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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패러독스

목이긴기린그림

선천적 존재 박약증이라는 병이 있다.

먼 미래에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하게 되어, 일단의 시간여행자들이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이 나라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옴으로서 인과관계에 뒤틀림이 생겼다. 타임 패러독스라는 것으로, 원래라면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 존재하게 되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선천적 존재 박약증이란, 쉽게 설명하자면 백투더퓨처에서 점점 사진 속의 사람이 사라져가는 현상과 비슷한 것이다.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천천히 사라지는 현상이다.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선생님! 유진이가 없어요!"

소풍날에는 언제나 이랬다.

"어머나, 그래? 유정아, 미안하지만 찾아 와 줄 수 있어?"

그리고 언제나 내가 찾아오는 역할을 맞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여동생인 유진이는, ‘선천적 존재 박약증’ 환자라고 한다. 이 병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눈에 띄지 않게’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가 인식되지 않게 되는 병, 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나도 가끔 유진이를 잊어버린다. 근처에 있는데도 눈치 채지 못한 적도 있다. 아무래도 그것이 ‘증상’인 것 같다.

"유진아~!"

나는 소리를 지르며 동물원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아!”

사자 우리의 앞에 왔을 때에, 소리가 났다.

유진이가 있었다. 사자 우리의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유진아-!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사자한테 돌을 던지고 있어."

유진이는 기쁜 듯이 말했다.

"돌 던지면 안 돼."

유진이는 괴롭히면 반응해 주는 동물들을 아주 좋아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쉬운 병에 걸렸으니까.

"나, 저기 사자 인형을 갖고 싶은데……."

"돈 없어? 이번에 엄마한테 사달라고 하자."

"안 돼! 엄마도 또 잊어버릴 거야!"

"어쩔 수 없잖아."

그렇게 말하고 나서,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미안…….”

나는 사과했지만, 유진이는 심통이 난 표정으로 내 얼굴을 피했다.

유진이와 나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났다.

그런데도 그 병은 유진만이 걸렸다. 쌍둥이이지만 ‘일란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 같다.

"괜찮아. 언니는 착하니까. 언제나 나를 찾아내 주는 걸."

그렇게 말하며, 유진이는 손을 뻗었다. 따뜻한 손이 나의 손을 잡았다.

"가자, 너무 늦으면 안 되니까."

유진이와 나는 함께 달렸다.

달리다가 한 번 뒤돌아보며, 유진이의 존재를 확인했다. 달리다 보면, 같이 달리고 있는 유진이를 잊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나는 그것이 무서워서 유진이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모두가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은 유진이에 대해서 잊어버렸던 듯 놀란 표정으로 유진이를 바라보았다.

유진이는 눈썹을 찡그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서 유진이와 나는 항상 같은 반이었다. 내가 없으면 선생님이 유진이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5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유진이의 출석을 부르지 않고 넘어갔다.

그때 유진이가 '저 여기 있어요!'라고 큰 소리로 말해서, 선생님은 당황해하며 사과했다.

쉬는 시간에 나와 유진이는 함께 교실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했다. 다 같이 하는 놀이를 하면, 유진이를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거 맛있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유진이가 보여준 페이지에는, 과자 사진이 커다랗게 들어가 있었다.

유진이는 머리가 좋아서, 별로 공부하지 않아도 언제나 시험에서는 100점을 받았다.

나는 유진이에게 지는 것이 분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100점을 받았다.

둘 다 똑같은 점수지만 선생님에게 칭찬받는 것은 나뿐이다. 다른 애들이 부러워하는 것도 나 하나만.

나는 어쩐지 화가 났지만, 유진이는 웃고 있었다.

유진이는 운동신경도 뛰어나서, 달리는 것도 잘하고 철봉운동도 잘했다. 그렇지만 유진이는 운동회 때 달리는 일도 없었고, 수업시간에 철봉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유진이가 손해만 보면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몰래 조례를 빼먹기도 하는데다, 국어 시간에 일어서서 교과서를 읽어보라고 시키는 경우도 없었다. 기술가정 시간에 몰래 과자를 굽는 것을 좋아했다.

남자아이가 나한테 짓궂은 장난을 쳤을 때, 그 남자애를 때려서 도와주기도 했다.

"언니는 인기가 너무 많아서 큰일이야."

언제나 나에게 장난을 걸어오는 남자애를 보며, 유진이는 능글맞게 웃었다.

"아니야! 쟤는 언제나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애야!"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유진이는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전에 교실에 있을 때 들었거든. 저 애가 언니 좋아한대. 다른 남자애들이 놀리는 걸 보기도 했었어."

자기가 있는 교실에서 걔네들끼리 얘기했다며, 유진이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그렇게 말했다.


수업시간 중에 비가 내리는 날이야 여름이면 몇 번 씩 있기 마련이라, 체육 시간에 비가 오면 우리는 대체로 자습을 했다.

나는 평소대로, 선생님에게 허락을 받고 도서실에서 빌린 책을 읽었다.

책에 한참 빠져있을 때, 유진이가 조용히 다가와서 물었다.

"무슨 책 읽어?"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웃을 것 같아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쩍 책표지를 가렸다.

그러나 유진이는 고개를 기웃거리더니 기어코 책제목을 읽기 시작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동화책이야?"

"……응."

"아직도 동화책 읽어?"

유진의 솔직한 의견에, 나는 약간 울컥했다.

"뭔가 언니랑 잘 안 어울려. 이런 거 유치원 애들이나 읽는 거잖아?"

아마, 유진이는 별로 나를 깔봤다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걸 알면서도,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바보 취급하는 유진에게 화를 내버렸다.

"아냐, 안 유치해! 그러는 넌, 애니메이션으로 해주는 거 말고 제대로 읽어본 적 있어?"

"별로……어차피 읽을 나이는 지났고."

계속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나는 일순간 눈앞이 깜깜해질 정도로 화를 냈다.

"아니라니까! 게다가 난 그림이 좋아서 보고 있는 거란 말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깨닫고 보면, 교실 안에 있던 모든 애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반 친구들이 중얼거렸다.

"……가 혼자서 소리를 지르고 있어."

"깜짝 놀랐어……."

유진이는 눈에 띄지 않는 아이다. 의식하지 않으면 거기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없고, 소리를 작게 내는 것도 아닌데 목소리를 알아듣기 힘들다.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으면, 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인식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런 병이다.

나는 아까까지의 분노는 다 잊고 당황해서 말했다.

"아니야, 나 지금 유진이랑 얘기하고 있어……."

그러나 내 말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각자가 내뱉는 소곤소곤 거리는 소리만 되돌아왔다.

"유진이가 누구야?"

"아, 반에 한 명 있어. 유정이 여동생이야."

"혼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유진이랑 얘기하고 있었단 말야!"

내가 소리쳤지만, 반 아이들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은 아이를 낳아야 한다든가 하는 이유로 당분간 학교를 쉬게 되었다. 대신 다른 선생님이 오셨다. 그 선생님은 우리에게 있어 좋은 선생님은 아니었다. 내주는 숙제도 많고, 수업 중에 질문에 대답을 못하면 무척 화를 냈다.

선생님은 학생 중에서도 유진이가 싫은 것 같았다.

확실히 유진이는 출석을 부를 때 시간이 걸리고, 수업에 나와 있는지 아닌지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취급하기 힘든 학생이라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 때문일까, 그 선생님은 유진이에 대해서는 유독 화를 더 냈다.

이를테면 점심시간 때의 일이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복도에서 밥을 받아 교실에서 급식을 먹었는데, 유진이는 식사를 못 받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선생님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셨다.

“자, 이제 감사인사 하고 먹어라.”

"선생님, 유진이가 아직 밥을 못 받았어요."

나는 일어서서 그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자리에 앉다가, 눈썹을 찡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귀찮게 시리……."

유진이는 괴로운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나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진아?"

반 친구들 대부분은 유진의 행동을 깨닫지 못했다. 유진이를 보고 있는 아이도 몇 명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알아차린 건지도 모르겠다.

유진이는 선생님의 옆에 서더니, 퉤엣 하고 국에다가 침을 뱉었다.

"유진아!"

유진이의 행동을 보고 있던 애들이 입을 딱 벌렸다.

선생님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숟가락을 움직였다.

그것을 보던 아이 중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건네 왔다.

"와, 방금 유진이 엄청 대단했어."

나는 수긍했다. 유진이의 무용담에 대한 소문이 한동안 학교에 돌았다. 선생님을 싫어했던 학생들이 단결해, 유진이에게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지금까지 그늘에서 살아온 유진이에게 있어서, 그것은 너무 강렬한 자극이었다.

본궤도에 오른 유진이는, 선생님에게 여러 가지 짓궂은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수업 중에 칠판지우개를 던지거나, 앉으려고 하는 의자를 뒤에서 잡아 빼는 등, 제멋대로였다.

반 친구들도 덩달아 기세가 올라서, 다양한 일을 유진이에게 부탁했다.

나는 유진이를 말렸지만,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관심을 받은 적이 없던 유진이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불안했다. 반 친구들은 재미로 부추길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인식하기 어려워도, 도를 넘어선 악행이 계속되다 보면 발각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우려대로, 결국 선생님은 부모님을 호출해 버렸다.


나는 교문 앞에서 유진이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서 혼자 기다릴 수는 없는 기분이었다.

바닥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는데, 시야 너머가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드니 해가 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석양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해가 가라앉자 조금씩 추워졌다.

스웨터의 소매 부분을 꾹 그러쥐어서 손을 감췄다.

"……."

나는 지금 아마도 화가 나는 상태일 것이다. 유진이를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기대를 받아 행동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런 일을 유진이는 지금까지 할 수 없었다.

모두가 가진 선생님에게의 반감과 유진이의 당찬 성격. 그 둘이 합쳐져서, 모두가 유진이를 인식하고, 일치단결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좋지 않은 결과를 부른 것이지만, 유진이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귀중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해가 가라앉았다. 그즈음에 학교 본관 건물에서 유진이와 엄마가 걸어 나왔다.

나를 찾아내고 유진이는 뛰어들 듯이 내 가슴 안에 안겨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끄윽끄윽 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하도 서럽게 울어서 어쩌나 싶었지만, 돌아가는 와중에 그럭저럭 그치게 되었다.

"선생님이 나보고 못된 아이라고 했어. 병 때문에 언제나 다른 사람들한테 귀찮은 아이로 취급받는데, 여기에 못된 장난까지 치니까 커서 무슨 어른이 될지 모르겠다고 했어."

"유진이는 못되지 않아. 병도 별로 귀찮다고 생각한 적 없어."

나는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어'라는 말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중간에 멈추었다.

깨달아 버렸다. 어른이 된 유진이를 상상할 수 없었다. 유진이의 병이 점점 악화되어 가는 탓일까.

"나는 유진이를 좋아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나는 내 자신의 불안정한 기분과 함께 유진이를 껴안았다.

"응……."

유진이가 대답했다. 엄마는 우리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는 평소대로 통학로를 따라 집까지 걸어갔다. 왼손으로 유진이의 오른손을 꾹 잡은 채였다. 따뜻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일순간, 그 온기가 사라진 것 같은 착각도.

아마 나는 이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중학교.

나와 유진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점점, 점점 유진이는 주위로부터 인식되지 않게 되어갔다.

초등학생 땐 눈에 띄지 않기는 했지만, 반 친구들이 유진이의 존재를 기억해주고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학교에서 유진이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게 되었다.

막 눈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던 눈이, 도로나 인도 위에 차례차례 겹쳐져 하얀 융단을 만들고 있었다.

한낮인데도 공기는 차가웠다.

학교로 향하는 도중에 유진이의 코가 점점 붉어졌다.

유진이가 겉에 입고 있는 옷은 단순한 더플코트인데, 묘하게 귀엽다. 목에 감은 흰 머플러도 어울렸다.

유진이에게서는 로즈메리 향기가 살짝 감돌았다. 내가 유진이의 생일에 선물한 향수 때문이었다. 유진이는 외출을 할 때에는 언제 그 향수를 뿌렸기에, 로즈메리향은 유진이의 냄새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 귀여운 유진이를 볼 수 있는 것은 나와 부모님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데 왜 공들여서 꾸미는 건지 물었던 적이 있다. 유진이에게서 대답이 돌아왔을 때, 나는 물어본 걸 조금 후회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던 것이었는데, 라고.

유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안 보이지만, 그래도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니까. 자기주장 같은 거랄까."

그렇게 말한 뒤 유진이는 웃었다. 그 표정 뒤에 있을 감정을 생각하자 나는 약간 괴로워졌다.

유진이의……로즈메리의 향기조차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다르지 않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몫만큼 내가 유진이를 봐주자.

"와아, 오늘도 귀여워!"

"응, 언니도."

눈이 쌓여 미끄러지기 쉬워진 통학로를 둘이서 걸었다.

그때 뒤에서, 자전거가 눈 위를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전거는 우리 근처에서 속도를 줄였다.

"안녕."

인사를 해온 건 같은 반 친구인 남자애였다. ‘선호’라는 이름이었다. 활달한 성격에, 비교적 근사한 사람.

"안녕."

"응, 안녕."

선호가 쾌활하게 웃었다.

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유진이 쪽을 돌아보니, 유진이는 바짝 긴장한 채 등을 꼿꼿이 펴고 있었다.

"안녕! 잘 지냈어?"

조금 어울리지 않는 인사를 하며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선호는 눈치 채지 못했다.

"오늘 체력장이 있었지."

"그래.”

“기록이 얼마나 나오려나.”

“글쎄.”

칼같이 대답하자, 잠시 대화가 없다가 선호가 떠났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선호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무렵, 나는 유진이를 돌아보았다. 유진이는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나는 유진이에게 물었다.

"너, 저 애 좋아해?"

유진이는 귀까지 새빨개지며, 그러면서도 부정은 하지 않았다.

"응……."

"……그렇구나."

우리는 지각하지 않고 학교에 도착해, 곧장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유진이는 선생님이 기록을 잴 수 없기 때문에, 유진이가 할 때는 내가 도와줘야 했다.

눈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달리기는 체육관에서 실시했다.

유진이는 달리기를 좋아한다.

이번에 재는 것은 1500미터 달리기다.

1500미터를 다 달린다니, 나는 생각하는 것만으로 종아리가 아파질 것 같지만, 유진이는 즐거운 듯 했다.

다섯 명씩 조를 짜서 달리기로 하고, 유진이의 차례가 왔다. 다른 네 명을 보니, 잘 달리는 애들끼리 조를 붙여놓은 듯 했다.

유진이를 포함해 다섯 명이 라인에 서고, 스타트 소리와 함께 다섯 명이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체육관 안이다 보니 여럿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두다다다다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출발지점에서 라인을 정했다고 해도, 달리다 보면 라인은 의미가 없게 된다. 다른 네 명은 유진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유진이는 다른 네 명과 부딪히지 않도록 일부러 바깥쪽 라인에서만 달렸다.

"유진아, 힘내!"

단순히 기록을 재는 거라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소리를 지르며 응원했다. 그렇게 하면, 주위 사람들이 유진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해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윽고 다섯 바퀴째가 지났다. 체육관에서 한 바퀴를 돌면 200미터니까, 앞으로 두 바퀴 반을 더 달리면 된다.

같이 달리고 있던 애들 중 두 명이 선두를 지키고 있고, 다른 두 명은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었다. 언제나 유진이가 제일 앞인데, 오늘은 왠지 제일 뒤를 달리고 있었다.

"유진아, 조금만 더 힘내!"

응원을 던지자 유진이는 달리는 와중에도 여유 있게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남은 한 바퀴 반.

그 시점에서, 유진이는 속도를 올렸다. 다른 네 명도 열심히 달리기는 했지만, 유진이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추월해 제일 빠르게 도착했다. 몇 등이냐가 중요한 경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기뻤다.


나와 유진이는 중학교에 들어갔을 쯤부터 교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를 이어 갈수록, 일기에 조금씩 유진이의 한탄이 늘어갔다.

“언니가 부러워.”

시험 성적이 발표되었을 때, 2등이었던 나에게만 모두가 칭찬을 해줬을 뿐 유진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엄마 생일 때, 유진이가 준비한 생일 케이크를 보고 부모님이 나를 칭찬한 일도 있었다. 그 후 바로 유진이가 만들었다는 걸 깨달은 부모님은, 굉장히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요리는 늘 좋아했는데. 제일 자신 있는 것도 알아채주지 못해."

어쩔 수 없는 병의 악화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방과 후의 학교. 교실 중앙에 있는 난로 근처에 의자를 두고 그림을 끄적이고 있을 때였다.

창문 너머에서는 소리도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교실에는 나 한 명 밖에 없었다.

혼자.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약간 기분이 편안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유진이는 자기가 받는 스트레스를 그대로 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물론 유진이가 괴로운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나는 어딘가 마음 한 구석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병에 걸린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신경 쓰고 싶지 않은 푸념을 듣느라 지친다고.

실수로라도 유진이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역시 무거운 짐이었다.

복도 저편으로부터 사람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었던 복도는, 그 달리는 사람의 숨결조차 명확하게 나에게 전해주었다.

"아, 역시 있었구나."

"……안녕."

선호였다. 남아서 축구라도 하고 있었던 듯, 이 추운 날씨에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 그런데 말이야, 유정아."

"왜?"

선호는 어째서인지 입을 다물어 버리곤,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한참 뛰다가 온 것은 알겠지만, 계속 숨을 크게 쉬고 있었다.

이윽고 진정이 된 건지 어떤 건지, 선호가 고개를 들고는 입을 열었다.

"있잖아, 유정아. 나 너 좋아해."

"응?"

갑작스런 고백에 나는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전부터 좋아했어. 등굣길에 내가 오는 거 기다리기도 하고……. 제대로 말은 못했지만 나 정말 너 좋아해."

"아, 응. 고마워……."

그 때, 교실 뒤쪽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와 선호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깨닫지 못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곧바로 문으로 달려갔다. 거기엔, 로즈메리 향수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그 후로 어영부영 선호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방으로 올라갔다. 2층 침대 위에 유진이가 있었다.

"유진아."

나는 사다리를 한 칸 올라가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유진이는 내 손을 피하며 대신 일기장을 내밀었다.

나는 일기장을 펼쳤다.

말 걸지 마.

글씨에서 유진이의 감정이 전해져왔다.

"미안해."

나는 내 감정이 전해지도록 또박또박 글자를 쓰고, 침대 위에 있는 유진이에게 돌려주었다.

언니가 나쁜 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

다시 돌아온 일기장의 지면에, 꾹꾹 눌러 쓴 글자를 바라보며 나는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서, 어떻게 할 거란 생각도 없이 사다리를 올라갔다. 그냥 지금은 유진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2층 침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없는 건 아닐 것이다. 나에게도 유진이가 안 보이게 되어 버린 것이다.

"유진아?"

내 입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대답이 들려왔다.

"혹시……보이지 않아?"

목소리는 들렸다. 그것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고 말 것 같았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수긍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눈앞에 유진이가 있을 텐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앞이 흐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눈물을 닦아내면 여전히 유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유진이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나는 그걸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야말로 미안. 아니, 그게 아니라……고마워. 언제나……."

유진의 말이 집 앞을 달리는 자동차 소리에 지워졌다.

나는 세계의 무신경함에 머리가 뜨거울 정도로 화가 났다.

조금만 나중에 들렸어도 되었을 것이다. 유진이의 말이 들리는 동안만이라도 조용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견딜 수가 없게 느껴졌다.

흐느껴 우는 내 얼굴에, 따뜻한 것이 겹쳐졌다. 무엇인지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유진의 손가락이, 나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었다.

"미안해, 선호에 대해서는……."

아까 전의 일이 떠올라서 이야기를 시작한 나의 입술을, 유진이가 손가락으로 살며시 막았다.

"어쩔 수 없는 거 알아.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좋아하게 될 수 없는 걸."

그렇게 말하며, 유진이는 울음을 참으며 몸을 떨었다.

어째서 유진이인 걸까.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어째서 세계는, 이렇게 착한 아이를 사람들로부터 떨어뜨려놓으려 하는 걸까.

일요일. 유진이가 과자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선호에게 선물로 주면 좋아할 거라고 했다. 선물이라면 사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니, 내가 만드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만든 과자를 주면 OK했다고 생각되지 않을까?"

"그렇지. 그대로 사귀게 될지도……언니도 좋아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라면 싫지만, 언니라면 뭐, 허락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니까."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유진이의 병이 악화되고 나서, 유진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유진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나밖에 없게 됐다.

식탁에는 유진이 분의 밥그릇도 올라왔고, 잠자리도 정리가 덜 되어 있거나 잘 개어져 있거나 했다. 그것을 보면 조금은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수업은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유진이의 존재를 가장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은, 매일 교환 일기가 한 장 한 장 채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유진이의 일기에는, 어두운 면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늘은 오전에는 고양이와, 오후에는 강아지와 놀았다든가, 그런 일들이 적혀 있었다.

나는 때때로 유진이를 그렸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유진이를 앞에 앉혀놓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초상화를 그렸다. 유진이가 입을 다물고 있다 보면, 유진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될 때가 있었다. 나는 없는 사람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불안함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뭐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불평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유진아, 유진아?"

"왜, 언니?"

걱정에 휩싸여 참지 못하고 물어버리면, 유진이가 그렇게 대답하며 가까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아주었다. 손의 온기와 로즈메리 향기가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언제까지 유진이를 잊지 않고 있을 수 있을까.

그 다음 날 아침에, 식탁 위에는 세 명 분의 그릇이 올라와 있었다.

"엄마, 유진이 아침은 어디 있어?"

엄마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나는 지갑에 넣어두는 사진을 꺼내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유진이 말이야, 이 사진에 있는!"

나와 유진이 둘이서 찍은 사진이었다.

엄마는 사진을 보면서 귀엽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이 점점 흐려져갔다.

"아, 아……."

파악할 수 없는 말을, 감정을 찾듯이 사진 안의 무엇인가를 눈으로 쫓았다.

"뭔가 부족하다고는 생각했었어."

나는 그 모습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점점 보이지 않게 되어간다.

나는 엄마를 껴안았다.

이후 유진의 아침은 내가 만들게 되었다.

유진이가 내 손을 잡았다.


시간은 흘러간다. 증상이 악화되어 가는 와중에도, 유진이는 늘 나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계속 알렸다.

엄마가 프라이팬의 뚜껑을 찾고 있으면, 다음 순간에는 그것이 싱크대 옆에 놓여 있다. 아빠가 신문을 찾으면 식탁 위에 신문이 생긴다.

뜰을 손질하는 게 유진이의 일이 되고 나서, 뜰은 항상 예쁘게 정리되었다.

한 개 늘어난 화분에는 로즈메리가 심어져 있었다.

그것과 고양이가 뜰에 많이 정착하게 되었다. 한두 마리씩 자주 보인다 싶더니, 이제 와서는 10마리 이상이 로테이션을 짜 집에 먹이를 받으러 오고 있다. 그리고 가끔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말한다.

"유진아, 추워지니까 집안에 들어와!"

"조금만 더 있다가!"

"감기 걸려도 몰라!"

"괜찮아, 몸은 튼튼하니깐!"

밝은 소리로 대답해온다. 지금 유진이는 어떤 얼굴일까? 나와 달리 귀여운 걸 좋아하기 때문에, 운동하는 것도 좋아하니까 분명 예쁘게 자랐겠지.

어째서일까, 사라져 가는 것은 내가 아닌데, 제일 괴로운 것은 유진이인데, 가는 실이 심장을 단단히 조이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언니? 또 울어?"

현관 앞에 고양이들이 모여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보이지 않는 다리 주위를 맴돌면서.

"유진아."

고개를 들어도 유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쯤 얼굴이 있는지도 점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진아, 넌 무섭지 않아?"

"응, 괜찮아. 언니는 괜찮아?"

괜찮냐고? 나는 생각했다. 잠시 머리에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유진이를 걱정하고 있으면, 친구가 점점 줄어들었던 것. 유진이의 말에 따라 사귀게 되어, 결국 선호와는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싸우고 헤어졌던 것.

나는 잠시 침묵을 무마하기 위해 웃었다.

"응, 괜찮아."

저녁식사 때, 우리는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부모님과 내가 식사를 끝내가도, 유진이의 밥은 줄어들지 않았다. 반찬도, 유진이가 좋아하는 거였는데 많이 남아있다.

"유진아? 안 먹어?"

대답은 없었다.

혹시 어디 아프거나 해서 식욕이 없는 걸까, 라고 생각해서 방에 가봤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나는 유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집안을 돌아다녔다. 유진이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부탁이야! 대답해줘!"

"유정아, 왜 그래?"

엄마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을 걸어왔다.

"유진이가 없어!"

"뭐?"

엄마는 당황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런 엄마를 내버려두고 현관에 가보았다. 살펴보니 유진이의 신발이 없었다. 당황해서 문을 열어보니,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고양이를 데리고 놀던 공원에 가서 불러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편의점에 가 봐도 없었다.

나는 온 마을을 돌아다녔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가 없었다. 유진이를 찾을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어떻게 하지.

유진이가, 비에 젖어 감기에 걸리면 어떡하지. 의사에게 데려갈 수도 없는데.

모르는 곳에서, 차에 치여 쓰러져 있으면 어떡하지. 찾지 못하면 쭉 홀로 있을 수밖에 없다.

유진아, 유진아.

달리면서 외치고, 외치면서 찾았다.

그렇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자꾸자꾸 무서워지고, 뺨을 타고 흐르는 비에 눈물이 섞였다.

시야가 깨끗해진다고 유진이가 보일 리도 없지만, 나는 흐려진 눈앞을 소매로 닦아냈다.

물을 찰박찰박 튀기며 달리는 나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되돌아본다.

나 같은 것보다, 유진이를 찾아!

화가 나고 슬퍼서, 나는 울면서 돌아다녔다.

유진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거듭될수록,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아니, 찾아내야 해.

나에게는 더 이상 유진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길을 걷는 고양이를 찾았다. 유진이가 고양이를 거느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몇 마리의 고양이를 찾아냈다. 하지만 유진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 벌써 엇갈리거나 한 건 아닐까.

유진이가 나를 무시하고 지나친 건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령 그렇다 한들 어쩔 것인가. 나는 유진이를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제는 유진이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 건지도 모른다.

시야가 흐려졌다.


나는 낙담한 채로 집으로 돌아가,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부모님이 걱정하고 계셨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오니, 침대 위에 교환 일기가 놓여 있었다.

펼쳐져 있는 페이지를 봤다.

'언니를 거리에서 봤어. 찾으러 돌아다녀줘서 고마워.'

눈앞에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일기장에 단지 문자만이 차례차례 늘어갔다. 지금 내 옆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손을 뻗어도 허공을 저을 뿐이다. 분명 있을 텐데, 없다. 뇌가 착란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세계가 비틀린 걸까.

'이제 내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어버린 것 같아.'

"……평소처럼 장난치는 거지? 제발 그렇다고 해줘."

'나도.'

일기장이 물방울로 젖어갔다. 내 것이 아니다. 유진이의 눈물이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일기장을 응시했다

간신히 문자가 다시 쓰여지기 시작했다.

'이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그만두자.'

유진이는 돌연 그런 말을 적었다.

"아냐, 어째서? 그러지마, 유진아."

'이래봤자 괴로워져. 나는 언니도 나를 잊어줬으면 좋겠어.'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누구보다 좋아하는 게 너인데,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어."

'엄마도 나 잊었어. 아빠도. 언니도 곧 잊을 거야.'

"아냐, 엄마도 아빠도 널 기억하고 있어. 가끔씩 잊어버리시긴 하지만, 내가 말해드리면 금방 떠올리셔."

'언니가 날 잊어도, 언니가 날 좋아해줬다는 사실은 사라지는 게 아니야.'

"왜 내가 잊어버릴 거라고 단정하는 거야……."

'게다가 나도 무서워. 언니에게 내 말이 들리지 않게 됐잖아.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계속 멀어져가.'

'언니, 정말 좋아해. 고마웠어.'

"기다려, 유진아. 떠날 것처럼 말하지 마……."

'나는 계속 있어.'

일기 위에, 어느 순간 펜이 올라와 있었다. 일기가 멈췄다. 아무리 기다려도 쓰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유진의 손길이 남아있는 펜을 쥐었다.


그날부터 나는, 게으름 피우지 않고 매일 일기를 썼다.

'오늘은 생일이라 케이크를 먹었어. 넌 생크림보다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했었지. 네 것도 냉장고 안에 넣어놨어.'

'따뜻해졌네. 오늘은 머리카락을 잘랐어. 평소랑은 다르게 머리모양을 바꿔봤는데, 어울릴까 모르겠네. 유진이는 지금, 머리가 많이 길었으려나?'

'오늘은 옷을 사려고 돌아다녔어. 귀여운 원피스가 있었어. 네가 입으면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이제 벌써 더워져가네. 바다라든지 함께 가고 싶었어.'

'너는 최근에 뭘 하고 있어?'

'이제 네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도, 예전 그림이나 사진을 보지 않으면 그릴 수가 없게 됐어. 미안해.'

'너한테 어울릴 만한 머리띠를 샀어. 책상 위에 올려둘게.'

'오늘 시작한 드라마 봤어? 꽤 재밌더라.'

'대학에 합격했어. 내년부터 대학생이야.'


나는 오늘도 내 방에서 일기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예전부터 해오던 버릇이다.

가끔씩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듯이 써버리지만, 최근에는 그런 일도 거의 없어졌다.

왜 쓰기 시작했는지는 잊어버렸다. 뭔가 계기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뭐가 됐건 오늘도 일기를 쓰기 위해 일기장을 폈다.

"어, 펜을 어디에 놔뒀더라?"

그렇게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방금 전에 분명 살펴봤을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나는 펜을 들고 일기를 썼다.

'친구는 기분 탓이라고 말하지만, 내 집에는 요정이 있는 것 같다. 물건을 찾고 있으면 곧바로 발견되고, 뭔가 인기척 같은 것도 느껴진다. 화분에 있는 로즈메리도, 아무도 돌보지 않는데 제대로 자라고 있다. 게다가 왠지, 마당에 고양이가 많이 모여든다. 아무도 먹이는 주지 않는데, 이상한 일이다.'

야옹-

고양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봤다.

"어라, 어디에서 들어온 거지."

고양이가 종종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고양이는 내 앞에서, 사람 한명이 서있을 정도의 공간을 남겨둔 채 멈추었다.

나는 고양이를 빤히 바라봤다. 집 안에 놔둘 수는 없으니 데리고 나갈까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언니.'

그리운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고양이 밖에 없었다.

나는 고양이를 쳐다봤다.

"너, 지금 말한 거야?"

말하고 나서 바보 같은 얘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고양이를 마당에다가 돌려놓고, 돌아와서 일기를 마저 썼다.

쭉 쓰고 보니 마지막 페이지였다. 내일은 새로운 일기장을 사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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