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Joshua Tree

2008.02.29 23:1602.29

지독한 열기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는 나무가 있길래 그쪽으로 겨우 걸어가 등을 기대고 스르륵 주저앉았다. 목을 짓누르고 있던 헬멧과 대지의 공기와 직접적인 접촉을 막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옆에 내려 두고 손에 끼고 있던 장갑마저 벗었다. 장갑으로 보호받고 있으리라 여겼던 손은 기대와는 달이 여기저기에 긁히고 베인 상처투성이였다.
“하아.”
깊은 숨을 들이 쉬고 내뱉었다. 의외로 공기가 깨끗한 것 같았다. 헬멧에 표시된 대기 수치를 보니 레벨 1, 즉 1등급의 공기였다.
“이런데서 멍청하게 마스크를 쓰고 있었나? 제길.”
뻐근한 목을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위, 아래, 옆으로 돌리다가 하늘을 보았다. 티끌 하나 없는 우라지게 푸른 하늘이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기대고 있는 나무 주변에는 듬성듬성 덤불과 같은 이름 모를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고 땅은 메마른 모래로 덮여 있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흙먼지가 날아올랐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인데, 어디였더라.’
잠시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증조할아버지께서 유품으로 남기신 그룹 U2의 Joshua Tree 앨범 사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Joshua Tree 한 그루가 서 있는 건조한 땅을 배경으로 메마른 표정의 사내 넷이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던 사진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사진과 달리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불과 나흘 전만 해도 내 곁에는 밴드는 어렵더라도 듀오는 결성할 수 있었던 한명의 사내, 산돌이 있었다. 내 오른팔에 붙어 있는 칩이 그가 이 땅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 칩은 그의 목숨을 연장시켜주던 주요 에너지원이었는데 이제는 나의 차지가 되었다. 난 이것 덕분에 놈들이 기대하는 것 보다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언제까지 물을 제때에 공급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남아있다. 타고난 나의 정력을 믿지 못 하는 바는 아니나 지금 이 곳은 너무 건조하다. 우리가 이 건조한 땅을 피해 지하수가 흐르는 땅속으로 기어들어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었다는 것을 여기 나와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얼마 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지?’
가만히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산돌이 죽은 지 이미 이틀이 되었는데 그 동안 물을 마신 기억이 없었다. 적어도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셈이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나의 생존이 신기할 따름이다.
갑자기 애써 억누르고 있던 물에 대한 갈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물을 마시지 못 하면 죽을 것만 같았다. 난 벨트에 붙어있는 파란 색 단추를 눌렀다. 그리고 기다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드디어 ‘위이잉’ 하는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뽀얀 먼지가 휙휙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난 헬멧을 집어 들고 먼지가 소용돌이 치고 있는 곳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내디뎠다. 날리던 모래 먼지가 가라앉자 내 앞에는 그 옛날 시골 마을 사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신주를 닮은 기둥이 하나 우뚝 솟아 있었다. 산돌이 이야기해준 [우먼 스틱]이라는 것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쇠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검은색 도료로 두껍게 칠해져 있어 플라스틱과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지상으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어 덜 달구어진 탓에 아직 서늘했다. 난 산돌이 이야기해준 대로 내 사타구니 높이 쯤 되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과연 막혀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여러 개의 구멍이 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개의 구멍 제일 왼쪽에 빨간색 단추가 하나 있었다. 그 단추를 눌렀다.
‘끼기긱’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구멍을 덮고 있던 덮개가 열렸다. 동시에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구멍위 내 눈높이에 붙어있던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더니 메시지가 떴다.
/시작하세요./
아무것도 없는 건가? 동영상은 어렵다 하더라도 하물며 사진이라도 보여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해가 쨍쨍거리고 있는 이 벌건 대낮에 쇠기둥을 붙들고 그 짓을 하라는 건가? 너무 하지 않은가?    
[우먼 스틱]은 나의 바람에는 아랑곳없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잔말 말고 들이밀라는 의사표현이리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겠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 지극히 쑥스러운 행위를 아무도 봐주지 않았으면 하는 하찮은 소망의 발로라고나 할까. 바지 지퍼를 내리려했다. 그런데 옷이 끼였는지 잘 내려가지 않아 한참을 낑낑대었다. 마시는 물이 없으니 소변 볼일도 없고 그러다 보니 지퍼를 내려본지가 꽤 되었다. 이어 벨트를 풀고 바지를 밑으로 내렸다. 후 하는 한숨이 나왔지만 지금 나에게는 물이 필요했다. 팬티마저 내렸다. 그리고 여러 개의 구멍 중 적당한 크기의 구멍을 골라 내 몸을 갖다 붙였다.
이런 제길.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우먼 스틱]은 최소한의 배려도 해주지 않았다. 그냥 차가운 파이프에 불과했다. 그 때 ‘삐링’ 하며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자극을 원합니까? 원하면 빨간색 단추를 누르세요./
난 그저 수컷이 아닌 남자이다. 고민하지 않고 단추를 눌렀더니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사방이 탁 트인 벌판에서 검은 쇠기둥을 끌어안은 지 1분도 안 되어 난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허망한 마음에 바지도 추리지 못하고 기둥을 붙들고 서있는데 실로 오랜만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에요. 관리명 강돌/
스크린을 쳐다보니 한 여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윤위원장.”
/기억하는군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잊을 수 있겠소?”
/방금 전, 즐거웠습니까?/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요?”
/당신이 제일 잘 하고, 또 하고 싶어 하던 거잖아요?/
“난 이미 벌을 받고 있소. 그런 식으로 조롱하지 마시오.”
/정신을 잃은 여자나 분위기 없는 우먼 스틱이나 뭐가 달라요? 차이가 있던가요?/
잔인한 윤위원장이었다. 윤위원장이 생각하기에는 성폭력범인 나를 훨씬 잔인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지금의 난 아무 힘도 없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형벌은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린치라 할 수 있다. 차라리 사형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을 상대로 싸워 이기면 목숨을 보전해주고 지면 그냥 죽으라는 형벌은 너무나 잔인하다.  
‘끼기긱’
다시 소리가 나며 [우먼 스틱]의 하단부에서 커다란 구멍이 열렸다.
“이건 또 뭐요?”
긴장한 탓인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당신이 애타게 원하던 것 일텐데./
윤위원장은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구멍을 들여다봤다. 물병이 놓여있었다. 손을 집어넣고 물병을 움켜쥐었다. 500 밀리 리터짜리 병으로 짐작되었다. 꺼내 보니 병의 크기는 내가 예상한 대로였으나 물병에는 물이 반 밖에 차있지 않았다. 분노가 치밀었다.
“뭐 하자는 거요? 위원장, 이게 뭐요?”
소리치면서 물병을 스크린 앞에 대고 흔들어대었다.
/아까 자극을 원했지 않소. 옵션 선택에 대한 대가는 지불하셔야지. 당연하지 않아요? 호호호./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그렇다면 사전에 인지라도 시켜줬어야지.”
/그러는 당신은 상대방의 동의를 얻고 그 짓을 한 거요?/
육성이 아닌 기계를 통해 전달되는 윤위원장의 목소리는 더더욱 차갑게 들렸다.
“그만, 그만합시다. 지금은 당신들이 내 목을 쥐고 있으니 뭘 어떻게 한들 내가 어쩔 수 있겠소.”
/행운을 빌겠어요. 양이 많지 않으니 아껴서 마셔요. 아마도 곧 보게 될 테지만./
“잠, 잠깐만!”
/뭐지요?/
“그 여자는 어찌되었습니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군요. 지속적인 치료를 받아 지금은 별 무리 없이 지내고 있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죄가 용서받을 수는 없어요. 가슴에 남아있는 그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테니까. 그럼./
‘삐링’ 하며 윤위원장이 사라졌다. 그리고 [우먼 스틱]에서 요란한 기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난 뒤로 물러섰다. 먼지가 점점 더 많이 솟아 올랐다. 난 그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발걸음을 놀렸다.  
나무로 돌아와서 뿌리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물병 뚜껑을 조심해서 땄다. 병 입구에 코를 대고 먼저 냄새를 맡아 보았다. 누가 물을 무색무취라고 했던가. 향긋한 물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향에 이끌려 허겁지겁 물을 마시다 보니 어느 새 물병은 바닥을 드러내었다. 난 아쉬움에 물병을 탁탁 흔들어 바닥에 묻어 있던 한 방울까지도 혀로 받아냈다.
갈증!
오랜만에 물맛을 본 내 혀와 목구멍과 위와 창자는 물을 더 달라고 요동치고 있었다.
자괴감!
하지만 물을 더 얻어내기 위해서는 [우먼 스틱]과 또 그 짓을 해야만 한다.
술도 구할 수 없는 처지에서 타는 듯한 갈증과 무거운 자괴감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잠을 자는 것이다. 난 억지로 잠을 청했다. 마침 해도 뉘엿뉘엿 지평선 아래로 잠겨가고 있었다.


/이제 두 번째인가요?/
“그렇소.”
/이번에는 옵션을 사용하지 않았군요. 그 상태에서도 잘 되던가요?/
“갈망하면 뭔들 못하겠어요. 그걸 못 하면 물을 안 줄 것 아니오?”/살고 싶소?/
“모르겠어요. 그냥 목숨이 붙어있으니까 물은 마셔야 하고.”
/편하게 죽는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위원장께서는 내가 스스로 죽기를 바라시오?”
/솔직히 말하면 그렇소./
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비록 한 여자의 영혼을 처참히 짓밟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죽이려 들다니.
“이 짓을 안 하면 말라 죽겠죠. 그게 편한 방법 아닌가요?”
/당신 팔에 붙어 있는 칩을 떼어 내세요. 그러면 목말라 죽는 것 보다는 편안하고 나른하게 죽을 수 있을 거요./
“결국, 목말라 죽는 대신 굶어 죽으라는 이야기군요.”
/그리 되나요. 호호호!/
“그만 합시다.”

/이제 다섯 번째군요. 우리 너무 자주 만나는 것 아닌가요?/
난 헉헉 거리고 있었다. 사실 윤위원장과 나누고 싶은 말은 없었다. 단지 물을 얻기 위해 [우먼 스틱]을 찾은 것이지만 영상을 통해서라도 사람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 면도 있었다. 여긴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다.
/왜 대답이 없죠?/
“점점 더 갈증을 못 참겠어요.”
/후후, 다른 사람들도 그랬지요. 우먼 스틱을 더 자주 찾더군요. 당신이 만났던 관리명 산돌도 마찬가지였어요./
“내가 어느 정도까지 망가져야 만족하겠어요?”
/어떤 사람은 하루에 세 번 우먼 스틱을 찾은 적도 있어요. 그러나 찾는다고 다는 아니죠.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정력이 고갈되었기에 우먼 스틱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주질 못하죠. 그걸 원활히 하려면 옵션을 선택해야 하고 그에 따라 공급되는 물은 줄어들고. 이런 걸 악순환이라고 하나요./
내가 걸어가게 될 길을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 고리를 빨리 끊는 방법은 이미 알려드린 것으로 아는데./
“알겠으니 그만 해요.”

난 나무 근처를 떠나지 못했다. [우먼 스틱]을 만나기 전에는 이 불타는 대지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이곳 저곳 거처를 옮겼었지만 자꾸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내 체력을 빨리 소진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뙤약볕 아래에서의 움직임은 갈증을 증폭시켰다.
나무에 기대고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해가 지면 내 오른팔과 왼팔에 붙어있는 칩이 작동을 멈춘다. 하나는 산돌의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원래 내 것으로 이곳으로 방출되면서 위원회에서 제공해준 것이다. 당초 성폭력방지위원회는 죄인들에게 최소한의 생명 유지 장치 제공도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잔인한 파렴치범이므로 사형을 구형하는 것이 마땅한데 스스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땅위에서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는 철저히 그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권위원회는 다른 목소리를 내었다. 죽음의 땅으로 아무 대비책도 없이 방출하는 것이 사형이랑 뭐가 다르냐는 것이었다. 목숨의 부지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는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두 위원회가 티격태격 대다가 결국 인권위원회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나를 비롯한 성폭력범들은 칩을 달고 나올 수 있었다. 내 팔에 달려있는 이 칩은 태양빛을 받아 에너지를 생성해 인체에 공급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칩을 많이 달면 달수록 확보할 수 있는 에너지양도 커진다. 그러나 성폭력방지위원회는 칩을 1개만 제공하는 안을 관철시켰다.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먹지 않는 상태에서 칩 하나를 달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한다.
내가 이 거친 땅에서 산돌을 만났을 때 그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팔에 붙어 있어야 할  칩은 엉뚱하게도 그의 벨트에 매달려 있었다.
“왜 이걸 여기에?”
산돌은 나의 질문에 희미하게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도 알게 될 거요. 내가 칩을 떼어버린 이유를. 내가 죽고 나면 이 칩을 당신이 사용하시오. 아, 죄책감 같은 것은 가질 필요 없어요.”
하지만 난 이제 산돌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윤위원장의 말대로 나도 칩을 팔에서 떼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굶어 죽는 것과 목말라 죽는 것 중 어느 것이 편할까? 진짜 굶어 죽는 것이 편할까?’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순간의 욕정을 다스리지 못한 내가 미웠다. 짧은 치마를 입고 만취 상태로 하필이면 나에게 엎어진 그 여자가 미웠다. 그 일만 없었어도 난 지금쯤 시원한 방에서 물에 대한 갈증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편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계속해서 에너지가 충당되면 살아있게 되고 그리되면 어쩔 수 없이 물을 마셔야 한다. 물을 마시려면 그 놈의 검은 기둥과 또 그 짓을 해야 한다. 그것이 싫다. 산돌도 그것이 싫어 칩을 떼어 낸 것이다. 자괴감이 산돌을 죽였고 곧 나도 죽일 것이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저 먼저 갑니다.”
난 몸을 일으켜 방금 해가 진 서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그리고 내 왼팔과 오른팔에 붙어 있던 칩을 떼어 내어 벨트에 붙였다. 나의 시체를 발견한 자가 이 칩을 차지하고는 잠시라도 기뻐하게 되겠지. 이제 죽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오늘 밤에 잠이 들면, 내일 해가 떠오르더라도 잠에서 깨지 않으련다. 그렇게 계속 누워있으면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한 내 몸은 급격히 쇠약해질 것이다. 이미 최소한의 에너지로만 지탱해온 내 몸은 약할 대로 약해진 상태이니 아마 2~3일 내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말라 비틀어진 이 나무가 내 무덤의 십자가가 되는 셈이다. 스르르 눈이 감겼다.

얼마나 잤을까.
문득 차가운 기운이 손등에서 느껴졌다. 살며시 눈을 떴다. 아직 밤인가. 사방은 깜깜했다. 좀 전에 느꼈던 그 기운이 뭘까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이번에는 코 위로 툭하고 차가운 기운이 떨어졌다. 손으로 콧등을 찍어 보았다. 손가락에 어떤 액체가 묻어 있었다. 킁킁거리며 코로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살짝 혀끝에 묻혀보았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아니다, 잘 생각해보니 이건 물의 맛이요 향이었다. 눈을 번쩍 떴다. 헬멧에 달려 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전 10시. 무려 12시간 이상을 잔셈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두운걸까?  
그제서야 하늘을 쳐다보았다. 늘 푸르고 햇볕이 쨍쨍거리던 그 하늘이 아니었다.
솜털과 같은 회색 뭉치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설마 이게 비라는 건가? 저게 구름이라는 건가?”
학교에서 배웠던 비와 구름의 사진이 떠올랐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우리가 살았던 이 땅에는 비도 내렸고 당연히 하늘에는 구름이 떠 다녔다는 내용을 배운 기억이 났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구름이 없어지고 비가 오지 않아 사람들은 땅속으로 기어들어갔던 것인데 지금 믿을 수 없게도 비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이건 비야. 비가 분명해.”
처음에 툭툭 하고 떨어지던 빗방울은 곧 힘찬 빗줄기로 변했다.
쏴아.
난 벌떡 일어나 입을 벌리고 쏟아지는 비를 꿀꺽꿀꺽 받아 마셨다.
세찬 빗줄기로 인해 막 생겨난 물구덩이로 풀쩍 뛰어 들어 뒹굴며 소리쳤다.
“어머니! 비가 와요, 비가.”

사흘 째 내리 비가 쏟아지고 있다. 구름이 꽉 낀 하늘로 보아서는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비가 오고 나서야 그칠지 예상을 하기 힘들었다. 갈증에 메말라 있던 내 몸에 신선한 물이 충분히 공급되어 정신이 명료해지자 윤위원장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지가 궁금해졌다.
‘윤위원장은 이 사실을 알까? 여기에 이토록 비가 쏟아지고 있는 사실을 알까?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사람들을 보내 날 잡아갈까? 그리고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나에게 형벌을 가할까? 멀리 도망가야 할까?’
그러나 지하세계로부터는 어떠한 메시지도, 조치도 없었다. 아마 그들도 이렇게 비가 올 줄은 미처 예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란 놈이 지구에 내리지 않은지 거의 100년이 되어서 이제는 더 이상 비란 존재가 없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허둥대고 있을 지하세계 놈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도대체 [우먼 스틱]을 고안해낸 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에게도 이 비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장애물일 것이다. 나는 이제 [우먼 스틱]을 찾을 필요가 없다. 물이 충분히 공급되는 이 마당에 그 따위 딱딱한 기둥을 뭣 하러 찾겠는가?
하지만 이틀, 사흘 비가 계속되면서 난 점차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배가 너무나 고팠다. 처음에는 물을 이렇게 충분히 마시고 있는데 내가 왜 이렇게 힘이 없나 그 이유를 알아채지 못했다. 죽을 결심을 하고 떼어 놓았던 칩을 다시 팔에 붙였는데도 그러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바로 두꺼운 구름이 문제였다. 나의 칩에 에너지를 전달해줄 태양 빛이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온 몸이 젖어있는 상태에서 느껴지는 배고픔은 뙤약볕 아래에서 느끼는 갈증만큼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배고픔으로 죽는 것이 낫다고?’
난 윤위원장을 저주했다.
이번에는 나만 죽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나무 역시 연일 쏟아지는 비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너무 많은 물 때문에 죽는구나. 불쌍한 놈.’
난 비가 내리기 전 했었던 결심도 잊어버리고 다시 살기 위해 버둥거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 뿐이었다. 벨트의 파란색 단추를 눌렀다. 하지만 누르면서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비가 너무 와서 못 오는 것은 아닐까?’  
한 시간 정도 지나서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왔다.’
난 곳곳에 생긴 물구덩이를 피해가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이동했다. [우먼 스틱]이 보였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서둘러 빨간 색 단추를 누르자 기계음이 들렸다.
/시작하세요./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지금은 물이 필요하지 않다.
“안 돼. 윤위원장과 먼저 면담을 원하오.”
난 꺼져 있는 스크린에 대고 소리를 쳤다. 그러나 [우먼 스틱]은 묵묵부답이었다.
/시작하세요. 이번에 응답이 없을 시 철수하겠습니다./
별 수 없었다. 윤위원장과의 면담을 위해서 [우먼 스틱]을 끌어안고 젖 먹던 힘까지 다 소진해야만 했다.

‘끼기긱’
물 구덩이에 철퍼덕 앉아 있던 내 눈앞에 /우먼 스틱/ 하단부의 구멍이 열렸다.
손을 집어넣었다.
예상대로 500 밀리 리터짜리 물병이었다.
“으아악!”
난 고함을 치며 물병을 던져버렸다.
“오랜만이오, 관리명 강돌. 하도 연락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어요.”
“당신이 바라던 대로 이제 죽게 되었소.”
“그럴리가요. 당신만 열심히 하면 우린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어요.”
“그래서 준 게 고작 물병이요? 이 물난리에?”
“아하! 지금 그곳에 비가 엄청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연락이 없었군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너무 하오.”
“뭘 원하세요?”
“먹을 것이 필요하오.”
“음, 그러죠. 이 사실을 보고하면 인권위원회에서 또 뭐라고 짖어댈테니 최소한의 양식은 줘야겠지. 우먼 스틱을 개조해서 다음부터는 대가로 빵도 줄 수 있도록 할 테니 기다리세요. 오늘은 별 수 없고. 호호.”
“허어, 정말 너무 하는군요.”
“너무 하다니. 당신은 아직 벌을 덜 받았어요. 벌을 충분히 받아야 다시는 그런 못된 짓을 하지 않을 것 아니겠어요? 그나저나, 이번 비가 꽤나 오래갈 것 같다고 하던데 그런 식으로 비를 많이 맞으면 병에 걸릴 수 있어요.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세요.”
“제 걱정을 하는 겁니까?”
“아니, 당신이 너무 빨리 포기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아무튼 약까지 줄 수는 없으니 알아서 잘 관리하세요. 더 할 말 있나요?”
“지금 한 번 더 하면 빵을 줄 수 있소?”
“아니,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참고 있어요. 그럼.”
윤위원장이 사라졌다. 이어 [우먼 스틱]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비를 막아 주고 있던 헬멧을 벗었다. 철컥철컥 굵은 빗방울이 정수리를 때려대었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던 빗물이 눈으로 들어가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결코 단 시일 내에 그칠 비가 아니었다. 팔에 붙어있는 바짝 말라있어야 할 칩에도 물방울이 잔뜩 붙어있었다. 나무 옆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 나무 곁을 떠나야 한다. 이 나무에게는 비로부터 나를 가려줄 잎이 없다. 게다가 자기 몸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난 또 다른 십자가를 찾아나서야 한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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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ror 08.03.04 13:10 댓글 수정 삭제
    거울 독자 우수단편에 선정되신 분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드립니다. 유진 님께는 <판타스틱 창간호> 보내드렸습니다.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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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08.03.06 07:57 댓글 수정 삭제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분류 제목 날짜
우수작 숲으로5 2005.01.28
가작 불멸에 대하여 2012.02.24
우수작 우주류 - 작품 삭제 -5 200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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