내린 적은 없어요. 유령들이 자꾸 오면서 호텔 분위기가 이상해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여긴 그냥 보통 호텔일 뿐이라고요. 어떻게든 내쫓아 보려고 40년째 술도 안 주는데, 참 끈질기기도 하죠. 아저씨 같은 사람도 불러들이고.”
“무슨 말이야?”
“아저씨 여긴 어떻게 왔어요? 우연히 왔다고 생각하죠? 천만에요. 여긴 누가 예약해주지 않으면 방 잡기 힘든 곳이에요. 아마도 아내 되시는 분이 예약하셨을 거예요. 내가 꼭 할 말이 있으니까 불러달라고… 유령으로서의 본능 같은 건가 봐요. 누구한테 말을 전해야 하는 건지 잘 알고 있는 거죠.”

남자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날 불렀다고? 못한 말이 있어서?”
“제가 아저씨를 말리고 있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에요. 들어주지 마세요. 아저씨 같은 사람, 많았어요. 무슨 얘긴지 꼭 들어야 하겠다면서 절 밀치고 뒤뜰로 달려 나갔죠. 뭐, 얘기를 다 마친 유령은 다음 날 부터는 파티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어요. 아저씨, 제 말 잘 들으세요.”

어둠 속에서 여자의 눈이 빛났다. 남자는 침을 삼켰다.

“말을 들어준 사람도 다음 날 아침부턴 보이질 않았어요.”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남자는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치우고 창밖부터 살펴보았다. 호텔 뒤뜰은 거짓말처럼 삭막했다. 남자는 잠이 들기 직전까지 쩌렁쩌렁하게 들려오던 소음들을 떠올리며 허탈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남자는 호텔을 떠나지 않았다. 침대에 웅크린 채로 TV만 멍하니 바라보며 반나절을 보내버렸다. 점심시간 무렵 다시 방문을 열고 나타난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남자에게 음식을 건네주었다. 여자는 딱딱하게 충고했다. 제가 주는 음식 외엔 물 한모금도 입에 대선 안돼요. 호텔 안에 있는 어떤 음식이든 입에 대는 순간 영원히 호텔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막연히 그 이유를 짐작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가장 흔히 하는 일이 무언가를 먹는 것이니까, 어쩌면 ‘유령의 본능’ 이란 그런 순간을 용케 잡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자는 침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저녁에도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해가 지고, 다시 파티가 시작되었다. 남자는 슬픈 눈으로 창가에 서서 파티장 곳곳을 서성이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벌게진 채 자기 멋대로 떠들어대는 사람들 틈새를 위태롭게 오가며, 아내는 이따금 누군가의 어깨를 두드려 이야기를 건넸다.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동안 아내의 말을 듣더니, 이윽고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봐도 대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이었다. 어깨동무도 하고, 함께 춤도 추고, 악기도 연주하며 즐겁게 노는 것 같았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파티는 먼 지평선에 여명이 감돌 때 쯤 중단되었다. 유령들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총총히 호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지배인은 종업원들과 함께 나와 식탁 여덟 개를 들고 호텔 안으로 사라졌다. 뒤뜰은 다시금 삭막한 사막의 언저리쯤으로 변했다. 문이 열리고, 여자가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 빨리 가세요. 그녀가 안내하는 길은 명확했지만, 남자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결국 호텔의 룰은 간단했다. 아내를 구원하던가, 자신을 구원하던가. 남자는 한없이 비참해지는 기분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되돌아보았다. 침대에 누워 쓸쓸한 죽음을 맞던 아내의 모습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절망적이었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며칠 밤이 지나갔다. 여자는 끼니마다 식사를 가져다주었고, 남자는 매일 밤 아내를 내려다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내를 구하고, 내가 사라진다면,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몰라요. 그런 건. 사라진 사람들은 지배인 몫이에요. 매일 방 청소도 해 주고, 룸서비스도 해 주죠. 그리고 식당에선 매일 수십인 분씩 밥을 짓는데, 저는 밥을 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고 먹는 사람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한 적도 없어요.”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의 자신과 별다를 것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들은 창가에 서서 매일 밤 그 누군가의 모습을 바라볼 자유는 잃어버린 것이 확실했다. 할 말을 다 한 유령은 더 이상 파티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이대로 영원히 호텔에 남아 있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다만, 여자가 가져다주는 음식은 빵 몇 조각과 우유 같은 것이 고작이었고, 남자는 결국 더위와 배고픔과 외로움을 고스란히 이겨내야 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노트북을 굴리고 로비에 내려와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살피며, 남자는 자신이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지 생각했다. 자신이 없었다. 아내는 매일 밤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누군가에게 건넸고, 남자는 매일 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력한 나날들이 지나갔다.
어느 날 오후, 남자는 이메일을 받았다.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전화는 꺼져 있고, 집에 확인하니까 죽은 아내도 팽개치고 어디로 갔다고 그러던데. 살아있는 거 맞죠? 덕택에 책은 잘 팔리고 있어요. 뭐 워낙 작품 수준이 좋기도 했지만, 작가 이력이 이런 식이다보니까 아무래도 화제가 되던데요. 혹시라도 일부러 꾸민 일이면 가만 안 둘 거에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내는 거니까. 살아있으면 연락 좀 줘요. 부탁이에요.

남자는 생각에 잠겼다. 팔 개월 동안 작품을 쓰면서도, 그는 사실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에게는 노트북이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있고, 끼니때마다 밥을 가져다주는 사람도 있었다. 어차피 사막을 건너 도시 어딘가에 정착하더라도 이곳보다 괜찮은 환경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매일 밤 목을 조여 오는 죄의식만이 문제였지만, 어쩌면 그런 죄의식이 자신의 글에는 더 괜찮은 자양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이야기꺼리 뿐이었다. 머릿속을 뒤져 예전의 아이디어들을 되새겼지만, 좀처럼 잘 조립되질 않았다. 밤이 깊어오고, 무의미한 파티 속을 헤매는 유령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다른 생각 따위를 할 여유는 없었다. 어떻게든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쓰다가 다시 들려오는 창밖의 소음에 손을 멈춘 남자는 창가에 서서 정신없이 이야기하는 유령들을 내려 보았다. 그러자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나 많은 이야기, 죽어서까지 꼭 전해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눈앞에 있는데.
남자는 종이와 펜을 들고 부리나케 로비로 내려갔다. 어디선가 나타난 양동이와 대걸레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빨리 가라고 했잖아요. 제 말 못 믿을 게 뻔하지만 아저씨 같은 사람은 정말로 많았… 남자는 여자를 뿌리치고 파티장으로 달려갔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이 벌게진 채 테이블을 내리쳐 가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군복을 입고 있었다. 괜찮은 전쟁소설 하나를 머릿속에 그려보며, 남자는 조심스레 병사의 어깨를 두들겼다.
의외로 말이 통했고, 게다가 병사는 남자가 살아있는 사람이란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남자가 이야기해 달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는 정신없이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약혼자와 징집령, 동부전선에서 당한 부상으로 후송당하는 도중 도착한 약혼자의 편지, 후송되는 곳으로 찾아오겠다는 소식을 듣고 광분했던 이야기, 이어지는 소련군의 추격, 고립, 탈출, 그리고 마침내 만난 약혼자의 대리인… 결국 병사가 약혼자에게 전하지 못한 이야기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소식인 것 같았다. 앞뒤 없는 이야기를 메모해 가며 정리를 마친 남자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만약에 약혼자가 살아있다면, 찾아갈 거예요? 병사는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갈 겁니다. 죽어서라도, 꼭.
남자는 메모에 마침표를 찍고 호텔로 향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호텔 후문까지 걸어간 그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지만, 아내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지옥문을 홀로 걸어 나오던 오르페우스의 기분이 이랬을까. 남자는 침울한 기분으로 문을 열고 호텔로 들어갔다. 문간에 서 있던 여자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에요?”

남자는 짧게 대답했다.

“내 직업이 원래 이래. 이해해요.”

이해하라는 말은 누구에게 하고 싶었던 걸까. 남자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꾹 참으며 방으로 되돌아갔다. 책상에 앉은 그는 정신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창밖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타고 온갖 소음이 들려왔다. 이따금 기지개를 피거나, 제자리에 선 채로 창 너머 먼발치를 바라보는 일은 불가피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남자는 온갖 유혹들을 이겨가며 계속 글을 써 내려갔다.
이윽고 창밖이 조용해지고, 햇빛이 창틀을 넘어왔다. 창가에 다가가 테이블을 정리하는 지배인을 멍하니 내려 보며, 남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룻밤을 이겨냈다. 하지만 이런 밤들을 얼마나 더 이겨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설이 완성되자, 남자는 출판사 담당자에게 원고를 보냈다. 소설의 내용 이외에는 아무런 변명이나 설명도 덧붙이지 않은 상태였다. 원고를 완성한 날 밤에도 파티에 나가 다른 사연 하나를 적어서 돌아온 그는, 다시 다른 이야기를 쓰는 데에 매달렸다.
이야기를 받아 적고, 꾸미고, 완성해서 이메일로 보내는 작업이 계속됐지만 남자는 그럴수록 자신이 점점 더 소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령들의 이야기가 항상 재미있는 것은 아니었다. 진부한 이야기만 한가득 건져온 날이면, 글을 쓰다가도 창밖을 헤매고 있을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패배할 것이 뻔한 승부였다. 유령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남자가 버텨내야 할 날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으니까. 남자는 가끔 미라처럼 말라붙은 채 책상에서 숨을 거둘 자신의 미래를 떠올렸다.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 이야기를 쥐어짜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버거운 일이었다.
어느덧 이메일에는 모르는 이들의 편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지만, 그는 독자들의 편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출판사 담당자가 보낸 답장은 휴지통에 넘어가 있었다.

-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지독한 작가주의에라도 빠진 거예요? 아니면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거니까 거추장스러운 요식같은 건 필요 없다는 거예요? 독자들이 난리부리는 건 그렇다 치고, 이젠 경찰도 나섰으니까 어디 있는지 밝혀지는 날에는 알아서 해요. 보내준 단편들은 소설집으로 내기로 했어요. 장삿속이 지나치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들도 워낙 말이 많고 일단 사장님 결정이니까 어쩔 수 없죠. 동의를 못 구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뭐, 작품에 이름을 안 써놨다고 해도 읽어 보면 직접 썼다는 걸 알긴 하겠는데… 일단은 댁도 실종된 상태니까 정식으로 계약을 맺기도 뭣하고. 인세 챙길 생각 있으면 꼭 연락해 줘요. 살아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으니까.

남자는 피식 웃으며 방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한참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그 날 밤부터, 남자는 다시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유령들의 파티와 아내의 모습을 내려 보기 시작했다. 머지않은 곳에 더는 버틸 수 없는 순간이 버티고 있었다. 억지로 연장시켜 온 집행유예기간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밤, 여느 때처럼 창가에 서 있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령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 같았다. 한동안 이 호텔에 찾아온 손님도 없었으니 구원받을 유령도 없을 텐데. 그간 눈에 익은 유령들을 하나씩 찾아보던 남자는 결국 독일군복을 입은 유령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요.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튿날, 아침을 건네준 여자는 소설로 유령을 구원했다는 남자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남자의 논리는 명확했다. ‘유령의 본능’ 이란 것이 기어코 이 사막과 호텔을 벗어난 자신의 이야기를 타고 세상으로 흘러간 것이다. 결국 이야기를 들어야만 할 누군가에게 건네진 소설은 그의 한을 풀어주었고, 아무도 사라지지 않은 채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열릴 수 있었다. 며칠 밤 동안 관찰을 거친 남자는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 준 유령들이 차례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을 얻었다. 길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남자는 매일 밤 뒤뜰로 나가 유령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최대한 빨리 소설로 바꿔서 출판사에 보냈다. 그는 이메일 마지막에 짤막하게 덧붙였다. 지금부터 제가 보내드리는 모든 이야기를 출판해 주셔야 합니다. 그게 어렵다면 그냥 포털 같은 곳에 공개라도 해 주세요. 인세 같은 건 없어도 됩니다. 출판사 담당자는 짜증 섞인 답장을 보내왔다. 사장이 동의했으니 계속해서 작품을 출간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왕이면 지금 어디에서 작업 중인지를 밝히는 게 좋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남자는 조금 주저하다가 명확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여자의 말대로 이곳이 저주받은 호텔이 아니라면, 굳이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는 걸 말려야 할 이유 같은 것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있는 곳을 파악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남자는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카운터에서 졸고 있는 지배인에게 다가가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약 좀 할게요. 꼭 할 말이 있어서.”

이틀 후에 출판사에서 온 사람이 호텔에 도착했다. 지배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겨 빈 방을 안내해 주었다. 남자는 지배인이 나간 후에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가방을 든 채 문간에 서 있는 출판사 직원을 앉혀놓고 차근차근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내가 죽은 뒤 사막을 헤매다가 이 호텔을 우연히 발견했으며, 집필에 매진하기에 좋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연락도 끊고 잠적해 있었다고. 호텔 뒤뜰에서 유령들이 밤마다 파티를 연다거나, 죽은 아내가 그곳에서 헤매고 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혹시나 그가 한밤중의 상황을 직접 목격한다면 이상한 짐작을 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 점에 대해선 확인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못 봐요. 유령들이 직접 예약해 준 사람 아니면 파티에 참가할 자격이 없거든요. 그러니 자기 맘대로 먹거나 마셔도 호텔에 갇히는 일 같은 것도 없겠죠.”

여자는 문 밖 복도에서 팔짱을 낀 채로 비딱하게 서서 남자와 출판사 직원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남자가 문을 닫고 나오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법이네요. 아저씨? 여태껏 여기에 외부인을 초대한 사람은 없었는데.”

남자는 쓴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지.”





출판사 직원이 돌아가고 나서, 남자는 경찰과 사막횡단 고속도로 관리공단 직원을 잇달아 호텔로 초대했다. 그러자 지도가 갱신되고, 고속도로 공식 안내책자에 호텔의 존재가 명시되었다. 한적한 호텔에 사람들의 발길이 스치는 것을 느끼며 남자는 몇 편의 소설을 더 출간했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으로 창가에 기대어 사라진 유령들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어주고 써 줄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이 구해내야 하는 아내의 이야기만은 영영 들어줄 수도, 써 줄 수도 없을 것이다. 끼니마다 남자를 찾아온 여자는 끊임없이 그 점을 상기시키며, 결국 성공할 수 없는 시도는 관두고 지금이라도 호텔을 떠나라고 권유했다. 죽은 사람들은 그렇게 알량한 방법으로 다룰 수 없는 법이라는 게 그녀의 일관된 충고였다. 하지만 남자는 기어코 호텔을 방문하기 시작하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들을 빈 방으로 안내하는 지배인을 살피며,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은 사람들보다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훨씬 시끄럽고, 끈질기며, 무섭다는 점을. 그러니 이제 그가 할 일은 그저 여력이 되는대로 아직 남아있는 유령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달하며, 살아있는 자들의 소음으로 이 낡은 유령의 호텔이 스스로 파산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호텔에 머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다. 초반 한 달 정도 무상으로 숙박과 음식을 제공하던 지배인은 별안간 숙박비를 받기 시작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느 여행 잡지에 세월의 흔적이 고풍스럽게 남아있는 사막의 외딴 호텔에 대한 특집기사가 실렸다. 여행객들이 늘어나고, 호텔의 구석구석이 그들의 사진기에 실려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이렇게 외로운 곳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어느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을 호텔로 불러들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남자는 로비에 내려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자신의 책을 들고 찾아온 여행객들에게 사인을 해 주었으며, 주로 어디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느냐는 질문에 지체 없이 호텔 뒤뜰의 외로운 오아시스가 자신의 뮤즈 역할을 한다고 대답해 버렸다. 그래서 새로운 책이 출간된 날이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한가득 몰려들어 호텔 뒤뜰에서 파티를 벌였다. 남자는 샴페인을 흔들고 와인잔을 높이 들어 건배 제의를 하며, 사막 먼 곳의 어둠 속으로 쫓겨나 버린 유령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얼핏 잔인한 일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튿날 밤 다시 나타난 유령들은 아무도 남자의 사과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만을 목청껏 떠들어댈 뿐이었다. 남자는 측은함을 삼키며 유령들을 하나 둘씩 떠나보냈다. 마지막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밤마다 잠을 방해하던 소음들이 잦아들었다.
결국 어느 밤 창밖을 내다 본 남자는 아내가 홀로 뒤뜰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배인은 이제 큰 테이블을 설치하지도 않았고 불을 밝혀주지도 않았다. 살아있는 자들로 가득 찬 호텔 객실에서 근근이 스며 나오는 빛만이 황량한 오아시스 한 구석을 밝혀주고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슬픈 얼굴로 뒤뜰을 배회하다가, 이따금 멈춰 서서 먼 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창틀을 꼭 쥐고 고개를 숙여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아침을 가져다 준 여자를 붙잡았다.

“술 한 잔, 했으면 좋겠는데.”

여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말했잖아요. 술 같은 건 취급 안한지 40년이 넘었다고.”
“그럼 지금 지하저장고에 있는 와인은 40년은 넘게 묵었다는 소리겠네. 오늘 밤에 지배인님 모시고 같이 와.”
“지배인이요? 그 분은 왜…”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여자는 더 깊이 물어보지 않았다. 남자는 침대에 몸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밤이 깊어갈 무렵, 지배인은 여자와 함께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퍽이나 오래 묵은 것처럼 보이는 와인도 함께였다. 남자는 세 개의 술잔에 담긴 와인들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작별인사 하려고 불렀어요.”

지배인은 말없이 잔을 손에 들었다.

“이 호텔,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올 겁니다. 어르신이 워낙 말이 안 통하니까 저한테 연락을 했더군요.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해 줬어요. 아마 이 호텔 주인은 1969년에 죽었을 테고, 지금은 사업자 등록도 안 한 사람이 세금도 안 내 가면서 불법으로 운영하는 중일 거라고. 여태까지는 나름대로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방법이 있었겠지만, 이젠 그게 쉽지 않을 거예요. 살아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무서우니까.”

술잔을 들던 여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지배인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어르신이 운영하고는 있지만, 결국 어르신도 이 호텔에 있는 유령이니까, 아마 누군가를 부르긴 불렀겠죠. 저는 아마도 그게 여기 있는 이 아가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로 옆에 두고 일을 시키면서도 자신이 할 말을 하고 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뻔히 알고 있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요? 아마 아가씨도 그런 마음 정도는 알고 있을 테고. 저도 골치 아프지만, 두 분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정말 골치 아프던데요. 그래서 그냥 과격한 방법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던가, 아니면 그냥 경찰한테 쫓겨나던가.
저주 같은 걸 만든 사람은 없다고 했던가요? 그렇다면 저는 있지도 않은 저주로부터 수십 명의 영혼을 해방시킨 셈이겠네요. 그러니까 그런 게 있건, 없건, 이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주가 아닌 무언가가 있다면 그걸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어르신이겠죠. 길 잃은 영혼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그건 천국일 수도 있고, 지옥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어느 쪽이던, 제 아내를 구해낼 수 있다면 전부 다 박살내 버릴 겁니다. 이제 당신들이 마지막 수순입니다. 자, 말씀하시기 어렵다면 한 잔 하실까요?”

남자는 자신의 술잔을 들어 두 사람 사이로 내밀었다. 입을 굳게 다문 지배인은 남자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술잔을 든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아저씨. 이걸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죠?”
“아마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우리가’ 함께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고 있을 걸. 어르신, 저는 이미 저 뒤뜰에서 기약 없는 잔치를 벌이던 사람들을 다 구해냈어요. 그러니 절 믿으셔도 좋습니다. 좋은 곳으로 가길 빌어드리죠.”
“이야기 같은 걸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거에요? 아저씨 바보에요?”
“할 말도 못 해서 끙끙대는 머저리 같은 유령 정도야 구원할 수 있겠지. 자. 건배할까요?”

지배인은 잔에 담긴 와인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잔을 잡았다. 셋은 동시에 잔을 부딪쳤다. 쨍, 경쾌한 소리와 함께 와인이 가볍게 출렁였다. 동시에 와인을 삼켜버린 셋은 역시 동시에 잔을 내려놓았다. 문득 지배인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그는 두 손을 내밀어 남자의 손을 부여잡았다.

“고맙습니다.”

남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별 말씀을.”
“내일부터는 저도 볼 수 없을 테고, 아내분도 볼 수 없을 겁니다. 아마 제가 그렇듯, 아내분도 아쉬움이 많이 남을 테니 우리들은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시간이 많이 남질 않았습니다. 어서 가 보세요. 저도 얘랑 둘이 있고 싶습니다.”

남자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거기 서 있던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아내는 뒤뜰 한 편에 걸음을 멈춘 채 남자가 있는 방 창문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이 깊었고, 아내의 얼굴은 그 어둠 속에 숨은 채 윤곽조차 흐릿했지만, 남자는 그녀의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또렷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슬픈 눈빛으로 남편을 부르고 있었다. 오래 묵은 호텔의 저주가 깨지고, 모든 영혼들이 약속된 곳으로 갈 수 있게끔 해방된 순간, 그녀는 남편이 있던 곳과, 그가 이제껏 해 온 일들과, 머지않아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모두 알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남자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와 뒤뜰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는 지 알 수 없었다.
뒤뜰로 향하는 문을 열자, 아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로 고개만 돌려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아내를 향해 달려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에 안았다. 온기 없는 아내의 몸은 철사처럼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두 가슴 사이에서 아이가 힘없이 옹알거렸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눈물 흘렸다.
아내가 말했다. 잘 도착한 거야? 남자는 대답했다. 응… 아내가 다시 말했다. 자동차는 고장 안 났고? 엔진오일 갈 때가 됐는데… 남자는 대답했다. 응… 아내는 다시 말했다. 또 어디 가? 남자는 대답했다. 아니, 안 가. 아무 데도 안 가. 아무 데도…
밤이 깊어갔다. 호텔의 모든 불빛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차갑고 마른 아내를 끌어안은 남자는 끝도 없이 눈물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무 데도 안 가. 아무 데도 안 간다고. 아무 데도…






지배인은 방문을 열었다. 언뜻 보기에 방은 깔끔해 보였다. 하지만 TV위에는 반쯤 피운 담뱃갑이 놓여 있었고 침대 시트가 묘하게 구겨졌으며 책상 위의 노트북도 살짝 기울여져 있었다. 지배인은 느릿느릿 걸어가 정리를 시작했다. 시트를 바르게 펴고 노트북을 책상 한 편으로 밀어놓고 가져온 행주로 책상을 닦았다. 먼지떨이를 꺼내 방 안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털어낸 지배인은 1층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식사를 들고 올라왔다. 빈 접시는 책상 아래에 들어가 있었다. 지배인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접시를 들고 TV 위의 담뱃갑을 아침식사가 담긴 접시 옆에 놓은 뒤 문으로 걸어갔다. 방문 밖에 선 그는 방 안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방문은 자동문처럼 스르륵, 말끔하게 닦인 바닥 위를 미끄러져 조용히 닫혔다. 아침을 맞은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 사방에서 아련하게 들려왔다. 한 뼘쯤 열린 창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들썩였다.
적막한 방 한가운데로 사막의 아침햇살이 가만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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