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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리바이어던

2007.06.30 13:5606.30

라반디스 님의 "일기"는 화자가 41세라고 하는데 말하는 투나 사고 등이 아이가 있는 중년 남자로 보기 어려웠습니다. 소재만 있을 뿐 주제도 이야기도 형상화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황당무계 님의 "침입"은 이전에 올리신 “농구화”와 함께 연작 단편인데요. “농구화”에서는 반행신이 귀신을 못 본다고 했었는데 이번 화에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귀신과 마주해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걸렸습니다.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는데 심심했습니다. 이만하면 재밌지, 라고 생각하고 멈춘 느낌입니다. 좀 더 고민해서 이 이야기를 더 재밌게 디테일을 풍부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곱다" 역시 재치는 보이나 성의가 보이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나온 말이지만 이런 이야기면 재밌게 보겠지, 라는 게 묻어납니다. 사자는 토끼를 잡는데도 최선을 다합니다. 옆편이라고 해서 가볍게 써야 한다는 건 아닐 겁니다. 어떤 글이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누군가 읽길 바란다면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건너편”은 글에서 포커스를 맞추고자 한 지점이 어디인지, 마지막 문장에 등장하는 교차로, 개, 여신이 본문과 어떤 상관이 있는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건너편이라는 제목과 건너지 못한 강은 어울리지만 마지막 문장은 본문과 연관성을 찾기 어렵고, 건너지 못한 강에 한이 맺혔다는 게 이야기의 끝이라면 이 이야기는 전혀 맺힌 한을 풀 만큼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대충 읽자면 끝까지 죽 읽힐 수는 있는 이야기인데 하나씩 따져보기 시작하면 아귀가 맞는 게 없습니다. 배경이 명확하지도 않고, 시사하려던 바도 명확하지 않고, 주인공의 행동에 감정이입하거나 조롱할 여지도 없고, 주인공의 행동에서 얻을 교훈이나 멋도 없습니다. 주인공이란 것 자체가 무의미한 옛날이야기체로, 소설이라기보다는 여행지에 써 있는 안내문이나 지역 유래, 게임의 마을 설정, 역사 개관 같은 느낌입니다. 세계에 대한 배경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등장한 폭약도 납득하기 어렵고, 이야기에 '블러드 공작이 노린 바'는 나왔지만 그에 상응하는 반전이나 결말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녹"은 아이러니를 다뤘습니다. 뻔히 알고, 능히 나올 수 있을 만한 상황에선 실수를 안 하다가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기 때문에 실수를 수습하다가 갇힌 아이러니인데요. 아이러니의 실체를 너무 일찍 파악하게 만들어서, 눈에 띄게 하기 위해 한 줄 여백도 두었으나 핵심 아이러니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세한 과정은 생략한다지만 동기에 대해서도 필요한 건 다 서술했고요.
이미 아이러니의 실체도 말해 놓은 상태에서 아이러니에 빠뜨리는 걸로 이야기를 맺어버려 재미가 없었습니다. 이 아이러니에 다른 아이러니를 더하든가, 아이러니를 극복하는 명쾌해서 눈이 번쩍 뜨이거나 보통 사람들은 생각지 못했던 전복적인 해결 방법을 보여 줘야 했습니다. 아이러니만 제시하는 게 목적이었으면, 보통 사람들은 여기서 그런 게 발생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지점까지 나가서 그런 새로운 아이러니를 보여 줘야했고요.
이런 형식의 글은 독자의 의중을 뛰어넘는 아이러니를 보여 주지 않는 한 별 의미도 재미도 찾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그냥 진퇴양난에 빠진 자의 심정을 느끼기엔 이야기 자체가 너무 헐겁습니다.

"눅눅하다"는 외계고깡물의 패러디로 엽편으로 괜찮은 글이었습니다. 담배 이름 패러디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노유님의 "냉장고"는 냉장고에 분명히 넣었는데, 이상하게 안 보이는 경험, 한두 번쯤 해본 사람들 많을 텐데, 그런 점에서 착안해 이야깃거리를 찾아낸 점이 좋았습니다.
간결하게 넘어가야 할 곳과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어 넣어야 할 곳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듯 싶습니다. 예를 들어 다 자라서 출근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면 충분한 지점에서 무의미한 대화가 길었고요.
이야기들이 사이에 무언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건너 뛴 부분들이 보입니다. 일상의 작은 균열을 느끼자마자 냉장고를 갈아 버리고, 갑자기 거지 옆에서 발견되고,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릅니다.
어렸을 때 무서웠다 - 커서는 뭔가 수상하고 기분 나쁜 균열이 있었다 - 냉장고를 가지고 있던 남자를 죽였다.
각 이야기 틈새에 분명 더 사건과 이야기, 심리변화에 대한 묘사가 있었어야 합니다.
진짜 끔찍한 광경이나 일을 겪는 게 아니라 “냉장고” 일상적인 소재가 공포로 전환될 때엔 조금씩 차츰차츰 쌓인 것이 결정적인 계기를 만나야 진정한 공포가 되는 법인데 쌓기도 적게 쌓았고, 그래서 결정적인 계기 자체도 약했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왔을 때 너무 갑작스럽단 느낌도 받게 된 듯 합니다.
‘20년 동안 들려온 그 소리!’에 오싹하기에는 앞부분이 약합니다. 갑작스레 냉장고를 키우고 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주기적으로 먹을 걸 넣어줬거나, 주인공이 저도 모르게 냉장고 소리에 길들었다거나 하는 등의 “키운다.”는 단어에 걸맞은 상황들이 없었기에 마지막 문장 또한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湛燐님의 “싸우는 남자”는 일단 번역체가 걸렸습니다. 특히 대화체에서 그러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입으로 말할 때 “그는 아주 건강했어요.”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대사를 쓸 때 좀 더 사람들이 실제 쓰는 말,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캐릭터에게 어울리는 말을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야기와 지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지루합니다. 감정적인 부분들도 밋밋하고요.

singularity님의 “하늘의 노란 눈”은 죽음 앞에 이른 사형수가 태양을 죽음 자체로 느끼는 순간을 포착한 단편으로 충분한 사전 조사와 연구 없이 쓰기에 어려운 주제입니다. 이런 일은 흔히 겪어보기 힘든 만큼, 더 생생하고 리얼하게 독자를 그 상황 속으로 빠뜨릴 수 있어야 합니다. 글을 쓴 이도 잘 모르는 이야기를 쓸 경우 읽는 이가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꼭 이런 순간을 잡고 싶었다면 관념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데에는 필요한 아이디어와 아이디어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기 위한 연구를 더 해보시기 바랍니다.
‘노란 눈’이라는 중심 아이디어에 할애한 부분도 너무 적었습니다.

Inkholic 님의 “마녀의 조건”은 잔혹동화로 딱히 큰 단점은 눈에 띄지 않는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광고 카피처럼 사소한 차이가 명품을 만듭니다. 분위기를 더 잘 살릴 수 있는 표현들, 무심하고 반어적이면서 인간의 잔인한 심성을 보여줄 수 있는 한두 문장을 더 껴넣을 구석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아쉬웠는데요.
예를 들자면

그래요, 소녀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성품을 지니고 있죠. 궂은일은 도맡아 하고 누군가 소녀를 놀려 대도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해를 끼친 적이 없답니다. <<그나마 그것마저 없으면 아무도 소녀와 눈도 마주치려 들지 않았거든요.>>

이런 문장 등으로 은근히 주인공이 천성이든, 환경에 의해서든 삐뚤어져 있다는 복선도 되고, 마을 사람들의 잔혹함에 대한 암시도 되고 분위기도 더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템포를 유지한 잘 쓴 글이었습니다. 다만 무난하다는 것도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한두 가지 포인트가 없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건필하세요.

Ether님의 “콘드리아”는 전위예술에서 몸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듯이, 관념을 여러 측면에서 구체화하여 총체적인 실체로 그려내는 연습을 한 것 같습니다. 그 여러 측면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 관찰과 형상화를 통해 구체화했다면 마지막에 아픔, 통증, 고통이란 말을 직접 쓰지 않고도 글 전체가 일관된 이미지로 흐를 수 있었을 걸로 보입니다. 의미는 있는 습작으로 보인다, 다만 독자를 위해 내놓은 글이 아니길 바랍니다.

"리바이어던"은 이전에 올리셨던 것보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괴물 안에 있는 상황이 도입부에 바로 나타나 초반 진입장벽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실험적인 형식 차용이나 주제를 밀고 나가는 힘이 좋으며 글에 공을 들이고 노력한 티가 많이 납니다.
과거의 플래시백이 나온다는 건 등장인물의 캐릭터리티와 과거가 진행에 중요한 요소가 될 때가 아니면 시선을 분산하고 진행속도를 느리게 할 수 있습니다. 사제의 경우 특수한 과거를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점이 아쉽고, 사내의 경우 과거가 이야기 전체 진행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데도 길었습니다.
맞춤법이 너무 많이 틀리고 문장에 오류가 많습니다. 탈고를 하실 때 오탈자를 좀 더 유심히 봐주시기 바랍니다.
49호 독자우수단편에 선정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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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er


삶의 쓰라림에 바침.
폴과 척에게 바침.






지금 그녀들은 나를 욕하기에 정신없겠지. 내가 자리에 없을 때면 꼭 그렇다. 흥! 오만방자한 것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이 누구 덕택인데……. 일을 하고, 고기를 썰고, 그 앞에 대령하는 게 누군데 그러는 거야!








리바이어던







어떤 식으로 든 지, 그 거대한 괴물이 더 이상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뭐, 나름대로 비통에 잠긴 희생이 있었지만 국민 의식에 담겨 있던 괴물의 공포에 비하면 그건 좁쌀처럼 아주 미미한 형태에 불과했다. 어찌됐든 괴물에게 희생된 두 명 중 -정확히는 세 명이지만- 한명을 위해 국민보다 조금 더 비통에 잠긴 왕은 10일간의 국장을 지냈으며, 그 기간 동안은 손에서 쟁기를 절대 잡지 말라는 엄포가 내려졌다. 또한, 교단 측에서도 순교자가 된 또 다른 한명을 위해 10일간의 추모식과 미사를 드렸고, 이례적으로 그녀가 괴물에 의해 희생된 지 5일째 되던 날 교황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하기에까지 이르렀다.
10일후 나라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표현하자면 본연의 생생한 현실성을 띄어가고 있었다. 국정은 다시 가시나무처럼 엉켜 상대 정치가를 향해 파고들기 시작했고, 국민의 생활은 주정뱅이의 몸짓처럼 비틀거렸다. 귀족의 생활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아이러니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거대한 괴물 덕택에 감히 침략하지 못했던 이웃 국에서는 국경주변을 다시 쥐처럼 들쑤시기 시작했고, 산적도 다시 들끓기(역시나 쥐처럼) 시작했다. 괴물이 떠난 나라는 정말 씨앗만이 한 방울 맺혀 있는 민들레와 같았다. 누군가가 아니, 어떤 시린 바람처럼, 무심하고 작은 손길처럼, 스치는 발길처럼, 입속에 들끓던 작은 입김처럼, 그런 바늘처럼 가늘고 섬세한 외압에도 무너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
행복도, 비참함도, 두려움과 즐거움도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한 고통은 누구에게나 당연시되었지만. 모든 것들의 위에 있던 왕은 그저 그랬다. 왕비는 슬픔에 빠져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자신역시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힘은 있되, 가진 것은 없었다. 물질은 충족한데, 가슴의 상자는 먼지 한 톨조차 없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냥, 그저 그랬다.
가끔 허전하고, 그저 그랬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시간이 점점 지나가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거대한 괴물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이는 없었다. 괴물은 괴물일 뿐이었다. 결코, 그 어떤 이름으로도 불리지가 않았다. 정말 어떤 명확한 명칭을 갖게 된다면, 그것이 정말 가시화되어버려 자신들 앞에 그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기라도 한다는 듯이, 비좁은 목구멍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가시처럼 연신 목 언저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조심했다. 정말 모두들 조용히, 또, 안개보다 흐릿하게 괴물이 사라져 주기를 바랐다. 다시 호흡하지 않기를, 그동안 게걸스레 먹어치운 수많은 음식과 집들과 소와 양들과 나무와 굴러다니는 통나무들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 주기를, 보물의 둥지에 떠나지 않기를, 어두운 잠에서 결코 깨어나지 않기를…….
제물이 되어 괴물의 뱃속에 잠들어 있을 두 명과 함께, 어둡게.
점점
점점
아니, 정정하자면 정확히는 세 명인 희생자와 함께 점. 점. 점. 어둠속으로 빠져들기를……. 앞으로도 영원히. 하물며 신조차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1. 소제 없음


냉정을 되찾을 즈음. 혹은 허기를 느낄 만큼의 시간이 흐를 정도. 자신은 살아 있고, 숨 쉬고 있으며, 심장역시 온전히 뛰고 있다. 약간의 더위와 함께 허벅지와 겨드랑이 주변에서선 눅눅함이 느껴진다. 바닥에선 이상야릇한 뭉클함이 한치 앞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속에서 담을 넘어가는 구렁이처럼 요동친다. 요동은 느릿한 시소를 타는 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위로……. 아주 부드럽게 솟아오르다가 다시 줄어든다. 아래로 천천히. 느릿하게. 그러다 꽝! 하고 갑작스런 불규칙한 충돌이 어둠속을 강타하면 온몸이 이리저리 튕겨 다닌다.
꾸르륵!! 쾅! 하는 소리가 울리자 바닥이 폭발하듯 솟구치자 그는 “으아아아악!”하고 온몸이 푹신푹신한 어둠속에 이리저리 튕겨 다녔다. 신음소리가 튀기는 육체와 함께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한참 후 잦아들었다.
처음은 공포가 온몸을 지배하였다. 신세를 한탄 할 수조차 없는 공포가 거미로 변해 온몸을 가는 실로 챙챙 감아 버렸다. 자신을 절망적으로 만드는 하나는 자신이 괴물의 몸속에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다친 곳 하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어둠과 외로움과 허기와 공포가 자신을 죽음과 동화되게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은 괴물의 몸속이 자신의 무덤이며, 방황하는 한 영혼의 쉼터가 될 것이다. 그는 이리저리 더듬거리며 어둠속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 있지? 이디에 있지?”하고 얼간이 같은 목소리가 솟아 나왔다.

느릿하게 요동치는 어둠속에서 엎드린 채 이리저리 더듬거리던 그는, 한참 후 바닥에서 마른 잎사귀와 풀들을 주웠다. 그리고 신중히, 또 신중히 손가락을 집중시켜 잎사귀 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뱃속은 꼬르륵 거리며 골은 울음을 내뱉고 있었다.

  “으음. 이것은 담발라." 먹었다가는 고자가 되는 풀이었다.

그리고 다음 풀을 집어 본다.

  “불가시, 온몸이 마비게 되겠군.”

다음 잎사귀.

  "페넬로페, 역시 먹으면 10일 동안 두통과 고열이 나고…….“

다음. 다음. 하나씩 약초의 효과를 말하며 잎사귀를 버리던 그의 손엔 결국 작은 풀잎들이 남았다.

  “레보, 이게 제일 낫군. 배탈 정도야.”

어둠속에서 혼잣말들을 하던 그는 입속에 집어넣어 꼭꼭 씹기 시작했다.

  “맛은 괜찮네.”하고 짧은 감평.

잠시 후. 그의 뱃속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허기보다 더한 통증이 솟아오르자 그는 바닥을 떼굴떼굴 굴러다녔다. 한참 후 다시 바닥을 쓸며 잎사귀들을 찾기 시작했다.

  “먹을 수 있는 것, 먹을 수 있는 것, 먹을 수 있는 것.” 그러다. “죽을 수 있는 것, 죽을 수 있는 것, 죽을 수 있는 것, 죽을 수…….”

지쳤는지 그는 출렁거리는 어둠속에 드러눕고는, 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과거의 모든 고통과 사건들까지 평온한 바람처럼 느껴졌다. 그런 회상의 시작은 철없던 시절의 즐거움에 대하여, 그리움에 관하여, 현재의 절망으로 이어져 결국 극심한 망상으로 까지 번지게 된다.

  “코리나.”하고 사내는 상상의 누군가의 이름을 외쳤다. 자신의 손이 하복부 밑의 자지로 가게 되고, 사내에게 어둠속에서 극단적인 유희거리가 되어버린 허연 단백질이 빠져나갔다.  그런데 "코리나가 누구였더라?” 라고 했지만 생각은 금방 났다. 자신과 약혼을 한 여인의 동생이었다는 것을. 먼발치에서 봤지만 자신의 약혼녀 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약혼녀를 처음 봤을 때 사내는 무척이나 재미있게, 아니 흥미롭게 생겼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어제 과도하게 먹었던 수면초 때문인지 정작 그토록 재미있게 생겼던 약혼녀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약혼녀와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 그녀에게 머리장식 하나를 선물한 생각이 났다. 자신이 약초를 두 달 동안 팔아서 간신히 살 수 있었던 머리장식이었다. 그걸 그녀 동생의 머리에 달아 주었다면 좀 더 아름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꾸르륵 쾅! 하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남자는 공기가 들어 있는 돼지 오줌보가 되어 이리저리 튕겨가기 시작했다. 더욱더 스산한 어둠속으로 말이다.

어둠은 계속된다. 좀 더 길게. 그가 쓰러졌던 곳 보다 좀 더 깊은 곳까지 계속된다. 그곳은 사내가 있었던 곳(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길고긴 괴물의 목구멍의 끝자락인 갑상선 부근보다)보다 조금도 더 안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미집처럼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섣불리 그곳을 벋어날 엄두내지 못했다. 게다가 그곳은 괴물에게만 있는 독특한 신체기관이라 이것저것 수많은 것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이것저것?
그래! 난파된 해적선처럼 이것저것. 괴물이 먹어 치운 모든 것이 그 속에 있어.

거기엔 남은 두 명의 제물도 고스란히 살이 있었다. 한명은 모든 것을 잃어버려 축 쳐진 토끼처럼 굴지만 특유의 오만함이 남아 있는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아버지와 국민들에 의해 자신이 희생이 되어, 그토록 극적이고 고고했던 모든 생활에서 내던져진 체 혐오스러운 괴물에게 먹혀버렸다는 것이었다. 지고한 왕족의 피 덕택에 그녀는 자신의 이름 뒤에 꼭 ‘공주님’ 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길 원했다.

괴물의 몸속에서도 그렇게 불려?
물론! 공주님이지.

  “아르하 공주님 경건한 마음으로 신께 기도드릴 시간입니다.”하고 괴물의 몸속보다 깊은 근심에 휩싸여있던 공주의 뒤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네, 로베트사제”라고 공주는 짧게 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딴 짓이 하찮게 느껴졌다.

제물이 되어 버린 또 한명에 대하여 마저 소개하자면, 그녀는 신에 대해 맹목적이고 정열적이고 숭배의 정신으로 잔뜩 무장한 사제로. 너무나 지나치게 확고한 -온몸이 숭배로 덕지덕지 붙어져 있을 정도로- 정의감에 휩싸여있는 덕택에 자신이 괴물의 뱃속에 있는 지금도 신이 자신을 시험하려 든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자신을 깊고 깊은 어둠에서 벗어나게 해주리라, 순백의 세상에서 기쁨에 겨워 산책하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리라 믿고 있었다.
기도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면 곧 신이 응답할 것이다. 틀림없이. 그렇죠. 아르하, 공주님? 안 그런가요?

“아르하 공주님?”

“네, 로베트사제.”하고 공주는 따분히 대답했다. “지금 기도드릴 준비가 끝났습니다.”

여기서 잠시, 어느 정도 지성이 있었던 괴물의 요구사항과 그녀들이 제물이 된 경위에 관해 비교적 부실하게 설명하기로 하자. 애초에 괴물의 요구사항은 커다란 제물과, 번쩍이는 제물과, 아름다운 제물과, 싱싱한 제물과, 그럭저럭 겉보기에 가치 있는 제물이었다. 괴물은 자신이 조용히 잠이 드는 대가로 100가지 제물을 한 달 이내에 갖다 바치길 원했다.
선정은 인간 스스로. 어때?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씩 제물리스트를 만들었다. 금에서부터 보석, 진귀한 동물, 식물, 그림, 국보 이것저것 귀하다 싶은 것은 모조리 집어넣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괴물의 제물 선정위원회는 고귀한 피도 제물에 들어가야 한다며 68번 항목에 추가해 버렸는데, 사실을 따지자면 68번 항목은 세토프리아산 물방울 다이아 -크기가 주먹만 한- 14개로, 힘들게 제물을 분류한 선정위원회 14명이서 한 개씩 부상으로 가진다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제물선정위원회의 단장의 입에서 조용히 나왔다.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그래서 빼 버리고, 가장 고귀한 피로 고쳤다.
하지만 가장 고귀한 피의 선택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제물선정 위원회는 사흘 만에 99가지 제물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마지막 한 가지 고귀한 피의 선택만 남았는데, 고귀한 피는 뭐로 보나 왕이었지만 자신들의 목이 붙어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선정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괴물선정단의 단장의 입에서 가장 왕족다운 행동을 하는 이가 가장 고귀한 피를 가진 자이다, 라는 말이 나왔다.
당연한말 아닌가?

  “그래서 누가?”라고 주먹만 한 세토프리아산 물방울 다이아를 손가락에 끼고 있는 선정단원 중 한명이 조심히 물었다.

  “처녀이고, 결혼을 하지 않으며, 우리가 세토프리아산 물방울 다이아 반지를 가로챈 것을 왕께 고자질하려한 오만한 셋째 공주이다.”

옳거니!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찬성!

그래서 그녀가 제물로 선택되었다. 그런데 제물로 선택된 것은 공주 하난데 어째서 지고한 사제까지 이곳에 있게 된 것일까? 로베트 사제, 그녀는 사실 공주가 괴물에게 먹히고 나면 방황하지 않고 신의 품으로 갈수 있게 마지막 기도를 드리기 위해 교단 측에서 보낸 사제였다. 제물들은 거대한 괴물의 둥지 안에 옮겨지고 난후. 온몸이 결박된 공주 역시 제물 사이에 끼여 있었다. 사제는 신에게 가기 위한 서른 두 가지기도를 하나씩 공주를 위해 드리고 있던 중이었다. 기도를 드리는 중 사제의 귀에 퍼덕이는 날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날개소리는 마치 이제 곧 제물이 되어 버릴 공주를 신의 품으로 인도하는 냥 크고 거대하게 울려 퍼졌다. 사제는 감동에 겨워하며 막 서른두 번째 기도를 마치고, 하나의 기도를 추가하던 중이었다. 주위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는 듯 바람이 휘몰아치고, 가끔 이해 할 수 없는 기괴한 울음소리도 들렸다. 이윽고 쿵! 하는 울림이 땅에서부터 진동했다. 공주의 몸이며 사제며 제물 할 것 없이 그 충격에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신의 응답인지 뭔지 알 수가 없이 이리저리 구르다 정신을 차린 사제는 자신의 주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만들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그림자를 만드는 존재까지 확인 한 후 사제는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거대한 괴물이었다.
발톱은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크고, 짧은 다리와 배불뚝이 몸과, 성채만한 날개가 막 접히고 있었다. 게다가 저만치 위에는 비늘이 달린 기다란 목이 있었다. 그리고 말로 형용하기 힘든 괴물의 얼굴까지……. 괴물의 눈이 아래로 향하자 사제는 수많은 바늘이 자신의 몸을 찌르는 것과도 같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고개를 수그린 괴물은 공주와 사제를 동시에 먹어 치워버렸다.



2. 복숭아 씨앗이 목에 걸린 사내에 대하여.


  오! 하나님. 일반 민중의 저 빈곤을 보시옵소서.
  열심히 저들을 살피소서.
  아아! 배고픔과 추위, 두려움과 비참함으로 저들은 떨고 있으니
  저들이 죄가 있고 과실을 범했다 치더라도,
  놈들이 저들에게서 탈취해간 재산이 딱하지도 않습니까?
  이제 저들은 풍찻간에 가져갈 밀도 없습니다.
  놈들은 저들에게서 양털과 린넨까지 강탈해갔습니다.
  이제 저들에게서 마실 거라고는 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1484년 투르 정부의 현황에 대하여 왕에게 제출된 한 보고서>

  지고의 귀족성은 다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고상한 품성을 갖춘 고결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
  ……천박한 것은 조금도 그의 마음을 뒤흔들지 못하지.
  


철이 들기 전에는 그런 생각에 몇 번 빠진 적이 있다. 벌들이 이제 막 파고들어 둥지를 틀기 시작하는 푸석푸석한 나무기둥처럼, 주위의 무지한 요소들은 사실 기분 나쁜 악제이며,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것을 자신에게 점점 강요하려 한다는 것을…….
그것은 5살 때부터 소년이 모르는 누군가의 곡식을 거둬들이고 타작을 하고 건초를 말리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귀리나 지푸라기를 섞은 죽을 먹은 것 때문도 아니었다. 처음 그런 생각에 빠졌던 것은 아버지를 따라서 처음 도시로 갔을 때였다. 아버진 그곳은 더러우며 불결하며 신에게 부여받은 하루의 두 끼의 식사조차 제대로 붙잡지 못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하였다. ‘그렇기에’ 자신들은 얼마나 축복을 받았는지, ‘그렇기에’ 영주님께 감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왜 신에게 감사하지 않고 영주님께 감사하는지 소년은 의문이 들었지만 아버지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여전히 영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생활을 계속했다.
사실 그대로였다. 도시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보다 더욱더 거무튀튀한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거리는 거지로 가득했고, 골목마다 어깨 언저리를 소름 돋게 만드는 광경이 손쉽게 펼쳐졌다. 하물며 도시의 비세트르(빈민 수용소)는 얼마나 끔찍하던가.

“이번 집회가 빨리 끝나야 수확시기를 맞출 수 있을 텐데.”하고 아버지는 주위로 수도 없이 모여들기 시작한 군중들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아버지와 같이 어깨엔 곡괭이를 쥐고, 도끼를 매고, 도리깨를 매고, 대꼬챙이를 쥐고, 검을 차는 무리를 보면서 말이다. 무리는 시작도 보이지 않았고, 끝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와 소년은 그 무리 속에 붙어있는 작은 이끼처럼, 때론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처럼 그들을 따라다녔다. 수없이도 많은 무리는 어느 사이엔가 커다란 단두대가 있는 곳에서 한데 엮이게 되었다. 단두대 위에는 몇 명의 사람이 있었고, 그들은 제각각 무어라 불평을 부리고 있었지만 가까이서도 잘 들리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옆에 있던 다른 이에게 비가 얼마나 왔는지 경작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하여 대화를 하거나 소년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나누었다. ‘그렇기에’ 단두대 앞에 있는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아들이며 아버지역시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무리의 앞쪽에서 함성이 들렸다. 아버지도 주위의 다른 이들도 연달아 함성을 질렀다. 어디서부터 피어올랐는지 모를 고양된 울림은 점점 격한 양상을 띠며 솟구쳐 올랐고, 몰려 있던 무리 이성의 족쇄를 풀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고삐가 풀려 버렸는지 들고 있던 곡괭이가 높이 들려졌다. 극도로 혼잡한 움직임과 정해지지 않은 일탈된 행동이 몰려있던 모두의 몸에서 탄식처럼 빠져나왔다. 소년의 아버지도 급히 소년을 들쳐 업고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뛰어 가기 시작했다.
무리는 여전히 시작도 보이지 않았고, 끝도 보이지 않았다. 혼란만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무리가 몰려가는 곳은 무리 자신도 모르는 곳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년이 이해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자신의 영주가 살고 있던 저택과 비슷한, 아니 그보다 큰 저택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는데, 무리들은 제각각 다른 저택을 향해서 몰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쟁기가 사정없이 휘둘려지고, 고함이 파편처럼 튀기고, 누군가의 피가 터져 나왔다. 소년을 들쳐 맨 아버지는 그런 무리사이에 끼어들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은 밖보다 더욱더 극심한 상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소년의 나이로써 그곳은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생전 영주의 저택조차 밖에서 보기만 했을 뿐이었던 소년이었다. 이제 막 훼손되기 시작했지만 그곳은 웅장하고 으리으리하며 화려한 곳이었다. 하지만, 화려함과는 정 반대의 형상이 매캐한 연기처럼 이곳저곳을 쉴 틈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다른 무리가 그러하듯이 눈앞에 보이는 불필요한 것을 훼손시키고, 좋아 보이는 물건들을 가방에 적당히 담기 시작했다. 아니 담을 수 있는 데로 담았다. 그리고는 빠지기 시작하는 무리와 함께 그곳을 벗어났다.
밖은 격렬한 고함소리가 규칙적인 제복을 입은 무리와 폭도들 사이에 불규칙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버진 소년과 함께 불규칙한 고함소리 사이로 멀어졌다. 무리들 역시 불규칙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도시로 가는 길보다 험하기만 했다. 저택에서 훔친 물건들을 등에 지고 있던 아버지는 온전한 길이 아닌 산을 따라 숲을 따라 가기만 했다. 이윽고 집에 도착했을 때의 아버지의 얼굴엔 희열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소년역시 이빨을 드러내며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피부 안쪽에, 가슴속, 흉곽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상자가 규칙적으로 달그락 거렸다. 그 소리는 목과 턱을 타고 귀와 이마와 입술을 덮어 온몸을 붉게 만들고, 희뿌연 증기를 입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하하하.”하고 아버지가 웃었고, 소년도 웃었다.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소년의 정신은 좀처럼 일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마음이 복잡했고, 불편했으며 어딘가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으리으리한 저택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비이상적인 세계에 갔다 온 것 같았다. 그것은 저택의 화려한 외양이 아닌 폭도들의 행동과 저택의 무력한 모습이 맞물린 형상 때문이었다. 그곳은 자신들의 욕구를 위한 곳이었고,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뺏어 갈수 있는 곳이었다. 주인은 곡괭이를 든 자신들이었다.

몇 달 후. 다시 한 번 무리가 도시로 몰려갔다. 소년역시 아버지와 함께 무리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모든 것이 전과 다른 양상으로 번져 가기 시작했다. 똑같이 단두대의 연설과 무리의 함성, 약탈로 이어졌지만 규칙적인 제복을 입은 이들의 숫자가 폭도들을 압도하였다. 발길질이 이어졌고, 고통이 시작되었다. 소년역시 이마에 피가 쏟아지고, 아버지역시 시퍼런 얼굴로 소년을 들쳐 매었다. 이번역시 전과 같이 불편한 산과 숲으로 돌아 집으로 왔다. 이젠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몇날 며칠을 앓고 나니 다시 그런 곳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몇 달이 지난 후 무리가 다시 도시로 몰려갈 때쯤엔 그런 생각이 싹 지워졌다.
이번역시 아버지와 소년은 무리 사이에 끼어 있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무리는 시작도 보이지 않았고, 끝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전과, 그전의 전과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단두대 위에서 선동하던 이는 그대로인데 그는 어떤 두루마리를 펼쳐들고 외치고 있었다. 소년도 아버지도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고 질 들리지가 않았다. 물어, 물어서 앞쪽에서 들려온 몇 마디의 외침이 아버지의 귀로 옆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국왕이 노동법(여기서 말하는 노동법은 노동급료의 상한선을 정해 임금을 묶어 놓은 법을 말한다)폐지를 승인했다네.”

그게 뭐지? 소년의 나이 또래가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고, 소년의 아버지 역시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단두대 앞에 선 이는 기뻐하라며 왕의 도장을 찍은 서신들을 각 지역 무리의 우두머리에게 주며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이제 끝났군.”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잘 됐네 그려.”하고 역시나 누군가가 말했다.

수많은 무리들이 해산하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많은 무리들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남아서 제복을 입은 이들과 여전히 대치한 체 으리으리한 저택을 흘겨보고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역시 남아있는 무리와 해산하는 무리사이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결국 해산하는 무리에 끼여 도시를 벗어났다. 돌아오는 길은 평소와 다른 평범한 길이었지만 소년의 마음은 저택의 으리으리한 흔적이 미련처럼 남아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 역시 그와 다르지가 않았다. 다시 일상은 계속되었다. 귀리와 지푸라기를 섞은 죽을 먹고, 누군가의 곡식을 수확하는 그런 일상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소년과 아버지가 있는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감사의 생각도 충성심도 그다지 들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조금씩 나태해져만 가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생활은 조금씩 낳아지고 있는 듯 한데 어째서 그런 것일까? 소년은 그것보다 철이 들 무렵까지도 가끔씩 다른 생각하였다. 그때 해산하지 않고 남아 있던 무리들은 대체 어떤 이유로 남아 있었을까? 아니, 자신이 집으로 돌아온 후 어떤 일이 있었을까? 혹시 그들의 마음속에는 소년과 소년의 아버지와 같이 아쉬운 그런 마음이 깊이 남아있어서가 아닐까?
소년이 철이 들고 난 이후에도 무리는 가끔씩 도시로 몰려갔다. 그 역시 그들 사이에 끼여 있기도 했고,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씩 수확 철이 임박해 빠질 때면, 이해하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는 그런 질타와 같은 말이 소년에게 쏟아졌다. 그런 일들 외에 그가 도시에 가는 일은 없었다. 요즘 그는 약초를 캐기에 바쁘다. 노동법인지 뭔지 모를 것이 폐지된 이후 농사를 짓는 일이 예전보다 괜찮아졌지만. 심마니의 일만큼은 아니었다. 깊은 산을 타고 넘나들다 진귀한 약초를 캐 횡제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괴물이 나온다는 불길한 소문이 더해진 덕택에 잘 가지 않는 숲엔 비싼 약초들이 널려 있었다.
오늘 역시 한가득 캘 수 있을 기대감에 그는 벌써부터 부풀어 올랐다.






3. 상징적인 모든 것의 포기로


-1-


사내는 어부의 그물에 갇힌 문어처럼 느릿하게 꿈틀거리기만 했다. 미끄러져 가는 괴물의 목구멍에 허우적거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그냥 그렇게 괴물의 기관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신은 아직 수면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지 가끔씩 깜빡거리는 눈꺼풀이 그것을 증명시키고 있다. 결국, 어둠보다 더욱더 극심한 허기가 사내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 어쩌면 혼절해 버리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라도 하듯 사내는 힘에 부친움직임을 잠시 중단해버렸다. 이대로 자신은 어떻게 되어 버리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이미 자신은 괴물의 몸속에 들어온 후 살아 있음이 증명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죽음만 기다리면 된다. 여태껏 가시화 되지못한 죽음이란 형상은 이제 곧 남루한 두건을 쓰고 나타날 것이다. 지어내기 좋아하는 이들이 말하듯 붉은색인지 고동색인지 윗자락으로 갈수록 그 형태가 불분명해 지는 두건 속엔 식별되지 않은 해골얼굴이 있음이 틀림없다. 사내의 앙상한 뼈마디 보다 더욱더 가는 손가락에는 녹슨 낫을 질질 끌고서, 반대편에는 그와 같은 앙상한 손마디를 구부리며 자신에게 손짓 할 것이다. 꽤나 반가운 듯이. 혹은 익살맞은 인형극에 나오는 피에로처럼 팔을 흔들겠지. 그리고 그 속에 가려진 누런 두개골이 딱딱거릴 것이다.
  어서와.

사내의 정신은 아득한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쓰디쓴 노역보다 조금 더 느긋한 날이 시작되기라도 한 것처럼. 사제와 공주는 눈을 감고 머리를 조아렸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지겹도록 외치는 그 말. 내일도 그러겠지. 아니 오늘이 언제인지 알 수도 없는 날에도 매일처럼. 삶의 끝이 죽음이 될지, 신에게 구원될지 모르는 아득한 시간의 대부분이 그렇겠지.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한심한 톤으로 끝맺음한 기도 후. 그녀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의 식량은 괴물에게 바친 제물 100가지 중 54번으로 선정되었다. 러시안 왕국의 진기한 고양이인 제물 54번은 그 오묘한 블루톤의 털의 색깔 덕분에 오랜 시간동안 왕의 사랑을 독차지 받았다.
물론, 한때는 애완용이었다.
먼저 13번 제물인 왕가의 보검으로 고양이의 털을 깎고, -고양이는 괴물에게 먹힌 후. 어둠속에서 울리는 그 불길한 울음소리 때문에 얼마안가 공주에게 목이 비틀어지는 죽임을 당해 버렸다.- 목을 잘라 피를 뽑고, 뼈를 발라내고…….
먹는다.  

  “최악이야.” 맛은 그런대로. 감미로운 맛은 전혀.

먹는다.

  “신의 시험입니다.” 감상역시 그런대로. 촛대가 있는 청동제단과 식탁도 전혀.

공주와 사제는 꾸역꾸역 자신의 입속에 잘라버린 러시안 왕국 산 블루톤의 고양이를, 먹는다.
식사를 끝마친 후 어둠속에서 다시 기도가 시작된다. 그리고 난 다음 어떤 한탄과도 같은 사제와의 잡담이 이어진다. 허구한 날의 아름답던 삶에 대해서, 자신이 입었던 벨벳산 드레스가 어땠는가에 대해서, 이 축축함에 대해서, 내일역시 사라지지 않을 어둠에 대해서, 이제는 지리멸멸해진 희망에 대해서…….
자, 그래도 남는 시간엔 뭘 하지?
그런 멜랑콜리가 주체할 수 없었던지 오늘 공주는 용기를 내어 산책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빛조차 존재하지 않는 어둠속이었고 미로로 꼬인 괴물의 몸속이었기 때문에 조심히, 아주 조심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대담함과 용기가 어둠과 익숙해진 만큼 흘러나왔다. 공주는 가끔 원래의 공간이 않아있던 사제를 불러 위치를 확인하였다.

  “로베트 사제! 그 자리 그곳에 있습니까!”

그럼 한참 후 사제의 응답이 들렸다. 짧거나 간결하게, “네, 신이 저를 구원하지 않는다면 저는 언제나 이 자리에 있을 겁니다.”라고 응답한다. 그렇기에 두려움의 고삐가 좀 더 헐거워진 공주는 좀 더 먼 어둠속을 탐험하였다. 풀잎처럼 달콤한 향내 따윈 일체 배제한 독특한 향취가 주위에서 자신의 후각을 이미 마비시켰다. 여전히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자신의 키 보다 높은 동굴처럼 생겨먹었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은 축축하고 무른 단단함을 가지고 있어서 돼지의 창자처럼, 아까 먹은 고양이의 염통처럼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이것은 얼마나 우울함이 가득하던가. 창백하게 핏줄이 팽팽해진 고양이가 자신의 입속에서 우걱우걱 그 형태를 잃어갔다니. 하지만, 시각화 되지 못한 모든 것은 점점 자신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작은 좁쌀만 한 불빛이라도 자신의 식사시간에 주위를 맴돌았다면 그동안 장속에 들어갔던 모든 것을 게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모든 감각은 청각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 외의 것은 모두 거짓이고, 축축하고 무른 형태이다. 자신의 몸 역시 주위의 동굴처럼 짓무른 형태였다. 그 어느 것 하나 쓸모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는 어둠까지도 자신에게 어떤 공포로 다가오지 못했다. 자신 역시 어둠과 성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청각과 손에서 가끔 느껴지는 무른 촉각으로 이루어져있다. 특히나 음성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일한 수단이며 공주인 자신의 완벽한 상징처럼 느껴졌다. 공주는 사제를 불러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잊은 채 좀 더 먼 곳으로 나아갔다. 공주가 다시 멍한 정신에서 돌아왔을 즈음엔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사제의 위치가 어딘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로베트 사제! 어디에 있습니까!! 로베트 사제!”하고 공주는 문득 솟아난 불안함에 사제를 불렀다. “로베트 사제!”

하지만, 아무리 사제를 불러도 사제는 응답을 하지 않았다. 어둠속 사제와의 거리가 자신이 살고 있던 궁전보다, 나라보다, 자신과 아버지인 왕의 거리보다 멀게만 느껴졌다. 공주는 갑작스럽게 엄습해온 불길함의 씨앗이, 마침내 해일보다 커진 것에 몸서리쳤다. 사제가 응답을 하지 않는다니!

“로베트 사제!!”

공주는 목구멍에서 쏟아진 신음을 바닥으로 흘러내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돌아가야 했다. 이어두운 곳에서 외톨이가 되는 것은 절대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주위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공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엎어지더니 한참동안 물렁물렁한 괴물의 몸속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으흑! 로베트, 로베트 사제…….”

그 어떤 때 보다 절망적인 눈물이 나오고, 죽은 고양이를 생각해도 나오지 않던 구역질도 밀려왔다. 공주는 한참동안 구역질을 하다 엉금엉금 기어서 자신이 왔던 곳이라고 생각하는 곳을 되짚어 가려 했다. 그때였다. 뭐지? 기어가던 공주의 손끝에 어떤 묵직한 감각이 침범했다. 자신이 아까 걸려 넘어졌던 그 어떤 무언 가였다.  

“로베트 사제!”하고 공주는 그렇게 외치곤 그 무언가를 와락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로베트 사제일 리가 없지 않은가. 껴안고 보니 공주는 자신의 어깨에 느껴지는 꼬불꼬불한 턱수염을, 깡 말라지만 단단한 체격을 느낄 수 있었다. 공주는 놀라 다시 껴안은 상대를 내팽개쳤다.
그건 다름 아닌 약초장이 사내였다.

  “거기 누구냐!!”라고 외쳐 보았지만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공주는 조심히 다가가 상대의 몸 이곳저곳을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내라는 것과 정신이 없지만 심장만은 여전히 뛰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떡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한참을 어떡해. 라고 중얼거린 공주는 다시 외쳐대었다. “로베트 사제! 로베트 사제! 로베트 사제! 로베트 사제!”

미치도록 질러 대었고, 희미하나마 이슬같이 투명한 목소리라도 되돌아오기를 귀기울여대지만 그 어떤 외침도 돌아오지 않았다. 공주는 사내의 몸을 부여잡고 끙끙대었다. 결국, 응답지 않는 공허한 어둠이었고, 길을 잃어 버렸고, 사내를 만나 혼돈이 가중되었다. 두려운 재난으로 다가오기 시작해버린 죽음을 한탄하면서, 삶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지막 심정만이 목이 쉬도록 내지른 몸 깊숙한 곳에 작게 남아 있었다.

‘로베트 사제.‘


-2-


공주가 있는 그곳엔 어둠이 있고, 어느새 자신은 두건을 쓴 술래였다. 아니, 자신은 두건을 썼고 그로인해 주위는 어두컴컴해져 버렸다.
그래, 술래야 술래!
웃음소리가 들려? 아니, 전혀.
날 잡아보란 소린? 전혀.
박수소리도? 아니.
거대한 함선의 마스트에 대롱대롱 걸려 있다 해도 이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손에 잡히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쥐어보는 아기처럼 공주는 사내의 목을 끌어안고서 어두운 괴물의 굴속을 헤쳐 다녔다.

‘공주님?’

“?!”

공주는 환청을 찾아 헤매는 이처럼. 주변의 작은 들썩거림에도 심하게 몸을 떨었다.

‘공주님 이쪽이에요’

복잡하게 엉킨 실에 걸린 개미처럼 이리저리 자신의 위치조차 확인하지 못한 체 남은 힘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던 몸은 점점 느려 터져 갔다. 낮도 밤도 아닌 완벽한 어둠은 여전하다. 중얼거린 목에서는 쇳소리가 나오고, 불편한 허벅지엔 통증이 퍼렇게 맺혀있었다. 종아리 밑, 바닥은 점점 질퍽거렸다. 이젠 뒤죽박죽 한 머릿속엔 얼마든지 낙서가 가능했다. 적국에 불모로 시집간 언니는 자신보다 얼마나 행복하던가. 알아듣지 못할 소음 속에서도 깃털침대에서 잠을 잘 테고, 빛이 내리쬐는 정원에서 산책을 할 거야. 그럼에도, 자신의 불행을 한탄할 테지. ‘끈적거리는 늙은 사내 밑에 깔려 난 일생을 고통 속에 마감하고 말거야.’ 한심한 년! 아바마마는 나를 버리셨어. 그는 저주받아 마땅해. 지옥불 구덩이 속에서 뼈까지 녹아 없어져라.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도록! 모조리 더럽혀지고, 엉망이 되어버려라!
온갖 상상과 혐오 섞인 저주를 퍼부어 버리던 공주는 결국 기진맥진한 척추를 수그린 채 쌕쌕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은 미묘하게 뜨겁고, 달팽이의 체액과도 같은 것이 무릎 위만큼 차올라 물결치고 있다. 공주는 이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처량하고 분했다. 자신이 느글거리는 괴물의 몸속에서 썩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약 오른 아이처럼 파르르 떨던 자신의 눈에 눈물샘이 마르지 않은 것도 화가 났다. 이성이 마비되어 버린 몸은 급기야 사내를 팽개쳐 버렸고,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거나, 동물처럼 소리를 지른 입에선 추잡한 욕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내지른 발길질이 벽을 때릴 때 마다 음산한 증오의 색깔이 머리를 덮어 버렸다.  

  “으아아아아! 모두 죽어버려라!”

수없이 포개져 있는 어둠속에서 질식할 것 같은 분노에 휩싸인 공주가 저주를 쏟아내었던 것이 원인이었을까? 공주가 아닌 다른 무언가의 소리가 질퍽한 곳에서 흘러들어 왔다. 통금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전, 짧게 끊기는 나팔소리처럼 그 울림은 어딘가 불규칙 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부욱! 부욱! 부욱! 부우욱! 하고 바닥이 물결치고 있었다. 공주는 행동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부욱! 부욱! 북! 부욱! 부우우욱! 소리와 함께 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닥이 더욱더 크게 출렁거렸다.  

  “!?”

미약한 진동에서 시작한 지진이 점점 과격한 형태로 다가왔고 어딘가에서 밀려들어온 질퍽질퍽한 파도가 공주와 사내의 몸을 덮쳐버렸다.

사제는 공주에게 닥친 위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본래의 자리에서 여전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신이시여 저희를 구원해 주소서. 어제와 다른 내용의 같은 주제. 내일과 다른 내용의 같은 주제. 오늘은 당신이 주신 일용할 고양이를 감사히 먹고, 경건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신이여 우릴 구원해 주소서.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고. 신이시여 우릴 구원해 주소서.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고. 공주님은 왜 아직 안 오는 것일까? 신이시여 우릴 구원해 주소서. 아! 아! 생각해 보면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르는구나. 성 코프니스의 탄신일 축제에 가까워 졌을까? 그렇다면 금식기도를 준비해야 할 텐데. 신이시여 우릴 구원해 주소서.

공주님은 왜 아직 안 오는 것일까?

사제는 그녀가 자신 보다 먼저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잠깐, 공주 먼저 구원받다니?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지. 절대! 절대! 그럴 리 없지. 신이시여 우릴 구원해 주소서.
그래, 단지 길을 잃어 버렸겠지. 신께 미사를 드릴 때 마다 꿈틀거리며 잡생각에 빠지는 공주님이 신께서 거두어 드릴 리 없지. 암! 그렇고말고. 길을 잃어 버렸을 거야. 그래, 그렇고말고. 그렇고말고.
응!?

  “공주님!!”하고 사제가 퍼뜩 일어나 소리쳤다. “공주님! 어디계세요!”

아무리 외쳐보아도 공주의 응답은 티끌조차 되돌아오지 않았다. 자신과 공주는 별개의 공간에 있었고, 별개의 공상에 뒤덮여 서로에게 무심해져 버렸다. 사제는 방방 뛰며 한참동안 공주의 이름을 외쳐보다 다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신이시여 공주님을 불쌍히 여겨 이곳으로 인도해주소서. 신이시여.” 신은 자신의 기도를 응답할 것임이 틀림이 없다. “신이시여 당신의 낙원으로 가기엔 공주님은 아직 어리고 무지합니다. 혹, 어두운 지옥 굴로 떨어져 고통 속에 보내기에도 너무 안타깝습니다.” 사제의 목소리는 갈수록 다급해졌다. “어휴! 당신도 참 너무하십니다. 온통 거무튀튀한 곳에서 저만 두고 그녀를 데리고 가시면 어떡합니까. 그녀가 미우셨나요? 길 잃어버린 불쌍한 새끼 고양이 같은 공주를 이곳으로 다시 돌려 보내주신다면 틀림없이 충실한 당신의 종으로 거듭나게 만들겠습니다. 그녀의 뼈가 다 보이도록 금식 기도를 드리고, 그녀의 입에선 당신을 찬양하는 말만 내뱉도록 하겠습니다. 틀림없이!”

소리가 들렸다. 구덩이에서 끓어오르는 물거품 같은 소리가 사제의 서글픈 음성을 멈추게 만들었다. 신이 내 기도를 응답하신 것이다. 사제는 기도를 멈추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어두운 굴속에서 성급히 이동했는지 벽에 부딪혀 넘어지고, 미끄러져 넘어지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아교만큼이나 끈적끈적한 액체가 이것저곳에 덕지덕지 흘러넘치고 있었다.

  “공주님! 공주님!”하고 다시 사제는 공주를 불러 보았다.

조심히 움직이지 않으면 흘러들어온 끈적끈적한 물결에 몸도 가누지 못할 것 같았다. 이건 대체 어디서부터 온 거람. 다행히 엄청난 괴물의 분비물은 공주를 사제의 앞까지 당도하게 만들었나 보다 공주는 사제의 목소리에 작게 응답했다.

  “사제 여기야. 여기에 있어.”하고 괴물의 분비물을 잔뜩 들이켰는지 연신 캑캑거린 공주의 음성은 사막처럼 갈라지고 메말라 버린 것 같았다. 음성이 수십 년이 지난 것처럼 늙어 버려 이런 굴속이 아니면 공주인지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랴. 이곳은 괴물의 몸속이고, 사제는 이곳에 자신과 공주밖에 없다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 것을.

공주가 응답한 방향으로 뛰어든 사제는 공주를 꽉 끌어안았다.



4.사고의 유형.


  □ 등장인물
사내 : 약초를 캐러 다니던 평범한 시골 청년.
아르하 공주: 괴물에게 제물로 받쳐진 도도한 공주
로베트 사제: 몹쓸 재앙 혹은 시험에 휩쓸린 충직한 신의 여종.

  □ 무대장치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축축하고, 적당하지 않을 만큼 어두운 괴물의 몸속. 아니면 그냥 조명을 다 꺼버리고 온통 깜깜하게 만들던지 말든지. 그런 것을 내가 알게 뭐람. 죽은 고양이는 내 책상 서랍 맨 아래에 있으니 꼭 챙겨갈 것.
<주의>객석에 팝콘과 음료를 팔지 말 것. 12세 이하 아이들을 입장시키지 말 것. 권총을 소지한 은행 강도가 찰리 우드스톡 브라운을 찾으면 적당히 돈을 쥐어주고 필로폰 2g을 받을 것.

제 1막

Si todo Hiciera Crack(CRACK)의 마지막 간주가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사내는 적당한 자리에 고통에 찬 표정으로 누워 있다가 가끔씩 얼굴을 더욱 찌푸리며 신음소리를 흘러댄다. 공주는 사내의 옆에 앉아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옆에 사제역시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무대가 깜깜하기에 세 사람의 모습은 전혀 알 수 없다.(어둡기에 모두 귀찮다는 듯이 드러눕거나 대충 꾸부정하게 앉아있을지도 모른다. 알게 뭐람.)

해설 : 사내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아니 깨어날지, 심연의 어둠속으로 호흡이 사라져 버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사내의 의식은 몽롱한 공간에 떠다니고 있었고 죽음의 한 귀퉁이에서 흘러오는 강을 건너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연옥으로 안내할 뱃사공과 흥정을 하고 있지만 영 미심쩍은 얼굴을 하고 있던 뱃사공은 동공을 확인할 수 없는 눈으로 사내를 응시한 체 안 된다면 손을 내 젓고 있었다.

로베트 공주 : (공주는 어찌할줄 몰라 한다.)아직까지 깨어나지 않으니 어쩌면 좋아.

  해설: 사제는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듯이 사내를 더듬었다. 축축한 사내의 이마가, 목이, 가슴에서 온기가 느껴지고, 피가 맴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로베트 사제 : 오! 신이시여. (‘사제는 사내에게 마시다 남은 고양이 피를 부어준다.‘)

해설 : (공주는 사내의 가슴에 귀를 가까이 한다.)가끔 사내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보던 공주는 이 사내가 그리 늙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런 사실들이 여러 가지 상상으로 뻗어나가게 했다.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은 아닐까? 그것은 재난에 대한 공포로 노심초사하던 자신들에게 내린 신의사자일지도,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내려진 환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공주 역시 ‘사내에의 입에 남은 고양이의 살점을 물려준다.‘)

해설: 사제가 공주에게 금식기도를 시킨 후 공주의 목소리는 흙속에 파묻힌 녹슨 쇳조각처럼 일그러져 버렸다. 신에게 내뱉은 참회의 한마디가 모래가 쏟아진 듯, 쇳가루가 흘러내리는 듯 했다. 게다가 가끔 신경질이 날 때면 부어오른 악어 같은 음성이 괴물의 몸 안에 떠돌았다.
사제는 악마가 공주의 목에 자리 잡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르하 공주 : (객석을 바라보며 최대한 돼지 멱따는 소리로 말한다.)당신은 어디의 누구인가요? (아무리 가다듬으려 해도 공주의 목소리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자 신경질 난 공주는 축 늘어진 진흙이 되어 괴물에게 바쳐진 제물 한 귀퉁이에 돌아서 버렸다.) 나는 변해 버렸어.

(토라진 공주는 물에 빠진 토끼처럼 행동한다. -낙서로 북북 휘갈겨 쓴 흔적이 있다. 거기엔 ‘어둠속이니 알게 뭐람.’ 이라고 적혀 있다.- 사제는 구석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낙서.- )

해설 : 괴물의 몸속에 들어온 이후로 어느 것 하나 정상인 것이 없었다. 사제의 기도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때는 공주 자신이 정말 어떠한 상태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때나마 가장 느긋하게 느껴오던 깊은 잠에 빠진 것은 아닌가? 아니면 자신이 이미 죽은 것은 아닌가? 미각은 점점 굳어져 가고, 청각만이 점점 요란스럽게 발달한 토끼라도 된 것같이 온통 붉은 눈으로 충혈 되다 못해 검 해진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아르하 공주 : (조금은 조급하고 우울하고 시궁창에서 건저 올라온 것 같은 목소리로 사내를 내려다보며 중얼 거린다.) 어떻게.

해설 : 사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도 없었다. 아니 하루의 모든 것은 어느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다. 고기를 먹던지, 기도를 하던지, 자신만의 어둠에 빠져버리던지. 순서가 뒤바뀌는 법은 없었다. 기도는 고기를 먹기 전, 관념에 빠진 대화와 상상은 기도 후. 잠은 그 외의 모든 것을 마친 후. 상실감은 그 사이사이 불편한 심장이 뛰는 만큼.
그럼 사내는 어디에 분류해 놓지?

아르하 공주 : (확신하지 못한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어떻게…….

해설 : 공주도 사제도 이 사내가 어디에서 솟아오른 누구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제에게 있어 이 사내는 신의 종일 테고, 공주에게는 왕국의 백성이었다.
신비주의에 빠진 모든 이들이 무아지경 속에 참회하고, 엄격한 금욕주의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사제도 그에 속했으며, 자신의 남은 일생역시 그리 하는 것이 당연했다. 삶 전체가 종교로 가득 차 있었고 진부한 확신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일상과 생활에 종교적 사고는 분류하기조차 힘들만큼 끼어들었다는 거다. 그랬다는 거다.
사제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죽어서도 신의 품으로 가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것 정도. 아, 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좀 더 감정을 섞어 말한다.)
그럼 가장 공포스러웠던 기억은? 직사각형의 은색접시위에 흔들리던 빠알간 푸딩, 정도.(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좀 더 해설에 힘을 주도록 한다.)
그게 어째서? 으음, 이건 지금 말고 나중에 얘기해 줄게.(이 부분은 조금 장난스럽게)

로베트 사제 : 신이시여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해설 : 시간이 지날수록. 사내가 죽지 않을 거란 것은 어느 순간부터 확신이 아닌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는 살아 날 것이고, 이토록 흉물스런 공간에 어떠한 변화 점을 부여할 것이다. 어쩌면 섬뜩한 상황의 탈출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사제는 신이 보냈으리라 하는 작은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남은 문제는 사내의 의식이 청각과 촉각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로베트 사제 : (두 손을 모으고 천정을 바라본다.) 신이시여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오! 신이시여!

해설 : 달리 할 게 있어야 말이지.


제 2막


사내는 깨어나기 시작한다. 사제와 공주는 기도를 드리는 중이었고, 사내의 작은 신음소리가 들리자 사제는 어떻게든 기도를 빨리 끝내기 위해 노력한다.

아르하 공주 : (사제의 답답한 행동에 참다못해, 공주는 사내를 향해 뛰어들어 모기만한 목소리를 내며 흔든다.) 이봐. 정신 차리겠는가?

사내 :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지다 잔기침을 몇 번한 사내는 기관지에서 쏟아져 나온 습기 덩어리와 함께 조금 탈색된 목소리를 내어보인다.)  “어디지?”

(사내의 그런 관념적인 혼잣말에 공주가 괴물의 안이라 짧고도 작게 답한다. 한동안 사내는 말이 없다. 기도를 마친 사제가 공주 사이에 끼어들어 사내의 손을 잡았다.)

로베트 사제: (침착하게)괜찮아요. 이곳은 괴물의 안이고, 당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사내 :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가 조금씩 크게 중얼거린다.) 괴물의 안? 괴물의 안? 여전히 괴물의 안이라고?

로베트 사제 : (사내를 달래듯이 말한다.) 걱정 마세요. 이곳이 그 어떠한 곳이든 신이 저희 곁에 있으니까요.

사내 : (몸을 극심히 떨며 난동을 부린다.) 우아아아아악!!

갑자기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고함을 지르던 사내를 다시 안정시키는 대는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사내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공주와 사제는 그런 사내 뒤를 쫓아가 붙잡고 처음부터 하나, 하나 설명해 준다.

로베트 사제 : 공주님이 길을 잃어버린 후 쓰러진 당신을 발견했어요. 그러니까,(하고 잠시 머뭇거리며) 신의 인도에요.

사내 : (급박하고 퉁명스레 되묻는다.) 뭐!?

로베트 사제 : 신의 인도요. (사내가 못 알아듣자 또박또박하게 다시 힘을 준다.) 신. 의. 인. 도. 요.

사내 : 신의 인도라니? 당신들 뭐야!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사내는 자리에 일어나 관객을 향해 소리친다.) 이곳은 온통 어둠뿐이라고. 나 이외의 누군가가 있을 수가 없어! 오오! 신이서여! 정말 여성이라면 발정난 남성인 내가 그녀들을 가만둘 것 같아!

로베트 사제 :(사제는 일어나 뒤로 주춤거린다.)아니요! 저희들은 신의 시험으로 이곳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역시 저희들에게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어요. 신이 저희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죠. 저희들에게 해코지를 한다면 신이, (잠시 머뭇거린다.)당신의 그 위험한 부분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해설 : 사내를 다시 설명시키는 대는 좀 더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괴물의 제물 6번째 항목 8번째 단락이 되어 괴물에게 먹혀 버린 후 -공주는 불쾌한 기분이 되었고, 사제의 마음은 가라앉아 버렸다.- 매일같이 기도를 드리는 충실한 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던 와중에 길을 잃어버린 공주가 당신을 만났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 신의 인도였다, 라는 사제의 주장이다.

로베트 사제 : 아마도 신께서 당신이 이곳으로 인도한 것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혹시, 어쩌면, 저와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신께서 보내주신 사자일수도 있겠죠.(사제 조금의 희망에 들뜬 목소리)

사내 : (한참 후 사내는 어눌한 목소리로 묻는다.) 공주님이요?

아르하 공주 : (사내의 존대에 고개를 치켜 올린다.) 그래! (그러곤 기대감에 들떠 두꺼비 같은 목소리를 숨기지 않고 묻는다.) 그런데, 그대는 누구인가? 대체 어디서 왔는가? 나를 구하기위해온 망국의 왕자인가?

사내 : (다시 한참 후 사내가 말한다)아뇨, 약초장이요. (그러고는 혹시나 성기가 온전한지 한번 더듬어 본다. 물론, 어둠속이라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평범한 약초장이에요.

이번엔 공주와 사제가 한참동안 침묵을 한다.

사내 : (그들의 침묵에 하나씩 차근차근 말한다.) 약초장이의 일이란 숲에서 먹을 만한 풀을 뜯는 거예요. 약이 될 만한 것이나. 쥐를 잡을 수 있는 것들…….

아르하 공주 : (크게 실망하며 소리친다.) 알고 있어! 나참! 기사도, 성의 문지기도 아니고, 약초장이라니. 흥!(공주는 콧방귀를 끼며 코를 판다. 어둠속이라 보이지는 않는다.) 쓸모없는 약초장이!

(사내 기가 죽어 몸을 움츠린다.)

로베트 사제 : 괜찮아요. 괜찮아. 신의 뜻이겠죠. ‘당신을 구원하라는.’(사제는 끓고 있는 무릎이 아픈지 들썩 거리며 엉덩이를 긁적거린다. 역시나 어둠속이라 보이지는 않는다.)

사내 : (사제의 말에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오! 그런가요?

로베트 사제 : 하지만 당신은 더럽고 추잡한 약초장이에요. 저희들을 보며 욕정을 품었을 것이 틀림이 없어요. 회개하세요!

막이 닫히기 시작하면서 이국적인 음악 Marta's Song(Deep Forest)이 흐른다. 관객에게 박수를 유도. 아니, 강요한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춰도 된다.

사내 : (사내 절규하며 관객들에게 외친다.)모두들 보셨죠! 그래요! 나는 더러워! 나는 발정 난 수퇘지라고요! 이제 나는 자위를 하며 당신을 상상할 거라고요.(하고 사내는 왼손으로 자신의 자지를 만지고 오른 쪽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킨다. 하지만 어둡기 때문에 누구를 가리키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르하 공주 & 로베트 사제 :(고개를 흔들면서 뒷걸음질 친다.)오! 안 돼! 나를 그런 식으로 보지 마!

막이 닫힌다. 리바이어던 4화 사고의 유형 끝.

해설 : 소설 리바이어던은 계속됩니다. 출구는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공연장은 여전히 어둡습니다.(옆에 ‘알게 뭐람. 난 이미 퇴출 위기라고. 내 인생의 출구는 비상구 옆에 위치한 화장실 두 번째 칸이라고!‘ 이렇게 낙서가 되어있다.)

주의 : 혹시나 객석에서 팝콘과 음료를 팔았다면, 관객이 던질지 모르는 팝콘과 음료를  조심해라. 떠드는 아이들은 발로 뻥뻥! 걷어차기 바란다. 교환한 필로폰 2g은 나중에 맥도널드에 가서 빅맥을 먹으며 투여하도록 하자.






5.구덩이 앞을 지키고 있던, 지켜야 할 이에 대하여.



아이가 신전 앞에 버려진 것은 태어난 지 6개월이 지나고 나서였다. 아이의 부모도 버틸 때로 버텼다는 얘기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여느 아기들이 그렇듯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오열하고 있었고, 자신을 싸고 있던 낡은 천 조각은 심한 악취가 나고 있었다. 아이를 표시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낡은 천 조각이 그의 얼굴 없는 부모의 궁핍함을 말해주고 있었기는 하지만 아이에겐 이름조차 없었다. 아이의 이름은 그를 주은 늙은 청소부의 이름을 따 로베트라 지었다. 사내 이름과 다르게 잘 보채는 여자 아이였다.
아이는 자신의 삶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볼 나이가 되었을 때까지 극도로 불안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머릿속은 100년 전부터 일어난 냉전 한 가운데에 있는 듯 늘 공포에 질려 있었다. 수많은 갈매기가 바다 속으로 낙하하는 것처럼, 돌고래 떼가 해변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말벌들이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쥐들이 배 위에서 떠나는 것처럼,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그런 것처럼, 혹은 그렇고 그런 것처럼 아이의 이상야릇한 곡선은 비 이상적으로 날뛰었다. 무엇이 그토록 아이의 양 미간 사이에 기생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이도 자신의 몸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불안한 뱀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날카로운 고드름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처럼, 빙판이 깨지는 것처럼, 숭어가 말라죽어가는 것처럼, 돌발적이고 불확실하게……. 곤란하게 내뱉어버리는 호흡까지도 모두 아이와 연관된 것이지만, 상관없는 것이었다.

아이의 삶이 정해진 것은 좀 더 나이가 들어서였지만 아이는 그전에 자신의 삶에 대해,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일방적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나이가 12살이 되던 해였고, 한밤중이었다. 신전의 작은 숙사 안은 언제나 잠이 들지 않은 소녀들의 잡담소리가 오가기 마련이다. 어둠속에서 엄격한 기침소리가 들릴 때까지 소녀들의 집단이불 속에서 소곤거리던 목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날 역시 그랬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언제나 일찍 자던 불안한 표정의 로베트가 그날따라 양들의 숫자를 웅얼거리며 잠에 빠져들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언제나 키득거리는 소녀들의 음성을 주도하던 아이 한명이 곤한 잠에 빠져 들었다는 점이다. 일찍 잠이든 그 아이는 다른 또래보다 나이가 한두 살쯤 많은 옹그리란 아이로 자신보다 어린 소녀들의 작은 장난에도 곧잘 웃어주는 털털한 소녀였다.
여전히 로베트는 양을 세고 있었다.

  “양 팔백구십육, 양 팔백구십칠, 양 팔백구십팔”

소녀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소리가 갑자기 커지자 로베트는 눈을 깜빡이며 양의 숫자를 계속 세었다. “양 구백삼, 양 구백사, 양 구백오” 로베트는 그날따라 도무지 잠이 들 수 없었고, 옆에서 들려오는 잡담소리가 길고긴 손톱으로 목 언저리를 긁는 것처럼, 신경을 점점 불규칙하게 만들었다. 너희들은 내일 조과(朝課 : 성무 일과의 시작)시간에 졸다가 매질이나 당하라지. 아침밥도 없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양의 숫자를 세어나가기 시작했다.  

  “양 구백구십구.”

그때 잠이든 털털한 소녀 옹그리가 잠꼬대를 하며 심하게 몸을 뒤척였다. 무슨 꿈을 꾸는지 작게 중얼거린 음성을 듣고 장난기가 발동한 한 소녀가 다가가 코를 눌러보거나 당기거나, 머리끄덩이를 잡아 귀신처럼 산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보고 히히거리는 소녀들의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
여전히 로베트는 양을 세고 있었다. 눈썹은 그 어느 때보다 험악해져있었다.

  “양 천이, 양 천삼.”

  잠이든 옹그리에게 장난을 치던 소녀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손에 묻혀 있던 끈적끈적한 느낌에 연신 손을 비벼 보았다. 어두운 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불쾌한 냄새가 흘러나와 어찌할 바를 몰라 자신의 옷과 집단 이불에 닦아 보았지만 쉽사리 그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게 뭐야.”하고 소녀 한명이 말했다.

로베트의 머릿속에 돌아다니고 있는 양들의 숫자는 어마어마해져 울타리를 넘어야 할 지경에 이르자 소녀들의 목소리도 갑자기 커져갔다. 그건 호기심과 두려움에 잡힌 목소리로, 장난을 친소녀의 입에서 뱉어져 나왔다. 그리고 하나씩 소녀들 주위로 확산되어만 갔다. 로베트는 더 이상 양의 숫자를 셀 수 없었다. 일어나 소녀들에게 엄격하고 험한 소리를 해줘야 갰다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웅성거리며 모여든 소녀들의 행태를 보고 그럴 수가 없었다.

“웩! 이게 무슨 냄새야. 옹그리 앤, 씻지도 않나봐.” “정말.” 소녀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그때 지나가던 수도사 한명이 등을 들고 외쳤다. “아직까지 자지 않고 무슨 소란들이냐!“ 소녀들은 쥐 죽은 듯이 이불속으로 쑥 들어갔다. ”누가 일으킨 소란이냐!“ 수도사가 소리를 쳤지만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꽁꽁 얼어버린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도사는 등을 훤히 들고 아이들 사이로 가로질렀다. “요, 꼬맹이들! 조금이라도 소란을 일으킨 녀석은 지금 당장 일어나!”하고 화가 난 수도사야 수도사는 방에 등에 불을 켜고는 소리쳤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일어나지 않고 집단 이불속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그때 장난을 친 소녀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는데, 로베트는 원망 가득한 얼굴로 장난기 가득하던 소녀를 보다가 가려진 소녀의 손에 마른 피가 발라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 소녀도 자신의 손에 그어진 피를 눈치 챘는지 “악!” 하며 입에서 손을 떼고 짧게 신음을 뱉어 내었다.

  “뭐냐!” 하고 수도사가 소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피가 이어진 방향을 보던 로베트가 길고긴 괴성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피는 옹그리의 엉덩이와 가랑이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로베트의 머리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열어젖혀졌다. 그건 아주 어렸을 적의 어떤 기억의 파편처럼, 혹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로베트에겐 결코 열어서는 안 될 무언가 였다.

흘러나온 피는 회색 잠옷과 섞여 침대와 집단이불을 불규칙하게 더럽히고 있었고, 허벅지 안쪽의 피는 점점 굳어져가고 있었다. 로베트가 소리를 지르자 어린 아이들은 깨어나 울기 시작하거나 따라 소리를 질렀다. 수도사는 잔뜩 인상을 써대며 아이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애들아! 별일 아니다. 괜찮아! 생리를 시작한 것뿐이다. 당연한 거야!”

그래 당연한 것이었다. 옹그리도 괜찮다고, 아프지 않다고 했지만 깨끗한 물로 그 피들이 모두 닦이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때 까지 로베트는 무엇이 그리 무서운지 웅크린 체 귀를 막고만 있었다. 다음날 모두들 아침밥이 없었다. 단 한명인 옹그리 만이 아침밥을 먹고 깨끗한 옷을 입은 채 씩 웃음을 짓고 있었다.

  “생리를 시작한 거야. 더러운 피를 빼버리는 거지. 어른이란 증거야.”하고 옹그리는 자신보다 머리가 작은 아이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설명을 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몇몇 아이들이 더 생리를 시작했다. 당연한 것이었고 몇몇 아이들은 알아서 척척 해결하기 까지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한 아이는 생리를 하지 않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생리가 시작하지 않자 그건 불안으로 변한 아이는 칼로 자신의 허벅지를 자해할 생각까지 했다. 그건 아이의 나이가 15살 까지 계속되었고, 비쩍 마른 몸으로 매일같이 기도를 하는 삶을 유지했다. 피는 두려움과 동시에 아이에게 상실된 무언가를 되찾아 줄 수 있는 신성함이 있었다. 아이의 삶은 정해져 있었고, 어딘가로 기어들어가야 할지 뻔했다. 어느 곳에 누워야 할지도 뻔했다. 평생 동안 무엇을 보고 배워야 할지도, 침묵해야 할지 뻔했다. 결혼을 한다 해도 소박맞을 것이 뻔했다. 몇몇 아이들은 떠나고, 몇몇의 아이들은 다시 버려졌다. 결혼을 한 아이도 있었고, 벽돌을 나르다 죽은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생리를 하지 않는 그 아이는 로베트란 이름을 가지고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자신의 몸속엔, 가슴속에 아직 더러운 핏기가 검은 덩어리로 뭉쳐져 있는 것일까? 로베트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어딘가가 아픈듯했고, 무언가가 몸속에 숨어 있는 듯 했지만 그 어느 것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당연하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수도사는 천상 신에게 봉사해야할 삶이라고 로베트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언제 부터인가 그 사실이 신성시되기 시작했다. 불행과 행복의 극단적인 모습처럼 상실의 우울함과 신성함이 천국과 지옥의 거리만큼이나 벌어질 정도였다. 당연하지 않음이 신성시 되어갔다.
자신의 손에 닿지 않는 종기처럼 자리 잡고 있던 그런 불안함이 가득한 어느 날. 로베트는 어떤 꿈을 꿨다. 그 꿈은 언제나 유쾌하게 웃던 옹그리란 아이로 시작한 꿈이었다. 옹그리는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고, 자신과 손을 맞잡고 길고긴 신전 주위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러다 신전 안으로 함께 들어가 보았다. 두 손은 여전히 맞잡고 있었고 즐거운 대화는 그칠 줄 몰랐다. 그 둘은 재단이 있는 곳으로도 가 보았다. 제단위엔 은색의 접시가 놓여 있었다. 거기다 붉은 덩어리 하나도 접시 위에 올려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로베트는 알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 빨간 푸딩인가 싶었다. 옹그리가 그것을 집어보려 하자 로베트는 급히 그걸 막고서 자신이 가지려 했다. 옹그린 험악한 인상을 쓰고 로베트를 밀쳐냈다. 지금까지의 화기애애했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옹그리는 은색접시를 뺏어 쓰레기 통으로 던져져 버리고 욕을 했다.

퉤! 더러운 놈! 더러운 놈! 더러운 놈! 퉷! 퉷! 퉷!

꿈에서 깨어나자. 식은땀이 나고, 온몸에 오한이 돌았다. 무엇이 두려운지 자신의 머릿속에서 흔들리는 것에 온몸이 반응했다.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그 꿈은 자신을 알 수 없는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날이 밝고서도 공포는 가시지 않고, 자신의 몸속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그 이후로도 계속 자리 잡았다. 마치 길고긴 비명처럼 자신의 깊숙한 곳에서 어쩌다 한 번씩 척추마디를 타고 솟아올라왔다.

  “신이시여 불쌍한 어린양을 구원해 주소서.”여전한 소리.

로베트에 대한 찬사가 커져가던 어느 날, 수도장이 로베트에게 어떠한 일이 맡겼다. 수도장은 그것은 악마가 만든 거대한 괴물에 관계된 중대한 일이며, 일이 끝날 때까진 침묵을 지킬 것을 신에게 맹세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커다란 마차가 몇 일후 왔고 로베트는 마차에 올라섰다. 그 중대한 일은 체할 정도로 매우 급박하게 진행되어 가는 것 같았다. 로베트는 여전한 말과 여전한 투로 마차밖에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봉건적이고 계급적인 사고방식속의 삶은 여전히 그 광체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근심과, 걱정과, 고통과, 믿음과, 연민과, 음심과, 슬픔과, 시기와, 질투와, 웃음과, 회환과, 미련과, 통증과, 애통과, 오열과, 기쁨과, 희망과, 행복까지도 그 삶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어릿광대의 목에 걸린 쇠목걸이처럼 어딘가로 질질 끌려가는 삶은 추락하는 바위나 썩어가는 음식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끝이 정해진 삶. 바닥에 닿아 부서지는 바위나,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악취물이 되어버린 음식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신이 존재했고, 저 너머 영생과 영원한 행복을 위한 빛의 계단이 존재했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로베트는 다짐했다. 신이 존재하기에,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은 신의 뜻이고, 시험이리라.

6. 국가의 탄생


한정된 공간 안에서 한정된 생활이 유지되었다. 셋이 만난 이후로 조금의 생리적인 변화(이성이 듣지 못한 곳에서 소변을 보거나 자위행위를 하는)가 있기는 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만나기전과 그전과 그전의 전과도 같은 형태의 삶이 유지되었다. 무료함도, 즐거움도, 하찮은 고통까지도 가끔을 제외하고는 느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판단의 폭은 너무나도 협소해져버려 왼쪽잎사귀를 갉아먹을지 오른쪽을 갉아먹을지나 고민 하는 개미나 다를 바 없었다.
아니면 여왕개미에게 바쳐질지 모를…….

“결혼하기로 했었죠. 상대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었지요. 그러니까 이름이……. 코리나? 네, 코리나였어요. 위로는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못생긴 언니 하나와 오빠가 둘이 있는 집의 막내였죠. 정말 아름다웠어요. 하지만, 혼인날짜가 한 달 가까워졌을 때 사건이 터져버렸어요. 다시 말하자면 내가 괴물에게 먹혀 버린 거예요.”하고 괴물에게 바쳐진 제물 상자하나에 걸터앉은 사내가 말했다. 사내는 자신의 턱수염을 매만져 보았다. 수염의 끝은 쇄골에 가까워져 갈만큼 자라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수염이 쇄골에 가까워질 만큼이란 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일까? 사내는 언제 한번 수염을 손봐야 갰다고 생각했다.

“정말 안타깝군요.”하고 사제가 운을 띄웠다.

결국, 어둠이란 것은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인간의 공감각은 시각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비록 괴물의 안이긴 하지만 그들은 조금씩 행동반경을 넓혀가고 있었다. 이미 사내는 사제의 목소리가 닿는 방향까지 탐험을 마친 상태였다. 공주는 길을 잃어버린 후로 겁이 많은 토끼처럼 제물이 쌓여있는 굴 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사제 역시 공주와 비슷했다. 아니 공주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하루 종일 미동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죠, 코리나와 함께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려면 많은 돈이 들어요. 나는 약초장이였지만 하찮은 약초장이와는 틀려요. 실력도 좋고 능력도 좋았죠. 그렇다 해도 돈이 많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커다란 집을 사려면 벽돌을 하나씩 모으듯이 하나씩 약초를 캐는 거죠. 그렇기에 그 불길한 소문이 도는 숲으로 가야만 했죠.”

“흐음.”하고 공주가 말하자 사내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사내는 쩍쩍 갈라진 얼음 같은 공주의 목소리가 몹시 신경 쓰였다. 특히나 이 어두운 곳에서는 더욱더 그러했다. 모든 목소리가 사라지고 공주의 음성만 메아리처럼 세상에 떠돈다 해도 공주의 목소리는 티끌만큼 호감이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내는 공주의 외형이 아주 추할 것이라고, 그래서 제물이 되었을 거라 단정 지었다.

“사실 나는 두렵지가 않았어요. 정말 나는 겁이 없는 남자였죠. 따지고 보면 코리나 그녀도 행운아라고 할 수가 있어요. 나 같은 남자를 만나 평생 호강하며 살 것이 뻔했으니. 아마 나를 잃은 슬픔에 지금쯤 울다 지처 잠이 들거나 자살을 했을 것이 틀림이 없어요.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가?”라고 공주는 돌아오지 않을 반사적인 되물음을 하였다. 괴물의 몸 안에서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공주였고, 가장 현명한 자신이, 결국 이 생활을 이끌고 나아가기 위해서 어떠한 결론을 내어야 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공주는 먼저 사내에게 이 굴 안을 탐험하기를 명했다. 사내는 몇 번에 걸쳐 탐험을 마친 후에 어둠과 어둠의 미로만이 주위에 있다고 공주에게 알려 주었다. 그 미로는 복잡하지만 자신의 손에 있는 손금과도 같아서 시간이 흐르면 속속들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사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지금 우리는 신께 기도를 드려야 해요. 신께서 우릴 구원해 주실 것이 틀림없어요. 그분은 언제나 중요한 일을 안배하기 위해서 종종 인간들이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시곤 하지요.”

공주에 비하면 사제의 목소리는 얼마나 차분함과 아름다움이 가득한가? 사내는 그녀가 어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같다고 느껴졌다. 신성시되며 숭배되어야 할 대상 말이다. 그에 비해 공주는 두려움에 떨며 머리를 조아려야할 군주였다. 대화의 마무리는 언제나 사제가 했다. 그리고 그 마무리란 언제나 신에게의 기도로 이어졌다. 기도가 끝나면 다시 어떠한 시작을 해야 하지만 결국, 그 어떠한 시작도 행동도 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일도 행동도 하지 않는다 하여도, 시간은 흐르고 수염은 자라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식량도 점점 줄어 들어갔다. 이제 먹을 것이라고는 왕들의 초상화와 금으로 만든 성배밖에 없었다.  제물 중에 먹을 만한 식량이 바닥나고 있을 즈음, 그런 생각을 가장 먼저 한 것은 사내였다. 아마 허기가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 확실했다.

“현명하신 공주님!”하고 말이다. “제게 좋은 생각이 하나 났습니다. 왕가의 보검만 있으면 식량 걱정은 이제 문제가 없습니다.”

공주는 제물 중 하나인 왕가의 보검을 되도록이면 자신이 소지하길 원했다. 실제, 언제나 그것을 허리에 차고 있었고, 사내가 가끔씩 쓰길 원하면 공주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것은 왕족인 자신 힘의 상징과도 같았다. 사내는 그 생각이 머리에 들자마자 공주에게 자신의 생각을 고했다. 그것은 지금껏 생각지도 못한 불쾌한 것이기도 했다.

“괴물을 먹자고?!” 얼마나 놀랐는지 공주는 소리를 쳐 주위를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공주는 반대를 했고, 사제는 신을 찾았다. 공주는 왕가의 보검이 자신의 힘의 상징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사내가 생각하는 공주의 진정한 두려움은 그 목소리였다.

“하지만, 굶어 죽기 싫다면 괴물의 고기를 먹어야 해요.” 사내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공주는 괴물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무시무시하고 울퉁불퉁한 괴물을 먹다니? 누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겠는가? 하지만, 사내의 말대로 그것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결국엔 코를 틀어막고 입을 삐쭉 내밀지라도 입속에 넘겨 자신의 뼈와 살로 만들어야 했다. 공주는 결국 알았다면 허리춤에 찬 보검을 사내에게 내밀었다. 사낸 먼저 벽에 다가가 칼로 후벼 파 보았다. 벽은 울퉁불퉁한 돌기처럼 되어 있어서 잘 잘려지자 않아 두 팔을 모두 써 힘겹게 썰어내어야 했다. 그리고 한 점 입에 넣어 보았다. 쓴맛에다가 악어의 가죽을 씹는 것 같았다. 사내는 얼른 뱉어내보았지만 쓴맛이 혀끝에 여전히 맴돌았다.

“맛은 어떤가?”

“10년 묵은 가죽부대보다 써요. 다른 곳을 파야겠어요.”하고 공주의 물음에 사내가 대답했다. 제물이 모인 굴 주위는 온통 쓰디쓴 악어가죽과 소가죽으로 뒤 덥혀 있는지 좀 더 멀리 가야만 했다. 결국, 적당한 고기를 찾았지만 그 위치는 사제의 목소리가 간신히 닿는 곳이었다. 그래도 주위를 탐색하게 한 공주가 아니었다면 벌써 사내는 미로 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 뻔했다. 고기 맛은 여전히 엉망이었지만 사내는 적당히 야들야들한 감촉을 가진 곳을 찾았다. 그리고 그중 가장 괜찮은 맛을 가진 것을 자신의 주머니에 숨겨 넣고, 나머지는 두 손에 가득 쥐고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찾은 것은 맛이 어떤가?”하고 사내가 돌아오자 공주가 같은 되물음을 하였다. 공주 어두운 굴에서의 삶을 더 연장하기위해서는 괴물을 먹는 것이 합당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제 입에는 그럭저럭 먹을 만합니다.”하고 사내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래 어서 모두 내놔 보아라.” 공주의 명령에 사내가 공주에게 두 손에 쥔 고기를 내밀자, 공주는 그것을 3등분해 사제와 사내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입에 넣어보았다. “읍.”먼저 그런 소리가 나왔다. 고기엔 쓰고, 구린 맛이 섞여있었다. “정말 이런 것 밖에 없단 말이냐?”

“네, 제가 찾은 것은 그게 전부입니다.”그런 말을 하며 사내는 아까 주머니에 넣었던 고기를 빼서 입에 넣었다. ‘이건 내가 고생한 대가야. 그러니 내가 먹어야 한다고.’

“이 맛엔 신의 축복 따윈 느껴지지 않는군요.” 그런 소릴 하다 사제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뱉어낸 말이지만 사젠 왠지 어처구니없었다. 그런데 신의 축복이 담긴 맛은 대체 뭐였지?
모두들 괴물을 자신의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이제 공주는 그 싱싱한 맛이 나던 고양이 고기가 너무도 그리웠다. 물컹물컹하고 야들야들한 그 맛은 이제 혀 깊숙한 곳에나 존재할 뿐이다.

씹는 도중 침을 자주 뱉어내며 고기의 맛을 없애니 고기도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자 사내가 찾아오는 고기도 점점 질이 좋아져 가끔 핏기가 어려 있는 정말 싱싱한 고기를(그중 정말 좋은 것은 언제나 사내가 숨겼다.)가져오는 때도 있었다. 오늘 가져온 고기는 그다지 질이 안 좋은지 모두들 자주 침을 뱉어내었다.

“퉤!”씹고.

“퉤! 퉤!”씹고.

“퉷!”

“이게 무슨 짓이냐!”

“죄송합니다. 공주님. 조준을 잘못했습니다.”하고 공주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어버린 사내가 조아리며 말했다.

“어떻게 나의 얼굴에 함부로 침을 뱉을 수가 있단 말이냐. 게다가 이 맛은 정말. 퉤!”

“공주님 내일은 정말 좋은 고기를 가져올 테니 노여움을 푸시옵서서.”하고 사내가 공주의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

“흥 그렇다 해도…….”

“공주님 그래도 이런 고기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은 그의 덕이니 화를 푸세요.”하고 사제는 애매한 말투로 사내의 편을 들었다.

“알았으니 다음부터 침을 뱉을 땐 고개를 돌리고 뱉는 것을 잊지 말아라.”

“예, 알겠습니다.”

갈수록 공주는 자신의 위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결국 그 위치에 대해 확고한 조치를 취해야 할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사내는 가끔 제물이 있는 곳으로가 제물을 만져보곤 했다.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하나씩 손의 감촉으로 느껴보았다. 보석, 금, 은, 이름 모를 예술품. 악독한 해적의 보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 그곳에 쌓여 있었다.

“동그랗고 납작하고 작은 것이 전부 금화인가? 이게 정말 금화야?” 하고 생전 느껴보지 못할 만족감에 빠져들곤 하던 사내는 어느 날 금화일지 모를 동전하나를 깨물어 보았다. 단순히 이것이 정말 금화인지 확인해볼 요량이었다. 깨물고 나니 동전을 흠집 낸 이빨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그건 황토 빛 구리의 맛과 닮아 있었다. “금화가 아니네.” 그런데 어째서 금화가 아닐까?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구리동전은 흔하디. 흔한 것이었고, 사내역시 농담처럼 자신의 어수룩함을 떠들어 대었다.

“저기에 산처럼 쌓여 있는 동전들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게 전부 금화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구리 동전이지 뭡니까.”하고 말하며 사내가 웃자 공주가 핀잔을 주었다.

“왕국에서 구리동전을 제물로 바칠 리 없지 않은가. 하물며 은화 한닙조차 없는데 구리동전이라니 정말 한심하구나.”

“아니, 공주님 하지만 그건 정말 구리동전이었습니다. 하하하. 왕국에서도 제물로 주기에 아까워 구리를 주었나 봅니다. 어쩌면 나머지들도 전부 그런 것들이 아닐지…….”

“왕국에선 확실히 금화를 제물로 헌납하였다. 그건 이 두 눈으로 확실히 확인을 하였다. 켁켁!”하고 열을 낸 공주가 녹슨 기침으로 마무리하였다.

“그러면 겉만 금으로 보이도록 도금을 한 것이 아닌지.”

“흥, 그럼 이 내가 직접 확인해 보겠다. 어차피 넌 금붙이 한조각도 제대로 손에 쥐어 보지 못했을 터. 네 입에 넣어서 쓰면 구리고, 구린 맛이 나면 똥이라 생각하겠지. 보석은 또 어떠하냐? 나는 매일 이것들을 걸치고 살았기에 이것이 정말 이것이 루비이고 사파이어인줄 알지만 넌 유리인지 얼음인지 판단을 할 수 있겠느냐? 켁켁켁!”하고 또, 기침. 목소리가 도금한 구리동전처럼 벗겨지고 있었다.

공주는 제물이 쌓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 금화 하나를 집어 보았다. 그리고 살짝 문질러 보고는 이빨로 흠집을 내었다. 처음엔 무른 맛이 그리고 벗겨진 흠집에는 구리 맛이 느껴졌다. 구리였다. 그것은 뭐로 보나 구리였다. 사내가 캐온 고기만큼이나 쓰고, 혀끝에 맴도는 아리아리한 맛은 정말로 구리가 틀림이 없었다. 공주는 다른 동전들을 집어서 확인해 보았다. 사내 몰래 조용히 확인해 보니 그것 또한 구리였다. 그럼 다음 동전을……. 세 번째 확인해 본 동전역시 구리 맛나고 있었다. 공주의 볼이 시큰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켁켁켁!”사래가 들렸는지 공주는 자꾸만 기침을 하였다. “켁켁! 내가 지금은 몸이 좋지 않으니 다음에 다시 얘기를 하자꾸나.”하고 은근슬쩍 넘어가는 소리로 보였지만 그것은 명백한 공주의 패배선고였다.

“하긴 공주님도 제물이었으니 그것을 직접 확인해볼 요량이 없었을 수도 있겠죠.”하고 사내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제물? 네가 지금 제물이라 했느냐?”

그렇게 말한 사내는 공주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생각했는지 헤헤거렸다. 공주는 이빨을 갈며 머리를 굴렸다. 제물이라니 단지 숲에 떠돌며 풀뿌리나 뽑던 녀석이 나에게 제물이라니.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바닥에 머리를 엎드리게 만들지. 무지렁이 같은 녀석.

“그래 좋다. 너는 죄를 하나 지었다. 나를 모멸한 죄 값은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하고 공주가 의연한 태도로 다시 물었다. 그것은 공주에게는 평이한 어조이지만 사내가 듣기에는 악독하고 늙은 마녀와도 같은 목소리였다.

“소인이 잠시 입을 잘못 놀렸나 봅니다. 헤헤헤.”

“아니 너에게 죄를 묻는다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구리동전을 금화로 잘못 알고 너를 몰았으니 이건 내 실수이기도 하다. 그럼 이것으로 비긴 것으로 하자. 상을 주지도 않겠지만 벌을 내리지도 않겠다. 알겠냐?”하고 공주의 목소리가 어느덧 안정을 찾아갔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공주님.”

“하지만.”하고 공주가 사내의 말을 끊었다. “다음번에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때도 이렇게 넘어가야 하느냐? 너는 어떻게 하길 바라느냐?”대패로 나무를 긁는 소리가 공주의 입에서 나왔다.

“신에게 맹세코 다음번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하고 사내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정말 맹세하겠느냐?”

“네! 신에게 맹세합니다.”

“하지만, 네 맹세를 믿을 수 없으니 또 이렇게 하도록 하자꾸나. 나는 귀족이 아닌 자의 맹세는 믿을 수 없다.” 목을 혹사 시켰는지 쌕쌕거리는 소리와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공주의 음성과 섞여 나왔다. 공주는 숨을 한번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게 성을 하사하도록 하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네게 작위를 내리겠다는 말이다. 공주인 내가 말이다. 이것으로 너는 귀족이 되는 것이다. 흐음, 어떤 것이 좋을까?”

“공주님…….”사내가 당혹감이 깃든 목소리로 공주를 불렀다.

“그래 슬라브(slave)로 하도록 하자.”공주의 말에 잠자코 있던 사제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마도 공주의 의도를 눈치 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사제는 특별히 공주를 말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럼 성을 하사하도록 하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라.”

사내는 왠지 찜찜하기는 했지만 손해 볼 것도, 이득 볼 것도 없는 입장이라 공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사내는 공주의 말대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슬라브(slave)경에겐 주위 30야드의 영지와 제물, 그리고 남작의 작위를 하사하노라.”사내의 위치가 불안정해 공주는 더듬거리며 사내의 머리를 잡고 단검으로 그의 어깨를 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영지는 어떤 영지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려 주려했다. 먼저 이 제물이 있는 굴은 내가 있는 곳이니 줄 수 없다. 하지만 이 굴을 벗어난 이후로 30걸음까지는 너의 것이다. 알겠느냐?”

“네에.”하고 사내가 떨떠름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일체의 관섭도 하지 않겠다. 네가 그곳에서 식량을 쌓아 놓든 보물을 쌓아놓든 무엇을 하든 그곳은 너의 영토다. 그리고 이제부터 너에게 세금으로 받도록 하마. 너는 하루에 일정량의 고기만 나에게 바치면 된다. 나머지는 모두 너의 것으로 하마. 네 어깨가 휘청 일 정도의 고기를 잘라 온다고 해도 너는 그중 일부만 나에게 바치면 되는 것이다.” 그제야 사내는 어느 정도 만족감에 빠져들었다. “어머나. 그럼 이것은 슬라브 경에게 주는 상이 되는 것인가? 너는 죄를 짓고도 상을 받았구나. 하지만, 네가 많은 공을 세운다면 이보다 더한 상도 주도록 하마.”

공주는 충분히 영리했고, 아랫것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공주가 말끝마다 경이라는 호칭으로 불러 주는 것 외에는 시간이 지나도 특별히 달라진 점이 없었다. 고기를 잘라오는 하루는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사내는 자신이 귀족이 되었다는 것과 어느 정도의 존칭이 들어간 호칭에 기분이 좋았다.

“슬라브경 오늘은 상을 내리도록 하마. 저 상자는 모두 구리동전이긴 하나 저 양이면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다. 저것을 네게 하사하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됐으니 네 영토로 가서 쉬도록 해라.”

사내가 질이 좋은 고기를 가져올 때마다 공주는 여러 가지 보물 들을 하사하였다. 사내는 그 무거운 상자를 자기의 영토로 끌고 오면 온몸이 후줄근해져 힘에 겨웠지만 묵직한 구리가 주는 포만감에 생글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공주와 사제에 준 것보다 질이 좋은 고기를 씹으며 헤헤거렸다.

사내가 캐온 괴물의 고기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7. 파업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이미 한참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불합리한 제도는 개선될 여지가 없었다. 정신없이 모은 제물도 가치가 없었고, 쌓아놓은 고기도 나중에 가서는 결국 쓸모없어졌다. 변함없이 느껴지던 그 사이클은 어딘가 잘못 회전하고 있었다. 공주는 자신의 머리 위에 다리를 꼬고 있었고, 자신은 어느새 그녀에게 종속된 불합리한 존재에 불과했다.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었다. 사내는 오늘도 고기를 썰며 공주의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 가장 맛없고 비리비리한 고기를 그녀에게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공주는 자신에게 바쳐진 고기를 살짝 집어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슬라브경 요즘 따라 고기의 질이 왜이런가? 날이 갈수록 쓴맛만 더해지니 내 혀가 잘못된 것인가?” 공주는 고압적인 목소리로 사내에게 물었다.

“공주님 이제 근처의 적당한 고기도 모두 바닥난 뒤여서 남은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그중 가장 질이 좋은 고기입니다.”

“흐음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공주는 고기를 받고는 잘라 보았다. 쓰디쓴 맛을 잔뜩 함유하고 있는 고기를 입에 넣자 공주 역시 잔뜩 매운 얼굴이 되었다. 공주는 힘겹게 고기를 삼켰다. 고기를 다시 자른 공주는 그걸 사제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제는 요즘 미동도 하지 않고 신에게 기도를 드리기에 바빴다. 게다가 자꾸 식사를 거르는 통에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많이 쓰군요.”하고 고기를 입에 넣은 사제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내일은 좀 더 좋은 고기를 가져 오겠습니다.”

사제는 먹다 남은 고기를 임시로 만든 재단에다가 올리고는 다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슬라브경 그리고 먹다 버린 고기가 이리저리 널려 있어 혹시나 밟으면 미끄러져 넘어질 것 같으니 모두 치워주었으면 하오.”하고 공주가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쳇 미끄러지긴 뭐가 미끄러진단 말이야?’ 공주는 언제나 저런 식이다. 쓸데없고 거추장스러운 일을 생각해내서 자신에게 시켜 버린다.

“슬라브경, 그리고 고기를 캐오는 간격을 일정하게 조절해주었으면 하오. 배도 고프지 않은데 고기를 씹어 봤자, 경이나 우리나 무의미하니 ”

“네, 알겠습니다.”

“슬라브경. 요즘 들어 자꾸 예배시간에 자꾸 조는 이유가 무엇이오? 피곤하다고 해서 예배시간에 졸아서는 안 되니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오.”

“네, 알겠습니다.”

“슬라브경 자꾸…….”

“네에 명심하겠습니다.”

“슬라브경…….”


결국, 사내의 굳어진 불만은 바위보다 단단해졌다. 사내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와 자신이 잘라온 고기들을 사납게 씹어대기 시작했다.

“흥! 그년들은 절대 고마워할 줄 몰라. 언제나 불만투성이라니깐.”

사내가 씹고 있는 고기는 쓴맛도 나지 않고 야들야들한 한 감촉이 살아 있었다. 이제 사내는 어느 정도 미로의 모양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어느 쪽이 맛있는 고기가 있는지, 어느 쪽이 단단하고, 어디가 괴물의 위인지, 위산은 언제 나오고 침샘은 어디서 받아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장과 그 밑으로 갈수록 주위는 온통 기름칠을 한 것처럼 미끄러워서 사내역시 더 이상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곳에 누군가 한번 빠진다면, 온통 미끌미끌 거리는 기름 범벅에서 굶어 죽을 때까지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사내역시 처음 다가갔을 때 발을 잘못 디뎌 무척이나 고생한 기억이 있었다. 사내는 야들야들한 고기를 씹고는 눈을 감았다. 어느덧 잠은 자신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멀리서 자신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사제의 음성에 잠에 빠지고 있던 자신의 의식을 흔들었다.

“슬라브님. 슬라브님.”하고 이제는 미동조차 잘 하지 않던 사제는 사내가 반응하지 않자 점점 사내의 영지에 가까이와 소리쳤다. “슬라브님!”

“네, 네! 로베트 사제님.”하고 사내가 깨어나 대꾸했다.

“기도드릴 시간입니다.” 그 말에 사내는 자리에 일어나 사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 있습니다. 제 손을 잡으세요.”하고 말하며 사제는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사내는 더듬거리며 사제의 손을 잡고는 사제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축축한 사제의 손은 힘없이 주저 않을 듯 말라 있었다.

“식사를 너무 거르지 마십시오.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제가 걱정됩니다.”하고 사제에게 안쓰럽게 말하자 사제는 사내를 쥔 손에 힘을 주고는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이제 곧 신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겁니다.” 사제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내가 보기엔 구원도 하기 전에 사제는 말라죽고 말 것이 틀림없었다.

공주는 이미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공주는 사내가 사제의 손에 이끌려 늦게 나타나자 찌푸린 얼굴을 하며 핀잔부터 주었다.

“경은 무얼 하다 이렇게 늦게 오는 건가? 혹시 숨겨둔 고기라도 먹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신경질이 깃든 공주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아닙니다. 잠시 잠을 자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세금으로 바치고 난 후의 고기는 전부 제 것인데 어찌 숨겨 놓은 것이 됩니까?”

사내의 말에 공주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럼 내가 기도시간에 늦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어찌 잠에 빠져 늦을 수 있단 말이냐?”

“힘겹게 고기를 잘라 오고나면 피곤한 것이 당연할 터인데 어찌 공주님은 그런 것으로 꼬투리를 잡고 그러십니까.” 사내는 눈살을 찌푸리며 평소에 안하던 반항을 하고 말았다.

“뭐라? 일이야 나 역시 하고 있는데, 너는 왜 너 혼자 피곤하다 하느냐?”

사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가 대체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아니 이곳에서 자신 외에 일을 하고 있는 이가 있기는 하단 말인가? 사내가 한참동안 끓어오른 냄비를 침묵으로 덮어버리자 사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슬라브님. 신께선 한사람, 한사람마다 소임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신의 말씀을 전파라는 것, 그리고 슬라브님에겐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식량을, 공주님에겐 이 모든 것을 관리하기 위한 통치권을 주셨습니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래 봤자 노동은 자신밖에 하지 않지 않은가. 입으로 쫑알쫑알 쏘아 대는 것이 어찌 일이 될 수 있지? 게다가, “제가 어찌 고기만 캐온단 말입니까? 그럼 다른 일은 하지 않습니까?”

“경은 남자이지 않습니까.”하고 사제가 작게 외쳤다.

그때 공주가 끼어들었다.

“흥, 먼저 너의 위치를 보아라. 지금 네가 나에게 대들 수 있는 위치더냐? 이곳에 오기 전 너는 어떠했느냐? 너는 일개 평민에 불과했던 네가 작위를 가지고, 배만 고프지 않으면 되지 무엇이 또 문제이기에 그러느냐?”

공주의 말에 사내는 그걸 꼭 꼬집지 못했다. 불합리하다 느끼고 있으며, 모든 노동을 자신에게 돌려진 것과 언제나 투정만 부리는 그녀들의 행동에 결국 상한 고기와 같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피곤하여 그랬사옵니다.”하고 사내는 건성으로 답했다.

“앞으론 조심하도록 하여라.”

  공주는 매정하게 마무리했다. 다시 고기를 캐오고 바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전의 말싸움 덕인지 공주도 사내에게 되도록 고기 맛을 칭찬을 하였고, 작위를 백작으로 올려 주었다. 사제 역시 사내를 위로를 하며 자신에게 충분한 기도를 해주었다. 한동안 사내도 그것을 위안거리로 삼아 열심히 세금을 바쳤으나 결국, 그것도 무의미해졌다. 자신은 대체 왜 고기를 그녀들에게 바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젠 불만보다는 그 어떤 말 못할 우울이 자신의 옆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사내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오면 웅크리고 앉아 혼자의 공상에 빠져들었다. 공상에서 사내는 빛이 내리 쬐는 작은 무인도에 있었다. 주위엔 그 어떠한 것도 -인간의 숨소리도, 동물의 기척도, 하다못해 작은 벌레의 울음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역시나 사제와 공주도 없었다. 그 작은 무인도에는 단 하나의 야자수 나무에 셀 수도 없는 만큼 주렁주렁 달린 황금빛 야자가 있었는데, 야자열매를 먹고 싶으면 사내는 있는 힘껏 야자수를 발바닥으로 걷어차기만 하면 되었다.
뻥! 하고 걷어차면 야자수하나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뻥! 뻥! 뻥!

  혼자 편하게 야자수를 따먹던 사내는 기분 좋게 수영을 하거나, 아무 때나 잠을 자고, 자위를 했다. 공상이 끝난 사내는 다시 광막한 어둠속에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다. 등에는 까끌까끌한 구리동전들이 자신의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작은 호흡을 해도 눅눅한 기운은 자신의 폐 깊숙한 곳으로 밀려왔다. 사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참을 자리에 일어나 공주가 있는 굴로 다가갔다.

“공주님.”

“왜 그러는가 슬라브경?”하고 공주는 사내가 부르자 곧바로 기척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고기를 캐러 갔다 오겠습니다.”

공주는 왠지 나른한지 “알았다.”하고 대답하며 왕가의 보검을 사내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번엔 좀 더 맛좋은 고기를 깨오도록 해라.” “조심하세요.”하며 사제와 공주는 사내를 배웅해 주었다.

사내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와 단단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을 보검으로 깨기 시작했다. 청동조각상의 얇고 단단한 부분을 깨어버린 후 다시 그걸 다듬기 시작했다. 날이 설 때 까지 그것을 갈고 나자 왕가의 보검만큼은 아니지만 날카롭게 날이 선 조잡한 쇠붙이가 사내의 손에 만들어 졌다. 사내는 어제 캐어 버린 고기와 함께 왕가의 보검을 들고 공주에게로 돌아갔다.

“공주님 여기 고기를 캐 왔습니다.”

“흠 그래?” 공주는 평소와 같이 고기를 집어 보았다. “오늘은 아주 좋은 고기 군. 그 어떤 것보다 좋아. 수고했소. 슬라브 경. 영지에 가서 쉬도록 해라.”공주는 사내의 고기에 크게 기뻐하며 입에 넣어 보았다.

“이 맛이라면 신께서도 기뻐할 것이 틀림이 없을 겁니다.” 사제 역시 만족 했는지 그날따라 식사를 거르지 않고 입에 넣었다.

“그럼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하고 언제 나와 같은 말투로 사내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우울은 이제 자신과 함께 축축한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사내는 날이 선 쇠붙이와 몇 가지의 제물을 들고는 좀 더 깊은 굴속으로, 공주의 목소리와, 사제의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을 침묵의 미로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8. 사회적 구성의 변화


‘ ’()와 안의 숫자가 표시되어있는 부분은 아래의 책과 작가에서 인용하거나 변형한 것임.

(1)적막한 집(E. T. A 호프만)
(2)외딴방(신경숙)
(3)변신(카프카)
(4)중세의 가을(호이징가)
(5)뉴욕 3부작(폴 오스터), 유리의 도시(폴 카라식, 데이비드 마추겔리)
(6)엔젤전설(야기 노리히로)
(7)열혈만화가전설 호에로펜(시마모토 카주히코)
(8)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실비 제르맹)
(9)시식시종(우고 디폰테)
(10)니코폴(엥키빌랄)
(11)컴퓨터아트 2006년 05월호
(12)OZ. 오즈로 가는 길(L 프랭크 바움)
(13)광기의 산맥(러브크래프트)
(14)오해(알베르 까뮈)
(15)섹스피어의 기억(보르헤스)




“슬라브님? 슬라브님?” 하고 기도시간이 되자 사제는 사내의 영지로 가 사내를 찾아갔다. 하지만, 아무리 지나도 사내의 대답은 티끌조차 되돌아오지 않았다. 사제는 한참을 외쳐도 사내가 대꾸를 하지 않자 공주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불안한 목소리를 내었다.

“공주님 아무리 슬라브님을 불러도 작은 기척 하나 돌아오지 않습니다.”

사내가 캐온 고기 맛에 만족한 기분이 되어 있는 공주는 무척이나 관대한 말투로 말했다.  

“슬라브 경이 아까 고기를 캐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겠습니까. 피곤해 잠이 든 것 같으니 그냥 놔두도록 합시다. 한번쯤은 상관없지 않소.”

“공주님 아무리 피곤하다고 하여도 기도시간엔 빠질 수가 없습니다.” 하고 사제는 딱 부러지게 답했다. “그런 건 타락한 정신에 가녀린 욕심일 뿐입니다.(1)”

“어허, 오늘은 경이 피곤할 테니 그냥 놔두도록 하자니깐요.”

“공주님 이것은 그 누구의 시간이 아니고 신에게 대화를 청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에 공주님이며, 그 누구도 이 시간은 엄숙히 지켜야 합니다.” 사제는 그렇게 말하며 사내가 있는 영지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공주도 더 이상은 말리지 않고 제단 앞에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공주님!”하고 사제가 급박한 투로 공주를 불렀다.

“로베트 사제, 왜 그러세요?”하고 먼 곳에서 공주는 사제를 불렀다. “사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공주는 미아가 된 이후로 제물이 있는 굴 이외의 곳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이곳을 한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오금이 저리고, 공포가 자신의 종아리를 활키고 허벅지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곳은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금지된 세계로 통하는 문과도 같았다.‘(13) 공주는 몸을 웅크리며 사내가 있는 영지 쪽으로 다가갔다.

“슬라브님이 사라지셨어요!”

공주는 무던한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것 때문에 그러셨습니까? 잠시 산책이라도 갔나보지요.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싶던, 금화를 던지고 빙빙 돌려 섞어 버리든 말든, 산책을 가던지 신경 쓸 필요가 있습니까?’”(11)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산책이라뇨. 슬라브님이 언제 한번이라도 산책을 가신 적이 있었습니까?”

“어찌 됐든 기도는 경이 오면 하도록 합시다.”하고 공주는 사제의 말을 무시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사내의 자치가 영지 내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때쯤 공주의 배는 점점 비워져 가고 있었고, 허기가 짜증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공주는 사내가 언제쯤 되어야 나타나 고기를 캐러 간다고 할지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타나기만 하면 벌을 주고 말리라. 아니, 질이 좋은 고기를 캐온다면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 주마. 정말 어제와 같은 고기를 또 한 번 가져다주면 만족할만한 상도 내려주마. 공주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자신에 허리에 차여져 있는 보검을 만지작거리자 조금씩 기분이 낳아졌다.

“좋아 지금 나타난다면 특별히 용서해주지.”라고 말하고 나니 더더욱 기분이 낳아졌다. 하지만, 그것이 쓸데없는 잡념으로 퍼지기 마련이다. 마음이 안정되는 것은 잠시뿐이었고 다시 불안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사내는 저번 식사시간에 고기를 가져다준 후 여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사내의 영지가 텅 비어있던 것과 왠지 모르게 사내의 이름을 외치던 사제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생각되었다. “사제!”하고 공주는 급박하게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공주님?”하고 무릎을 꿇고 비석처럼 미동도 않던 사제가 되물었다. 그녀 역시 사내의 일로 마음이 심란한 상태였다.

“사내의 영지에 가서 사내가 돌아왔는지 확인해 주시겠어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하고 사제는 공주의 말에 즉각 대답한 후 사내의 영지로 몸을 움직였다. 공주는 지금쯤 사내가 돌아와 평소와 같은 미련한 잠에 빠져 있을 것이라, 아마도 그러리라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참 후에 돌아온 목소리는 그와의 반대의 양상을 띄어가고 있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제의 목소린 힘이 빠져 있었다.

공주는 허세를 부렸다. “걱정 마라. 보검은 나에게 있으니 그 역시 허기가 진다면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결국, 먼저 지친 것은 공주가 되었다. 사내가 무슨 작정을 했는지 갑작스럽게 사라진 경위에 대해서는 공주도 사제도 이해치 못했다. 공주는 손톱을 캐물으며 초조하게 사내를 기다렸지만 몇 번의 허기로 채워진 식사시간과 기도시간이 지나도 사내는 여전히 자신의 영지에 돌아오지 않았다. 사내의 자취는 뜬구름처럼 굴 이곳저곳에 존재했지만, 진정 사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영지를 버리다니. 그건 나에 대한 기만행로다!”하고 공주가 말했다.

부서진 청동조각상 같은 흔적들이 그가 결국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은근한 불안감으로 바스러져 채워졌다. 영리한 공주는 그것이 어떠한 도구를 만들기 위한 흔적인 줄 알고 있었다. 사제는 다시 기도를 드리기에 바빴고, 공주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았지만 그 어느 것으로도 자신의 허기를 없앨 수 없었다. 별수 없이 공주는 보검으로 벽을 긁어 보았다. 쓰디쓴 맛이 나는 벽은 공주의 손에 잘리기엔 너무나도 질기고 단단했다. 결국 욱신거린 손을 문지르며 벽을 자르길 포기해야만 했다.
제물이 있는 굴을 나선다면, 그렇다면 좀 더 질이 좋은 고기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아가 되었던 공포에 질린 공주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공주의 성화에 못 이겨 사제가 몇 번 자신이 갈 수 있을 만큼 가 보았지만 복잡한 갈림길이 나오자 더 이상 진입을 하지 못한 채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괴물의 미로의 중심과도 같았다. 왕궁의 정원에 만들어진 미로 따윈 아이들의 놀이터에 불과했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곳 죽음, 아님 죽음과 직결된 공포이리라. 공주는 이곳을 벗어난다는 공포를 제어키 어려웠지만 사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유목민처럼 적당한 고기가 있는 곳을 찾아 떠나야 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머무른다면 자신들은 허기진 겨울잠을 자는 곰과 같을 것이고, 언 땅속에 죽은 듯 웅크리고 있는 개구리와 같을 것이다.

“흥, 두고 보자.”하고 공주는 이빨 사이에 끼여 있는 고기조각을 씹으며 초조히 말했다. “내가 기어코 큰 벌을 내리고 말리라.”

굶주림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고통 중 하나였다. 그건 사제역시 예외가 아니었지만 사제는 그것보다 신에게 드릴 기도가 우선이었고, 공주가 아무리 닦달을 하여도 이곳은 자신이 정한 신성한 재단이 있는 곳 -임시로 만들었지만- 이기에 여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곳이야 말로 진정 신에 안배한 장소였다는 것이 사제의 주장이다.

“이제 곳 신께서 저희들을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사제의 의지는 확고부동했다.

공주는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슬라브 내가 그의 목을 치고 말리라!” 그것은 허기에 빠진 자신이 몸이 낼 수 있는 마지막 힘이었다. 풀잎과도 같은 자신의 허리가 힘없이 수그려 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던 공주는 벽에다 신경질에 가까운 난도질을 하기 시작했다. “슬라브으으!!!”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냉혹하고 멍해보였다. 더 쉰 것 같기도 하고 더 아득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고‘(10) ‘용암의 아득한 신음 소리’와도 같았다.(13)

남은 분노가 모조리 쏟아지자 공주는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공주가 하는 양을 말리지 않던 사제는 그제야 공주에게 다가가 쓰러진 공주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축축한 이마와 길게 풀어헤친 머리채를 쓰다듬어 주자 공주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사제 너무도 배가 고파.”하고 아이가 되어 버린 공주는 웅얼대며 사제에게 보채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죽겠어. 목구멍에 담즙이 가득 찬 것 같아. 몸이 너무 안 좋아.”(9)

“제가 다시 한 번 고기를 찾아보겠습니다.”하고 사제는 공주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공주님. 신께서 저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제가 공주님의 곁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사제.”

“그런데,” 하고 사제는 말한 후 조금씩 뜸을 들였다. “그가 정말 우릴 버린 것일까요?”  

그것은 공주가 그토록 인정하기를 원치 않았고, 입에 담기조차 꺼렸던 말이었다. 사제의 그 목소리가 이명처럼 굴 주위에 떠돌았다. 그 말에 공주는 흘러나온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분노와 굴욕 여타의 이해 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섞여 있던 그런 복잡한 눈물이었다.
사제는 다시 공주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곳은 공주의 목소리와 사제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괴물의 어느 부분이었다. 싱싱한 고기가 벽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바닥역시 다른 곳보다 습기가 적었다. 사내는 그곳에서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고기들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이곳은 그 누구도 침범 할 수 없는 나만의 천국. ‘가장 좋은 상태일 때면 사내는 자기가 어느 곳도 아닌 곳에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5)

“제까짓 것들이. 어디 한번 당해보라지.”

다시 하나의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허기가 채워지고 나면 사내는 자신 만에 공상에 빠져들었다. 아무도 없는 외딴 무인도나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에서 자신은 언제나 홀로 있었다. 주위엔 언제나 넘칠 만큼의 식량과 안락한 휴식은 끝도 없었다. 사내는 흥에 겨워 콧노래를 했다.

“‘트들 윈들 아이들, 움팜팜! 움 팜파므 움팜팜!‘(12) 천국이로구나.”

공상에 잠겼던 눈을 뜨자 주위는 온통 어둠뿐이었다. 온통 어둠. 보이지 않는 벽과 눅눅함만이 존재하는 그런 어둠이었다. “흥, 천국이야. 천국이지.”하고 울적한 마음은 어느새 질퍽질퍽한 벽돌이 되어 다시 자신의 주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사내는 다시 고기를 씹기 시작했다. 공허한 침묵 속에 버릇처럼 씹던 고기는 어느새 그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내일도 모래도 앞으로도 영원히 홀로 남을 생활이 변함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사내 역시 지쳐가기 시작했다. 보복에 가깝던 그 마음도 어느새 수그러들고, 좀 더 단순화된 생활은 지리멸렬한 무료함으로 만들었다. 이젠 그 어떤 우울함이 겹쳐진 깊은 심층의 정체를 좀 더 신중히 관찰할 수 있었지만, 사내는 그녀들이 지금 받고 있을 고통을 상상하며 고집을 부렸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그가 느낀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닫고 나자 그녀들에게 더욱더 다가갈 수 없었다. 그것은 자기의 항복의 선언, 백조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한 오리새끼, 백기를 들고 머리를 조아리는 패자와 같았다.

“내가 알 바 아니지.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 왔다고.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

그 감정의 정확한 정체는 소외라는 우울하고 낮은 존재감이었다.
하지만 사제는 어쩌지?
깊은 우물에 뛰어든 사내의 그런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극에 달하게 되었다. 공주와 사제 역시 허기에 지쳐 웅크리고 있었다. 사제가 몇 번 고기를 캐러 다녀오기는 했지만 쉽사리 그녀들에게서 허기를 뺏을 수가 없었다. 지쳐가는 눈꺼풀이 이 공간이 자신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것을 대변해 주었다. 공주는 당연시되어가기 시작하는 공포에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점점 텅비어져가기 시작했다. 산소가 사라진 공허한 머릿속엔 그다지 남아 있지 않은 상념들이 공주의 안식을 방해하거나 또 희망으로 만들었다. 가장 강렬하게 남은 그 감정 중 하나는 사내에 대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불쾌할 수 있던 그 무언가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혹시나, 정말 만약에, 정말 그 어떠한 극단적 상황에 그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지? 그럼 칼을 내려쳐야 하나 반겨야 하나? 그의 손에 고기가 들려져 있다면? 그렇다면, 예절조차 무시하고 그에게서 고기를 뺏어야 하나 말아야하나? 그가 잘못을 구한다면? 머리를 땅에 두드리고 용서를 빈다면?

그때 “사제님?” 하는 목소리가 제물이 있는 굴속에 살금살금 거리며 침입했다. 공주는 먼저 그것이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환청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제역시 그 목소리에 반응하였다.

“설마. 슬라브님?”하고 사제가 중얼거렸다. 사제 역시도 그 목소리가 환청인지 아니면 자신의 귀에 울리는 진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조용해주세요.”하고 사내는 사제가 있는 제단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혹시나 허기에 빠진 사제가 굶어 죽을지 모른다는 사내의 생각이 제물이 있는 굴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제가 여기 고기를 조금 가져 왔습니다.”

“넷?!”

“쉿! 조용해 주세요. 공주가 깨지 않게…….”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고기 한 덩어리를 사제의 손에 쥐어 주었다. 마른가지와도 같은 사제의 손을 잡자 사내는 갑작스럽게 죄책감이 들었다. “로베트 사제님만 드세요.”
그때였다.

“이노오옴!!!”하고 그 어떤 때보다도 악독하고, 차가운 공주의 목소리가 굴 안에 울렸다.

“?!”

긁혀질 때로 긁혀진 공주의 음성은 사내를 질리게 만들게 충분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공주는 자신의 허리춤에 차여져 있는 보검 빼어내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여태껏 앓고 있었던 감정이 폭발한 공주가 달려들자 사내는 “으악”하고 뒷걸음질 쳤다.

“으아아아! 켁켁!”하고 공주가 괴성을 질러 대었다.

끔찍한 분노로 휩싸여진 이성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사내는 공주의 기세에 놀라 도망가기 시작했다. 사제가 말릴 새도 없이 공주 역시 사내가 도망치고 간 방향을 쫓아가며 이리저리 칼을 휘둘렀다.

“으아아!!! ‘끄이에에에!!‘(6)”

  축 늘어졌다고 생각했던 몸은 사내를 쫓아가며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지만 결국 사내의 기척이 줄어들자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목에 피가 뭉쳤는지 자꾸만 아파왔다. 공주는 숨을 헐떡이며, 조금씩 느리기 뛰었다. 자신이 뛰어온 방향을 다시 되짚어 가려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뜨겁게 달아오르든 머리가 점점 식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또다시 미아가 되었다는 사실에 공주는 침묵에 빠졌다.

“하아! 하아! 하아!” 주위는 온통 공허한 어둠뿐이었다. 공주가 헐떡이던 숨은 점점 격해져만 갔다. 막막한 공포가 다시 한 번 공주의 머리를 죄어왔다. 극도로 부족한 산소가 자신을 점점 어지럽게 만들었다. 혼자였다. 또 다시 혼자였다.


“하아! 하아!”

“공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대하지만 않았어도 이러지는 않았을 겁니다!!”하고 갑자기 먼 곳에서 사내가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공주의 공포를 쫓아 버렸을 뿐만 아니라 발악할 수 있는 기운까지 되찾아 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하고 공주가 큰소리로 대꾸했다. 목은 더욱더 아파왔다. 시큼한 맛이 혀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대체 무엇을 어찌했다고 그러는 거냐!! ‘독특한 행동을 함으로써 영예와 명성을 얻으려는 마음이냐?(4)’”

“나는 그런 식의 대우를 바란 것이 아니야!!”하고 사내는 반항하듯 외쳤다.

“그런 식의 대우라니?” 하고 공주가 물어보았지만 사내는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무엇을 바라는 거냐!! 어디한번 말해 보거라!!”

“…….”

  사내의 침묵은 길고도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그럼 나보고 고기를 캐오라는 것이냐?”하고 공주가 침묵으로 이루어전 공허가 두려워 소리쳤다.

“그건 아닙니다!”하고 한참 후에 사내가 외쳤다.

“그럼 너는 아무 이유 없이 불만에 빠져 영지를 벗어난 것이 불과하지 않느냐! 그것과 고기를 캐오지 않은 것이 큰 죄가 되는 것을 너는 정령 몰랐단 말이냐!!”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겁니다. 세금을 바치지도 않을 것이고 영지로 돌아가지도 않을 겁니다!”

“안돼!!”하고 공주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것들을 모두 용서해주겠다! 지금 돌아온다고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 ‘너의 모든 것을 내가 받아주마.’(7)”

“흥! 싫습니다! 용서를 구할 생각도 없습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제 멋대로냐너는!!” 결국 공주는 사내의 심통에 막막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피가 터진 공주의 목소리는 쪼개져 버린 쇳조각을 그대로 갈아 마신듯 이전보다 말도 못할 정도로 흉해져 버렸다. “켁켁! 그럼 네 멋대로 해라!! 켁! 네가 어쩌지 않아도 나는 돌아갈 길도 모르고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으엉엉엉!!”

공주가 갑작스레 허점을 드러내 버리니 사내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공주님이 울 이유가 없잖습니까!! 공주님은 손해 본 것이 없으니깐!”하고 사내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공주에게 다가갔다. 어쩌지도 못하는 상황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한참 후에 다시 냉정을 찾아가기 시작하는 공주가 훌쩍거리며 울음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그럼 부족한 것을 말한다면 들어주겠다. 흑흑!”하고 공주는 줄어둔 눈물소리를 섞어가며 말했다.

부족한 것? 대체 그것이 무어란 말인가. 그것을 사내가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사내가 ‘자신의 침묵에 마침표를 찍으려다 보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사람은 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서먹서먹하게 얘기를 시키고 있었다는 생각. 그것이 자신의 혼돈과 고통을 줘 광막한 어둠속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어둠과 저 무리속의 어둠의 차이는 분명 존재했다. 다가감으로 얻을 수 있는 안식 역시 엄연히 존재했다.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또 다른 사내는 처음부터 다시, 처음부터 다시를 속삭인다.‘(2)

“나는 단지, 단지…….”그렇게 우물거리던 사내는 입을 다시 닫았다. 침묵은 다시 사내와 공주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한참 후에 사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세금을 다시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공주의 울음소리가 죽어가는 만큼 사내의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고기를 다시 캐 드리겠습니다.”

머리가 차가워지고 나니 결국 결론이 뻔하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사내는 고개를 숙였고, 전과 같은 소외감이 반복되리라는 것과 앞으로도 영원히 자신의 삶은 단순한 노동과 식욕과 잠, 그리고 가끔의 공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았다.” 너무도 쉬어 있어서 잘 들리지가 않았지만 공주는 짧게 대답하였다. 너무나도 간단히 대답한 공주의 목소리에 사내는 조금의 허탈감을 느꼈다. 자신의 위엄을 되찾으려는 공주는 자리에 일어나 어질 거리는 몸을 힘겹게 지탱했다. “다시 돌아가도록 하자. 나는 길을 모르는데다,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다. 네가 안내해 주었으면 한다.” 전처럼 냉정해진 목소리로 공주는 말을 했다.

“알겠습니다.

사내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신분적 괴리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한번 화를 터트리고 나니 조금은 후련해지기도 했다. ‘이제 삶의 길은 시듦, 노란 잎사귀로 다시 전략해 버렸다.’(15)

“내 손을 잡아 주기 바란다.” 공주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더듬어 공주의 손을 잡은 사내는 자신이 그동안 많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공주의 손은 자신이 그토록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판이한 형태였다. 그녀의 무시무시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손은 작았고, 굳은살도 없이 보드라웠다.  공주는 기괴하기 비틀어진 가지도 아니고, 곧 바스러질 낙엽 역시 아니었다. 주변에 빛이 있었다면 ‘그녀가 두 볼이 창백해질 정도로 갖은 고생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탑스러운 처녀임을 느꼈다. 사내는 말수가 적어지더니(3)’ 다시 몸을 움츠렸다. 공주는 아직 생생히 피어오르는 튤립이었고, 혼기에 가까워져 오는 소녀였다.
제물이 있던 굴로 돌아오니 사제는 여전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 후 기도가 끝나자 사제의 목소리는 기쁨에 넘쳐 소리를 쳤다.

“신께서 제 기도를 들어 주셨군요.” 사제는 사내와 공주를 꼭 끌어 앉아 주고는 확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신께서 꼭 우릴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사내가 캐온 고기는 굶주렸던 사제와 공주에겐 그 어떤 것보다 만족스러운 식사가 될 수 있었다. 이제 안심을 해도 될 것이다. 이젠 괜찮겠지. 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아 남지 않으리라. 이 어두운 공간에 말도 못할 빛이 내래쬐고, 바다를 건너 끝없는 하늘에 다다를 수 있는 계단이 이제 곳 내려오리라. 허기가 채워지고 나자 머드 편안한 잠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사내 역시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다. 체념에 빠지고 나자 어떤 마음의 안정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공주의 손을 잡았던 그 감촉이 다시 살아났다. 사내는 조금씩 잠이 들었고, 꿈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사내는 철이 들기 전의 어린 아이었다. 옆엔 아버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고 반대편엔 곡괭이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자신들의 주위엔 폭도들이 우글거렸다. 저 앞 단두대의 누군가가 소리치자 폭도들은 척척 발을 맞춰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엔 으리으리한 저택이 널려 있었다. 저택 앞에 다다르자 일사불란하던 걸음걸이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앞 다투어 저택의 쇠창살을 곡괭이로 치기 시작했다. 아이가 된 사내도 그리고 아버지도 그들과 함께 곡괭이를 들어 쇠창살을 무너뜨리고, 저택으로 침입하였다. 사내는 웃음이 났다. 주위엔 온통 제물 이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자신들의 것이다.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들은 곡괭이의 위협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다음 저택도. 그 다음저택도. 이 곡괭이만 있으면 돼. 저 멀리 있는 성까지 무너트릴 수 있을 거야.

사내가 꿈에서 깨어난 것은 공주의 목소리 덕뿐이었다. 공주는 어느새 자신의 영지 가까이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슬라브 경! 슬라브 경!” 공주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져 있었다. 공주 역시 쓰린 목 덕 뿐에 크게 낼 수가 없었지만 사내는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수 있었다.

“공주님?”하고 사내의 되물음에 공주는 사내가 들리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제물이 있는 굴을 벗어난다는 것은 공주에게 상당한 용기를 필요한 것이지만 공주는 참고 다가가 보았다.

“말해 보거라.”하고 공주가 서두 없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인지……?”

“나는 네 마음을 전혀 이해치 못하겠다.” 공주의 말에 사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내가 대답이 없자 공주는 조금 더 사내에게 다가갔다. “너 역시 바라는 것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 공주가 다시 물었다.

“없습니다.”하고 사내는 한참 후에 딱 잘라 말했다.

“그것이 정말인가?” 하고 공주가 마지막으로 확인하였다.

“네.”

“알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런 불미스러운 일어 결코 없었으면 한다.”

“명심하겠습니다.”사내는 짧고 절제된 대답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나는 이제 돌아가겠다.”

공주의 말에 공주의 손을 다시 잡고 싶었던 사내는 순간적으로 입을 열었다. “영지까지 제가 이끌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여라.”하고 공주 역시 만류하지 않았고, 사내는 조심스레 공주의 손을 찾아 잡았다.  

다시 잡아본 공주의 손은 여전했다. 사내가 힘을 주었는지 공주가 쌕쌕거리며 부서진 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손을 다지 잡게 된 놀라움에는 벌써 어떤 고양된 감정의 혼란스러운 충동이 깃들어 있었고 그래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은근히 마음이 흔들렸다.‘(8) 결국, 욕망과 이성이 허물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내는 갑작스레 욕심을 부리고는 공주를 자신의 영지 쪽으로 끌어들였다. 공주 역시 사내의 반응에 놀라 벗어나려 했으나 우악스런 손길이 공주를 밀어뜨리자 공주는 더 이상의 반항을 하지 않고 사내의 몸짓이 이끌러 갔다.

“소리 지르지 말아 주십시오. 공주님” 하고 사내가 위협인지, 주의인지, 아니면 부탁인지 애매모호한 톤으로 말했다. “고기는 부족하지 않게 캐드리겠습니다. ‘그건 제 손에 언제나 걸려있는 돌멩이와 같아요. 쉬운 일이죠. 저는 거기에 이끌려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돌멩이 없이는 살지 못하겠죠. 제발 나쁘게 해석하지 말아주세요, 아르하 공주님, 인제 제게는 아무 말씀도 말아주세요. 아무것도…….’(14)”

  이제 공주는 사내가 지금부터 무엇을 하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공주는 입을 다물고 이빨을 깨물었다. 사내는 조급함에 빠진 듯 공주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지만 되도록 신사적으로 일을 치르기 위해 노력했다. 공주의 가슴을 잡아 쥐는 손 역시 힘이 풀어져 있었고, 등을 세차게 끌어당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프게 하지는 않았다.

사내가 공주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추면 공주 역시 입술을 벌려 주었다. 하지만 사내의 손이 목둘레를 지나 머리채를 풀어헤치자 그만 소리를 지르며 사내를 밀치고 말았다.

“싫어!”

순간 사내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를 고통스레 압박했다. 입술은 정신없이 몸을 훑고 지나가며 불쾌한 기분에 빠지게 했다. 공주는 사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진정해라. 놀란 것뿐이다. 진정해라.”

“죄송합니다. 공주님.”공주의 목소리에 이성이 돌아온 사내가 힘을 풀어 주었다.

  방금 전의 일로 공주는 사내가 언제까지나 이성적으로 행동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처럼 쉽게 무너질 것이다. 자신을 더듬고 있는 저 망아지의 고삐는 갈수록 느슨해 질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사타구니를 잡고 싶어 할 것이고, 아랫배를 압박하며 허벅지 사이에 몸을 비벼댈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일이 있을 수도 있다.



9. 새로운 형식의 출현



감옥 같던 인생이 조금 더 낳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수많은 미로 속에서 방황을 하던 일은 이제 없었고, 고기를 캐 오는 것은 기쁨 중 하나가 되었다. 고기의 질은 더욱더 좋아졌다. 모든 삶이 예측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 역시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형태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까지와는 전혀 판이하게 다른 친밀감이 쌓여가고 있었다.
  보검을 받으러 공주에게 다가가면 사낸 조심히 이마를 쓰다듬어 주거나 -아이나 연인에게 하듯이- 입을 맞추었고, 공주 역시 성가시게 굴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의 모습에 편안한 마음으로 응대해 주었다. 하지만, 가끔 사내가 공주의 몸을 더듬거나 가슴을 훑어 부풀어 오르게 하는 그것이 어떤 대가인 마냥 구는 것이 공주는 늘 못마땅하기는 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지금과는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처음엔 공주와 사내도 은밀히 문틈을 관찰하는 아이들이나 소심한 다람쥐들처럼 굴었다. 혹시라도 사제가 눈치 채지 않을까? 숨을 죽여 서로를 보듬어 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조심성은 허술해 지기 마련이었다. 사제가 있는 제단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관계를 맺다 나중에 가서는 헐떡이는 숨소리나 그와 비슷한 신음소리가 들리지만 않으면 어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사제가 바로 옆에 있다고 “호오, 이 고기는 아주 맛이 좋구려.” 하며 딴청을 부리며 서로의 몸을 찾아다녔고, 웃음이 나오고 거친 숨소리가 나오는 입을 막으며 몸을 비벼 되었다. 그것은 스릴 있는 행동 중 하나이며 다른 즐거움의 부분이며 하냐의 유희였다.
사내는 구애를 하는 공작새나 왕국의 어릿광대마냥 공주의 흥을 돋워 주려고 노력했다.

“이제 수염이 공주님의 머리채만큼 자랐습니다. 공주님의 머리채와 함께 묶으면 서로 길을 잃어버리는 일도 없겠지요.” 그런 농담을 하거나. 가끔 우스꽝스런 소리를 지르면 공주 역시 조신한 체를 잊고서 키득거렸으며 어떤 때는 사제가 기침소리로 주의를 준다 해도 대놓고 박장대소를 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내는 공주의 머리채를 가지고 장난치는 일이 많아졌다. 공주 역시 사내의 가슴에 기대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마음이 안정되고나자 사내는 이제 그런 일을 좀 더 당연시 생각하게 되었다. 공주는 이제 사제보다는 사내를 찾아가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물론 사제가 그런 낌새를 느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제가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은밀한 소리는 대범하게 굴 안에 떠돌았고, 자신의 명상이나 기도를 방해할 때면 사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건 사제가 지금껏 겪어 오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문제라 이불에 오줌을 지린 아이마냥 굴 수밖에 없었다. 사제는 우물쭈물하며 사내와 공주 사이의 간격을 조금이라도 먼 곳으로 떼어놓으려 노력하거나 비난처럼 기도소리를 높였다.

“신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불쾌하고 더러워. ”우리를 구원하옵서서!“ 제발 좀 떨어졌으면. 공주님이 그러시다니. 불결해! 불결해!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들의 행동은 더욱 격해졌으면 격해졌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은밀한 소음이 사제에게 들으라는 듯이 굴속에 떠돌자 사제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하게 되었고, 사내나 공주도 더 이상의 관계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터인가 공주의 식욕이 게걸스럽다 못해 미친 듯이 변하기 시작했다. 허기에 굶주린 사람처럼 고기를 찾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것을 주체하지 못해 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로베트 사제. 나를 위해 기도를 드려주시겠어요?”하고 어느 날인가 공주가 그런 부탁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잘못되기를 감지한 불안한 음성이었다.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그때쯤 너무나도 많은 변화가 사제의 골머리를 흔들고 있었기에 사제는 공주의 그런 부탁이 그런 골머리를 썩이게 하는 종양의 일부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신께 청하기로 하지요.”

그 문제는 사내가 이제 공주에게 경어를 사용하지도 않았기 때문도 아니고,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여자인 마냥 대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건 사제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공주 역시 사내와의 관계를 벌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어째서 갑자기 그런 행동의 변화를 보이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사제에게 있어서는 반가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공주의 그런 행동들이 사내의 감정을 자주 고조되게 만들었다.
고기를 산더미만큼 캐오던 어느 날 공주가 사내와의 관계를 거부하였다. 공주는 달팽이처럼 움츠려 들며 지금껏 없었던 반항을 하였고, 사내에게 벗어나려 하자 사내는 화를 내며 그만 주먹을 잘못 놀리고 말았다. 난동을 부리던 사내의 주먹이 우연히 공주의 가슴과 배를 강타하였고 공주는 밧줄에 묶여 불태워진 동물처럼 소리를 질렀다. 깊은 늪 속에 살고 있는 두꺼비보다 불쾌하고 천박한 울음이 동굴 전체에 울렸다.

  “꾸에에에에엑!!”하고 공주 자신조차 놀라게 만드는 울음이었다. 하지만, 공주는 이제 자신의 울음을 막지 않고 질러대었다. 사내가 자신을 때리다니. 그건 공주가 언젠간 우려하던 그러한 상황이었다. 공주는 오열을 하며 사제에게로 도망을 쳤다. 사내 역시 자신의 행동에 놀라며 공주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전에 사제가 사내의 행동을 저지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아요!! 내 손엔 칼이 들려 있어요!”하고 사제는 사내를 위협하며 소리를 쳤다. “신이 보시는 앞에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하실 수가 있죠?”

“죄송합니다. 결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그녀를 잘 대해주었는지 알지 않습니까.” 하고 사내는 지루한 항변을 하며. 공주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하. 내게 돌아와요. 내가 실수를 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요.”

  하지만, 공주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며 사제의 뒤로 움츠려 들기만 했다.

“공주님은 당신과 마주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영지로 돌아가 주세요.”하고 사제는 조용한 어투로 사내에게 부탁을 하였다.

“아뇨! 나는 그녀를 만날 권리도 있고 그녀에게 매를 들 권리가 있습니다. 사제님도 이제 아실 것 아닙니까. 아르와의 나와의 관계를.”하고 사내는 여느 결혼한 남자가 그렇듯이 무턱대고 신랑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건 부정한 관계입니다. 슬라브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발을 들여 놓지 말아 주십시오. 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매를 들 권리는 없습니다. 더 이상 다가오면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단지 공주가 왜 갑자기 이러는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아르하! 내가 무슨 잘못을 하기라도 했어?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사내는 자신의 머릿속이 지극히 차가워졌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차분한 어투였다. 자신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정신은 여전히 그대로이며, 자신은 언제라도 변함없이 그녀를 존중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조용히 말했다, “아르하? 왜 이러는 거야!”

“싫어!!”하고 공주가 소리쳤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아르하!”

한참 후에 공주가 우물쭈물하던 입술을 열었다.

“배가 불러와. 점점 더 크게…….”

“뭐?!”하고 사내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되물었다.

“안 돼. 이젠.” 하고 공주가 자괴감에 빠진 듯 말했다. “이제부턴 안 돼.”

  공주의 말은 곧바로 사내의 머릿속에 이해되지 않았다. 기묘하며 괴상한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생명이 솟아나오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매일같이 고기를 캐고, 먹고, 기도를 드리는 무던하고 예측 가능한 삶에 또 하나의 누군가가 끼어들려 하는 신호탄에 사내는 할 말을 잃고서 있었다.

“공주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하고 침묵 속에 사제가 끼어들었다. 사제는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말 그대로라면 이 저주받은 괴물의 뱃속 안에, 그러니까 공주의 뱃속 안에, 사내와 공주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말이 된다.

“아르하 왜 그걸 여태껏 말하지 않았지!”하고 사내가 소리치자 공주는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싫어! 싫단 말이야. 켁켁!! 나는 두려워. 혼란스럽고 두려워. 켁!”하고 공주는 기침과 함께 소리를 쳤다.

“괜찮아. 괜찮아.”

“켁! 이젠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켁켁켁!! 죽고 싶어.”하고 공주의 가식적인 말에도 상관없이 사내는 한참 동안 공주를 달래기 시작했다. 사내는 생각했다. 여기가 더럽고 낡은 방이었으면, 알싸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오래된 모포가 단 한 장만이라도 있었으면, 마른 짚단이 주위에 둘러쳐져 있었으면, 축축한 습기가 사라져주었으면, 방금 한 자신의 천치 같은 행동이 공주에게 어떠한 해라도 미치지 않았으면 바랬다.

  “아르하 괜찮아. 응? 아르하 이리와!”

혼란은 정리가 될 줄 몰랐다. 이 원망스런 공간은 당연한 생리적 형상까지 절망으로 변해 버리게 하고 있었다. 사내는 공주를 끌어 않아 주었고. 공주는 한참 후에도 눈물을 그치지 않은 채 사내의 품안에 있었다. 모든 것이 고장 나 버린 것 같았고 느끼고 있는 감정을 대체 어떻게 분류할지를 몰랐다. 사제는 이것이 진정 신의 어떠한 계시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곧 자신들은 구원될 터인데 아이가 태어난다니? 그럼 이 저주받은 공간에서 태어난 그 아이는 이제 어떻게 하지?
그럼 그 아이는 신에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혹시, 그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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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구덩이 앞을 지키고 있던, 지켜야 할 로베트의 삶에 대하여.




더 이상 비와 눈이 내리지 않는 먹구름 낀 하늘처럼 불길한 기운이 한참 동안 사제의 마음속에 내려앉았다. 빈혈이 일어나고, 몸의 온도가 급작스럽게 올라가거나 냉기를 내뿜을 만큼 내려갈 때도 있었다. 심장이 이상 박동을 하기도 한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다 못해 뽑힐 것 같은 그런 오한이 시작된 것은 공주가 아이를 낳고나서 부터였다.
아이의 이름은 공주의 뜻에 따라 호프눙(Hoffnung)이라 지었다. 사실 아이는 신의 품으로 가야 했다고 사제는 생각했다. 사내의 주먹이 공주의 배를 강타했을 때는 내심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다. 부정한 아이였다. 부부의 서약을 하고서 낳은 아이도 아니었고,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태어난 이이였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정말 그랬다면 더욱 행복하지 않았을까? 더 이상 이 어둠속의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는 곳으로 갔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진정 우리가 가야만 하는 곳, 빛이 떠도는 순백의 세상.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신의 품으로. 우릴 구원하기 위한 신의 품으로 갈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낳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가끔씩 소스라치게 놀라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낳았겠지.”

정말 그럴까?

그날 이후에서부터 사제의 꿈에 몹쓸 공포가 침입하기 시작했다. 신전에 주워져 로베트란 이름을 받기 전, 그 일은 자신의 가장 깊은 심층부에 숨어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절대 외부로 표출되는 법이 없는 그 비밀은 사제가 의식하지 않은 사이에 사제의 손톱 끝부터 장악하기 시작했다. 쥐처럼 사각사각 혹은 아이의 젖니처럼 야금야금 사제를 베어 먹는다. 그런 서서히 밀려오는 공포와 낮은 수면상태에서 사제는 꿈을 꾼다. 혼란스런 그 꿈의 시작은 아주 오래전 자신이 철이 들기 전 사춘기 무렵부터였다. 그 꿈은 먼저 즐거움으로 시작한다. 언제나 로베트는 어렸을 적 아이들 중 가장 머리가 크던 옹그리란 아이와 손을 맞잡고 신전주위를 산책 하고 있었다. 옹그리는 로베트의 손을 이끌며 온통 즐겁고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전에 들어가서도 그 즐거운 이야기는 그칠 줄 모른다. 신전의 제단 위엔 은색의 접시가 놓여 있는데 거긴 붉은색 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때의 어린 로베트도 지금의 로베트도 이해치 못했다. 빨간 푸딩인가 싶었다. 옹그리가 그것을 집으려 하니 로베트가 급히 그걸 막고서 자신이 가지려 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급박한 감정변화에 옹그린 로베트를 밀쳐내며 은색접시 채 들어 그걸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퉤! 더러운 놈! 더러운 놈! 더러운 놈! 퉷! 퉷! 퉷!‘ 하고 옹그리고 쓰레기통에다가 침을 버리고 욕을 하자 로베트는 흡사 자신에게 하는 듯 그 욕에 심한 모멸감과 불쾌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다.
사제는 꿈에서 깨어나 온몸을 죄여오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구토가 쏟아질 것 같은 썩은 손가락이 자신의 입을 벌리고 혀와 식도를 압박해 심장과 폐 부근을 이리저리 뒤흔들고 있는 듯했다. 사제는 자신의 옆에 공주가 있는지부터 확인을 하였다. 식은땀이 흐르는 손으로 자신의 주위를 엉금엉금 기어가며 더듬어 본다. 공주는 아직 잠에서 깨어 나오지 않았다. 사제는 공주의 손을 잡으며 자신의 몸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공포를 떨쳐내려 했다. 공주의 품에 있던 아이가 작게 보채며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사제의 몸이 순식간에 움츠려 들었다. 사제는 어떻게 하지도 못한 채 한참을 우물쭈물 거리다 제단으로 돌아갔다. 사제는 아직까지 아이의 체온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옹그린 부모가 없는 아이들 중 가장 먼저 생리를 했고, 가장 먼저 신전을 떠났다. 지금쯤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자신은 가장 늦게까지 남았고, 생리를 하지 않았고, 결국 이런 괴물의 몸속에 있게 되었다. 이것 역시 신의 뜻이리라.

정말……?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거지?” 아니 괴물의 몸속에 있는 것 자체가 잘못인가? 이곳에서 아이를 낳은 것이 잘못된 것인가? “신이시여 언제까지 저는 이곳에서 시험을 받아야 합니까?”

“허허허! 미처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하다. 허허허! 나는 너희들이 괴물의 몸속에서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 살아 있었네? 허허허! 어이쿠, 아이도 낳았네. 허허허허!” 하고 어느 날 신이 너스레를 떨며 말한다면? 아니 사제 자신은 신의 뜻을 아직 이해하지 못할 뿐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시간이 너무나도 흘러갔다. 괴물안의 삶의 모습이 밖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흡사해지자 사제는 이것이 모순인지 그 어떤 무엇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사내는 여전히 일정한 간격으로 고개를 캐온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생한 현실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때론 피곤해 공주에게 투정을 부리기도하고, 짜증을 내며 자신에게 부과된 소임을 회피하며 화를 내기도 한다. 그와 반대로 흥겨울 때는 고기를 캐오기 전에 공주와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춰주고 휘파람을 불며 일을 하러 가기도 했다.
공주는 자신의 뱃속에서 낳은 아이의 젖을 물려주거나 울고 불며 보채면 몇 시간 동안 아이를 달래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의 모습에 화내기도 했고 웃기도 했다. 게다가 사내의 신경질적이고 극단적인 모습에 많은 시간을 싸우기도 했고 사제에게 와 몇 시간 동안 하소연을 하며, 위로받기도 했다. 헤어진다든가, 아이 때문에 산다든가, 죽지 못해 산다는 소리를 듣다가 사과하러온 사내의 저자세에 다시 풀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머리를 숙이고 다가가 사내에게 애교를 부리며 기분을 맞추어주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 때면 사제는 너무나도 기이한 기분에 자신이 있는 이 공간이 대체 어떤 곳인지 파악을 하지 못 할 때가 있었다. 이곳은 진정 어디란 말인가?

“당신들은 정말 구원받고 싶은 겁니까?”

“네, 그럼요.” 하고 사내와 공주는 서슴없이 대답하다 기도시간이나 제사가 끝나면 구원이나 그런 열망적인 것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정말로 신에게 구원받고 싶은 겁니까?”

“당연하죠.“

그런 모순적인 대답에 대해 사제가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들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색깔도, 냄새도 없이 소리와 연한 촉감만으로 존재하는 아이는 괴물의 몸속에서 천천히 자라나고 있었다.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울고 보채며 어미의 젖을 찾았다.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재롱을 부리면 사내나 공주는 거기서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세월이란 권태로움은 마수처럼 점점 그들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사내는 아직도 공주와 아이를 사랑했지만, 가끔 공주의 감정 섞인 쇳소리가 자신의 귀에 울릴 때면 귀를 틀어막고 싶었고, 공주의 성대를 없애 버리고 싶었다. 사제의 기도소리가 동시에 들릴 때면 그러한 충동적인 기분은 더했다. 사내는 사제의 음성이 이 세상의 무엇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외모역시 이세상의 무엇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여신보다 더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사내의 생각은 어떤 신성한 감정과 더불어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하는 범접함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와 전혀 상반된 추악하고 파괴적인 수컷의 본성역시 가지고 있었다. 사내는 그걸 자신의 이성의 빗장을 걸어서 꼭꼭 숨겨두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사내의 극단적인 난폭성은 어떤 주기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사내자신의 신분적 열등감과 관계가 있기도 했지만, 그와 전혀 다른 자극에도 폭발하기도 했다. 사내의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던 폭약이 한번 터지고 나면 주위엔 성한 곳이 없어졌다. 대부분의 화살은 공주에게로 쏟아졌다. 공주라는 신분을 트집 잡았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싫다며 화를 낼 조짐을 보이면 공주는 싸우거나 질겁하며 사제에게로 뛰어들기 일쑤였다. 사내는 그런 공주의 모습에 어떤 만족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가 약탈한 저택에서 느끼던 그런 만족감과 비슷했다. 곡괭이를 쥔 자신이라면 저택이든지 성이든지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었다.
사내가 터트린 화가 바닥이 나면 언제나처럼 공주에게 다가가 자신의 잘못을 빌며 애원하였다. 잘못했다며, 자신의 실수였다거나 악마가 자신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기도를 하거나 신에게 죄를 빌고 나면 자신은 괜찮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공주를 달래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공주는 뿌리치지 못한 그 손으로 사내를 보듬어 주었다. 공주에게는 단 하나뿐인 남편이며, 이 좁은 세상의 유일한 남편이기도 했다.

“사제님 제가 죽일 놈입니다.”하고 사내는 사제의 손을 잡으며 빌었다.

“진심으로 신에게 기도를 드리면 지금까지의 죄는 모두 없어질 것입니다.”하고 사제는 여느 때와 같은 소리로 말했다.

정말일까? 정말 그럴까? 그의 죄는 모두 사라진 것일까?

“사제님, 감사합니다.”

“신께서 우릴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사제는 그런 사내의 모습이 못마땅한 것이 당연했고, 그런 그의 모습은 이제 구원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삶의 방향성이라던가,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모든 것은 우발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구원을 바란다며 말하고 있다. 사제에게 있어서 문제는 사내만이 아니었다.  진정 두려운 것은 새로 태어난 사내와 공주의 아기였다. 사젠 공포로 칠해진 꿈의 원인이 아이에게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것은 어떤 병균처럼 자신의 발톱에서부터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점점 위로, 점점 위로, 점점 위로, 점점 위로, 발목을 타고 허벅지와 사타구니를 타고, 배꼽을 건너서 가슴과 목을 지나 자신에게 있어 어떤 금기와도 같은 것을 파헤칠 것 같았다. 그렇기에 공주가 아이를 한번 앉아 보라며 권할 때에도 사제는 별의별 이유를 들먹거리며 피하기 일쑤였고, 혹시라도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아이를 멀리했다.
  사제는 오늘도 꿈을 꾸었다. 언제 나와 같은 꿈이었다. 그 속에 자신은 옹그리란 아이와 산책을 하고 신전 안으로 들어가 불쾌하고 경멸적인 말을 듣고, 추악한 공포에 질린다. 깨어나면 어김없이 공주를 찾았다. 공주의 손을 잡으며 안정을 찾았고, 안심을 했다.

“신이시여,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하고 사제는 매일처럼 기도를 했다.

사제는 아이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고, 울음소리조차 듣기 싫었다. 공포에 질린 꿈 역시 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꿈과 현실 곳곳에 나타나 사제를 괴롭히고 있었다.

“신이시여. 저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이곳은 매일 같은 노동에 슬픔과 근심 고통만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들은 신을 기만하며 자신의 죄를 건성으로 뉘우치고 살고 있습니다. 신이시여…….”

괴물 속의 삶은 모두 거짓이다. 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삶의 가치는 저 위에 있는 빛의 세상으로 가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곳은 노동할 필요도 없으며, 아이를 낳을 필요도 없다. 기쁨이 가득한 것이다. 사제의 몸은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만 갔다. 마치 말라빠진 갈대처럼 질려버린 몸과 마음이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있었다. 사내와 공주는 그런 사제의 모습에 걱정을 했지만 사제는 이제 신의 품으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들을 다독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고기를 캐고 돌아온 사내는 그날따라 기분이 좋은지 공주와 아이와 함께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다 자꾸만 심신이 약해져만 가는 사제가 멍하니 있던 것이 안쓰러웠던지 아이를 안아 보라며 자꾸 보채었다. 사제는 공주의 제의를 거절할 마땅한 변명거리를 생각하지 못했지만 한사코 거절만을 반복 했다. 그날따라 공주는 자꾸만 장벽을 만들며 멀리하는 사제에게 집착에 가깝게 권하기 시작했다.

“로베트 사제, 우리 아이  호프눙(Hoffnung), 한 번만 안아 봐. 어찌나 귀여운지 몰라.”

“하지만, 지금은 좀…….”

“사제 응?”

사제는 더 이상 거절할 방편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한 번만 안아 보는 것뿐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럼 한번만.”하고 사제가 마지못해 조심스레 승낙의 말을 하자. 공주는 떠넘기다시피 아이를 사제의 품에 안겼다. 순간, 사제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어떤 커다란 상실감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자신의 소유를 뺏어간 것 같았다. “공주님 제 손을 잡아주시겠어요?” 하고 작게 속삭였다. 손이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응.” 하고 공주는 사제의 부탁에 손을 잡아 주었고, 사제의 떨림은 점차 사라졌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아린 아이를 만져 본 것이 한두 번은 아닐 텐데, 어째서 그랬을까? 유독 이 괴물의 몸 속안에서 태어난 아이를 어째서 두려워했을까? 그런 반문이 들 만큼 사제의 마음은 안정되어 갔다.

“어때?” ‘봐 아무렇지가 않잖아.’ 라고 하는 듯이 공주가 자상히 물었다.

“작네요. 보들보들해요.”하고 짧은 감평을 하였다. 좀 더 용기를 내어 공주를 잡고 있던 손을 빼고는 두 손으로 아이를 안아 흔들어 보았다. 흔들리던 심장이 점점 안정되어만 갔다. 아이는 조금 축축했으며, 잘디잔 머리카락이 자라나 있었다. “하하하.” 하고 사제가 웃었다.

“귀여운 사내아이지?”하고 공주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네?!”하고 사제가 반문했다. 사제의 손은 아이를 더듬고 있었는데 공주의 그 말이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간 순간 어깨가 으슬으슬 저려왔다. 더듬고 있던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귀여운 사내아이라고.”하고 공주가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사내아이? 사내아이? 무의식 적으로 사제의 손이 아이의 사타구니 사이로가 성별을 확인하였다. 공주의 말 그대로 그건 사내아이였다. 이어 사제의 코에 지금까지 맡아 보지 못한 알싸한 곰팡이 냄새와 흐린 먼지 냄새가 느껴졌다. 눈앞이 번쩍이고 식은땀이 아이를 잡은 손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오한과 공포가 다시 느껴진 것이다.
혀가 벌어지며 불확실한 발음이 사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으아으아아아.”하고 그리 크지 않지만 길고 울음 진 음성이었다.

“사, 사제 왜 그래!?”

사내가 달려와 사제의 몸을 잡아채었다. 사제는 발작적으로 몸을 흔들다가 어느 순간 딱하고 멈추어 버렸다. 동시에 구역질이 거침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쓰려져 버렸다.

“사제!!”

그리고 사제의 의식은 공허한 공간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11. 접시에 담긴 빨간 푸딩에 대하여.



상아색 체크무늬벽지에 얼룩이 잔뜩 낀 작은방. 낡은 구리선반과 흠집이 파여진 2인용 책상, 부러진 의자, 오래된 모포에서 베어나는 알싸한 곰팡이 냄새. 이 모든 것이 퇴폐적인 범죄행각을 부추기고 있는 듯했다. 주변은 눈부시게 하안 햇살이 창문을 꿰뚫고 방안 전체를 감싸 안고 있다. 먼지는 광대처럼 조롱하듯 비틀거리며 배회하고 고장 난 문이 소름 끼치게 열리면서 그들을 저주하는 목소리를 내뱉을 것 같았다. 그날의 아침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울음소리역시 여느 때와 같은 그런 평범한 톤이었고 멀리서 백색잡음이 혼란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밖은 사육제(Carnival :이 글에서 표현하는 사육제 역시 중세의 카니발행사와 완전히 똑같다.)가 한창이었다. 오늘은 축제의 날. 일 년에 한 번뿐인 최고의 축젯날. 언제나 그렇듯이 사육제에서는 그 어떤 무례함도 용인되었다. 사람들은 거칠고 음탕한 욕설과 과격한 행동들을 서슴없이 하였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침을 뱉거나 꽁꽁 숨겨야 할 누군가의 비밀스럽고 추잡한 진실들을 떠벌리고 다녔다. 조롱하고, 파괴하고, 숨기거나, 훔쳤다. 누군가도 모르는 근친이 생겨나기도 했고, 상대가 있는 부인을 건드리거나 어긋난 만남이 성행하였다. 더욱이 이날은 그 어떤 신분적 질서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아이는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서민과 천민은 귀족을 험담하며 다녔다. 모든 것이 전복되는 순간이었다. 식탁마다 기름진 음식이 가득했고, 어느 누구도 자신을 제어하지 않고 정신없이 먹어 대었다.
사육제가 끝나면 금욕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모든 환락이 중지되고 엄격한 규칙이 다시 적용될 것이다.
그날 그 아이가 태어난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었을까? 이 불확실한 경계가 만연한 소음 속에 태어난 아이는 사내아이도 아니었고 계집아이도 아니었다.

아이에겐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 두 개다 존재했다.

아이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경악했고, 자신의 죄를 신에게 빌었다. 그것은 자신들에게 내린 신의 저주처럼 보였다. 부정된 관계로 만들어진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식사를 하기 전 기도를 드렸고 평소와 같이 식사도 마쳤다. 신에게 다시 죄를 빌었고 결국, 칼을 들고 와 아이의 남성을 잘라내었다. 아기의 잘려진 성기가 무참히도 붉게 피를 흘리며 접시위에 올려져있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낳았다. 잘못된 관계로 아이가 태어났으며, 아이의 삶 역시 순탄치 못할 것이 뻔했다. 하물며, 남성도 여성도 아닌 아이라니…….
그러니 문제 될 만한 것은 없다. 그렇지?
이제부터 아이는 여자 아이로써 자라게 될 것이다. 정말로 여성의 삶을 살 수도 있지만, 아이가 생리를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남성의 본능에 눈뜰 수도 있었다. 그런 아이러니한 성별을 가진 아이의 어머닌 아이의 상처가 아물고 나자 신전에 그 아이를 몰래 갖다 버렸다.

문제 될 만한 것은 없다. 그렇지? 그렇지?





12. 개미. 일과 병정과 여왕


-1-

사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자신이 아이가 되어 바동거리고 있었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위협과 공포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숨이 텁텁 막힐 것만 같았다. 사제는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온몸이 감전된 것 같았고, 정신이 어떤 흉측한 벌레라도 된 것 같았다. 사제는 급속도로 내려간 자신의 몸을 공주가 끌어안고 있는 것을 느꼈다. 사제는 조심스레 공주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제 자신은 괴물 밖에서의 그 어떤 것도 바랄 수가 없을 것이다. 죽어가는 매미처럼 쇠약한 모든 것이, 비릿하게 변한 후각이, 늑골에 달라붙어 버린 살이, 깊은 늪보다 어둠과 습기가 모든 것을 변화시켜 버렸다. 삶과 고통은 이 어둠 속 모든 것에 일상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그것은 불행과 욕망처럼 착 달라붙어서 죽을 때까지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이곳의 생은 모든 것이 거짓이다. 그렇기에 빛이 펼쳐질 곳으로 가야 한다. 행복의 미묘함을 맛보기 위해 쓰디쓴 고통을 삼킬 필요가 없는 그런 곳으로 가야 한다고, 사제는 생각했다. 아니 갈 것이 틀림이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어째서 아직 구원받지 못하는 거지?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신은 아직까지 자신을, 사내를, 공주를, 이곳에 방치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곳의 고통스런 뻔뻔한 삶이 그 어떤 가치가 있기에? 다시 구토가 쏟아져 나왔다. 시큼한 액체가 자신의 식도를 타고 바닥에 쏟아졌다. 목이 따갑고 입안에 비릿한 맛이 몰려왔다. 자신은 신에게 충분히 기도를 드렸고 제물을 바쳤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고루한 고통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기도를 얼마나 더 해야. 제물을 얼마나 더 바쳐야 한단 말인가?

“제물? 아이?”

순간, 사제의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제물이야. 제물! 그래, 제물이야! 그것은 제물이야! 공주가 괴물에게 바쳐진 것 같이, 새로 태어난 아이도 신에게 바쳐야 해. 사제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손톱 끝이 다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정이 거품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방금 전 그 꿈은 신께서 제물을 바치라는 암시일거야.

“제물이야.”

사제는 이빨을 덜덜 떨며 공주에게로 다시 다가가 보았다. 말도 못할 본능이 자신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겁이 났지만 사제는 마음을 다잡았다.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고통을 줘 본적이 없던 사제였다. 그렇다곤 해도, 신의 뜻이라면…….

“공주님?“ 하고 조심스레 불러 보았다. 공주는 잠이 들었는지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사제는 다시 공주의 주변을 더듬었다. 이윽고 자신의 반대편에 두 팔과 다리를 펼치고 누워있는 아이가 느껴졌다. 조심스런 손으로 아이를 입을 틀어막고 잡아채었다. 아직까지 심장이 이상박동하고 있었다. 다음엔 사내에게 다가가 왕가의 보검을 집었다. 그리곤 제물이 있는 굴을 빠져나가 사내와 공주가 모르는 곳으로 덜덜 떨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공주는 아이가 사라진 것을 곧바로 눈치 챘다. 그것은 모성의 본능에 가까웠다. 자신의 손에 아이가 느껴지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곧바로 사내를 불렀다.

“여보! 아기가 없어!!”

“잘 더듬어봐.”하고 사내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이 어두운 곳에서 침묵을 지키고 기어다니면 찾기가 쉽지 않은 아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우려했던 그런 불안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사제를 불러도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고 사내의 허리춤에 있었던 왕가의 보검이 사라져 있던것을 확인한 것이다.

  “아이는 어디 있는 거야!!! 켁켁!!” 하고 어느 순간부터 공주는 집착에 가깝게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사내의 가슴에도 은근한 불안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대한 것이다.

“로베트 사제도 없어! 사제는 어디로 간 거지?” 하고 사내가 소리쳤다.

머릿속에 솟아나는 한 가지 추측은 사제가 아이를 데리고 이 굴을 빠져 나갔다는 것이다.  게다가 왕가의 보검까지 사라져 있었다. 대체 왜?

“괜찮아. 아르하. 내가 찾아볼게.”하고 사내가 말했다. 아이가 없다면 자신은 곡식을 타작하는 도리깨이고, 허기를 앗아갈 능력을 가진 증기기관일 뿐이었다. 사내는 불안한 심정을 애써 감추며 공주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제물의 주변을 더듬고는 언젠간 만들었던 청동으로 만든 날붙이를 집었다. 극단적인 결말에 대한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사제가 어째서 아이를 채 갔을까?

“싫어, 나도 따라갈래.”

“안 돼 너는, 이곳에서 벗어나질 못하잖아.”

공주는 덜덜 떨리는 공포를 참고는 사내의 팔을 꼭 부여잡았다.

“가야해. 아이를 찾아야 한단 말이야!!”하고 발작적으로 공주가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이는 찾아야 했다. 어둠이, 공포가, 괴물의 더듬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가 사라진다면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슬픔과 고통이 자신의 몸을 꽉 채워 버릴 것이 뻔했다.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설마 사제가…….”하고 사내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끝끝내 사내를 따라갔다.

“호프눙!! 로베트 사제!!”하고 어둠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아이와 사제를 불렀다.

빈혈이 일어날 것 같은 공주는 힘겨운 상채를 지탱하며 한걸음씩 나아갔다. 아직 까지 제물이 있는 굴을 벗어나는 것은 공주에겐 공포였지만 아이를 찾아야했다. 어느 순간부터 새어나오기 시작하는 어떤 불안감에 공주가 울음을 터트렸다.

“호프눙…….”하고 작게 신음소리를 내며 공주는 울었다. “으아아아앙.”

“죽여 버리겠어. 우리 아기를 데려가다니.” 하고 어느 순간 사내의 입이 불길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사내의 머릿속이 타올랐다.

사제가 자신의 아이를 훔쳐갔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충분했다. 지금껏 사제가 보여준 의심스런 행동을 보자면 불안감은 더욱더 증폭되었다. 공주의 젖을 물리지 않으면 아이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찾지 못하면 아이는 죽을 것이다.

“호프눙!!”하고 사내가 소리쳤다.

공주는 분열된 정신으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고 사내는 점점 독단적으로 공주를 끌고서 아이를 찾았다. 주변은 어둠과 미로와 촉감만으로 되어있다. 사내에게 있어 이 미로는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사제가 이 어둠속에서 침묵을 유지한다면 찾지 못할 것이 뻔했다. 이 넓은 공간을 일일이 더듬고 다니는 것은 사내와 공주를 지치게 했다. 공주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몸으로 사내의 몸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주변을 더듬을수록 절망감이 점점 그들의 머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목이 쉴 대로 쉬어버린 공주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사내는 이빨을 깨물 으며 쇠붙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내와 공주가 침묵에 빠지고서 나서 한참 후. 어딘가 에서부터 작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작은 아이가 보채는 소리는 그들의 귀에 몇 배나 크게 들렸다.

“호프늉?”하고 반사적으로 공주가 중얼거렸다.

신기루 같은 그 음성이 좀 더 확실해 지자 사내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건 사제와 아이의 음성이었다.

“로베트! 그년이야. 가만두지 않겠어!”하고 사내가 소리쳤다.

분노가 일어났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하는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공주도 힘을 내 사제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는 분노가 이성을 점점 흐트러지게 했다. 어느 순간부터 바닥이 미끄러워졌다. 그곳은 심장의 밑으로 언젠간 사내가 와본 기름칠이 덕지덕지 된 곳이었다. 여기서 부터는 사내가 아무리 해도 더 이상의 진입을 하지 못한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미끌미끌한 바닥을 정신없이 걷던 사내와 공주의 몸이 뒤집어 져도 그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기어가야 했다, 사제의 목소리는 가까이 갈수록 뚜렷이 들렸다. 그것은 여느 때 같은 기도소리가 아니라 자장가 소리였다. 사제는 그곳에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주변에 울렸다.

“호프늉!!”하고 공주가 소리를 쳤다.

사내는 사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어들어갔다.
  
“더, 더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하고 사제가 늪에 빠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손엔 칼이 들려 있어요!”

“호프늉, 내 아이!! 로베트 사제 제발 그러지마!!”하고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한 공주가 울면서 아이를 찾았다.

“로베트!!”하고 분노에 빠진 사내가 소리쳤다.

“아이는 제물이 되어야 해요. 그럼 우린 신의 품으로 갈수 있어요! 신께서 꿈속에서 계시를 내려 주셨단 말이에요!” 사제역시 울고 있었다. 아이를 품에 앉은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어떤 불확실한 물음이 머릿속에 떠돌았다. 신은 어째서? “당신들은 모두 죄인이에요! 이 지옥 같은 어둠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제물을 바치고 신에게 가야 한단 말이에요!”

“제발 내 아이를 돌려줘!! 이곳에 있어도 괜찮으니 제발!!”하고 공주가 소리쳤다.

“그곳은 고통도 없고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곳인데, 가보고 싶지 않단 말입니까?”

“아이를 돌려줘!! 그곳에 가지 않아도 좋아!! 나는 이곳이 행복해! 아이가 없으면, 아이가 없으면…….” 공주가 오열하며 외쳤다. 혼란스런 상황은 수습되려 하지 않고 점점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미끈거리는 기름 위에 서 있는 이들처럼 모두 엉망으로 만들었다.

“거짓말! 행복하지 않잖아요!! 저 사내에게 폭행을 당하고서 운적이 한두 번이 아니잖아요! 싸우고 근심한 이곳이 좋단 말이에요!”

“내가 잘못했으니 아이를 돌려줘!!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제발!! 이제 더 이상 주먹을 쓰지 않을 거야!”하고 사내가 소리쳤다.

“당신은 언제나 똑같은 소리뿐! 건성으로 죄를 빌고서, 신도 당신을 용서치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제발 아이를 돌려줘!!”

“어째서!? 아이는 신의 품으로 가야해요!! 그편이 아이에게 더욱더 행복해요!! 이곳은 고통뿐이야! 신께서 우리들의 믿음을 시험 하시는 겁니다!! 지금이 그때에요!”하고 사제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안 돼!!” 하고 공주가 소리치자 사내는 사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내가 다가오는 것에 반응하지 못한 사제는 힘에 밀려 쓰려졌다. 사내의 주먹이 사제의 가슴을 강타했다. 고통에 비명을 질렀고, 품에서 벗어난 아이가 기름 덩이 안에서 울었다. 공주 역시 뒤따라 뛰어들어가 아이를 끌어 않았다.

“죽여 버릴 테다!” 사내의 머릿속이 뜨거워지고, 사내의 손에 쥐여진 쇠붙이가 들어 올려졌다. “죽어!!”

사젠 반사적으로 왕가의 보검을 들어 올려 사제의 쇠붙이를 막았다. 순간 날붙이가 맞부딪치자 무척이나 작은 불똥이 튀어 올렸다. 그 작은 불똥은 바닥으로 튀기며 기름진 바닥을 점점 달아오르게 했다.
다음 순간, 불길이 일어났다.

“?!”

바닥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제의 위에 올라탄 사내는 정신없이 사제를 몰아붙였다. 자신의 머릿속도 주변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빨간 불빛 속에 깡마른 사제의 얼굴이 드러났다. 불길에 닿아 시뻘건 얼굴, 퀭한 눈, 움푹 들어간 볼, 쭈글쭈글한 입술은 마치 해골처럼 보였다.
 
“죽어! 죽어!!” 공주가 말릴 때 까지 사내의 주먹이 사제의 몸을 정신없이 강타하였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사제의 몸이 고통 속에 진동하고 있었다.

“제발, 그만해!! 괜찮아. 아기도 괜찮고 모두 괜찮아!” 공주는 울면서 사내의 허리를 부여잡고 외쳤다.

“이년은 죽어야해! 우리아이를 죽이려 했으니 죽어야해! 악마야!!”

“안 돼,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제발! 제발, 그러지마!”하고 공주는 사제와 사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진이 다 빠진 사제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공허 히 쓰러져 있었다. 자신이 한 짓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신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빛은 어디에 있는지? 모든 것이 알 수가 없었다.
조금씩 화가 진정되자 사내는 주변에 타오르는 불길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사제도 보였고 공주 역시 자신의 눈에 붉어져 보였다. 주변이 모습역시 뚜렷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시각적 감동을 부여해 주지는 않았다. 얼굴은 엉망이었고, 머리카락이며 꼬질꼬질한 무언가가 이리저리 끼여 있었다. 사내는 사산의 몰골과 공주와 사제를 보며 한참을 머뭇거렸다.

“켁켁! 여보?”하고 기침을 하던 공주가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악어 같은 목소리를 작게 내뱉었다. 공주역시 처량 맞은 자신의 몰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시각적 형태마저 아이를 다시 되찾은 공주의 평온을 몰아내진 못할 것이다.

“가자.”하고 사내는 입을 꽉 깨물고 힘겹게 평소와 같은 말투로 말했다. 그리곤 사제도 데리고 가야 한다며 떼를 쓰는 공주를 만류하지 못하고 불길이 일렁이는 기름진 굴을 벗어났다.

-2-

  거대한 괴물은 자신의 둥지에서 오랜 시간 잠을 자고 있었다. 이 잠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구분할 수 없을 만큼의 오랜 세월로,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몇 백 년 혹은 몇 천 년은 족히 걸렸다. 괴물은 이미 인간들을 위협해 만족할 만큼의 식량과 보물들을 먹어치운 상태였기에 느긋한 잠을 즐길 수가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오랜 시간의 편안한 잠 외엔 없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괴물은 자신의 뱃속을 콕콕 찌르는 그런 고통을 앓았다.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그 통증은 거대한 괴물의 몸속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고 괴물은 뚜렷한 대책도 없이 속병을 앓아야 해야 했다. 그래, 잠에 빠지면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힘겨운 몸으로 괴물은 잠을 청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바늘로 찌르는 그런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져만 갔지만 오늘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여느 때와 다르게 목이 메워지고 가슴이 타오르는 듯 뜨거워진 것 같았다. 속이 말도 못할 만큼 쓰려 왔다. 거대한 괴물은 잔뜩 인상을 쓰며 힘겹게 잠이 들기를 바랐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는 순간, 재채기가 나오려 했다. 거대한 괴물은 잔 숨을 들이마시며 재채기가 쏟아지기를 기다렸다. 결국, 코가 시큼해지고 대포 같은 재채기와 함께 괴물의 입에서 산을 태워버릴 것 같은 거대한 불꽃이 쏟아졌다.

“?!”

거대한 괴물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입에서 쏟아진 불길은 뭐란 말인가? 이어 목을 태워 버릴 것 같은 고통에 때굴때굴 굴렀다. 괴물은 목을 부여잡고는 다시 한 번 기침을 쏟아내었다. 화산 같은 불꽃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갔다. 물을 마셔야해! 고통 속에 괴물의 거대한 날개가 펼쳐지고 호숫가로 날아올라갔다. 숨을 내쉴 때 마다 거대한 괴물의 입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주변의 산들이 미친 듯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호수로 다가가자 거대한 괴물의 숨결 때문에 호수의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증기를 내뿜다가 삽시간에 증발해 버렸다. 거대한 괴물은 온몸을 태우는 것 같은 고통에 다시 한 번 때굴때굴 굴렀다. 물! 물! 괴물은 물을 찾았지만 자신의 숨결에 닿는 모든 물은 삽시간에 증기로 변해 벼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인간들 때문이야! 인간들이 자신을 속이고 위험한 제물을 바쳤음이 틀림이 없다. 그렇게 거대한 괴물은 판단했다. 인간들이 자신을 속인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고통의 절규하는 괴물의 포효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평안하던 왕국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에 휩싸였다. 저 멀리 거대한 괴물이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괴, 괴물이다!! 거대한 괴물이 불을 내뿜으며 날아오고 있다!!!”

순식간에 혼란이 시작되었다. 왕은 절망을 하였고 국민들은 어떻게든 도망을 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거대한 괴물에겐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 한번 기침을 하면 집들과 성과 신전과 다리와 호숫가 그리고 아우성치는 인간까지 재로 만들어 버렸다. 모두들 절망에 빠진 기도를 드렸고 괴물을 피해 도망쳤다. 괴물은 왕국의 모든 것을 태우고 있었다. 한꺼번에 많은 불을 쏟아 부은 괴물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지만 아직까지 속이 뜨거웠다. 한참 후 무너진 왕국의 성 위에서 괴물은 힘겨운 몸을 추슬렀다.

거대한 괴물의 몸속에 있던 이들은 괴물의 기침 소리에 이리저리 튕겨가기 시작했다. 생각할 수 있는 정신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괴물의 몸속 여기저기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괴물은 느릿하고 길고 긴 요동을 반복하며 점차 안정을 되찾자 그들은 조금의 정신이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죽고 말 거야!”하고 불길에 피부가 누렇게 자지러진 사내는 절망에 빠졌다. 불길은 언젠간 이곳까지 도달하고 말 것이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남은 안식을 불안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신은 어째서…….” 사제의 말에 어느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보검은 아직까지 자신의 손에 들려 있지만 이젠 그것에 어떤 종교적 의미도 찾지 못했다. 이미 주변은 지옥과도 같았다. 축축했던 벽들은 불길에 서서히 타오르며 타는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고, 바닥은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났다. 어둠보다 더한 절망이 서서히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공주가 입을 열었다.

“아이를 살려야 해. 아이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려야해.”  

“아르하, 이제 곧 우린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아이는 살릴 수 없어.”하고 사내는 절망에 빠져 말했다. “이젠 끝이야! 우린 죽을 거라고! 저 로베트 때문에 우린 죽고 말거야!”

“내가 제물이 되고, 죽더라도 아이만은 살려야해!” 공주가 소리치며 사내를 붙잡았다. “제발. 살릴 수 있어.”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어.”하는 사내의 목소리는 죽어있었다. “신이 온다고 해도 우리를 살릴 수 없어.”

“그래도 살려야해!” 하고 공주가 떼를 썼다. “괴물의 배를 갈라서라도 살려야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공주는 자신이 뱉은 말에 어떤 확신처럼 다시 소리쳤다. “그래 괴물의 배를 갈라야해! 가장 약한 부분을 갈라내고 파는 거야! 오! 제발! 아이를 살려내야 해!!”하고 공주가 소리쳤다.

“불가능해! 나도 아기를 살리고 싶단 말이야!”

공주는 사내를 끌어안고서 달래었다.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 아기 호프늉을 살리자 응? 당신이라면 괴물의 가장 약한 부분을 알 수 있어.”

이미 공주는 이 어둠속에서 그 어떤 고통과 인내력을 견딜 수 있는 어머니로써의 헌신적인 모습을 변화되어 있었다. 빛도 들지 않은 이 공간은 촉감과 소리만으로 존재한다. 주변은 꼬불꼬불한 미로가 가득했다. 하지만 어둠은 공포가 아니고 세상의 형태며 눈은 자신의 손이고 더듬이다. 그것이 주변을 감지하고 어둠속에 물체를 확인하고 느낀다. 이제 공주는 더 이상 두렵지가 않았다. 자신의 목소리도 더 이상 상관치 않았다.

“알았어.” 하고 결국 사내가 작게 대답했다.

사내는 길잡이를 하며 좀 더 밑으로, 좀 더 밑으로, 좀 더 바닥 깊숙한 곳으로 내려갔다. 콩팥과 침샘을 지나, 괴물의 뱃속 가작 약한 부분으로 내려갔다. 그렇다곤 해도 단단한 괴물의 뱃속은 어떻게 해도 파여 질것 같지가 않았다. 도끼로 찍는다고 해도 무리였다. 사내는 자신의 날붙이를 가지고 바닥을 힘껏 도려내기 시작했다. 쓰린 감촉이 자신의 손을 타고 올라왔다. 사내는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으으. 안될 꺼야.”하고 사내가 말했다.

“할 수 있어 제발! 당신은 할 수 있단 말이야.”공주가 사내의 옆에서 사내를 응원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가 살 수 있던 것은 모두 당신 때문이야. 이것은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자신의 삶의 가치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특별한 금전적 행운이 있지 않다면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노동의 연속성과 찰나의 기쁨을 느끼기 위한 쉼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깊은 구덩이에 빠진 무료함. 내일과 모래, 그 다음, 다음 날에도, 그리고 일 년 후나 십 년 후에도 뻔히 그려져 있는 형태의 삶. 작은 행복에 미묘함에 빠지기 위해 수반되는 쓰디쓴 고통이 얼마나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떤 유희조차 즐기지 않은 자신은 이제 어디서 즐거움을 찾아야 할까? 수도 없이 쌓여진 제물, 금화나 몇 에이커의 땅?
공주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바닥을 파보자 조금씩 바닥의 형태가 울퉁불퉁해 지며 고기조각들이 튀기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조금씩 사내를 희망으로 물들게 했다. 결국, 사내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아이가 태어났다. 쾌락이나 욕망이 아닌 공주와 사내를 잇는 또 다른 테두리가 생겨난 것이다. 사랑이 더해졌다. 하지만 권태와 무료함이 찾아왔고, 발작적 분노와 폭력이 행해졌다. 공주는 그런 고통을 참으며 테두리를 유지시켰던 것이다.
  
“미안, 미안, 미안. 내가 잘못했어!” 사내는 바닥을 파며 울며 외쳤다.

주변이 다시 한 번 크게 울렸다. 사내와 아이를 품에 안은 공주와 사제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시간이 없었다.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사내는 다시 한 번 반복된 동작으로 괴물의 배를 도려내었다. 이 고통과 노동은 그 어떤 것보다 가치가 있었다.

“아이를 살려야해.”

자신의 삶에 그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야 했다. 아이를 살려야해. 그리고 두발로 걷게 해야 해. 아이가 울자 공주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 높은 곳에 있던 공주였다. 하지만, 이 어둠속에서 자신의 신분의 가치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보다 더한 바닥 깊숙한 곳으로 추락한다고 해도 아기의 어머니라는 자신의 위치를 버릴 수가 없었다. 공주는 아이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울지 마. 호프늉, 우리아기 울지 마.”

손이 쓰려왔다. 아미 자신의 손엔 물집이 터지고 살갗이 벗겨지고 있었다. 쓰렸던 팔의 감각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몸이 뜨거웠다. 쉼 없는 노동에 사내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바닥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얼마만큼 깊이 파야할지 보이지가 않았다. 얼마나 더 파야 하지? 지옥의 깊이만큼? 절망을 암시하듯이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욱더 거세어 졌다.

“괜찮아. 호프늉.”하고 공주는 몇 번이고 아이를 달래었다.

줄 곳 잠자코 있던 사제가 다가왔다. 자신의 손에 들린 보검을 가지고와 아무 말 없이 사내를 따라 바닥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더욱더 깊숙이 파야 해. 더욱더 깊숙이. 빛이 보일 때 까지 바닥을 파야해.

“신이시여.”하고 말한 사제의 입에서 들리기 좋은 자장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의 울음소리도 동시에 점점 줄어들었다. 사제는 지금도 혼란스러웠다. 신은 대체 왜 이런 곳에 자신을 몰아넣은 것일까? 이 어둠속에서의 삶이, 아니 그보다 이 세상에서 삶은 빛의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기에 아직까지 시험을 하는 것인가? 그런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빛으로 가는 것이 전부라면, 이곳의 삶은 아무 가치가 없단 말인가? 고통과 선의의 보상이란 말인가? “신이시여.”하고 사제가 다시 한 번 신을 찾았다.

바닥을 파도, 파도 끝은 보이지 낳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노동은 온몸을 욱신거리게 했다.

“신이시여.”

우울한 왈츠 같은 삶에 철학적 의미를 찾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먼 시간의 한줌의 흙이 되고 난후의 영원이 아니라 지금 현지의 직관적 행복뿐이었다. 언젠간 빛의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어쩌면 결코 알지 못할 것이고, 느끼지 못할 것이 뻔했다. 아니 아직까지 완전히 이해치 못했다. 세상의 그 누가 이해할 것이란 말인가.
바닥을 도려내고, 또 도려내고, 얇은 막을 하나씩 하나씩 걷어내었다. 그 끝없는 노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괴물이 가끔씩 꿈틀거리고, 허기가 찾아오면 도려낸 고기를 먹고, 고통이 동반되었다. 몇 번이나 바닥이 튀었고, 그때마다 그 자리로 돌아와 바닥을 도려내었다. 공주도 사제의 손을 잡고 거들었다. 결국, 바늘만한 빛이 바닥 사이에 새어나왔다. 빛을 보자 이미 사라졌던 힘조차 되돌아 온 것 같았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희열과 말도 못할 기쁨이 느꼈다. 사내와 공주는 신을 찾으며 바닥을 도려냈고, 사제는 아이가 울지 않게 자장가를 불렀다.
빛이다. 바로 빛이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빛이었다.

왕국을 모두 불태운 거대한 괴물은 천천히 날개를 다시 펼쳤다. 뱃속의 통증은 다시 한 번 자신을 괴롭혔다. 주위는 온통 황패하고 불태워져 참혹함이 가득했다. 날개를 한번 퍼덕이자 주변을 태우던 연기들이 소용돌이치며 걷혔다. 날개를 좀 더 힘껏 퍼덕였다. 그리곤 자신의 몸을 식힐 수 있는 곳으로. 천천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괴물의 뱃속은 점점 얇아지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단단한 괴물의 외피가 느껴졌다. 그 사이로 옅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남은 힘을 짜내어 힘껏 바닥을 내려쳤다. 이 바닥은 결국 깨지고 말 것이다. 바닥에서 새어나온 빛이 좀 더 커졌다. 이제는 뚜렷이 모두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사내와 사제의 얼굴은 엉망이었고, 공주도 엉망이었다. 흉터와 그 어떤 흔적들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모두가 무참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모두들 눈물을 흘리면서 활짝 웃었다. 바닥이 아이의 머리가 들어갈 만큼 벌어졌다. 신선한 공기가 새어나오고 초목들이 펼쳐졌다. 나무도 보였고, 그것을 모인 숲과 작은 강,  놀란 돌물들이 두려움에 떨며 이리저리 도망치고 있는 모습역시 보였다.
모두들 아이를 꽉 끌어안아 주었고,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이제 아이는 그들의 손을 떠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주는 아이의 젖을 물려주었고 사내는 보검을 가슴에 쥐어 주었다. 사제는 기도를 드렸다.
  다시 한 번 괴물에게 기침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불꽃이 쏟아져 나와 주변을 타오르게 하였다. 입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새어나왔다. 괴물은 초원을 지나 저 먼 곳으로 낮은 활강을 하기 시작했다.

“행복해야 해.”

자신의 손으로 아이를 저 밑으로 떨어뜨리자.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 깊은 상실감과  희망이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 괴물의 몸 안에서 공주도 울고, 사제도 울고, 사내역시 엉엉거렸다. 모두들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아이는 공주의 젖도 없이 스스로 살아야 했다. 누군가가 발견하기를, 그 흉측한 몸이라도, 정말 누군가가 소중이 키워주기를 바랬다. 그리고 이젠 다신 이 손을 놓지 않으리라. 이품에서 아이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 손을 절대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괴물의 몸이 다시 한 번 하늘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시야에 태양이 타오르고 있는 노을 진 하늘과 바다가 저 멀리 펼쳐졌다. 하늘에 떠있는 양떼구름들이 햇볕에 반사되어 빛의 계단처럼 보였다. 온몸이 다시 한 번 타오르고 있지만 힘을 내어 괴물은 바다로 날갯짓을 하였다. 이 고통은 이제 곧 끝날 것이다. 바다에 뛰어들면 자신은 그 깊은 심해 속에서 편안한 잠에 다시 한 번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편안해 질수 있을 것이다. 괴물은 바다 깊숙한 곳으로 마지막 생명의 날갯짓을 하였다.


-4-


괴물의 뱃속에서 나와 하늘에서 떨어진 아이는 더 이상 울지를 않았다. 몸은 이리저리 붉게 되어 있고 핏덩이가 뭉쳐 엉망인데다가 피부는 온통 쭈글쭈글했지만 울지 않았다. 바닥에 한참을 엉금엉금 거리던 아이는 자신의 시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주위는 여태껏 보지 못한 총천연색의 숲이었고 수많은 소음들이 저마다의 독특한 형태를 가진 채 울고 있었다. 자신의 바닥 아래를 보니 개미들이 저마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물끄러미 그것들을 바라보던 아이는 개미 하나를 집어보았다.
그 개미는 열심히 여왕을 위해 일을 하던, 모두를 위해 일을 하던 일개미였다. 개미의 입에는 넓은 잎사귀를 물고 있었는데, 집으로 가기 위한 굴의 입구에 넓은 잎사귀가 끼어 더 이상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우.”하고 말한 아이는 자신의 집게손을 벌려 일개미를 잡아 보았다.

개미는 아이의 손에 꿈틀거리며 헤어 나오려 했지만 무리였다. 아기는 손으로 약하게 몇 번 굴려보다가 쑥 하니 자신의 입에 개미를 넣고는 삼켰다. 다음 아이의 손에 잡힌 것은 구덩이를 지키고 있던 병정개미였다. 그 개미는 굴 앞을 지키며 여왕을 지키던 병정개미였다.
아이는 한참동안 병정개미를 살피다가 그것도 쑥 하니 입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날개가 달린 여왕개미가 눈에 잡혔다. 아이는 날아오르는 여왕개미를 두 손으로 잡고는 쏙 하고 또 입에 넣었다.

“아우.”하고 아이가 말했다.

이제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주위에는 온통 소리가 들려 왔다. 새소리나 벌레소리, 작은 바람소리, 어딘가에서 타오르는 소리, 아이 자신이 바닥을 기어 갈 때 마다 나는 스치는 소리, 무릎이 쓰려왔다. 아이는 울지 않았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 방향 저 방향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저 멀리 보이는 파란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 바다 먼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반복되어 아이의 귀와 피부 속으로 침투했다. 반복되는 목소리. 그것은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귓속에 마지막으로 들려주던 그런 따뜻한 음성과 닮아 있었다.

“아우.”하고 아이가 메아리에 응답했다.

그리곤 천천히 일어나 두발로 버티고선 아이는 바다 쪽을 항해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른손엔 왕가의 보검이 들고서 말이다.



- END -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정말. 행복해야 해.”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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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아 07.07.03 07:55 댓글 수정 삭제
    Ether님. 거울에 가입하신 메일 주소로 메일 보내드렸습니다. 확인하시고 답변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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