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김연실변신전

2010.01.29 22:4501.29

연실은 벌써부터 파랗게 질렸다. 아직 역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연실은 물끄러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 추위에도 사람들은 용감하게 성큼성큼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한테서 차가운 냄새가 물큰했다. 두꺼운 코트를 걸친 연실은 꼭 자라나 거북이처럼 보였다.

연실은 딱 한 벌 있는 두꺼운 코트에 얼굴을 푹 묻었다.

어쩐지 어제보다 몸이 더 차가워진 거 같아. 연실은 정신없이 팔을 문지르다가 문득 엄마를 떠올렸다. 연실은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엄마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반쯤 미친 게 틀림없었다. 조금 쉬면 나아지겠지. 그런데 지금 엄마가 쉴 수가 있나?

연실은 간신히 발을 옮겨서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점점 가까워졌다. 연실은 비 맞은 개 마냥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연실을 힐끔거렸다.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 얼굴이 불쌍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찬바람이 확 밀려오는 순간, 역시나 온몸이 쩡하고 얼어붙었다.

연실은 발을 뗄 때마다 지옥 같은 고통과 싸워야만 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요 며칠 새에 날이 유난히 차가워지긴 했지만 이건 확실히 병적인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게 그저께부터 시작된 기현상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 말을 들은, 바로 그 순간부터.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문제였다. 연실은 잠버릇이 심한 편도 아니었고, 이불을 덮고 자면 반드시 이불을 덮고 깨어나는 사람이다. 여전히 연실의 온 몸엔 이불이 깨끗하게 덮여있었지만, 연실은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을 떨면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따뜻한 물을 틀어서 샤워를 하려고 했는데, 이번엔 연실을 데칠 듯이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연실은 황급히 물을 끄고 수도꼭지를 봤다. 언제나 틀던 온도에 수도꼭지는 멈춰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가장 미지근한 정도까지 물 온도를 내렸다. 뜨겁지는 않았지만 온 몸이 따끔거렸다. 연실은 또 엄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신경 쓰고 있나. 연실은 학교를 다닐 때 읽었던 심리학 서적들을 죄다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떤 책에서는 망상을 이유로 신경계통의 문제가 발생한다고도 했다. 아내를 모자로 보기도 하고, 몸의 감각이 다 없어지기도 하고. 연실은 너무 엄마가 한 말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랬다. 연실은 스타킹을 신고, 재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3분 후, 연실은 재킷을 코트로 바꾸기로 했다. 10월 중순에 코트라니, 역시 웃기겠지. 하지만 방 안에서도 연실은 종아리가 아플 정도로 추웠다. 밖에 나가면 오죽하겠는가.

그리고 집 밖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연실은 울고 싶었다. 아니 죽고 싶었다. 연실이 발을 계속 움직여서 회사 근처까지 왔다는 건 기적이었다. 이제 연실은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혈관까지 다 얼어버린 거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연실은 발걸음을 내딛을수록 미래가 고통스러웠다. 연실이 다니는 이 빌어먹을 회사는 빌어먹을 여의도에 있지 않던가. 빌어먹을 한강 옆에. 아니나 다를까 강바람은 역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언더테이커의 손바닥마냥 연실의 싸대기를 양쪽으로 후려갈겼다.

뺨이 얼얼한 감각도 없이 꽝꽝 얼어붙었다. 그때였다. 종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연실의 온몸에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 연실의 다리가 멈췄다. 종을 치면서 다가온 건 늘 돌아다니던 그 사람들이었다. 까만 상복을 입고 관을 떠메고 계속 여의도롤 돌고 돌던.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러 나가면 서명용지를 들이대면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사인을 해달라면서 종이를 들이밀던 그 사람들이었다. 저 종소리겠지. 하지만,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와 별개로 연실의 몸 구석구석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디잉 디잉 분명히 종소리는 계속해서 울렸다.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종소리는 더 다급하게 울렸다. 종소리보다는 꽹과리소리에 가까워질 쯤, 연실의 발이 딱 멈췄다. 연실은 있는 힘껏 다리를 들었지만,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리에도 팔에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맙소사. 연실은 책에서 봤던 이야기들을 열심히 떠올렸다. 그래서 몸의 감각을 잃어버린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더라? 치료가 되었나? 연실의 몸 마디마디에서 들리는 꽹과리소리와 종소리가 사이좋게 화음을 만들었다. 딩딩딩 띠딩띠딩띠딩 낑낑낑 끼긱끼긱끼…… 종소리가 멀어져가면서 연실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연실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풀썩 주저앉을 뻔했다. 쥐가 났던 것처럼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겨우 사무실에 들어갔다. 연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씀뻑 숙였다. 사람들은 한 번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화면으로 얼굴을 고정시켰다. 아까보단 훨씬 나았지만, 아직까지 몸에 냉기가 가시질 않았다. 연실은 약간 절뚝이면서 자리에 앉았다. 옆 자리에 앉은 비서 황미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연실 씨, 어디 아파?”

연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황미영은 싹싹했다. 그리고 연실은 어떻게 해도 저 싹싹한 여자들이 편치가 않았다. 도저히 연실이 갈 수 없는 세계. 애가 싹싹하질 못하다는 학교 선배의 농담에 싹싹하게 웃어보였다가 돌아온 반응을 연실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선배는 표정을 싹 굳히더니 탕 소리가 나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갈했다.

너 지금 비웃냐?

갑자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황미영 역시 냉큼 애교있게 웃으면서 일어났다. 멍 때리던 연실은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었다. 사장은 허허롭게 웃으면서, 대충 손짓을 했다. 사람들은 자리에 앉았고, 연실은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이건 일어선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니고……. 연실은 과연 여기 몇 개월이나 더 있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등록금을 다 벌기 위해서는 적어도 여덟 달은 일해야 한다. 8월부터 일했으니까 벌써 두 달째다. 하지만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연실이 지금 집필하고 있는 저 사장의 자서전은 다섯 달이면 다 쓸 것 같다. 더군다나 모자라는 석 달분을 메워줄 가능성도 사흘 전에 사라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연실 씨, 진짜 괜찮아? 얼굴이 안 좋아.”
“아…… 괜찮……아요.”
“아버지 상은 잘 치렀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황미영은 손을 뻗어서 연실의 손을 잡았다. 연실은 황미영의 손이 다가오는 순간 손을 빼려고 했지만, 얼결에 손을 잡혔다. 그리고 황미영은 황급히 손을 뗐다. 연실은 자기 손을 스스로 쥐었다가 의아하게 황미영을 보았다.

“연실 씨 손이 너무 차가워서……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연실은 자기 손을 스스로 잡아보았다. 그다지 유별나게 차갑지는 않은데. 그보다는 이 사무실이 오늘따라 너무 추운 게 문제 아닌가. 연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미영은 당황한 눈으로 연실을 살펴보더니,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황미영의 말 그대로였다. 연실은 바로 어제 아버지의 상을 다 치렀다. 아버지는 죽었다. 사실 있어도 별로 삼 개월 치 등록금을 추가하는 데엔 도움이 안 될 지도 몰랐다. 오랫동안 장사도 못 했으니까.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아버지의 빈소엔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딱히 사람이 많이 올 정도로 잘 산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연실은 잠깐 놀랐다. 사람들은 똑같은 색깔의 조끼를 입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붕어빵을 굽는 걸 언제나 지켜봤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그 맞은편에서 뽑기를 팔았다고 했다. 자취하면서 대학에 다닌다는 딸애를 처음 본 아버지의 이웃들은 연실을 붙잡고 울었고, 연실은 황망하게 그들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엄마를 붙들고 또 울었다. 엄마는 그들과 함께 울었다. 연실은 빈소 구석에 앉아서 멍하니 아버지를 생각했다.

텔레비전에 늘 나오는 평범한 아이들처럼, 연실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늘 그렇게 지루했다. 매체와 현실은 한 치도 다른 게 없었다. 연실은 아버지 직업에 자영업이라고 써 냈고, 아버지는 학교 앞에서 연실을 모른 척 해 줬다. 연실은 다들 그렇듯이 쪽팔린다고 몇 번 소리도 질러보았고, 상냥하게 아버지의 손을 잡기도 했다. 그냥, 그런 삶이었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연실은 계속 가난했다는 거 정도지만, 그래도 딸은 가난하게 살지 말라고 무리해서 대학교까지 보내 준 좋은 아버지였다. 물론 가난한 아버지들이 다 그렇듯이 보내고 난 다음까지는 책임질 수 없었지만.

아버지는 평범하고 좋은 아버지였다. 그래서 연실은 더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는 다 그렇듯이 평범한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아버지는 뒷산 고목나무에 매달려있었다고 했다. 목에 빨간 줄이 선명하고, 빼어 문 혀가 끔찍하다고, 아버지의 이웃들은 연실에게 아버지를 보지도 못하게 했다. 이 사람이 울고, 저 사람이 술을 마시고, 이 사람이 큰 소리로 욕을 하고, 저 사람이 함께 욕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의 죽음은 이래서는 안 되었다.

“그때 언니랑 나랑 저기서 맞고 있을 때, 아저씨가 길 건너편에서 보고 있었거든. 내가 언니한테 차마 말은 못 했는데, 바로 그 건너편에서, 바로…….”

누군가 엄마 손을 잡고 또 울음을 터뜨렸다. 이걸로 세 번째다, 아버지가 엄마를 보고 있었다는 증언을 한 건. 생각해보면 뻔한 이야기기도 했다.

단속 때문에 더 장사를 할 수 없게 된 남자는 다른 일을 해 보려고 했지만 구하지 못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속 때문에 좌판이 부서지는 아내를 목격한다. 남자에게는 대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있고, 어떻게든 입에 풀칠해야 할 아내가 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는 아무도 아버지에게 일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팔은 그렇게 약하지는 않았었는데. 연실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새벽 세 시쯤에 연실은 잠을 설쳤다. 아버지 영정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연실은 누워서 멍하니 영정을 치어다보았다. 눈가에 자글자글하게 주름이 보였다. 아버지는 그 사이 많이 늙었었구나. 다시 잠이 쏟아졌다. 눈을 다시 내리감았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몸을 움직이면서 연실을 끌어안았다. 연실도 엄마 허리에 손을 얹었다. 엄마 품으로 파고드는데, 나직하게 엄마가 중얼거렸다.

“사실은 넌 늬 아빠 딸이 아니야.”

엄마는 밭은기침을 몇 번 하고는 연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실은 여전히 잠이 쏟아졌다. 무슨 소리야, 엄마, 라고 말을 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다정하게 연실을 계속 쓰다듬었다. 나직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엄마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늬 아빠가 아니야.”

잠결에 몽롱한 연실에게 엄마가 천천히 해 준 이야기는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연실의 부모님은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는데, 사실 연실의 아버지는 매우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으나 엄마는 돈도 없어 죽겠는데 무슨 애까지 낳느냐며 아버지에게 퉁박을 주곤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은 기특하기도 하고 해서, 어느 순간부터 그래, 한 번 만들어보지 뭐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도무지 애가 들어서질 않아서 불임인가 하는 의심을 스스로 하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연실의 엄마는 여느 때처럼 리어카를 끌고 나갔다. 유난히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공기 지나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던 조용한 새벽이었다. 그날따라 늘 장사하던 자리에 경찰들이 떼를 지어 서 있었다. 엄마는 쪼끔만 비켜주시오를 연발하며 리어카를 펴기 시작했다. 그 때 누군가 무슨 짓이냐고 소리쳤고, 연실의 엄마는 당황했고, 누군가 쫓아내라고 얘기했고, 엄마는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 엄마를 밀쳤고, 엄마는 리어카를 붙잡았고, 누군가 리어카를 소리나게 걷어찼고, 엄마는 주저앉았고, 리어카에 끼울 천막 지지대에서 부러져 나온 한 조각이 떼굴떼굴 엄마의 치마폭으로 들어왔고, 연실 엄마는 질질 끌려나가면서 발버둥을 치는 사이에, 속곳 속으로 그 차갑고 딱딱한 쇳덩어리가 쏙 들어오는 바람에 엄마는 가슴이 선득하니 내려앉았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 연실의 엄마는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고, 연실의 아버지는 매우 기뻐했으나, 연실의 엄마 말을 듣고 나서는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서는 어서 병원에 가 보자고 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눈코입이 달린 아기가 잘 자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기가 잘 있다잖아.”
“그렇지만 내 속으로는 쇳덩어리가 들어왔는데.”
“그럴 리가 없지, 그 쇳덩어리는 빠져나갔겠지.”
“그 쇳덩어리가 이 뱃속에 있는데.”
“우리 아기일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한참 엄마랑 입씨름을 하던 아버지는 쇳덩이로 된 아기를 낳더라도 자기가 잘 키우겠으니까 자기 아기 하겠다고 엄마한테 선언을 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열 달 동안 배를 불렸다. 그 이후에도 아이를 가지려고 시도했지만, 그 뒤로는 아이가 생기지 않은 걸로 봐서는 틀림없이 연실은 그 때 그 쇳덩어리라는 이야기였다.

“네가 그래서 정도 없이 쇳덩어리처럼 엄마한테 연락도 안 하는 거야.”
“아니야,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잠에 취한 목소리로 연실은 대답했지만, 엄마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새근새근, 엄마가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연실은 눈을 가만히 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엄마가 미쳤나보다, 생각하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전부 꿈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유난히 엄마의 나직한 목소리는 계속 연실을 쫓아왔다.

연실은 모니터를 가만히 응시했다. 정말 이상했다. 오늘따라 사무실은 유난히 추운데,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겉옷을 벗는다. 등이 따가웠다. 추워서 옷조차 벗지 못하고 있어도 여전히 그 시선은 따가웠다. 사장의 자리는 바로 연실의 뒤에 있었다. 연실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사장은 놀라울 정도로 완전히 사장이었다. 면접 날 굳어있는 연실에게 자기 인생 얘기를 한 시간 동안 늘어놓았다. 사장의 인생은 두 가지 모토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징검다리를 놓는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 성공을 하기 위해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사장은 무릎을 내리쳤다.

연실은 도무지 사장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은 반드시 해야만 했다. 이 책이 출판되지 않을 확률은 없었다. 사장은 자기 자서전을 출판하기 위해 출판사까지 만들었다고 했다. 대체 이 얼마나 사장님 같은 사장이란 말인가.

제대로 써야 할 부분은 사장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20대부터다. 그러나 연실은 첫 출근 때부터 지금까지, 사장에게 들은 사장의 어린 시절을 줄줄이 풀어내는 거밖에 할 수가 없었다. 사장이 이야기하는 사장은 소신을 배신하지 않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지금 연실이 보고 있는 사장은 자기 이름으로 낼 자기 자서전을 싼 값에 대학생에게 맡기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모토와 크게 다르지도 않다. 연실은 자서전으로 가는 길에 있는 징검다리이며, 자신이 글을 못 쓰니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마음으로 연실을 고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썼다가는 연실은 당장 잘리겠지. 연실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사장은 이쪽을 보고 있다. 사장이 참고하라며 사 준 책 몇 권이 연실의 책상에는 꽂혀있다. 잘 나간다는 실용서 및 자서전들이다. 연실은 그 중 하나를 집어 들고 가만히 펼쳐들었다. 정말이지, 이 사무실은 오늘따라 너무 추웠다. 사장은 의뢰인을 이해하기 위해선 얘기를 많이 해야 한다고 했다. 사장은 자주 연실에게 술을 마시자고 했고, 연실은 그때마다 술에 취한 사장의 인생론을 들어야만 했다.

“스무 살이 지났으면 말이야, 김연실 씨도 자기 인생론을 만들어 나갈 때가 된 거지.”

사장이 참고로 하라면서 놓아두고 간 책에는, 20대여, 재테크를 하려면 밥을 굶고 커피를 끊자, 라고 또박또박 박혀있었다. 밥을 굶고 커피를 끊어야 등록금이라도 모일텐데, 연실은 아직까지 밥도 커피도 끊질 못했다. 책을 펴자마자 엷은 종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연실은 당황해서 책을 덮었다. 이번엔 딱히 엄마를 떠올린 것도 아닌데. 발가락이 언 것 마냥 아팠다.

“밥 먹으러 갑시다.”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온몸을 오들오들 떨던 연실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어? 허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리에 힘을 주고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아등바등했지만, 몸은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전신에 랙이 걸린 듯 버퍼링을 이겨보려고 책상을 짚는 차에, 황미영이 연실을 돌아보았다.

“연실 씨는 안 가?”
“아…… 전 속이 좀 안 좋아서요.”
“그럴 때야말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래야 돼.”

불쑥 등장한 사장이 몇 마디 더 하려는 걸, 황미영이 등 떠밀고 나간다. 문이 닫혔다. 황미영의 웃음소리가 문 너머까지 들렸다. 왜 이 작은 회사에 비서가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끔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연실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사실 지금껏 점심 먹으러 나가서 얹힐 뻔 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남자 직원들은 하나같이 사장을 칭찬했고, 여자 직원들은 하나같이 사장에게 애교스럽게 대답했고, 연실은 거기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처음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간 자리에서, 저 이제 막내 아니에요? 라며 울상을 지어 보이는 황미영 때문에 연실은 불편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귓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밥은 언제나 호화로웠지만 연실은 제대로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겨우 다리를 폈다.

뻣뻣하게 로봇처럼 움직이면서 겨우 연실은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갔다. 아무튼 배는 고팠다. 그리고 연실은 아직 밥을 끊지 못했다. 혼자서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연실은 막막해졌다. 여전히 바람은 차가웠다. 다시 온 몸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사학연금관리공단은 섬 속에서도 섬처럼 떠 있다. 일단은 횡단보도를 건너야만 밥을 먹으러 갈 수 있을 터였다. 밥집들은 대각선으로 보였다. 가장 가까운 횡단보도 하나를 비틀거리면서 건넜다. 그 순간,

뎅 뎅 뎅 뎅

다시 종소리가 들렸다.

종소리는 몸 여기저기에서 시끄럽게 울렸다. 아침에 그 관과 마주쳤을 때랑 다를 게 없었다. 또 그 관이 와 있는 건가, 하지만 그 관은 아침에만 돌았다. 여의도는 그 아침만 지나면 그 곡소리를 깨끗하게 잊었다. 그 곡소리를 기억하기엔 너무 숫자가 많았다. 그럼에도 계속 종소리는 그치질 않았다. 뎅 뎅 뎅 뎅 뱃속이 울려서 아플 지경이었다. 배를 부여잡고 연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그 자리에 웬 비썩 마른 남자가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서명에 동참해주세요.”

연실은 단 한 번도 서명한 기억이 없었다. 점심에 밥을 먹으러 나올 때면, 느린 연실의 걸음은 사장과 다른 사람들을 따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거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연실이 비척거리면서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는 동안, 서명을 해 달라고 하던 사람의 어깨는 축 처지곤 했다.

연실은 펜을 들었다. 계속 바람이 불었다. 얼어붙은 손가락은 몇 번씩 펜을 놓칠 뻔 했다. 손가락에서 약간 녹슨 기계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끼릭, 연실은 다시 손가락을 세워서 펜을 쥐었다.

연실이 서명을 하고 있는 동안, 종소리는 천천히 잦아들어갔다. 그리고 연실의 다리는 다시 꽝꽝 얼어붙어갔다. 서명을 다 마치고, 종이를 돌려줄 때쯤 연실의 몸에선 작은 종 하나가 찰랑 찰랑 흔들렸다. 서명을 받은 그 사람은 고개를 꾸뻑 숙이고는 휘청이며 걸어갔다.

연실은 다음 횡단보도를 건널 수 없다는 걸, 그 사람이 한참 걸어가고 나서야 알았다. 걸으려고 했지만 다리가 도무지 움직이질 않는 것이다. 바로 옆에, 떡볶이를 파는 노점상이 보였다. 세 걸음 정도. 연실은 있는 힘을 다 해서 한 걸음씩 내딛었다. 다리 관절에서 자꾸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떡볶이 일 인분 포장해 주세요.”

천막 안쪽에 틀어놓은 온풍기의 열기가 연실한테까지 닿았다. 다리가 조금 느슨하게 풀렸다. 하지만 조금 더 있다가는 다리가 녹아버릴 것 같아서, 연실은 살짝 자리를 비켜섰다. 아주머니는 떡볶이를 비닐봉지에 퍼 담았다.

“날씨도 추운데 저게 뭔 고생이여. 일은 똑같이 시키는데 왜 똑같이 돈을 안 준대?”

아주머니는 투덜거렸고, 연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은 불었지만, 가을 햇살도 따가웠다. 떡볶이 천막에 쇠로 된 지지대가 얼어붙을 거 같은 빛깔로 빛났다.

아버지의 장례는 끝났다. 엄마는 떡볶이를 팔러 나왔을까, 아니면…… 아버지 장례식에 와서 엄마를 끌어안고 울던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그 아주머니는 조끼를 입고 있었다. 엄마도 그 조끼를 입고 있을까. 계속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이 아주머니는, 그때 아빠 장례식에서 봤던 그 조끼를 입고 있었다. 엄마는 떡볶이를 팔러 나왔을까, 아니면…….

“엄마…….”
“어?”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연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아까까지 몸속에서 찰랑거리던 종소리가 조금 더 세게 울리는가 싶더니, 잠잠해졌다.

퇴근 시간 여섯 시까지, 연실은 원고지 20장정도 분량을 더 쓸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도 무리였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본격적인 사장의 일대기를 기록해야만 했다. 이걸 다 쓰고 나면, 돈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연실은 힐끔 사장을 돌아보았다. 사장은 50대 중반의 배 나온 아저씨다. 연실은 천천히 사장을 그려보았다. 40세로, 30세로, 20세로, 그리고 열다섯 살로 천천히 사장은 어려졌다. 딱, 이 정도라면 일대기를 신나게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열다섯 살의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출렁거리면서, 다시 머리가 벗겨졌다.

“오늘 회식 있는 거 다들 알죠?”

연실은 모기만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몸이 정말로 안 좋은데…….”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연실도 허둥거리면서 일어났다. 아까는 도저히 펴지지 않던 다리가 쭉 펴졌다. 연실은 아주 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관절에서 기이잉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중국집 커다란 원탁에 자리를 잡고 앉자, 사장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이 자리를 뜨자마자 황미영이 말문을 열었다.

“나 진짜 중국집 이제 지겨워요.”
“사장님이 좋아하시니까 어쩔 수 없잖아.”
“맨날 똑같은 것만 먹잖아요.”
“뭐 어차피 우리가 낼 것도 아닌데.”

연실은 황미영의 모니터에 남자 직원들의 메시지가 뜨는 걸 종종 봐왔다. 이따가 누구들이랑 술 마시러 갈 건데, 미영씨도 같이 가자고. 단 한 번도 연실의 모니터에는 뜬 적이 없는 메시지였다. 싹싹하기 그지없는 황미영은 턱을 괴고 웃었다.

걸핏하면 점심이고 저녁이고 양장피만 먹으러 오는 사장의 식성에 대해 얘기하다가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중국집은 너무 더웠다. 연실은 몸이 익어가는 기분이었다. 특히 엉덩이는 짓무르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있을 때쯤, 사장이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나한테도 얘기 좀 해 줘봐.”

사장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고, 황미영이 웃음 끝을 아직 못 잡은 채, 연실의 팔을 살짝 때렸다.

“연실 씨가요…… 아우 사장님한테도 얘기 좀 해 줘요.”
“네?”

허둥대던 연실은 물잔을 놓쳤다. 다리에 물이 엎어졌다. 치이이익, 쇠 식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웃음이 터졌다. 연실은 계속 허둥대며 다리를 닦아냈다. 엷은 녹냄새가 났다. 조금 몸이 식었다. 사장은 ‘늘 시키던 걸로’ 라고 말했고, 불만 없냐고 묻는 듯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연실은 한숨을 쉬었다. 상 가득히 비싼 요리들이 자리했지만, 연실은 어차피 많이 먹지 못할 터였다.

“사장님, 그러시면 저 진짜 시집 못가요.”

여직원들의 웃음소리가 꺅꺅 울렸다. 사장은 연실의 잔에 공부가주를 가득 따랐다.

“사장님, 저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은데…….”

나지막이 뱃속에서 종이 울렸다.

“한 잔만 해, 딱 한 잔만.”

얼굴을 찡그리며 연실은 술잔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술은 목이 타는 느낌과 함께 넘어가지 않았다. 또르르 술은 몸속으로 들어갔다. 연실은 온몸이 미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장기가 다 반질반질해지는 것 같았다.

“한 잔만 더 해, 딱 한 잔만.”

사장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한 마디를 반복했다. 연실은 손가락 관절에서까지 기계소리를 들었다. 기이잉, 하고 몸을 옆으로 돌려서, 위이잉, 하고 팔을 뻗은 다음, 철컥, 하고 손을 멈췄다. 철컥, 하고 술을 받고 기이잉, 하고 팔을 도로 가져와서, 철컥, 하고 고개를 꺾었다. 철컥, 철컥, 하고 술잔을 내려놓은 후 연실은 생각했다.

매우 큰일이었다. 대체 뭐 때문일까. 내일 점심시간이라도 얼른 병원에 가 봐야 했다. 그런데 이 증상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대체 어느 병원에 찾아가면 될까.

엄마,

“연실 씨, 딱 한 잔만 더 해.”

연실은 다시 철컥, 하고 술잔을 들었다. 역시 신경정신과로 가 봐야했다.

한참 시간이 지났다. 연실은 몸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철커덕, 철커덕 소리를 들으면서 무척 슬퍼졌다. 더군다나 연실은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중국술은 목이 타지 않아도 여전히 독했다. 이걸 보면 연실은 분명히 인간이었다. 틀림없는 아버지의 딸이었다. 엄마는 너무 슬퍼서 미친 게 틀림없었다. 쇳덩어리의 딸이라면 쇳덩어리여야 할 게 아닌가. 쇠가 취한다는 말은 고금을 걸쳐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연실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오늘은 절대로 취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연실은 머리에 손을 얹었다. 머릿속에서 컴퓨터 CPU 대기시간에나 들릴 법한 위이잉 소리가 한참 들렸다. 생각해보면 취하기 전에도 연실이 정신이 나갔던 그렇지 않았던 연실은 하루 종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취한 거나 안 취한 거나 비슷할 지도 몰라.

사장이 연실의 몸을 부축했다. 결국 마지막에 남은 건 사장과 연실과 정 대리 한 명뿐이었다. 한 명 두 명, 자리에서 일어날 때, 요령 좋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연실은 술을 마실수록 온몸에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엉덩이를 일으킬 수 없었다. 술을 마실수록 몸은 미끈거렸지만, 렉은 더 심하게 걸렸다.

정 대리가 연실을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사장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연실은 사장한테 기대서 중국집 밖으로 나왔다. 연실은 보도블럭만 보면서 걸었다. 상황이 잘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동안 혀까지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술 때문일까.

사장의 입김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이렇게 뜨거운 바람 옆에 있으면 기체에 무리가 갈 텐데. 연실은 끼리릭, 몸을 뒤틀었다.

“연실 씨, 몸이 왜 이렇게 차?

그렇잖아도 뜨거운 사장의 손은 겨드랑이를 지나서 가슴께에 닿았다. 연실의 온몸에 짜릿하게 진동이 스쳤다. 끼릭, 메인보드에 경고메시지가 들어왔다. 뎅딩뎅딩딩뎅딩뎅딩둥뎅뎅딩딩동딩동뎅딩동뎅

연실의 몸 구석구석에서 날카롭게 경고종이 울렸다. 연실은 몸을 떨었다.

“연실 씨, 완전히 취했네. 이래서 집에 갈 수 있겠어?”

사장의 손이 술로 매끄러워진 연실의 겨드랑이를 더 지나왔다. 연실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기익, 기긱, 기긱, 잘 되지 않았다. 사장님, 놔, 주세, 연실의 혀가 기계음을 내면서 천천히 굴러갔다. 귀가 아플 정도로 종이 울렸다. 하지만, 사장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연실은 도저히 이제 더 이상 사장의 자서전을 쓸 자신이 없어졌다. 대체 이 끔찍한 남자의 어떤 점에 대해 칭찬을 해야 한단 말인가. 사장의 목소리가 바로 귓전에 들려왔다. 종소리에 박자를 맞춰서,

“이래서 집에 갈 수 있겠어?”

바로 그때였다.

저쪽 어딘가에서 반짝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와장창 소리가 들렸다. 경찰차가 두 대 서 있었고, 까만 옷을 입은 남자들이 웅성거렸다. 아까 그 떡볶이를 팔던 아주머니가 보였다. 종소리는 더욱 분명하게 들렸다. 사장은 한 손으로는 연실의 허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자꾸 겨드랑이 사이를 미끄러지면서 중얼거렸다.

“종소리 같은 거 들리지 않았어?”

덩둥뎅뎅둥뎅딩동둥뎅딩당당둥당딩깡끼긱끼기긱끽끼긱

떡볶이 국물이 튀었다. 아주머니는 소리를 질렀다. 아주머니가 지르는 소리는 연실의 몸속까지 깊숙이 박혔다. 엄마 목소리였다. 누군가가 떡볶이 리어카를 소리 나게 걷어찼다. 리어카가 조금 우그러졌다. 사방에 반짝거리는 경찰차 불빛이 왔다 갔다 했고, 경찰들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주위에 둘러선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조용한 밤이었다.

엄마가 연실을 가진 그날도 역시 아주 조용한 날이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들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딱 한 공간을 제외하고는. 그 조용한 순간에도 연실의 몸속에서는 종소리가 다닥다닥 튀어 올랐다.

조용한 날이 늘 그렇듯이, 술 냄새가 물큰 풍겼다. 사장의 손이 연실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그 침묵 속에 철커덕 소리가 들렸다. 사장은 비명을 지르면서 손을 빼냈다. 사장의 손 한가운데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있었다. 사장은 손에서 피를 흘리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어느새 연실의 가슴은 날카로운 나선형 쇳덩어리로 불쑥 솟아올랐다. 위이잉, 연실의 가슴이 드릴처럼 돌아갔다.

연실의 팔이 뒤로 꺾였다. 위잉, 철컥, 다리도 꺾였다. 위잉, 철컥, 사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실의 등이 활짝 펼쳐졌다가 도로 오므라들었다. 하얗게 빛나는 철 프로펠러가 연실의 양쪽 어깨에서 돌아갔다. 연실은 기지개를 쫘악 켰다. 사장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손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에 난 구멍으로 연실의 엉덩이가 보였다. 엉덩이는 철커덕, 철커덕 한참을 뒤집더니 작고 귀여운 한 쌍의 부스터로 솟아올랐다. 이제 연실의 다리는 단단하고 매끄러운 금속으로 빛났다. 그 순간, 사장은 기절했다.

연실은 부스터로 펄쩍 뛰어올랐다. 연실의 팔꿈치에서 묵직하게 포신이 미끄러졌다. 연실은 팔에 포신을 달고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철컥, 철컥, 쿠왕, 쿠왕, 바닥이 울렸다. 연실은 까만 옷을 입은 남자들을 향해 총신을 겨누었다. 두다다다다다 총탄이 튀었고, 핏방울이 튀었다. 천막이 찢어졌고, 남자들의 가슴팍에 총탄이 꽂혔다. 몇몇은 피를 쏟았고, 아주머니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덜덜 떨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켜보던 경찰 한 명이 오줌을 지렸다. 연실의 한쪽 가슴이 미사일로 변했다. 가슴이 발사되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경찰차가 폭발했다.

지켜보던 사람들 중 몇몇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연실은 바닥에 총탄이 떨어진 포신을 내리꽂았다. 바닥이 쩍 하니 벌어졌다. 떡볶이 리어카와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골이 생겼다. 연실은 다시 한 번 부스터를 가동시켰다. 프로펠러가 커다랗게 돌아갔다. 연실이 밤하늘 위로, 별처럼 아련하게 날아갔다.

경찰들은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찰차는 그대로 제자리에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남자들은 서로를 붙들고 배를 부여잡고…… 전혀 피가 나지 않는 걸 확인했다. 분명히 죽었던 그들은 죽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멀쩡한 떡볶이 차를 쓸어내렸다. 몇몇 까만 옷을 입은 남자들이 허둥지둥 경찰과 무언가 이야기를 했다. 경찰들은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손을 내저으며 경찰차를 출발시켰다. 어영부영 남자들은 황망하게 어딘가로 걸어갔고, 아주머니는 서둘러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보도블록은 하나도 깨지지 않은 채 멀쩡했다. 사람들은 바닥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몇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기절해 있는 사장을 발견했고, 멀찍이서 앰뷸런스를 불러야 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비썩 마른 남자는 농성 천막 안에서 꾸뻑 꾸뻑 조는 중이었다. 갑자기 천막 안에 있던 관이 덜컥 열렸다. 그 속에 있던 부러진 지지대 하나가 눈 깜짝할 새에 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비썩 마른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관을 도로 닫았다. 쓸모없는 쇳덩어리는 하늘 높이 떠올라서, 별처럼 높이 떠올라서, 연실의 발바닥에 닿았다. 지잉, 연실의 기체가 아주 잠깐 별처럼 빛났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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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atg 10.02.18 23:01 댓글 수정 삭제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 그런지 평과는 다르게 읽기 힘들거나 하지는 않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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