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등불 : 아차상

2007.10.27 13:2810.27

크라비어 



내 이름은 이올 테 라소미드 에 로포나. 로포나 후작 가문의 4남이(라 쓰고 물려줄 영지가 없어 집에서 쫓겨난 골칫거리라고 읽는)다. 그리고 하루지트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 틸란트 왕국의 젊은 국왕 테오 4세의 국내부문 수석 보좌관이기도 하다.

“어서 오게, 라소미드 후작.”

그날도 왕궁에 출근해 국왕께 보고드릴 문서를 챙겨 집무궁으로 갔다. 국왕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나보다. 보자마자 나부터 놀리기 시작했으니까.

“후작이라고 하면 보통 영지가 3만 틸토가 넘지? 방대한 농지를 가진 악덕 대 영주로서 한 말씀 해보겠나?”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 후작도 아니고, 땅 한 평 가진 게 없는데요?”

“으음...그런가. 하긴 장래성 없는 자식에게 작위와 영지를 물려 줄 부모 따윈 세상에...”

“이번에 85번째로 말씀드리는 것인데, 제가 넷째 아들이기 때문에 영지와 작위를 못 받은 거지 멍청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진짜 바보라면 절 수석 보좌관에 임명하신 것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그야 우리 틸란트 왕국의 복지 정책의 일환이지. 국왕으로서 아무도 굶어 죽게 하고 싶지 않았네.”

신나게 나를 박살낸 국왕은 집무실 책상 위(의자가 아니다!)에 앉았고 내게도 자리를 권했다. 물론 나는 상식적으로 의자에 앉았다.

“자, 오늘 수많은 아첨꾼들이 내게 만년은 갈 것이라고 뻥을 치는 왕국에는 무슨 일이 일어 났던가?”

“먼저 마늘 값이 1퀵 당 44 달리 만큼 올랐습니다. 올해 들어 최대 가격입니다.”

“맙소사. 의회에서 귀족파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겠군. 원인은?”

“최대 산지인 틸코마트에서 넘어오는 물건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이유는 아직 모릅니다.”

“알아내게. 하지만 내 짐작으로는...네스테크야. 그 놈이 수상해. 틀림없다고.”

네스테크는 틸코마트 최대 거상으로 그 동네 농산물 유통과 금융업을 휘어잡고 있는 굴지의 자산가다. 틸코마트의 영주이자 귀족파의 수장인 아이리안트 공작의 목줄도 잡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데 테오 4세와는 사이가 별로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를 감옥에 처 집어넣고 그의 전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국왕의 커다란 인생 목표 중 하나였다. 그가 왜 이렇게 네스테크를 미워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물어본 적도 있으나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국왕이 자꾸만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테오 4세의 정치 세력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상공업자 쪽이라는 점이었다. 네스테크 하나 때려잡으려고 무리수를 두다가 상공업자들 전체를 적으로 돌린다면 국왕 입장에서는 사실상 정치적 자살을 하는 샘이었다. 아직까지 국왕은 그런 짓을 할 정도로 이성을 잃지는 않고 있다.

“아직 그에 대한 증거는 없습니다. 조사해보고 보고서를 올리지요.”

그딴 증거 따윈 조작하면 되니까 놈을 잡아넣으라는 국왕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정중히 무시하며 다음 보고사항으로 말을 돌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 왕도의 6번, 7번 다리가 무너졌습니다.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낡아서 보수하려고 통행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거 다행이군. 아무도 처벌하지 않아도 되니 말일세.”

“대신 예산 지출이 늘어날 것입니다. 자세한 예산안 보고는 왕도 장관이 차후에 보고할 것입니다.”

“좋네, 그 다음은?”

“테솔페인의 무역길드 장이 어젯밤에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잉어구이를 너무 많이 먹다 채했답니다.”

“60넘은 노인네가 과식을 하는 일은 현명한 짓이 아니지. 후임은?”

“오늘 내일 중으로 길드 장 선출이 있을 예정이랍니다. 그쪽 얘기로는 카를 뵘이 유력하답니다.”

“우리 편인가?”

“아니요. 귀족파에, 지주파에, 신정파랍니다.”

“개입해야겠군. 그 정도 중요한 길드 장을 귀족파가 날로 먹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지. 상황은 어떤가?”

“길드 이사 5명을 살 수 있다면 국왕파 인물을 당선 시킬 수 있습니다. 돈이 장난 아니게 들겠습니만. 차후에 길드 장 후보 명단을 보고해 올리겠습니다.”

“알았네. 후보 선정과는 별도로 당장 작업을 시작하도록. 다른 것은 없나?”

결국 오늘 할 보고 중 가장 심각한 일을 말할 때가 왔다. 어떤 사람은 국왕에게 보고할 때 가장 골치 아픈 일을 먼저 보고하며 그 반대로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를 선호하는데 나름대로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현 국왕의 기질은 명백히 후자를 좋아한다.

“이게 오늘의 메인 디시입니다. 안타고 추기경이 어제 저녁 하정 미사에서 우리 왕국이 그리트 교를 정식 국교로 삼아야 한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국왕은 기묘한 표정으로 이 보고를 들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미간을 찌푸린 얼굴. 집중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테오 4세는 당황하지 않는다. 화도 내지 않는다. 단지 생각할 뿐.

“계속하게”

“장소는 왕도에 있는 미셸튼 성당입니다. 약 1천 명 정도의 신도들을 상대로 이루어졌고 설교 시간은 대략 1시간 정도였답니다.”

나는 국왕의 눈치를 살폈다. 어쩌면 이는 국왕 직속 정보부에서 이미 보고한 내용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국왕의 모습을 보니 이번이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만일 그렇다면 빙고이겠지만, 모르지. 테오 4세는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니까.

나는 국왕에게 안타고 추기경이 한 설교를 요약한 내용을 읽어주었다. 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뻔한 레퍼토리였다. 틸란트 왕국의 백성 중 3할이 넘는 사람들이 믿고 있는 그리트 교는 마땅히 국교로 지정될 자격이 있으며 다른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도 모두 그리트 교에 귀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세게 나간 부분이 국왕 테오 4세도 당연히 그리트 교에 귀의하여 지난 거짓된 믿음의 세월을 반성하고 주의 양이 되어 복음을 전파하는데 앞장서야 한다고까지 말한 것이다.

“골치 아프군. 일개 시골 신부가 한잔 한 김에 몇 명 모아 놓고 한 얘기도 아니고 왕도 한복판, 우리 왕국의 그리트 교 총본산에서 추기경이 천명 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소리야.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지?”

이런 질문에는 신중에게 답해야 했다. 국왕은 다소의 무례는 가볍게 웃어넘기는 사람이었지만 바보의 멍청한 소리는 견뎌내는데 서툴렀다.

“상책은 무대응입니다. 추기경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할 정도라면 우리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 기대한 반응 중 무시는 포함되어 있지 않을 겁니다. 모른 척 해버린 것만 해도 그들의 의도-무엇인진 모르겠지만-를 일단은 분쇄해 버릴 겁니다. 문제는 이 방법을 앞으로 한두 번 정도 밖에는 쓸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계속 이런 식의 도발을 한다면 우리는 반응해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뭘까?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하는 것이 그들을 가장 기쁘게 만들까? 물론 내가 그리트 교로 개종하고 틸란트 왕국을 신권 국가로 만들거나 안티고 추기경을 처형하고 그리트 교도들을 모조리 때려잡으려고 하면 뛸 듯이 좋아 할 거야. 하지만 게네들도 머리가 있으니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잘 알 테고...”

“혹시 현 교황이 다른 국가의 정치적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안티고 추기경에게 시킨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면 나스티리아 공국에서 현지의 포교에 대한 저항 문제라든지...”

“그렇게 보긴 힘들어. 고작 그런 촌구석의 포교문제 때문에 틸란트하고 복잡한 외교, 정치적 문제를 야기하려고 할까? 흠. 모르겠군. 이상해. 왜 이들이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논리적이지 않네. 뜬금없어. 뭐, 다른 보고 사항은 없나?”

“이걸로 끝입니다, 폐하.”

“그 추기경 건은 간단히 끝낼 문제가 아니야. 오후에 시간을 내서 각료 회의를 열어야겠어. 자네도 참석하게나. 비서관과 일정 조율을 해야겠지. 그럼 수고했네. 이따가 오후에 보세.”

나는 집무궁을 떠나 관료궁에 있는 내 사무실로 돌아왔다.

“지하라 보좌관, 민라센 보좌관, 하센 서기관은 모두 모여주세요.”

양피지 더미를 책상 위에 던져 놓으며 말하자 차석 보좌관 2명과 서기가 내 자리로 찾아 왔다. 내가 수석 보좌관 자리에 임명 된지도 올해로 3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나와 함께 임명되어 지금까지 같이 이 너저분한 일을 해오고 있다.
“여러분 예측대로 그리트 교 건이 핵심 안건이 되었습니다. 아마 열흘, 잘하면 보름 넘게 우리 왕국의 행정력을 모조리 동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외교력, 군사력, 내치력, 모두 그 일에 묶여 정신없게 되겠죠. 그리고 여기있는 우리가 그 내치력입니다.”

“세상에, 우리가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군요.”

하센 서기관이 이죽거렸다.

“바꿔 말하면, 우리의 능력이 곧 틸란트 왕국의 능력이기도 하다는 소리지요. 이거 불안한데요?”

민라센 차석 보좌관이 맞장구쳤다. 이 두 사람은 불행히도 형제로서 국왕파의 중진의 자제라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각종 듣기 괴로운 만담으로 나를 고문하곤 했다. 내 꿈은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 연예계로 진출해 관객들 앞에서 썰렁한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분노한 관객들에게 맞아 죽는 것이다.

“폐하께선 뭐라고 하십니까?”

가장 상식에 충실하며 우리 중 가장 연장자인 지하라 선임 차석 보좌관이 제대로 된 질문을 해 왔다.

“왜 하필 지금 그런 행동을 하는지 납득을 할 수 없다고 그러십니다. 인용하지면, ‘논리적이지 않네. 뜬금없어.’”

“하나도 안 똑같아요!”

“폐하께서 방금 그 흉내를 보셨다면 매우 실망하셨을 겁니다.”

잉크병 속 잉크로 두 인간을 익사시키려다 참았다.

“일 합시다. 오후에 이번 설교에 대한 각료 회의가 있을 겁니다. 그 때까지 수도에서의 그리트 교단의 활동 내역과 안타고 추기경, 그 측근들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세요. 각하의 결단은 우리가 조사하고 정리한 자료와 거기에 부기된 여러분들의 의견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그러자 지하라 선임 보좌관이 한마디 했다.

“지난번 크란켄크라트 사태처럼 망치지만 맙시다. 솔직히 우리 모두 그때 쫓겨나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그거야 군부가 너무나 큰 사고를 처놔 버려서 우리가 삽질 한 것 따위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서죠. 군인의 의무는 국왕과 왕국, 그리고 백성을 수호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사실이더군요.”

크라켄크라트 사태는 크라켄크라트의 광산 길드가 내분에 빠져 채광을 완전히 중지해버린 사건이었다. 왕실은 분쟁을 중재하려고 했고 실무를 맡았던 것이 나와 내 부하들이었는데 양 파벌의 대표에게 보낼 비밀 협약서를 서로 바뀌어서 보내버린 실수를 해버렸다. 다행히 도착 직전에 회수했기에 사태가 파국에 빠지는 것은 막았지만 왕실 내 분위기가 험악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사임하는 것을 각오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그 때 군부가 한건 해준 것이다. 틸란트 왕국 육군은 새로운 편제의 부대를 창설하기로 했는데 그 부대 병과가 ‘용기병’이라고 발표를 했다. 물론 진짜 용을 타는 것이 아니라 이동시에만 말을 타고 싸울 때는 말에서 내려 싸우는, 싸게 먹히는 경무장 기병이었는데(40년 전 외국의 어떤 왕이 허풍스럽게 붙여버린 이래 관용적으로 쓰이는 명칭이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는 몰라도 농촌 출신에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병사들이 자기네나라 육군이 진짜 용을 키우고 있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휴가 나와서 가족들에게 자랑스럽게 용기병 이야기를 했으며 이는 왕국 전역에 퍼져 버렸고 국가적으로도 대 망신이 되어 버렸다. 이거 수습하느라 왕실이 혼란에 빠져서 우리 실수는 은근 슬쩍 넘어가 버렸으니...뭐 좋은 일인 것이다.

“그랬어요? 전 수석 보좌관님이 국왕 폐하께 수청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무사한 것으로 아는데요?”

“예, 두 분 모두 그 나이가 되도록 독신인 이유가 있었다고 모두들 납득했는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들고 민라센과 하센의 정수리를 노리고 휘둘렀다. 아깝게 빗나가서 내 집무실을 뛰쳐나가 도망치는 것을 두고 봐야 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부하들은 일을 시작했고 나도 내 할일을 해야 했다. 영지도, 작위도 받지 못한 귀족 나부랭이가 가질 수 있는 직장 치고는 나쁘지 않았기에 쫓겨나지 않게 열심히 일해야 했다.

부하들이 찾아온 자료도 묶고 정리하고, 정서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동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고,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식당으로 가 밥을 먹었다. 나름대로 괜찮은 식사를 마치고 직장으로 돌아오는데 왕국에서 가장 재수 없는 밥맛을 만나고 말았다.

“난 재수 없는 밥맛이 아니라 네 형이다.”

“예에. 무려 5만 틸토의 영지를 가지신 대지주 로포나 후작님께서 이렇게 말을 걸어주시니 저 같은 미천한 시골 귀족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요. 그럼 이만.”

“이올, 비꼬는 것은 그만 뒤. 네가 장남이었어도 나랑 똑같이 했을 거다. 그 보다도 오늘은 잠깐 얘기 좀 하자.”

“아, 드디어 이성과 염치를 되찾아 나한테 작위와 영지를 넘기려고 왔군. 넙죽 받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지만 정의를 위해서는 예의가 양보해야지. 잘 받을게.”

“...정말 입담이 쌔구나. 예전엔 안 그랬는데.”

“폐하와 한달만 같이 일 하면 이렇게 돼. 그런데,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래?”

“여기서는 곤란하다. 나가서 이야기 했으면 하는데...”

“이거, 귀족파의 중진인 라소미드 에 로포나 후작과 국왕 수석 보좌관 사이의 대화야, 아니면...”

“형과 동생 사이의 대화다. 그 뿐이야.”

믿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이렇게 되면 자리를 피할 명분이 없게 된다. 나는 형이 타고 온, 왕도에서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운 마차로 형을 따라 갔다. 형은 나와 만나러 왔을 때 두 명의 수행원을 대동했었다. 그런데 마차 곁에는 무려 8명의 경호원들이 둘러싸고 있던 것이었다. 숫제 그들을 태울 마차까지 한대 더 끌고 왔다. 나는 어처구나가 없어 형을 돌아보았다.

“저게 뭐하는 짓이야. 아말련 축제일은 석 달이나 남았어. 이게 무슨 가장 행렬이야?”

“뭐가 이상한데? 여기는 국왕파의 본거지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아?”

농담하나? 이것은 귀족으로서 국왕에 대해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인데다가 실속 없는 행동이다. 국왕이 진짜 형을 암살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8명가지고는 무리다. 진정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면 아애, 왕도에 기어들어오지 말고 대리인을 보내야 한다.

어이가 없어 멍해하는 나는 아랑곳없이 형은 마차에 올라서 자리를 잡고 앉더니 빨리 안 들어오고 뭐하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헛웃음을 삼키며 마차에 올라 형과 단 둘이 앉게 되자 형이 데리고 온 수행원들은 밖에서 마차를 둘러싸고는 버티고 섰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며. 네가 결혼했으면 하는 혼처가 있다. 자작가의 영애이지. 이름은 도리나. 올해로 열아홉 살이 되었다.”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내가 국왕 밑에서 일하는 직장을 잡아서 거의 의절 당하다시피 했는데 갑자기 집안을 위한 장기 말로 쓰시겠다?

“허, 무지 고맙네. 결혼? 진심이야? 귀족파의 필두 집안에서 검은 양 한 마리가 나왔다고 야단법석을 떨 때는 언제고 갑자기 중매를 새워? 행동에 시종일관성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널 위해서다. 귀족이면서도 국왕파가 됐다 해도 너는 로포나 집안사람이고 난 네 형이야. 서른이 다 됐는데 영지도 작위도 없으면서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지 않니. 훈둔 자작가는 아들이 없어. 네가 그 쪽과 결혼하면 훈둔의 성을 따르게 되고 자작 칭호와 1만 오천 틸토의 영지도 얻게 돼. 그 쪽에서도 너라면 이야기를 진행시킬 눈치다.”

“이 결혼, 가장으로서의 명령이야, 아니면 내게 선택권이 있는 거야?”

“이올. 난 아버지가 아냐. 네가 싫다면 억지로 진행시킬 생각 없다. 난 단지 네게 로포나 집안사람답게...어떤 수준 이상의 삶을 살길 원할 뿐이다.”

난 폭발했다.

“수준 이상의 삶?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이 나라의 수석 보좌관이야! 국내 정치 사안 중 폐하의 이름으로 하는 사소한 일은 내가 결정해. 중요한 사안도 폐하는 내 의견을 크게 참고해서 결정하셔. 그깟 귀족들 몇 명이 모여 서로 영지 크기나 비교하며 마차에 단 금박 장식  경쟁하는 것보다는 내 쪽이 훨씬 귀족답고 로포나 다워!”

“그게 너희 국왕 파들의 한결같은 착각이야. 그게 네 힘인 줄 알아? 네가 똑똑해서 사람들이 네 마을 들어주는 것 같니? 넌 성모상을 등에 짊어진 당나귀에 불과해. 지금은 좋겠지. 국왕의 신임도 받고,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까 뭔가 자신이 대단한 인간이 된 느낌도 들겠지.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까? 국왕의 총애만큼 변덕스러운 것도 없어. 언제 모든 것을 읽고 맨 몸으로 궁전에서 쫓겨날지 몰라. 그 땐 넌 어쩔 테냐?”

“이게 누가 얼마나 출세하고 더 높이 올라가는 그런 문젠 줄 알아? 내가 왜 국왕 폐하를 지지하는데? 누가 틸란트 왕국이 더 부강해지기를 바라지? 누가 백성들이 더 잘 먹고 잘 사는데 신경을 쓰냐고? 귀족들이? 천만해! 백성들이 죽 던 말 던 자기 마누라 진주 목걸이와 드레스 사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정박아들이 자기 영지에서 백성들 고혈을 빨아낼 때 폐하께서는 군인들 퇴직금 충당하느라 포크 하나도 맘대로 새 걸 못사셔.”

“국왕이 백성들을 위한다고? 맙소사.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진하군. 그에게 목적이 있다면 단 한가지야. 자신의 권력 강화지. 그가 진정으로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왜 백성들에게 막대한 부담이 되는 군비 확장을 무리하게 추진하는데? 안 그래도, 틸란트 왕국의 국왕 직속 부대는 대륙 최강이야. 우리 귀족 연합을 견제하려고 하시나? 그럼 국민에게 덜 부담이 가는 방식으로 해야지.”

“누가 먼저 군비 경쟁을 시작했는데? 안 그래도 수확량이 뻔한 영지에 박박 긁어 가는 머저리들에게 좀 전해줘. 산출량의 7할 이상을 뺏어 가면, 농부들이 다 굶어 죽는다고!”

“그 이야기 그대로 돌려주지. 그놈의 중상주의 정책 때문에 국왕 영지의 백성들이 곡물 상인들에게 착취당하는 꼴은 어떻게 설명할거냐? 입도선매다, 비료대다, 흉년 때 구휼미 상환이다 뭐다 해가지고 수확량 대부분을 헐값에 넘기거나 그냥 빼앗기지 않나?”

“그건 일부의 이야기야. 많은 경우 농부들은 좋은 가격에 밀을 수확물을 팔아서 현금을 손에 넣는다고. 왜 그게 가능하냐고? 상업을 발달 시켜서 상인들이 곡물을 살 돈이 있기 때문이지. 중상주의야말로 진정한 중농주의야. 언제까지 농부들이 자기 밭에서 캐낸 순무나 씹어 먹으라고 할 샘이야?”

“일부? 국왕령의 트란볼트 지방은 농지의 6할이 모조리 상인들 것이 되었는데 그 동네는 자기 땅 가지고 농사짓는 사람이 일부인 것 같은데?”

이렇게 형과 정면으로 논쟁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나는 감정이 격양되어 헉헉거리며 형을 노려보았지만 로포나 후작은 얄밉게도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차분한 표정으로 지긋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형하고 정치적 논박을 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가문의 수장이라는 권위로서 찍어 누르기만 하는 멍청한 귀족들 중 한명이라고 슬쩍 무시하기도 했다. 논리로 싸우기만 할 수 있다면 나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거 만만치 않은데.

“이올. 언제까지 그런 백성의 복지나 왕국의 미래 따위의 뜬 구름 잡는 소리만 계속 할지 모르겠구나. 우선 너부터 건사해. 널 봐라. 넌 로포나 가문 사람이다. 그런데 국왕파 한가운데서 놀고 있지. 네가 국왕파에 몸담고  있는 이상, 사람들은 언제고 네게 국왕파인지 귀족파인지 밝힐 것을 요구할거다. 넌 답하겠지, 난 국왕파라고. 그럼 사람들은 이럴 거야. 네 몸에 흐르는 귀족의 푸른 피는 뭐냐고! 넌 평생 의심 받을 거다. 귀족파의 지주이자 실세 가문의 남자이면서 국왕파에서 온전히 살아남을 순 없는 법이야. 이올, 궁을 나오거라. 귀족답게 영지와 작위를 얻어. 만일 결혼하는 것이 싫다면 그냥 로포나로 돌아와도 좋다. 내가 영지를 나누어주지. 작위는 무리지만 말이다.”

눈이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형이 영지를 나누어주다니, 놀랠 노자였다.

“어느 정도 줄 건데?”

“오천 틸토, 곡창지로.”

영지의 전체 넓이가 5만 틸토임을 생각하면 ‘에게?’ 소리가 나올 법도 했지만 실은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웬만한 자작이나 남작 가문 중 영지가 오천 틸토가 안되는 곳이 수두룩했다. 형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수석 자리를 때려 치고 냉큼 받아먹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3년간 내가 궁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 ‘달콤한 이야기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다.’

“고마워, 생각해볼게.”

“결혼에 대한 대답은 서두를 필요 없다. 추후에 사람을 보낼 테니까...”

“아니, 형. 그렇게 번거롭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냥 여기서 대답할게. 싫어. 그딴 결혼, 하고 싶지도 않아. 솔직히 형도 보고 싶지 않고. 그러니 여기서 우리 해어지자고. 나 지금 마차에서 내려도 되지, 후작 나리?”

“그래, 여전히 내 말은 귀에 담지도 않는 것 같지만, 가고 싶다면 가거라. 하지만, 이올. 우린 형제다. 국왕파건 귀족파건, 세속파건 신정파건 그 사실을 바꾸어 놓진 못해. 알겠지?”

“아니, 모르겠어.”

친절하게 솔직히 대답해 준 나는 마차에서 내린 후 일부러 장식이 떨어져라 세게 문을 닫았다. 마부는 채찍을 휘둘렀고 4마리 말이 끄는 마차는 무심하게 거리로 사라졌다.

집무실로 돌아와 보니 내 책상위에 서류가 쌓여 있었다. 오전에 부하들이 조사해 놓은 그리트 교와 안타고 추기경에 관한 자료였다. 안타고 추기경은 올해 58세로 크리마티 출신이었다. 부모는 방물장수였고 8살 때 수도원에 맡겨져 승려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교리의 이해나 신앙심 면에서는 두드러진 평가는 받지 못했으나 조직 내 파워 게임에 굉장히 능하다는 평이었고 인맥관리 면에선 타에 추종을 불허했다. 차기 교황 후보로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인물.

이런 사람이 단지 ‘똥오줌도 못 가리는’ 충동적인 신앙적 소명 심으로 정치 외교적으로 파장이 큰 미사를 올렸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리트교 교단. 철저한 상명 하복의 피라미드 체계를 유지하는 특성을 고려해 볼 때 불타에 있는 교황이 뒤에 버티고 있음이 명백했다. 더 안 좋은 것은 그 교황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권모술수에 능하다.

이런 자들이 하는 행위가 아무 의미 없을 리가 없다. 만일 진짜 아무 의미 없다면 의미 없다는 것이 의미다.

문제는 아직도 이 친구들이 왜 이런 미사를 하는지 감이 안 잡힌다는 것이다. 왕실을 도발해서 얻는 이득이 무엇인가. 저번 교황의 멍청한 강성 신권주의가 대륙의 국가들의 반감을 사 그리크교권이 위축된 것에 비하면 현 교황은 유연하게 대처를 하고 있다는 평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왜?

자료는 얼마든지 있었다. 지난 이백년간 그리트교는 틸란트의 전통 종교를 밀어내고 왕국 3위의 종교가 되었다. 헌금도 엄청나게 많이 모았고 사원도 개울가의 올챙이 알 마냥 지겹게도 많이 지어 댔으며 사제들 숫자도 엄청났다. 그리트교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와 지역을 초월한다는 점이었다. 모든 그리트교 교단은 볼타의 교황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게다가 강력한 선교력을 가지고 있어 토착 종교는 어떻게 대항할 방법이 없을 지경이었다. 틸란트 왕국이 아직 그리트교 신권국가가 되지 않은 이유는 전통적으로 재정 분리의 정치적 분위기가 강하고 종교의 자유를 강력히 고수하는 사회적 풍토가 있으며 그리트 교 교황의 영향력 아래 있는 왕국이나 공국을 모두 합친 것 보다 강력한 군사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종교 단체에 세금을 부과하는 권리를 챙겨 두어서 속권이 교권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를 확보한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그리트 교단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역대 국왕들은 이들의 불같은 교세 확장과 정치개입에 대한 정렬과 맞서 싸워야 했다.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인다는 방법은 200년 전에 진작 실패했고, 이제는 훨씬 까다롭고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상대해야 했다.

그래도 새 교황이 취임한 이래 지난 10년간 틸란트 왕국에서 그리트 교는 그다지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준다는 묵시적 신사협정이 채결된 분위기마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제 와서?

모르겠다. 그것보다도 일단 국왕에게 오늘 형을 만났다는 보고서를 쓰는 것이 더 급했다. 그는 형 이전에 귀족파의 중진인 로포나 후작 가문의 수괴이니 말이다. 형과의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양피지에 옮기면서 나는 뭔가 확실히 잘 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형과 나 사이의 대화는 한마디로 전혀 의미 없었다. 아무 쓸모 짝도 없는 정치 이야기, 내가 받아들일 리도 없는 혼담에 이상하게 미끼인 느낌이 강한 영지 할당. 그 어떤 것도 형의 성격과 행동에 맞지를 않았다. 로포나 후작 라스미르는 바쁜 사람이었다. 더더구나 성격 또한 쓸데없는 일을 가급적 안 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약속도 없이 갑자기 3년 전 국왕파가 되서 쫓아내버린 동생을 찾아와 뜬금없는 혼담을 권유한데다가 직장을 관두라는 이야기를 한다?

오늘은 의미 없는 일을 절대 하지 않을 사람들이 무의미한 일을 하는 것을 보는 날인가? 아니다. 의미가 없을 리가 없다. 다만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일 뿐.

그 때 비서실 쪽에서 사람이 와서 긴급회의가 열렸으니 빨리 참여하라는 연락이 왔다. 긴급회의?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이 지천에 널렸는데 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허겁지겁 집무궁으로 달려가니 정부 각료들과 군부의 장군들이 집무실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틸란트 육군의 기마 2천 마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폐사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왜 말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죽었는가. 독인가? 사료에 문제가 있나? 배후는? 외국의 첩자의 짓인가? 귀족파의 사주인가? 정보는 부족했고 사태는 심각하여 정신이 없었다.

하긴 당연하다. 틸란트 육군의 기병은 2만기이지만 그 숫자가 모두 순식간에 동원될 수는 없다. 고작 2할 정도가 이틀 내로 출병할 수 있고 나머지 숫자가 소집되려면 열흘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 죽은 말들은 그 2할의 절반이었다. 맙소사. 우리 왕국의 신속 대응 기병 전력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일단 회의는 폐사의 원인을 신속하게 찾는 것으로 마루리가 지어졌다. 나 또한 집무궁을 나오려고 했는데 국왕이 잠깐 나를 불러 새웠다.

“이게 우연인 것 같나? 사고일 수도 있겠지. 전염병이나 뭐 그런 것 말이야. 하지만 시기를 보아서는 누군가 우리말들에게 손을 봤다는 가정을 안 할 수는 없어. 자네가 그 가정 중 하나를 맡게나. 그리트 교 말일세.”

“그리트 교단이 이번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밖에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 조차 알려진다면 교계가 벌컥 뒤집힐 겁니다. 외교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길 테고요.”

“그 치들은 자기들이 종교 집단 이유만으로 뭔가 거대한 특권을 얻었다고 착각하고 있어. 아무도 그리트 교를 비난해서도 안 되고, 의심해서도 안 되고 무조건 존중해주고 칭찬만 해 줘야지. 그걸 이유 없이 당연하다고 여겨. 미치고 환장할 일이지. 여하튼 자네는 그리트 교 쪽을 파고들게. 최근 그 설교하는 것 들을 보면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기니까.”

집무궁을 떠나 내 집무실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민라센 차석 보좌관과 하센 서기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막 집무실로 돌아오니 갑자기 그 들이 노래를 부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안타고 추기경이 미사하고 있습다.”

“엉터리 설교지만 사람들은 많슴다.”

“내용을 들어보니 그리트교 짱임다.”

“간절히 외칩니다 그리트고 국교화.”

“어쩌면 좋습니까 우리들의 보좌관.”

“가르침을 주십시오 벼락출세 보좌관.”

두 팔과 두 다리를 반대쪽으로 교차하며 벌린 자세로 가무를 마친 두 사람을 보니 어이가 없어 입만 벌리고 있었다.

“보라고, 우리들의 완벽한 가무에 심장에 직격탄을 먹은 표정이야.”

“저런 멍한 표정조차 사랑스럽군.”

“장난은 그만 둬요! 토 나오니까. 잠깐, 안타고 추기경이 또 정교합치 설교를 했단 말입니까?”

내 질문에 민라센 보좌관이 대답했다.

“예, 대성당 앞의 티톨리움 광장에서 1만 명 정도 신자들을 모아 놓고 하는 미사죠. 미사 자체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이맘 때 종종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의식이 끝나자마자 설교를 시작하는데, 어제와 대동소이한 내용입니다.”

하센 서기관이 이어 받았다.

“‘테오 4세는 주의 종이 되시오. 다른 그릇된 믿음을 백성들의 마음에서 쫓아 내고 그리트교만이 유일신으로서 왕국의 국교가 되도록 하십시오!’”

“맙소사, 진짜 그렇게 설교했단 말입니까? 또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관심 받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 것이죠.”

“빨리 우린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냅시다. 광장에 기병대를 보내는 것은 어떨까요?”

두 사람의 헛소리를 한 귀로 흘려보내며 생각했다. 그리트 교가 왕실에 시비를 걸고 있었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왜지? 지기들에게 백해무익한 짓을 계속 하는가? 백성의 3할이 그리트 교라는 세를 믿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형제다. 국왕파건 왕당파건, 세속파건 신정파건 그 사실을 바꿔놓지는 못해.’

갑자기 형의 말이 생각났다. 마음에 걸리는 소리였다. 왜 하필 신권파를 언급했을 까? 그러자 머릿속에서 거미줄 같은 사고의 실이 이리저리 튀어 다니다 몇 가지 사건을 연결시켰다. 그러자 나로서는 가장 합리적이고 진실임이 분명한 결론, 사태의 진상을 알아냈다. 남은 것은 확인 뿐.

지하림 차석 보좌관까지 부른 나는 3명에게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상인인 네스테크, 틸코마트에서 상인들이 거래하는 물건, 왕도에서 거래되는 다른 물건들의 가격 동향, 창고 이용 상황 등등. 다른 일들은 잠시 미루고 모든 인원을 이 일을 조사하는데 동원해 달라고 했다.

다음날 오전, 밤을 꼬박 센 나는 이번 사태를 정리한 보고서를 가지고 국왕을 만나러갔다. 다행히 막 장군들과 회의가 끝난 참이어서 바로 집무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폐하.”

“어서 오게나, 이올. 자네 꼴이 말이 아니군. 드디어 하시시를 피고 싶은 만큼 피고 나머지는 잊어버리는 삶을 택했나봐. 내가 먼저 저지를려고 했는데 선수를 치다니.”

“폐하, 저를 놀려대는 즐거움을 도중에 방해하게 되서 굉장히 송구스럽습니다만, 급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안티고 추기경이 왜 정교일치 발언을 계속 해대는지 알아냈습니다.”

“그들은 그저께도, 어저께도 미사에서 우리가 그리트 교를 국교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지. 오늘 아침에는 추기경을 필두로 500여명의 그리트 교인들이 왕궁 앞에서 일렬로 줄을 서서 걸어가더군. 그 들이 왜 그런지 안다면 좀 덜 신경질이 날텐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들은 미끼입니다. 추기경이 그런 돌출 행동을 연달아 하는 것은 왁국의 모든 시선이 그 쪽으로 향하기를 원해서 입니다. 폐하 직속 정보기구도 지난 이틀간 이 일에만 매달렸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국왕은 나를 처다 보다가 눈길을 아래로 돌렸다.

“그렇다네. 조직을 총 동원해서 그리트 교와 기마 폐사 사건을 연결시키는 단서를 찾으려고 사력을 다 하고 있었지.”

“거기다 외교 쪽도 마찬가지고요. 한마디로 우리는 그리트 교 때문에 다른 곳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무엇을 숨겼나? 그렇게까지 소란을 피우면서 뭘 숨기려고 했던 거지?”

“아직 보고를 못 드렸지만, 실은 어제 제 형인 로포나 후작이 절 만나러 왔습니다. 만남 자체는 어처구니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후작답지를 않았으니까요. 후작은 약속도 안하고 갑자기 쳐들어오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게 혼담을 가져 왔는데 저보고 선택하라고 하더군요. 세상에, 그가 만일 진짜 혼담을 들고 온다면 제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후에 올 겁니다. 그래야 시간과 노력의 낭비가 없거든요. 거기다, 쓸데없는 말싸움. 이것도 후작이 시작한 것이죠. 후작은 그런 식으로 일 하지 않습니다. 저보고 국왕파가 어쩌니 저저니 하며 수석 보좌관 자리를 그만 두라고 하던데 그런 말 할 시간이 있으면 어떻게든 수를 써서 제가 확실히 그만 두게 했을 겁니다.

후작이 이렇게까지 의미 없는 만남을 주선한 것은 두 가지 경우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는 그가 도플갱어 이였던지...“

“아니면 그 만남 자체가 후작의 신호라고 생각하는군.”

“예.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형제다. 국왕파건 귀족파건, 세속파건 신정파건, 그 사실을 바꿔놓지는 못해.’ 이겁니다. 별 이유 없이 신정파 운운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귀족하가 뭔가 꾸미고 있으며 그리트 교도 관련이 있다는 암시로 보입니다. 더 큰 암시는 수행원의 수입니다. 경호원을 무려 8명이나 끌고 왔더군요. 뭐하러요? 이건 완전히 난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광고하는 꼴입니다. 국왕파 본거지에 오는 탓에 암살을 두려워해서요? 그러면 안 오면 됩니다. 꼭 와야 했다고요? 그런데 고작 하는 것이 동생과 쓸 데 없는 소리나 하는 일? 앞뒤가 맞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뭔가 꾸미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가 아니면요.”

“좋아, 귀족들이 뭔가 꾸미고 있다고 치지. 그게 뭔가?”

“제가 어제 왕도의 마늘 값이 올랐다는 보고를 드렸습니다. 근데 제가 간과한 것이 다른 것들도 많이 올랐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항목들의 공통점은 모두 틸코마트가 산지거나 틸코마트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물품들이었습니다. 대부분 한달 세 1.4배 가까이 올랐더군요. 알아보니 그곳에서 물건이 안 풀리고 있답니다.”

“틸코마트는 아이리안트 공작의 영지야 귀족파의 수장이지. 그곳에서 물자를 끊은 것이군.”

“그리고 왕도에서의 금리 역시 한달 새에 40분의 9로 폭등했습니다. 조사해보니 최근 갑자기 여러 명의 명의로 돈을 빌리는 자가 지나치게 많았더군요. 또한 잘게 쪼갠 너구리 가격이 몇 배나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화약은 조심해서 흔적을 안 남기게 구하지만 이런 것은 꼬리가 밟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조심하지 않습니다.”

“머스켓 탄을 장전할 때 총알을 감싸는 얇은 가죽 말이군. 귀족파가 내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인가? 그리트 교단과 연계해서 말이지. 우리 말 이천 마리가 절단 난 것도 그들 공격의 일환인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증거는 없습니다만.”

“앉아서 당할 수는 없으니 이쪽도 움직여야겠군. 하지만, 아직 귀족군이 집결한다는 보고는 없어. 그들이 우리 눈을 피해서 어디선가 모여서 올라오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실제로 그들이 군이 올라오고 있다면 우리 눈을 완전히 피하기는 힘듭니다. 그들이 그리트 교단과 손을 잡은 것도 전쟁 준비에서 집결 사이 동안에 우리에게 들키는 것을 막으려는 것일 테니까요. 현재 귀족군은 집결 중인 상태일 겁니다. 집결이 끝나 지금 올라오고 있다면 후작도 훨씬 전에 우리에게 암시를 해 주었을 겁니다.”

“그럼 어쩔까? 빨리 우리도 군을 집결해서 왕도에 배치해야할까?”

“궁극적으로 그게 가장 확실한 방안이지만, 솔직히 제 의견으로는 군을 동원하지 않고 해결했으면 합니다. 만일 군을 동원하게 되면 그 이유, 즉 귀족파의 반란을 공식 선포해야 하고 그리트 교까지 끌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럼 일이 너무 커지며 그리트 교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의 간섭 빌미까지 주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을 대처하기엔 우린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할 수 있다면 조용히 끝내는 쪽이 어떨는지요.”

“조용히 처리한다라. 적당한 중개인을 내세워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언질을 줘야 하나?”

“언질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솔직히 이쪽은 밑지고 있는 중입니다. 기마 2천 마리가 죽었지만 과연 그에 대해 귀족파나 그리트 교에 대해 책임을 추궁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명명 백백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도 제대로 그들과 연계시키기 힘들 겁니다. 따라서 귀족들에게 한 방 먹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법은?”

“네스테크. 그 텔코마트를 금전적으로 지배하는 상인을 우리 편으로 돌리는 겁니다. 텔코마트의 영주이자 귀족파의 수장인 아이리안트 공작은 네스테크에게 코가 꿰어 있습니다. 상당한 단기 금융을 융통해주고 있으며 영지 수확물을 대부분 매입해주고 있거든요. 네스테크만 우리 편이 된다면 공작을 귀족파에서 한걸음 물러서게 할 수 있습니다.”

국왕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곤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돼! 차라리 내전을 하자고. 그 딴 놈에게 우리가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고? 안 해! 못해! 난 이제 장군들을 소집하기로 하겠어. 충고 고마웠네. 그럼 잘 가게나.”

나는 국왕의 명령에 순순히 뒤로 돌아 밖으로 나갔다.

“잠깐!”

이성과 감성, 양심과 욕망의 갈등 속에서 튀어 나온 비명에 걸음을 멈추곤 뒤 돌아보니 무지무지하게 신경질 난다는 표정으로 갈등하는 국왕이 있었다. 짜증난다는 감정이 절실히 느껴지는 몇 번의 발 구르기 후, ‘젠장! 빌어먹을!’이라는 절규가 있었고,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나를 불렀다.

“자네....말이....맞는 것 같아. 좋아, 별 수 없지. 국왕이란 자리가 자기 마음대로 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 근데, 어떻게 그 친구를 우리 편으로 만들지? 지금 그 친구는 없는 것이 거의 없어. 있다면....망할.”

“맞습니다. 국왕파 의원 자리를 하나 주어야 합니다. 그간 아이리안트 공작에게 귀족파 의원 자리를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공작이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거든요.”

“그 인간이 종신 의원이랍시고 뻐기는 꼴을 눈뜨고 봐야 하다니, 돌아버리겠군.”

“혹시 그것가지고 안 넘어오는 수가 있으니 몇 가지 더 떡밥을 준비해 가겠습니다. 이번에 죽은 기마 2천 마리의 수주권, 그리고 테올페인 길드 장 자리 정도가 적당할 듯싶습니다. 그리고 허락하신다면 제가 직접 협상을 하려고 합니다. 그 쪽에서도 우리 쪽을 경계하고 있을 것이니, 우리가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면 수석 보좌관 정도가 나와야 할 테니까요. 지금 네스테크가 왕도에 머물고 있으니 그쪽으로 찾아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쪽에선 모든 협의를 폐하의 서명이 들어간 문서로 남길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래야 함정이 아니라고 믿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 그래, 다 퍼주라고. 난 저기 구석에 처박혀서 공기놀이나 할 테니까...”

그의 우울함이 나를 덮치기 전에 집무궁을 빠져 나왔다.

네스테크와의 협상은 순조롭게 끝났다. 그나 나나 모두 합리주의자였고 서로의 패를 너무나 빤히 알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준비했던 3가지 안을 모조리 내놓아야 했지만 그를 확실히 국왕파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성공했다.

아이리안트 공작과 네스테크 사이에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나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귀족파의 군사 행동이 무산되어 버렸으며 수장이 발뺌을 하는 바람에 귀족파에 일대 대 혼란이 왔다는 점이다. 앞으로 반년은 후폭 풍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공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네스테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국왕은 막대한 자금을 지불했고 여러 정치적 대가를 치렀다. 그래도 귀족파가 한동안이나마 통일된 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든 것 만해도 나쁘지는 않은 것이다.

열흘 후 나와 국왕은 기마의 폐사 배후 문제로 다시 만났다.

“그 빌어먹을 창췐국 대사가 뭐라고 한 줄 아나? ‘폐하의 용들이 부디 건강하기를 기원합니다.’ 그 쪽팔린 일이 거기까지 퍼졌다고. 창췐이 얼마나 먼 줄 아나? 말로 이십일 거리야. 거기까지 퍼졌다면 하우지트 대륙 전체에 망신살이 퍼졌다는 소리지. 앞으로 백년은 술자리에서 놀림감이 될 거야! 뭐 그건 그렇고 그 사료 상인의 가족은 어디까지 추적했는가?”

2천 기마를 한방에 몰살 시킨 것은 사료에 섞인 알칼리 독물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2천 마리가 먹을 엄청난 사료에 모조리 독이 섞인 점을 보아 군에 사료를 공급하는 상인 쪽을 의심했고 결국 범인을 잡는 데엔 성공했다. 잡히자마자 독으로 자살을 해버려서 문제였지. 이렇게 되니 배후를 추적할 단서가 없어 혹시 가족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당시 가족들은 집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가족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냈습니다. 불타에 있더군요. 폐사 사건이 있기 두 달 전에 이미 그 쪽으로 간 것 같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그 빌어먹을 교황 놈이 배후에 있었구먼. 교황령으로 가족을 피신시키다니... 이러면 방법이 없군. 그 가족들을 거기에서 빼내는 방법이 있을까?”

“무립니다. 교황청은 바보가 아니니까요. 교황청 직속 성당군이 지키고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납치는커녕 암살도 힘듭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투입했는데 들켜서 잡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난리가 날 겁니다. 교황은 마침 잘 됐다며 신나게 우릴 비난할 거고요.”

“어쩔 수 없군. 우리가 졌구먼. 교황령에 상인들 가족이 가 있다는 것만으로 그리트 교단을 고발하기는 너무 근거가 너무 약하니 말일세. 알았어. 수고했네.”

나는 보고를 마쳤으므로 인사를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국왕이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다.

“자네, 형님, 그러니까 로포나 후작이 왜 자네에게 귀족군의 군사행동에 관해 언질을 주었다고 생각하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그간 이런 저런 일이 많아서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상당히 이상한 일이긴 했다.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번 계획이 로포나 가문에 뭔가 불이익이 되었기 때문에 훼방 놓지 않았나 싶습니다.

테오 4세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겼다.

“자네, 3년 전 내 수석 보좌관이 된 이후로 로포나 가문에서 쫓겨 났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네 성이 뭐지?”

“라소미르 에 로포나 입니다.”

“귀족파 굴지의 가문에서 국왕파가 나왔다는 것은 일종의 치욕이네. 다른 귀족들의 눈을 생각해서라도 가계에서 말소 시켜야겠지. 하지만 자넨 여전히 로포나야. 후작이 말로는 자넬 집안에서 쫓아냈다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닌다지만 실제론 가장 중요한 일을 안했어. 왜 그럴까?”

듣고 보니 그랬다. 형 입장에서는 그냥 파문시키는 것이 가장 간단했을 것이다. 또한 그랬어야 했다.

“혹시 로포나 가문 한 사람 정도는 국왕파와 다리를 걸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겁니까? 이번 사태와 같은 일이 있을 때 써먹기 위해서요?”

“맞네. 나 또한 자네를 채용한 이유 중 하나가 자네가 로포나 가문의  4남이고, 그런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이야. 자네에게 말 안 해서 미안하네. 하지만 자네가 모르는 것이 비밀 유지에 더 효과적이거든. 얼마 전 자넬 찾아온 후작의 수행원 중 한명 정도는 귀족파의 감시였을 거네. 그 땐 자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감정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그쪽도 아무것도 눈치 못 챘겠지. 이 궁전에서도 어디서 무슨 눈과 귀가 있을지 누가 아나.”

충격이었다. 스스로는 잘났다고 생각했건만 결국 국왕과 형의 장기 말에 불과한 처지였다. 한심했다. 너무나 한심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폐하, 절 채용하실 때 후작이 절 파문하지 않을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가 절 연락책으로 쓸 것을 말입니다.”

그야, 백작이 그리 말했기 때문이지.“

“...네?”

형이 국왕에게 말했다고? 그럴 리가. 둘이 만나서 이야기라도 했단 말인가. 말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왜, 국왕파 거두와 귀족파 중진이 이런 신사협정을 맺었다는 것이 이상한가? 그리 이상할 것 없네. 이올, 자네 형님은 내 지지자야.”

“폐하, 그 말씀은 로포나 후작이...그...”

“맞아. 그는 국왕파라고. 자네를 채용하기 1년 전이었던가? 우리들이 몰래 만날 기회가 한번 있었네. 그 자리에서 그가 말하더군. 자기가 국왕파로 전향하겠다고. 나도 깜짝 놀랐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 그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국왕 지지를 선언하는 것 보다는 귀족파의 가면을 쓰고 몰래 움직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했네. 또한 귀족 주제에 국왕파랍시고 깝죽대는 자기 동생, 즉 자네를 연락책으로 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어. 뭐, 우리는 합의를 했고 1년 뒤 자네가 왔네. 나머지는 다 아는 대로야. 그 뒤로는 그와 만난 적도, 연락한 적도 없었군.”
믿을 수가 없었다. 형이 국왕파였단 말인가. 그런데 나를 포함한 모두를 그렇게 감쪽같이 속여 넘기다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도대체...왜...후작이 국왕파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글쎄. 나도 모르네. 물어는 봤는데 그저 한 마디 하더군. ‘등불’ 때문이라고.”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랬었다. 그런 거였다. 내가 본 것을 형도 봤던 것이다. 아니, 형이 본 것을 내가 봤다고 해야 하나?

나는 집무궁을 물러나온 퇴근하기 위해 왕궁을 나섰다. 벌써 달이 뜰 정도로 어두운 밤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왕도는 어둡지 않았다. 수많은 불빛이 왕도의 거리와 집, 건물들 사이로 아롱아롱 빛나고 있었다. 7년 전 현 국왕이 즉위할 때 이 거리는 밤에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하지만 3년 전 이 거리를 보았을 때 밤이라는 것이 의심될 정도로 기름 등불 천지였다.

테오 4세의 중상주의 정책의 성과로 왕국 북쪽의 값 싼 동물 기름이 대량으로 들어와 웬만한 집들은 밤에도 마음껏 등불을 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을 보곤 당시 귀족으로서의 정체성과 국왕파로서의 이상 사이에 왔다 갔다 하던 나는 확실히 마음을 정하고 왕궁의 문을 두들겼던 것이다.

그 3년 전 보다도 더 많아진 등불을 보며 스스로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눈으로 확인한 나는 국왕 다음으로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혈육이 나와 같은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기쁨을 음미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가작 오규수悟窺樹 : 아차상 2007.10.27
가작 너 자신을 알라 2015.03.02
가작 잃어버린 화요일1 2008.02.29
가작 나와 그녀 사이 2008.12.26
가작 건방진 와트슨과 흰 벚꽃 잎 2009.04.24
가작 워프기술의 회고1 2013.06.30
가작 미련(未練) : 아차상 2007.10.27
가작 사진관1 2009.12.26
가작 아내의 눈물 2010.06.26
가작 시선을 줄게 : 가작1 2007.10.27
가작 스타폴1 2007.12.31
가작 우리는 모두 죽을 겁니다. 2010.12.31
가작 그에게는 아직 팔 한 자루가 남아 있다. 2015.08.01
가작 등불 : 아차상 2007.10.27
가작 나는야 우주의 케밥 요리사2 2010.04.30
가작 채취선 2011.11.25
가작 두세 계1 2011.02.26
가작 아마존1 2010.03.27
가작 쥐를 잡아! 2008.12.08
가작 사고1 2010.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