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4.1

2008.04.25 21:0704.25

stygia.tistory.commarulover@gmail.com  너라면 믿어줄 거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사실 이건 네 문제이기도 하니까.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듯, 단지 타이밍이 문제였어. 몇 년이나 복용해오던 우울증 약병이 하필이면 그날 아침에 텅 비어버렸고, 하필이면 그 순간 내 다리사이로 수도꼭지처럼 핏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던 데다, 또 하필이면 TV앞에 앉아 이혼 드라마의 재방송(그것도 이성적으로 판단해보면 정말이지 개연성이라고는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었는데도!)을 짓씹으며 투덜거린 직후였지. 그래, 하필이면 그 순간 현수가 평소의 나쁜 버릇을 드러내고 말았던 거야. 전화가 걸려왔어.(벨소리는 자우림이 부른 <글루미선데이>. 가수는 김윤아고 자우림은 밴드 이름이라고? 몰라. 난 아직도 둘이 헷갈려.) 빌어먹을 휴대전화. 세상의 전화란 전화는 다 난지도 밑거름으로 묻어 버려야 한다니까. 유비쿼터스는 엿이나 먹으라지. 그렇게 하지말라고 말했는데 왜 고쳐지질 않는거야, 그 나쁜 버릇은.
  응, 맞아. 남의 욕을 주구장창 늘어놓는 버릇 말야. 말이야 곱지. 대놓고 저질어휘를 난사해 대는건 아니니까. 아니, 차라리 그런게 낫겠다 싶어. 빙빙 돌려대면서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대체 자기 직장의 화장실 청소부 아줌마가 소변보는 다리사이로 대걸래질을 한게 나한테 무슨 책임이 있다고 내가 그 아줌마 대신 설교를 들어야 하는거야? 설교도 그냥 하면 몰라. 잘못은 자기가 다 했어요. 한숨도 푹푹 섞어가면서 그 아줌마한테는 한 마디도 못한 주제에 '수정아 내가 그 아줌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응?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거야?' 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중엔 양다리 걸친 여편네랑 헤어지고서 자기가 왜 헤어졌는지 나한테 물어보는 거 아닌가 몰라.
  음, 미안해. 감정이 조금 격해졌어. 아직 흥분이 가라앉질 않아서 그래. 내가 차갑고 냉철해서 별명이 얼음공주라는 거 알지만, 사람이 그런 일을 겪고서 어떻게 금방 평소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겠어? 돌아오려면 일주일, 아님 한달,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지. 그치만 그 덕에 당시 내 기분이 어땠는진 오히려 잘 전달된 것 같지? 난 그만큼 짜증이 났어. 그래서 그만
  “아 그만 좀 해.”
  하고 소리내어 말해버리고 만 거야. 응. 아주 조그맣게. 사실 웬만해선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어. 하지만 현수의 귀엔 들려버렸지. 불가항력이랄까, 특수 머피의 법칙이랄까, 사람이 원래 듣고싶지 않은 얘긴 귀에 쏙쏙 들어오잖아. 게다가 현수가 좀 예민한 남자잖니. 살짝 소심하기도 하고. 반응이 당장 돌아오는 타입이지.
“뭐? 너 뭐라고 했어? 니가 어떻게 나한테…”
  내 남자친구 심히 드라마틱하지? 주말 드라마랑 똑같잖아. 대사도 그렇고, 말 튀어나오는게 참 뜬금없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물론 거기선 여자들이 주로 하긴 하지. 오해하지마 나 남자랑 사귀는 거 맞으니까.
  참을 수는 없었느냐고? 그래, 그럴 수도 있었어. 그이의 버릇이 고약하긴 하지만 참을만 했으니까 3년이나 사귀어 온 것 아니겠니. 그정도 단점은 다 커버하고 남을만큼 현수는 착했고, 부지런했고, 키도 컸고, 잘생긴데다, 국민연금도 착실하게 내고 주택부금이며 종신보험까지 꼬박꼬박 넣고 있었지. 최소한 10년은, 아니면 3년이라도, 혹은 1년쯤? 그게 아니라도 적어도 하루쯤은 더 참을 수 있는 문제였어. 어쩌면 평생 참고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문제는 타이밍이야. 현수는 가랑이 사이를 비정규직에게 점령당해 자부심의 상처가 말이 아니었고, 나는 그런 그를 상대할만큼 여유롭지가 못했지. 돌봐야 할 내 상처만도 너무 많았어. 심지어 출혈까지 있었잖아 난. 나도 알아. 내 쌀쌀맞은 태도 하나 때문에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터져버렸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현수가 고작 그런일로 죽어버릴줄 대체 누가 알았겠냐구. 나는 네가 그 부분만큼은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봐.
  그래. 현수는 죽었어. 깔끔하게 목을 맸지. 두 발이 의자를 걷어찬 순간 목뼈가 부러져서 질식할 틈도 없이 즉사했어. 너무 높은 데서 뛰어내린 거지. 죽는 데엔 30초도 걸리지 않았을 거야.
  왜 죽은 거냐고?
  내가 말해버렸거든. “이제 그만 헤어지자.” 라고 말야. 정말로 그걸 원했는지는 모르겠어.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그 때의 나는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는 거야. 그런 흐름이었어. 현수는 안기부 지하실 심문관처럼 계속해서 과거를 하나하나 들쑤시며 ‘해준 것’과 ‘받은 것’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댔고(물론 나로 말하자면 부채가 자본을 다 먹어치울 만큼 받은 게 많았어. 그건 사실이야.), 나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로 일관했지.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하고 저 말을 내뱉어 버린거구. 차라리 모르쇠로 버틸걸 그랬어. ‘몰라요, 기억이 안납니다. 그치만 내가 해준 것도 꽤 많지 않았나요?’ 그런 식으로 대했음 현수 기분도 좀 나았을텐데. 그런 복잡한 사건으로 이어지지도 않았을 테구.
  문제는 거기서부터야. 전화를 끊고서 1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난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래, 솔직히 그런 말을 해버린 건 실수였다고 후회가 들기 시작했어. 난 불안해졌어. 다시 혼자가 된다는 것이, 앞으로 다시는 누군가 다른 사람을 곁에 두는 행운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기적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난 꼭 현수여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어. 그 순간 현수 아닌 누가 날 아끼고 좋아해 줄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면 내가 다시 집어든건 휴대전화가 아니라 TV리모컨이었을 거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손이 집어올린건 휴대전화였지.
  그래도 그렇다고 해서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끊자마자 바로 다시 전화해? 좀만 더 기다리면 그이가 먼저 전화해 올지도 모르는 거잖아. 그럼 무심한듯 쉬크하게 ‘그래 한번만 더 생각해 볼게.’ 하고 마지못해 승낙해 줄 수도 있는거고. 그런 마음에 1분만 더, 1분만 더, 가슴졸이며 나는 현수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어. 알아. 내가 나쁜년이야. 그렇게 짱구 굴리면서 권력타령 하는 동안 현수가 멀티탭의 구리 피복선을 목에 칭칭 감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면 나도 내가 미칠듯이 싫어지니까 그렇게 추궁하진 말아줘.
  결과가 어찌되었든 난 정말로 몰랐으니까.
  그렇게 30분이 흘렀어. 그제서야 나는 나쁜 낌새를 채고 통화버튼을 눌렀지.
  요즘 세상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이는 컬러링이 없어. 그게 오히려 컬러인 셈이지. 하지만 전화를 거는 입장에서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모를 거야.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가늠이 안되거든. 노래라면 대충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만 띠리리 소리가 몇번씩 반복되고 나면 내가 얼마나 기다린 건지 알 수가 없어. 이별과 재결합의 갈래에 선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그래서 대체 내가 몇번이나 전화를 걸었는지, 또 얼마나 그렇게 시간을 보낸건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마 꽤나 긴 시간이었을 거야. 혹은 1분이 채 안되었을지도 모르고.
  결국 전화를 포기한 나는 현수를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어.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입고 밖으로 나와서는, 급한 마음에 택시를 잡아 탔지. 물론 지하철 역 앞까지.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택시를 타고가긴 좀 그렇잖아. 물론 현수가 목을 매고 있는 줄 알았다면 택시 아니라 KTX라도 타고 갔겠지만, 생각해봐, 그 때의 난 아직 그이가 자살할 거라곤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고. 게다가 솔직히 이런 말 하긴 좀 부끄럽지만 내 지갑엔 육천칠백원밖에 없었어. 놀고먹는 백수 신세가 다 그렇지 뭐.
  동인천에서 도곡동까지 지하철로 얼마나 걸리는 지 아니? 네이버에서 찾아보면 열차가 달리는 시간만 자그마치 86분이래. 거기다 환승을 두번이나 하지, 사이사이 열차 기다리는 시간은 또 어떻구. 넉넉잡아 두시간은 봐야 할거야. 역앞까지 택시를 잡아타고 갔다해도 말야. 그 시간은 또 얼마나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지. 게다가 머리도 못 감아서 부스스하지, 화장도 못해, 몸 상태는 말도 아니고, 심장은 점점 쿵쾅거려서 정신 사납게 하지…
  가는 동안 정말 별별 생각을 다 했어. 삐친거면 어떡할까, 어떤 애교로 풀어줘야 하려나, 선물이 나을까, 선물은 뭐가 좋을까(그제서야 지갑에 돈이 텅텅 비었단 걸 알았어), 정말 이렇게 찾아가도 괜찮은 건가, 아니 아니 계속 사귀는게 정말 옳은 선택일까 등등. 솔직히 설마 자살이라도 저지르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 스치는 상상에 불과했지만 말야.
  금요일 퇴근길의 2호선이 그렇게 북적이는지 난 그날 처음 알았어. 심지어 환승 구간에선 사람들이 디스토피아 영화의 노예시민 뺨치는 동작으로 척척 열을 맞춰 걷더라. 내가 그 사이에 끼어서 숨도 못 쉬고 끌려다닌 건 말할 것도 없구.
  그래도 결국 도곡역에 도착했지. 응. 그이는 도곡동에 살아. 그치만 현수가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건 아냐. 그 애가 사는 곳은 그냥 자그마한 원룸이거든. 그것도 구룡마을 판자촌에 접한 허름한 빌딩 한 층을 쪼개고 개조해서 만든… 응? 알고 있었어? 그래. 그랬겠지. 네가 현수에 대해 모를 리가 없지. 널 현수와 떼어놓고 생각해선 안되는건데. 몰입하다 보니 잠깐 잊고 있었어.
  아무튼 그렇게 현수네 집까지 도착했어.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기에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열었지. 나한테 맡아둔 열쇠가 하나 있었어. 그이는 그냥 열쇠를 잃어버린 줄로만 알겠지만 하여튼 그런게 하나 있었어.
  그리고 봤어. 문을 열자마자. 현수가, 그 애가, 거짓말처럼 허공에 떠서 날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말야. 그래. 멀티탭으로 만든 매듭의 내구성과 천정에 박힌 옷걸이용 강철봉의 지지력으로 떠 있었지. 하지만 그 순간엔 그런게 보이지 않았어. 정말이야. 제정신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고, 너무 제정신이어서 자살이나 죽음 같은 개념보다는 카퍼필드의 공중부양 마술쇼가 더 친숙했는지도 모르지.
  그애가 죽었다는걸 안건 그로부터 1분 정도가 흐른 후야.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고, 발 언저리에 닿은 축축한 액체를 손으로 찍어 누린내를 맡은 다음에서야 비로소 하얀 피복선이 목에 감긴게 보이더라. 그 이상은 묻지 마. 나 정말 끔찍한 기분이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야. 단지 현수가 죽었단 말을 전할 거라면 얘기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거라면 경찰서에서도 지겨울 만큼 했고, 또 아무리 봐도 변명으로 밖에 안 들리는 이런 이야기를 굳이 네게 할 이유도 없잖아. 난 현수의 죽음이 내 책임이라며 호들갑에 오만상 찌푸리며 죄를 구제받고싶은 바보가 아니야. 그리고 이런 이야기로 널 괴롭혀 쾌감을 얻으려는 새디스틱한 여자도 아니고.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후로 일어난 사건들이고, 또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에 관해서야. 그래. 중요한 건 앞으로도 또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야. 그것도 세상 모든 사람에게, 그중에서도 특히 너와 내게 깊이 관계된 일이지. 그래, 네 말처럼 오늘이 월요일이니 지난 주말동안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되겠다.
  금요일 밤엔 정말 지지리 시달렸어. 내가 최초 발견자인건지 살해 용의자인건지 모르겠더라. 하긴 김X일 만화같은데 보면 최초 발견자가 용의자일 확률이 가장 높다고 그러잖아. 아무튼 내가 네게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3배정도 더 자세하게, 그것도 사이사이 꼬치꼬치 캐물어가며 딴지거는 형사들에게 둘러쌓여서 이야기해야 했어. ‘자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고, 아가씨’ 소리도 세번정도 들은 것 같아.
  취조가 끝나니까 12시가 훌쩍 넘었더라. 그냥 뛰쳐나가려다가 돌아서서 택시비가 없다고 하니까 순경 한명이 순찰차로 집 앞까지 태워줬어. 다행히 집엔 아무도 없었어. 난 그날 아침에 부모님이 동남아로 2박 3일 단체 계모임 여행을 떠난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 덕에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현수를 만나온 일에 대한 변명거리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단 점도 있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그것보다는 부모님이 ‘그것들’의 습격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이 가장 커.
  그래. 그날 밤 ‘그것들’이 우리 집에 침입해왔어. 침입이니 습격이니, 너무 거창하고 만화같고 유치한 어휘라는 거 알아. 하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걸. 그렇다고 그런 일을 ‘도둑이 들었어.’ 라고 표현할 수는 없는 거잖아. 알아. 궁금해도 좀 참고 들어봐. 곧 전부 알게 될 테니까. 그래 아니야. 만화 얘기나 꿈 얘기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참고 좀 들어. 부탁이야.
  하아.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아 그래, ‘그것들’이 침입해왔어. 난 잠들지 못하고 그저 침대에 누운채 뒤척대고 있었는데 무르벨라랑 다르위가(우리집에서 기르는 고양이 이름이야. 분양받을 때 한창 읽던 소설에서 이름을 따왔지.) 자꾸만 그르렁 그르렁 내 신경을 긁어대는거야. 처음엔 그냥 또 둘이 티격대는 건가 싶어서,
  “얘들아 좀 조용히 해 줄래?”
  하고 중얼거리고는 말았는데, 몇 분이 지나도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더니, 조금 더 지나니까 반대로 울음소리가 갑자기 툭 끊어져 버린거야. 고양이가 좀 변덕스러운 동물이긴 하지만 쩌렁쩌렁 울리던 울음이 갑자기 딱 사라지면 누구라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지 않겠어? 기분이 이상하니까 왠지 덜컥덜컥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왠지 그게 발자국 소리인 것도 같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정말로 발자국 소리였어. ‘그것들’이 내는 발자국 소리였지.
  나는 천천히 이불을 걷어올리고 침대에 일어나 앉았어. 본능적으로 항상 머리맡에 세워두는 새빨간 야구배트에 손을 뻗었지. 그러고는 천천히 바닥에 발을 대고 일어서서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어. 땀 채인 발바닥이 쩍 쩍 소리내는게 얼마나 신경쓰이던지. ‘그것들’이 귀가 조금만 밝았어도 난 거기서 끝이었을거야.
  그러고 나선 문고리에 매달아놓은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내들었지. 10cm쯤 열린 틈새로 소리가 들리진 않는지 주의를 기울이면서 말이야. 그 다음엔 조심스럽게 슬라이드를 밀어올리고, 1, 1, 2, 통화버튼. 그리고 신호가 한번 울리기도 전에 바로 슬라이드를 내렸어. 그럼 나중에 언제든지 통화버튼만 누르면 되잖아. 그 순간에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던 건 현수가 평소에 “별 걱정을 다하시네.” 하고 비웃어대던 내 걱정병 덕분일거야. 집에 강도가 들었을 때의 매뉴얼 같은건 머릿속에서 노트 몇 권은 준비해 뒀었으니까.
  준비를 마치고 난 천천히 문을 열었어. 끼이이 소리가 들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캄캄한 어둠속에 날 무방비로 노출시킨다는 기분이 썩 즐거운건 아니었어. 심장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오그라드는 것 같고, 숨 대신 침만 꼴깍꼴깍 넘어가지, 눈 앞의 문을 열어제쳤는데 왜 등 뒤에서 뭐가 튀어나올것만 같은건지 뒤통수가 시큰시큰 저려오지… 그러다 마음의 준비보다도 먼저 내 몸이 움직였어. 문고리 옆에 있던 형광등 스위치를 반사적으로 켠거야. 순식간에 방 안이 새하얘졌어. 환한 불빛이 문틈을 따라 일자로 쭈욱 거실을 밝혔지.
  그리고 봤어. 누군가의 발 뒤꿈치가 종종걸음으로 밝은 영역을 지나 어둠속으로 스르르 사라지는 걸 말야.
  나는 그자리에서 뒤로 자빠졌어. ‘소스라치게 놀랐다.’같은 진부한 표현을 쓰고 싶진 않지만 난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어. 손을 부들부들 떨어대느라 핸드폰을 놓쳐버렸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려고 했어. 하지만 자꾸만 헛손질에 더 멀리 튕겨나가기만 했지.
  가까스로 전화를 붙잡아서는, 그대로 통화버튼을 누르려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쐐애애애애 소리가 나더니 뭔가… 기분나쁜 뭔가가 날 덮쳤어. 그래, 꼭 무슨 괴물도마뱀 울음소리 같더라니까. 내 표현이 어설픈게 아니라 정말로 그런 쉰소리가 났어. 놀란 나는 꺄아아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면서 미친년마냥 양 팔을 휘둘렀어.
  그래. 네 말처럼 난 여전히 배트를 쥐고 있었어. ‘그것’의 머리에 정통으로 배트가 맞았어. 아픈건 아는지 ‘그게’ 힘을 잃고 풀썩 바닥에 자빠져서 버둥거렸어. 그리고 거실에서도 쿵쾅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는데, 놀라서 돌아보니까 까만 실루엣들이 점점 멀어져갔어. 도자기며 베란다 창유리며 와장창 깨지는 소리도 들렸어. 둘? 셋? 그 정도 숫자였을거야. 못믿겠다면 이리와서 거실을 봐. 그 때 어질러진 그대로니까.
  …저기 고양이 시체도 그대로 있으니까.
  난 다시 전화를 집어들었어. 통화버튼을 눌러서 귀에 대고는 문득 발 아래를 보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믿지 못하겠지만, 발 아래에 누운 ‘그건’, 그 괴물 같은 소리를 뿜어대던 그건, 그냥 평범한 할머니였어. 그냥 평범한 할머니. 요 앞 사거리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나 팔 것 같이 좀 째째하지만 인자하게 생긴 그런 평범한 할머니 말야.
  웃지마. 난 심각하니까. 어쨌든 그건 사람이 아니었다고.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이었어. 하필 뒤집어쓴 가면이 무척이나 착하고 정감있게 생겼을 뿐이야. 살인범이 김태희나 고소영 얼굴을 뒤집어 썼다고 용서가 되는 건 아니잖아. …개중엔 용서가 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아냐. 아니, 이쁘니까 더 나쁘다고.
  자꾸 말 끊지 좀 마.
  그래서 난 또 다시 휴대전화의 슬라이드를 닫았어.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안녕하세요. 범죄와 사건 어쩌구 블라블라…” 말소리가 탈칵 소리와 함께 끊어졌어.
  어쩔 수 없었어. 너라면 집안에 널브러진 유리조각과 고양이 시체와 야구 배트에 얻어맞고 기절한 할머니에 대해서 경찰에게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겠어? 더욱이 할머니에게 배트를 휘두른 건 나였다고 말할 수 있겠냐고. 그것도 바로 몇시간 전에 타살이 의심되는 자살로 추정되는 애인의 시체를 최초로 발견한 여자의 입으로 말이야. 집 꼴이 대체 왜 이렇게 됐는지 나조차도 이해가 안되는데 누가 납득하겠어?
  그래.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컸어. 대체 우리집에 침입한 사람들이(적어도 그때까진 ‘그게’ 사람일거라고 생각했어.) 누군지, 왜 하필 우리집인지, 또 왜 하필 현수가 죽은 날 이런 일이 겹쳐 일어난건지. 두 일이 따로따로 일어났다면, 또 내가 평소처럼 냉정한 얼음모드였다면 뒤숭숭한 사회의 구조적 결함이 일으킨 노인절도범 정도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겠지만, 그 때의 나는 그럴 수 없었어. 아까도 말했듯이 난 제대로 된 컨디션이 아니었고, 게다가 현수의 시체에 대한 기억이 머리에 박혀서 정신이 없기도 했었으니까. 냉철하게 판단해보는 대신 난 그저 “뭐야 이거…” 하고 반복해서 중얼거릴 뿐이었어.
  그래도 어떻게든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정도는 있었어. 그 할머니가 누구인지는 차치해 두더라도 어쨌든 그 노인네가 우리 집에 숨어들어왔다는 점에서는 틀림이 없는데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쐐애애애애 소리가 난 마음에 걸렸어. 정신병이든 좀비바이러스든 간에 그게 굉장히 위험한 소리라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 할머니인지 뭔지 모를 몸뚱이를 지하창고에 가둬두기로 했어. 나는 거실에 있는 지하실 문을 열고는 ‘그것’의 양 겨드랑이 부근의 옷을 움켜쥐고 질질 끌고 내려가기 시작했지. 그게 얼마나 무서웠는지 넌 모를거야. 갑자기 눈이라도 번쩍 뜨진 않을까, 그게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오히려 날 지하실에 가두고 도망치면 어떡할까 별별 상상에 미칠듯이 심장이 뛰어댔어. 응. 다행히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난 성공적으로 그걸 지하실에 처박아둔 구식 듀X백 의자에 앉힐 수 있었지. 그리고는 근처에 있던 노끈이며 청테이프로 칭칭칭칭 감아서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렸어.
  정말 바보같지만 난 그제서야 할머니가 죽은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어. 확인해봐야겠는데 도저히 입가에 귀는 못대겠고, 손목은 청테이프로 칭칭 감겨있어서 하는 수 없이 영화에서 킬러들이 하는 것처럼 목덜미에 손을 갖다 댔어. 미끄덩한 피부 감촉이 느낌이 좀 더럽더라. 얼굴기름을 나흘정도 안씻은 콧잔등을 만지는 기분 같았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그리고 손에 뭔가 꿈틀 꿈틀 움직이는 게 느껴졌어. ‘그건’ 분명 아직 살아있었어.
  나는 거실로 올라와서 일단 문단속을 했어. 현관문도 다시 확인하고, 거실의 깨진 창은 쇠창살 커튼으로 누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지. 1층 2층 돌면서 열린 창문이란 창문을 전부 잠근 건 말할 것도 없구.
  모든게 확실해 진 다음에 다시 지하실 문을 열고 내려갔어. 그때까지도 여전히 난 빨간색 야구배트를 손에 꼭 쥐고 있었던 것 같아. 그제서야 계단 한켠에 배트를 내려놓은 기억이 나. 그게 고개를 조금 움직였거든. 그래서 난 천천히 다가가서 상태를 살폈지. 그건 확실하게 눈을 꿈벅이고 있었어.
  “이봐요… 할머니는 대체…”
  쐐애애애애애
  그 빌어먹을 울음소리 정말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어. 그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려는 내 손을 깨물려고 했거든. 틀니를 잃어버려서 이도 없는데 말야. 날 노려보는 눈빛에 위협이 느껴질 정도였어. 듀X백 의자에 청테이프 한 개를 다 감아두었는데도 말야.
  “다, 당신 대체 뭐야?”
  쐐애애 쐐애애애애
  자꾸 발작을 하며 온몸을 들썩들썩대기에 나는 그만, 반사적으로 뺨을 후려갈겼어. 모르겠어 내가 왜 그랬는지. 무서워서 그랬을 수도 있고, 그냥 학창시절 버릇이 나와버린 건지도 모르지. 이제는 껌도 안씹고 술담배도 끊었는데 그건 왜 사라지지 않는건지… 흠, 흠, 아무튼 그건 그제서야 좀 잠잠해졌어.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지. 아, 이야기라는 건 그러니까 한국어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나 지구인말 잘 못한다.”
  …솔직히 좀 화가났어.
  “그럼 어느별 말이 자신있는데?”
  빈정대는 내 질문에 ‘그건’ 너무나도 진지하게 대답했어.
  쐐애애애애애.
  자음과 모음이 하나뿐인 언어인가봐.
  “빠, 빵상?”
  쐐애애애애애.
  “까, 깐따삐아?”
  쐐애애애애애.
  그래, 언제나 그렇듯 타자와의 소통은 꿈일 뿐이지. 좀 어처구니가 없어서 난 다시 한번 뺨을 후려갈겼어. 그래, 할머니 얼굴을 했든 어쨌든 상관없이 말야. 다시 말하지만 김태희나 고소영 얼굴이었으면 주먹으로 때렸을지도 몰라. 난 이쁜척하는 것들이 싫어.
  “한국말로 해요. 한국 말로.”
  “나 지구인말 잘 못한다.”
  “잘 하네? 지금.”
  “나 지구인말 잘 못한다.”
  찰싹.
  “아프다.”
  “아프라고 때리지 그럼 느끼라고 때릴까.”
  찰싹.
  쐐애애애애애.
  “아… 역시 경찰을 불러야겠어.”
  그렇게 허세를 부리며 핸드폰을 꺼내려는데 다시 한번 쐐애애애 소리가 들렸어. 그건 의자에 묶인 녀석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어.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지. 또 한번 쐐애애 소리가 들리고, 또 들리고, 왼쪽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오른쪽에서 들리고,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그제서야 생각이 닿았어. 엄한 곳 다 잠근 주제에 바보같이 지하실 통풍창을 하나도 잠그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야. 정말 바보 같은 일이지.
  뒤돌아서서 세워둔 배트를 집어드는 순간 뭔가가 지하실 안으로 뛰어내렸어. 나는 “으아아아” 소리치면서 그놈을 향해 뛰어가려는데, 반대방향에서 또 뭔가가 안으로 뛰어내리는 기척이 났어. 그리고 또 하나가. 그러고 또 하나가. 다해서 몇이나 나타났는진 모르겠어. 중간쯤부턴 헤아리는걸 포기하고 거실로 뛰쳐올라갔으니까.
  하지만 결국 도망치지 못했어. 멍청하게 계단에 발이 걸려서 자빠졌거든. 다시 일어서는 순간 뭔가에 뒤통수를 얻어맞았어. 현실은 영화랑은 다른가봐. 뒤통수를 맞으면 기절한다는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난 쌩쌩하게 깬 정신으로 바닥에 쓰러졌어. 그리고 다시 일어설 틈도 없이 ‘그것들’이 내 몸 위로 덮쳐들었어. 난 무게에 짓눌려서 꼼짝도 할 수 없었어. 그래도 억지로 억지로 팔을 빼내고 미친듯이 저항했지만 금새 눈이며 코며 입이며 다 틀어막혀서는 이불보따리 같은 거에 감싸여 버렸지.
  보쌈당하는 여자가 딱 그런기분일거야. 이불안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조금이라도 더 산소를 마시려고 헥헥대는 일밖에 없고, 대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대체 누가 이러는 건지도 모르지. 자유를 박탈당한채 아무런 정보도 없이 어딘가로 끌려간다는건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어. 혹여라도 이벤트를 한답시고 여자를 보쌈싸서 프러포즈하는 남자가 나타난다면 난 보답으로 그 놈 목을 졸라버릴 거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보따리 밖으로 얼굴을 내민 곳은 어느 허름한 방 안이었어. 도배가 벗겨진 벽에 금이 가있고, 조명이라곤 어둑어둑한 화장실 전구 하나가 전부에, 천정에선 비도 안 내리는데 물이 주륵주륵 새고있는 그런 곳이었지. 바닥엔 양동이며 세숫대야며 물 담긴 그릇이 합쳐서 다섯 개나 놓여있었어. 그리고 내게 뒤집어씌운 보따리는 정말로 이불보였어.
  그리고 주변엔 그것들이 잔뜩 모여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어. 쐐앵쐐애애 거리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 그리고 TV를 보고 있었어. TV하나에 열명 넘게 달라붙어서는 극적인 장면마다 쐐애애- 쐐애애- 입모아 소리쳐 대는 게 꼭 S전자 광고 같은 모습이었지. 또 하나의 어쩌구 하는 거 있잖아.
  그리고 악수. 왜 그렇게들 악수를 해대는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방을 들락거렸는데, 꼭 인사를 하고 나면 그들은 악수를 나눴어. 그건 거의 집착에 가까웠지. 심지어는 강제로 악수를 시킨 다음에야 내보내 주기도 했어. 그들의 입에서 간간히 한국어 문장이 튀어나오기도 했는데, 내가 생각하기엔 아마 TV를 통해서 배운 것 같아. 왜냐면 놈들의 말투가 성대모사 수준이었거든. 한 놈은 정말 어조가 이순재랑 똑같았어.
  그들은 치과의자 같은 곳에 날 눕히고는 팔다리를 묶어버렸어. 그래 정신병원의 찍찍이 달린 그걸로. 누가 리모컨 같은걸 건드리니까 의자가 뒤로 젖혀지기 시작했어. 그래, 치과처럼 말야. 그래, 드릴도 가져왔어. 나 심각하니까 묻지말고 그냥 들어주면 안돼? 응. 고마워.
  그놈들은 정말로 드릴을 가져왔어. 합판같은데 구멍 뚫는 공업용 드릴말야. 한놈이 내 눈앞에서 시험삼아 그걸 몇 번씩 켰다가 껐다가 했는데, 돌아가는 모양새를 직접 보니까 정말로 뭐든 구멍을 낼 수 있을 것 같았어. 잠시 뒤 그놈은 자리를 옮겨서 내 머리 위, 의자 뒤쪽으로 가서 섰지. 그러곤 다시 또 드릴을 켰다가 껐다 하기를 반복했어. 위이이잉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불안에 이를 꽉 깨물었지.
  그리고 위이잉 소리가 좀 길게 이어진다는 생각을 한 순간, 가가가가가각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어. 그건 귀에 들린 소리가 아니라 두개골이 그 자체로 진동하는 소리였지. 그래. 놈은 내 머리통에 구멍을 냈어. 충치가 아니라 정수리에 드릴을 찌른거지. 비명도 지를 수 없었어. 뇌를 휘저어져서 그런건지도 모르지.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입은 미친듯이 비명을 지르는데 정작 목구멍으로는 새우깡 쥐토막만한 소리도 안튀어나오는거야. 그러는 와중에도 머리통엔 가가가각 치과 드릴이 이빨 갈 때 울리는 소리가 열배쯤 크게 울리고 있었어.
  소리가 멈추는듯 싶더니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또 구멍 뚫는 소리가 들리고, 또 멈추는 듯 싶더니 소리가 들리고, 다섯번인지 여섯번인지 반복한 다음에야 놈들은 내 머리통에 구멍내는 일을 멈췄어. 그제서야 비명이 튀어나왔어. 나는 미친년처럼 한참동안 비명을 질러댔어. 조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 앞의 거울에 비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울고 있었어. 나는 놀라서 흑흑대느라 숨도 못 쉴 정도였어. 눈물이며 콧물이며 침이며 줄줄 흘러내려서 화장이 엉망으로 뭉개졌고, 또 흘러내린 피줄기가 말라붙어서 가로 세로로 검붉은 선이 죽죽 그어져 있었어.
  사람이란 정말 무서운 것 같아. 그런 상황에도 결국은 천천히 적응하게 되니까. 자꾸만 쳐다보니 거울 속 내 모습도 점차 익숙해져 가고, 주변 상황도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어. 생각 외로 상처가 작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피가 줄줄 흘러나온 거에 비해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어.
  그리고 호흡이 가라앉으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
  그저 ㅆㅙㄱㅆㅙㄱ거리는 소리로만 들리던 그것들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한거야. 그리고 그들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그들의 정체. 계획. 어처구니 없는 진실. 외계인 침공. 신체강탈자. 그 이유. 수단으로서의 문화. 아무튼 그들이 내게 원하는 것. 머리에 박힌 칩. 칩의 효능. 잠시 뒤에 활성화 될 칩의 진짜 기능. 그 전부를 듣고 알 수 있었어. 그리고 더 끔찍한 기분이 되었지.
  내 얘기가 조금 복잡해? 다시 간단하게 한번 정리해보자. 나는 좀 컨디션이 나빴어. 그래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고, 타이밍 나쁘게 현수가 내게 전화를 했어. 그리고 난 그 애에게 매정하게 굴고 말았지. 응. 내가 나빴어. 그래서 현수가 목을 매고 죽었어.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정체모를 것들에게 습격을 받았지. 쐐애애애애 소리로 울어대는 할머니의 탈을 쓴 바디스내처 외계인에게 말야.
  그래. 그것들은 태양계 밖에서 왔어. 그리고 인간의 탈을 뒤집어썼지.
  그들의 목적은 ‘순수’라고 불리우는 범 우주적인 사상을 인간들에게 전파하는 거야. 정확하게는 <낙후된 제3세계 행성에 ‘순수’의 복음을 전파하고 물적, 정신적 봉사지원활동으로 우주적으로 교단의 명성을 높이는> 데 있어. 기왕이면 낙후되고 문명의 빛을 덜 받은 곳이 좋아.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더 좋고. 아프간 다녀온 샘물교회 같은거지.
  사실 ‘순수’는 사상이라기 보다는 종교에 가까워. 그들은 광신적으로 ‘순수’를 전파해. 어떻게 ‘순수’하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 ‘순수한 선’일지도 모르고, ‘순수한 악’인지도 모르지. 혹은 ‘순수한 사과젤리 조제법’을 전파하는 건지도 모르고. 아무튼 그들이 전파하는 종교의 이름은 ‘순수’야. 무슨 미네랄 워터 이름이 아니라 순수하다 할 때 순수 말야. 응. 영어로 퓌어인지 휴어인지 아무튼 P.u.r.e라고 쓰는 그거.
  종교 나부랭이가 뭐가 위험하느냐고? 단지 포교활동이라면 문제가 없겠지. 18세기의 기독교를 생각 하면 이해가 될거야. 그들의 의도는 그 이름처럼 순수하게 ‘순수’를 전파하는 데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사회가 모두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어. 언젠가 차츰 종교가 아닌 기술과 문화를 들여와 깊은 곳까지 침식할지도 몰라.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순수’가 종교인 동시에 생명체이기도 하다는 점이야. ‘순수’는 단지 정신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아. 어떤 견해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물리적이고 생물적인 실체를 지니지. 쉽게 말해서 그건 우리의 육체를 변화시켜. 일종의 바이러스지. ‘일종의’는 비유라는 뜻이 아냐. 정말로 그건, 바이러스야.
  우주의 종교가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순수’는 육체를 통해 전파되고, 세포를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해. 전파라기 보다는 전염이라고 부르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정신이 교정돼. 오직 ‘순수’의 전파만을 생각하는 교단의 충실한 종이 되는거지.
  그래, 무슨 뜻인지 알아. 그건 전파가 아니라 생식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에일리언 유충이 새끼를 까는 거나 다름 없으니까 말야. 그게 인간의 시각이고, 인간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게 옳을거야. 하지만 봐, 그들은 육체와 정신이 조금 변화했을 뿐이지 여전히 자기만의 추억과 관점을 가진 존재라구. 난 해석의 여지에 따라 그걸 전도행위라고도 정의할 수 있을거라고 봐.
  그걸 죄라고 생각하는 건 인간의 시각이지. 은하계 사회에선 육체에 손괴를 입히는 일이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아무런 죄가 안될지도 모르잖아? 아니, 폭력을 옹호하는게 아니야. 단지 그들이 우리와는 심각하게 다르다는걸 말하고 싶을 뿐이야. 나도 그게 옳다고는 생각 안 해. 역앞에서 확성기 들고 떠들어대는 아줌마 아저씨 나도 너만큼이나 많이 싫어해.
  그런 내용들이 바로 여기 쓰여있어. 그들로부터 도망쳐 나올 때 훔쳐온 문서야. 보기엔 좀 복잡한 지혜의 고리 퍼즐 장난감 같지만, 이게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야. 이런 이런 문양들을 조합해서 문장도 만들고 문서도 만들고 그러는거지.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할 만큼 효율이 좋아. 손바닥에 올려놓은 고리 일곱 개로 A4 열여섯 페이지짜리 여행 계획서가 만들어지니까.
  그리고 난 직접 봤어. 그들의 ‘전도’가 이루어 지는 장면을 말야.
  내가 납치당한지 열 시간쯤 지나서… 그러니까 아마 토요일 오후 두시나 세시쯤 됐을거야. 그 때쯤 누군가 방으로 끌려들어왔어. 전날 ‘악수’를 나눴던 사람들 중 하나였지.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양 쪽에서 붙잡고 억지로 데려온 것 같았어. 싫은 사람을 강제로 납치해 왔다기 보다는 몸을 가누지도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부축받는 모양새랄까, 그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을 거야. 완전히 정신을 잃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어.
  그리고 그의 모습을 본 ‘그것들’은 그를 나처럼 의자에 앉히고 팔 다리를 묶었어. 그러고 한 5분쯤 지나자 그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지. 입에선 거품이 쏟아지고 손가락은 미친듯이 흐느적댔어. 그리고 그의 손가락과 손톱 사이의 틈으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어. 나도 묶여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발에서도 똑 같은 일이 벌어졌을거라 생각해. 놈들이 그의 발 아래에 양동이를 가져다 놓았던 게 기억나.
  ‘순수’는 물을 끔찍하게 싫어하나봐. 그는 금새 미이라처럼 말라가기 시작했어. 그리고 충분히 말라붙었을 즈음, 놈들은 물이 빠져나간 빈 자리, 혈액을 흐르게 할 용매를 다시 채워넣기 시작했어. 용매는 식용유였어. 1.8L짜리 식용유, 그것도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한통을 그의 입에다 부은거지. 꿀꺽꿀꺽꿀꺽꿀꺽 엄마 젖빠는 아기처럼 식용유를 마셔대는 그 모습이 얼마나 끔찍하던지. 으… 그 장면만 생각하면 아직도 구역질이 나. 실제로 그 순간 내 머리 위엔 구토하는 홀로그램 영상이 나타났었어. 내 머릿속에 박힌 칩이 그려낸 이미지였지.
  음… 아직 그 이야길 못했구나.
  놈들이 내 머리통에 구멍을 뚫은건 뇌에 전자칩을 박기 위해서였어. 그리고 그 칩은 내 머릿속을 살펴보기 위한 두가지 기능을 탑재하고 있지. 첫째로는 그들과 나 사이의 언어를 번역하는 거고, 둘째는 바로 그 망할 홀로그램 기능이야.
  칩이 머리에 박힌지 세 시간쯤 지나니까 처음으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어. 마침 내가 목매단 현수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 순간 내 머리 위 30cm쯤에 현수가 나타난 거야. 방 안에 목을 맨 시체의 모습으로 말야. 그걸 올려다보며 놈들이 말했어. 머릿속 칩이 그 내용을 번역해 주었지.
  드디어 작동되는군.
  이제 비밀을 밝혀낼 수 있다.
  비밀. 비밀. 비밀.
  저것의 능력.
  능력. 능력. 능력.
  그들 중 하나가 내 곁으로 다가왔어. 그리고 말했지.
  저거 어떻게 죽였나.
  “저, 저건 대체 뭐야? 왜 현수 시체가 여기…”
  저거 어떻게 죽였나.
  “안 죽였어! 안 죽였다고!”
  도덕이 뭔지. 그 순간에도 내 책임 아니라고 변명이나 해대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한심하다고 느껴. 하지만 놈들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계속해서 ‘저거 어떻게 죽였나.’ 하고 추궁해댔지. 어쩌면 그 말이 옳을지도 몰라. 현수를 죽인게 나라고 말해도 꼭 틀린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결국 내 책임여하 같은건 현수의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현실 앞에선 보기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잡다한 문제일 뿐이야.
  그때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아. 그게 내 책임이라고, 내가 죽인거라고 말야. 놈은 계속해서 물었지.
  저거 어떻게 죽였나.
  난 놈의 말에 반응해서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어. 그래. 텅 빈 약병부터, 생리혈이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을 내려다 본 기억도, 현수의 전화도, 그리고 대화 내용도 낱말 하나하나까지 샅샅이 떠오르더라.
  그리고 그 장면 하나하나가 내 주위에 펼쳐졌어. 바닥에 엎드려서 통화하는 내 모습을 봤어. 현수한테 “뭐 어쩌라고?”하며 소리치던 모습도 봤고, 전화를 끊고 나서 리모컨을 집을까 전화를 집을까 손 끝이 왔다 갔다 거리는 모습도 봤어. 정말 나쁜년이야 난.
  아무튼 그제서야 원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 내 머릿속에 박힌 그건 일종의 영사기였어. 내가 생각하는 것, 기억하는 것, 아무튼 머리통에서 흘러다니는 이미지들을 시각화 해서 주변에 투사하는 거지. 물론 그건 그냥 홀로그램이야. 유령처럼 둥둥 떠다닐 뿐 남의 머리털 한 가닥 못 뽑아.
  그러고나니 놈들이 왜 날 납치했는지, 왜 이런걸 머리통에 쑤셔박아 놨는지도 조금 알 것 같았어. 놈들은 궁금했던 거야. 어떻게 말 한두마디로 사람이 죽을 수 있는지를 말야. ‘사랑’이라는 개념이 놈들에겐 없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집착’이 없는지도 모르고, 그도 아니면 ‘절망’이나 ‘자살’이라는 개념이 없는지도 몰라. 아무튼 그들에겐 우리가 가진 어떤 개념이 결여되어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현수를 죽인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마 그것들은 현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 같아. 다음 ‘포교’대상자로 말야.
  지금쯤이면 너도 추측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본거지를 튼 곳은 구룡마을이야. 도곡동 알짜배기 땅 한가운데 있는 미스터리한 판자촌이지. 그들이 왜 그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여기 계획서에 쓰여있어. 지혜의 고리가 아니라니까. 그래. 나 안미쳤어.
  놈들(최초의 ‘그것들’ 다시 말해 진짜 외계인들은 다섯 정도였던 것 같아. 그리고 그들 중 하나는 알다시피 우리 집 지하실에 갇혔던 놈이지.)은 인간의 몸을 하고 서울시에 내려왔어. 그리고 ‘포교’를 하려고 했지. ‘순수’가 전염되는건 아마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서인 것 같아. 그것도 손바닥과 손바닥의 접촉, 악수를 통해서라고 생각해. 이틀동안 방 안에 끌려와 ‘전도’당한 사람들은 모두 그 전날 찾아와 악수를 했던 사람들이었어. 악수가 분명해. 하지만 너도 한번 생각해봐. 요즘 세상에 서울 한복판에서 생전 처음 보는 남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좀 머리가 돈 노숙자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일걸.
  게다가 생각외로 서울 시내에 폐쇄적인 공간은 많지 않아. 가족 정도의 소규모 레벨에서는 소통이 덜 될지 몰라도 수백명 단위로 묶기만 해도 외부와 단절되기란 쉽지 않지. 하다못해 신문 배달이나 택배정도는 받을 테니까 말야. 그렇다고 억지로 ‘순수’를 전파했다가 금새 외부에 발각되기라도 하면 개개인이 정신병자로 몰려 감금되거나, 혹은 진실이 밝혀져 일대 파란을 일으키게 될테고, 그럼 그들의 ‘포교활동’은 숫적 열세에 몰려 굉장히 힘들어 지겠지.
  그들에게는 충분한 숫자의 ‘신도’가 모일 때까지 외부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그런 마을이 필요했어. 그렇게 찾고 찾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구룡마을이구.
  하지만 구룡마을은 대부분의 거주자가 노인이거나 장애인인 곳이기도 해.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물리적인 전투력이 부족했어. 그래서 애초의 계획처럼 숫자를 충분히 확보하고도 폭동처럼 떼로 몰려다니며 사람들의 몸을 강탈해대지 못했던 것 같아. 할머니 할아버지의 그런 성치 못한 몸으론 몇 걸음 달리기도 전에 관절염땜에 무릎이 쑤셔서 바닥에 나앉아 버리고 말테니까 말야. 현실이 항상 영화처럼 되진 않는 법이지.
  그런 그들의 입장에선 건장한 20대 청년의 몸이 하나라도 아쉬웠을 거야. 게다가 친구도 적고, 본거지 근처의 외진 원룸에 살기까지 하니 그들에겐 최적의 숙주였겠지. 그런 귀하디 귀한 숙주를 관찰하는 도중에 내가 끼어들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죽여버린 거야.
  그 결과가 이거지.
  저거 어떻게 죽였나.
  놈들은 내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홀로그램 영상을 보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어. 아마도 그렇겠지. 사랑이니, 애증이니 하는 것들이 그리 호락호락한 개념은 아니잖아. 인간 중에서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태반인데 하물며 외계에서 온 녀석들이 금새 이해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 순간, 놈들의 전략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어. ‘폭력이 아닌 대화로 풀자’ 정도의 마인드랄까. 우리 문화를 이해하면 저항없이 몸을 훔칠 수 있겠거니 생각하게 된거지. ‘그것’들은 신도들을 불러모아 인간에 대해 속성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TV를 가져오더니 몇시간만에 무X팍도사와 무X도전의 광적인 매니아가 됐지. 9시 뉴스도 좋아하더라. 번역기 말론 앵커가 성적 매력이 황급히 충만하다나 뭐라나 암튼 외계인까지 홀려먹다니 이쁜것들은 다 이슬만 먹고 굶어 죽어야 한다니까.
  후우. 그러는 동시에 몇몇 놈들은 내 주위로 둥둥 떠다니는 홀로그램 영상들을 체크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어. 방 안엔 지겹도록 반복되는 김태희의 신용카드 광고에 분노하는 내 분신들이 하늘을 날아다녔어. 주말드라마를 보며 방 안 가득 비처럼 쏟아지는 눈물이 무릎 높이까지 차오르기도 했고. 조인성이 빵집 광고 할땐 찐한 에로씬이 바닥을 뒹굴거리는데 어찌나 부끄럽던지… 아우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야.
  그리고 9시 뉴스. 짜증나는 9시 뉴스. 하필 그때 그런 장면을 틀게 뭐였는지 몰라. 왜 그런 장면 있잖아.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두 정치인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썩은 미소와 함께 카메라를 향해 고개만 90도로 쑤욱 돌리는 꼴사납고 속보이는 장면 말야. 응. 중요한건 악수를 한다는 거지.
  그리고 화면 아래엔 ‘새로운 정치의 시작!’ 운운 하는 견고딕 폰트의 문장이 타이틀로 뽑혀 있었지. 정치. 이 얼마나 모호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동시에 심란한 기분이 들게 하는 단어인지.
  나는 그들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길 맘 속으로 기도했어. 제발 저들이 바보이길. TV가 저것들을 창조성 제로의 바보 천치로 만들어 주었기를…
  하지만 그건 헛된 희망이었어. 그들 중 하나가 내게 다가와 물었지.
  정치가 뭐다?
  “저, 정치 따위 알아서 뭐 하게?”
  정치가 뭐다?
  “모 몰라, 나 같은 20대 무관심 부동층은 저, 정치같은거 모른다고!”
  정치가 뭐다?
  빌어먹을 귀머거리도 아니고 왜 내 말에 반응을 않는 건지.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텔레토비를 상상했지만, 결국 놈들의 집요한 추궁에 텔레토비는 하나 둘 사라지고 그들이 바라는 홀로그램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어. 국회의사당 난투극 하며, 돈 가득 담긴 사과박스며, 선거 유세 현장의 아줌마 떼거리들이며…
  그리고 악수하는 장면들. 방 안엔 정치가들이 악수하는 장면들이 한도 끝도 없이 떠다니기 시작했어. 어쩔 수 없었어. 방금 악수하는 장면을 봐 버린걸 어떡해. 피하려 하면 할수록 자꾸만 그쪽으로만 더 연상되는데 정말이지 사람이라는게… 내가 내 생각하나 통제할 수가 없더라구.
  솔직히 난 조금 위기감을 느꼈어. 그들이 만약 정치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멀쩡한 인간의 탈을 쓰고, 그들 중 하나를 국회의원이나, 혹은 대통령 선거에 내 보내서, 만약이라도 당선되게 된다면? - 모 당 후보는 개를 내보내도 당선이 된다는데 하물며 외계지성체 쯤이야 뽑히고도 남지 않겠어? -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나라는 끝장이겠지. 그들의 입맛대로 법을 만들고, 정책을 만들고, 재계의 큰손들과 악수를 나누고… 뭐어, ‘순수’는 물을 지지리 싫어하는 것 같으니 적어도 운하는 안 봐도 되겠다.
  물론 그들이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어. 당장엔 그저 악수를 손쉽게 하는 방법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겠지.
  놈들중 하나가 수없이 떠다니는 홀로그램 속에서 유의미한 장면을 기어이 하나 발견해 냈어. 바로 거리 유세 장면이었지. 후보들이 시장바닥 헤집고 다니면서 한사람 한사람 악수를 나누는 장면 말야. 그리고 지금은 선거철이지. 앞서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정말 문제는 타이밍이야. 어쩜 이렇게도 거지같이 잘 맞을 수가 있는건지 모르겠어.
  홀로그램을 손으로 집어 든 녀석은 그 장면을 꼼꼼히 살피더니 친구들한테 달려가 눈앞에 들이댔어. 놈들은 하나 하나 순서대로 그 홀로그램을 돌려보며 쐐액 쐐액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어. 그러는 와중에도 난 그 영상들을 멈추려고 밑도 끝도 없이 텔레토비 주제가를 불렀지만 생각이라는게 결코 마음대로 멈춰지지 않더라. 아 요가라도 좀 배워둘 걸 그랬어.
  오오 정치!
  정치! 정치! 정치!
  놈들이 소리 높여 외쳐대기 시작했어. 홀로그램 영상이 이쪽 저쪽으로 옮겨다니면 다닐수록 그 소리는 점점 커졌어. 나중엔 집 밖 가득 놈들이 모여들어서는 미친듯이 울어대기 시작했어.
  외침은 밤 새도록 계속되었어. 정치! 정치! 정치! 외침소리와 순수! 순수! 순수! 외침소리가 사방에 가득히 차올랐지. 몇 시간쯤 잠들었다 깨어나니까 순수 정치! 나 정치 순수! 따위로 구호가 진화하더니, 햇살에 눈이 부셔서 눈을 뜨니까 그 무렵엔 순수를 위한 정치! 같은 어처구니 없는 문장으로 놈들의 표어는 완성을 이루고 있었어.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 원칙 따위는 여기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어. 헌법을 만들었던 이들은 우주적 종교의 국지적 정치 개입 같은 건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애초에 그것들은 국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잖아. 이건 명백한 전쟁이고 침략행위인걸.
  놈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알게된 건 그로부터 몇 시간쯤 지난 후야. 차츰 소리가 줄어든다는 느낌이 들어서 밖을 보았다가 놈들의 수가 절반 정도로 줄어있다는 걸 깨달았지.
  2시쯤 되자 바깥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게 되었어. 건물 안에도 날 감시하는 둘 셋 정도만 빼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어.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 뭔진 몰라도 그것들의 행동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도 물론 있었지만, 그보다도 지금보다 더 나은 기회가 없을 거란 생각이 더 컸어. 놈들은 아직 인간의 상상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어. 나를 편리한 백과사전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 허점을 잘만 노리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어. 내 머릿속엔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전자칩이 박혀있었으니까.
  먼저 놈들의 위치를 파악해야 했어. 난 최대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어. 확인할 수 있는 숫자는 셋이었는데, 무기로 보이는 기계장치를 허리에 차고 있었지. ㄱ자 모양으로 꺾인 형태가 꼭 총을 연상하게 했어.
  셋은 호리호리한 할아버지와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할아버지, 그리고 인상 사나운 몸빼바지 할머니의 모습이었어.(편의상 홀쭉이와 뚱뚱이, 몸빼바지라고 부를게.)홀쭉이는 나와 같은 방 안에 있었고, 뚱뚱이는 옆 방에 있었어. 나머지 하나인 몸빼바지는 입구 바깥쪽에 서있었고.
  나는 상상을 시작했어. 머릿속에 몇 가지 이미지를 떠올렸지.
  옆 방 한가운데에 내가 나타났어. 나는 눈 앞의 뚱뚱이를 향해 뻑큐를 날리고는 다시 원래 있던 방으로 도망쳤어.
  동시에 나는 치과의자에서 사라졌어. 내 몸 주위로 홀로그램이 보호색처럼 덧씌워진 거지만 나로서는 그저 텅 빈 의자를 상상하는 것으로 족했어.
  또한 나는 바로 옆에서 감시중이던 홀쭉이의 눈 앞에 나타나 그를 향해 뚜벅 뚜벅 걷기 시작했어.
  홀쭉이는 놀라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기를 꺼내들었어. 쥔 모양새를 보아 예상대로 그건 총이었어.
  어떻게 탈출한거지.
  놈이 말했어.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어. 그 대신 앞으로 확 뛰어들며 그를 놀래켰지. 홀쭉이는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어. 타이어가 펑크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새하얀 광선이 총구에서 뿜어져 나왔어. 그리고 광선은, 정확히 내 심장을 향해 날아와서는, 깨끗이 홀로그램을 통과해 등 뒤의 목표를 맞혔어. 광선에 맞은건 뚱뚱이였어. 뻑큐를 날리고 도망치던 내 또 다른 홀로그램을 쫓아 방으로 뛰어들다 광선에 당한거지.
  뭐다?!
  놈이 소리질렀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놀라 당황하는 홀쭉이의 옆으로 뛰어들어서 권총을 빼앗아 들었어. 그리고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어.
  후우. 사실 실수가 좀 있었어. 놈들의 총은 긴쪽이 손잡이고 짧은 쪽이 총구였는데, 나는 상식적으로 짧은 쪽이 손잡이겠거니 인간처럼 생각해 버린거야. 발사된 탄환은 홀쭉이가 아니라 바닥을 때렸지. 발 옆에 불꽃이 팍 튀는데 순간 아찔하더라. 빌어먹을 왜 총을 그따위로 만든 건지 몰라.
  놀란 나는 거의 총을 떨어뜨릴 뻔 했다가 다시 고쳐쥐고 홀쭉이를 쐈어. 그 소리를 듣고 바깥에서 뛰어온 몸빼바지도 곧바로 쏘아 쓰러뜨렸어.
  어떻게 묶인 팔을 풀었냐고? 간단해. 엄지를 탈골시켰어. 습관성 탈골이 있거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그럴 수 있어 난. 다 어린 날의 치기 덕분이지. 고삐리때 남자친구가 뽑아 두면 수갑을 풀 수 있다나 어쩐다나 혹해서 억지로 잡아 뽑은 적이 있거든. 신발끈을 손목에다 묶고는 책상 위에 엄지를 대고 발을 바닥까지 차는 건데, 그거 하고 얼마나 아팠는지 곧장 그새끼랑 헤어질 정도였지. 애초에 수갑 찰 일 같은거 없는게 최고인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몰라. 아무튼 병신 같은 남자는 여러모로 몸과 마음에 해로운거 같아.
  나는 먼저 놈들의 생사를 확인했어. 한번 해봤다고 좀 더 과감하고 능숙하게 경동맥의 맥박을 확인할 수 있었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셋 다 살아있었어. 군인이 아닌 선교단답게 갖고 다니는 무기도 스턴건이었던 거야.
  그런 다음 방 안의 서류며 기기들을 뒤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홀쭉이가 갖고 있던 외계의 휴대 콘솔에서 놈들이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었지. ‘그것들’ 중 하나가 모 당의 국회의원 후보(야구 좋다고 난리 치는 그 영감이라고 하면 알려나?)가 거리유세를 하러 온다는 소식을 가져왔던 거야. 그래서 놈들은 하나 둘 유세현장인 구룡초등학교 앞 대로에 몰려간 거지.
  보통이라면 아마 그쯤에서 난 경찰이든 군대든 멀더든 스컬리든 아무한테나 떠넘기고 멀리 도망쳐버렸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난 인류니 국가니 그런 거에 희생하는 인간들 정말 질색이잖니. 하지만 그땐 다른 방법이 없었어. 누군가를 설득하기엔 너무나도 시간이 촉박했어. 하긴, 시간이 남더라도 이런 이야길 누가 믿어주겠어.
  아니, 그들에게 정치를 가르쳐준 내 행동에 대한 책임감은 아니야. 결국은 개인적인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 내린 결정일 뿐이야. 단기적으로 잃는 것과 장기적으로 얻을 것을 이성적으로 계산한 것뿐이지. 그건 누구라도 조금만 생각해면 알 수 있는 거잖아? 정의 같은 게 아니야.
  난 죽고 싶지 않았어. 그것뿐이야.
  후우.
  그치만 그때 일을 떠올리면 정말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후우. 말하기 전에 분명히 해두겠는데. 듣고 나서 절대 나 놀리지 마. 그럼 니 목을 비틀어 버릴테니까. 음, 음, 너 이건 정말 이해해 줘야 해. 난 오밤중에 자다가 납치를 당했고, 만 하루를 갖혀있었어. 다시 말해서 스스로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는 거야. 내 잘못이 아니야. 알았지? 응? 절대 놀리면 안돼?
  후우.
  지금까지 이야기에서 난 잠옷차림이었어. 응. 납치 당한 시점부터 말야. 응. 곰돌이가 그려진 핑크색 잠옷. 그래. 기장이 좀 짧아서 팔다리가 간당간당한 그거. 응. 그래 그거라니까. 아 자꾸 묻지 마. 맞을래?
  그래서 입을만한 옷이 없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었어. 놈들의 옷을 빼앗으려고 해도 홀쭉이와 뚱뚱이는 란닝구에 트렁트 팬티만 걸치고 있었어. 그리고 몸빼바지… 나는 고민했어.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했어. 하지만 내 계급적, 세대적, 미학적 프라이드가 차마 그것만은 용납하지 않더라. 그걸 뺏어입게 되면 내 영혼이 악마에게 넘어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어.
  하는 수 없이 그녀가 입고 있던 겉옷만 뺏어서 잠옷 위에 걸쳤어. 등에 떡하니 삼미 슈퍼스타즈 로고가 박힌 팬클럽 잠바였지. 대체 그런 유물을 어떻게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는지 몰라.
  그렇게 부끄러움을 뒤로 한 채 나는 문제의 초등학교로 달리기 시작했어. 시계를 보니까 시간이 10분도 채 남지 않은거야. 정말 미치는 줄 알았지. 나 정말 죽어라 숨이 끊어지도록 달렸어.
  유세 현장으로 이어지는 대로변엔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어. 그리고 드문드문 ‘그것들’의 모습도 보였어. 그냥 볼 땐 몰랐는데 진짜 사람들과 비교해 보니까 뭐랄까, 위화감? 그런 게 느껴졌어. 조금만 눈치가 있어도 알아챌 만큼 확연히 눈에 띄었지.
  저 멀리 한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오는 게 보였어. 어깨에 띠를 두른 걸로 봐서 소문의 그 ‘농구를 좋아하는 모 당 국회의원 후보’의 무리인 것 같았어. 같이 축구하다가 만났다는 그 모 가수 하며, 회장님 회사의 간판 CEO들도 보이고, 얼마 전 시끄러웠던 그 연예인 아가씨도 어째 결혼한 뒤로 생전 안비추던 귀하신 얼굴을 다 비췄더라. 대체 지역구민을 위한 법제정과 그 이쁜 얼굴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야.
  하지만 그땐 그런 걸 욕할 여유도 없었어. 나는 그저 미친듯이 그를 향해 달릴 뿐이었지. 그가 한 명 한 명 악수를 청할 때마다 심장에 무리가 가더라. 빌어먹을 내가 일찍 죽으면 다 그 영감탱이 때문일거야. 한 사람 또 한 사람… 손길이 오가는데, 유독 한 사람, 아니 한 놈이 눈에 띄었어. 그건 ‘그’ 할머니였어. 응. 내가 지하실 의자에 청테이프로 묶었던 바로 그 할머니. 놈과 국회의원 후보 사이엔 네 사람밖에 없었어. 나와의 거리는 아직도 100미터는 넘게 남아있었고.
  내가 정치가 한명 구하자고 무턱대고 달려갔던 것만은 아냐. 내겐 나름의 계획이 있었어. 모든 사태를 정리할 수 있을 만한, 그리고 실현가능성도 로또보단 높은 계획이었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먼저 놈들을 한자리에 모을 필요가 있었어. 놈들의 주의를 끌어 유인하기에 그 순간 그 장소만큼 좋은 타이밍은 없었지.
  후보는 또 한걸음 나아가서 악수를 나눴어. 앞으로 네명. 나는 달리면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어.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악수를 나눴지. 앞으로 세명. 정치가는 오른 손을 한번 들어서 주위에 흔들어 보였어. 그리고는 두명째 손을 꼬옥 부여잡고, 모 가수가 트럭 위에서 춤 사위를 한번 휘젓고, 며느리는 꾸벅 꾸벅 인사를 해대고… 그리고 바로 그 할머니 차례가 왔어.
  후보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어. 놈은 혹여라도 놓칠 새라 그의 손을 잡아 뽑을 기세로 양 팔을 내밀었지.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손에 쥐어진 국지 범위 마비 음파총의 사거리가 닿는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어.
  “안돼애애애애애애애!”
  하고 소리치는 상식의 영역에서 아무리 보고 또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정상참작의 여지를 주려고 해도 미친년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 내 모습. 게다가 머리 위엔 똑같은 문장이 입체문자로 튀어나왔어. 아 정말 부끄럽다. 청계천 썩은 물에 코 박고 죽어버리고 싶어. …랄까 아무튼 난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일명 ‘국지범위마비총’의 화력 셋팅을 최대로 올려서 겨누고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어. 예의 타이어 펑크소리가 나며 총구에서 폭발이 일었어. 나는 그 반동으로 몇 미터나 뒤로 날아갔어. 다행히 잔뜩 모인 사람들이 쿠션이 되어주어서 다치진 않았어.
  나는 재빨리 다시 일어서서 목표를 확인했어. 탄환은 명중이었어. 다들 정말 깔끔하게 기절해 버렸지. 할머니에, 정치가에, 그의 추종자들에 덤으로 주위 일대의 유권자 수십명이 닌자영화의 엑스트라들처럼 우수수 쓰러졌어.
  쐐애애애애애애.
  울음소리와 함께 그 장소에 모여있던 ‘그것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어. 나를 발견한 거야. ‘그것들’은 주위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밀치며 줄줄이 날 쫓아오기 시작했어. 뛰어. 뛰어야 해. 머리 위에 그런 문장이 그림처럼 떠올랐어. 후우.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나는 또 달려야 했어.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도 온갖 뜀박질하는 홀로그램이 내 주위를 질주했지. ‘X려라 X니’나 ‘톰과 X리’ 같은 이미지 말야.
  놈들을 유인할 장소로 생각해둔 곳이 하나 있었어. 나는 대로를 따라 매봉역 방면으로 향했어. 그리고 영동교를 건너 오른쪽에 보이는 고급아파트 단지로 들어섰어. 등 뒤에 ‘그것들’을 매단 채로 달리는데 경비같이 보이는 사람이 내 앞을 가로막았어.
  “어이 학생…”
  나는 지체 없이 충격총의 방아쇠를 당겼어. 그는 반미터쯤 날아가서 그대로 기절했어. 정면의 유리문도 쏴서 날려버렸어. 산산이 부서지는 유리 조각을 밟으며 들어섰는데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더라, 여기가 호텔인지 백화점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안내 데스크의 언니에게 가서 어디로 올라가면 되느냐고 묻자 그녀는 허가가 필요하다고 했어. 그러는 사이에도 놈들이 하나 둘 가까워지고 있었고. 난 다시 한번 물었고, 그녀는 머뭇거렸어. 난 욕을 한바가지 하고는 무작정 안으로 뛰어들었지.
  한참이 지나서야 엘리베이터가 보였어. 다행히 1층에 있었던지 바로 문이 열렸어. 나는 곧장 뛰어들고는 닫힘 버튼을 눌렀어. 한놈이 문틈에 손을 집어넣으려 했지만 난 그 녀석의 가슴을 걷어찰 수 있었어.
  후우. 한숨 돌리긴 했지만 거기서부터가 문제였어. 엘리베이터의 버튼이 5까지밖에 없었거든. 상가와 주택의 구분 때문인지 5층부터는 또 갈아타야 하는 모양이었어. 물론 직행하는 녀석도 있겠지만 내가 고른 엘리베이터는 그렇지 못했던 거야.
  땡. 하고 문이 열리자 마자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뛰쳐나갔어. 주위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솔직히 많이 꺼림직했어. 만약 그놈들이 더 윗층으로 올라가는 직행 엘리베이터를 발견했다면? 그렇다면 나는 위 아래로 꼼짝 없이 갇힌 셈이었어.
  그것보다 더 급한 문제도 있었어. 알다시피 엘리베이터라는 게 서로 가까이 모여있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잖니. 내가 타고 올라온 곳에서도 양쪽 벽에 세 개씩 총 여섯 개가 동시에 운행되고 있었지.
  그리고 그것들이 동시에 도착했어. 땡. 땡. 땡. 땡. 땡. 사방에서 문이 열리며 쐐애애애 울음소리가 쏟아져 나왔어. 나는 생각하는 일을 집어치우고 미친듯이 달렸어. 등 뒤에서 충격파가 날아와 내 옆의 조각상이 가루가 되었어.
  앞에서도 한 놈이 나타나서 길을 가로막았어. 나는 녀석의 왼쪽으로 파고들어서는 목덜미를 잡고 그대로 밭다리를 걸어 넘겼어. 그리고는 정면의 계단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놈들을 봤어. 내가 방향을 틀자마자 양쪽에서 충격탄이 날아들어 놈들끼리 맞고 기절해 버리더라. 멍청한 놈들. 나는 욕을 한바가지 날리고는 눈 앞의 오토록 유리문을 쏘아서 날려버렸어.
  놈들의 늙어빠진 육체에 비해 난 분명 체력적으로 월등했어. 마음만 먹으면 금새 차이를 벌려놓을 수 있었지. 하지만 그놈의 보안이 문제였어. 비밀번호다 지문이다 홍채 인식이다 어찌나 장치가 많던지. 그럴 때마다 난 멀찌감치 서서 충격총을 갈겨야 했어. 그 때문에 놈들과의 거리는 항상 아슬아슬했지. 때로는 등 뒤에서 돌진하는 녀석에게 발차기도 한방씩 먹여줬어.
  그리고 몇 겹의 보안을 박살내고서야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보였어. 이번엔 옥상까지 통하는 직통이었지.
  버튼을 누르고는 돌아서서 놈들을 향해 몇 발 충격탄을 쏘며 시간을 벌었어. 땡. 하고 문이 열리는데, 빌어먹을, 한 놈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튀어 나오더라. 난 그놈을 쏴서 기절시키고는 문틈에 끼인 몸을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고 그대로 문을 닫았어. 닫힌 문에 쾅쾅 부딪치는 소리가 났어.
  후우. 그 다음부터는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야. 난 옥상을 향했고, 놈들도 어떻게 어떻게 걸어서든 기어서든 엘리베이터로든 옥상까지 쫓아왔지. 난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후덕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미소에 정서적 열세지, 막다른 골목에서 지리적으로 열세지, 무엇보다도 수적 열세에 밀려서 어찌할 방도가 없었어.
  놈들은 천천히 내 주위로 모여들었어. 원을 만들어서 날 둘러싸고는 빠져나갈 틈 없이 몇 겹으로 꼼꼼하게 벽을 쳤지. 놈들 거의 전부가 옥상에 모여든 것 같았어. 오기로 방아쇠를 당겨도 봤지만 몇 번 쏘니까 이것도 탄창같은게 있는 건지 푸슉 푸슉 소리만 나고 더 이상 발사가 안되더라.
  놈들이 한걸음 한걸음 좁혀오고, 나는 물러서려다가 등 뒤에서 다가오는 낌새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멈춰섰어. 난 그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머리통 위에 보X보노 땀방울 비스므리한 홀로그램을 흩뿌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이제 놈들에게 붙잡혀서 강제로 악수를 당하겠지, 그럼 나도 저것들처럼 골빈 병신이 되겠지, 이것들 이왕 온 김에 이 아파트도 끝장을 내겠구나, 부자들의 성지라더니 여기도 별거 없네 등등 나도 무슨 별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는 건지.
  그 순간 멀리서 빛이 보였어.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저 멀리 구름 속에서 한줄기 새하얀 광선이 뿜어져 나왔어.
  “어?”
  하고, 내가 놀란 표정을 지으니 ‘그것들’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어. 그리고 광선을 보았지. 광선은 점점 커지는 것 같았어. 아니, 커지는 게 아니라 이쪽으로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어. 폭이 얼마나 되는지, 또 얼마나 높은 데서 쏘아지는 건지 가늠이 안됐어. 네가 거기에 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건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것도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거대했으니까.
  놈들은 쐐액 쐐액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어. 저건 뭐다? 뭐다? 큰일이다. 도망치자. 갑자기 패닉에 빠지는가 싶더니 그것들은 저마다 기도문 같은걸 줄줄 읊어대기 시작했어.
  그랬거나 말거나.
  광선은 한 톨의 자비도 없이, 우리를 향해 덮쳐들었어.
  놈들은 저마다 공포에 질린 비명을 토했어.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어.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온 빛에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어.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흔적 하나 없이 사라지고 없었어. ‘그것들’도, 구름도, 새하얀 광선도. 그저 푸른 하늘 가운데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웠어. 나는 눈이 부셔서 그만, 살짝 눈가를 찡그렸어. 나도 모르게 입술이 중얼거렸어.
  “어휴 주름 생기면 안되는데… 참, 선크림 안 발랐는데!”
  나도 못 말려 정말.
  하얀 광선의 정체는 이 은하계 일대를 근거지로 삼는 일종의 테러리스트였어. 혹은 반정부세력 정도로 불러도 좋고. 그들은 그들의 구역에서 이교도의 전도를 극렬하게 싫어해. 그래서 소위 선교단이라는 그들을 납치해 버린 거지.
  실은 그들을 부른 건 바로 나야. 놈들의 본거지에서 발견했던 콘솔에 통신 기능이 있었거든. 문서를 뒤적이던 중 나는 우연히 그들의 존재를 알게됐어. 그리고는 일부러 모든 주파수에 잡음신호를 흘렸지. 그들에게 발견되도록 말야.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되느냐고? 그런 건 나도 몰라. 놈들이 사형집행을 당하든, 혹은 그네들 정부로부터 보내진 거액의 우주화폐를 대가로 풀려나게 되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야.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조금 가엾다는 생각은 해. 그들이 숙주가 된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닌걸. 단지 조금 가난했고, 늙었고, 치안이 잘 되지 않는, 그리고 사회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고립된 장소에 살았다는 이유였을 뿐이잖아. 심지어 외계의 침략에 조차도 사회계층이 문제가 되다니, 이건 맑스도 생각 못했을 거야.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웃음밖에 안 나와.
  하지만 너도 나도 알고 있어. 구룡마을의 바로 옆에 누가 사는지를 말야. 조금 더 시간이 흘렀다면 그들도 안전하지 못했을 거야. 요새나 다름없는 그들의 영역이 한번 지배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 땅에서 가장 악수를 많이 나누는 사람들이 사는, 한국땅에서 가장 폐쇄적인 거주지, 게다가 한국을 실제로 좌지우지할만한 권한도 가진 이들이 ‘전도’되었다면? 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해.
  후우.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났어.
  하지만 내 삶은 무엇하나 끝나지 않았지. 나는 지하철을 타고 집까지 돌아오는 내내 잠옷에 삼미 재킷 차림으로 부끄럼을 당해야 했고, 너는 죽어버렸지. 우리 집은 여전히 난장판이야. 거실이 왕창 어질러진 채로 있는 거 아까 봤지? 난 오늘밤에 돌아올 엄마 아빠에게 이 현실을 어떻게든 설명해야만 해.
  놈들이 아직 남아있을지도 몰라. 광선이 ‘그것들’ 모두를 납치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부산이나 대전쯤에 파견된 또 다른 선교단이 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영국이 아프리카를 토막 냈던 것처럼 위도와 경도마다 할당이 떨어졌는지도 몰라.
  게다가 내 머릿속엔 그들이 심어둔 칩이 남아 있어. 생각하는 건 무엇이든 현실에 만들어내는 홀로그램 장치 말야. 배터리 문제가 있어서 고작해야 사람크기의 물체 딱 하나 정도를 만들고는 수명을 다하고 말았지만.
  그래. 네가 생각하는 대로야.
  나는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널 만든 거야. 현수 너를.
  …
  …
  …
  아니, 저기 이봐… 현수야, 너 표정이… 풋.
  너 정말로 내 얘기 믿었어? 바보도 아니고 무슨… 푸흡, 푸하하하하하하.  

  ●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정말 믿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조심스레 살핀 그녀는 웃음을 거두어 들이더니,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듯 눈물을 글썽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님… 설마 너마저…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거야?”  

  모르겠다. 뭐가 뭔지.
  그런데 오늘이 며칠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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