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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오규수悟窺樹 : 아차상

2007.10.27 13:2910.27

Copyright @ 2007 by박 찬일(Chanee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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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량한 나

나는 열매를 씹었다. 쓴물이 배어나왔다. 입안이 온통 쓰고 비린 맛으로 가득차고 내가 내뱉는 숨결에서조차 쓴내가 났다. 그래도 달게 삼켰다. 한웅큼 가득 집어 입안에 털어넣고 싶었다. 볼이 터지도록  우겨넣고 우적우적 씹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주어진 고 콩알만한 열매 하나를 입안에서 굴리며 오래도록 씹었다. 거기서 배어나오는 약간의 쓴물로 갈라진 목을 축였다. 쓰다. 아니다, 달다고 생각하자. 달다, 달다, 달다, 달다… 역시 쓰다.

2. 오규수의 기원

오규수는 옛사람 도도이어가 쓴 ‘제국의 흥망’에 처음 등장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산속에서 나타나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황제는 죽지 않는 불사의 인물이었다. 그는 강건했으나 잔인하지 않았고 자비로웠으나 우유부단하지 않았다. 그의 나라는 천년의 세월 동안 번영했다. 오규수라는 나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그 두꺼운 설화집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다.

[… 황제의 정원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가득히 자랐는데 이름을 오규수라 하였다. 껍질은 붉고 뿌리는 가느다랗고 잎사귀는 은빛이었다. 봄에는 무색 투명한 꽃을 피웠는데 향기가 황홀하여 사람과 벌과 나비가 항시 그 꽃을 탐하였다. 가을에는 황금빛 열매를 맺었는데 신성한 열매라 하여 하늘에 기원을 할 때는 반드시 젯상에 올랐다. 그러던 어느 해 봄에는 꽃이 피지 않았고 그해 가을에는 열매가 맺지 않았다. 황제가 그를 보더니 깊이 탄식하며 ‘아, 나의 날에도 드디어 끝이 왔구나’ 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나라는 삼년간 홍수가, 다시 삼년간 지진이 끊임없었고 마지막 삼년간은 역병이 돌았다. 아홉 해를 시름시름 앓던 황제는 드디어 천년의 삶을 마치고 불꽃으로 돌아갔으며 세계는 신화의 시대에서 역사의 시대로 넘어갔다.

3. 일의 발단

항상 그렇다. 사건의 발단을 만드는 건 륭과 아라스고, 휘말려 우왕자왕 하는 것은 나의 몫이며, 마키는 뒷수습을 맡는다. 통칭 ‘오규수 사건’이라고 불리는 그 일도 그랬다.

우리의 다과회는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주변 인물들에 대한 담화와 자기 신변에 관한 소소한 잡담 정도. 별로 대중적이지 않아 보이나 우리의 작은 다과회에 한번쯤 시도해 볼 만한 죽순차와, 만약에 차가 실패작이어도 그 불만을 상쇄시킬만한, 이미 마키의 까다로운 입맛으로 검증받은 꿀과자가 적당히 어울리는 그런 정도의 잡담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대화가 끊겼다. 마키가 옆집 사는 중년 부인에 대한 험담을 한 것을 끝으로 아무도 맞장구를 치지 않은 것이다. 이야기는 혼자 할 수 없다. 특히 이런 친목 성향의 잡담에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어, 누군가의 호응이 없다면 머쓱해지기 마련이었다.

공휴일 오후의 느긋한 햇살에 게으른 하품이나 내뱉으며, 나는 누군가가 새로운 화제를 내어오길 기다렸다. 와삭. 아라스가 꿀과자를 베어물었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는 뜻이었다. 후룩. 마키는 죽순차가 마음에 든 다는 듯 한모금을 마셨다. 그녀 역시 기회를 고사한다는 뜻이었다. 나 역시 별반 할 만한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기에 접시로 손을 뻗었다.

자연스레 륭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 역시 죽순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똑같은 일의 반복. 침묵이 이어졌지만 우리는 그걸 그다지 어색해 하지 않았다. 역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나는 창문을 열며 내 차례를 넘겼고, 륭의 순번이 다시 돌아왔다.

륭은 체면때문에 대뜸 말하기는 좀 뭐했던, 그러나 아까부터 말하고 싶어 손가락을 꼼질거리던 그 화제를 꺼내었다. 대체로 륭이 꺼내는 이야기가 그렇듯이, 자기 신상 얘기였다.

“최근 새로운 논문을 쓰고 있어.”
“오, 그래?”

그리고 한박자 늦게, 나는 다시 되물었다.

“어떤 논문인데?”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대답했다.

“오규수의 정체를 확립하는 논문이지.”

4. 불명확

오규수라는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두가 알았으며 아무도 몰랐다. 대중에게 오규수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나무, 황금이 열리는 나무, 혹은 복을 주는 나무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러 신화나 설화 등지에 자주 등장한다. 허나 그다지 일관성이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알려진 효능도 다양해서 그 뿌리를 달여먹으면 만병이 낫고 건강한 사람은 수명이 늘어난다고 하고, 그 꽃은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데 쓰이며, 좀 더 속물적인 이야기로는 말 그대로 황금이 주렁주렁 열려 그것을 소유한 이를 떼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도 있다.

제국의 멸망 이후 존재했던 많은 나라들이 오규수를 깃발에 내걸기도 했고, 오규수 문장은 풍요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 의해 멋대로 부풀려지고 치장된 오규수라는 나무는 신화적인 나무를 지칭하는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다.

오규수라는 이름이 어떻게 붙여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오규수의 열매를 먹으면 깨달음을 얻어 신선이 된다는 설화가 전해져 오는데, 그렇기 때문에 오규수悟窺樹 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 밖에 인두라스의 소수민족 아우규스들의 이름을 딴 것이 와전되었다는 설, 고대 덕진의 언어 중 풍요를 뜻하는 ‘아-ㄹ귀유’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5. 땅콩

그러한 오규수였기에, 학자인 륭이 오규수를 확실하고 공식적인 방식으로 정의내리겠다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덧붙여 보통 사람인 내가 ‘뭔가 쓸데없어 보이는 일’ 이라고 생각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나는 오규수가 콩과에 속해있다고 생각해. 그 중에서도 땅콩.”

륭은 외알 안경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금으로 테를 두른 비싼 외알 안경은 그가 왕립 학술원 교수로써 쌓아올린 학식과 자부심의 결정체였다. 작년 경 처음 그것을 산 이후로, 그는 말을 할 때마다 괜히 그 안경을 치켜올리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땅콩?”

륭을 제외한 우리 세 사람은, 물론 륭 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식물과 관련해 지식을 쌓은 사람들이었다. 마키는 비록 말단이지만 농림정책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나는  글을 쓰는 작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지만 실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농장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입에 풀칠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번도, 오규수가 혹시 콩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는 커녕 오규수라는 나무가 진실로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영 신통찮은 반응에 륭은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남들이 주장한 바 없는 새로운 학설을 입증하여야 더 주목받을 수 있는 륭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반가운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라스가 그의 속을 긁기 시작하기 전까지 말이다.

“땅콩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오규수에 대해 별별 이야기를 다 들었어. 심지어는 오규수가 말을 할 줄 안다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땅콩이라니?”

륭이 책을 통해 지식을 얻기를 택했다면 아라스는 자신이 직접 모든것을 경험하기로 결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험가이고 탐험가였다. 우리 중 누군가 륭에게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주로 아라스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겪은 일’ 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근거를 대었고, 책을 통한 간접적인 지식을 주로 쌓은 륭은 아라스의 주장에 할 말을 잃기도 했다. 허나 이번에는 륭도 강경했다.

“사람들은 자주 착각하지. 오규수, 즉 오규나무라는 이름만 듣고 어떤 나무를 상상하기 마련이야. 아주 거대한 거목, 혹은 고목의 모습으로 오규수가 자주 그려지곤 하지. 그러면서 자연히 그 열매는 흔히 어린아이들이 그리듯 크고 동그란, 사과나 뭐 그런 것이라고 상상하는 거야. 하지만 믿을 만한 서적들의 어디에서도 그런 묘사는 없어.”

밀감 껍질을 벗기던 아라스가 피식 웃었다. 아아, 시작된다. 시작되어 버린다. 아라스의 저 묘한 웃음은 륭의 머릿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격발장치를 건드린다.

“’믿을 만한 서적’ 이란 건 또 뭐야? 오규수의 모습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은 모든 서적을 말하는 건가?”

륭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참을성이 부족하던 학창 시절의 륭은 쉽사리 아라스의 페이스에 말려들었으며, 아라스는 빈약한 근거를 가지고도 화술이 부족한 륭을 손쉽게 요리했다. 허나 이제 자신의 기반을 확고히 한 륭은 그 정도 술수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오규수를 학술적으로 탐구한 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 자연과학이 발달하기 전이기 때문일 테지만…  예를 들어 꽃잎은 무슨 색이고 줄기는 무슨 색이니 하지만 어느 것도 오규수가 쌍떡잎 식물인지, 외떡잎 식물인지 언급하지 않았어. 번식은 어떻게 하는가? 한해살이 풀인가, 여러해살이 풀인가? 열매의 크기는 정확히 어느 정도인가?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없이 말야. 그렇지만, 오규수를 이미 저자 자신의 세계와 동떨어진 환상의 존재로 놓고 글을 쓴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분명히 달라. 그리고 난 후자의 경우를 믿을 수 있는 글이라고 여겼지.”

우리는 –륭과 매번 다투는 아라스도- 모두 륭을 좋아했지만, 그의 장광설은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아라스가 륭의 속을 너무 긁지 않기를 바랬다. 아라스를 납득시키려는 륭이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서론에만 한 시간 가량은 걸리기 때문이었다.

“에퀴녹스 사람 레오 도리토는 그의 저서 ‘기기묘묘한 약초의 세계’에서 오규수의 열매가 ‘치매를 방지하고 기억력을 돕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고 묘사했어. 땅콩 및 견과류에 그러한 효과가 있음은 현대의학에서도 보고되고 있는 바야. 물론 이것만으로는 모자르지. 덱스트럼 슈누커는 오규수의 즙을 짜 그 기름을 바르면 습진과 욕창에 주효하다고 했어. 그 효능에 대해서는 조금 미심쩍지만, 오규수가 현재는 존재하지 하지 않는 종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틀린말이라고만 할 수도 없어. 아무튼 이 부분이 중요해. 기름이라고 한 부분이지. 보통 열매의 즙을 기름이라고 하지 않아. 깨나 콩 등을 짰을 때 기름이 나오는 것 아니겠어? 과일이라면 기름이라고 하지 않고 과즙이나 뭐 그런 말을 썼을 거야.”

그 밖에도 여러 인물들과 저서들이 언급되었다. 1800년 전 고대 에퀴녹스의 레오 도리토부터 시작해 비교적 근대의 에기람이나 그릿츠, 혹은 최근에 작고한 고전학 교수 쉬우창의 논문에 이르기까지 그가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그가 댄 이름 중의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의 박식에는 감탄했다. 그의 논리에 아무 반론도 생각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럴 이유도 없었던 나는 이미 오규수 콩과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6. 껍질

맞아. 땅콩이라고 했다. 어쩌면 이 지독한 쓴맛은 껍질채로 씹어서일지도 모른다. 쓸모없는 껍질은 버리고 속알맹이를 취하라는 말도 있잖은가. 이번에는 껍질을 벗기고 먹어보자.

캄캄한 암흑 속에서 흙벽을 더듬었다. 오규수의 가느다란 뿌리가 만져졌다. 실처럼 가느다란데도 철사처럼 질기다. 그 뿌리를 헤치고 열매를 따내는 일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손가락마다 베인 상처 투성이다. 아! 실수다. 선뜩함이 등골을 내달렸다. 손톱과 손가락 사이를 베였다.

날카로운 아픔은 이를 시리게 만든다. 치통이 있는 이빨을 송곳으로 건드릴 때와 같은 느낌이다. 가만히 놔두어도 아프고, 만지면 더 심하다. 어줍잖게 건드리면 차가운 불꽃이 혈관과 신경을 온통 긁어내는 기분이 된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손을 들어 벽을 후려쳤다.

돌에 부딪친 손등이 화끈하다. 뼈까지 울리는 둔중한 아픔이다. 차라리 이 쪽이 낫다. 그제야 겨우 수선피우기를 그만 둘 수 있었다. 손을 쥐기가 힘들 정도로 지릿한 아픔이 남아 있지만, 덕분에 손끝의 아픔은 잠시 잊을 수 있다.

힘이 빠진 손으로, 겨우 오규수 열매를 찾아냈다. 칠흑같이 어두운 속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돌과 헷갈릴 염려는 없다. 이토록 매끈한 돌이 있을리가 없다. 나는 껍질을 벗기려 노력했다. 작은 열매를 손 안에서 문대어본다. 땅콩을 깔 때와 비슷한 느낌. 하지만 나는 곧 깨달았다. 오규수는 땅콩과 비슷하지만 땅콩이 아니다. 땅콩의 껍질은 큰 주머니 안에 두 개의 땅콩이 들어가 있는 형태다. 그러나 오규수는 그렇지 않다. 콩알처럼 작은 열매가 저혼자 존재한다. 어디에도 꼬투리는 없다.

나는 오규수의 껍질을 벗겨내는데 성공했다. 땅콩의 얇은 속껍질과도 다르다. 좀 더 두껍고, 좀 더 저항력을 가졌다. 가죽으로 만든 골무와 비슷한 느낌이다. 알맹이를 삼켜 보았다. 정말 작다. 혹 나는 껍질이라고 여기며 과육을 벗겨낸 것이 아닐까. 이건 마치 씨앗같다. 몹시 딱딱하고 메말랐다. 그러나 씨앗일 리는 없다. 땅콩에 따로 씨앗이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새로운 난제에 부딪혔다. 륭의 연구는 오규수가 땅콩에 가깝다는 결론을 냈다. 그러나 껍질을 벗겨낸 오규수는 마치 사과 씨앗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륭의 연구는 틀렸던 걸까? 오규수는 땅콩과 다른 것일까?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껍질을 씹었다. 쓴 물이 가득 배어나왔다. 씹고 씹고 또 씹어, 그 쓴물이 다 빠져 없어질 때 까지 씹었다. 삼키지 않고 입에 모은 쓴 물을 마지막에 삼켰다. 갈증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7. 다툼

“듣기에는 그럴 듯 하군.”

아라스는 좋은 친구지만, 저런 깔보는 표정을 하는 그는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얄밉다. 나를 향한 표정도 아닌데 이렇게 화가 나는 걸 보면, 륭이 얼마나 인내심이 강한 지 알 수 있다. 하기사 학창 시절의 두 사람은 주먹다짐도 어지간히 많이 했다.

“듣기에는?”
“그래,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넌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어.”

아라스는 일어서서 밀감 껍질을 집어던졌다. 그는 운동신경이 좋고 만능 스포츠맨이다. 밀감 껍질은 정확하게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장난스레 던진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깨끗한 자세였다.  관객 중의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았지만 그는 정중하게 –다분히 장난기 어린-   답례의 인사를 하고 말을 이어갔다.

“너의 논리는 이론을 위한 논리야.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아. 네가 언급한 책들 중 단 하나라도 완벽하게 입증된 책은 없어. 즉, 네가 언급한 그 책들의 내용이 모두 ‘신뢰할 만 하다’ 라고 하는 전제를 깔지 않고서는 너의 논리는 성립되지 않지.”
“그야 대부분의…”
“너의 추론이 아무리 그럴 듯 하고, 논리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맞아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어. 다르게 말하자면, 너의 이론은 모두가 가설이며, 언제까지고 가설일 뿐이야. 부정할 수도 없지만 입증할 수도 없는 거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는게 뭐지? 아무것도 없어.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기초로 다른 가설을 세우고, 그래서 가설과 가설을 쌓아 사실을 만들어 내기라도 할 건가?”
“그게 아니…”
“그게 아니면 뭐지? 처음부터 너의 연구는 뭔가 대담한 내용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하는 것 아닌가? 학술원에 들어간지 2년 가까이 되는데 아직까지 별다른 실적이 없으니 말이야.”
“아라스!”

날카로운 목소리는 마키의 것이었다. 아라스는 왜 그러느냐는 듯 마키를 돌아보았지만 그녀의 사나운 눈초리에 기가 죽었다.

“왜?”
“륭에게도 이야기할 기회를 줘야지! 뭔가 반론하려 하는데 네가 계속 가로막잖아. 그건 옳지 못한 태도야.”

우리들 중에 마키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랬는데, 나는 그 이유를 거의 짐작하고 있었지만 한번도 입 밖으로 내놓은 적은 없다. 그것은 우리 셋 모두, 아니, 마키를 포함해 우리 넷 사이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그 금기를 범함으로써 넷 사이의 관계에 어떤 극적인 변화가 오는 것 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왔다. 너무 오랫동안 불문율이었기에 지금쯤 유야무야 없어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아라스의 반응을 보면 그 불문율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마키에게 반발하지도 않았다. 마키는 륭에게 윙크를 보내었고, 륭은 떨떠름한 미소로 답례했다.

“흠, 흠. 좋아. 아라스의 말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냐. 즉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입증함으로써 가설을 더 이상 가설이 아닌 진리로 만드는 것이 옳은 거지. 그러나 명명백백한 입증을 하지 않더라도 학계에서는 이미 가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설을 펼치는 것이 관행이 되어 왔어. 현실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론의 경우, 반대로 그것을 부정할 근거가 있는 가를 살펴본 뒤,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에 맞설 만큼 논리적인 다른 이론이 없는 경우 그 가설을 받아들이는 거야. 물론 그것은 가설로 남으며 그것을 부정할 다른 이론이 나올 경우 바로 폐기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가설 자체가 무의미하지도 않을 뿐더러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여러 방법으로 입증되는 사례가 무궁무진하게 많으며…”

마침 전화가 왔기에, 나는 륭과 아라스의 가열된 토론의 장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얼마전에 경미한 추돌 사고로 손상을 입은 내 차의 보험처리에 관한 전화였기 때문에, 나의 통화는 길어졌고, 내가 사건정황을 설명하는 사이에 륭과 아라스는 순차적으로 집을 떠났다. 두 사람 다 문을 때려부술 듯 거칠게 닫으며 나선 덕분에, 그들이 어른스러운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8. 갈증

갈증을 잊기 위해서는 목이 마르다는 사실에서 생각을 돌려 다른 것으로 머리를 꽉 채워야 했다. ‘갈증을 잊기 위해 다른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다른 것을 생각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많은 시도들  중 하나가 바로 오규수에 관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규수는, 말하자면 내 갈증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급수원이었고, 따라서 오규수를 생각하면 자연히 나의 갈증이 연상되었다.

목구멍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껍질들이 벗겨져 버석거리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목을 축일 한 그릇의 시원한 물을 갈망했다. 두손 가득 떠올릴 때의 차가운 출렁임, 이를 시리게 하고 말라붙은 혀를 적시는 청량함, 목구멍을 가득 채우고 꿀꺽 내려갈 때의 충만함 – 그리고 그 후에 끄윽 하고 올라오는, 좀 지저분한 트림까지도 나는 갈망했다.

그러나 적어도 지난 수십 시간동안 나에게 그런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시간 감각을 거의 잃고 있었기에 그것이 다만 하루였는지, 여러날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내가 느끼기에 그것은 수십 시간이었으며,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이상 내가 체감한 시간이 수십 시간이라는 것에 또다른 이견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의 시간은 암흑과 고독과 갈증에 비틀려 지독한 느림보가 되어버렸다.

가끔, 난처한 상황에 처한 나는 이런 생각을 곧잘 했다. ‘아, 시간을 빨리돌릴 수 있다면-‘ 하고 말이다. 비디오의 재미없는 장면을 빨리감기로 지나쳐 버리듯 – 그러나 완전히 장면을 건너뛰는 것이 아닌, 빠르게 움직이는 화면을 보며 무슨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혹 중간에 재밌는 장면이 없는지 확인하면서 – 그렇게 말이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암흑 속에서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리기를 바랬다. 그리고 나는 다시 구조되어, 일상 생활을 살며 ‘아 정말 지독한 시간이었었지’ 하고 이 순간을 회상하길 바랬다. 그러나 이럴 때일 수록 시간은 가혹하리만치 느리게 간다. 집에 재미있는 게임을 사다 두었으면 수업 시간이 평소보다 길고, 버스 안에서 화장실이 급하게 되면 버스에서 정류장까지의 거리가 한없이 길어진다. 시간의 이야기를 하다 잠시 공간의 이야기를 했지만 시간과 공간은 애초에 뗄래야 뗄 수 없으므로 하나로 묶어 이야기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어쨌든, 시간은 빨리 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더 느리게 간다. 내가 아마 하루쯤 지나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쯤 사실은 두어시간 밖에 흐르지 않았다던가 말이다. 점점 더 심해지는 갈증에 목구멍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후비고 싶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침착하게 생각하려 애썼다. 내 실종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려면 적어도 하루는 필요하다. 륭과 아라스는 그저 내가 길을 잃었거니 할 터이니, 그들이 경찰에 연락하거나 조직적으로 나를 찾아 나서기까지는 그 정도는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찾아내기까지 이틀 정도가 걸릴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지나쳤던 길들을 샅샅이 뒤질 테고, 우리가 탐사했던 동굴을 뒤지는 데만 하루는 소모할 테니, 내가 빠진 굴혈을 찾아내기까지는 그 정도 걸릴 것이다. 운이 좋으면 더 빨리 찾을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운이 나쁘면 더 오래 걸릴 가능성도 있다.

문득문득 생각날 때마다 힘을 내어 소리를 질렀다. ‘어어이- 어어이-‘ 정확히 시간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규칙적으로 하겠지만, 전혀 시간을 알 수 없는 지금은 그저 아무때나 생각날 때만 할 뿐이다. 누군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한 채, 나는 고장난 알람시계처럼 소리를 질렀다.

시간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큰 절망이다. 우습게도 내 손목에는 시계가 채워져 있다. 아날로그 시계이지만 방수 기능도 있고, 스톱워치 기능도 있다. 50년 전통의 시계회사 아겐하이드의 제품 답게 2년이 넘게 차고 다녔는데도 여전히 정확하고, 물건을 험하게 다루는 내 손아귀에서도 전혀 파손되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기까지 했다. 디자인도 내 마음에 꼭 드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나로하여금 녀석을 사게 만든 그 모든 장점들보다도 단 한가지 단점이 나를 슬프게 했다. 나의 아겐하이드 시계에는, 애석하게도 야광 기능이 없었다.

전혀 보이지 않는 시계를 애써 눈 앞으로 들어올려 보며, 나는 예전 일을 떠올렸다.

“근데 시계에 야광은 좀 촌스러워 보인다, 야.”

언젠가 아라스의 새 시계를 보며 마키가 했던 말이다. 그런 말을 한 마키를 탓해야 할지, 아니면 시계를 살 때 마키의 말이 문득 걸려 야광이 없는 시계만을 고른 나를 탓해야 할지 나는 몰랐다.

나는 발단을 제공한 아라스를 탓하기로 했다.

9. 마키

“다 어디갔어?”

마키는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비록 보진 않았으나 상황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특별히 내가 추리력이 뛰어나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지금과 같은 상황을 수도 없이 겪어봤기 때문이다. 종종, 서로간의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한 륭과 아라스는 다시는 서로 안 볼 것처럼 식식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곤 했다. 나와 마키가 중간에서 중재하면 마지 못한 척 화해할 테니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또야? 녀석들도 어지간 하군.”

나는 한숨을 쉬며 마키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조금 고민되었다. 나는 륭처럼 지식을 많이 쌓지도, 아라스처럼 경험이 많고 자신만만하지도 않았다. 결국 말문을 여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 중의 하나를 택했다.

“마키는 어떻게 생각해?”
“아아, 포기야 포기. 자기들끼리 알아서 화해하라고 해.”
“아니, 그거 말고.”

문득 그녀의 옷차림에 눈이 갔다. 헐렁한 반바지에 한 사이즈 큰 티셔츠, 밑창이 너덜거리는 샌들. 양말을 신고 샌들을 신어주는 무신경함에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우리를 만날 때, 그녀는 집에서 입는 그런 옷으로 찾아온다. 너무 무신경하고, 빈틈이 많다. 늘어진 셔츠의 구멍 속으로 슬쩍슬쩍 비치는 그녀의 속살이 유난스레 눈에 띈다. 꼭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일 때 말이지. 아아, 어쩔 수 없는 남자의 비애여. 나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오규수 말야. 륭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

마키는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남자들은 참 바보구나.”

아, 이런. 눈치채였나. 그래, 여자들은 민감하다지. 음흉한 시선 같은 건 충분히 느꼈을 거야. 마키는 좋은 친구였는데, 이를 어쩌나. 남녀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어 버리면 어색해 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휘저었다.

“그걸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던 거야?”

당황스럽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어설프게 웃었다. 진지하다면 진지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하하, 진지하게 생각했다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현상, 혹은 불가항력이었다고나 할까, 뭐 그렇게 되버린 거야. 그게 그렇잖아?”

마키는 무릎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묘한 표정이다. 대게 사람들이 여인을 두고 고양이에 비유하곤 하는데, 마키는 고양이보다는 강아지에 더 가까웠다. 사람을 뚫어질 듯 올려다보는 – 그녀는 키가 작다 -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특히나 말이다.

“아니 뭐, 너는 그런 점이 귀엽긴 하지만 말야…”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래도 그런 바보같은 논쟁에 정말로 관심을 가졌다는 건 좀 놀라운데.”

나는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사소한 오해였다. 마키는 나의 음흉한 시선 같은 것에 신경쓰는게 아니었다. 둔감한 건지, 스스럼이 없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짧은 순간이나마 걱정했던 나는 겨우 안심이 되어 술술 말을 풀어갔다. 심지어는 마키를 약간 나무라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런 말 하면 안되지. 륭은 자신의 연구에 진지하단 말야. 아라스도 시비조이긴 하지만, 륭이 언젠가 말한 적이 있어. ‘아라스에게 쓸데없이 꼬투리를 잡히는게 싫어 더욱 철저히 공부한다’고.”
“아아, 알았어. 그치만 오규수 같은 게 무슨 상관이야. 사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륭이 상처받을 까봐 그런 말을 하지 못했던 것 뿐이지.”

바보같은 데에 열을 올리는 자신의 주변 남자들에 대해 – 나도 포함하여 – 실컷 험담한 마키는 마지막 꿀과자까지 다 집어먹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와 정확하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오후 햇살에 비치는 그녀의 흰 속살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녀도, 나도 오규수는 뒷전이었다.

10. 숫자 십팔

갈증에 대해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마키 생각을 한 덕분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잊고 있던 갈증이 다시 생각나 버렸다. 나는 천천히 손에 쥔 오규수 열매들을 세아려 보았다. 열 아홉 알. 손끝이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오규수의 뿌리를 헤집은 끝에 모을 수 있었던 모든 것이다.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하나씩 따먹었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게 될 때 까지 마음은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제 알아버렸다. 이 열 아홉 알의 오규수 열매가 내 한계다.

이야기 속의 오규수 열매는 주먹만하고 커다랗다. 때로 사람 머리통만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의 오규수 열매는 자그맣다. 땅콩만하다. 빌어먹을! 어째서 륭은 오규수를 땅콩과라고 했을까. 아라스의 말이 맞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라스의 말대로라면, 이야기 속의 오규수 대로라면 오규수는 사과만하거나 수박만했을 것이다.

… 황금이라서 못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한 알을 입 안에 넣고 씹었다. 익숙한 쓴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싫어하는 것도 자꾸 먹다보면 괜찮다고, 그런데로 고소한 맛도 나는 것 같다. 게다가 열 아홉 알 밖에 남지 않은 내 모든 식량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이나 맛나다.

이제 남은건 열 여덟 알이다. 십팔 알. 의미심장한 숫자다. 나는 되뇌었다. 십팔. 한번 입 밖으로 내니 거리낌도 사라졌다. 십팔십팔십팔. 십팔놈의 새끼들. 마키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아라스와 륭, 두 십팔놈의 새끼들을 따라오는게 아니었다.

11. 륭과 아라스

륭과 아라스와 마키가 이틀 간격으로 나를 찾아왔다. 처음은 륭이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내가 그렇기에 잘 알지만, 륭도 그다지 시원시원한 성격은 아니다. 아라스가 그의 머릿속에 있는 어떤 스위치를 건드리기 않는 한 그는 대단히 답답한 사람이다.

“아니, 지난 번에는 인사도 없이 떠나서 미안하기도 하고…”

우물쭈물하는 폼새가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라고 해서 단도직입적이지는 않아서, 우리의 대화는 일상적인 – 그러나 너무 길게 이어져서 비정상적인 – 인사치레만을 빙빙 맴돌았다. 자연스럽게 본론을 유도해낼 만한 말주변도 없는 우리 두 사람의 의미없는 대화는, 결국 할 말이 있는 쪽이 먼저 본론을 꺼냄으로써 끝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와의 화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기에 엉뚱하기까지 한 이야기였다.

“우리 여행 가자.”
“여행?”

뜬금없이 화제를 바꾸는 륭에게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나 자신도 그럴 때가 많으니 어련히 이해하는 것이다.

“무슨 여행을 말하는 거야?”
“고도 제도에 갈거야. 나랑, 아라스랑. 같이 가자.”

고도 제도라. 난 고개를 갸웃했다. 남쪽 바다 어딘가에 있는 섬들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특별히 관광의 명소라고 알려져 있지는 않다. 워낙에 외진 곳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전혀 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알기로 고도 제도는 지구 반대편에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아니 갑자기 왠 고도? 게다가 난 비행기삯도 없다고.”
“괜찮아, 내가 내줄게. 넌 몸만 오면 돼.”

사실 귀찮았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보다는 익숙한 것을 반복하는 쪽을 선호하는 나에게 여행이란 신선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목 매달고 가고 싶어할 만큼 매력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비행기삯을 내준다는 그 한 마디에 왠지 가는 쪽으로 마음이 동한 것은 왜일까.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또 가줘야지. 근데 왠일이야? 갑자기 이런 여행을 계획하고.”

나는 근래 드물게 기분이 들떠 이것저것 챙겨야 할 물건들 – 주로 우리가 먹어치울 고기와 술– 에 대해 이야기했다. 륭은 비행기에 실을 수 있는 짐에는 한계가 있으니 적당히 준비하라며 웃었다.

“아, 근데 마키도 불러야지.”

륭이 불편한 미소를 흘렸다.

“마키는 안간대. 일해야 하니까.”

하긴 백수나 다름없는 나와는 달리 마키는 엄연한 직업이 있었다. 공무원 밥그릇이야 철통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래도 그녀는 꼬박꼬박 출근도장을 찍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에이, 뭐. 잘됐네.”
“뭐가?”
“마키 말야. 가끔은 같이 안 다니는 것도 좋지. 아무래도  남자들간의 이야기를 하기가 불편하잖아.”

나는 며칠 전 마키와 단 둘이 있을때의 불편함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마키가 우리들 사이에서 차지하고 있는 미묘한 위치도. 멀리까지 여행을 가서 그런 불편함을 떠안고 있을 필요도 없지, 하고 생각하자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그렇지?”

륭은 한번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거야? 고도 제도로 여행이라니, 무슨 생물학자라도 된 거 같다 야.”

인간의 손길이 거의 타지 않은 고도 제도가 그나마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대륙과 단절된 채 오랫동안 독자적인 진화를 거듭한 생물들이 섬마다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학자들의 가설에 따르면 고도 제도는 태초의 대륙 대이동 때 떨어져 나온 섬들이며, 그 이후 바다를 건너올 수 있었던 생물을 제외하고는 어떤 생물도 새로 유입되지 않았다 한다.

때문에 독특한 식생의 생물들을 연구하기 위해 학자들이 자주 방문하고, 유명한 학자들이 몇차례 고도 제도의 식생을 바탕으로 진화에 관한 새로운 설을 입증하기도 했다. 때문에 연구차 찾아오는 학자들을 위한 숙소와 경비행기의 착륙장은 있지만, 유흥시설 등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그런 곳이다. 휴가를 위해서라면 더 좋은 곳도 얼마든지 많으니, 이번의 여행지 선택이 조금은 의아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연구차로 떠나는 여행이야. 마냥 한가한 휴가는 아니라고.”
“엉? 연구?”
“그래. 오규수 연구 말이야.”

며칠간 까맣게 잊고 있던 오규수 이야기였다. 륭과 아라스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척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나로써는 오규수와 고도 제도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얼른 알아차릴 수 없었다. 륭은 – 그가 원하는 주제에서만 한정적으로 발휘되는 – 배려의 차원에서 설명해 주었다.

“에기람은 현존하는 어떤 식물 중에서도 각종 설화속에 등장하는 오규수와 꼭 닮은 것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서, 혹 오규수는 이미 멸종하거나 다른 식물로 진화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했지. 물론 그의 연구는 식물의 진화에 관한 것이었으니 만큼 하나의 통일된 모습으로 묘사되지 못하는 오규수는 그리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어. 그는 농담처럼 ‘오규수가 사람 사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면, 사람 살지 않는 곳에는 오규수가 있을 수도 있다.’ 라는 말을 남겼지.”
“그래서, 고도 제도에 찾아가면 오규수가 있을 거란 말이야? 미안하지만 그건 좀… ”

웃으며 고개를 젓는 그의 모습은 나를 의아하게 했다.

“그렇게까지 생각한 건 아니야. 하지만 문헌 속이 아닌 현실에서 나의 가설을 증명할 방법을 찾아보라는 아라스의 의견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렇지않아도 아라스는 고도 제도에 한번 여행을 갈 참이었는데, 가서 오규수를 한번 찾아보지 않겠냐고 하더군. 가능성은 있어. 고도 제도는 대륙과는 다르고, 환경이며 기후가 거의 변하지 않아왔지. 즉 오규수가 고대 문헌에 가까운 형태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을 가능성도 높지.”

나는 륭이 자기 이야기에 스스로 몰입해 버리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얼른 말을 끊었다.

“흐음, 네가 아라스의 의견을 따르다니, 의외인걸.”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 어차피 큰 기대는 하지 않아.”

륭은 고도 제도가 더운 지방이라 하더라도 반팔과 반바지는 되도록 피하라는 둥의 조언을 몇 가지 하고는 곧 떠났다. 나는 생각치도 않았던 여행에 들떠 농장의 일을 미리 정리하고 장을 보러 가는 등의 준비로 부산했다. 아라스가 방문한 것은 막 자외선 차단제를 사러 나가려던 참이었다.

“여어. 어디 가는 길이야?”
“아라스!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그냥. 친구가 보고 싶어서 온 것 뿐이야.”

아라스는 흔히 말하는 인기 많은 남자의 조건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훤칠하니 키가 컸고, 만능 운동선수였으며, 얼굴은 곱상한데다 화술도 떨어지지 않았다. 륭처럼 갑부 집안인 것은 아니나 부모님이 두 분 다 의사여서 돈 걱정은 별로 안 한다. 단 한 가지, 역마살이 끼었는지 툭하면 어딘가로 떠나기를 좋아하는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도 매력적으로 보인다니 충분히 여자가 따를 만도 하다. 그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데 소홀하다는 것은 아니나 특별한 일 없이 우리 집을 대뜸 찾아올 만큼 한가한 녀석이 아니었다. 그가 좋다고 만나자는 여자들이 줄을 섰음은 물론이고, 술 한잔 하자거나 어디 놀러가자고 부르는 남자들도 태산처럼 많았다.

“시간 좀 있어? 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 보였다. 나는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차가운 사과쥬스를 한 잔 내왔다. 꼭 술이라도 한 잔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집에 술은 없었다. 아라스는 그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나는 어쩐지 불안해졌다. 그때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불길한 짐작이 들었기에 나는 얼른 침묵을 깼다.

“이번 여행, 네가 가자고 했다며?”
“아, 응. 뭐, 그랬지.”
“뭔 일이라도 있어? 평소엔 늘 혼자 다녔잖아.”
“그냥 우리끼리 여행한 지도 오래된 것 같아서.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한 번도 같이 간 적이 없잖아.”
“그보다 륭의 연구를 도와주려는 거 아냐? 가서 오규수를 찾아보자고 했다면서. 그래서 고도 제도로 가자는 거고.”

아라스는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는 잔을 매만지며 한참을 있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 어딘지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륭 같은 녀석을 위해서가 아냐. 오히려 그 반대면 반대지. 나는 녀석의 논문을 꺾을 생각이야.”
“논문을 꺾어?”
“쓸데없는 짓을 그만두게 해 준다는 거지. 난 설화속의 오규수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륭이 주장하는 땅콩 따위는 절대 아니라고 믿어. 요즘의 학자들은 설화나 신화 등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과장이거나 비유, 혹은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나는 학자들이 모르는 진짜 세계를 알고 있어. 그들이 갇혀있는 좁은 세계가 아닌, 이 넓은 세계에는 정말로 신비한 곳도 있고 정말로 아름다운 곳도 있어. 어두운 서재에 쳐박혀 책장만 넘기고 있는 그들은 평생이 가도 볼 수 없는, 진짜 감동으로 사람의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그런 것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

거기까지 단숨에 말한 그는 목이 마른지 잔을 비웠다. 그가 쥬스를 마실 때 그의 목젖이 꿀떡꿀떡 움직였다. 나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은 내 목젖을 생각하며, 왠지 그의 목젖마저 남성적으로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륭에게 고도 제도의 신비한 생물들을 보여주며 설화속의 오규수는 실존하고 있을 거라는… 어라.”

그가 소파의 쿠션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조금 의외의 물건이었다. 작고 하얀 양말로, 누구의 것인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 집에 왔던 사람 치고 저런 사이즈의 양말을 신는 사람은 한 명 뿐이다. 나와 아라스의 표정이 동시에 변했다.

“… 마키의 양말이 왜 여기있어?”
“난들 알겠냐. 아마 지난번에 왔을 때 벗어놓은 모양이지.”
“지난번?”
“그래, 너랑 륭이 나 전화하는 사이에 가버렸던 때 말야.”

아라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걔도 여자애가 되갖고 너무 칠칠치 못한 거 아냐? 양말을, 그것도 한짝만 떨어트리고 가는 녀석이 어딨어?”
  
나는 혀를 차며 웃었지만, 아라스는 웃지 않았다. 애초부터 웃을 기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지긋이 양말을 바라보다가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사실 처음부터 하려던 이야기는 마키에 관한 거야.”
“마키?”
“그래.”

나는 문득 고등학교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냈다. 그때도 아라스는 나만 따로 불러 이야기를 했다. 그때는, 내가 마음을 터놓을 만한 친구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지금은 부담감만을 느꼈다.

“나는 마키를 좋아해.”

심장이 옥죄는 기분이었다. 그때와 완전히 똑같은 대사였고, 나는 다음 대사도 유추할 수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마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거야.”

그는 이해를 구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륭이 있어. 거기서 모든 문제가 출발하지.”

그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를 미워하려고 하는 건 아냐. 하지만, 사사건건 마키가 녀석의 편을 들 때마다 마음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질투가 일어나. 녀석이 얄밉고, 한대 먹여주고 싶은 생각마저 들어. 그렇지만, 그래도 륭은 내 친구야.”

고등학교 때에도 그랬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편이 될 수도, 륭의 편이 될 수도, 그렇다고 나 자신의 편이 될 수도 없는 나는 그저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마키가 마음을 정하지 않는 한, 난 앞으로도 영원히 지금과 같은 딜레마에 빠져 있을 거야. 난 애매한 건 질색이야. 어떤 결말이건 끝을 봐야겠어.”
“그럼, 이번 여행도…”
“… 오규수는 핑계일 뿐이야. 이번에야말로 마키의 마음을 듣겠다, 라는 각오였는데… 정작 마키는 안간다더군. 어쨌든 상관없어. 이번 여행에 가면 륭과 확실하게 이야기하겠어. 나는 마키를 좋아한다. 너도 마키를 좋아한다면, 둘 중 하나가 물러나자 라고.”

그가 나를 보며 힘겹게 미소지었다.

“너라면, 증인이 되어 줄 수 있겠지?”

나 역시 아주 힘겹게 웃는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입꼬리의 경련을 감추는데 성공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 물론.”

12. 절망

오규수의 열매는 아홉 알이 남았다. 나는 마침내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구조대는 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내가 죽어, 뼈만 남게 될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탐사대가 굴을 파다, 나의 뼈를 발견하고는 이런 이야기를 하겠지.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200년쯤 전에 실종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유골인가 보군.’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다. 아직 배고픔과 갈증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끝없는 신호가 되어준다. 이미 죽어버렸다면, 그래서 소위 말하는 영혼만 남은 상태라면 배고프고 목이 마르지는 않겠지.

매 순간 기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소리지르지 않았다. 그럴 기운조차 잃어버렸다. 그들은 나를 찾으려는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많이 소리쳐 불렀는데도 내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소리가 닿지 않는 곳까지 떨어져 내려와 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인간이 버틸 수 있는 날이 며칠이더라. 언젠가 과학 잡지에서 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기억나지 않았다. 역사를 좋아해 열심히 공부해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다 알면서도 끝내 연도를 외우지 못해 시험을 망치는 나 답게도 말이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있다. 남는 것은 지독한 기갈과 외로움, 공포로 서서히 미쳐버리는 나 자신 – 혹은 미쳐버리기도 전에 먼저 찾아올 죽음이겠지.

나는 와락 하고 가진 오규수 열매 모두를 입안에 우겨넣었다. 여기에 떨어진 이후, 나는 처음으로 소원하던 바 한 가지를 이뤘다. 이 빌어먹을 열매를 입안에 잔뜩 넣고 우적우적 씹고 싶다는 소원 말이다. 가득 배어나오는 쓴물로 갈증을 달래며, 나는 눈물 흘렸다. 나는 벌써 후회하기 시작했다.

13. 마키

아라스가 찾아온 그 날로부터 정확히 이틀 후에 마키가 나타났다. 찾아왔다기 보다 나타났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내가 이층에서 가방에 속옷을 챙겨넣고 내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보통이라면 초인종을 누르지 않은 것에 의아해했겠지만 – 그리고 불쾌했겠지만 -  마키라면 이해가 갔다.

“어? 마키, 언제왔어?”

평소의 그녀라면 문단속 좀 잘 하라며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별 다른 대꾸 없이 지긋이 나를 노려보았다. 팔짱을 끼고 있는 폼이, 무언가 단단히 뿔이 난 폼새였다.

“너 일요일에 청소 안했지?”
“어…? 어, 그날 마침 륭이 찾아와서 말이야. 여행 가기로 했거든. 그래서 좀 정신이 없었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이걸 봐!”

마키가 심한 발냄새를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코앞에 양말이 들이밀어졌을 때 즐거워할 사람은 없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키와 양말을 번갈아 쳐다보는 나에게 기가 막혔는지, 마키는 양말을 흔들며 소리질렀다.

“대체 내가 왜 이걸 아라스한테 받아야 하는데, 이 바보 멍청아!”

나는 잠시간 사소한 오해를 했다. 물론 이후에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 오해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지, 당시에는 완전히 그렇게 믿었다. ‘마키는 아라스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나는 한편으로는 미안하면서도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아 하루쯤 청소 안 할 수도 있지, 그까짓거 가지고 엄청 뭐라고 하네. 애초에 거기다 양말을 벗어두고 간 네 잘못이지.”
“뭐?”
“별로 틀린 말도 아니잖아.”

마키는 애써 화를 억누르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폭발할까 약간 두렵기도 했지만, 그때 나는 뭔가 비뚤어져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는 겨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 여행 가기로 한거야?”
“응? 아, 어.”
“진짜 갈꺼야?”
“모처럼인걸. 모두가 같이 여행을 간 게 얼마만이야. 아, 미안. 넌 일 때문에…”

마키는 머리를 털었다.

“못가는게 아니라 안 가는 거야. 내일부터 어차피 휴가거든.”
“그래? 그럼 같이 가면…”
“싫어. 내가 거길 왜가? 난 거기서 오규수나 찾고 싶지 않아.”
“꼭 오규수 탐사를 하지 않더라도, 그냥 우리랑 같이 놀러가는 기분으로…”
“글쎄 너네들이랑 같이 가고 싶은게 아니란 말야! 내가 왜 휴가를 내고도 안 가는지 정말 모르겠어?”

마키는 이를 악물고 잇새로 말을 토해냈다. 쉭쉭거리는 숨소리가 그녀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알려주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를 올려다보는 날 쳐다보던 마키는 양말을 내 얼굴에 집어던졌다.

“애초에 일요일날  청소를 해서 직접 양말을 가져왔으면 되는 일이었다고, 바보 멍청아!”

나는 마키와 대판 싸우고 말았다.
14. 깨달음

가지고 있던 한줌의 오규수 열매를 모두 먹어치운 후로 나는 꽤 오래 버텼다. 그러나 마침내 그 한줌의 오규수 열매마저 모두 소화된 모양이다. 다시금 배고픔과 목마름이 찾아왔다. 바짝 말라가는 내 팔을 느낀다. 그토록 운동을 하고 절식을 해도 빠지지 않던 살이 매 순간이 다르게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내 심정이 얼마나 절박하느냐 하면, 자살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을 지경이다. 어차피 죽을 것을, 굶주림과 갈증으로 서서히 말라죽어가는 고통을 마지막까지 느낄 필요가 있을까. 아직 정신이 온전할 때 깨끗이 가버리는게 낫지 않을까.

방법이라면 있다. 처음 떨어져 내릴 때 깨진 손전등의 유리 파편이 아주 날카롭다. 그걸 사용한다면 일을 쉽게 끝낼 수 있다. 이 근처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이 분명하다…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손가락에 잡혀온다. 차갑다. 날카로운 모서리에 손가락을 얹고 지긋이 눌러보았다. 아프다. 그 예리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삶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손목 위에 유리 파편을 얹고, 나는 차분하게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나는 후회되지 않는 삶을 살았는가.

답은 바로 나왔다.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다. 지독하게 후회하고 있다. 이따위 곳에 오지 말 것을, 유서라도 써두고 올 것을…

나는 할 일을 다 하였는가.

하지 못한 일이 태산이다. 나는 아직 젊다. 나는 쓰고 싶은 글도 다 쓰지 못했다. 나는 한번 유명해져 보지도 못했다. 나는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고, 먹어보지 못한 것도 많고, 읽어보지 못한 것도 많다. 사랑도 하지 못했다.

이때까지 내가 삼킨 오규수 열매들의 효과가 갑자기 나타난 것 같다. 나는 깨달아 버렸다.

“마키. 나, 너를 사랑하고 있어.”

나는 끝내 손목을 긋지 못했다.


15. 오규수

고도 제도의 이름없는 동굴 속에서 실종된지 여드레 만에 발견되어 생환한 나의 소식은 매스컴에 크게 알려졌다. 그들은 좋은 기사거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특히, 간신히 병원에서 정신을 차리고 나서, 기자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오규수가 나를 살렸어요’ 라고 말한 것이 기사를 특종으로 만들었다.

복잡한 일들이 얽혔던 모양이다. 크게 불거져 나오던 사회보수당 의원들의 뇌물 수수 사건을 덮을 만한 것이 없나 두리번 거리던 시점에, 때마침 가십거리가 될 만한 기사가 나왔고, 내용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내가 어째서 그 식물을 오규수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동굴 속에서 발을 헛디뎌 문제의 그 구멍 – 지층이 뒤틀려 생긴 틈새 – 에 빠진 후,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더듬었을 때 내가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벽면을 덮으며 자란 그 식물의 뿌리와 뿌리에 맺히는 열매 뿐이었다. 볼 수도 없고, 겨우 뿌리나 만져볼 수 있었던 그 식물을 오규수라고 생각해 버린 것은 왜였을까. 아마 고도 제도까지 가는 비행기 속에서 륭과 아라스의 오규수 논쟁을 계속 듣던 나머지, 오규수라는 이름에 너무 사로잡혔던 듯 싶다. 그래서 전혀 모르는 식물을 그만 오규수라고 생각해 버렸다고 유추할 수 있겠다.

내가 오규수라고 생각해 버린 그 식물은, 이전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새로운 종이었다. 땅콩이라기 보다는 알이 매우 작은 감자에 더 가까운 그 식물은 어느새 오규수라고 이름이 붙어 버렸다. 대부분의 식물학자들은 학명이 아닌 통상의 이름이라면 그다지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했고,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이 식물에 대해 적극적으로 ‘오규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내가 이 통칭 ‘오규수 사건’이라 불릴 만한 사건과 내가 느끼는 바를 쓴 수필들을 책으로 엮어 내자, 세간에서는 다시 한번 난리가 났다. 나는 얼떨결에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라 버렸다. 비평가들은 나의 글을 난도질했고, 매스컴들은 별 다를 것 없는 내 글이 어째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는가를 분석하는 글을 기사화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러나 비평가들이 얼마나 다양한 어휘를 구사하여 나의 글을 난도질하였는가와는 상관 없이, 내 글은 어쨌든 많이 팔렸다.

정말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던 내 소설은, ‘오규수悟窺樹’ 라는 이름의 산문집에 덤으로 끼워팔리듯 팔려나갔다.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오규수 작가의 소설’ 이라는 식의 이름을 달고 팔려나간 내 소설에 대해, 나는 큰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어쨌든 명성을 얻었으니 반쯤은 행복했다.

륭은 조금도 행복해지지 않은 사람 중의 하나다. 그가 준비해왔던 논문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그가 속한 고문헌 연구 학계에서는, 내가 이름붙인 오규수와 그들이 지금까지 문헌 속에서 읽을 수 있었던 오규수를 구분하여 명시해야 한다는 수고를 더 해야 하는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별로 바뀐 점을 느끼지 못했다. 진짜 오규수가 어떤 식물인지를 밝혀냄으로써 오규수를 묘사한 문헌의 신뢰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주창한 그의 의견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야무야 묻혀버렸다.

그는 얼마 전에 편지를 보내왔다. 서론 부분에서 내 책의 일부 문장을 격렬하게 비난한 그는 – ‘비록 내가 찾아낸 이 오규수가 옛 이야기속의 진짜 오규수가 아님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식물의 옆에서 내가 몇 가지 깨달음을 엿볼 수 있었던 것 만은 사실이다. 누가 뭐라고 부르건 간에, 이것은 나의 오규수다.’ 라는 문장 말이다 -  결국 그의 새로운 연구 주제가 정해졌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는 앞으로 ‘각 문화권의 고유한 설화속 신비의 나무가 오규수라는 이름으로 통일됨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문화침탈현상의 연구’ 라는 주제로 연구활동을 지속해나갈 모양이다.

아라스 역시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륭과 완전히 화해했다며, 더 이상 륭과 다투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여행의 와중에 륭의 새로운 연구를 도와 자료 수집을 해 주기로 했단다. 그 둘이 화해한 사실에는 나와 마키 모두 기뻐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 ‘오규수’의 이름을 한 식물에 붙여버리고, 거기에 대해 책까지 낸 것에 깊은 유감을 가진 모양이다. 그들의 오규수에 관한 열정이 이토록이나 강할 줄은 몰랐다.

내가 청첩장도 보내고 음성메시지에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둘 모두 편지의 어느 구석에서도 나와 마키의 결혼에 대해 축하의 말이나 유감의 표시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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