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아마존

2010.03.27 02:3203.27

이상한 일이었다.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수요일 오후 4시, 러시아워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로변에 이 정도로 사람이 없을 리가 없는데. 무슨 국가 행사라도 있나, 오늘이 무슨 날이었더라?
당혹감 속에서 나는 계속 걸어갔다. 동네 파출소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슬쩍 안쪽을 들여다 보았지만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은 경찰뿐만이 아니었다. 마을버스 정거장 두 개 정도의 거리를 계속 걸어가며 몇 번이나 멈추어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거리에서 사라진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냄새와 소음도 함께 사라졌다. 담배 연기와 배기 가스와 배달 음식 냄새, 가게에서 쾅쾅 틀어대는 가요, 핸드폰에 대고 질러대는 목소리, 클랙슨과 오토바이 소리의 덩어리가 사라진 거리에는 무거운 공기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나는 30일만에 집에서 나온 참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난 30일 동안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최장 기록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기간이다. 작년 초겨울부터 봄까지 석 달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내가 사는 자취방은 연립주택의 지하층으로 부엌 쪽에 창문이 단 하나 있는데, 그나마 절반 정도만 지상으로 드러나 있고 두꺼운 불투명 유리가 끼어 있기 때문에 해가 뜨고 지는 정도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외부의 변화와 철저히 차단된 환경에서 일 년 넘게 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라는 건 핑계고, 사실은 게임 때문이었다.
나는 중학생 시절부터 게임에 미쳐 있었다. 그러나 직접 게임을 만든다는 생산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콘솔 게임과 온라인 게임을 병행하느라 나의 모든 사회 활동은 정지된 지 오래였다. 보다 못한 형이 꽂아준 회사에 취업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나마도 여섯 달 만에 권고사직을 당했지만.
퇴직 기념으로 새로 오픈한 온라인 게임에 30일 낮과 밤을 꼬박 투자했다. 그런데 약 일 주일 전부터 접속자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사흘 전에 서버가 다운되었다. 그 후로 다시는 서버에 접속이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게시판에 항의 글을 30건 정도 올렸지만 답변이 없었다. 전화로 진상을 부릴 만한 숫기는 없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몇 달 전에 사 놓고 팽개쳐 둔 콘솔 게임을 시작했다. 이틀 밤을 새워 콘솔 게임을 클리어하고 떨어진 먹을 것을 사기 위해 한 달 만에 외출을 한 참이었다-는 것이 지난 한 달 간 내 인생의 기록의 전부였다.
배가 고파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무게가 90kg을 돌파한 이후로는 집안에서 화장실을 가는 것도 힘에 부쳤다. 집 앞의 편의점 문이 닫혀 있지만 않았어도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한참 만에 목적지인 이웃 동네 편의점 앞에 도착했다. 겹쳐진 목살 주름을 타고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편의점의 조명이 꺼져 있는 것이 좀 걸렸지만 문이 열려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들어갔다. 점원은 없었다. 기다렸지만 몇 분이 지나도 점원은 오지 않았다. 어쩌지? 문득 불 꺼진 냉장고에 놓여 있는 순살 어묵 핫바가 눈에 띄었다. 동시에 위장이 맹렬하게 수축했다. 그러고 보니 만 하루를 내리 굶었다. 막판 보스전에 몰두하느라 밥 생각도 잊었던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핫바를 집어 들었다. 돈은 카운터에 두고 가면 되겠지. 내 맘대로 결론을 내리자 마음이 편해지며 다른 먹거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왕 가져갈 거 라면이랑 과자도 좀 가져가야겠다. 매콤한 라면 국물 냄새를 떠올리자 식욕이 용솟음쳤다. 나는 광속으로 진열대에 놓인 컵라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으앗!”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기겁을 하며 비명을 올렸다. 편의점에 들어온 사람은 긴 머리의 젊은 여자였다. 편의점 직원인 모양이었다. 분명히 나는 돈을 내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냐. 전전긍긍하는 동안 여자는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컵라면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최대한 빨리 바지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그러나 여자는 돈을 받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겨드랑이 밑에서 식은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안 돼. 이런 상황만은 제발 피하고 싶었는데.
‘이런 상황’ : 타인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 상황을 뜻함. 그 중에서도 여자,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 상황은 최고로 두려운 상황으로, 1년에 3번 이상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주의를 요함.
머리 속에서 사회부적응자 전용 국어사전의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갔다. 푹 숙인 머리 위로 여자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백돼지 같은 게 감히 도둑질을 하려고 들어?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으, 저…….”
30일간 라면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쭉 닫혀 있던 입에서 언어인지 신음소리인지 내가 들어도 모를 더듬거림이 흘러 나왔다. 고개는 여전히 죄인처럼 푹 숙인 채였다. 나는 사람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특히 젊은 여자를 마주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임 속 여자 캐릭터는 끈 팬티에 비키니만 걸치고 있어도 당당하게 대할 수 있는데, 현실의 여자는 차도르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마주볼 수 없다.
“계, 계산…….”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불과 몇 걸음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손이 본의 아니게 눈에 들어왔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에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어, 뭐지. 그 쪽이 아닐 텐데? 여자의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이 기괴한 방향으로 뒤집혀 있었다. 눈을 의심하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여자의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뜬 눈, 누렇게 뜬 흰자위에 섬뜩할 정도로 새빨간 실핏줄이 가득했다.
다음 순간, 정수리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악!”
여자의 가녀린 손아귀에 내 머리카락이 한 웅큼 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당황한 나는 머리칼을 움켜잡은 여자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여자의 손은 단단한 갈퀴처럼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앞뒤로 세게 흔들었다. 머리가죽이 통째로 벗겨져 나갈 것은 통증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머리를 움켜쥔 여자의 팔목을 두 손으로 붙잡고 필사적으로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여자의 가느다란 팔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이러세요! 왜 이래요!”
나는 반쯤 애원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 머리를 카운터의 포스 기계위를 향해 수직으로 내려 찍었다. 간발의 차이로 쇳덩어리가 아닌 카운터 테이블 위에 이마를 거세게 부딪혔다. 눈앞에 노란 불이 번쩍하며 순식간에 시야가 새빨갛게 흐려졌다.
이 여자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 본능의 외침에 따라 나는 진심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내 머리를 움켜쥐고 곧바로 다시 내려 찍으려 했다.
이마와 기계가 도킹하기 직전, 나는 두 다리와 척추에 온 힘을 다 쏟아 넣고 버텼다. 나보다 최소 40킬로는 덜 나갈 여자는 내 머리통에 한 손으로 매달린 꼴이 되어 주춤거렸고 그 틈에 나는 카운터 옆에 걸려 있는 긴 우산을 낚아채 온 힘을 다해 여자의 아랫배를 향해 내질렀다. 팽팽한 쌀자루에 쇠 젓가락을 꽂아 넣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 우산 손잡이를 통해 전해졌다. 여자는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내 머리를 놓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갖가지 색깔의 빛이 아이스크림처럼 뒤섞이며 눈앞에서 빙빙 돌았다. 나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시야가 점점이 밝아지며 비로소 바닥에 쓰러진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가 걸친 새하얀 원피스가 빠른 속도로 피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랫배 한가운데에 내가 내지른 우산이 꽂혀 있었다. 19금 호러 게임에도 나오지 않을 귀신 형상에 노랗게 뜬 두 눈만이 야생 고양이처럼 샛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여자는 배에 꽂힌 우산을 한 손으로 붙잡고 꿈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는 꿈쩍 못 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어. 꿈이야.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매끄러운 바닥은 여자의 배에서 솟아 나오는 피로 온통 칠갑이었다. 여자는 배에 꽂힌 우산을 지지대 삼아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하이힐을 신은 발이 피 웅덩이에 자꾸만 미끄러졌다. 분홍빛 립스틱을 칠한 여자의 입술을 비집고 웃음소리인지 신음소리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득 바지가랑이 사이가 뜨뜻해지면서 사타구니가 부르르 떨렸다. 뜨거운 액체가 바지 속으로 흘러내리며 얼어붙은 몸을 순간적으로 해동시켰다.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밖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건 꿈이야, 아니 이건 게임이야. 나는 지금 19금 공포 호러 게임 속에 있는 거야.
삼십 분쯤 후, 나는 텅 빈 상가 여자 화장실의 좌변기 위에 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미친 듯이 달린 끝에 어딘지 모를 동네까지 도망쳤다. 여전히 길거리에는 인적이 없었다. 그것은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자. 몸의 떨림이 간신히 잦아들자 내 머리 속은 귀소본능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러게 집 밖으로 나오면 고생뿐이라고. 애초에 집을 나온 것이 실수였다. 내가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돌아가자. 이불과 컴퓨터와 냉장고가 있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하다고 밖으로 기어 나와서. 어서 나의 아름다운 반지하 성으로 돌아가자.
마음을 다잡고 변기 위에서 기어 내려왔다. 쥐가 올라오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간신히 상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불안한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다행히 배에 우산이 박힌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 표지판을 확인하니 집에서 제법 먼 동네였다. 집까지 걸어서 두 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도 돌아가야 한다. 다리를 질질 끌며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데 멀찍이 차도 위에 한 여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순식간에 차도를 가로질러 열려 있는 가게 안으로 뛰어들었다. 악동에게 쫓기는 도둑고양이 같은 속도였다.
“으아악, 으아아악!”
이어서 남자의 지옥 같은 비명소리가 가게 안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기겁을 하며 뒤돌아서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죽어라 달려가는 동안에도 끔찍한 비명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완전히 녹초가 된 나는 길에 주저앉아 미친 듯이 기침했다. 목구멍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오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새 또 지렸는지 다시 뜨끈해진 바지 사이에서 지린내가 풍겨 올라왔다.
나는 비틀대며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으로부터 한층 더 멀어져 버렸다. 내가 주저앉아 있는 곳에서 몇 걸음 떨어진 보도블록 위에 양복을 걸친 중년 남자가 내 쪽으로 머리를 돌린 채 드러누워 있었다. 무심코 그 쪽을 내려다본 나는 비명을 올렸다. 남자의 양 다리가 잘려 나가고 없었다.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뻥 뚫린 채 입가에는 피 거품이 말라붙어 있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이거 안 놔, 개잡년들아!”
선 채로 토하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욕설이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뒤로 돌기도 전에 발이 꼬이며 넘어졌다. 넘어진 채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았다. 곱창집들이 몰려 있는 골목 사이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대로변으로 몰려 나왔다. 전부 네 명, 그 중 세 명은 젊은 여자였고 한 명은 운동선수처럼 우람한 체형의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덩치가 자기의 절반도 안 되는 여자들에게 양 팔을 붙잡혀 질질 끌려 나오고 있었다.
“이 쌍년들아! 이거 놓으라고!”
남자는 격렬하게 양 팔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며 저항했지만 여자들은 거머리처럼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 한 명이 남자의 등 뒤에서 매달렸다. 그녀는 남자의 굵직한 목을 양 손으로 움켜잡고 조르기 시작했다. 나머지 여자 둘은 각각 반대편으로 남자의 양 팔을 잡아당겼다. 무서운 비명과 함께 양 팔이 차례로 남자의 몸에서 뜯겨져 나갔다. 여자 둘은 잡아 뜯은 팔에 허겁지겁 고개를 처박았다. 남자는 양 팔에서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며 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오지 전통 부족의 춤사위 같았다.
남자는 곧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등에 달라붙어 목을 조르고 있던 여자가 재빨리 남자의 몸 위로 올라 타더니 얼굴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끔찍한 비명이 이어졌다. 여자들이 쩝쩝거리며 질긴 고기를 씹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멍해져 가는 내 곁에 관광버스가 급정거했다. 버스 앞칸이 열리며 군복을 입은 수십 명의 노인들이 차례로 뛰어내렸다. 매캐한 연기가 눈동자를 스쳤다.
“죽일 년들!”
카랑카랑하게 소리치며, 노인들이 여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선두에 선 노인이 남자 위에 들러붙은 여자의 머리를 향해 불 붙은 각목을 내리쳤다. 여자는 엎어졌고 뒤따라 온 노인들이 엎어진 여자의 몸 위에 휘발유를 뿌렸다. 순식간에 여자의 몸 위에 불이 붙었다. 쓰러진 남자의 몸에도 불이 옮겨 붙었다. 사정 없는 매질이 이어졌다. 다른 여자 둘도 순식간에 몸에 불이 붙어 각목 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신속하게 벌어졌다.
노인들은 허리에 휘발유가 든 깡통을 몇 개씩 차고 있었다. 피와 먼지에 찌든 군복 상의 앞판에는 수십 개의 훈장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노인들이 짊어진 군용 배낭에 걸려 있는 둥그런 것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들은 여자의 머리였다. 긴 머리카락이 피에 떡져 썩어가는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노인들은 군용 배낭에서 톱을 꺼내 검게 타 들어간 여자들의 시체에서 머리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선두에 섰던 노인이 잘라낸 여자의 머리를 높이 쳐들고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암탉이 설치면 나라가 망해!”
더 이상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나는 돌아서서 구역질이 올라오는 입을 틀어막고 도망쳤다.


나는 다리를 질질 끌며 하염없이 걸어갔다.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머리 속에 메아리 쳤다. 암탉이 설치면 나라가 망해. 만에 하나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괴물로 변했다면, 내 가족들도 괴물이 되었다는 걸까? 어머니와 형수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상상만으로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치에 전단지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커다란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대피 안내’
나는 급히 전단지를 주워 들었다. 전단지는 현 사태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담고 있었다.
약 열흘 전부터 갑자기 여자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변하기 시작함. 닷새 전에 계엄령이 내리고 군이 투입되어 도시 곳곳에서 여자들과 전투를 벌이는 중이지만 전망은 불투명. 여자들은 보통 사람의 몇 배의 근력을 지니고 있으며 칼 등의 흉기로는 죽지 않음. 여자들은 남자들만을, 그 중에서도 젊은 남자들을 우선으로 공격하여 잡아 먹음. 젊은 여자를 만나면 무조건 피할 것. 소탕 작전중인 군인에게 구조 요청을 하면 대피소로 이송해 줄 것임.
대피 안내라고 쓰여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결국 군대에게 구조되지 못하면 그만이라는 얘기다. 나는 전단지를 움켜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괴물 여자들과 마주친다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한시라도 빨리 군인들을 만나야 했다. 낮에 봤던 군복 입은 노인들 말고 진짜 군인 말이다.
어둠은 금방 찾아왔다. 대부분의 간판이 꺼진 거리에 유난히 커다란 보름달이 떠올랐다. 갈수록 시체들이 많이 나타났다. 전부 남자들이었고, 전부 사지의 절반 이상이 잘려나가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토하면서 계속 도로 표지판을 따라 걸었다. 걸어가면서 도로에 멈춰 선 자동차와 버스들과 그 안에 앉아 있는 시체들의 머리를 보았다. 이 모든 게 다 꿈이고 게임이라면. 나는 헐떡거리며 계속 걸었다.
서늘한 바람에 실려 물비린내가 느껴졌다. 한강이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갑자기 어두운 하늘 저편에서 섬광이 번쩍이며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밀려드는 공포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겨우 도착한 영동대교 북단 입구는 대형 컨테이너 박스 수십 개로 가로막혀 있었다.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니, 절망하지 말자. 한강에는 다리가 여러 개 있으니까. 나는 발걸음을 돌려 한남대교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만큼 빨리 걸을 수는 없었다.
고수부지의 어느 지하 터널 한가운데에서 완전히 지친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등 뒤에서 여자들이 몰려올 것만 같아 두려웠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으아악!”
느닷없이 눈앞의 벽을 뚫고 커다랗고 둥그런 것이 불쑥 나타났다. 그것은 오토바이 헬멧을 쓴 사람의 머리였다. 헬멧을 쓴 사람은 내가 남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문 밖으로 나왔다. 그가 걸친 형광색 점퍼에는 ‘심부름 24시’라는 문구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살려주세요!”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두 손을 맞비비며 외쳤다. 그는 팔짱을 끼고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헬멧을 벗었다. 턱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라나고 해골처럼 깡마른 얼굴을 한 젊은 남자였다. 그는 바닥에 가래침을 퉤 뱉더니 중얼거렸다.
“헛, 여기 나 같은 병신이 또 하나 있네.”
나는 그에게 전단지를 보여주었다. 사내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특수 부대가 소탕작전 중이고, 무슨 전우회인지 민우회인지 막 나가는 노친네들도 있어. 조만간 여자들이 싹 소탕되면 잠잠해질 거야. 그냥 알아서 잘 피해 다니는 게 최고라 이거야.”
“지, 진짜로 여자들이 전부 다 괴물이 된 건가요?”
“그럼 가짜겠냐?”
퀵서비스 사내는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아, 어저께 고수부지에서 한지희 봤다? 팬티만 입고 뛰어다니고 있던데, 가슴 존나게 크더라. 덕분에 좋은 구경 했지.”
인기 탤런트 한지희는 작년 내내 시켜 먹었던 치킨의 광고 모델이었다. 그런 여자가 팬티만 입고 고수부지를 뛰어다닌다니 나로서는 상상하기 벅찬 광경이었다. 퀵서비스 사내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킬킬대고 웃다가 불쑥 물어왔다.
“그런데 너, 혼자냐?”
“그, 그런데요.”
“그럼 같이 다니자.”
순식간에 동행이 생겼다. 적어도 혼자인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게임에서도 고레벨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지역에서는 파티를 맺어 다니는 것이 유리한 법. 문 안의 사무실에 들어가 남자가 모아 놓은 과자와 생라면으로 배를 채웠다.
“넌 어떻게 살아 남은 거냐?”
“아, 저는 그냥 오늘 처음으로 집 밖에 나왔는데 세상이 이상해져 있어서…….”
“너도 시민군에 들어갈 생각이냐? 난 안 들어가. 등신같이 뭉쳐 다니면 더 표적이 되지 않겠냐?”
뭉쳐 다니면 표적이 된다면서 나와 같이 다니자는 건 무슨 뜻일까? 어쨌건 산 사람을 만나고 배를 채우자 안도감과 함께 피로가 몰려왔다. 사내의 이야기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사내는 퀵서비스 센터 직원으로, 발송을 신청한 병원 간호사가 눈앞에서 환자를 잡아먹자 그대로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쳤다는 듯 했다. 살아 남은 2~30대의 군필자들은 자체적으로 시민군을 조직하여 생존을 도모하고 있고, 전우회는 퇴역 군인들로 이루어진 단체로, 군대에 버금가는 전투력으로 괴물화된 여자들을 사냥하는 중이다.
“여자들은 노친네들한테는 별 관심 없어. 쌩쌩한 이삼십 대부터 덮치지. 그 덕분에 전우회 노친네들이 때려 잡기 쉬운 거야. 걍 불로 태워버리면 끝이라던데.”
퀵서비스 사내는 집에서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호러 영화를 보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비정상적인 호르몬 같은 것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사내의 이야기가 끝나고 비좁은 사무실의 책상 사이에 사내와 함께 웅크리고 누워 잠을 청했다.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지만 등이 땅에 닿자마자 눈이 감겼다. 자면서 온 몸에 불이 붙은 여자들이 내 팔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씹어 먹는 악몽을 꾸었다.
눈을 뜨자 천정에서 백열 전구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퀵서비스 사내는 옆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방광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사무실 문을 조금 열고 동정을 확인한 후 터널 벽에 소변을 보고 들어왔다. 사내는 그 때까지도 자고 있었다. 그의 무사태평함에 나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역시 다 꿈이었을 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어제 먹다 남은 과자 봉지에 손을 뻗었다.
“이 돼지 새끼가, 뭘 그렇게 많이 처먹어?”
갑자기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 등짝 한가운데를 냅다 걷어찼다. 그는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당장 나가서 네가 처먹은 만큼 갖고 와! 싫으면 너 혼자 다니든가!”
“저, 저 혼자요?”
“당연하지! 너 때문에 굶어 뒤지게 생겼잖아?”
사내가 주먹을 치켜들며 위협했다. 나는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등 뒤에서사내의 으름장이 이어졌다.
“네가 처먹은 거 배로 갖고 오지 않으면 뒤질 줄 알아!”


모처럼 찾아낸 안전한 장소-그 곳이 정말 안전한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곳이 사방이 막혀 있는 ‘실내’라는 점이다. –에서 쫓겨난 나는 패닉에 빠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가 지기 전에 식량을 찾아 지하 터널로 돌아가야만 했다.
터널에서 나오자 쨍쨍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밤에 본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시체들이 눈에 뜨였다. 탁 트인 강가에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아 대로변으로 올라갔다. 작은 슈퍼마켓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판매대는 절반 이상 부서져 있었지만 아직 제법 많은 상품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먹을 만한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으헉!”
한쪽 구석에 나 있는 창고의 부서진 문짝을 무심코 바라보는 순간 숨이 멎을 뻔 했다. 문 안에 누군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어깨를 내리 덮은 긴 머리칼, 연한 주황색 원피스 아래로 죽 뻗은 매끈한 다리, 여자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우아아악! 사람 살려!”
나는 미친 듯이 고함치며 뛰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와 동시에 판매대 모서리에 발이 걸리며 발목이 직각으로 꺾였다.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죽이지 마세요!”
“죽이지 않아요, 저는 진짜 사람이에요!”
여자는 잔뜩 쉰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벌벌 떨며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여자의 가늘고 긴 다리가 보였다. 문득 배에 우산이 꽂힌 편의점 여자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벌벌 떨었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는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죽이지 않으니까 안심하세요.”
침착한 목소리, 당장 죽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시민군이세요?”
“아, 아뇨, 저는 그냥 먹을 것이 필요해서.”
“이거라도 좀 드세요.”
여자는 메고 있던 허름한 핸드백에서 비닐에 싸인 호빵을 꺼내 내밀었다. 망설이는 나에게 여자는 호빵을 위아래로 흔들며 재촉했다.
“어서 받으세요.”
“아, 어, 네, 고맙습니다.”
호빵을 받아 들자 비로소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화장기 없는 흰 피부에 살짝 처진 눈매를 한 젊은 여자였다. 주황색 원피스 밖으로 드러난 마르고 긴 팔다리는 말라붙은 핏자국과 때로 지저분했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처진 눈매가 선한 인상이었다.
“왜 진작 대피하지 않으셨어요?”
“그게, 제가 오늘 처음 이 일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렇군요……살아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군대의 도움을 받아 대피했어요. 하지만 아직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도 제법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강아지 때문에 일찍 대피를 못 했지만요.”
“강아지요?”
“결국 잃어버렸지만요.”
그녀는 잠시 고개를 떨구고 코를 훌쩍였다.
“지금까지 혼자 어떻게든 숨어 다녔는데, 강아지를 잃어버린 후로는 버티기가 힘들어요. 그냥 이대로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구, 군대를 만나진 않으셨어요?”
“멀리에서 보긴 했는데, 피해 다녔어요. 만나면 저도 죽일 것 같아서요.”
한층 더 허스키해진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괴물은 아니지만 여자니까, 구조보다는 소탕 대상일 것이다.
“저 혼자서는 무서워서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절박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 둘 데를 몰라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제안했다.
“저, 제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랑 같이 셋이서 다니면 좋을 것 같은데요.”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 사람, 좋은 사람인가요?”
“그, 그건 아직 모르겠지만, 그래도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나는 얼버무리며 바닥에 떨어진 먹거리들을 주워 밖으로 나갔다. 밀폐된 공간에 여자와 일대 일로 있자니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따라 가게 밖으로 나왔다. 순식간에 동행이 한 명 더 생겼다.
“으악! 저년은 뭐야?”
내가 데리고 온 여자를 본 퀵서비스 사내는 경기를 일으키며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어요. 저는 역시 혼자 다니는 게 나아요.”
쓸쓸하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혼자 걸어가기 시작했다. 굳게 닫힌 문과 조금씩 멀어져 가는 그녀 사이에서 나는 잠시 갈등하다 닫힌 문을 두드리며 퀵서비스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저, 저기요, 여자분은 가셨는데.”
“꺼져! 죽인다!”
공포에 질린 어조였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황급히 그녀를 쫓아갔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세요?”
“그, 그냥 둘이서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잠깐 생기가 돌았다. 우리는 고수부지 위로 올라가 성수동을 가로질러 서울 숲을 지나 계속 걸어갔다. 수십 구의 남자 시체와 불에 탄 여자들의 시체를 지나쳤다. 군인들은 언제 나타날까? 군인들이 저 여자를 죽이려 할까? 확실히 다른 여자들처럼 괴물은 아닌 것 같은데. 저 여자랑 다니면 위험할까? 그래도 괴물 여자들이 저 여자는 공격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같은 여자니까. 생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자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게임이라고 치고 생각하자. 위험 지대에서는 파티 플레이가 유리하다. 내가 기사라면 저 여자는 힐러. 어쨌건 혼자인 것 보다는 낫겠지. 이렇게 걷다 보면 언젠가는 군인이건 뭐건 살아 있는 정상인 집단과 합류할 수 있겠거니.
몇 십 분 걸었다고 다리가 저려오며 숨이 가빠졌다. 나는 눈앞의 버스 정거장 벤치에 주저앉아 목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여자가 초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바깥에 오래 있으면 위험해요, 어디 안으로 들어가요.”
불안해 하는 그녀에게 떠밀려 근처에 있는 아파트 상가로 들어가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좁은 공간에 여자와 함께 있으니 죽을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쉴 새 없이 다리를 떠는 나를 그녀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느껴질 수록 다리는 더욱 심하게 떨렸다.
“왜 그렇게 불안해 하세요? 뭔가 위험한 거라도 있나요?”
“아,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배 고파서 그래요? 또 뭐 드실래요?”
그녀는 가방을 뒤적여 반쯤 뭉개진 초코파이를 꺼내 주었다. 저 가방은 마법의 가방인가.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살쪘다고 욕을 하면서도 내 밥상 차려주는 것은 빼먹지 않았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도 제대하자마자 일 주일 내내 PC방에서 돌아오지 않는 나에게 진저리를 쳤지만.
“예전에는 어디 사셨어요?”
떡이 된 초코파이를 우물거리는 나에게 여자가 불쑥 물어왔다.
“아, 예. 저는 저기 중계동에서…….”
“저는 이태원에서 살았어요. 뭐 하시는 분이에요?”
“아, 예. 저는 그냥 집에서…….”
“요즘 취업하기 힘들죠. 저도 계속 놀고 있었어요. 강아지 사료값도 대기 힘들었다니까요. 사흘 내내 라면만 먹고 산 적도 있었어요. 친구들한테 쌀 좀 꿔달라고 하는 것도 미안해서요. 다 비슷한 처지라서.”
열심히 재잘대던 여자는 나를 흘끔 바라보고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열흘 넘게 혼자 있었더니, 이야기할 사람이 그리웠나 봐요. 살아 있는 남자들은 다들 저만 보면 도망쳤거든요.”
나도 열흘 넘게 혼자 있었지만 전혀 사람이 그립지 않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 사람이 필요했다.
“씻지도 못 하고, 머리도 못 감고. 이게 제일 미칠 것 같아요. 더 이상은 못 견딜 것 같아서 며칠 전에 음식점 주방 같은 데 들어가서 대충 씻고 나왔는데, 어휴. 누가 따라 들어올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솔직히 저한테서 냄새 나죠? 그 남자들 사실은 냄새 나서 나 보고 도망친 건지도 몰라요. 후후.”
“아, 아뇨.”
나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오줌을 지린 채로 그대로 말려서 입고 있는 청바지가 신경 쓰였다. 이제 와서 신경 써서 뭘 어쩌겠다고. 다리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데서 너무 오래 있으면 위험해요. 자, 이제 다른 곳으로 가요.”
여자는 일어나 가방을 고쳐 메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밖에서 지내온 만큼 생존에 대한 노하우도 확실했다. 나보다 반 뼘쯤 큰 그녀는 앞장서서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걸어갔다. 그녀가 나보다 훨씬 나은 인간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팔을 들어 겨드랑이 냄새를 맡아 봤지만 이미 지린내에 마비된 코는 아무 냄새도 맡지 못했다. 그녀가 내 몸에서 나는 악취를 맡을까 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작은 은행의 ATM 기계 옆에서 이틀 째 밤을 지새웠다. 여자는 긴 팔다리를 둥글게 말고 코까지 골며 잤지만 나는 거의 잘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난 여자는 오랜만에 잘 잤다고 속 편한 소리를 했다. 그녀의 만능 가방에서 나온 초콜릿을 나눠 먹고 다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우리 어머니, 아내, 누이들입니다! 여러분, 제발 이성을 찾으십시오!”
4차선 도로 위를 걸어가고 있는데 멀리서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대형 트럭이 머리에 확성기를 붙인 채 느린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트럭의 정면으로 달려가며 손을 흔들었다.
“여기요! 여기 사람 살려요!”
트럭이 멈추었다. 조수석 창이 열리더니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몸을 내밀었다. 그는 확성기를 통해 말했다.
“그 여자는 뭐요?”
“정상인이에요!”
나와 그녀가 동시에 소리쳤다. 남자는 운전자와 잠깐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더니 뒤쪽을 가리키며 타라고 했다. 나와 그녀는 황급히 트럭 뒤로 돌아갔다. 짐칸에는 수많은 남자들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떻게든 내 등 뒤에 숨으려고 했다. 남자들의 무리 중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고수부지 터널에서 만난 퀵서비스 사내였다. 그는 내 옆에 앉은 여자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트럭이 다시 출발했다. 짐칸에 탄 수많은 남자들 중 그 누구도 말이 없었다. 모두 극도로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기 좀 봐!”
갑자기 트럭 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질렀다. 예닐곱 명의 여자들이 트럭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몇몇은 맨발이고 몇몇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트럭이 속도를 높였다. 조금씩 멀어지던 여자들 중 한 명이 몸을 날려 번호판을 움켜쥐고 매달렸다. 아스팔트에 몸을 질질 끌던 여자는 단숨에 트럭 위로 올라탔다. 백세주 마크가 찍힌 앞치마를 두른 40대의 땅딸막한 아줌마였다. 앞치마에는 시커먼 핏자국이 선명했다. 아줌마는 바로 옆에 얼어붙어 있는 깡마른 청년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 쥐더니 단번에 부러뜨렸다. 짐칸에 탄 남자들은 아우성을 치며 짐칸 앞쪽으로 몰려갔다. 순식간에 텅 빈 뒤쪽에서 아줌마는 목이 부러진 청년을 어깨부터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이, 이모?!”
운전사가 룸미러를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트럭이 급정거했고 사람들은 트럭에서 뛰어내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와 여자도 온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이, 이러다 죽겠어요. 조금만 쉬었다가……!”
“안 돼요! 조금만 더 뛰어요!”
그녀는 내 손을 움켜잡더니 세게 잡아당겼다. 편의점에서 나를 공격했던 여자가 떠오를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겁에 질린 내 손을 따스하고 축축한 그녀의 손이 단단히 감싸 쥐었다. 그녀는 긴 팔다리를 휘저으며 내 손을 잡고 달렸다. 몇 십 초에 걸친 질주 끝에 나와 그녀는 차례로 아스팔트 위에 쓰러졌다.
“씨발, 저 년 보고 쫓아온 거 아냐?”
바로 옆에서 악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퀵서비스 사내가 가로수에 등을 기대고 이 쪽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저 년 암내 맡고 따라온 거 아니냐고!”
그녀가 고개를 쳐들더니 무서운 눈으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퀵서비스 사내는 입을 다물고 다리를 질질 끌며 도망쳐 갔다. 그녀와 나는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나서 걸었다.
그녀는 달아나는 와중에 가방을 잃어버렸다. 만능 인벤토리가 없어졌으니 다시 직접 식량을 구해야만 했다. 빵집에 기어 들어갔지만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눈앞의 빵을 봐도 의욕이 나지 않았다. 온 몸이 쑤시고 피로했지만 배도 고프지 않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본 쇼크에 빠진 뇌는 현실 도피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군대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처음으로 내가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저 혼자 다니면서 두어 번 군인들을 봤어요. 그 때는 너무 무서워서 밖으로 나갈 수 없었어요. 여자 수십 명을 한꺼번에 화염방사기로 불태우고 있었거든요.”
“서울 말고 다른 곳도 이럴까요?”
“모르겠어요. 여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다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럼 이제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남자들만 남았으니 결국 멸망하지 않을까요? 번식을 못 하니까요.”
내 말에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절망감이 내려앉았다.
“그래도 살 수 있는 데까지는 살아내고 싶어요.”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내뱉었다.
“어저께까지는 죽고 싶었다면서요?”
“지금은 혼자가 아니니까요. 저는 혼자인 게 제일 무서워요.”
삼십 일 동안 지하 셋방에 처박혀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혼자인 게 제일 편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게임과 현실이 뒤바뀐 세상 한복판에 내던져지고 나서야 스스로의 한없는 나약함을 깨달았다.
어디선가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멀고 아련해서 TV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나는 반쯤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꿈 속에서 나는 아마존의 밀림 속에 있었다. 3D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밀림 속에서 벌거벗은 여자들이 불 붙은 횃불을 들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여자들의 반대편으로 뛰어 달아나다 늪에 빠졌다. 늪 속에는 피라니아가 득시글대고 있었다.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피라니아 떼가 순식간에 나를 에워쌌다. 피라니아들은 하나같이 배가 빵빵하게 알을 배고 있었다. 암컷 피라니아들은 내 뱃살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일렁이는 불 그림자 아래 벌거벗은 여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의 여자들 중 유달리 피부가 흰 여자가 한 명 섞여 있었다. 그녀였다.


“일어나요!”
사흘째 새벽, 그녀가 내 몸을 마구 흔들어 깨웠다.
“뭐 좀 찾아서 먹고 나가요.”
그녀는 반쯤 혼수상태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도대체 저 빼빼 마른 몸 어디에서 무한한 에너지가 솟아 나오는 걸까. 여자가 이끄는 대로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었다. 배는 대충 채웠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간신히 시민군을 만났지만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앞으로 또 그러지 말라는 보장은 없었다.
“눈 앞에서 친구가 죽었어요. 단골 미용실 언니한테 잡혀 먹혔죠. 저는 강아지만 데리고 정신 없이 도망쳐 나왔어요.”
걸어가면서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떻게든 말을 해야만 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딘가에 살아 있는 사람은 있을 거에요. 전단지 보셨죠?”
“아, 예.”
“언젠가는 끝날 거에요.”
물론 어떻게든 끝은 날 것이다. 게임 오버, 리셋이나 부활은 없겠지. 우리는 다시 걸었다. 그러나 걷는 속도는 예전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낮은 비명을 지르며 멈추어 섰다. 눈앞의 교차로에서 노란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매캐한 연기가 흘러왔다. 관광버스가 교차로 한가운데에 서 있고, 그 앞에서 군복을 입은 노인들이 횃불을 들고 한 떼의 여자들과 싸우고 있었다. 첫날에 본 전우회 노인들이었다. 이번에는 여자들의 수가 제법 많았다. 여자들 중 몇 명의 몸에는 불이 붙어 있었지만 나머지 몇 명은 횃불을 휘두르는 노인들을 상대로 덤벼들고 있었다.
“도망쳐요.”
사색이 된 그녀가 중얼거렸다. 주변에 딱히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막 돌아서서 뛰려는 순간 관광버스 짐칸 쪽에서 한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형광색 점퍼가 눈에 띄었다. 그는 퀵서비스 사내였다.
“저년 잡아!”
우리를 발견한 사내가 악을 썼다. 사내 곁에 서 있던 노인이 횃불을 들고 달려왔고 사내가 그 뒤를 따라왔다. 노인은 횃불을 바닥에 팽개치더니 필사적으로 뛰어 도망가는 그녀를 향해 몸을 날렸다. 노인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질질 끌려갔다.
“이년, 각을 떠주마!”
노인은 그녀를 땅바닥에 패대기치더니 배 위에 깔고 앉아 허리춤에서 두툼한 군용 나이프를 꺼냈다. 노인의 눈동자는 반쯤 돌아가 있었다. 노인이 짊어진 배낭에 매달려 있는 여자들의 해골이 서로 부딪혀 딱딱 소리를 냈다. 노인이 그녀의 목을 향해 나이프를 찔러 넣으려는 순간, 나는 노인이 떨어트린 횃불을 집어 들고 노인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캑 소리와 함께 노인이 그녀의 몸 위에서 굴러 내려왔다. 나는 쓰러진 노인을 향해 마구잡이로 횃불을 휘둘렀다. 그 동안 그녀는 일어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욱!’
내 등 뒤에서 퀵서비스 사내의 욕설과 체중을 실은 발길질이 날아왔다. 앞으로 넘어진 내 몸 위에 퀵서비스 사내가 타고 올라 목을 조르며 악을 썼다.
“이 새끼 괴물년들이랑 한 패에요! 이 새끼도 같이 태워 버려요!”
숨이 막히며 눈앞이 벌개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쉰 비명이 헬리콥터 소리처럼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이대로 게임 오버인가? 여자도 아닌 같은 남자 손에 죽는 건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목을 조르는 힘이 사라졌다. 고기 타는 냄새가 훅 끼쳤다. 언제 쫓아왔는지 등에 불이 붙은 괴물 여자가 퀵서비스 사내의 팔을 뒤로 꺾어 올리고 있었다. 사내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여자를 떨쳐 내려고 발버둥쳤다. 다음 순간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여자는 덜렁거리는 사내의 팔을 그대로 쑥 뽑아냈다.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피의 비가 쏟아졌다.
여자가 퀵서비스 사내를 잡아 먹는 동안 나는 온 힘을 다해 뛰어 달아났다. 앞장 서서 도망치던 그녀가 멈춰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길 잃은 유치원생처럼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망할 년들! 개 같은 년들!”
악에 받힌 노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광 버스를 둘러싸고 노란 불덩이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불길 속에서 여자들이 노인들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들과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꿈 속에서 본 피라니아 떼가 떠올랐다. 횃불을 들고 나를 바라보던 벌거벗은 여전사들의 새파란 눈빛도. 빠른 속도로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내 곁에서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 쉬며 힘주어 내 손을 잡았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빨리 가요.


“역시 저랑 같이 다니면 위험해져요.”
썩는 냄새가 풍기는 분식집 카운터 뒤에 주저앉아, 그녀가 중얼거렸다. 잠깐 사이에 몰라보게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내 얼굴도 비슷한 상태일 것 같았다. 나야 살이 좀 빠져야 사람 형상이 되겠지만 그녀는 당장에라도 물거품처럼 산산이 흩어져 없어져 버릴 것 같았다.
“저랑 있으면 득 볼 게 없어요. 시민군 트럭도 제가 타자마자 흩어져 버렸잖아요. 앞으로는 그냥 저 혼자 다닐게요.”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시, 시민군이 흩어진 건 괴물 아줌마 탓이었지 당신 탓이 아니었는 걸요. 어떻게든 군대를 만날 때까지만 버텨 봐요.”
“방금 그 노인들 봤잖아요. 너무 무서웠어요.”
“그, 그 사람들은 진짜 군인도 아니고……정상적인 사람들도 아니잖아요.”
어느새 내가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내 주제에 남을, 그것도 여자를 위로할 수 있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에게 얹혀 가는 입장이었는데. 그녀는 대답 없이 시든 꽃처럼 고개를 수그렸다. 몇 시간 전까지의 생기 넘치는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었다.
“언제까지 이 상태로 버틸 수 있을까요?”
“예에? 무슨 말이에요. 지금 잘 버티고 있잖아요.”
나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그녀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아니……세상이 말이에요.”
“세, 세상은 이대로 망하지 않을 거에요. 어떻게든 망하지 않고 이어져 나갈 거에요.”
나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기운을 되찾아 주려고 되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인류는 살아 남을 거에요. 모든 여자들이 전부 다 괴물로 변해 버렸다고 해도, 당신만은 이렇게 정상적인 상태로 있으니까, 어떻게든 살아 남은 사람들과 힘을 합쳐서 정상적인 유전 인자를 다시 만들어 내면……. ”
횡설수설하는 나를 바라보며 그녀가 쓸쓸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그녀의 웃음에 나는 멍해졌다.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같이 다녀 줘서 고마워요.”
“저, 저야말로.”
비록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지만 어떻게든 살아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인류 최후의 여자와 그녀를 지키는 남자가 있으니까. 유치한 콘솔 게임 광고 같은 문장이 머리 속을 가득 메웠다. 상상 속에서 그녀와 내가 한 집에 있는 그림이 떠올랐다. 그림 속의 나는 그녀와 함께 리듬 게임을 하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기저귀를 찬 어린 아기도 있었다. 그래, 그렇게 인류는 어떻게든 이어져 나가겠지.
동이 트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긴 그림자가 도로를 뒤덮었다. 나는 입을 떡 벌리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텅 빈 도로 맞은편에서 군용 지프의 행렬이 느린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살았어요!”
나는 펄쩍 뛰며 그녀를 잡아 끌고 지프를 향해 달려갔다. 우리를 발견한 군용 지프가 멈추어 섰다. 뒤 칸에서 군인이 내려와 나와 그녀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우리는 동시에 손을 들었다.
“일반인입니다.”
내 말에 군인은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잘라 말했다.
“여자는 안 돼.”
“이 사람은 괴물이 아니에요. 정상인이에요!”
“여자는 안 돼. 원칙이다. 남자는 뒤차에 타.”
“정말 정상인이에요! 제가 사흘 동안 같이 지냈습니다!”
나는 두 손을 든 채 필사적으로 군인을 향해 소리쳤다.
“인류를 구할 수도 있어요! 유일하게 살아 남은 정상인 여자라고요!”
“지금부터 5까지 세겠다. 그 전에 뒤차에 타지 않으면 너도 같이 소각한다. 5, 4,”
“잠깐만요!”
갑자기 그녀가 소리쳤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3, 2,”
마지막 1을 세려던 군인이 말을 멈추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그녀는 한 손으로 치마를 들춰 올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치마 밑에서 팬티를 내리기 시작했다. 팬티가 땅 위에 떨어졌고, 그녀는 두 손으로 치마를 좀 더 높이 걷어 올리며 군인을 향해 섰다.
드러난 그녀의 벗은 아랫도리에 군인의 시선이 꽂혔다. 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나는 그가 입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씨발 별 좆 같은’. 우리를 겨누고 있던 총부리가 내려갔다.
“둘 다 차에 타.”
군인의 허가가 떨어지자 그녀는 치마를 내리고 바닥에 떨어진 팬티를 주워 들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와 그녀는 군용 트럭에 올라타 죽은 물고기 같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미안해요.”
“뭐, 뭐가요?”
“저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녀는 팬티를 움켜쥔 손을 내려 다리 사이를 가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와 땀 냄새와 오물 냄새와 숫내가 한데 뒤섞여 코를 찔렀다. 나는 멍하니 그녀, 아니 그의 둥근 이마를 바라보았다.
군용 지프의 행렬은 아침 햇살에 붉게 물드는 아마존을 헤치고 나아갔다.




----------------------------------------------------- '아마존' 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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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dherring 10.04.05 20:40 댓글 수정 삭제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할 수는 없겠지만, 마음에 드는 반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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