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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뮤즈의 속삭임

2008.01.25 21:5601.25

먼저 총평입니다. 이 달에 올라온 글들은 비슷한 문제점들을 많이 보였습니다.

독자는 언제나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야기를 읽게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셔서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가 필요한 지를 꼼꼼히 따져 본 후, 작은 이야기든 큰 이야기든 하려는 이야기에 집중해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분들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inkholic님의 "뮤즈의 속삭임"은 공개 합평회 때 가져오신 것과 결말이 달라진 글이었습니다. 퇴고를 하실 때는 이야기의 구성, 합리성, 논리구조를 집중적으로 보시기 권합니다.
inkholic님의 글을 보다보면 중간중간 왜, 어떻게, 라는 의문이 듭니다. inkholic님은 많은 습작을 하신 분이고, 이제 이런 초보적인 지적을 받을 때는 지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야기는 2048년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왜 2048년에서 시작해야 할까요. 이 이야기 속에서 지금보다 미래라는 걸 알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장치도, 그래야 할 어떤 이유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장르, 어떤 이야기가 되었든 간에, 이야기는 자기 이야기 속에서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신비로운 돌이 과거와 현재 사람이 대화하도록 연결해준다는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처음에 돌이 발견된 부분에서는 언어가 다른 두 사람이 대화를 하기 위해 언어학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언어 문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갑자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무 합리적인 설명없이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갈수록 노트북도 소형화되는 추세인데 여자애 컴퓨터가 아니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고요.
챕터 5에 보면 돌은 영감이 떠오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에게만 들린다는 설정이 나오는데, 그럼 처음 여자애는 도대체 어떤 영감을 원했기에 그 돌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걸까요.
심리학자라는 게 얼마든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겁니다.
귀한 돌을 발견했다고 기뻐한 해적에게 무슨 일이 생겼기에 주인이 열 다섯 번이나 바뀌게 된 건지, 왜 돌은 한 번에 10년씩 건너 뛰어 사람을 연결시켜준다는 건지, 속삭이는 돌이 텔레파시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2007년으로 한정되어 있다는데 도대체 그 이유는 뭔지, 설정들이 중간중간 작가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맥락없이 튀어나옵니다.
온갖 범죄자를 속삭임으로 조정하는 것과 갑부가 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지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역사적인 큰 사건들, 해적, 모기 초컬릿 등, 요소요소에 황당하고 자극적인 것을 넣어야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는 건 아닙니다. 스케일이 큰 이야기든 작은 이야기든 독자들이 납득하고 이해할만한 논리적인 설명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특히 스케일이 큰 사건들을 넣을수록 작가가 이 이야기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자료 조사를 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어느 지점에서 공을 들여야 하는지, 쓰고자 하는 이야기를 위해 배경 지식은 어떤 게 필요한 지 더 생각하시고 더 많은 자료를 찾는 노력에 소홀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 어느 지점을 파야 하는지를 생각해주세요.
많이 쓰는데도 글이 제자리 걸음을 한다면, 그 때는 글을 쓰는 방식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반복되는 말입니다만 한 발 더 나가서 생각하고, 치밀하게 이야기를 맞추고, 그러기 위한 자료 조사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inkholic님 가작으로 선정되신 걸 축하드리며 ltpimento @ paran.com 으로 우편물 수령하실 주소와 성함, 전화번호(택배발송시 필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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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holic



  1


  속삭이는 돌은 언제나 우연한 계기로 인류의 역사 속에 출현했어요. 서기 2048년, 자메이카 출신 다이버 콰트로 보일삭스는 북극해의 버핀 섬에서 테니스공만한 푸른빛의 돌을 채굴하게 되죠. 순박한 심성의 콰트로는 열 세 살짜리 딸에게 그것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고 북극해에서 발견된 돌은 대륙을 가로질러 자메이카 한 마을의 소녀의 손에 들어갔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콰트로는 얼어서 길쭉해진 콧물로 체스말을 만들어 동료 광부와 내기 체스를 두던 도중 딸에게서 짤막한 메시지를 받게 되었죠.
  ‘아버지. 돌이 말을 해요.’  
  딸의 말로는 푸른빛의 돌을 손에 꽉 쥐고 있으면 기묘한 중얼거림이 들려온다는 것이었어요. 오직 돌에 접촉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불가해한 소리. 돌 역시 소유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같았지만 역시 기묘한 언어로 대답을 할 뿐이었죠. 결국 속삭이는 돌은 마을의 명물이 되었고, 콰트로의 딸은 처음엔 돌이 무서웠으나 결국은 흡족한 기분에 젖게 되었습니다. 돌을 만져보기 위해, 혹은 속임수를 밝혀내겠다는 목적 하에 많은 사람들이 선물을 들고 집을 찾아온 거예요. 문전성시를 이루었었겠죠? 누군가는 악마의 주문이라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외계 성운에서 지적 생명체가 보내는 전보라고 주장했답니다. 그러나 마을의 어느 누구도 돌이 속삭이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는 자는 없었어요.
  보름 후, 방문객들이 선물한 과자들 때문에 4키로나 몸무게가 늘었다는 것을 깨닫고 홈쇼핑으로 공중부양식 지방분쇄기를 주문하려던 콰트로의 딸은 호리호리한 중년 남자가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는 소문을 듣고 수도 킹스턴에서 찾아온 언어학자였죠. 콰트로의 딸은 방문객에 진저리가 나 있는 상태여서 그를 내쫒으려 손을 휘둘렀고, 언어학자는 말없이 모기눈알 초콜릿을 슬쩍 내밀었어요. 콰트로의 딸은 순간 멈칫했답니다. 최고의 고단백 상품인 동물 눈알 콜렉션은 그녀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까요. 치열한 공방전 끝에 공중부양식 지방분쇄기는 모기눈알에게 격퇴되었고 언어학자는 소문의 ‘속삭이는 돌’을 손에 쥐게 되었죠.
  언어학자는 13일 동안 돌의 언어를 분석해대었고, 그동안 콰트로의 딸은 이만팔천구백 마리의 모기눈알을 위장 속으로 집어넣었어요. 13일째 되던 날의 새벽. 이만팔천구백 마리의 모기들에게 쫒기며 피를 빨리는 꿈을 꾸던 콰트로의 딸은 새된 목소리로 내지르는 언어학자의 외침을 들었죠.
  “해냈다!”
  전세계의 모든 언어를 대조한 끝에 그가 결국 돌의 속삭임을 해독해 낸 거예요. 그것은 페니키아어와 아카드어의 유형과 매우 흡사했답니다. 그러나 언어학자는 그것이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님을 겸허히 인정해 이탈리아에 사는 친구인 유럽어학 교수를 부르기로 했고, 콰트로의 딸 역시 겸허히 텅 빈 초콜릿 상자를 가리키며 이번엔 두 배로 가져다 줄 것을 요구했죠. 한 가지 조건을 덧붙여서.
  “되도록이면 피를 빠는 주둥이가 없는 곤충으로.”
  붉은 수염을 지닌 유럽어학 교수는 이튿날 한달음에 자메이카로 날아왔고, 교수답게 속삭이는 돌이 꺼내는 말이 페니키아어의 원형이 되는 ‘셈어’와 부분부분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었어요. 유럽어학 교수는 언어학자와 콰트로의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속삭이는 돌과 대화를 시도했답니다. 그는 두껍기 그지 없는 셈어 사전을 바닥에 펼쳐둔 채 붉은 수염을 쥐어뜯으며 힘겹게 돌에게 말을 건네었죠.    
  “이름이 뭔가?”
  그러자 놀랍게도 그 말을 알아들은 돌에게서 대답이 전해져왔어요.
  “나는 아야마룩.”
  돌은 자신을 아야마룩이라고 밝혔고, 다섯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다고 말했죠. 붉은 수염의 유럽어학 교수와 언어학자는 이 돌이 ‘누군가와 교신할 수 있는 어떠한 통신수단’이라는 것에 서로 동의했어요. 물론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인공위성 전화기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아야마룩이라는 사람과 텔레파시를 하고 있는 것이라 추측한 거죠. 붉은 수염의 교수는 또다시 셈어 사전을 한참 뒤적인 후에 물었어요.
  “아야마룩.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가 사는 곳은 우가리트다.”
  생소한 도시의 이름이었어요. 붉은 수염의 교수는 언어학자에게 눈짓을 보내었고, 언어학자는 콰트로의 딸에게 넓적사슴벌레눈알 초콜릿 한통을 더 쥐어주었고, 콰트로의 딸은 초콜릿을 우적우적 씹으며 오직 그녀만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를 작동시켜 ‘우가리트’라는 지명을 찾아보았습니다. 모니터가 뱉어놓은 검색결과에 붉은 수염의 교수는 한 웅큼의 수염을 부욱 쥐어뜯었고, 언어학자는 찢어져라 입을 쩍 벌렸고, 콰트로의 딸은 초콜릿을 바닥에 떨어뜨리고야 말았다고 해요. ‘우가리트’는 기원전 3400년전 지구상에서 사라진 고대도시의 이름이었거든요.
  그들은 50세기 전의 인물과 텔레파시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2


  저런, 당혹스러우신가 보네요. 하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제가 아직 의심스러운 것은 당연해요. 하지만 설빈 씨. 국내 최고의 영화배우인 당신의 아침 시간을 뺏으면서까지 이렇게 앉아 있는 저의 절박함을 조금은 알아주시길 바라요. 늘 정갈하게 프린트 된 시나리오만 받아보던 설빈 씨에게 있어 말로써 시나리오를 들려준다는 것 또한 괴이한 일이겠죠. 그러나 이 이야기는 지면으로 옮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건 대한민국의 그 어떤 배우도 해낼 수 없는 일이며 오직 당신만을 위한 시나리오라고 전 늘 생각해왔어요. 그러니, 이왕 시작한 이야기 조금만 더 제게 시간을 주셨으면 해요.
  물론 설빈 씨가 요새 마음 고생이 심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일본의 아이돌 그룹 ‘핑크히메’의 메인보컬인 유미 다카코와의 스캔들 때문이겠죠. 신경쓰지 마세요. 매스컴이라는 것이 원래 스타들의 틈을 파고들어 먹고 사는 하이에나같은 부류들이니까요. 혹시 알아요? 제가 들려드리고 있는 이 시나리오가 그 모든 부스러기들을 날려버릴 대작 영화의 시발점이 될지.
  조금은 표정이 누그러지셨군요. 물론 어떤 표정을 지으셔도 여자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키실 정도로 수려한 얼굴이긴 하지만요. 이런 노처녀인 제게까지 말이에요. 호호. 그런데 조금 긴 이야기라 마음 편하게 들으시려면 다과가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정도로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빈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이런 중요한 사안을 논의한다는 건 어울리지 않아요. 쉼없이 말을 해야 하는 저도 조금 목이 탈테고 말이죠. 그럼 이야기를 계속할까요?
  참, 전 밀크티가 좋답니다.


  3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속임수였어요. 과거와의 정신교감이라니.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죠. 세 남녀 중 물리학에 조예가 깊은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시간역행이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명제임이 밝혀진 것은 오래된 일이었어요. 그러나 돌을 통해 이야기하는 남자 아야마룩은 가짜라면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죠. 청동기 시대의 풍습에서부터 이미 멸종한 식물의 특성까지. 무엇보다 이미 소실되어버린 셈어를, 대학에서 강의를 펼치는 붉은 수염의 교수보다 더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것 자체가 부정하기 힘든 증거였답니다.
  “인정해야겠군. 뭐, 어때. 돌에서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백악기 공룡 트리케라톱스의 위장 속에 있는 기생충과 텔레파시를 나눈다고 해도 말이 안 될 건 없지.”
  언어학자는 마음을 고쳐먹고 아야마룩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어보기로 마음먹었어요. 아야마룩은 느닷없이 머릿속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해 그동안 꽤나 공포에 떨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오기 전까지, 아야마룩의 최대 고민은 이웃 부족과의 전쟁 문제에 있었어요. 이웃 부족이 아야마룩의 부족 여자를 훔쳐가는 사건이 벌어졌고, 아야마룩을 비롯한 마을 전사들은 여자를 되돌려 받기 위해 무력시위를 벌이는 중이었죠.
  “하지만 우리 화살, 닿지 않는다. 그들 부족 울타리, 너무 높다.”
  아야마룩의 말을 듣고 있던 붉은 수염의 교수는 콰트로의 딸과 그녀의 스트레칭을 도와 주고 있던 언어학자에게 그 말을 전해 주었고 세 남녀는 고민에 휩싸였어요.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새 정들어버린 과거의 청년 아야마룩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던 거예요.
  “대포로 쏴 버리면 그만이잖아요?”
  격한 스트레칭을 한 뒤라 헉헉대며 콰트로의 딸이 말을 꺼냈어요. 언어학자는 그녀의 불어난 체중이 자신 탓이라는 마안함에 잠자코 있었지만 붉은 수염의 교수는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눈빛을 드러냈답니다. 기껏해야 나무에 청동을 묶어 만든 창칼로 전쟁을 벌이고 있을 시대에 어떻게 대포를 구한단 말이에요. 결국 세 남녀는 청동기시대의 화살이 어느 정도까지 발전했는지 조사해보았고 아야마룩에게 어떻게 하면 좀 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어요. 그리고 30세기에 걸친 무기 발전 역사를 모두 꿰고 있는 컴퓨터는 답을 토해냈죠.  
  “아야마룩. 그들 담, 높아서 화살 넘을 수 없다고?”
  붉은 수염의 교수가 이제는 조금 능숙해진 셈어로 물었고, 아야마룩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언어학자가 교수를 재촉했고 붉은 수염을 잡아당기며 교수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죠.
  “내가 방법 알려준다. 새, 잡아서 깃털, 화살촉 반대편에 달아봐라. 그러면 화살, 더 멀리 날아간다.”
  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 남녀는 뿌듯한 마음에 맥주잔을 부딪히며 우정을 나눴을까요? 속삭이는 돌을 발견한 공로로 타임지의 표지모델에 선정되었을까요? 아녜요. 그 뒤에 아야마룩이 붉은 수염의 교수에게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세 남녀 모두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어요. 아야마룩에게 방법을 전수해 준 순간 그들을 감싸고 있던 시간의 우주가, 비운 어항에 새 물을 붓듯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렸기 때문이죠.  
  사실 그들이 아야마룩에게 알려 준 ‘화살깃’의 아이디어는 셈족에게 있어 217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려질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별 생각 없이 순수한 호의에서 세 남녀는 아야마룩에게 화살깃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고 그때부터 시간의 톱니바퀴는 3400년 이전으로 돌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답니다.
  아야마룩은 화살깃을 붙인 화살로 이웃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어요. 그로 인해 이웃부족의 여자들은 하룻밤 사이 아야마룩의 부족 남자들과 동침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발악을 하다가 잠자리에서 발휘되는 아야마룩의 색다른 기술에 열광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원래 역사에서라면 태어날 수 없었을 ‘소부타’라는 한 전사가 세상에 태어나게 되죠. 소부타는 용맹한 무력과 뛰어난 카리스마, 그리고 큼직한 거시기로 우가리트 일대를 통일 시켰고 강대해진 셈족은 수메르인들과의 전쟁 판도를 뒤바꾸어 놓기에 이르러요. 그리하여 원래대로라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인이 되었을 수메르인들은 셈족의 지배를 받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고 소부타의 큼직한 거시기에서 쏟아져 나온 올챙이들은 유럽 일대로 퍼져나가게 되었답니다.
  먼 훗날 그 올챙이들 중 하나였던 ‘하비레논’은 트로이 전쟁 당시 그리스의 오디세우스 장군의 전략으로 만들어진 트로이 목마 속에서 잠복 중이었어요. 그러다 동료 병사가 뀐 방귀에 기도가 막혀 하비레논은 질식사하고야 말았고, 또 다른 올챙이였던 ‘장 꼴레므’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날, 옥상에서 빨래를 널던 하녀의 젖가슴을 뒤에서 더듬던 중 광분한 시민들의 외침소리에 깜짝 놀라 옥상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사망했어요. 물론 비음 섞인 교성을 내지르던 하녀도 함께요. 그러나 질기게 살아남은 올챙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에스파냐 해군사령관으로 자라난 판데 에스키벨이라는 남자였어요. 그는 아프리카 대륙의 자메이카로 넘어가 원주민이었던 아라와크족을 이구아나 잡듯 제압해버렸고, 성대한 잔치를 열었답니다. 그 날, 포도주에 잔뜩 취해 밤 상대를 불러오라 명한 판데 에스키벨의 얼굴에 포로로 잡혀온 한 아라와크족 소녀가 용감하게도 가래침을 뱉어버렸고 격노한 판데 에스키벨은 그 소녀의 목을 단 칼에 잘라 버렸어요. 그 소녀는 643년 뒤 북극해에서 ‘속삭이는 돌’을 채굴할 운명인 콰트로 보일삭스의 머나먼 조상이었죠.
  자, 이리하여 콰트로 보일삭스는 새로 쓰여진 역사의 페이지에서 깨끗하게 지워져 버린 것이었고 그에게서 돌을 선물 받은 콰트로의 딸도 태어나지 않게 되었어요. 자연스럽게 ‘속삭이는 돌’을 둘러싼 세 남녀의 일들도 일어나지 않게 되어 버렸죠. 광대한 우주의 그 누구도 그 일들을 기억하는 이는 없었어요. 존재하지 않았던 일로 시간의 톱니바퀴 속에 끼인 티끌철머 묻혀버린 거예요.
  하지만 ‘속삭이는 돌’은 묻히지 않았답니다.
  북극해에서 묵묵히 푸른빛을 내뿜던 돌은 콰트로 보일삭스 대신 다른 사람을 부르기 시작했고, 결국 처음 발견되었던 2048년이 되던 해 다른 이의 손에 캐내어져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어요. 속삭이는 돌은 그것을 주운 자에게 또다시 과거의 인물과 연결시켜 주었고, 아야마룩에게 일어났던 일이 한 번 더 일어났습니다. 아주 사소한 ‘그들만의 속삭임’이 시간의 운명을 또다시 뒤집기 시작한 거예요.
  돌은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손에 쥐어지기 시작했죠.

  4


  영감이란 뭐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감’은 양로원에서 기체조를 하는 할아버지를 향해 기둥 뒤에 숨은 할머니가 추파를 던질 때 쓰는 말은 아니에요. 인류 문명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거대한 위업을 달성한 발명가들이나, 자나깨나 인간의 고뇌와 환희를 표현하고 싶어 몸부림쳤던 예술가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바로 ‘그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냥 퍼뜩 떠오르는 것 아니냐고요? 물론 그 말도 일리가 있죠. 뇌에서 파바박, 불꽃이 튀듯이 말이에요. 하지만 아르키메데스의 머릿속에서, 혹은 고흐의 영혼 속에서 약동하기 시작한 그 영감들은 정말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일까요? 혹시 누군가 금기의 비밀을 살짝 엿보여주듯이 귓가에 속삭여 주는 것은 아닐까요?
  이른바 ‘뮤즈의 속삭임’ 같은 거 말이에요.


  5


  속삭이는 돌은 쉬지 않고 운명의 수레바퀴를 새것으로 갈아 끼웠어요. 적절한 시간에 맞지 않는 ‘때이른 발명의 아이디어’는 세상의 수많은 발명품들을 앞당겨 놓았고요. 속삭이는 돌이 2048년의 사람들을 불러들여, 교환원이 통화를 연결시켜주듯 연결시켜준 과거의 사람들은 언제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뮤즈의 속삭임’을 반갑게 맞이했어요. 물론, 아무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오로지 ‘영감’이 떠오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에게만 그것은 들려오는 것이었죠.
  기원전 2511년. 이집트의 석수장이 실로스 라네는 주문받은 코뿔소 석상을 옮길 걱정에 빠져 있었어요. 귀하신 집정관이 주문한 것이라 정성들여 만들긴 했지만 막상 그것을 집정관의 저택으로 옮길 인력이 부족했던 거죠. 집정관은 정해진 날짜에 자신의 앞마당으로 석상을 가져오라 명령했고, 장정 서른명이 달려들어야 낑낑대며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무거운 석상의 존재는 실로스 라네의 시름을 더욱 깊게 만들었어요. 백명 정도의 노예를 고용하면 수월하게 옮길 수야 있겠지만 그래서야 집정관이 준 수고비를 훨씬 웃도는 돈이 들어갈 것이었어요. 그래서야 수지가 맞지 않는 거죠.  
  “확 그냥 코뿔소 머리만 싹둑 잘라서 가져다줄까.”
  홧김에 실로스 라네는 이렇게 내뱉어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랬다간 자신의 머리도 코뿔소 머리와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이 뻔했죠.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적은 인력으로 힘들이지 않고 저 무거운 석상을 옮길 수 있단 말이지? 날짜가 다가올수록 실로스 라네는 초조해졌고, 초조한 마음에 잠자리에서도 서지 않는 물건은 실로스의 마누라를 날카롭게 만들었고, 결국 이집트의 석수장이 부부는 파혼의 위기에까지 이르렀어요. 하지만 어떠한 도움 때문에 둘은 평생 갈라서지 않고 오랫동안 잘 살 수 있었답니다.
  약속된 날짜 하루 전에 뮤즈의 속삭임이 들려오기 시작했던 거예요. 머릿속에서 울려오는 뮤즈의 목소리는 실로스 라네의 고민을 들어주었어요. 그리고 식후 디저트를 고를 때의 고민거리만도 못하다는 듯 해결책을 알려주었죠. 뮤즈의 속삭임은 단단한 통나무 다섯 개만 준비하라고 알려줘 실로스 라네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위에 석상을 올려놓기만 하면 알아서 비탈길을 굴러갈 것이라고 확신하듯 뮤즈는 말했지요.
  그렇게 하여 ‘바퀴’의 원리가 실로스 라네로부터 탄생되었고, 그 기술은 유프라테스 강이 원류에서 젖줄을 타고 뻗어나가듯 이집트 전체로 퍼져나갔어요. 결국 멀고먼 지역까지 무거운 돌을 나를 수 있는 ‘바퀴’의 원리는 이집트의 건축술을 경이적인 속도로 발전시켰고, 쿠푸 왕의 피라미드와 같은 불가사의한 유물을 역사의 한 페이지에 당당하게 남겼죠. 실로스 라네의 머리에 영감을 속삭여준 어떤 존재를 알 리 없는 역사가들은 어찌하여 이집트인들이 그토록 정교한 건축술을 가질 수 있었는지 해답을 낼 수 없었고, 결국 은하계로 묻지마 관광을 왔던 외계인들이 오지랖이 넓어 알려주고 갔다는 이야기만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어요.
  속삭이는 돌은 뉴턴의 머릿속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속삭여 주었고, 베토벤에게 ‘운명 교향곡’의 멜로디를 속삭여주었어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고 1945년에 사라질 운명이었던 대한민국은 ‘한글’의 존재 덕분에 민족정신의 뿌리를 이어나가 결국 독립을 쟁취할 수 있게 되었고요. 그 또한 세종대왕의 머리에 ‘훈민정음’의 글자모양을 알려준 뮤즈의 속삭임 덕분이었죠.
  그렇게 속삭이는 돌은 영원한 생명을 구가할 듯이 보였어요. 후라이팬으로 계란 후라이를 뒤집듯 2048년의 세계 판도를 휙휙 뒤집으면서. 때로는 소련이 미국을 넉다운시켜 전세계가 공산주의의 물결로 넘치기도 했고, 때로는 징기스칸이 죽지 않고 세계를 통일해 CNN 뉴스 아나운서들의 헤어스타일이 모두 변발 일색일 때도 있었지요. 음, 이건 좀 섬뜩하죠?
  그러던 어느 2048년. 속삭이는 돌은 이전에 만났던 모든 주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리하고 교활한 주인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6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어요. 네, 나비의 사소한 날갯짓 한 번이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을 불러일으킨다는 이론이죠.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의 말에 따르면 유심히 보지 않을 경우 그냥 지나치고 말 미세한 변화 하나가 종국에는 거대한 힘으로 불어나게 되는 것이랍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이야기에 그야말로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죠.
  위대한 발명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설빈 씨? 컴퓨터? 자동차? 상대성이론? 아, 물론 설빈 씨가 말씀하신 것들도 굉장히 뛰어난 발명들이긴 하죠. 하지만 그것들이 ‘위대한’ 발명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진정 위대한 발명은 그런 거창한 것들보다, 뭐랄까……. 그래요, 지우개나 바구니 같은 거죠.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만약 이 세상에 지우개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한번 쓴 글자를 지워서 고친다는 발상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럼 모든 과학기술의 기초가 되는 이론 수정의 원리가 발달하지 못했을 거고. 설빈 씨가 말한 핵폭탄의 아버지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만들어질 수 없었겠지요. 그럼 바구니는 어떨까요? 지우개의 위력보다 훨씬 대단하죠. 물체를 모아서 담을 수 있는 바구니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군집이 개체보다 큰 위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거예요. 즉, 문명에서 매우 중요한 분업 혹은 분산의 개념이 태어날 수 없었을 거란 얘기인 거죠. 물론 제가 꼽는 인류 최고의 작품은 따로 있어요. 그것이야말로 이 인류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최고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죠. 뭐냐고요?
  그건 이 시나리오를 다 들려드리고 나면 자연하 알게 되실 거예요.


  7
  

   미국의 심리학자 케빈 아이스하트는 속삭이는 돌을 주운 뒤, 그것이 과거 인물의 머릿 속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 연구하는 것에 자신의 일생을 걸었어요. 속삭이는 돌이 케빈에게 연결시켜준 이는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제국의 중년 여자 말루다 부인이었답니다. 말루다 부인은 매일 밤 귓구멍이 너무 간지러워 불면증에 시달리던 중이었죠. 어떻게 하면 이삭가지로 쑤시는 것보다 더 효율적으로 귓밥을 제거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던 그녀에게 케빈은 ‘가지 끝을 살짝 구부리시오’라고 알려주는 대신 아무 말 없이 말루다 부인의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는 깨달았죠. 그녀에게 아주 사소한 지식이라도 알려주는 날엔 자신의 존재가 부지불식간에 소멸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것이 이전의 뮤즈들과 달랐던 케빈의 영민함이었어요. 하지만 케빈 아이스하트에게 있어 과거와 텔레파시를 시도할 수 있는 푸른빛의 돌은 너무나도 매혹적인 보물이었지요. 그는 그것을 결코 버릴 수 없었어요. 그렇게 속삭이는 돌을 2달 동안 보관만 하고 있던 케빈은 어느 날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어요. 귀의 간지러움을 견디다 못한 말루다 부인이 콜로노스 해협에 몸을 던져버린 것이죠. 케빈은 속삭이는 돌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고 탄식했답니다. 그런데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죠. 말루다 부인이 죽자 속삭이는 돌은 곧바로 다른 이를 찾아 그에게 연결시켜준 거예요. 그는 정확히 10년 뒤인 기원전 480년에 활동했던 카르타고의 히밀코라는 해적이었고요. 케빈 아이스하트는 보물이 다시 살아 숨 쉬는 것에 기뻐했어요. 하지만 두 번째 깨달음에 직면했을 때 그는 더욱 큰 환희에 젖게 되었답니다.
  말루다 부인이 죽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어요. 속삭이는 돌 또한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고요. 그의 명석한 두뇌는 번뜩이며 뉴런 세포를 불태우기 시작했고 하나의 논리를 귀결시키기에 이르렀어요.
  말루다 부인의 죽음은 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 거예요. 그제서야 케빈은 속삭이는 돌의 이전 주인들 중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비밀 한 가지를 깨달았죠. 속삭이는 돌이 연결해주는 자는 희대의 발명가가 될 수도 있지만, 만약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경우에는 세계에 티끌만한 영향도 주지 못하고 사라지는 거라는 걸. 물론 더 많은 사료가 필요했겠지요? 케빈이 자신의 가설을 완벽히 확신했을 때는 속삭이는 돌이 열 다섯 번이나 연결을 바꾼 다음이었어요.
  속삭이는 돌은 일부러 역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자들에게만 속삭이는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케빈 아이스하트는 새로운 판단을 내렸어요. 속삭임을 듣는 자가 죽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거죠. 케빈은 돌을 얻은 이후 처음으로 격렬한 속삭임을 불어넣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예술의 영감도, 발명의 씨앗도 아니었죠. 오직 당사자를 빨리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일종의 고문이었어요. 심리학자인 케빈이 자신의 전공을 총동원해 사람을 정신이상의 단계로 몰아가는 기술이 그것이었죠. 이제 돌에서 들려나오는 소리는 뮤즈의 속삭임이 아니라 악마의 세뇌로 바뀌어져 있었어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사악한 음성. 속삭임을 듣는 자들은 점점 더 빠른 시일 내에 목숨을 잃어갔답니다. 귀를 틀어막아도, 잘라 버려도 두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그 속삭임을 막을 방법은 아무데도 없었어요. 그들은 미쳐서 발작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광인이 되어 사람들에게 처형당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케빈은 모르고 있었어요. 그러는 동안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속삭임을 연결해준 푸른 돌에 조금씩 보이지 않는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돌이 연결해주는 시간은 10년씩 규칙적으로 흐르고 흘러 점차 케빈이 존재하고 있는 2048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48년에 케빈은 활동을 시작했답니다. 나비효과란 말을 기억하시죠? 100년이라면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산들바람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케빈은 확신했기 때문이에요. 그는 돌을 쥔 채 속삭이고 또 속삭였어요. 위대한 발명, 혹은 예술로 업적을 쌓을 수 있었을 천재들은 케빈 아이스하트의 세뇌 아래 억만금을 가로챈 사기꾼, 혹은 국가의 원수를 암살하는 테러리스트들로 변모해나가기 시작했어요. 케빈은 자신의 청사진대로 자신의 조국이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를 바랐고 그 바람은 착실하게 이루어져갔어요. 케빈은 점점 자신만의 최면암시법을 위험한 단계에까지 끌어올렸어요. 그의 속삭임 아래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고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으며 후세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죠. 알고 계신가요? 케네디를 암살했다고 밝혀진 오스왈드는 체포 된지 겨우 이틀 만에 경찰서 지하에서 살해 되었어요. 오스왈드를 살해한 잭 루비는 언론에 ‘캐네디 살해범을 용서할 수 없어 내 손으로 처단했다’고 밝혔죠. 물론 그랬을거예요. 악마가 그렇게 하라고 속삭였다고 사실대로 밝힐 수는 없었을 테니까.
  케빈 아이스하트의 계략은 성공하는 듯 보였어요. 온갖 범죄자들을 속삭임으로 조종한 끝에 그는 현실 속에서 억만 장자가 되어 있었고 세계를 주름잡는 거물이 되어 있었거든요. 아무도 그를 거역할 수 없었어요. 그를 제외한 그 누구의 권력도 과거를 주무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던 어느 날 이라크를 초토화시킬 빌미가 필요했던 케빈은 세계무역센터를 테러리스트로 하여금 공격하도록 지시하고 있었어요. 그는 한참동안 속삭이는 돌을 붙잡고 주문을 외우듯 입을 놀려대었죠. 평소보다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했어요. 그래서 그는 알아채지 못했죠. 속삭이는 돌의 귀퉁이가 쩍하고 갈라지더니 그의 방 카펫위에 툭하고 떨어진 것을.
  분리되어 나온 속삭이는 돌의 잔해는 선량한 멕시코 청소부 살바도르 깔레하의 손에 들어갔어요. 살바도르는 케빈이 자신의 딸인 라니메의 은밀한 곳을 상습적으로 더듬곤 하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참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어요. 케빈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살바도르는 자신이 관리하는 쓰레기통의 일부가 되어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케빈의 방에서 주운 푸른 돌에서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하달하고 있었죠. 그것도 멀쩡한 비행기를 납치해서 빌딩에 돌격시키라는 과격한 내용이었어요. 기억력 좋은 멕시코 청소부는 두 목소리 중 하나를 알아보았죠. 다름 아닌 자신의 고용주이자 원한의 대상 케빈 아이스하트였으니까.
  비밀스런 통화를 도청하는 첩보원이 된 기분이었을 거예요. 한 테러리스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케빈 아이스하트와 그런 케빈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살바도르. 그는 몇 주 동안 틈나는 대로 돌을 손바닥에 쥔 채 케빈의 속삭임을 엿들었어요. 그리고 며칠 후 TV를 보며 나초를 씹던 살바도르 깔레하는 ‘세계10대 참사’라는 프로그램 도중 화면으로 흘러나온 무언가를 똑똑히 보게 되었죠. 육중한 무게의 여객기가 빌딩으로 날아와 부딪히는 장면은 마치 데자뷰처럼 그의 뇌리에 꽂혔고, 살바도르는 나초에 사례가 들려 한참을 고생해야 했어요. 그 프로그램은 그가 여섯 번이나 지겹게 본 것이었는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장면이, 있을 리가 없는 사건이 새롭게 추가되었던 거예요.
  케빈의 속삭임은 단순한 흉계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어요. 살바도르는 자신의 고용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깨닫고 공포에 떨었지요. 그의 영향력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시간의 울타리에까지 뻗쳐있었어요. 단순한 심리학자였던 케빈에게 희한할 정도로 줄줄이 따라온 행운의 중첩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는 알 수 있었어요. 그 악독함에 치를 떨던 도중 살바도르는 어떠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답니다. 자신의 손에도 역시 속삭이는 돌의 조각이 있었거든요. 케빈 아이스하트가 할 수 있다면 왜 자신이라고 할 수 없겠는가. 바로 그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돌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아랍어도, 중국어도 아니었죠. 그 어떤 언어보다 친숙한 에스파냐어였어요. 과연 돌은 살바도르에게 누구를 연결시켜주었을까요? 영감을 목마르게 원하는 과학자? 번뇌에 빠진 예술가? 아니었어요. 오랜 세월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돌이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거예요.
  돌은 살바도르에게 ‘속삭임의 역사’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어요. 살바도르는 어째서 돌이 자신을 선택했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았죠. 자신의 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고 있는 케빈에게 복수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인 거예요.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강렬한 욕망과 동시에 능력을 함께 가진 것은 온 인류를 통틀어 오직 그 뿐이었고요.
  그래요, 케빈 아이스하트를 막기 위한 마지막 반격이 시작된 거죠.


  8


  힘을 손에 넣는 다는 것. 과연 어떤 걸까요? 설빈 씨는 이미 배우로서 확고한 입지를 굳힌데다가 젊은 나이에 돈으로 코를 풀 정도의 부와 명성을 얻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제 이야기 속의 케빈 아이스하트는 어떨까요. 그는 속삭이는 돌이 자신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고목에서 수액을 갈취하듯 뽑아냈죠. 하지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요?
  우리 함께 생각해봐요, 설빈 씨. 케빈 아이스하트가 만약 실존하는 인물이었다면. 정말로 그런 자가 현실에 있다면 그는 정말 나쁜 놈이겠죠? 세상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악당 중의 악당이겠죠?
  자,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어요.




  9  


  속삭이는 돌은 살바도르 깔레하에게 케빈 아이스하트를 없애줄 것을 부탁했어요. 하지만 현실에서 그는 케빈의 솜털하나 건드릴 수가 없는 형편이었죠. 하지만 그에게도 ‘돌의 조각’이라는 막강한 무기가 있었답니다. 그것을 사용하면 살바도르 깔레하 역시 과거를 바꿀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살바도르는 케빈 아이스하트의 출생을 지워버리기로 마음먹었어요. 애초에 없었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기로 한 거죠. 그는 케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인지 조사했어요. 케빈의 아버지인 알버트 아이스하트는 26살 때 한 파티에서 신들린 듯 춤을 추고 있던 새라 해밀턴에게 한 눈에 반하고 말죠. 그리고 그것은 새라도 마찬가지였어요. 살바도르는 바로 그것을 노려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둘을 애초에 만나지 말도록 하면 케빈 아이스하트는 태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속삭이는 돌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죠.
  속삭이는 돌이 텔레파시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2007년으로 정해져있었어요. 그 알버트와 새라가 만나게 되는 파티는 2029년이었고. 시간대가 맞지 않게 되는 거예요. 22년을 기다리면 되겠지만 그 사이에 미쳐가기 시작한 케빈 아이스하트가 세계를 어떤 모양으로 바꿔버릴지 장담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절망에 빠진 살바도르 깔레하의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스쳐지나갔어요. 속삭이는 돌이 도움을 준게 아니었어요. 신의 도움인지, 뇌의 화학작용인지는 모르지만 진실로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죠.
  새라와 알버트가 만나게 된 그 파티는 일본의 영화배우 신지 하오마루가 월드투어를 하던 도중에 개최된 팬미팅이었어요. 살바도르는 그것을 기억해 낸 거예요. 만약 신지 하오마루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알버트와 새라의 만남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겠죠. 그래서 속삭이는 돌은 자신의 최후가 될지도 모르는 도박을 감행했어요. 2007년 영화배우 신지 하오마루의 잉태를 막을 수 있는 누군가에게 살바도르 깔레하를 연결시켜 준거예요. 그 누군가는 바로…….
  2007년의 대한민국. 시나리오의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는 한 여류 작가였어요.


  10


  물론 제 말을 믿기 힘드시겠죠. 알아요, 그런 것쯤은.
  처음에는 저 역시 혼란스러웠어요. 알아듣지도 못하는 속삭임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을 때는 너무나 두려워 미쳐버리는 줄만 알았지요. 그 말이 에스파냐어였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 제 행운일까요, 불운일까요. 어쨌든 그 속삭임은 제게 간절히 말하고 있었어요. 한 남자아이의 탄생을 막아야 한다고. 그래야 세계에 평화가 찾아온다고. 믿기 힘든 내용이었지만 거부하기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만들게 된 거예요.
  뮤즈가 속삭여준 그대로.
  설빈 씨가 처음에 물었었죠? 왜 시나리오를 ‘보여주지’ 않고 ‘둘려주는’ 거냐고. 당연하죠. 이 이야기는 애초에 영화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것은 먼 미래에 실제로 벌어질 일이예요. 그리고 속삭이는 돌에 관한 이 고백은 오직 신설빈, 당신만을 위한 것이지요. 왜 하필 당신이냐고요? 수많은 한국의 영화배우 중에 왜 당신을 선택했느냐고요? 놀라지 말아요.
  내가 막아야 할 신지 하오마루가 바로 오늘 잉태될 당신의 아이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절 바라보지 말아요. 물론 저 역시 당신이 미혼에 애인조차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다른 사실 역시 알고 있죠. 당신에게는 은밀한 피앙새가 존재하고 그녀와의 비밀스런 만남이 들통나기 시작했기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걸. 그녀의 이름까지 말해줄까요? 유미 다카코. ‘핑크히메’에서도 손꼽히는 몸매의 소녀지요. 그리고 당신의 아이를 가지게 될 불운의 여자이고.
  어째서 그녀가 당신의 아이를 가지게 되는지 알려줄까요? 오늘밤 당신은 마지막으로 유미 다카코를 불러들여 침대 위에 끌어들이죠. 그리고 당신이 셀 수 없이 많은 여자를 스치며 갈고 닦은 애무로 그녀를 흥분시켜요. 삽입한지 7분 동안은 최고의 쾌락을 맛보게 될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깨닫지 못하죠. 7분째 되던 그 순간 격렬한 피스톤 운동을 견디지 못하고 콘돔이 찢어져버리고 마는 걸.
  그로 인해 유미 다카코는 당신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거예요. 오늘을 마지막으로 손을 써 둬 그녀와의 스캔들 뿐 아니라 실제 관계까지 청산해버린 당신은 가차 없이 그녀를 버리지만 유미는 아이를 지우지 않아요. 운명을 망쳐놓은 당신에 대한 복수로 아이를 영화배우로 키우지요. 그리고 세계적 스타가 되었을 때 아이의 아버지인 당신을 파멸시키게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을 잃은 당신은…….
  그거 내려놔요, 설빈 씨. 경찰을 부르겠다고요? 조금만 침착하고 이성을 찾아요. 내가 겨우 유명한 스타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부어주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면 신설빈이라는 배우에게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의 스캔들을 견디지 못해 부리나케 달려온 스토커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둘 다 틀렸어요. 저는 인류 최악의 악당을 막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에요. 겁먹지 말아요. 저는 그저 힘없는 노처녀에 불과하니까. 악의 씨앗이 될 것은 분명하지만 당신을 죽일 능력도 그럴 생각도 없으니까요. 물론 제 말을 믿지 않는 것도 알아요. 허무맹랑한 이야기 나부랭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제가 가져온 이것을 받아둬요.
  특제 스킨리스 라텍스 콘돔이이에요. 오늘밤 당신이 쓰려고 했던 콘돔은 불량품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악의 화신인 케빈 아이스하트가 세상에 태어나고야 마는 거죠. 하지만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았으니 이 콘돔을 쓰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에요, 설빈 씨. 이제 아시겠죠? 유미 다카코와 당신이 위험한 사랑을 즐기던, 어떤 체위로 교성을 내지르던 저는 거기엔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제 말을 믿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그것을 버리지 말아요. 제가 말씀 드렸죠?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라고. 맞아요. 바로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그것이죠. 저희 회사……, 아니 제가 가져온 이 콘돔이야말로 당신을 위하고 인류를 위한 제품이랍니다. 저런 그 눈초리를 보아하니 여전히 제 진짜 정체가 미심쩍으신가 보군요. 그러나 의심을 버리고 믿으셔야 해요.
  저는 뮤즈의 속삭임을 들은 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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