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스타폴

2007.12.31 22:4712.31

55호에는 파악 님의 "스타폴"과 Mono 님의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를 가작으로 선정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두 분 ltpimento @ paran.com 으로 우편물 받을 주소, 성함, 전화번호(택배 발송시 필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파악 님의 글은 전반적으로 초반이 늘어지고, 이야기를 끝까지 해보려는 의지는 엿보이나 결말에서 손을 놔버리는 경우가 많이 보였습니다. 글의 완급이나 리듬에 좀 더 신경을 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주 건조하고 스피디하게 진행하면서 철저하게 관찰자의 입장에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거나, 치열하게 이야기 안에서 뛰어야 하는데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어정쩡함이 걸렸습니다. 글을 경제적으로, 즉 필요없는 곳은 과감히 자르고, 필요한 곳에 투자하며 강약 조절을 해준다면 훨씬 좋은 글이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온다"의 경우 진실 또는 진실에 가까운 것을 알아내는 방법이 너무 안이했습니다. 핸드폰도 아니고 비밀번호를 그런 식으로 알아내는 건 어려울 것입니다. 특별한 재주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기계를 통해 어떻게 진실을 알게 되었는지가 두루뭉실하게 넘어갔습니다.
성경 구절을 챕터마다 넣었는데, 장식적인 요소에 머물고, 이야기 구조와 치밀하게 얽히지 못했습니다.

"스타폴" 역시 초반에 마법사를 만나기까지 이야기가 늘어졌습니다. 초반을 더 밀도있게 묘사해 군더더기를 줄이고, 충돌 부분에서 긴장감을 증폭시키고, 결말의 묘사가 더 생생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에테르에 대한 묘사라거나 자연스럽게 환상적인 설정으로 넘어가는 부분 등등이 돋보였습니다.

"공생"은 원시적인 다른 세계로 가 그 세계의 신이 된다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 낡은 감이 있는데, 그걸 뛰어넘는 이야기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특히 결말이 유독 안이했습니다. 풍자도 아닌 그저 무의미한 독백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결말에 좀 더 신경써주세요.

"즐거운 나의 집"은 이야기들이 서로 맞물리지 않고 겉돌다가 맥락없는 결론을 지으며 끝났습니다. 이야기를 그냥 흘러가게 놔두지 마시고, 좀 더 짜맞추고 재조립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한 이야기를 쓰더라도 얼마나 집요하게 매달리며 쓰느냐가 글이 느는 관건입니다.

"하지"는 각기 따로 떨어진 퍼즐 조각들을 보여주었는데, 결말에서 제대로 합쳐지지 않아 이야기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쓰기 쉬운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의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하지"의 경우 작가가 이야기를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더 치밀하게 생각하고 구성해서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새로운 방식을 시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불타는 밀밭 님의 "dispell"은 듀라한이라는 소재 자체가 신선하지 못했고, 이야기도 진부하게 끌고 갔습니다. 모두 잘 아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을 경우, 어떤 식으로든 작가의 터치가 잘 드러나지 못하면, 심심해지게 됩니다. 자기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기만의 색채입니다.


나길글길님의 "신처용가"와 "인디언 타임"은 둘 다 비슷한 문제점이 있었는데요. 일상의 고뇌와 삶들이 진짜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고, 박제되어 있었습니다. 야근하면서 세 남자가 주고받는 대사는 재미있었습니다. 그런 생생함이 부분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신처용가의 경우 제목에서부터 어떤 이야기가 될 것인지 알 수 있는데, 그 상황까지 몰아가는 이야기가 재미가 없었습니다. 부인이 무엇을 조정했다는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고, 말 한 마디로 너무 쉽게 문제를 해결해버리는 것도 안이했습니다. 꿈을 취미로 바꾸어 영위하는 것이, 진짜 치유이자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인디언 타임"은 신처용가보다 더 안이했습니다. 역시 주인공의 일상이 생생하지 못해, 많이들 겪는 상황일 것임에도 몰입이 되지 않고, 심심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인디언 캐릭터 역시 살아있는 재미있는 캐릭터가 되지 못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시계방 아저씨 병원비를 십시일반해 계속 부담해준다는 것 역시 너무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독자는 냉정합니다.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모든 부분이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Mono님의 "웃음 스위치"는 재밌었습니다. 힘을 빼고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재미있게 잘 쓴 엽편이었습니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역시 좋았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좀 더 간결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연출이나 편집에 더 신경을 썼다면 좀 더 톡톡 튀는 맛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건필하세요. ^^



파악

마침내 마법이 풀린다, 비록 강력한 힘이 작용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고 해도.
8월의 밤, 너는 알지못하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별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너는 알지 못하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예정된 섭리인지, 아닌지.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Ⅰ.
 어스름이 검은 숲 위로 깔리고 나직히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좁은 숲길이 끝나는 곳에 작은 마을이 총총한 별들 아래 펼쳐졌다. 별들의 위치를 가늠해보니 다행히도 북쪽으로 향해온 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숲 아래로 흐르는 작은 강은 휘모라 강일테고 강을 끼고 있는 이 마을은 아너울일 것이다. 안도하며 내리막길을 달려내려갔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묵을 곳을 찾아야했다.
 마을 사람들은 좁은 변두리 마을 사람들이 흔히 보여줄 수 있는 적개심과 호기심을 담아 낯선 이방인을 맞이했다. 그들의 시선을 묵묵히 받으며 묵을 곳을 찾아 이리저리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을의 조그만 광장 근처에 작은 간판을 내건 여숙이 보였다. 주점을 겸하는 곳이었다. 좁은 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에게 사정을 전했다. 그녀는 작은 놀라움을 담으며 내가 묵을 방으로 인도해주었다. 허둥대는 모습을 보아하니 오랫동안 여행자가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방은 작지만 정갈했다. 짐을 풀어놓고 허기를 잠재우기위해 홀에 나오자 사람들이 날 향한 관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부담스런 관심을 기분 나쁘지 않게 무시하며 뒤늦은 저녁을 들다 그들이 바라는 바깥 세상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었다.
 별 다를 것 없는 세상이었다. 언제나처럼 교당과 군주들간의 권력 다툼이 계속되고 지식인들은 그 사이에서 열심히 줄을 서고 관리들과 교당의 입맛에 맞는 학문을 뱉어내기에 급급했다. 배운 것 없는 농민들은 하루하루를 연명하느라 자신들이 착취당하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의미있는 흐름은 상인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이 충분한 변화를 가져오기는 요원해보였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에도 놀라움을 드러내며 정신없이 섭취하느라 바빴다.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 같은 이 작은 마을에서는 초라한 여행자가 전하는 파장도 엄청난 것이다. 내가 대보의 전언을 가지고 도라요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지하기 힘들만큼 확장된 세계와의 조우에 경악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계속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지만 여행의 피로와 업무의 비밀을 내서워 제지시켰다. 별 생각없이 한 행동이 사람들에게 굉장히 신비하게 보인 것이 분명했다. 내일 아침에는 온 마을에 낯선 곳에서 온 여행자 이야기가 퍼질 것이다.
 방에 드러누워 남은 여정을 정리해보았다. 더버라 산맥을 넘었으니 이제 어려운 고비는 넘겼다. 아마 사나흘만 더 가면 이르멉스 요새에 다다를 것이다. 그 곳에서 도라요는 지척이다. 대보의 전언이 시급한 것은 아니니 조금 더 이 곳에 머물러도 좋을 것이라 결론지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럽지만 몰려온 피로의 무게가 더 마음을 움직였다.

Ⅱ.
 아이는 연신 돌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 하며 놀았다. 지치지도 않고 반복되는 아이의 놀이를 멍하게 바라보다 뒤를 돌아보니 여인숙의 주인이 설거지를 하는 틈틈이 걱정스런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드디어 지겨워졌는지 아이는 돌을 내팽개치고 나에게 달려왔다.

 "여행자님, 이름이 뭐에요?"

 아이의 꾸밈없는 호기심에 잠시 미소를 보냈다. 아이의 이름은 아무로케라고 했었지.

 "날랜 발이라고 부르렴, 아무로케. 모두가 날 그렇게 부른단다."

 "날랜 발? 와, 날랜 발님은 달리기 잘하나봐요. 난 늘 술래잡기할 때면 발이 느려서 술래가 되서 화나는데. 달리기 가르쳐줘요!"

 좁은 마을이라 구성원들에 대한 파악도 쉬웠다. 아무로케는 이 마을에서 제일 어렸다. 평소같으면 몇살 더 많은 아이들과 놀겠지만 지금은 농번기라 아이들까지 일을 도우러 나갔다. 별 다른 소일거리도 없던 나는 이 아이와 놀아주기로 했다.
 여숙 뒷마당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의 장단에 맞춰주다 해가 머리 위로 솟았을 때 아이가 마을을 돌자고 했다. 잠시 걱정을 드러내던 여숙 주인은 마지못해 아이의 부탁을 수락했다.
 마을은 비슷한 크기의 집들이 조금씩 떨어진 채 늘어서 있었다. 닭들이 돌아나니는 작은 광장을 제외하고는 온통 좁다란 골목길들이었다. 마을 한켠에 높다랗게 뻗은 교당이 시커먼 자태로 키작은 집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새 골목들을 다 돌아보고서 아이와 나는 교당의 정문에 다다랗다. 높은 울타리 사이로 수사들이 바닥을 내려보며 걷는 것이 보였다. 세상에서 자신들의 걸음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이.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기려할 때 누군가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니 묵직한 체구의 장년이 날 바라보며 서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주임수사인듯 했다.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합례를 건네기에 합례로 받아주었다. 주임수사는 미소를 띄우며 다가왔다. 이 곳까지 오는 동안 수없이 보았던 예의의 가면이었다.

 "아, 언신자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대보의 임무를 맡고 계시다고요. 괜찮으시다면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하오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만."

 "아, 호의는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괜한 폐를 끼치고 싶진 않군요."

 "에이, 그러지마시고……."

 주임수사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옷자락을 잡아 끌었다. 마지못해 교당 안으로 들어섰다. 주임수사가 날 돌아보다 아무로케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음,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만 집으로 돌아가거라."

 아무로케는 잠시 나와 주임수사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제가 오후동안 이 아이를 맡기로 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동행하지요."

 주임수사는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교당을 돌아들어갔다. 교당의 첨탑은 다른 도시의 교당과 마찬가지로 높다랗게 뻗어있었지만 별 다른 장식은 없었다. 소박하고 그만큼이나 음침한 기운을 뿜는 교당을 돌아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올랐다. 주임수사의 거처로 향하는 듯 했다.
 집무실로 들어서자 주임수사는 거만한 몸짓으로 보조수사에게 하오를 내오라 명했다. 극구 사양했지만 주임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식탁으로 이끌었다. 보조수사가 기름진 음식들과 술을 차려놓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주임수사는 술을 한 가득 부어 건네고, 정신없이 음식을 우겨넣는 아무로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곧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임수사의 관심은 교당과 군주들간의 알력다툼에 맞춰져있었다. 최근의 정세는 교당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교시록을 통해 황제마저도 농단하는 중앙교단의 행태를 끄덕이며 듣던 주임수사는 곧 탐욕스런 눈을 번득이며 교파들의 흐름에 대해서도 물어왔다. 필시 어느 쪽에 충성해야 이득이 될지를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한번 줄을 잘 서면 평생토록 이 작은 마을에서 무단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문제없을 것이다. 뻔한 속내에 자연스레 한숨이 나왔다.
 
 "이단 척결은 잘되고 있습니까?"

 "네?"

 갑작스런 물음에 살짝 사레가 들렸다. 주임수사가 터질듯한 볼을 실룩거리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요새 전능하신 분의 뜻에 거스르는 요망한 이야기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많다면서요? 얼마 전에도 크게 난리를 부리다 지옥으로 던져진 사람이 있다 들었습니다."

 주임수사는 몇년 전에 세상을 시끄럽게했던 댄대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듯 했다. 천구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던가 그런 학설을 주장했을 것이다. 국립학당의 학장이라는 신분이 그를 어느정도는 방어했지만 교당에게 많은 인내심을 바랄 수는 없었다. 확실히 그 사건 이후로 이단 척결은 더 심화되었다. 한번 잡은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는 교당의 행보와도 맞닿아있을 것이다.

 "그런 요망한 말을 내뱉는 것들은 말입니다, 최고의 고통을 안겨줘야해요. 전능하신 분의 품에서 편안히 굴러가는 세상을 짓이기려는 악마의 하수인들이죠. 어떻게 그 크신 은혜를 모르고 감히……."

 주임수사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그 악의 기운이 이곳까지 퍼져오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임수사가 창 밖을 바라보며 신음을 뱉었다. 멋모르고 삼킨 음식들이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Ⅲ.
 어둠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광장 근처에서 하루의 고단함을 수다로 털어낸다. 알 수 없는 곳을 향한 푸념을 한껏 늘어놓고 나면 사람들은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 내일의 고통을 대비한다. 늦게까지 주점에 남은 축들의 물음에 성심껏 답해주고 나니 사람들은 다시 각자의 수다에 빠져들어갔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무언가 귀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마법사라고요?"

 사람들은 갑작스런 관심에 당황하며 대화를 멈췄다. 그 중 한명이 머뭇거리며 대답해왔다.

 "네, 그렇습죠. 그저 신기한 분이라 그런 게지 뭐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고쳐주고… 좋은 분이지요."

 그의 주저함이 이상했다.

 "아, 그냥 궁금해서 그럽니다. 악마와 거래하거나 그렇지는 않겠지요. 그 분이 기이한 일을 많이하시는가 봅니다?"

 "아, 그럽죠. 맹세코 좋은 분입니다. 저 쪽 산자락에 오두막을 짓고 별을 보며 사시는 분입니다. 약초부터 농삿일까지 모르시는 게 없어요. 뭐 궁금한 게 있으면 그 분을 찾아가면 됩니다. 아, 글쎄 그 분 말대로하면 안 되는 게 없다니까요."

 초야에 묻힌 학자인 모양이었다. 그에 대한 호기심을 향한 사람들의 경계도 이해가 된다. 마을 사람들에게 지지와 신뢰를 얻는데다 그에 걸맞는 실력까지 갖춘 학자라면 교당 쪽에서도 껄끄러운 존재일 것이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교당의 눈치를 살피느라 이곳 사람들도 함부로 그를 두둔하지는 못하겠지.
 한창 신나게 마법사의 행적에 대해 말하던 이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거 얼마 전에 들은 건데 그 분은 별을 움직일 수도 있다고 합디다. 아, 네! 별을요."

 잠자리에 누운지 한참이 되서도 쉬이 잠이 들지 못했다. 낯선 곳이라 그런가 싶었지만 여행자인 내게는 궁색한 대답이었다. 아까 들은 마법사가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별을 움직인다니. 그것은 전능하신 분의 영역이었다. 항상성을 유지하며 천구의 궤적을 따르는 별들의 운행은, 필멸하고 변화하는 피조물들과는 다른 법칙을 따른다. 사실일리 없겠지만 그가 그런 말을 주장하고 다닌다면 그건 분명 이단으로 몰릴만한 주장이었다. 더군다나 요새같은 서슬퍼런 때에.
 아까 주임수사가 했던 말이 걸렸다. 그는 어떻게든 그 '마법사'를 이단으로 몰고 싶을 것이다. 난 그저 스쳐 지나는 여행자일 뿐이란 생각을 하며 돌아누웠지만 날이 밝으면 그 마법사를 찾아가야겠다는 결심만이 굳어졌다.

Ⅳ.
 오두막은 마을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산등성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산에서 급작스레 뻗어져 나온 구릉에 자리잡은 마법사의 거처는 높은 곳에 위치한데다 탁 트인 곳이라 전망이 좋았다. 멀리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밭이 보였고 반대편 모퉁이에 위치한 교당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거인의 외눈처럼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두막은 단촐했다. 다만 지붕이 평평하고 옥상 위에 각종 기구들이 늘어선 것이 눈에 띄었다.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 슬쩍 열린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뉘요?"

 등 뒤에서 울리는 외침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중년의 사내가 풀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서있는 것이 보였다. 저 자가 마법사인가. 희끗희끗한 수염을 짧게 깎고 평범한 옷차림을 한 그의 어디에서도 전설의 마법사는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는 무심하게 문을 열며 말을 이었다.

 "처음 뵙는 얼굴이오만?"

 "아, 전 여행자인데 선생님에 대한 성문을 듣고 한번 뵙고 싶어서…."

 말을 내뱉고서야 대답이 경솔했음을 깨달았다. 마법사는 짖궃게 날 바라보다 안 쪽으로 들어섰다.

 "들어오시구랴."

 잠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마법사의 재촉을 받고서야 안으로 들어섰다. 오두막 안은 그 밖의 풍경만큼이나 단촐했다. 얼마 안되는 낡은 가구들이 선 사이로 휑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단칸 방 중앙의 널찍한 공간에 초라하게 자리잡은 탁자 위엔 용도를 알 수 없는 병들과 기구들이 늘어서 있고 한쪽 벽엔 작은 침대와 무언가가 잔뜩 들어찬 장식장들이 있었다. 정신없이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다 마법사의 시선과 마주하고서야 머쓱함을 느끼고 그가 안내하는대로 작은 의자 위에 앉았다.
 마법사는 챙겨온 바구니에서 풀들을 꺼내 늘어놓고 분류하며 인간의 네가지 형질에 따라 각각 잘 맞는 최선의 약초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을 끄덕이며 듣고 있을 때 느닷없는 질문이 들려왔다.

 "그래, 사람들이 저를 뭐라 말하더이까?"

 무방비 상태에 있던 난 허둥대다 가까스로 둘러대었다.

 "고매하고 학식 높으신 은자라 들었습니다."

 마법사는 설핏 웃으며 차분히 대답했다.

 "저는 그저 이 조용한 곳에 틀어박혀사는 필부일 따름입니다. 좁은 견식으로 미천한 연구를 해보고는 있지만 그에 대해 과한 말인 것 같군요. 그런 칭호는 멀리 도시에 학승이나 사서들이 들을만한 것이지요. 그저 모 라지흐카라고 부르세요. 전 은자도 선생님도 아닙니다."

 그는 날 향해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물론 마법사도 아니고요."

 속내를 들킨듯한 기분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그런 내 행동을 달리 중언하지 않고 라지흐카는 내 여행의 목적에 대해 물어왔다. 난 있는 그대로 대보의 전언을 가지고 이동하는 중이라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행보에 안위와 은총을 빌었다.
 상당한 시간동안 침묵이 지난 뒤 나는 나지막히 말했다.

 "미련한 몸이지만 라지흐카 선생님의 고매한 학식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말을 꺼내고서도 난 대체 왜 이런 말을 꺼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아무래도 들켜버린듯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꺼낸 말이겠지만, 일편 이 자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라지흐카는 아무 말없이 한참을 약초만 뒤적이더니 괜찮다면 내일 다시 방문하라는 답을 주었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질 것 같지 않아 나는 그 쯤에서 인사를 전하고 그의 오두막을 나왔다.
 침소에 누워서도 한참을 잠이 오지 않았다. 대보의 약정일은 아직도 열아흐레 정도 남았다. 여기서 이르멉스 요새를 지나 도라요까지 가는 데에 걸리는 날수를 생각해보아도 이 곳에서 생각보다 지체가 길어진다고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다만 묘한 호기심과 불안감이 나의 몸을 달뜨게하는 것이었다. 멀리서 동이 터올 때쯤에야 가까스로 잠이 들 수 있었다.

Ⅴ.
 다음날 시찬을 끝내고서 곧바로 라지흐카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그는 이런저런 장비들을 둘러보고 있는 듯했다. 문안을 건네자 그는 공손히 답례하고 다시 장비들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난 차분히 그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점검이 끝나자 그는 송구를 표명하며 오두막 안으로 날 이끌어 차를 대접했다. 귀족들의 성채에 머무를 때면 이따금씩 차를 대접받곤 했지만 그만큼이나 독특한 향취를 가진 차는 없었다. 조심스레 차에 대해 찬언을 전하자 그는 반색하며 풀들의 효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곧 그가 연구하고 있는 수많은 분야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의 학문은 상당히 광연하고 현오했다. 초목과 의술과 광물과 천문에 이르기까지 그의 학식에 한계는 없는 듯했다. 지금껏 도시의 수많은 학도들의 담화를 들어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만큼 자연의 이치에 밝은 자는 없었다. 다들 전능하신 분의 이름을 빌릴 줄만 알지 그 분이 이루신 세계와 그 안에 숨은 높은 뜻을 찾으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창 즐거이 이야기를 이어가던 라지흐카는 곧 어제 있었던 나의 제안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내게 대보의 임무를 맡았음에도 여유가 있는가 물었고 난 열흘 이상의 여유는 있다고 답했다. 곰곰히 생각하던 라지흐카는 짧은 기간에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없을 것이고 특정한 분야의 기초적인 연구법 정도는 익혀볼 수 있을 것이라며 관심있는 분야에 대해 물어왔다.
 난 곰곰히 생각해보고 별을 보는 것에 대해 알고 싶다고 답했다. 실상 나와 같은 언신자에게 가장 쓸만한 학문은 소중한 길잡이인 별에 대한 것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라지흐카가 별을 움직인다는 소문에 대한 관심이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은 아니라 살짜기 심사가 괴로웠다.
 라지흐카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날 벽 한 구석의 층계로 이끌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르니 넓은 옥상이 드러났다. 자그마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너울이 한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었기에 하늘을 관찰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일 터였다. 옥상에는 기다란 막대같은 도구들이 몇개 있었고 넓게 펼쳐진 천상도가 놓인 탁자, 그리고 천구의가 있었다. 천체들의 움직임에 대해 연구하는 학도들의 연론실에서 본 적이 있다. 라지흐카는 이 곳에서 별들을 관찰하는 것의 고적함에 대해 말하고서 천구의로 다가가 내게 설명을 시작했다.
 지구가 물론 천구의 중심이었다. 그 바깥쪽으로 수성과 금성, 달,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의 궤도가 있었다. 천구의 가장 바깥 쪽에는 별자리들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라지흐카는 계절마다 다른 별자리들의 위치를 기록한 천상도와 천구의를 들썩 거리며 내게 우릴 둘러싼 천구의 구조와 원리를 설명했다. 학문적인 용어는 친숙하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언제나 보던 별들의 움직임이었기에 이해에 크게 문제가 있진 않았다. 습득이 빠르다는 찬언에 조금 으쓱해졌다.
 제대로 학문을 강습 받아본 적 없는 내게 강의를 하는 라지흐카의 태도는 진지했다. 난 그의 성의에 감사하는 한편으로 그의 절실함을 마주했다. 이 깊은 산골에 있는 그에게는 무엇보다 그의 연구를 이해해줄 만한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존중하고 경애했지만 그건 이해할 수 없는 것에대한 경외일 뿐이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자신이 가진 학식을 전수하고 싶은 심정도 있을 것이다. 그의 그런 태도에 동화되어 나 또한 심오한 천구의 세계에 빠져들어갔다.
 오전동안 강습이 끝나고 함께 하오를 든 후에 나는 그를 도와 들판의 약초를 캐는 일을 했다.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세상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마법사의 모습은 없었다. 다만 누구보다 훌륭한 학식과 성품을 가졌을 뿐이다.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세상을 뒤덮자, 그는 망원경의 사용법을 알려 주겠다고 했다. 생경한 단어였다. 그는 옥상에 있던 기다란 막대들로 향했다. 그는 한참동안 무엇을 조절하는 듯 하더니 막대의 한쪽 구멍으로 눈을 대어보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한 뒤 깜짝 놀라 넘어질 뻔 했다. 작은 점으로 보이던 교당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마치 면전으로 다가온 것처럼 가까워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눈을 떼고 바라보니 다시 글라스는 저 멀리로 사라져있었다. 경이를 표하자 라지흐카는 망원경이란 멀리 있는 사물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장치라며 그 구조와 조정법에 대해 일러주었다. 망원경은 두개의 투명한 돌이 앞 뒤로 들어선 기다란 막대였다. 이 투명한 돌은 딱 한번 본 적이 있었다. 수도의 추도경이 가진 안경이란 물건에 있는 것도 바로 이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망원경의 경이는 그것과 비견할 수 없었다. 마침내 망원경의 원리와 용법을 터득하자 그는 하늘 위로 시선을 돌려 별을 바라볼 것을 권했다. 아아, 그리고 나는 별의 가공할 실체를 본 것이다. 매끈하게 빛나는 영롱한 구슬, 그 아름다움을 지상의 무엇에 비할 수 있으랴! 전능하신 분께 찬양할진저!
 그 밤은 한참을 망원경을 통해 천체들을 관찰하느라 여숙에 돌아왔을 때는 꽤나 밤이 깊어버렸다. 그러나 몸 어디에서도 피로감은 몰려오지 않았다. 외려 가벼운 흥분이 몸을 감싸는 것이었다. 내일 있을 또 다른 강습을 기다리며 난 대보의 임무가 끝나면 다시 이 곳으로 찾아와 못다한 학문을 계속하리라 다짐했다.

Ⅵ.
 이후 며칠간 이어진 강습으로 난 혼자서도 천체의 궤적을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그가 알아낸 것들에 대해 습득하고 실제 관찰을 통해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닷새째 되는 날 오전, 서둘러 시찬을 끝내고 라지흐카의 오두막으로 향할 때였다. 멀리서 마을을 돌며 성축을 행하는 수도사들이 보였다. 주임수사까지 나선 것을 보고서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그 곳을 지나치고자 했다. 허나 어느 순간 호명이 들리고야 말았다. 주임수사였다. 그는 예의 탐욕스런 미소로 맞이하며 날 무리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끌었다. 최근 마을에서 사악한 기운이 팽배해있어 자신까지 나서 대규모로 성축을 하고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그에게 적당히 대꾸하는 중에도 난 어서 새로운 배움을 얻고 싶을 뿐이었다. 그 때 그가 정색을 하며 물어왔다.

 "최근 언신자님께서 마법사의 거처에 출입하신다는 소문이 들리더이다……."

 난 짐짓 태연을 가장했지만 놀라움을 느낀 게 사실이다. 난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파다한 그의 성문에 호기심이 생겨 그에 대해 알아보는 중이라 둘러댔다. 주임수사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 물론 언신자님처럼 귀한 분께서 사악한 학문에 경도되거나 하진 않으시겠죠. 그런 것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속내를 감추고 있는 음흉한 자라서 말이죠, 혹여 언신자님의 귀한 명성에 흠집이 가지나 않을까 저어됩니다. 아무쪼록 그 자의 학문에 사악함과 전능하신 분 앞에 지은 죄가 있는 것을 알아내면 바로 알려주십시오."

 주임수사는 다시 헤벌쭉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섰다. 발걸음을 서두르는 나의 등 뒤로 다시 한번 그의 외침이 들려왔다.

 "부디 악마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주임수사가 던진 말들을 떨쳐내려 애쓰며 오두막에 당도하자 마당에 쌓여있는 광석들을 분류하는 라지흐카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진지하고 사려깊은 모습 어디에서 악마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리. 그는 평소보다 늦은 내게 별다른 힐언 없이 바로 강습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복잡한 계산과 열띤 논의로 보낸 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이었다. 그는 시선을 마을로 향한 채 잠시 주저하다 물어왔다.

 "이 좁은 곳에 있는 몸이지만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소. 천체의 운동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 주장하는 무리가 있다지?"

 난 갑작스런 물음에 살짝 긴장했다. 그가 나의 의견을 물어왔기에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답했다. 라지흐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도 전통적인 천구설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살짝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덧붙여 지금 현재 그 새로운 학설을 이단으로 몰아가는 세상의 분위기는 급격한 면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학문의 방법은 존중받아야할 것이라며 새로운 학설에 대해 가정과 사고실험이라는 생경한 용어를 부여했다. 전통적인 천구설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그 학설이 설명할 수도 있다며 내게 학문을 하는 자의 마음가짐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학문에 대해 가져야할 마음가짐에 대해 역설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난 어렴풋이 내가 마치 대단한 학자라도 된 양 고양되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나의 눈엔 칼이 번뜩이고 있었다. 나날이 날을 갈며.

Ⅶ.
 이레째 되는 날이라 기억한다. 그 날은 오두막을 찾아가자 라지흐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나타난 그는 상당히 흥분되어 보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로 서둘렀다. 공연히 나마저 흥분되기 시작했다.
 그가 이끈 곳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있었다. 그는 날 내버려둔 채 구덩이로 내려가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다시 내게 돌아온 그가 보여준 것은 작은 돌덩이였다.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돌과는 분명히 달랐다. 희미하게나마 빛을 발하는 모습으로 보건대 분명 귀중한 광석임에 틀림없었다. 나의 측견을 전하자 그는 동의하며 어서 연구해보자고 재촉했다.
 그는 망원경처럼 두 개의 투명한 돌을 넣은 막대로 그 돌을 관찰했다. 마침내 관찰이 끝나자 그는 이건 지금까지 어디서도 보지 못한 광석이라며 기뻐했다. 나 또한 새로운 발견을 하례하며 그 광석의 성질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 광석은 지상의 어떤 광석과도 닮아있지 않으며 스스로 발광하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는 놀라워하며 아까 본 구덩이를 생각해내고는 그 광석이 갑자기 생겨난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정색하며 세상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없으며 무언가가 나타나게 된 연유와 원리를 알아가는 것이 학문이라 말했다.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몸이 달아올랐다.
 얼마간 일상적인 강습이 진행되고나서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 광석의 출원을 알려주겠다는 뜻을 밝혔다. 난 기대에 차 그의 말을 기다렸다. 곧 그가 어디론가 손가락을 향했다.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었다. 하늘. 내가 뭐라 답하지 못한채 눈으로 재촉하자 그는 곧 천상도를 펼치며 한구석을 가리켜 보았다. 사수자리 근처였다.
 
 "사수자리의 남두육성 중 네번째 별에서 떨어진 조각이오. 물론 그댄 쉽사리 믿을 수 없겠지요. 의심이 들면 망원경을 통해 살펴볼 것을 권합니다."

 의심이 찾아온 것이 사실이며 난 최대한 그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망원경으로 향했다. 그가 말했던 별은 평소와 다름없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항변하려는 찰나, 구석에 작은 흠집을 발견했다. 배율을 높여보니 영락없이 무언가가 떨어져나간 자리였다.
 난 정리되지 않는 심사를 가지고 다시 그와 마주해 앉았다. 그와의 강습을 통해 난 오랫동안 다져진 천체에 대한 이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지구와 그 위의 인간들에 적용되는 것은 네가지 원소의 원리였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끝없는 변화의 장이었다. 그에 반해 천구는 단 하나의 원리, 에테르의 섭리에 의해 움직였다. 천상은 지상과 다른 원리가 적용되고 그것은 불변하며 언제나 일정한 운동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별이 균열되어 그 조각이 지상으로 떨어졌다는 것은 천상에도 지상의 필변의 원리가 적용된다는 이야기이지 않는가! 난 그간의 천체론을 뒤흔드는 이 발견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다.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간 어디에도 밝히지 못한 이야기를 최초로 말하는 것이니 부디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서두를 떼며. 그의 말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분명히 천구의 운동은 에테르의 원리로 움직인다. 하지만 그것은 천구와 지구가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세계라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상의 네 원리와 천상의 하나의 원리는 서로 일정 부분 간섭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경악한 것은 그가 최근 세운 가설에 의하면 에테르의 원리가 불변의 원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에테르가 불변하는 운동을 지지하는 원소로 인식되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인식이 그것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함을 말하는 것 그 이상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최근 이와 같은 가설을 증명할 단서를 찾아내었으며 내가 이 가설에 대해 관심을 느낀다면 함께 연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심사가 한층 복잡해졌다. 천구의 완전한 운동은 전능하신 분의 섭리이다. 그 분이 속하신 천구는 완벽하게 유지되면서 지상의 인간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고, 전능하신 분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헌데 천상의 원리에 대해, 그 가변성에 대해 한낱 피조물의 지성이 끼어들다니. 전능하신 분의 뜻에 대항하는 일이었다.
 여숙으로 돌아오는 길은 여느 때보다 힘겨웠다. 문득 주임수사의 조언아닌 조언이 떠올랐다. 라지흐카에게 불순한 뜻은 없다고 믿지만 의도와 상관없이 그가 하려는 일은 사악한 일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여차해서 이 일이 다른 이에게까지 알려지면 이단으로 심판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나까지함께.
 여숙의 공기는 어수선했다. 떠도는 중언을 확인하자 나의 무거운 마음은 한층 더 가라앉았다. 이단심판관의 순행이 곧 이 마을에서 당도할 거라는 얘기였다. 갑작스러웠다. 이단심판순행은 미리부터 악의 싹을 끊는다는 의미에서 행해지고 있었고 주로 사람들이 밀집된 도시를 중심으로 이뤄지지 이런 작은 마을에는 올 일이 없다. 더군다나 그들이 곧 임박할 정도로 순행의 일정이 느슨하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사람들과 달리 난 곧 이 일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주임수사는 이미 오래전에 중앙교당에 순행을 신청했을 것이다. 그의 노골적인 적개심을 보고도 왜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가. 순행의 칼끝이 향할 곳은 뻔하다. 이제 당장 라지흐카의 안위가 문제였다. 어쩌면 나도.

Ⅷ.
 온갖 의혹과 불안으로 확신을 가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라지흐카의 새로운 이론에 대한 연구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호기심이 날 강하게 이끌었다. 우스운 일이다. 언신자에게 허용되지 않는 감정 중 최우선이 호기심이다. 하지만 난 이미 과거의 언신자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연구에 동참하자마자 난 그의 연구가 생각보다 상당히 진척되어있음에 놀랐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에 대해 준비해 온 것이다. 그는 우선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한번 보았던 안경과 유사한 물건이었다. 단지 테의 중앙에는 투명한 돌이 아닌 반짝이는 무언가가 박혀있었다. 내가 묻는 시선을 보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별의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을 쓰고 하늘을 볼 것을 권하며 자신도 그것을 썼다. 난 강한 호기심에 이끌려 그가 시키는대로 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별들의 궤적이 보였다. 천체들을 서로 묶고 둘러싼 망이 보였다. 그리고 하늘 위로 무언가 꿈틀거리며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에테르지요."

 그의 침착한 답에 나는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 앉고 말았다. 전능하신 분의 비밀스런 섭리가 마침내 피조물들의 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라지흐카는 송축을 올리며 경배하는 나를 잠시간 바라보다 조금 더 상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가 하려는 바를 알고 난 귀를 막아 그의 음성을 듣지 않고 모든 것을 잊고만 싶었다. 하지만 난 입을 벌린채 끄덕였을 뿐이다.
 그는 단순히 에테르의 흐름을 관찰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지상의 4원소를 통제하고 분류해왔듯이 에테르를 제어하는 방법을 익힐 생각이었다. 그것이 가능한가와 별개로 나는 그것이 하지 말아야할 무엇이라 직감했다. 이건 단순히 전능하신 분의 영역에 발을 딛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 분의 능력이 미치는 곳에 뛰어드는 일이었고, 그 분을 능멸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치밀어오르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난 그에게 동의했다. 우리에 대한 심판은 그 분이 정하시는 것이다. 전능하신 분의 뜻을 헤아려볼 수는 없다. 우리에게 별 조각을 내려 그 분의 원리를 보게한 것은 분명 우리를 당신의 영역으로 이끌려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도 하다.
 이후로 그와 함께 에테르의 운용술을 연구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역시나, 그는 앞서부터 연구를 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정신을 에테르의 궤적에 맞추면 일정한 파가 공명해 에테르가 정신의 움직임에 반응한다고 설명했다. 난 그것이 영혼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지흐카의 지도에 따라 초보적인 에테르 운용을 익혀나갔다. 쉽지 않았다. 한순간이라도 집중력을 잃는 순간 이내 에테르들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전능하신 분의 섭리가 아닌가. 에테르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은 요원해보였지만 언젠가는 익숙해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과연 그 때 일어날 것은 재앙이 아닐지도 걱정되었다. 미천한 피조물이 전능하신 분의 영역에 섣불리 도전했다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지도 몰랐고, 그 분의 진노를 살지도 몰랐다.
 하지만 라지흐카는 그런 것에 대해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지상의 원소들을 연구하는 것처럼 건조하고 진지하게 에테르를 운용했다. 난 그가 복잡한 에테르의 이동을 순식간에 이뤄내는 것에 경탄했다. 그러다 일순간 별이 움직였다. 착시로만 생각했지만 불행히도 아니었다. 아크투르스가 한뼘 정도 옆으로 움직여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난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은 기분에 라지흐카를 돌아보았다. 그는 나와 얼굴을 마주하며 해맑게 웃어보였다. 그가 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 그는 역시 마법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를 고발해야겠다거나 멀리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나도 그 반차에 다다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에테르 운용술은 거듭할 수록 수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한 눈에 수많은 에테르가 움직여야할 길이 보였다. 운용이 나아지는 것이 눈으로 느껴지자 나는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한 고양감에 들떴다. 내 실력이 발전하는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라지흐카의 운용술은 엄청나게 성장해갔다. 그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별자리들의 위치를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향상에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라지흐카는 한편으로 떨어져내린 별 조각들을 연구하는 일들을 함께했다. 그는 별조각의 형질을 조사해 지상의 물질로 그것과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게 가능한지를 연구 중이라 했다. 난 그에게 왜 그 같은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가, 그의 냉엄한 시선을 받고 이내 그것이 어리석은 질문이었으리라 깨달았다.
 라지흐카는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그저 마법과 같은 일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는 처음으로 내게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자신은 모든 사람에게 에테르의 운용이 현실 속의 도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서 그는 자신과 나는 선구자가 될 수는 있어도 마법사가 아닌 평범한 인간일 뿐이며, 모두가 마법사가 되는 세상이 자신이 바라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뜻하는 것에 대한 사념으로 그날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어렵사리 생각을 정리해보는 사이, 갑작스레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침소에서 나가보니 사람들이 마을의 광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이단심판관의 순행행렬이 당도하고야만 것이다. 난 살짝 침을 삼키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타오르는 횃불 아래 이단 심판관의 무리가 고압적인 자세로 모여든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서 굽신거리며 한창 무어라 떠들던 주임수사가 나를 발견하고 뭐라 이단심판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보였다. 조심스레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곧 일단의 교병들이 날 심판관에게로 이끌었다.

 "대보의 전언을 맡은 언신자시라고요? 귀한 객이 계셨군요."

 하크 지기필라라고 이름을 밝힌 심판관은 매서운 눈매로 날 훝으며 물어왔다. 곧 그는 자신이 이 곳에 온 것은 제국에서 사악한 기운을 떨쳐내려는 열망 때문이라며 의례적인 말들을 건네었다. 난 그에게서 어떤 위협의 기미도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도 긴장은 어쩔 수 없었다. 순행 중에 벌어진 모진 고문과 끔찍한 처형들의 소문은 제국 전역에 자자했다. 내가 그런 처지에 놓일 것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조심해야했다.
 다시 여숙으로 돌아와서도 심내는 복잡했다. 주임수사가 어떤 말을 할지 몰랐다. 이곳에 머문 날수를 헤아려보니 어느새 열 닷새째였다. 약정일을 지키려면 내일은 이곳을 떠나야할 것이다. 에테르 운용술에 대한 연구가 중단되는 건 못내 아쉬웠지만 어쨌거나 스스로의 안위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내일은 마지막으로 라지흐카를 방문하리라. 그에게 다음 강습을 기약하고 무엇보다… 어쩌면 그를 피난시켜야할 지도 모른다.

Ⅷ.
 오전에 그의 오두막을 찾아갔지만 그는 근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혹여 벌써 체포된 것은 아닌가 저어하며 서둘러 마을로 내려왔다. 마을은 평온했다. 교당에 머문 이단 심판관 무리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은 없어보였다. 난 적이 안심했지만 쉬이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라지흐카를 찾아 피신시켜야했지만 드러내놓고 그를 찾는 것은 무리였다. 어느새 순행 무리가 마을을 돌며 감시를 시작한 것이다. 난 반쯤 체념하며 들판으로 가 마을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로 했다.
 마침내 모든 인사가 끝나고 이제 이곳을 떠나야하는가하는 고민을 할 무렵에 일단의 무리가 언덕을 오르는 것이 보였다. 주임수사가 앞장서서 순행 무리를 라지흐카의 오두막으로 이끌고 있었다. 차분한 생각이 들어설 틈이 없었다. 난 그대로 라지흐카의 오두막을 향해 달려갔다. 숨을 헐떡이며 가까스로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 오두막의 문은 모두 박살나있고 연구기기들과 분류된 책들과 광물들이 어지러이 흩어져있었다. 난 심판관의 무리 속에서 라지흐카를 찾으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고 그가 어디에도 없음에 안도했다.
 곧 교병 하나가 날 가리키며 심판관에게 뭐라 말을 건넸고 심판관이 교병들과 함께 나에게 다가왔다.

 "아아, 언신자님. 마침 잘 만났습니다. 여기 이 주임수사가 언신자님께서 이 추악한 마법사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교우를 다졌다는군요. 혹여 그가 갈만한 곳에 대한 정보가 없으시나이까? 그의 사술이나 악령과의 교신에 대한 증언도 필요하지요."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로 날 노려보는 심판관의 옆에서 주임수사가 기름진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난 잠시 그를 쏘아보고나서 심판관에게 모르겠노라고 답했다. 심판관이 한걸음 더 다가오며 나직이 말했다.

 "언신자님. 듣자하니 이제 약정일을 지키기위해 떠나실 때가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어서 임무의 종결을 위해 행차하시지요. 이 곳의 사악한 기운을 정화하는 과정은… 아마 언신자님이 보기에 불쾌하실 겁니다. 뭐, 사실… 언신자님의 지위가 언제까지나 방패막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는 것도 아닐테고요."

 난 그들의 협박에 짐짓 굴종한 척하며 그들의 시야를 빠져나왔다. 분명 라지흐카는 근방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행이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눈 앞의 위협으로 인해 연구를 중단하고 도망을 갈 위인이 아닌 것이다.
 오후 내내 더버라 산자락을 헤집고 다닌 끝에야 가까스로 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거대한 구덩이 위에 앉아 무언가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마 지난밤 낙하의 궤적을 보고 새로운 낙성석을 찾아 이 곳까지 온 것이리라. 나는 그에게 긴박한 정황을 전하며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은채 자신의 작업만을 계속했다. 그가 챙겨온 바구니 속엔 철실과 조각도들이 있었다. 그는 에테르의 움직임을 관찰할 안경들을 더 만들어 낼 생각인 것이다. 그가 발견한 낙성석의 크기로 보아 아마 열댓개는 더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제 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셨소?"

 조바심이 났다. 지금은 그와 학문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보다시피 난 천광경을 더 만들 생각이오. 내가 왜 이것들을 만들고 있는지 아시겠소이까?"

 그는 낙성석을 조금씩 떼어내며 물어왔다. 내가 고개를 젓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연구하고 있는 본초학, 광물학, 생물학, 천문학… 이런 다양한 학문의 분야들을 아울러 부를 수 있는 말이 있지. 그건 과학이라 불러요."

 그를 만난 뒤 수없이 생경한 말들을 들었지만 그토록 낯선 단어는 처음이었다. 과학, 과학이라니.

 "나누는 학문이란 뜻이오. 우리 인간은 이 세계를 나누고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에요. 그 과정이 학문이지요. 학문은 또한 연구분야에 따라 이리저리 나뉘지요. 그제서야 학문들 또한 의미를 가지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니까. 그래서 모든 학문의 분야를 아우르는 말이 과학인 겁니다."

 과학, 과학이라. 나지막히 발음해보다 거대한 우주를 입안에서 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 다른 뜻도 될 수 있어요. 사람들끼리 서로 나누는 학문이란 뜻이기도 하죠. 모든 학문은 그 결과와 의미를 사람들 모두와 나눌 때 의미를 가집니다. 소생은 사악한 능력을 터득한 악마도 아니고 위대한 능력을 가진 마법사도 아니에요. 그저 다른이들보다 먼저 사물의 뜻에 접근했을 뿐이죠. 이제 이 학식을 다른 모든 사람과 나눌 생각입니다. 누구나 내가 했던 것처럼 세계를 깨닫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그러면 나의 학문은 더 이상 마법이 아닌 과학으로서 세상을 위해 쓰이겠죠. 지금 도시의 학도들의 학문은 과학도 아니요 제대로 된 학문도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천광경을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조바심이 났지만 한편으로 그가 던져준 새로운 개념에 대해서 고민해볼 것이 많았다. 오랜 시간이 끝나고 작업이 끝나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노을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그는 천광경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오두막으로 갈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이미 어떻게든 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오두막 근처 산등성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있을 때였다. 멀리 타오르는 횃불들 사이로 오두막 근처에 교병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디서도 라지흐카를 찾을 수가 없자 일단 기다려보기로 한 것이 분명하다. 이미 근처의 제국군에게 원조를 요청했을 수도 있다. 다시 한번 조바심이 나 라지흐카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결연히 아래로 향했다.
 순간, 교병 중 하나가 우리를 발견하고 고함을 질렀다. 교병들과 수사들, 그리고 모여든 마을 사람들의 눈이 모두 우리에게로 향했다. 교병들이 활 시위를 당겨 조준하는 것이 보였기에 우리는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심판관이 소리높여 외쳤다.

 "모 라지흐카! 그대는 악의 무리와 소통하고 사람들을 현혹해 전능하신 분의 뜻을 거스르려 했다. 어서 이리로 와 전능하신 분의 심판에 순응하라!"

 라지흐카 역시 큰 소리로 화답했다.

 "나는 그 무엇도 잘못한 바가 없으며 심판을 받아야할 이유도 없소! 나는 그저 사람들에게 알릴 소중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오! 전능하신 분의 뜻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 그대들이야말로 심판 받아야할 것이오!"

 그의 태도는 여전히 결연했지만 난 순식간에 지옥의 문이 열린 것만 같았다. 멀리서도 심판관이 진노해 몸을 뒤흔드는 것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교병들을 향해 사격명령을 내릴 것만 같았다. 이제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도, 말이 통할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다. 라지흐카가 작게 한숨을 쉬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보았는지 교병들도 긴장하며 공격태세를 갖췄다. 라지흐카가 꺼낸 것은 자그마한 천광경이었다. 그는 천광경을 쓰고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무엇을 하려고? 동시에 아래에 있는 사람들 또한 하늘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 틈에 나도 천광경을 쓰고 라지흐카의 운용술을 보았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다른 이들에겐 그저 평범한 밤하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선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충만한 에테르들은 현란하게 움직이며 무수한 궤적들을 만들어냈고… 이어서 에테르의 바다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그 균열은 전갈자리에 미묘한 흐름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전갈자리의 궤적이 미친듯이 흔들렸다. 그대로 떨어져내릴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럼 혹여 라지흐카가 생각하는 것은……?
 곧 엄청난 빛이 지상으로 쏟아졌다. 일찌기 보지 못한 엄청난 빛이었다. 마치 전능하신 분의 광휘가 그대로 지상에 임한 것 같았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그대로 주저앉아 빛에 압도되어 버렸다. 오직 라지흐카만이 굳건히 서서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친듯한 굉음이 온 지상에 울려퍼지고 안타레스가 떨어져나와 지상으로 다가왔다. 엄청난 속도였다.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안타레스가 뿜어내는 오색의 빛에 지상은 낮보다도 밝게 빛났다. 정신을 놓은채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나를 라지흐카가 안고 엎어졌다.
 곧 엄청난 빛과 굉음과 진동이 온 천지를 뒤흔들었다. 아아, 별이 떨어졌다. 이것은 신의 의지가 지상을 관통하는 소리이리라. 찰나의 광포가 지나고, 가까스로 고개를 들자 오두막 근처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있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날 일으켜 세워주고 라지흐카는 득달같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뒤를 따라가보니 자욱한 먼지들이 시야를 가렸다. 겨우 먼지가 가라앉자 구덩이의 가운데에 아직 빛과 열기가 남은 안타레스가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별에 맞아 사람들은 순식간에 타 증발해버린 것이다.
 교병들과 수사들이 증발해버린 구덩이 너머로 마을 사람들이 우릴 바라보며 굳어있었다. 모두가 혼란에 빠져있었다. 경외와 증오와 공포와 환희가 뒤섞인 눈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누구하나 섣불리 소리를 내지 못했다.
 우린 오늘 전설의 밤을 목격했다. 이것이, 이것이 과학인가? 그 무엇보다 마법같은 이것이?

Ⅸ.
 그 밤, 별이 만든 거대한 상흔 위에서 라지흐카는 그 어느 때보다 힘을 담아 자신의 말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모두에게 열린 과학의 놀라운 능력! 평생 농사만을 지으며 교당에 짓눌린 채 힘겹게 살아온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들은 뭔가 불분명한 느낌에 크게 감화받은 듯 했다.
 더구나 이미 모두 한배를 타버렸다. 나 또한 다시는 언신자의 임무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어떤 말로도 용서받을 수 없을테니. 이미 제국군이 이 마을을 쓸어버리기 위해 출병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라지흐카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에테르의 운용을 알려주는 것에 주력했다. 그 밤 이후로 나와 라지흐카는 바쁜 시간을 보내야했다. 내가 맡은 이들 중 가장 성과가 뛰어난던 것은 아무로케였다. 아무래도 어린 아이일 수록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용이해서가 아닐까.
 아무로케를 시작으로, 곧 마을 사람들 또한 빠른 속도로 에테르의 운용을 익혀나갔다. 가장 기본적인 원리와 요령만 익히면 나머지는 부단한 노력만 있으면 되었다. 그리고 곧 그런 절실한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게 되었다. 에테르의 운용법이 퍼져나가면서 그것이 움직이는 기본적인 원리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었던 것이다. 라지흐카는 에테르가 정신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은 정신이 보내는 파동이 에테르가 반응하는 파동과 같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가설을 내어놓았다. 우리는 그 파동을 다른 도구를 통해서도 재현할 수 있는지를 여러모로 시험해보았고, 결국 교당의 종탑과 연결된 거대한 장치를 통해 에테르를 움직이는 것에 성공했다. 이젠 누구라도, 아무런 수련도 없이 우리의 '과학'의 결과물을 이용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일에 선두에 서있는 나조차도,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진 이는 라지흐카 뿐인듯만 보였다.  
 라지흐카는 내게 안타레스의 추락이 신호가 되었을 것이라 말했다. 제국군에게 보내는 신호는 아닐터였다. 그는 세상 곳곳에 자신과 같은 '과학자'들이 분명 있을 거라며 그들이라면 이 낙성을 이해하리고 말했다. 이 세계를 과학으로 재정립할 때가. 그는 안타레스의 추락 이후로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에서 이곳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 말했다.
 그것에 대한 반증은 늦지 않게 찾아왔다. 안타레스가 떨어진지 열하루 정도 지난 밤이었을까, 한순간 에테르가 규칙적인 형태로 모여드는 것이 보이더니 그들 사이로 작은 균열들이 보였다. 글자였다. 대부분의 마을 주민은 물론 문맹이었기에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지 못했다. '환영합니다, 앞서 길을 걷는 사람들'. 그것은 나의 직업에 종언을 고하는 문장이었다. 에테르의 운용은 마침내 새로운 교신 수단을 만들어낸 것이다. 모두가 볼 수 있는 하늘 위로 문장이 떠돈다. 이젠 더 이상 몇달이 지난 소식에 놀랄 필요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의 안부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모두가 문맹에서 벗어나야할 필요성이 생겼고, 지식은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 난 우리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문에 환희하면서도, 여전히 심중의 불편함을 지우지 못했다. 저곳은, 저곳은 전능하신 분의 영역이다. 그곳이 우리의 양피지가 되어도 괜찮단 말인가?
 다음날, 제국군이 곧 당도할 것에 대한 의논자리가 있었다. 에테르를 이용한 교신이 활발해지면서 우리는 제국군의 움직임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미 제국군의 파도에 휩쓸려버린 곳도 상당수이며, 이곳 아너울로 향하는 제국군도 이틀이면 닿을 지척에 있었다.
 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라지흐카를 불러내어 그에게 내가 품고있던 의문을 피력했다. 일순간에 우리는 그전의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기술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능력이 과연 제대로 제어될 수 있을까?  학문이라는 것은 체계적으로 익혀나가야하고 그것이 불러온 새로운 기술에 대해 익숙해지고 시행착오를 거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과정이 없이 곧바로 학문의 결과물을 사용하게 되었다. 과연 우리의 정신적 수준이 우리가 가진 엄청난 힘을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했는가? 누구나 재미삼아 별을 떨어뜨리면 어쩔 것인가.
 라지흐카는 그저 미소를 띄울 뿐이었다. 그는 과학이란 언제나 폭발처럼 다가온다고 말했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발견과 시행착오를 통해 이 문명을 이룬 것처럼 우리의 후손들 또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 세상이 더 나은 것이 되기 위해선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며 그 노력은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고도했다.
 그의 말들을 들으며 난 계속 무엇인가 반박하고 싶었지만 쉬이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는 내게서 몸을 돌려 사람들에게로 향하며 속삭이듯 말을 흘렸다. 언젠가는 천구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은 모두의 생각보다 일찍 실현되었다. 우리 세계의 마지막과 함께. 제국군이 눈으로 보이는 거리까지 진군했던 날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누군가가 종탑장치를 움직여 큰곰자리의 별을 쏟아내린 것이다. 그들은 궤멸되었지만 더 큰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순식간에 알게된 다른 도시와 마을의 사람들도 경쟁적으로 별을 떨어뜨리기 시작했고, 곧 더 많은 별들이 하룻밤 동안 떨어져내리며 천구의 균형을 깨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북두칠성이 쏟아져내렸다. 별들은 바닷물에 튕기며 거품을 일으켰다. 시간이 지나며 더 많은 별들이 자신의 궤적을 지나 지상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은하수가 쏟아져 내렸다. 은하수의 자그마한 별들이 쏟아질 때마다 평원 위에서 먼지구름이 일었다. 좀 더 큰 별들이 덜컹거리며 떨어지기 시작하자 별들의 환상적인 빛으로 가득한 생지옥이 되었다. 별들이 떨어져내렸음 직한 곳마다 형형색색의 빛의 폭풍이 일었다. 곧, 빛의 폭풍은 눈 앞의 현실이 되었다. 금성이 눈부신 빛을 허공에 그으며 자신의 궤도에서 떨어져 나와 마을 중앙의 교당으로 향한 것이다. 교당에 부딪힌 금성은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음과 함께 교당을 박살냈고, 곧이어 거대한 충격파가 순식간에 주변의 조그만 집들을 삼켜버렸다.
 저 멀리 지평선 근처로 막 떠오른 달이 떨어지며 거대한 파도가 이는 것이 보였다. 아마 아마케 해 위였을 것이다. 충돌이 만들어 낸 파도가 더버라 산맥 위로 찰랑거렸다. 아마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거대한 태양이 떨어져 처참한 지옥의 불로 세상을 사르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멸망의 광경은 천구 자체가 무너지는 광경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천구가 붕괴하면서 사이의 미세한 틈이 드러나자 난 엄청난 공포로 굳어버렸다. 가까스로 라지흐카를 돌아봤지만 그는 차분히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모든 끔찍한 광경 속에 넋을 잃은 것인가? 이 광경이 전해주는 경이의 빛에 정신의 찬양을 부르짖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천구 너머에 대한 지식을 기대하고 있단 말인가!
 그가 말한 것에 대한 기다림은 이제 길지 않았다. 곧 있으면 보고 싶지 않아도 마주해야만 할 것이다. 천구 너머 우리에게 금지되어온 비밀의 영역을. 저 너머에서 만날 세상은 어떤 것인가. 천국의 실체가 우리 앞에 드러날까? 전능하신 분과 우리가 직접 마주하게 될까?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어떤 대답을 내놓으실까. 지옥? 천국? 아니면 새로운 지상?
 난 대체 전능하신 분이 왜 이런 시련을 내리시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교만을 벌하시는 걸까? 그 분의 영역에 침입한 죄로?
 아니면 혹여… 그 분은 우리의 학식이 이 천구를 열어젖힐 때까지 기다리신 것은 아닐까? 우리를 둘러싼 이 좁은 세계는 결국 우리가 더 나은 무엇이 되기 위해 열어젖혀야만 하는 감옥이었을까? 세계가 무너져내릴 때마다 나의 지식들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날 휘감는 감정이란 그저 우린 준비가 부족하고 미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능력으로 우리는 아무런 노력없이 새로운 존재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인가? 라지흐카는 그리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무엇도 쉽게 결론 내릴 수 없었다.
 곧 겹겹이 둘러싼 천구들이 지상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제일 바깥의 천구가 옆으로 벗겨지며 마침내 천구 너머가, 천구 너머가… 그 빛이 보였다. 놀라운… 아니 새로운… 아니 또 다른… 그 천구 너머엔,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저 너머엔… 저 너머엔…
 아아, 전능하신 나의 주인이시여, 이 미천한 종을 보살펴 주소서.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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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ror 08.01.04 02:24 댓글 수정 삭제
    파악 님, Mono 님, ltpimento @ paran.com 으로 우편물 수령하실 주소, 성함, 전화번호(택배 발송시 필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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