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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holic 

                                                              

  내 이름은 뭉크. 그레이브 키퍼다.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무언가 대단해 보이는 직업 같지만 사실 일개 묘지기다. 즉, 무덤 위에 끼인 잡초를 제거해 주거나, 성묘객들이 놓고 가는 꽃 나부랭이나 쓰레기들을 치우는 잡일꾼이나 다름없다는 거다. 더군다나 내가 배정받은 이 곳 브룬타 공동묘지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기사들이 잠들어 있는 왕립 묘지도 아니고, 세상을 놀라게 한 마법들을 만들어 낸 마법사들의 묘지도 아니다. 하다못해 온갖 범죄자들이 묻혀 있다는 켈라브레소 수용소의 묘지였더라면 그나마 따분하진 않았을 텐데. 이 브룬타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시체라고 해봐야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노망난 영감탱이들 뿐…….

  “지랄하고 앉았네. 누가 영감탱이냐!”

  주정뱅이 푼타 할배가 느닷없이 일기장 사이로 불쑥 고개를 내미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의자째 넘어질 뻔 했다.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잖아!

  “미친놈의 할배가 사람 놀래키고 있어. 대낮부터 헤롱거리고 돌아다니니 누가 봐도 노망이지. 쳇.”

  내가 일기장을 덮으며 투덜거리자 푼타 할배는 아예 책상 위로 몸을 끄집어내며 말했다.

  “유령한테 낮밤이 어딨냐, 히꾹. 그나저나 뭉크, 네가 일기를 쓴다니 웃기지도 않는구먼. 까막눈인 줄 알았는데?”

  나는 실실거리고 웃는 푼타 할배의 이마께에 펜쪽을 찔러댔지만 와 닿는 것은 허무한 공기의 감촉뿐이었다. 제발 떠들지 좀 말라는 무언의 시위였지만 그럴수록 할배는 비워지지도 않는 술병을 입가에 갖다 댈 뿐이었다.

  “억지로 고아원에서 배운 거야. 그러고 보니 시팔 놈의 원장 새끼, 그거 하난 고맙네.”

  퉁명스런 내 대답에 이번엔 푼타 할배가 내 정수리를 향해 술병을 휘둘렀다. 물론 닿을 리 없다.

  “넌 열일곱 밖에 안 된 놈의 자식이 무슨 입이 그렇게 걸어. 히꾹. 내가 보기엔 안하무인인 네 녀석 키우느라 오히려 그 원장 선생님 허리가 휘어졌을 거다 이놈아.”    

  고아원에서도 문제아였던 내가 갱생 차원에서 이곳 브룬타 묘지의 그레이브 키퍼로 배정 받은 이후로 나는 내가 유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뭐 나쁜 거냐고? 매일매일 찾아와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영감탱이들 때문에 도저히 맘편히 살 수가 없다. 유령 덕분에 보물이 묻혀진 동굴을 찾아내 떼부자가 된 카로비치나 와인 한 잔을 대접한 덕분에 유령의 은혜를 입어 당대 최고의 미모를 얻게 되었다는 악쉬나의 얘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이 곳 브룬타의 유령 영감탱이들은 결코 그런 부류의 유령은 아닌 듯하다.

  “나도 쓰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야. 관리소장 아저씨가 그러는데 저녁에 감사가 나온다고 하더라고. 그레이브 키퍼가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지 검사해야 한대.”

  묘비에 새겨진 묘비명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란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이 곳 브룬타 공동묘지에 있는 무덤은 총 서른 아홉개. 그 중 묘비가 세워진 무덤은 단 한개도 없다. 즉 왕국에 공헌을 세운 위인이 한 명도 없단 얘기다.
  어쨌든 내 말을 들은 푼타는 사무실 이곳저곳을 취한 벌새처럼 날아다니며 기뻐했다.

  “감사가 나온다는 건 좋은 거잖아? 히꾹. 부서진 관도 고쳐주고 여기저기 나무도 심어 주겠는걸?”

  “할배 관이 어때서? 그 놈의 술병 때문에 썩은 거잖아. 대체 죽으면서까지 술병을 무덤에 넣어달라는 술꾼이라니.”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푼타 할배는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술병을 자신의 입 속으로 들이붓고 있었다-유령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음주법이다. 유령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먹고 마실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푼타의 저 술병은 그저 생전의 습관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푼타 할배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가끔 저렇게 입가로 흘러내리는 술을 팔뚝으로 닦으며 감탄사를 내뱉는 걸 보면 나조차도 가끔 술 생각이 날 때가 있다.

  “버르장머리 하고는. 어쨌든 그럼 오늘 밤은 싸돌아다니면 안 되겠구먼? 히꾹.”

  “오, 할배도 가끔 머리가 돌아갈 때가 있는걸? 맞아. 오늘은 쥐죽은 듯 있으라고. 뭐, 어차피 감사래봤자 대충 형식적으로 둘러보다 가겠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줄만 알았다. 별 볼것 없는 브룬타 공동묘지의 일상에 나도 완전히 젖어 버렸기 때문일까? 나는 운명의 잔인함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이후로 일개 그레이브 키퍼로서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 시작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이, 할배. 누가 허락도 없이 무덤에 올라가래요? 썩 내려와요.’

  푼타 할배와의 첫 만남이 떠오른다. 당시 나는 풋내기 그레이브 키퍼였기 때문에 우중충한 공동묘지를 돌아다닌 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 익숙하지 않고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 한 손에 술병을 쥔 채 누군가의 무덤 위에 올라가 있는 노인을 봤을 때 한편으론 깜짝 놀랐지만 다른 한편으론 짜증이 왈칵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허, 요놈 봐라. 히꾹. 내가 내 몸 위에 올라 타겠다는데 무슨 불만이야?’

  ‘뭐? 이 노인네가 아침부터 취해가지고선. 빨리 안 내려와?’

  그러자 그 노인은 턱을 홱 치켜 올리며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런 건방진 놈. 내가 패잔병이라고 무시하는 거냐? 이래뵈도 왕년의 푼타 킨테가 몇 명의 적군들을 때려눕혔었는데…….’

  그의 횡설수설에 난감해 하던 나는 번뜩 스치는 생각에 몸을 꼿꼿이 할 수 밖에 없었다. 푼타 킨테? 분명 귀에 익은 이름인데. 그러자 나는 관리소장이 내게 툭 던져주며 외우라고 했던 시체들의 명단을 떠올렸다. 푼타 킨테. 분명히 네번째 열에서 가장 왼쪽 무덤이었다. 바로 저 술병 든 노인이 앉아 있는 저 무덤. 그러고 보니 저 노인의 몸이 약간 뿌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를 깨달은 내 입이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유,유…….’

  ‘유령이라고? 알아, 인마. 히꾹. 내가 왜 지금 깨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개암나무 떨듯이 파르르 떨 필요는 없다 이거야.’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푼타 할배는 그 날 처음 깨어났다고 한다. 죽은 지 몇 년이 되었는지도 모른 채. 그가 간혹 혼팔라스 계곡 전투를 부르짖는 걸 보면 샴발라 장군 시대였던 것 같은데……. 뭐 샴발라 장군이야 거지들도 알만큼 신화적인 인물이지만 그 때가 몇 년도인지는 내가 알 턱이 없으니.
  그 후로 묘지에서 깨어난 유령들은 네 명이 더 있다. 뭐, 정확히 얘기하자면 네 명 하고 한 마리지만.



  “그루소 아저씨. 세푸는 어디 갔어요?”

  순찰을 하던 도중에 묘지의 유령 영감탱이들 중 그나마 앳된 얼굴을 간직한 그루소 아저씨를 만났다. 웬일로 그는 항상 곁에 두던 강아지 세푸도 없이 황망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으로 미루어 보아 생전에 그는 꽤나 대단했던 부자였을 것이다.
  그는 엄지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마침 잘 왔다, 뭉크. 글쎄 오늘따라 이 아이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더구나.”

  그루소 아저씨는 말투에서부터 침착하고 신중한 성격이 묻어나온다.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내가 유일하게 유령들 중에서 존댓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요? 공동묘지 곳곳에 안 누빈 데가 없을 만큼 쌩쌩했잖아요. 지금 어디 있는데요?”

  그루소 아저씨는 울타리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자세히 쳐다보니 세푸로 추정되는 괴물체가 땅바닥을 파헤치고 있었다. 내가 왜 괴물체라고 했냐면 저토록 온몸에 경기를 일으키며 발광하는 모습을 일찍이 못 봤기 때문이다.
  그루소 아저씨는 걱정스러운 듯이 세푸를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 놈 생전에 저런 적이 딱 한 번 있었단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불안해하며 땅을 파는 거야.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겠느냐?”

  나는 고개를 저었고, 그는 여전히 엄지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내 저택에 도적떼가 들이닥쳤었지.”

  그리고 그는 그 날 경비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도적떼들에게 붙잡혀 죽을 고생을 했던 것과 지금 생각하면 세푸에게 신비한 예지력이 있다는 둥 그루소 아저씨 답지 않게 요상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요, 아저씨. 우리 공동묘지에 훔쳐갈 게 뭐가 있다고. 그냥…….”

  개새끼가 결국 미친거지. 나는 튀어나오는 말을 억지로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어야 했다. 푼타 할배 앞이었다면 그냥 나오는대로 지껄였을 텐데. 어쨌든 이곳에서 계속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나는 내 용건을 말하기로 했다.

  “오늘 저녁에 감사가 나온대요. 물론 그루소 아저씨야 점잖으시니 후투치 할배처럼 성묘객한테 변태스러운 짓을 하거나 해서 놀래키지는 않으시겠지만 세푸는 좀 걱정되네요.”

  “음? 그럼 오늘은 그냥 무덤 속에 들어가 있어야 되는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푸도 함께. 오늘만 참으세요. 뭐, 금방 끝날 테니까요.”




  사실 묘지에 있는 유령들을 가리켜 영감탱이들이라고 말하는 건 어폐가 조금 있다. 네 명 중에는 유일하게 여자가 한 명 있으니까.

  “어머? 자기 왔구나. 이게 얼마만이야?”

  로시 할멈은 나를 보자마자 호들갑이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번쩍번쩍 빛나는 목걸이나 팔찌들이 내 눈을 간지럽혔다. 유령이 냄새를 풍길 수도 있었다면 분명 그녀의 주위는 독한 화장품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였을 것이다.

  “할멈. 내가 그 말투 좀 고치랬지. 마치 내가 무덤에 온 건지 유곽에 온 건지 분간이 안 가잖아. 그리고 뭐가 또 오랜만이야. 바로 그저께 후투치 할배랑 싸워대는 거 말리느라 혼났었는데.”

  “섭하다, 자기. 이틀이면 충분히 보고 싶어지는 거 아니야? 그리고! 후투치 그 변태자식이 내 허벅지를 몰래 더듬어 놓고 발뺌하잖아.”

  “후투치 할배야 원래 그렇잖아. 내가 보기엔 할멈이 '만졌으면 돈을 내놔야지.'라고 말한 게 잘못이야. 사과하려던 후투치 할배가 그 한 마디 때문에 발끈한 거 아냐. 같이 썩어가는 처지에 좀 사이좋게 지내지.”

  로시 할멈은 생전에 유곽에서 화류녀로 일했다고 한다. 그녀의 젊었을 적 모습을 보지는 못했으니까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분명 대접받는 화류녀는 아니었을 것 같다. 그다지 빼어난 미모도 아닌데다가 늙어서까지 퇴물 취급을 받으며 화류녀노릇을 했어야 했다면 그녀도 별 볼일 없었던 것 같다.

  “저 냄새나는 관 속에 처박혀 있으라고? 너무 야박하다, 자기야.”

  그녀는 내가 꺼낸 말에 과장 섞인 몸짓으로 투덜댔다.

  “감사 나온 사람이 유령을 볼 줄 아는 사람이면 어떡해. 할멈 얼굴 보고 기절할 거 아냐.”

  “흥, 기절을 왜 해? 반하면 혹 모를까.”

  나는 그녀랑 대화할 때면 매번 생각한다. 유령도 비출 수 있는 거울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리고 그것들도 내 놔.”

  내가 쓰윽 내민 손을 보더니 로시 할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내 놓으라는 거?”

  화류녀 출신답게 연기력 하난 뺨을 치는구나. 하지만 넘어갈 내가 아니지.

  “성묘객들 화장품 훔친 거. 어디다 모아뒀을 거 아냐, 그것들.”

  할멈의 얼굴엔 당황해 하는 표정이 얼핏 스쳐지나갔다.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알았겠지. 그녀가 훔친 화장품들 때문에 내가 성묘객들에게 엉뚱한 오해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안 풀린다. 그나마 할멈이 특별한 말썽을 부리지 않고 있어서 눈 감아줬던 것이다.

  “감사가 끝나면 다시 돌려줄게. 도대체 바르지도 못할 화장품을 가져다가 어쩌려는 거야?”

  할멈은 순식간에 울먹이는 표정으로 둔갑한 뒤 말했다.

  “힝. 여자에겐 여자만의 사정이 있는 거라고. 꼭 그런 걸 드러내야 직성이 풀려, 자기는?”

  윽. 미치겠군. 이렇게 계속 실랑이를 벌일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어쩔 수 없이 타협점을 찾기로 했다.

  “알았어. 다음 시내 나갈 때 하나 사다 줄께. 됐지?”

  로시 할멈의 표정은 급속도로 밝아졌다.

  “정말? 그럼 향수로. 포카리 꽃잎 향기 나는 걸로?”

  나는 포카리 꽃잎이 뭔지, 그게 지금 시대에도 있는지는 몰랐지만 어차피 유령인 로시 할멈이 냄새를 구분할 수 있을 리도 없을 것이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왜 성묘객들에게서 화장품을 훔치는지 잘 알고 있다. 아직도, 그녀는 여자로 취급받고 싶은 것이다. 생전에 그렇게 취급받지 못했기에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후투치 할배가 찝쩍거리는 걸 보면서도 크게 화내지 않는 것이다.

  “고마워, 자기야. 이리와, 뽀뽀해줄께.”

  어차피 유령인 할멈이 내게 달려 들어봤자 입을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나는 순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큰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로시 할멈이 모아 놓은 화장품은 들쳐맸을 때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양이었다. 관리소에 신고가 들어왔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었다. 대체 이건 로시 할멈의 욕심에 놀라야 하는 건지. 아니면 화장품 하나 없어진 것도 눈치 못 채는 요즘 여자들한테 놀라야 하는 건지.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유령 둘은 예상대로 함께 있었다. 살아생전 여자들한테 몰매를 하도 맞아서 얼굴이 저렇게 부었다는 변태 후투치 할배와 그의 오랜 마호프 상대인 맥마흔 할배. 그 둘은 여전히 마호프를 두고 있었다. 내게는 워낙 고리타분한 게임인 마호프. 대체 장기판 위에서 말을 움직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놀이가 뭐가 재밌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사실 저 마호프 장기판도 내가 갖다 준 것이다. 다섯 명의 유령 중 유일하게 무덤이 붙어 있던 두 할배는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둘의 취미가 같다는 것을 깨닫고 매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난 비웃었다.

  ‘멍청하기는. 마호프는 뭘로 둘려고? 관 속에 같이 가져오지도 않았으면서.’

  그러자 그 때 후투치 할배는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맥마흔 할배도 마찬가지였고. 나보고 유령한테 장기판을 가져다 주라고? 나는 콧방귀를 뀌며 그들의 부탁을 무시했지만 그날 밤 이후로 밤새 머리맡에서 노래를 불러대는 후투치 할배 때문에 결국 마호프 장기판과 장기알을 구해다 줘야 했다. 참고로 마호프는 혼자서도 둘 수 있는 브락치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반드시 상대방이 있어야 한다. 내가 들고 온 마호프 장기판을 본 관리소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허참. 온지 한 달 만에 미친놈은 처음인데.’

  꾀죄죄한 후투치 할배의 외양이야 특별할 게 없지만 맥마흔 할배에게는 처음 봤을 때 혀를 깨물었었을 정도로 섬뜩한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그의 등에는 창 한 자루가 꽃혀 있는 것이다. 백사자가 암각되어 있는 로이타 시대 군인들의 창.
  하긴, 그러고 보니 우리 브룬타 공동묘지에 위인은 없지만 유명인은 하나 있다. 바로 후투치 할배의 공격에 쩔쩔 매고 있는 맥마흔 할배가 그 주인공이다.
  적어도 삼백년은 된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유명하다. 고아원에 있을 당시에도 맥마흔이란 이름은 노랫말 속에 섞여 있고는 했으니까. 마법사들의 황금시대였다는 로이타 제국시대 때 자신이 마법사라고 주장했던 한 남자가 황제를 찾아왔다고 한다. 당시 황제는 뛰어난 마법사들을 휘하에 거느리는 것이 최대의 낙이었기에 그 남자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래, 그대의 재능은 무엇인가?’

  그 시대에도 물론이거니와 마법사들이 거의 자취를 감춘 요즘에도 마찬가지로 마법사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용의 어금니로 만든 마법 팔찌가 그것인데, 그 팔찌를 통해 마법사들은 마법을 부린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황제를 찾아온 그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 맥마흔은 팔찌 없이 마법을 부릴 수 있소.’

  황제와 그 휘하에 있던 마법사들은 경악했고 어서 그 솜씨를 보여 보라며 자리를 마련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맥마흔은 그들의 벅찬 기대에도 불구하고 전혀 마법을 보여주지 못했고, 황제를 능멸한 죄로 처형당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대륙에는 사기꾼 마법사 맥마흔을 조롱하는 노래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황제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일 정도로 간 큰 남자 맥마흔 할배는 소문과는 달리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노인네일 뿐이다. 마호프에 전혀 조예가 없는 내가 봐도 후투치 할배는 그닥 뛰어난 장기꾼이 아닌데도 그에게 쩔쩔매는 맥마흔 할배를 보면 알 수 있다.

  “또 지고 있어, 할배? 그냥 때려치라니까는.”

  내 비아냥거림에도 장기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맥마흔 할배는 대답했다.

  “닥쳐라, 이놈. 정신 흐트러진다. 여기서 용으로 치고 들어가면 활로가 보일 듯한데…….”

  “허허, 웃기시네. 그럼 백사자한테  콱 잡아먹힌단 말씀. 패배를 인정하게, 맥마흔.”

  후투치 할배는 여유 있게 팔짱을 낀 채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맥마흔 할배는 한참을 고심한 끝에 결국 그만의 방법으로 판을 끝내었다. “에에잇!” 괴성을 지르며 장기판을 뒤엎은 것이다.

  “야이 미친 영감탱이야! 졌으면 진거지, 왜 또 뒤집고 지랄이야!”

  후투치 할배는 맥마흔 할배의 멱살을 붙잡으며 소리쳤지만 맥마흔 할배는 후투치 할배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장기판은 뒤집히면 그만이야. 울고불고 해봤자 소용없지. 그냥 무승부로 치세.”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저 뻔뻔함을 보면 맥마흔 할배는 사기꾼이긴 사기꾼인가 보다. 한참을 옥신각신한 끝에 후투치 할배는 씩씩거림을 멈추었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장기판을 다시 가져간다고? 왜?”

  맥마흔 할배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오늘 저녁에 감사가 나온다고 하거든. 묘지 한 복판에 떡하니 장기판이 있어봐. 뭐라고 둘러 댈건데?”

  맥마흔 할배는 수염이 덥수룩한 턱을 긁어대며 말했다.

  “거 아쉽네. 내 필살의 한 수를 생각해 둔 게 있는데 말이야…….”

  “웃기시네. 막판에는 또 장기판 뒤집을 거면서. 매일 상대해주는 내가 고마운 줄 알어!”

  후투치 할배의 윽박지름에도 맥마흔 할배는 허허 웃으며 받아 넘겼다. 어쨌든 둘은 로시 할멈과는 달리 반항하거나 조건을 내걸지는 않았다. 대신 맥마흔 할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꺼냈다.

  “구경하러 가면 안 되나? 요새 외부 사람 본지가 너무 오래돼서 말야. 성묘객들도 뜸하고.”

  “영감탱이가 실성했군. 감찰관은 보통 샤먼을 데리고 온단 말야. 할배같은 불량 유령들은 걸리면 바로 잡혀가. 그리고 성묘객들이 뜸한 건 옆에 있는 후투치 할배 탓이지. 애어른 할 것 없이 여자들만 보면 사족 못 쓰고 장난질이니.”

  후투치 할배가 갑자기 먼 산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딴청을 부리는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맥마흔 할배는 계속 얘기했다.

  “이 맥마흔이 그런 놈들한테 들킬 것 같아? 까짓거 걸려도 마법으로 탈출하면 그만이야.”

  “웃기시네. 영동력(靈動力)도 쥐꼬리만 해서 겨우 장기말이나 옮기는 주제에.”

  영동력은 유령이 현실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한다. 그 먼 옛날 샴바라 장군의 유령은 워낙에 큰 영동력을 갖고 있어서 산을 옮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감탱이들의 영동력은 우습지도 않다. 화장품을 슬쩍하거나 장기말을 몇 칸 옮길 정도인 것이다.

  “그놈의 마법 타령. 한 번 보여주기나 하고 지껄이든가.”

  나의 비웃음에 맥마흔 할배의 눈꼬리가 치켜 뜨여졌다.

  “욘석이?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깟 놈은 순식간에 손톱만한 크기로 콱 찌부러뜨릴 수도 있어, 이놈아.”

  지겹도록 들어온 맥마흔 할배의 허풍을 뒤로 하고 나는 등을 돌렸다.

  “어쨌든 오늘은 말썽 부리지 마. 괜히 샤먼한테 잡혀가기 싫으면.”



  유령. 고아원에 있을 때 나는 가끔 유령과 대화를 나누는 녀석들을 본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유령을 볼 줄 안다는 것은 정신병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고아원에 있을 당시 항상 나를 챙겨주고 뭔가를 가르쳐줬던 챔파 형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유령은 진짜 있어. 그리고 유령과 대화 할 수 있는 건 특별한 재능이래. 그래서 그런 애들은 좋은 집에서 데려간다고 하더라구.’

  ‘쳇. 그게 뭐야. 내가 보기엔 미친 것처럼 보이는구만.’

  겨우 아홉 살이었던 당시의 내게 다섯 살이나 많았던 챔파 형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해 준 것 같다.

  ‘뭉크, 너도 성질만 죽이면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텐데.’      

  내가 유령을 볼 줄 알았다는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어느 으리으리한 집에서 나를 데려갔을까? 좀 더 나은 집에서 사랑받고 자라날 수 있었을까? 쳇. 이제 와서 생각하면 뭘 하냐. 어쨌든 브룬타 공동묘지의 그레이브 키퍼가 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유령을 볼 줄 알고 얘기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게 있어 영감탱이들의 유령은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분명 묘지기로서의 내 일에 방해가 됐으면 됐지, 좋을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관리소장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고, 그는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샤먼을 한번 불러보지 뭐.’

  유령을 성불시키는 전문직업이 있다는 게 또다시 나에겐 충격이었지만 어쨌든 그 무당이란 사람은 관리소장의 부름을 받고 며칠 만에 우리 공동묘지를 찾아왔다. 묘지 앞에 온갖 짐승의 뼈다귀와 요상한 물건들을 늘어놓으며 주문을 외우던 샤먼은 느닷없이 관리소장과 나에게 화를 냈다.

  ‘바쁜 사람 불러내서 와 봤더니, 유령은 커녕 쥐새끼 한 마리 안 나오네.’

  결국 우리 공동묘지에는 유령이 하나도 없다는 무당의 말이었다. 나는 기가 차서 말도 안 된다며 할배들을 불러 보았지만 그들은 내가 불러도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 날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는지 볼이 부은 채 무당은 돌아갔고, 화가 난 관리소장에게 두들겨 맞은 덕분에 나 역시 볼이 부은 채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나는 일어나자마자 할배들을 찾아갔다. 물론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하고.

  ‘이 노망난 영감탱이들이! 왜 꼭곡 숨어서 안 튀어나와!’

  그러자 슬며시 땅 속에서 올라오며 푼타 할배가 대답했다.

  ‘그 자식이 기분나쁘게 불러 내잖냐. 히꾹. 한이 있으면 나와서 풀라고.’

  로시 할멈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우린 한이 없는걸. 그냥 여한 없이 살다가 죽었다고.’

  나는 그 말에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왜 유령이 돼서 떠돌아다니는 건데?’

  그 말에 대답한 건 그루소 아저씨였다.

  ‘글쎄. 그건 우리도 모르는 것 같단다. 왜 잠들지 않고 깨어났는지.’

  그렇다. 우리 공동묘지의 영감탱이들은 지들이 왜 유령이 돼서 설치고 다니는지 그 원인조차 모른다. 정말이지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니깐. 그렇게 된 덕분에 그레이브 키퍼인 나와 유령 영감탱이들과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묘지를 순찰할 때마다 할배들과 할멈, 그리고 개새끼 한 마리는 나를 귀찮게 군다.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고. 나무뿌리가 관속을 파고든다는 둥, 땅 속이 너무 춥다는 둥.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뭐, 물론 심심하지 않아서 좋긴 하지만.



  “정말이지 지저분한 공동묘지네요.”

  감사를 나온 감찰관은 웬 뚱뚱한 아줌마였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나보다 서너 살은 어려보이는 꼬마가 건방져 보이는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공동묘지를 돌아다니며 그 아줌마는 연신 '지저분하다, 전반적인 개편이 필요하다'는 등 불만을 토로했다. 어쩌면 푼타 할배의 바람대로 일꾼들이 출장나와 공동묘지를 새로 꾸며줄지도 모르겠다. 뭐, 확실히 우리 브룬타 공동묘지가 썩 쾌적하지만은 않으니. 감찰관 아줌마의 투덜거림이 늘어갈 수록 나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한 바퀴를 다 돈 뒤에 감찰관 아줌마는 꼬마에게 말을 걸었다.

  “어떠셨어요? 그냥 진행해도 될까요?”

  그 아줌마가 꼬마에게 존댓말을 썼다는 사실에 놀란 건 나뿐이었다. 표정을 일그러트린 나의 머리를 관리소장이 쥐어박은 것이다. 그 제스처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멍청아, 저 꼬마는 귀한 분이시다. 그냥 거만한 감찰관 아줌마와 그걸 구경하러 온 싸가지 없는 아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
  어쨌든 그 꼬마는 내 예상대로 어른에 대한 예우는 전혀 없어 보이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렇군. 청소가 필요하겠어.”

  그런데 그 순간, 청소가 필요하다는 그 꼬마의 말이 이상하게 뇌리에 박혀 왔다. 꼬리뼈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소름이 쫙 끼쳐오는 불길한 느낌이었다. 청소라니, 뭘 청소한다는 거야?
  꼬마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여긴 그레이브 키퍼가 없나 보네.”

  익. 좆만한 꼬마 녀석아. 여기 네 눈앞에 서 있잖냐,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관리소장이 옆에 서 있었기에 나는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대답했다.

  “저……. 제가 그레이브 키퍼인데요.”

  그러자 꼬마는 어린 녀석이 입꼬리로만 웃는 놀라운 재주를 발휘하며 나를 비웃었다.

  “그 그레이브 키퍼 말고, 진짜 그레이브 키퍼를 말하는 거다.”  

  그런데 이 자식이 계속 반말이야. 나이는 내가 훨씬 많고만. 물론 이것도 나의 속마음일 뿐, 겉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그리고 난 분명히 들었다. 그 꼬마가 관리소의 창문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어디, 수호령도 없는 녀석이 그레이브 키퍼라고.’

  수호령? 그게 뭐냐? 하고 따지고 싶었지만 감찰관 아줌마가 깜짝 놀랄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럼 약속대로 내일 공사를 시작하는 걸로 하죠. 전부 갈아엎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네.”

  “네? 갈아 엎다뇨?”

  내 입 속에서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공사라니? 무슨 공사? 나는 관리 소장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감찰관 아줌마의 냉랭한 말투가 내 귓 속을 파고 들었다.

  “어머, 이장 소식을 못 들었구나. 하긴 일개 그레이브 키퍼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이 공동묘지를 높으신 귀족 가문이 접수했단다. 그래서 묘를 이장하는 거지.”

  “그럼……, 여기 있는 무덤들은요?”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감찰관 아줌마는 손사래를 치면서 웃어댔다.

  “당연히 폐기처분되는 거지. 어차피 묘비도 없는 쓰레기들이니까.”



  
  그들이 돌아간 뒤 나는 처음으로 관리소장에게 대들었다.

  “왜 진작 얘기 안 해줬어요? 이장된다고 말을 해줘야죠!”

  “허, 이놈이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인마. 이장이 되면 묘지가 더 으리으리해지는 거야. 관리사무소도 싹 뜯어 고칠 거고. 이미 유가족들과도 끝난 얘기인데. 좋은 소식이라 놀래켜 줄려고 그랬더니, 이놈이 어따 대고 성질이야.”

  쓰레기라니. 폐기처분이라니. 이 무슨 맥마흔 할배 장기판 뒤집는 소리야. 그럼 영감탱이들은? 우리 공동묘지에서 희희낙락하며 살고 있는 저 유령들은 어떻게 하라고?
  속에서는 백마디도 넘는 말들이 용암처럼 끓고 있었지만 나는 단 한 방울도 분출할 수 없었다. 내가 유령을 본다고 말해도 관리소장은 코웃음을 칠 것이고, 나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덤들은 결국 파헤쳐질 것이고, 그 안에 있는 관들은……모두 버려질 것이다.  
  내일부터 공사가 시작될 거라는 말을 남기고, 관리소장은 퇴근해 버렸다. 나는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 버렸다. 로시 할멈한테 뺏어온 화장품 더미들과 마호프 장기판이 눈에 들어왔다. 제길. 이제 이런 게 다 무슨 필요야. 나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그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화장품 케이스들과 나무 장기말들이 부딪혀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정말 없어지는 거야? 할배들 무덤이. 그 속에 있는 허름한 그들의 육신이. 한낱 썩은 나무 조각처럼 불태워지는 거냐고?
  빌어먹을. 내가 무슨 그레이브 키퍼냐. 묘비는 커녕 그 안에 있는 관들도 지켜내지 못하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그들에게 준비할 시간은 줘야 할 것 같았다. 하다못해 정든 묘지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라도 좀 더 일찍 알려줘야지. 램프를 들고 관리소를 나왔을 때 뭔가 차갑고 굵은 것이 내 이마께로 떨어졌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씨팔. 날씨까지 지랄이군.
  나는 어렵지 않게 그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웬일로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한 푼타 할배가 아는 척을 했다.

  “여어, 우리 그레이브 키퍼 아니야? 히꾹. 빨리 와 봐, 후투치가 할 말이 있다는군.”

  그러자 후투치 할배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영감탱이가 애꿎은 사람 잡을 일 있나. 제일 먼저 얘길 꺼낸 건 자네잖아. 얘길 해도 자네가 해야지.”

  하지만 두 할배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자, 답답한 모양인지 로시 할멈이 말을 꺼냈다.

  “소심한 남자들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있지, 간단한 거야. 이번에 묘지를 좀 더 예쁘게 꾸밀 때…… 우리 묘비 좀 세워주면 안 되니, 자기야?”

  묘비? 로시 할멈이 말문을 트자 푼타 할배와 후투치 할배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그래. 우린 멀쩡한 이름이 있는데, 히꾹. 왜 묘비가 없는 건지 이상했거든.”

  “보아하니 요 몇 년 동안 새로 이장된 사람도 없는 것 같고, 묘지가 너무 적적해. 묘비라도 세워준다면 혹시 모르지.”

  잠자코 있던 맥마흔 할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 공동묘지가 죽은 지 지나치게 오래 된 늙은이들만 있는 건 사실이지. 만약 묘비가 있다면 좀 더 보기 좋아질 텐데 말야.”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들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점점 거세게 정수리를 때리는 빗방울 때문에 온 몸이 젖어 들어갔지만 전혀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그루소 아저씨가 혀를 차며 말했다.

  “예끼, 이 사람들. 아이를 비 맞게 세워놓고 무슨 불평이 그리 많나. 묘지야 까짓거 내 돈으로 세우면 되는 거지.”

  푼타 할배가 받아 쳤다.

  “어이, 부자 양반. 히꾹. 자네 죽을 때 돈다발 들고 죽은 거 아니잖아?”

  “물론 내 자식들이 상속 받았지. 그러고 보니 그것들은 왜 묘비도 안 세워 준 거지? 가서 좀 따져야겠고만.”

  그러자 맥마흔 할배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루소 자네야 말로 웃기는군.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야. 우리가 세상을 뜬지가 언젠데. 자네 자식들도 이미 다 뒈졌을걸?”

  맥마흔 할배의 짖궂은 말투에 나와 그루소 아저씨의 품에 안긴 세푸를 제외한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웃음소리는 내 귓속에 명징하게 들려왔다.

  “무덤이 모두 없어질 거야.”

  느닷없이 내뱉은 나의 말에 할배들은 모두 웃음을 멈추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오늘 감찰관이 나와서 그런 말을 꺼냈어. 내일 사람들이 몰려와서 공사를 할 거래. 이제 더 이상 브룬타 공동묘지라는 이름을 쓸 수가 없어. 웬 높으신 귀족 나으리가 이 땅을 사버렸대. 자기들 가문의 묘지로 쓰겠다고. 그래서…….”

  이익. 아랫배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말이 더 이상 나오지가 않는다. 말해야 하는데. 이제 당신들은 이곳에서 살 수가 없다고. 떠나야 한다고. 어차피 갈 곳도 없는 노인네들인데…….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래 남아 있긴 했지.”

  맥마흔 할배가 빗방울을 만지려는 듯 손을 펴보며 말했다. 그러자 할배들의 얼굴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을 삼킨 듯한 표정이 하나 둘 생겨났다.
  로시 할멈이 말했다.

  “아까 그 뚱땡이가 감찰관이래? 걔 살 좀 빼야겠더라. 뭐, 내가 없어지면 미인 몸매의 표본을 이제 어디서 찾나?”

  “음, 나는 뭉크도 모르게 숨겨 놓은 게 있었는데, 그것도 버려야 하나.”

  무언가 아쉬운 듯한 말투로 말하는 후투치 할배에게 그루소 아저씨가 쏘아붙였다.

  “그 여자 속옷들? 이 사람아. 제발 철 좀 들어. 그 나이에 여색 밝히는 건 진짜 노망이야.”

  후투치 할배는 또다시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고 맥마흔 할배는 그런 모습을 보곤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나도 아쉬운 게 하나 있구먼. 내 후투치 이 놈한테 진짜 장기가 뭔지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말이지. 매서운 한 수로 말야.”

  잠자코 듣고 있던 후투치 할배가 버럭 화를 냈다.

  “야이 사기꾼 놈아. 내가 매일 봐줬던 것도 모르는 게냐. 마호프의 마자도 모르는 허풍쟁이가.”

  더 이상 이런 모습들을 볼 수가 없나. 그루소 아저씨가 엄지로 안경을 추켜세우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후투치 할배가 끝내주게 예쁜 성묘객이 왔다며 들떠 있는 모습도. 모두 다시는 볼 기회가 없겠지.

  “으헤헤. 무슨 거창하게 공사고 뭐고 할 거 있나. 우리 모두 숨 줄 끊어진 지 하도 오래 되서 시체도 썩어 없어졌을 텐데. 히꾹. 관 버릴 때 깜짝 놀랄 걸? 너무 가벼워서.”

  푼타 할배의 농담에 모두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지만 나는 그 웃음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냥 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와 버렸다. 빗줄기 사이를 뚫으며 달리는 동안 뒤에서 할배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더 이상 그들 틈에 있을 수가 없었다.
  관리 사무소에 도착할 때쯤 나는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했다.

  “뭉크, 이 놈. 그렇게 풀죽은 모습은 안 어울려.”

  그루소 아저씨였다. 곤히 자고 있는 세푸를 품에 안은 채 그는 푸근하게 웃고 있었다.

  “그루소 아저씨.”

  그루소 아저씨는 터벅터벅 내 쪽으로 걸어왔다. 하지만 그의 발자국을 따라 물방울이 튀기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너무나도 유령답게 전력으로 달려온 나를 따라잡았고 이렇게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엄지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내게 왜 이 버릇이 생겼는지 알겠는가, 뭉크?”

  나는 고개를 저었다. 늘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했던 거였다. 그루소 아저씨는 천천히 설명했다.

  “내가 살던 시대에는 자루파라는 계산기가 있었다네. 그 계산기는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로 쓰는 물건이었지. 나는 그 자루파를 능숙히 다루기 위해 매일 연습했어. 그러다 보니 안경을 추켜올리는 단순한 동작도 엄지를 써야만 했지. 나머지 네 손가락이 항상 부르터 있었거든.”

  “무슨 말을……하시려는 거죠?”        

  그루소 아저씨는 세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돈 버는 것에만 매달렸지만 결국 죽기 전 내게 남은 건 이 강아지 한 마리뿐이라네. 저기 묘지 한 복판에서 지금도 떠들고 있을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야. 이승은 이미 덧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 떠나는 것에, 사라지는 것에 미련 가질 친구는 한 명도 없다는 말일세.”

  “아저씨…….”

  “뭉크 자네는 아직 젊어. 아니 어리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이렇게 살아 있고. 오래 전에 이 세상과 관계가 없어진 우리들 때문에 자네가 괴로워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게야.”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계속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아참, 자네 말이야……. 아직도 맥마흔이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나?”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루소 아저씨의 얼굴은 무언가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의 등에 꽃혀 있는 백사자 모양의 창. 그건 군인들이 쓰던 창이 아니야. 당시의 군인들은 독수리 모양의 창을 쓰고 있었다지. 나는 수집가들도 많이 만나봤기 때문에 장담할 수 있다네.”

  “무슨 말씀이죠?”

  “나 역시 뭐라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전해지는 노래에서처럼 황제에게 처형당한 것은 아니라는 소리지. 자네에게 늘 알려주고 싶었네. 기회가 없어 말을 못했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굵직한 장기말 하나가 목 속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 것 처럼 메여왔다. 그루소 아저씨는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지나갔다. 물론 실제로는 아무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의도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네, 그레이브 키퍼.”
  



  관리 사무소로 돌아와 나는 말없이 아까 내동냉이 쳤던 화장품과 장기말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널부러져 있는 그것들을 쳐다보고 있자니 울컥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화장품과 장기말들을 깨끗이 정리한 다음 나는 습관처럼 관리소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앞에는 고아원에서 유일하게 내가 가져온 유리병이 있었다. 먼지 낀 유리병 속에는 조그만 돌들이 담겨져 있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그것은 챔파 형이 나에게 남겨준 유일한 물건이었다.
  이곳에 오기 이년 전에 나는 고아원 뒤 창고에서 연초를 태우다가 실수로 창고에 불을 내버렸다. 고아원에서 쫒겨 날 정도의 대형 사고였고,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이불 속에 들어가 바들바들 떨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무사했다. 아직 다른 곳에 갈 준비가 되지 않은 나를 대신해 챔파 형이 죄를 뒤집어썼던 것이다. 그날 저녁 챔파 형은 원장에게 정말 죽을 만큼 두드려 맞았다. 그리고 다음날 고아원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그는 떠나기 전 나에게 유리병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애지중지 하던 거야. 정말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돌멩이를 하나씩 집어넣었어. 그럼 유리병이 꽉 찼을 때 누군가가 나를 구원해 주리라고 믿었거든.’

  나는 그 때도 아무 말도 못 한 채 챔파 형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뭉크. 너도 외롭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돌멩이 하나씩을 넣어봐. 그럼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거야.’

  이제 유리병에는 돌멩이가 가득 들어있었다. 챔파 형이 떠난 뒤 나는 그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생각이 날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돌멩이 하나씩을 집어넣었던 것 같다. 유리병이 꽉 차기까지는 일 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형.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이불 속에 숨어만 있어.

  그 때였다. 너무나 희미했지만 분명히 어떤 소리가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짐승의 울부짖음 소리. 이곳 브룬타 공동묘지 근처엔 늑대나 살쾡이가 살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그루소 아저씨의 강아지 세푸였다.
  문을 부술 듯이 박차고 뛰쳐나갔다. 어떤 맹수의 발톱이 내 심장을 꽈악 움켜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불길한 예감이 멈추지 않고 뇌리를 파고들었다. 세푸가 짖어대는 소리가 저렇게 처절했던 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뭐지? 아저씨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빗줄기 속을 얼마나 달렸을까. 묘지의 입구 쪽, 그러니까 관리 사무소에서 맥마흔 할배의 묘지 쪽으로 통하는 공터 위에 그루소 아저씨가 쓰러져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하반신이 잘려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유령은 이미 사라질 것처럼 투명해져 있어 사람으로 치면 송장이나 다름 없어보였다. 세푸는 미친 듯이 그의 주위를 맴돌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루소 아저씨! 어떻게 된 거에요?”

  나는 그의 몸을 만질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은 채 감겨 있는 그의 눈을 뜨이기 위해 목청껏 소리칠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유령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야? 무슨 소리야?”

  맥마흔 할배의 목소리였다. 세푸의 울음소리를 듣고 뛰어온 건지 다른 할배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서야 나는 상황을 깨달았다. 그루소 아저씨는 나를 만나고 다른 할배들에게 돌아가는 길에 봉변을 당한 것이다.
  그 때 어디선가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잘 됐군. 한꺼번에 청소할 수 있어서. 사실 보잘 것 없는 유령들을 일일이 찾아다니기는 귀찮았는데 말이야.”

  천천히 고개가 돌아갔다. 묘지의 입구 쪽에 낮에 보았던 건방진 꼬마가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이 좇만한 새끼가. 네가 그런 거냐!”

  머릿 속에 불통이 튀겼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후려갈겨 주기 위해 튕기듯 일어났다. 그리고 녀석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지만……무언가가 내 뒷덜미를 홱 하고 붙잡았다. 후투치 할배였다.

  “너, 저 놈 뒤에 있는 커다란 게 안 보이냐?”

  그때서야 내 눈에 꼬마의 뒤에 서 있는 거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분명 거인이었다. 인간이라면 저토록 몸집이 우람할 리가 없다. 겉보기에도 흉흉한 망토를 걸친 그 거인의 오른 팔에 붙은 무언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분명 뱀 모양의 팔찌였다.

  “마법사……유령?”

  그 거인은 의심의 여지없는 마법사였다. 아니라면 그 짧은 새에 그루소 아저씨를 이 지경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꼬마는 귀찮다는 듯이 비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아까 봤던 그레이브 키퍼구나. 그러니까 내가 말했지. 수호령도 없으면서 건방지게 묘지를 지키는 게 아니라고.”

  수호령. 그렇다면 저 꼬마의 뒤에 있는 마법사가 수호령이라는 건가.

  “그래서? 네놈의 정체는 뭐냐. 대체 뭘 청소한다는 거야.”

  나의 질문에 꼬마는 대답했다.

  “아까 낮에 분명히 봤지. 허섭쓰레기같은 유령 몇 마리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걸. 너 역시 유령을 볼 줄 아나본데. 나와는 천지차이지. 이 몸은 귀족에 고용된 몸. 그리고 이런 묘지들에 남아 있는 유령들을 청소해주는 크리너지.”

  “크리너?”

  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쩌겠어. 귀족들이 이곳을 자신들의 가문 묘지로 택했는걸. 새로운 곳에 이사를 하려면 그곳이 일단 깨끗해야 하지 않겠냐고. 물론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성불시켜 주는 것도 좋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꼬마는 예전의 그 입꼬리만 움직여 보여주는 웃음을 지었다.

  “이쪽이 싸게 먹히거든.”

  그래서 우리 묘지에 있는 유령들을 모조리 죽인다고? 무덤을 없애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존재까지 지워버리겠다고?

  “그것 참 못들어주겠군! 히꾹. 대체 누가 누구 맘대로 죽이고 자시고 한다는 거냐.”

  푼타 할배가 뚜벅뚜벅 앞으로 나섰다. 이, 영감탱이야. 어딜 나서는 거야. 죽고 싶어?

  “내 비록 패잔병으로 수명을 다했지만 한 때 혼팔라스 계곡에서 용맹을 떨쳤던 몸이다. 히꾹. 네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행패냐!”      

  딸꾹질은 그대로였지만 놀랍게도 푼타 할배의 발음은 명확했다. 그런데 꼬마는 푼타 할배의 말을 듣자마자 허리를 젖히며 웃어댔다.

  “가소롭기 그지없구나. 네가 진짜로 혼팔라스 계곡에서 수명을 다했다면 내 뒤에 있는 마법사가 누군지 모르지는 않을텐데? 혼팔라스 계곡에서 누가 왕국군을 전멸시켰는지, 너무 오래 돼서 잊어버린 건가?”

  그러자 푼타 할배의 턱이 갑자기 덜그럭대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주정은 많이 부렸지만 단 한 번도 겁먹은 모습은 보여 준 적이 없었는데, 어찌 된 거지?

  “마, 마법사……카심?”

  그 이름을 들은 로시 할멈이 뒤에서 신음소리를 흘렸다. 카심. 그 이름은 나도 들어 알고 있었다. 단신으로 혼팔라스 계곡에서 왕국군을 궤멸시켰고, 샴발라 장군의 손에 목이 잘려질 때까지 오랫동안 왕국의 공포였다는 사악한 마법사의 이름이었다. 저 꼬마 뒤에 서 있는 유령이……그 마법사 카심이라고?  
  꼬마는 직접 보여주겠다는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없애, 카심.”

  그러자 부동의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거인이 오른쪽 팔을 들었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고대어의 주문이 이어지자 카심의 오른쪽 팔에 감겨 있던 팔찌가 보라색 빛을 내기 시작했다.

  “물러서, 뭉크!”

  그 순간, 후투치 할배가 나를 끌어안고 옆으로 뒹굴었다. 고작 여자들 치마나 들출 줄 알았던 할배가 어디서 그런 영동력이 생겨났던 걸까. 어쨌든 나는 그의 몸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바닥을 뒹굴었고, 일어났을 때는 허망한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푼타 할배의 발목 만이 풀밭 위에 남아 있었다. 그가 늘 갖고 다녔던 술병이 천천히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깃털이 떨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파삭, 하며 술병은 깨어져 없어지고 말았다.

  “이걸로 두 마리째.”

  꼬마의 목소리가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찢어질 듯한 로시 할멈의 비명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보았다. 마법사 카심의 유령이 그 팔찌를 휘두른 순간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푼타 할배의 몸이 산산조각 나는 장면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마법사의 마법은 유령 뿐 아니라 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저 꼬마는 사람의 목숨이라고 해서 귀히 여길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을.

  “오늘 날씨는 영 맘에 안 들어.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빨리 끝내고 가겠다는 뜻의 제스처로 꼬마는 오른쪽 손들어 나를 가리켰다.

  “편리하게도 한 곳에 뭉쳐 있군. 번거롭게 하지 말고 한 번에 없어져라.”

  후투치 할배와 로시 할멈은 내 옆에서 서로 부둥켜안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영혼이 소멸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으리라. 나는 도망칠 곳도 없음을 깨달았다. 내가 발을 떼기도 전에 저 마법사는 잔혹하게 우릴 죽일 것이다. 꼼짝없이 그렇게 된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입이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움직였다.

  “거 참, 오만방자한 꼬맹이로구나. 안 그러냐, 뭉크?”

  뭐야, 이 목소리는……맥마흔 할배? 그런데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온다. 어째서?

  “지금 네 몸을 조금 빌려 쓰고 있다. 그냥 잠자코 있어.”

  내 입에서 전혀 다른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꼬마는 호기심이 생긴 듯 물어왔다.

  “빙의? 수호령도 없는 놈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구나. 보나마나 허섭쓰레기겠지. 그래봤자 도망 못 친다.”

  그 때 내 오른쪽 손이 제멋대로 움직여 꼬마 쪽을 가리켰다. 맥마흔 할배,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지.”

  내 입에서 맥마흔 할배 특유의 허풍 섞인 말투가 흘러나온 뒤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망치에 맞은 것처럼 퍽, 하고 꼬마와 마법사 카심이 뒤로 고꾸라진 것이다. 내 몸을 맥마흔 할배에게 뺏겨서 어차피 말을 못하는 처지에 있기도 했지만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고, 후투치 할배와 로시 할멈 또한 자신의 썩은 이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즉,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내 안의 맥마흔 할배는 말을 끝맺었다.

  “애들은 맞으면서 커야 한다니까.”

  후투치 할배가 간신히 짜내듯이 말했다.

  “뭉크, 아니 맥마흔? 자네……지금 뭐한 건가?”

  물론 무엇을 했는지 후투치 할배가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조차도 같은 것을 묻고 싶었다. 물론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질문이 아닌 대답이었지만.

  “잘 봐두라고. 황제의 앞에서 보여준 이후로 처음 보여주는 거니까.”  

  마법이다. 역사상 가장 파렴치한 사기꾼이라고 모두가 조롱했던 맥마흔 할배가, 지금 마법을 보여준 것이다. 게다가 역사상 가장 흉폭한 마법사라고 모두가 두려워했던 카심을 밀어 넘어트렸다. 도대체 이게 상식으로 가능한 일인 거야?
  꼬마는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감히 내 몸에 흙을 묻혀!”

  꼬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카심이 팔을 휘둘렀고 그의 소매 안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용이 내 정면을 향해 돌격해왔다. 평소였다면 오줌을 지렸을 정도로 섬뜩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맥마흔 할배는 천천히 내 오른쪽 손을 올려 검지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그러자 어처구니없게도 용은 그 검지손가락에 막혀 낑낑대고 있었다. 맥마흔 할배가 훅, 하고 바람을 불자, 용은 신음을 내며 사라져 버렸다. 이럴수가. 좀전에 맥마흔 할배가 보여준 것은 요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꼬마는 입술을 짓씹는 듯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너…… 팔찌도 없는 주제에, 대체 어느 시대의 마법사냐?”

  그러자 내가 한 말은 아니지만, 내 심정을 정확히 표현해 주는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웃음 섞인 맥마흔 할배의 목소리였다.

  “마법사는 무슨. 그냥 사기꾼이지.”





  그 이후로는 믿지 못할 광경의 연속이었다. 맥마흔 할배와 마법사 카심의 힘겨루기는 몇 십분 동안 치열하게 지속되었고 그 여파는 공동묘지 전체에 미칠 정도로 대단했다. 카심이 불러낸 바람의 마법은 몇 십년은 되었을 거대한 나무들도 뿌리째 뽑아냈고, 맥마흔 할배가 휘두른 얼음의 마법은 내리던 빗방울을 모두 얼음 바늘로 바꾸어 버렸다. 어제까지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었던 이 곳 브룬타 공동묘지에서 신화시대에서나 등장할 법한 마법 대결이 일어나고 있었다.

  “뭉크! 위험해!”

  어디선가 후투치 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날로 만들어진 풍차가 날카롭게 회전하며 내 목전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할배, 걱정해 줘서 고맙긴 한데. 이걸 어째. 나도 당연히 도망치고 싶다고! 이렇게 바람의 사자를 소환해 저 풍차를 날려보내는 것 말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맥마흔 할배의 싸움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는데도 전투의 충격과 여파는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죽을 고비를 스무 번은 넘긴 것 같다.  
  먼저 백기를 든 것은 마법사 카심이었다. 맥마흔 할배가 손에서 내뿜은 불의 폭포를 막아내지 못하고 그가 소멸해버린 것이다. 카심이 사라지자 꼬마도 맥없이 잔디밭에 풀썩 하고 쓰러져버렸다. 그때서야 맥마흔 할배는 내 몸에서 빠져나왔다.  

  “뭐해, 할배? 저 꼬마는 아직 살아 있잖아. 끝장을 내야 되는 거 아냐?”

  맥마흔 할배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공터에 몸을 누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 놈아, 내가 끝장나게 생겼다. 뭐, 저렇게 질긴 놈이 다 있누.”

  그때서야 나는 맥마흔 할배의 몸이 지나치게 투명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영감탱이.……왜 이러는 거야?”

  “멍청한 녀석. 난 오래 전에 죽은 몸이야, 인마. 제 갈 곳으로 가는 거다. 뭐, 몇 백 년 정도 지각하긴 했지만.”

  저 멀리서 마법 대결의 여파를 피해 숨어 있었던 후투치 할배와 로시 할멈이 달려왔다. 후투치 할배는 오자마자 사라져가는 맥마흔 할배를 발견하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못난 친구. 진짜 마법사였잖아?”

  맥마흔 할배는 바람 새는 소리로 웃었다.

  “마호프 두면서 천 번은 말한 것 같다, 이 영감탱이야. 그 쌍놈의 마법사들이 황제 몰래 내 뒤통수를 친 거라고.”

  로시 할멈은 세푸를 품에 꼭 안은 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먼저 가는 거야?”

  “그래, 먼저 가는구만. 자네 둘도 그만 티격태격하고 사이좋게 좀 지내. 서로 싫어하지 않는 거 다 알아. 무슨 열일곱, 사춘기도 아니고 말이야.”

  농지거리를 건네는 맥마흔 할배의 말소리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곧 그는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나는 뭔가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 뿐 그걸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생각해 나온 말은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영감탱이. 내가 영감탱이 욕하는 놈들 다 죽여 버릴께. 그 시팔 새끼들이 헛소리 못하게, 그 주둥아리를 그냥…….”

  내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맥마흔 할배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만, 그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파고들었다.

  “아직도 모르겠냐, 인석아. 장기판은 뒤집어지면 그만이야. 난 옛날에 뒤집어진 장기판이라고. 네 놈 장기말이나 잘 간수해라. 알았냐, 뭉크?”



  
  맥마흔 할배가 떠난 뒤 어쩐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후투치 할배와 로시 할멈 또한 곧 성불해 버렸다. 묘지가 폐허가 되서 그들의 보금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인가 생각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둘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으니까.

  “으윽. 머리가 깨질 것 같아.”

  그리고 나는 이 녀석이 깨길 기다리고 있었다. 건방진 꼬마 녀석은 일어나자마자 나를 발견하더니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물론 뒤로 헐레벌떡 기어갔다는 얘기다.

  “뭐, 뭐야? 날 어쩌려는 거냐?”

  나는 마음먹은 행동을 실행에 옮겼다. 따악.

  “악!”      

  내 주먹에 머리를 쥐어 박힌 녀석은 비명을 질렀다. 나는 녀석이 기절해 있는 동안 생각해 둔 말을 꺼냈다.

  “맥마흔 할배만 아니었으면 넌 이미 어제 그 아줌마처럼 팅팅 부어 있었을 거다. 내가 널 가만 놔 둔 건 궁금한 게 있어서야.”

  “구, 궁금한 거?”

  꼬마는 경계심을 가득 품은 채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태연하게 물어보았다.

  “그레이브 키퍼는 뭐지?”

  그거야 묘지기지, 란 대답이 나오면 녀석을 진심으로 두들겨 패 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꼬마는 내가 원한 종류의 대답을 해주었다.

  “그거야 수호령을 데리고 묘지에 잠든 영혼을 지키는 자지. 가끔 우리같은 크리너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고. 하지만 내 수호령 카심이 패한 건 처음이야.”

  녀석은 처음으로 어린애다운, 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문득, 챔파 형의 얘기가 떠올랐다. 이 녀석도 유령을 볼 줄 아는 능력 때문에 키워진 놈일까. 그래서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삐뚤어졌나.

  “그랬었군. 진짜 그레이브 키퍼는 그런 거구나. 영혼을 지켜준다고? 내가 그 귀찮은 영감탱이들의 수호자였었단 말이지. 촌극이 따로 없군. 쳇. 됐어, 가봐.”

  “……뭐?”

  꼬마가 얼빠진 듯 물어보자 나는 오른쪽 주먹을 말없이 들어 올렸고 녀석은 주춤주춤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곤 묘지의 입구를 향해 뛰어갔다. 나는 말없이 그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갑자기 달리기를 멈추더니 먼 거리에서 나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멍청한 놈아. 착각 좀 하지 마!”

  저 녀석이 분명 덜 맞았군.

  “……무슨 소리냐, 꼬맹아.”

  꼬마는 비웃음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유령들이 귀찮다고? 진짜 몰라서 묻는 네가 한심해서 그런다!”

  약이 오르던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저 녀석,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 유령들은 자기가 알아서 깨어난 게 아냐. 네가 억지로 깨운 거지. 안식을 취하고 있던 영혼들을 다름 아닌 네 손으로 무덤에서 불러낸 거라고.”

  뭐라고? 내가 뭔가를 대꾸하기도 전에 꼬마는 휑하니 달려가 버렸다. 그리고 그 녀석이 남긴 한 마디는 큰 충격이 되어 내 머릿속을 뒹굴었다.

  글쎄. 그건 우리도 모르는 것 같네. 왜 잠들지 않고 깨어났는지.

  외롭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돌멩이 하나씩을 넣어봐. 그럼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거야.  

  뭉크, 이 놈. 그렇게 풀죽은 모습은 안 어울려.

  비는 오래전에 그쳤다. 아침 해가 떠올라 폐허가 된 브룬타 공동묘지의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씨팔 놈의 영감탱이들……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남겨 놓고 가면 어쩌자는 거야. 뒤집어진 장기판도 내가 다 치워야 하잖아.
  뒤늦게 이슬이 맺힌다. 다른 곳도 아닌 내 눈 위에.
  내 이름은 뭉크. 그레이브 키퍼다. 무덤을 보호해야 하는 녀석이, 못나게도 오히려 보호를 받고 말았다. 젠장. 나는 세상에서 제일 못난 그레이브 키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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