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the THING

2008.06.27 20:3506.27

“이야! 파파팍!”
나무 젓가락에 올려져 있는 잔 하나를 슬쩍 건드리자 연쇄반응이 일어나면서 8개의 맥주잔에는 딱 그 숫자만큼의 양주잔이 퐁당 퐁당 빠지기 시작했다. 이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오른 남자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박수를 쳐대고 그들 옆에 매미처럼 붙어있던 아가씨들도 덩달아 환호를 한다. 폭탄주 제조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 낸 남자는 마치 만루 홈런이라도 친 것 같은 신나는 표정으로 제조된 폭탄주를 돌리기 시작했다.  
“뭐 당연한 거지만 먹고 털기입니다.”
“아이, 참, 이게 몇 잔째에요?”
남자 옆에 앉아 있던 마스카라를 진하게 칠한 아가씨가 코맹맹이 소리로 앙탈을 떤다.
“어? 이거 왜 이래? 이제 시작이야. 안 되겠어. 다음 제조는 당신이야. 알았어?”
남자는 그렇게 외치고는 아가씨 볼에 뽀뽀를 마구 해댄다. 그러자 주위에서 저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하는 비난의 소리들이 들려오지만 그것도 잠시, 각자 자기 파트너에게 똑 같은 짓을 하기 시작했다. 역겨운 술 냄새와 입술로 피부를 빨아댈 때 튕겨져 나오는 공기의 파열음이 룸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아아.. 이러면 안 되죠. 건배를 한 다음에 놀든지 말든지.”
폭탄주를 제조한 남자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자 자, 건배!”
남자와 여자들은 저마다 건배를 외치고 폭탄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시다 중간에 끊으면 다시 마시기가 쉽지 않은 폭탄주이기에 다들 쉬지 않고 단숨에 마셔댔다.

“미련하긴.”
웩웩거리며 미처 몸으로 흡수되지 못한 알코올과 안주를 게워내고 있는 윤양 뒤에 서서 등을 두드리고 있던 선희 언니가 한심하다는 투로 내뱉었다.
“그걸 다 받아먹니? 그거 당해낼 장사가 어디 있겠어?”
“그럼, 어떡해요..”
윤양은 눈물과 코로 뿜어져 나왔던 콧물, 알코올, 위액을 휴지로 닦으면서 선희 언니에게 물었다. 이따금씩 욱 하면서 배속에서 올라오는 토악질을 간신히 참아내야 했다.
“진짜 모르는 거야? 버려야지. 눈치껏.”
윤양은 선희 언니를 흘끔 째려보았다. 그럼, 진작 가르쳐주던지. 이 난리를 피우고 나서야 조언하면 뭐하나. 윤양은 새삼 자신의 신세가 처량함을 느꼈다.
“아무튼, 정신 차려. 아직 술자리 안 끝났잖아.”
뭔 체력들이 그렇게 좋은지 11시에 온 손님들은 3시간이 지난 새벽 2시가 된 지금까지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연이어 술을 퍼마셨다. 주는 족족 받아먹은 윤양이 제일 먼저 취했지만 사실 다른 아가씨들도 지쳐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들은 경륜과 경험을 바탕으로 윤양과 같이 술을 무턱대고 마시는 실수는 하지 않았기에 좀 덜 취했을 뿐이다.
“휴우.”
윤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긴 밤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걱정만 앞섰다. 게워내고 나니 속은 다소 편해진 느낌이었다. 윤양은 자기가 미치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술을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빨리 들어가자. 늦게 가면 두 탕 뛴다고 또 트집 잡는다.”
선희 언니의 재촉에, 윤양은 옷을 추스르고 선희 언니를 따라 다시 룸으로 들어갔다.

룸으로 돌아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과 왼쪽에 마주 앉아있던 손님 두 분이 거의 동시에 위 속에 들어 있던 것을 분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 고개를 숙이고 바닥이나 휴지통에,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용히 토악질을 한 것이 아니라, 공중에다 대고 뿜어낸 것이다. 1학년 신입생 시절 처음 참석했었던 학교 축제 때 생맥주 빨리 마시기 대회가 있었는데, 거대한 체구의 한 남학생이 결승전에서 기세 좋게 마시다가 갑자기 공중으로 생맥주를 분사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던 모습이 아련하게 생각났다. 비록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옛 추억에 윤양의 입가에는 미소가 퍼졌다. 그러나 이 바닥에 발을 들여 놓은 지가 윤양보다 훨씬 오래 된 다른 언니들에게 조차 이런 장면은 그리 흔치 않았는지 다들 코를 막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그랬다. 생맥주 마시기 대회 때 토악질을 해댄 그 남학생의 경우에는 정말 맑디 맑은 맥주만 분사를 했지만 이 손님 둘은 달랐다. 피자 한 판을 공중에다 뿌려댄 셈이었다. 술이 덜 취한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렸고, 많이 취한 대다수의 손님들은 무감각했으며 심지어 어떤 손님은 좋다 좋아 하면서 박수를 치기까지 했다. 막내인 윤양은 얼른 행주를 들고 테이블에 산포된 토사물을 훔쳐내기 시작했다. 윤양 바로 위의 태희 언니도 맞은편에서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사실 윤양은 태희 언니의 나이가 자신보다 많은지 잘 모른다. 그저 업소에 먼저 나왔기 때문에 언니라고 부를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윤양보다 술을 더 먹었으면 더 먹었지 덜 먹지는 않았을 태희 언니의 피부가 자신 보다 더 뽀얀 것으로 판단컨대 태희 언니는 물리적으로 윤양보다 동생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나 이 바닥의 생리가 군대와 비슷한데다가, 막내 보다 겨우 한 자리 위를 차지해봐야 그다지 좋을 것도 없다는 판단에 그냥 태희(태희는 무슨, 본명은 영희라고 한다) 언니라고 부르고 있다.

“어이! 김교수 도대체 뭘 먹은 거야? 걸쭉하네?”
왼쪽에서 분사를 한 손님이 맞은편에서 분사를 하고난 후 거의 기절 직전에 있던 손님에게 물었다. 놀랍게도 기절 직전의 손님이 번쩍 하고 눈을 뜨더니 고함을 질렀다.
“나? 오늘 육회 먹었어. 대단하지? 나, 광우병! 그 따위 거 안 무서워.”
“그래? 김교수! 나 같은 강심장이 또 있네? 난 닭 먹고 왔는데. 으하하..”
“그런데 말이야. 그게 몸에 안 좋긴 안 좋은가봐. 몸이 거부해서 튀어 나오잖아. 안 그래?”
청소를 하면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윤양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써야 했다. 지금 저런 말들을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과연 교수들답게 시사가 가미된 유머를 구사하고 있지 않는가. 참, 선희 언니의 예상이 사실로 확인된 것도 놀라웠다.
“윤양아. 너 저 사람들 고등학교 선생 아니다! 대학 교수들이야.”
“예? 아까부터 서로 선생이라고 부르던데요. 교수들끼리는 선생이라고 잘 안 하는데요.”
꼴에 대학물 먹었다고 윤양은 대꾸를 했다.
“너 진짜 순진하구나. 저치들, 자기들도 이렇게 노는 게 창피한지 교수라는 말 안 써. 틀림없어. 두고 봐라.”
과연 선희 언니 말대로 거의 정신을 잃을 상태에 까지 오니까 교수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 어차피 요즘 세상은 교수를 스승(도덕적으로 무장되어 있는)으로 보지 않고 단지 전문인으로 볼 뿐인데 굳이 저렇게 숨길 필요까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직도 교수들에게 무거운 도덕성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도 분명 있기는 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자신을 가르치던 교수들도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자 윤양은 씁쓸해졌다.  윤양과 태희 언니의 활약에 힘입어 잠시 후 소고기와 닭의 잔해와 알코올이 섞인 토사물은 거의 모두 제거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모두 제거된 것이 아니라 거의 제거되었다는데 있었다. 룸의 바닥 구석에서는 소고기의 비정상 단백질과 조류 인플루엔자, 알코올과 지하 룸에서 서식하고 있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류의 미생물들이 화려하면서도 격렬한 불꽃을 피우며 파지직 파지직 랑데부를 하고 있었다.

거울에 나타난 얼굴이 흉하게 부어 있었다. 윤양은 머리카락을 헝크리며 침대에 털썩하고 주저 앉았다. 학교 다닐 때 실험실에서는 늘 요긴하게 사용하던 알코올이었는데 지금은 이 알코올 덕분에 윤양의 몸은 꺼이꺼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특히 머리가 욱씬거리며 몹시 아팠는데 필시 어제 밤의 과음으로 인해 저혈당이 유발되는 바람에 탄수화물을 유일한 영양소로 활용하는 뇌가 나 죽겠소 하고 호소하는 것이리라. 돈 벌면 다시 복학하여 공부해야 할 텐데 이렇게 뇌세포를 죽여서야 장학금 받을 수 있는 성적이나 얻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뇌 뿐만이 아니라 알코올이 간, 근육, 뼈, 구강, 식도, 위장, 소장, 대장, 심혈관 그리고 췌장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몸 구석 구석에 미치는 각종 악영향들을 하나 하나 복기하다 보니 도저히 더 이상은 술을 먹지 못하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처음 룸에 나갈 때만 해도 추근덕거리는 남자들의 손 장난을 더 걱정했었지만 막상 일을 하다 보니 몸을 괴롭히는 음주가 더 문제였다. 특히, 여자는 상습적으로 과음을 하는 경우 월경이 중지되거나, 비주기적인 월경이 나타나며, 배란이 불규칙해지고, 갱년기가 빨리 올 수 있고, 자연 유산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학계 의견까지 머리에 떠올라 윤양은 가볍게 몸을 떨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 놈의 돈이 문제였다. 과음의 부작용을 모두 머리에 꿰차고 있으면서도 매일 밤 들이부을 수 밖에 없는 현 상황의 원인은 바로 돈인 것이다. 짧은 시간에 필요한 학비를 버는데 있어서 룸 만큼 좋은 직장은 없기 때문이다.
윤양은 얼굴을 탁탁 가볍게 두들겼다. 그나마 이 정도 미모라도 되니까 룸에 나갈 수 있다는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세수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윤양 앞에 앉은 손님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아까부터 윤양을 흘끔흘끔 쳐다 보는데 호감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비호감을 가진 것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윤양이 룸에 처음 들어와서 파트너를 선택할 때 그 손님은 윤양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윤양은 다른 손님의 파트너가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앞 자리의 손님이 자꾸 쳐다보고 있다. 처음에는 몰랐던 윤양의 매력을 새삼 발견하고 그러는 걸까. 그 때 옆의 파트너 손님이 또 몹쓸 손장난을 치기 시작하자 앞 자리 손님에 대한 경계심을 풀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덧 손님들과 술을 마시기 시작한지 약 2시간 정도 지났다.
윤양은 이제 더 이상 몸을 가눌 정도로 취하지 않는다. 이것이 모두 다 선희 언니의 가르침 덕분인데, 처음에는 술을 버릴 때 손님들이 눈치채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손이 다 떨리기 까지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손님들은 이미 전작이 있는 상황이라 아가씨들의 손놀림을 유심히 관찰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윤양은 그래도 초반 1시간 까지는 술을 버리지 않고 꾸역꾸역 마시는 조심성을 갖추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양주나 폭탄주를 1시간 정도 마시고 나면 자신들은 아니라고 주장해도 상당히 취했다.
오늘 손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 명의 손님들의 눈은 이미 풀릴대로 풀려 있었고 이를 확인한 아가씨들은 경쟁적으로 술을 버리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는 척 하면서 손수건에 촉촉이 적시는 선희 언니, 테이블의 재떨이, 물컵 등 그릇 이라는 그릇에 틈만 나면 술을 부어버리는 태희 언니와 같이 각자의 개성에 따라 처리하는 방법은 다 달랐다. 윤양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고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의 바닥에 술을 버렸다. 물론 버리기 전에 손님들의 눈동자가 어디를 향해 있는지 반드시 확인하고 버렸다.
거의 정신을 놓아 버린 파트너가 또 윤양의 글래스에 양주를 잔뜩 따라 주었다. 윤양은 “어머, 많이도 주시네. 호호”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글래스를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대각선에 있는 손님을 쳐다 보았다. 태희 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감고 허벌레 웃음 짓고 있었다. 맞은 편 손님을 보았다. 마이크를 들고 노래 영상이 나오는 화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선희 언니는 노래책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오케이. 문제 없었다. 윤양은 글래스를 든 손을 슬며시 탁자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 조용히 술을 따랐다. 손님들과 아가씨들이 내는 여러 소음에 술이 바닥과 부딪쳐 내는 파열음은 묻혀버렸다. 완전무결한 일이었다. 술을 많이 버리면 버릴수록 윤양을 비롯한 아가씨들은 사장으로부터 더 많은 보너스를 받게 될 것이다. 보너스를 줄 때 엉덩이를 한 번 씩 툭 치는 사장의 못된 버릇만 없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을 테지만.

“이 가시나가!”
사장으로부터 받을 보너스 생각에 빠져 있던 윤양은 갑작스러운 고함에 화들짝 놀랐다. 앞 자리 손님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야, 너. 정말 그럴래?”
“예?”
윤양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떨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내가 모를 줄 알어?”
“뭘 요?”
“뭐? 뭘요? 이게 정말. 죽고 싶나.”
“말씀을 하셔야 뭔지 알죠.”
“사장 오라고 해. 뭐해?”
거의 정신을 잃고 있던 다른 손님 둘과 선희, 태희 언니도 이제야 무슨 일인가 하며 두 사람에게 시선을 모았다.
약간의 정막감이 돈 후 선희 언니가 나섰다.
“아이.. 뭔데 그러세요?”
“어허.. 이것들 봐라. 저 년이 아까부터 계속 술을 버리잖아. 너 그랬어? 안 그랬어?”
“아 아니에요. 제가 그럴리가요.”
윤양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대꾸를 하면서도 발로는 열심히 바닥을 문질렀다. 드디어 걸린 것이다. 그 손님은 다른 곳을 쳐다보는 척 하면서 기회를 찾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래 사팔뜨기인게 분명하다. 재수 정말 없는 날이다.
“진짜? 너 자신 있어? 내가 조금 전에도 봤는데? 그것도 왕창 부어버리는 것을.”
손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윤양이 앉아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선희 언니가 대책없이 손님의 팔을 잡았지만 손님은 거칠게 선희 언니의 팔을 뿌리치고는 비틀거리며 윤양 앞으로 왔다. 태희 언니는 제길하면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가씨들이 미안하다고 해도 곱게 넘어가지 않는 손님들이 있다. 이 손님이 그런 부류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매니저 오빠랑 사장이랑 다 불러들여서 사과를 받아내고 서비스까지 받아 챙기는 사람들도 있다. 더 아니꼬운 사람은 자기가 무슨 경찰이네 검찰이네 하면서 협박까지 하는 사람들이다. 윤양은 제발 잘 넘어가기를 기도했다.
“야, 여기 불 좀 켜봐.”
손님은 선희 언니에게 명령을 했다. 언니는 부스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스위치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불을 켰다. 갑자기 밝아진 조명에 자신의 술 취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쑥스러운지 사람들은 순간 움찔했지만 곧 이어 벌어질 흥미진진한 사태에 대한 기대감으로 윤양과 그 손님을 쳐다보았다.
“이리 나와 봐.”
손님은 윤양을 자리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 밑을 보았다.
“엇!”
잠시 후 손님의 외마디 신음이 들려왔다.    

그 날의 사건은 손님이 취해서 잘 못 본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다. 앞자리 손님은 다른 손님들로부터 좀 자제하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고, 두 언니는 어떻게 해서 윤양이 그 위기를 빠져나갔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술을 마셨고 다른 날 보다 크게 취했다. 분위기 상 그 이후 술을 버리는 일은 감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작 제일 황당했던 사람은 윤양이었다. 분명 적지 않은 양의 술을 바닥에 버렸는데도 바닥은 물기가 있기는 커녕 뽀송뽀송했기 때문이다. 마치 햇볕 잘 드는 남향의 아파트 베란다 바닥처럼 건조했다.
‘나를 도와주는 뭔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
윤양은 영업 시작 전에 그 룸에 들어가 자신이 앉아 있었던 자리의 바닥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물기가 있었다 해도 벌써 말라버렸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 때는 아무래도 술에 취해 제대로 못 본 것이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룸의 바닥은 전체적으로 번들거리는 소재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윤양이 앉았던 자리의 바닥은 약간 거칠어 보였으며 희미하게 푸르스름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윤양은 손으로 바닥을 만져보았다. 역시 오돌오돌한 느낌이 전해왔다.
“이게 뭐지?”
그 때 밖에서 윤양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 날 밤 윤양은 다른 방에 들어가서 영업을 하느라 그 방에는 다시 들어오지 못했다.

윤양은 출근하기 전에 인체에 침입한 병균 한 마리와 이를 막으려는 백혈구를 비롯한 인체 방어 시스템과의 싸움을 그려낸 만화와 실사가 혼합된 영화를 다운받아 보았다. 병균은 백혈구의 추격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사람을 거의 죽음까지 몰고 간 후 눈물을 통해 몸 밖으로 탈출하는데 까지는 성공하지만 아뿔싸 하필이면 알코올이 들어 있는 비이커에 빠지면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났다. 병균 입장에서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순간이었겠지만 보는 윤양은 알코올에 스르륵 녹아버리는 녀석을 보고는 쾌감을 느꼈다.
“역시 소독에는 알코올이야.”
그런데, 과연 모든 균들이 알코올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는 걸까?
알코올에 죽기는 커녕 알코올을 먹고 자라는 놈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윤양은 자기 위장에 그런 녀석들이 둥지를 틀고 살면서 쏟아 들어오는 알코올을 마구 먹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놈들이 있다면 간의 지원군이 되는 셈이지만 혹시라도 백혈구가 그들을 적으로 삼아 공격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던 윤양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거울 앞에서 서서 분칠을 하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첫 손님들은 문제의 그 방에 앉아 있었다.
적당히 쑥스러움을 타는 아저씨가 오늘의 파트너가 되었다. 윤양은 아저씨 옆에 앉아 “윤양이에요.” 하고 자기 소개를 하고는 스트레이트 잔에 술을 부어 아저씨에게 권하고 또 한잔에 술을 부은 후 자신도 마셨다. 아저씨는 시키는 대로 군말없이 술을 마셨다.
‘오늘은 편한 손님으로 시작하네.’
윤양은 긴장을 풀고 술을 마시다가 자신의 발로 눈길이 갔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에서도 푸르스름한 기운은 확인할 수 있었다. 직경이 약 2cm 정도 되는 원형의 무늬였다. 발로 살살 문질러보았다. 별 다른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다.
“노래 하나 하지?”
그 때 아저씨가 노래를 권했다. 윤양은 번호를 누르고 마이크를 들었다. 반주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멋진 파란 하늘 아래~ ”
윤양은 엉덩이를 살살 흔들며 경쾌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난 번 사팔뜨기 손님에게 비록 발각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후로 술을 버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훨씬 조심해서 버릴 뿐이다. 사팔뜨기에 대비하여 어설프게 눈동자 촛점이 비껴 나가 있을 때는 아예 술을 버릴 시도도 하지 않는다. 180도 이상 다른 방향을 보고 있음을 확인한 후에야 술을 버린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더더욱 술에 취하지 않았다. 술을 먹으러 온 사람들과 있으면서 술에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고통을 가져왔다.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추근대는 남자들의 추잡스러움을 감내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술을 마시면 다음 날 너무 힘들었다.
“쨍!”
파트너인 아저씨가 취했는지 자신의 술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 괜찮아요. 제가 닦을테니 걱정마세요.”
윤양은 잔이 떨어지면서 테이블에 튀긴 술을 휴지로 닦아내고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기 위해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들고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잔은 반 정도가 날아가 버린 상태였고, 주위에 크고 작은 유리 파편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윤양은 재빨리 쓸어 담았다. 그리고 흥건히 젖은 바닥을 닦기 위해 걸레를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윤양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바닥에 있던 술이 급속도로 증발하고 있었다. 분명 증발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현상을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사방에 튀어 있던 술이 푸르스름한 기운이 있는 그 지점으로 모이는 듯 하더니 쓰윽 하고 없어지는 것이었다. 윤양은 손으로 그 곳을 다시 만져 보았다. 그냥 까칠한 느낌만 있을 뿐 술이 흘러들어갈 구멍이 있거나 하지 않았다.

영업이 다 끝나고 언니들도 이미 집에 돌아갔지만 윤양은 그냥 집에 갈 수가 없었다. 룸에서 술 시중을 드는 아가씨이기 전에 생물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기도 했던 윤양으로서는 종전의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술에 취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본 것이라 더더욱 의심이 갔다. 룸으로 들어와 다시 살펴보았지만 바닥에는 푸르스름한 기운 외에 어떠한 징후도 없었다. 한 번 손톱으로 그 곳을 긁어 보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마치 얇은 거즈와 같은 형태로 바닥에서 벗겨지는 것이 아닌가?
“이게 뭐지?”
느낌으로는 무슨 헝겊 같았다. 윤양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았다. 아무런 냄새도 없었다. 엄지와 집게 손가락으로 잡고 비벼보았다. 까칠한 느낌이 날뿐 별 다른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얇기 때문에 혹시라도 찢어지지나 않을까 생각했지만 강도도 꽤 되는 듯 했다.
“좀 더 살펴봐야 겠어.”
윤양은 마치 학생 시절로 돌아가 프로젝트를 하나 하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핸드백에 집어 넣고 방을 나섰다.
집으로 들어오자 마자 윤양은 그 물건을 꺼내 책상에 놓았다. 그리고 방 구석에 포장되어 있던 현미경을 꺼내 들었다. 얼마 만에 보는 현미경인가. 윤양은 그것을 조그맣게 잘라 현미경 접사렌즈 밑에 집어넣었다. 눈을 접안렌즈에 갖다 대는 윤양은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뭘까?”
현미경을 통해 보이는 그것은 단백질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던 윤양은 고개를 들고 방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먹다 남겨 놓은 물컵이 있었다. 윤양은 물컵의 물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살짝 부었다. 그리고 그것을 물위에 덮었다. 1초 2초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물이 증발하거나 그것에 흡수되거나 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윤양은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그 물건은 물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이마를 어루만지던 윤양이 딱 하고 무릎을 쳤다. 다시 방을 두리번거렸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어딘가에 늘 놓여있던 술병을 찾을 수 없었다. 윤양은 화장대에 놓여 있는 화장수병을 들고 책상으로 왔다. 뚜껑을 열고 몇 방울을 책상에 흘렸다. 그리고 다시 그 물건을 위에 올려놓았다. 놀랍게도 화장수가 서서히 그 물건에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역시 알코올이던가?”
윤양은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물은 전혀 손대지 않으면서 알코올을 빨아들이는 단백질 같은 무엇이 자신 앞에 있다. 이것을 생물이라고 해야할지 무생물로 보아야 할 지도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 때였다.
“삐리릭 삐리릭!”
전화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응, 엄마다.”
“아, 엄마야? 무슨 일로?”
“잘 지내지? 학교는 잘 다니고?”
엄마는 아직 윤양이 휴학을 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응, 잘 다녀.. 아빤?”
“늘 그렇지. 이번에도 또 사고 하나 쳤다.”
“예? 무슨..”
엄마가 전화를 걸었을 때부터 윤양은 불안했다. 분명 아빠 때문에 또 막아야 할 돈이 생긴거지 하고 예상했는데 그것이 적중했다. 전화기 넘어 엄마는 가늘게 울음을 흘리고 있었다. 윤양은 그냥 전화를 끊고 싶었다. 집에 손 하나 안 벌리고 학교를 다니느라 바둥대고 있는 딸에게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서러움이 밀려 왔다. 도움은 주지 못 할망정 방해는 하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인데 그게 쉽지 않았다. 엄마의 전화로 인해 집에 사정이 생긴 것을 뻔히 알아버렸으니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
윤양은 룸에 나가는 횟수를 늘리기로 했다. 몸을 걱정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돈을 벌 기회만 있다면 잡아야만 했다.    

눈치껏 버린다고는 해도 술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룸에 나가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윤양의 몸은 서서히 알코올에 찌들기 시작했다. 두통을 거의 매일 달고 살았고 임신도 하지 않았는데 헛구역질이 나곤 했다. 그리고 생리 불순까지 시작되었다. 그러나 윤양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 학기 등록금과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돈을 마련할 가장 빠른 길은 이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변기를 끌어 안고 토악질을 막 끝낸 윤양은 침대에 떨썩 드러 누웠다. 오늘 밤에는 신입이 술을 버리다가 걸린 재수 없는 날이었다. 손님들은 추가 서비스를 요구했고 윤양을 비롯한 아가씨들은 신입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낯 뜨거운 쇼까지 해야만 했다. 눈이 뜨겁다 하는 생각이 들더니 눈물 줄기가 흘러내려 침대 시트를 적시고 있었다.
“도대체 이 짓을 얼마나 더..”
윤양은 냉장고에서 소주병을 꺼내 들고 병나발을 불었다. 위스키와 맥주에 절어 있던 위장은 소주를 품자 꿈틀대기 시작했고 이어 마셨던 소주를 고스란히 토해냈다. 캑캑 거리며 방바닥에 손을 집고 엎드려있던 윤양에게 그 물건 생각이 났다. 그 물건은 책상 서랍에 고이 놔두었는데, 가끔씩 서랍을 열고 쳐다 보면 처음 집으로 가져왔을 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똑같았다. 윤양은 저건 생물이 아니다 하고 결론을 내렸다. 첫 날 가져와서 실험을 해본 이후로는 그 물건에게 알코올을 준 적도 없었다. 그 물건이 생물이라면 벌써 굶어죽었을 것이다. 책상 서랍을 열고 그것을 꺼냈다. 그리고, 방금 전의 토사물 위에 그 놈을 던졌다.
...
조용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까.
윤양은 뚫어지게 그 물건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알코올이 서서히 말라가는 듯 하더니 어느 순간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쏟아진 비가 그대로 흡수되듯이 급속한 속도로 알코올이 없어졌다. 쉬익 하는 소리도 들렸던 것 같다.
“너 도대체 뭐니?”
윤양은 그 놈을 손으로 집어 들어 올렸다. 그 많은 알코올을 흡수했는데도 무게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더 커진 것 같지도 않았다. 물끄러미 그 놈을 바라보고 있던 윤양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번져나갔다.

언니들과 매니저 오빠, 그리고 사장은 도대체 비결이 뭐냐며 윤양을 괴롭혔다. 윤양은 지금까지는 술 실력을 속였을 뿐 비결 같은 것은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윤양은 증조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말 팔도의 내노라하는 애주가들이 모여 술잔치를 벌였는데 윤양의 할아버지는 자랑스럽게도 평안도 대표로 참석을 했다고 한다. 술잔치는 사흘에 걸쳐 열렸고, 애주가들은 오직 막걸리만을 마셨다고 한다. 선뜻 상상이 되지 않지만 사흘 내내 막걸리를 쉬지 않고 마시는 일은 일반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윤양의 증조 할아버지는 전라도에서 온 김씨와 끝까지 남아 술을 마시다가 결국은 김씨를 쓰러뜨리고 주모가 내민 바늘에 실을 꿰어 최고 술꾼의 자리에 등극했다. 하지만, 윤양의 증조 할아버지는 그날 밤 잠에 들었다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증조 할아버지의 피는 윤양의 아버지에게 그대로 전해져 아버지 역시 나이 50에 소주 10병을 마셔도 음주 운전에 걸리지 않을 정도라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사람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윤양이 엄청난 양의 술을 먹고 있음을 밤마다 목격하기 때문이었다. 신입 아가씨는 어떻게 해서든지 윤양과 함께 룸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을 했다. 룸에 들어가 손님들의 선택을 기다릴 때도 신입은 윤양이 선택되느냐 안 되느냐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듯 했다. 자신이 먼저 선택이 되면 제발 윤양도 뽑히기를 바라는 듯한 눈길로 윤양을 쳐다보았다. 물론 신입만 윤양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괴물과 같이 술을 마셔대는 윤양과 같은 조를 이룬다면 자신들의 몸이 덜 망가지면서도 많은 보너스를 챙길 수가 있었기 때문에 너도 나도 윤양과 같은 룸에 들어가게 되기를 바랐다.
사장은 윤양을 특별 대우해주기 시작했다. 복덩어리 윤양이 다른 업소로 옮긴다는 말을 할까봐 선수를 친 것이다. 윤양도 한 때는 업소를 옮겨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새로운 환경에 다시 적응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아 못 이기는 척하고 눌러 앉았다. 윤양이 받는 보너스는 본봉보다 오히려 많았고 그 덕분에 윤양은 다음 학기 등록금은 물론이요 아버지가 친 사고를 메꾸어 줄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윤양이 룸에 나가야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윤양은 룸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 따위 대학 더 다녀봤자 졸업하면 잘 해야 연구원 생활을 하게 될 터인데, 국책 연구소에 다니게 되면 공무원들을 상대로 연구비 앵벌이 하러 다니느라 정작 하고 싶은 연구는 못 할 것이 뻔하고 민간 기업에 들어가면 오로지 돈벌이에 혈안이 된 CEO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돈 되는 일에만 동원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학생들 등쳐먹는 교수는 더더구나 되기가 싫었다. 과학기술계에 종사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입으로는 맨날 떠들면서도  정작 대접은 제대로 해주지 않는 사회의 이중적인 분위기도 싫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았다. 일단 돈을 더 많이 번다. 아직 마담도 아닌 윤양이 버는 돈이 보통 회사의 중견급들에 비해서도 많았다. 그리고 윤양이 나중에 마담으로 크거나 술집을 직접 운영하게 된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분야는 서비스업으로서 국가가 발전할수록 결국은 서비스업이 대세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하지만 이런 이유들은 정작 중요한 이유에 비하면 소소한 것들이다. 이 일이 제일 잘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윤양은 자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술을 잘 마실 자신이 있었다. 사흘 내내 막걸리를 마셨다는 증조 할아버지의 전설적인 기록은 마음만 먹는다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깰 수 있다. 바로 그 괴물 덕분이다.  

그 것, 아니 그 물건, 아니 그 생물, 아니 그 놈, 아니 그 푸른색 괴물은 이제 윤양의 혀 밑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괴물을 혀 밑에 숨겨 놓고 술을 처음 마신 날이 생각난다. 손님들과 아가씨들이 급하게 술을 마실 때에도 윤양은 마치 꼬냑을 음미하듯 입에서 술을 잠시나마 머금었다 넘겼다. 손님들은 거 참 술 한번 고급스럽게 먹는다면서 비꼬았다. 처음에는 입안에 머무는 시간이 짧은 탓인지 그 것은 술을 잘 흡수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 번 그와 같은 방식으로 술을 마시자 그것은 그놈이 되었다. 학습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놈은 짧은 시간에도 많은 양의 술을 흡수, 아니 마셨다. 결국 그 괴물을 처음 입속에 넣은 첫날밤이 끝날 무렵에 윤양은 입안에 부어 넣은 술을 단 한 모금도 목구멍으로 삼키지 않아도 될 경지에 이르렀다. 괴물과 윤양은 어느 새 환상의 커플이 된 셈이다. 처음엔 술을 먹을 때만 그녀의 달콤한 혀 밑을 허락했던 윤양은 일주일 만에 그 놈에게 24시간 내내 혀 밑을 허용하게 되었다. 떼었다 붙였다 하는 일이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혀를 들어 올리고 거울을 보면 그 놈은 마치 윤양의 피부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푸른색 때문에 다소 괴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것도 자꾸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혀 밑의 꺼끄러운 느낌도 점차 사라져갔다.  

그 놈이 윤양의 몸에 기생한지 약 한 달이 지났다. 윤양은 늘 그렇듯이 양치질 후 거울 앞에 서서 혀를 들어올렸다.
“헉!”
윤양의 입에서 가느런 신음이 흘러나왔다.
혀 밑 전체가 푸른 색을 띄고 있었다.
그 놈이 자란 것이다.
그 놈은 생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윤양은 그 놈에게 매일 엄청난 먹이를 대주었다. 그러니 놈은 자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윤양은 거의 매일 그 놈을 관찰했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 놈은 처음 발견했을 때의 그 크기로 혀 밑에 얌전히 붙어있었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거의 3배 가까이 커져버렸다. 그 놈은 아무래도 파충류와 같은 방식으로 자라는 것 같았다. 윤양은 서둘러 손가락을 입에 집어 넣고 그 놈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놈은 떨어지지 않았다.
“안돼!”
윤양이 소리를 질렀다. 온 몸이 푸른색으로 덮여버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비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때 혀 밑이 간질간질했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그 놈은 윤양의 몸에서 존재의 몸짓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이제 윤양의 몸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던 윤양이 그 놈의 자극에 의해 어이없게도 웃기 시작했다.
윤양은 화장실에서 뛰어 나와 책상 서랍을 열고 면도칼을 꺼내어 든 후 다시 화장실로 돌아 왔다. 검은 색 눈물 자욱이 얼굴에 번진 윤양이 입을 벌린 채 면도칼을 든 손을 벌벌 떨며 서 있는 모습이 커다란 거울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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