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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에 관한 소고 연작 #2

1.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 상일은 스푼으로 젓던 커피 잔에 조심스럽게 크림 액을 부었다. "이런 사소한 문제로 우리 인류가 멸망을 겪게 되리란 걸 말이야."

그의 잔 안에서 크림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휘말려 들더니 이내 까맣던 커피를 커피색으로 물들이고 말았다. - 까맣던 커피를 커피색으로 물들인다라. 아, 이 무슨 아이러니람! 그러나 그에 대한 경탄보다 앞선 것은 선명한 기시감이었다.

'오늘날 우리 유전학의 연구 방향이 무엇이라 생각해?'

커피숍의 유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던 과거의 어느 날엔가, 상일은 이처럼 우아하게 크림을 흘려 넣으며 내게 물은 일이 있었다. 언제나 활기가 넘쳤고 익살이 가득했던 그의 눈빛 어딘가에서, 지금의 나는 전에 보지 못한 피로와 우울의 흔적을 살필 수 있었다.

"결국 실패한 거야?"

내 물음에 사이를 뜬 상일은 곧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앞에 놓인 레모네이드 캔의 따개를 열어 빨대를 꽂았다. 늘 카페에서 마시던 음료를 내온 일은 어디까지나 상일의 속 깊은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단정하고 우아한 유리잔이나 예쁜 컵 받침 같은 것이 없었다. 그 작은 차이, 바로 그 작은 무성의 탓이었을까. 오래 전 카페에서 함께 누렸던 즐겁고 소소한 일상의 기분을 찾을 수 없었고, 여유도 행복도 없는 시간이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상일이 입을 열어 조심스럽게 침묵을 비집고 들어섰다.

"난 소설이나 영화를 자주 봐서 그런지, 우리 인류의 위기가 좀 더 극적이고 스펙터클하길 바랐던 것 같아. 그래서 비극적이긴 할지라도 제법 흥미진진할 거라 생각했었지."

난 웃었다.

"왜? 그래도 영화나 소설 따위. 아포칼립스의 사회 혼란에 관해 꽤나 현실적인 설명을 해준 것 같은데? 다만 원인을 제대로 유추하지 못했을 뿐이야."

"그렇지? 그래도 난 코맥 맥카시의 소설 언저리에 보인 그 쓸쓸한 핵폭발의 흔적이라든가(*1), 레이 커즈와일이 은연중에 드러내던 그 무한 가능성의 인공지능 기계를 두려워했어.(*2) 그도 아니라면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 정도?(*3)
사실, TV 강론 프로그램에서 한 국립대 역사학자가 말하던 외계충격설에도 꽤 큰 신뢰를 갖고 있었는데,(*4) 그런 우주적 차원의 질서와 현상 속에 맺는 인류의 장엄한 귀결을 꽤나 멋진 결말이라 여긴 까닭일 거야."

"물론, 지금의 상황은 그만큼 거창하고 장엄하진 않지만, 마지막이라는 것만으로도 제법 숭고한 멋은 있잖아?"

"하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내 위로에 상일은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커피 잔을 들더니 곧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널 이렇게 따로 부른 건 단지 연구 결과를 미리 일러주기 위함만이 아니야. 개인적으로 선언할 것이 있기 때문이지."

선언?

"살가운 연대의식을 기대할 수 없는 그 사람들 있잖아. - 신경쇠약에 빠져든 우리 인류 동포들. 그치들의 평균에 비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는데, 결국 나도 그들의 대열에 동참한 것 같지 뭐야."

복잡한 말을 곰곰이 씹어보던 중에 나는 입에 문 빨대를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그것은 애써 지켜오던 일상적 농담의 파국이었고, 레모네이드 캔을 쥔 손이 떨렸다. 뭘 그리 놀라고 그래? 어차피 예정된 일이었잖아. 너나, 나나. 상일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희미하나마 여유로운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너 지금, 사소한 부재를 겪고 있다 말하는 거잖아! 대체 언제부터?"

"삼 일 정도 지났어. 그래도 뭐, 차라리 잘 됐다 싶기도 해. 난 내가 실은 염색체 개수가 70개 정도 되면서도 이제껏 출생의 비밀을 모르고 인간들 틈에서 살아온 지능형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닌가 해서 불안했거든."

상일다운 말이었다. 지독한 낙관. 재치. 유머. 그러나 그는 내심 두려워하고 있을지 모른다. 생을 끝맺는 순간에는 누구나. 대개 그렇다고들 하니까. 그에게 뭐라 답을 하고 위로를 해야 어색하지 않을까? 난 내가 비관적인 사고의 소유자가 아니라 믿어왔음에도 뜻밖에 담담한 농담으로 받아치는 내 대꾸에는 스스로도 놀라고야 말았다.

"아아, 그래. 나만 두고 홀로 혐의를 벗어 참으로 기쁜 모양이다?"

오히려 잠시 머뭇거린 건 상일이었다.

"물론,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지."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계획은 세웠고?"

"시골집에 내려갈까 생각해.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몇 달째 방치된 집이 있어. 풍광은 좋아. 인심이야 뭐, 요즘은 어딜 가나 다 그러니 기대할 일은 없지. 거기 내려가서 생각도 좀 하고, 정리도 좀 하고."

"무슨 생각에 정리? 마지막으로 그럴싸한 저작물이라도 하나 남길 생각이신가?"

웃음을 섞었지만 얼핏 가시 돋친 말투로 비치지는 않았을까 후회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번에는 상일 쪽에서 대수롭지 않게 그 말을 받아주었다.

"인류가 끝장나는 판에 저작을 남겨 무슨 소용이겠어. 그건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잖아? 아는 사람들한테 추한 모습 보이기도 싫고. 그냥 조용한 곳에서 지난 일을 되돌아보며 곱씹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 앞서 간 제수씨나 내 애인 생각도 하면서."

누구 맘대로 형수님을 제수씨라고. 하여튼, 기자 회견에 앞서 불러 나눈 이 짤막한 대화가 우리 만남의 마지막 순간이 될 줄은 몰랐지만, 불시에 마지막을 통고받는다 할지라도 난 우리가 나눌 말들이 제법 풍성하길 기대해왔다. 그러나 대화는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상일과 나는 서로의 말 언저리만 맴돌다 결국 쑥스럽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러고보면 어린 시절의 일이긴 해도, 우리는 종종 서로의 죽음을 상상하며 그 마지막을 장식할 이런저런 연출과 대사에 대해 논의하곤 했었지. 그러나 그 귀여운 허영은 어디에 갔을까. 막상 그 순간에 이르자 대본을 잃은 초짜 단역배우처럼 갈팔질팡하고 있었다.

묘하게 잠겨가던 감정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상일은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미안해."

뭐가?

"혼자 오리가 된 일 말이지?"

"아니, 답을 찾지 못한 거. 너나 네 아이에게나."

"사과는 우리 부자에게가 아니라 인류에게 해야하는 거 아냐?"

이제 담담함은 내 무의식이나 본능 따위가 아닌, 정신의 표상 위로 떠오른다. 그것이 상황을 더욱 견디기 어렵게 했다. 그러나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그에게 대꾸했고 상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그냥 여기서 널 인류의 대표로 삼아 사과하려고. 미안해."

그래. 정해진 각본 따위는 내버리자. 바보들이 가열차게 떠드는 인생의 무대에선 애들립이야말로 가장 멋지고 진솔한 대사가 되는 법이다.


2.

이 뜬금없는 막간극의 피날레를 설명하자면, 역시 뜬금없게 느껴질 수개월 전의 자살 사건을 짚어봐야 한다.

당시로 나는 슬하에 네 살 난 아이가 있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 물론, 평범함이란 수사를 제외하면 그제나 지금에나 차이는 없겠지만.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밥술을 뜨는 둥 마는 둥. 아내와 인사를 나누고 급히 길을 나선 그날 아침에, 나는 신문사의 사옥 현관에서 후배인 정배로 씨와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자 반갑게 다가서더니 인사도 없이 대뜸 물음부터 꺼냈다.

"최 선배님. 아직 제 기사 얘기 못 들으셨죠? 사무관 자살 사건이요."

"사무관 자살 사건이라니?" 가만히 배로 씨를 살펴보니 한 듯 만 듯 성의 없는 화장에 대충 주워 입은 옷차림으로 보아 이미 취재를 다녀온 모양이었다. "새벽부터 현장에 다녀온 거야?"

"네, 종합청사 쪽에 아는 공무원 친구가 있어 몰래 연락을 받았거든요."

이런 국민성으로 한국이 G8에 들 수 있을까. 그래도 연줄 이상의 좋은 취재원도 드물거니와 따져들면 그것 또한 결국은 능력이며 자원이었다. 배로 씨가 노트북 가방에서 꺼내 건네 준 PDA의 액정 화면에는 본사로 송고했을 기사 하나가 출력되어 있었다. "이미 신문사 사이트에도 1보로 올렸어요." 거 어지간히도 서둘렀군…… 얼핏 살피기로 기사의 요는, 중앙부처의 젊은 여성 사무관이 밤샘 근무를 마치고 오늘 새벽 종합청사의 옥상에서 난간을 넘어 자유 낙하를 했다는 것이었다.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를?"

"이게 단순한 자살이라 생각하시냐고요. 이 사무관이 속한 부서를 보세요."

그녀의 재촉에 기사를 다시 읽은 후에야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까 배로 씨는 여기에서 2보, 3보의 기사를 기대한다는 건데. 하긴, 말 그대로 관료라 할 사무관이 정부청사에서 투신자살을 한 일도 그렇거니와, 그녀의 부서가 하필 한창 민감한 사회 이슈를 다뤄온 곳이란 점이 마뜩찮았다.

그러나 그런 석연치 않은 느낌을 비단 그 사건 이면에 있을지 모를 복잡한 음모 관계에만 돌려두는 것은 부당했다. 내가 오히려 염려스럽게 생각한 것은 그 문제를 두고 평소 42℃의 자수정 사우나처럼 뜨겁게 열변을 토하던 정배로 씨의 태도였다. - 뭐, 이조차도 결국은 조촐했던 지난 술자리에서의 내 실언, 그러니까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 민심이 지나치게 동요하는 것 같지 않아?"라는 말이 화근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하긴, 그 후로 이 집요한 후배는 나를 음모론자의 대열에 동참시키지 못해 안달이었으니, 그 성격으로 이렇듯 바쁜 시간에 나를 붙들어 놓고 기사 얘기를 꺼내는 것이 무리는 아니겠지. 그래도 배로 씨가 기왕에 폭스 멀더가 될 작정을 했다면, 회의론자인 스컬리에게 보여 줬던 관용과 이해 역시 더불어 갖추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그래, 무슨 말인가는 알겠어." 당장에 말을 늘여 득이 될 일은 없었으므로 나는 우선 점잖은 목소리로 선부터 그었다. "하지만, 섣불리 음모론으로 몰아가진 말자. 아직 밝혀진 점이 많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기사에도 이 여성이 평소와 달랐다는 증언이 있잖아. 우울증이 아니었는가부터 살펴 볼 일이야."

"음모론이라뇨, 선배님. 게다가 우울증 탓이라 해도 그건 정부의 공작과 은폐에 대한 죄책감이 원인일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배로 씨는 이에 질세라 대화를 길게 늘여 볼 심산인 듯했지만 때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려들었다. 나는 급히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섰다. 이봐, 배로 씨. 그건 좀 있다 다시 얘기하지. (아니, 안 하면 더욱 좋고.) 제발 부탁이야.

근래에는 수입 육류 문제로 나라가 온통 시끌벅적했고, 그로인해 지난 정권처럼 국론이 양단 날 기세마저 있었다. 배로 씨가 내게 신경을 쓰며 집요하게 의식의 전환을 요구하던 것은 바로 그런 문제들에 대한 인식차가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다행히 포크레인이라 불리던 행정수반의 기세가 꺾이며 사태는 일단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후유증처럼 남은 국민 반절의 불신과 의혹은 불씨와 다름 없었고, 여당과 야당의 이전투구는 불길을 재촉하는 부채질과도 같았다.

그런 즈음, 업무량과 강도가 높기로 유명한 중앙부처의 사무관 하나 자살한 일이 뭐 대단한 일일까도 싶었건만, 편집장과 부장의 생각은 달랐다. "배로 씨 기사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이 꽤 좋더군." 부장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배로 씨가 자신의 기사에 음모론의 뉘앙스를 노골적으로 담아낸 것은 아니었으나 지난 하수상한 시절들, 그러니까 군부독재 시절이라든가 IMF, 수입 육류 사태 따위를 겪어온 독자들이 별다른 암시 없이도 제 입맛에 맞춰 기사를 고쳐 읽었고, 그것이 입소문을 타고 번져 포탈의 메인 기사에 떠오르게 된 것이었다. 사실, 신문사로서는 뜻하지 않은 이익이었다.

때문에 부장은 사회부 기자 회의에서 후속 기사를 준비하겠다던 배로 씨의 의견을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다만, 거기에는 나와의 동행 취재라는 - 나와 배로 씨 모두에게 탐탁잖은 단서 하나가 붙어 있었을 뿐이다.

아, 그렇군. 그 결정에 담긴 부장의 셈속을 헤아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를테면 애굽에서 척박한 희랍 땅을 향해 가던 배가 지중해의 거센 풍랑을 만날라치면, 승선객인 정배로 씨는 우왕좌왕 갑판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다. "이것은 애굽의 견실한 상업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소아시아 유대 자본의 음모와 신탁이 어우러낸 포세이돈의 분노예요!" 그때 필론을 대신한 내가 수출용 검은 물소를 가리키며 배로 씨를 진정시킬 만한 말 한마디를 건네줘야 하겠지. "이봐, 정배로 씨. 저 물소를 보게나. 이 난리 속에서도 평안히 되새김질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야. 자, 저렇듯 마음에 평정을 갖게나. 아아, 아타락시아!" 허, 배로 씨의 이어질 대꾸가 눈에 훤한 걸. "미친 소군요! 저 소는 아마 광우병에 걸렸을 거예요!" 그 소가 다우너 소였건 광우병 소였건 간에. - 부장은 배로 씨가 이런 소재로 인기 있는 기사를 재생산하는 일은 환영했지만, 최소한 기사의 균형을 잡아줄 회의론자 한 사람이 필요했고, 그 적임자로 나를 선택한 셈이었다.

나에 대한 부장의 평가가 썩 나쁘지는 않은 듯해 조금은 위안을 얻었으나, 배로 씨와의 동행 취재에 대한 부담과 불편함이 아주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부양할 가족이 있어 불평 한 마디 못 꺼낸 채 신문사를 나서던 바, 이번에는 취재용 차를 빌려 나온 배로 씨가 내게 대뜸 레프트 훅을 날려왔다.

"선배님. 이번 취재에서 절대 편향된 시각을 가지면 안 된다는 거. 잘 아시죠?"

그래, 회심의 후속 기사를 나와 취재하려니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음모론자가 회의론자에게 편향된 시각을 주의하라니, 어디 이런 가당찮은 소리가 있나. 난 말없이 웃으며 조수석의 안전벨트를 묶었다.


3.

상일이 카페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투명한 유리 탁자를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나는 미안함을 감추며 넉살 좋게 손을 흔들었다. 상일의 커피잔 옆에는 하얀 냅킨으로 접은 몇 마리 개구리가 모여 앉아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20분을 늦은 건가?" 냅킨 개구리는 상일이 누군가를 기다릴 때 보여주는 오랜 습관이었다. 옆에 놓인 냅킨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다섯 번째 개구리도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어?"

"넌 시계도 없어? 스스로 얼마나 늦었는지 몰라?"

"오늘 아침에 급히 출근하느라 화장실에 끌러놓고 나왔지 뭐야." 난 멋쩍게 웃으며 양복 주머니에서 내 낡은 휴대폰을 꺼내 보여주었다. "휴대폰은 배터리가 다 나갔고."

"어디서 돈 주고 충전이라도 좀 하지. 그렇게 칠칠맞아 직장에서 안 잘리는 게 용하다. 대체 수진이는 너 같은 녀석이 뭐 기대볼 게 있다고 결혼을 해서는."

"바빠서 그래. 취재건이 좀 겹쳤거든. 여 사무관 자살 기사 봤지? 그게 내 후배 기사야. 내가 같이 후속기사를 취재 중이고. 그리고 우리 직장이 나름 철밥통이잖냐. 그만해선 안 잘려."

"신자유주의 시대에 거 대단한 자랑거리군."

"신자유주의 시대여서 더욱 자랑할 만한 거지!"

나는 냅킨꽂이를 앞으로 끌어다 놓고 아크릴판 안쪽의 메뉴를 살폈다. 뭘 마실까? 그러자 상일이 손짓으로 종업원을 불러들이더니만, 레모네이드 한잔. 그리고 여기 커피 좀 다시 채워주세요.

"뭐? 레모네이드?"

메뉴를 살피던 내 항의는 그의 무심한 목소리에 부딪혀 흩어졌다.

"어차피 넌 레모네이드를 마실 거였잖아."

상일은 대학 동아리 시절 이후. 그러니까 짬뽕과 자장면을 두고 이십 분이 넘도록 고민하던 내 모습을 본 이래로. 이런 상황에서 으레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내가 오래도록 메뉴판을 살피리란 걸 알고 있었다. - 그 탓에 그는 내 회의론이란 것도, 결국은 뭔가 하나를 딱 움켜쥐지 못하는 그 우유부단한 성정 탓이지 결코 냉철함과 관조 어린 지성은 아니라며 평가절하하곤 했다.

"뭐, 좋아. 그렇다 치자. 그나저나 요즘 하는 연구에 진척은 좀 있냐?" 내 물음에 녀석은 갑자기 딴청을 피우는 기색으로 답을 대신했다. "잘 안 되는 모양이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네 시간관념처럼 대중이 없네."

그렇게 토를 달긴 했으나 상일의 말에 별다른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뭔가 될 듯 말 듯 모호해. 요즘은 과연 내가 유전학 전공자가 맞는지도 의심스럽다니까.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암호를 붙든 암호학자 정도? 하늘에서 이니그마 같은 것이라도 뚝 떨어지면 좋겠는데."

"이니그마?"

"왜 그 독일군의 암호 해독기 있잖아. 2차 세계대전 때."

아, 그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야 그쪽 분야는 문외한이지만. 그럴 것 같긴 해. 저번에 보여준 거 있잖아? 무슨 ATG……. 상일이 염기서열이란 단어를 알려줬다. - 그래, 그 염기서열. 그거 꼭 무슨 스도쿠를 보는 것 같더라니까?

"스도쿠?" 내 말에 상일은 웃었다. "그거 괜찮은 표현인데? 네 말마따나 신기하긴 하지만 무척 지루하고 복잡한 스도쿠야."

종업원이 레모네이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서 상일의 잔에 커피를 채워주었다. 주전자를 거두던 종업원의 눈길은 테이블 위의 냅킨 개구리들을 향했고, 상일의 눈길은 살며시 웃으며 자리를 떠나던 그녀에게 슬며시 따라붙었다. "흠, 흠. 어찌되었든. 있는 건 뭐고 없는 건 뭐야?" 나는 레모네이드로 살짝 입을 축이며 물었다.

"느낌은 있지만 접근방법은 없는 거지." 어찌 설명할지를 고민하는 듯하던 상일의 시선이 문득 커피잔으로 떨어졌다. "아, 그래. 이걸 잘 봐."

상일은 각설탕을 넣고 휘휘 저은 커피 잔 바깥으로 조심스럽게 크림액을 부어 넣었다. 크림은 근사하게 소용돌이 모양을 그리며 휘말려 들어갔고, 이내 번져들어 까맣던 커피를 커피색으로 물들였다. 난 적잖은 감명을 받았다. 마치 근사한 커피 광고 같군. 하지만, 커피에 프림을 근사하게 타는 것이 네 일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건데?

"정확히는 프림이 아니라 크림이지.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내가 보라고 했던 건 좀 전의 그 크림이 보여준 소용돌이를 말한 거야." 상일은 커피의 맛을 보더니 크림을 좀 더 따라 부었다. "넌 오늘날 우리 유전학의 방향이 무어라고 생각해?"

"글쎄. 알다시피 난 그쪽은 전혀 몰라. 생명 윤리 논쟁에 관한 기사야 다른 사람의 기획 기사였고. 나는 이번 일처럼 거들기만 한 거야. 너도 알잖아?"

"답은 DNA의 기능적 해석과 상호연관성이야."

기자 밥을 먹은 지 수년째였고, 몇 해 전, 생식세포와 관련해 온 나라가 시끌벅적했지만. 유전학 분야의 용어는 언제 들어도 낯설었다. 상일은 내 처지를 기꺼이 이해해주겠다는 듯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 넌 옛날에도 생물 교과에는 젬병이었으니까. 하지만, 동현아. 그렇다해도 괴물 근처에 살면서 그 괴물에 무관심해 좋을 건 없는 거라고. 상일이 말을 이었다.

"자, 네게 백혈병이 있다고 해보자."

참으로 끔찍한 가정인데.

"그냥 있다고 가정하자는 거야." 내 기색을 살피던 상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럼 네가 곱슬머리라고 하자."

난 실제로 곱슬머리였다.

"그럼 유전학자들은 너의 DNA 지도를 펼쳐놓고 보는 거지. 이들 중에 무엇이 곱슬머리와 관련된 유전자일까. 어떤 것이 어떤 것과 연관되었고 그리하여 곱슬머리의 형질을 보이는지. 이전까지야 DNA의 구조 자체를 규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이제는 게놈 지도까지 완성한 판에 기능 규명이 보다 중요한 이슈가 된 거야. 물론, DNA 자체는 엄정한 규칙을 따르고 있어. 인간들의 DNA는 서로 동일한 부분이 많을 뿐더러 복잡한 스도쿠라고는 했지만 의외로 규칙은 단순한 면도 있지."

"그런데?"

"하지만 데이터의 양이 많다면 어떨까? 그 과정에 생긴 의문은 이거야. 인간 DNA 중에 쓰레기 유전자라 불리는 게 있어. 그게 대다수야. 우리는 이 유전자가 인간의 형질에 관여하지 않는, 과거의 진화 정보가 저장된 공간에 불과하다 여겼거든. 헌데, 어쩌면 거기에 담긴 정보도 다른 DNA들과 맞물려 발현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아, 그럼 연구 범위가 늘겠구나?"

"그렇지. 각각의 DNA가 다른 DNA와 맞물리며 어떤 형질을 보여준다면 우리가 고려해야 할 변수는 기하급수라는 말이 무색해질 테니까. 그 안에 있는 여러 함수를 규명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DNA를 활용하는 방법이 될 텐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함수가 있을지 감이 오질 않아."

"헌데, 그게 아까 보여준 크림이랑은 무슨 관계야?"

"함수가 그렇게 많고 적용될 변수의 정보도 다양하다면 그건 차라리 혼돈에 가까워. - 물론, 우리에겐 컴퓨터가 있어. 유전학자들은 기술의 발전 속도를 감안해 플랜을 짰고. 하지만, 아직 충분한 기술 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현대의 연구가들에게는 답답한 일이지.
그래서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탐색을 해보려는 거야. 이를테면 혼돈이라는 것도 실은 몇 개의 변수를 조정해 일정한 방향으로의 제어가 가능하니까. 여기에서 크림이 어떤 모양으로 번져갈지를 내가 정확히 지정할 순 없겠지만, 스푼으로 소용돌이의 방향을 정하고 크림을 쏟아 붓는 지점을 설정하는 것만으로 대강의 예상은 가능하잖아. 그게 바로 내가 말한 느낌이야.
물론, 지금까지도 소기의 성과들은 있었어. 기능 규명은 기본적으로 인과적 귀납추론이라는 전통적인 논리학의 개념을 따라가면 되고, 그걸 도와줄 컴퓨터가 있기는 하니까. 지금도 일부 의사들은 환자의 유전자 정보를 토대로 치료의 방향을 잡아보기도 하니까. 이 환자는 유전적으로 화학 치료가 쉬울지. 암 같은 질환의 재발 가능성은 얼마나 높을지. 하지만, 대개에 있어서는 어떤 스푼을 선택해 어떤 방향으로 젓고, 어떤 지점에 크림을 쏟아 부어야 할지를 쉽게 가늠하기 어렵지. 얼핏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인류에게 왜 이리 방대하고 복잡한 지도를 그렸는지……. 창조주가 있다면 진지하게 묻고 싶어."

"흠, 하긴. 나도 특정 주제를 취재할 때, 어디부터 접근해야 할지 몰라 난감할 때가 있어. 그럴 때마다 선배들이 하던 충고를 떠올리지. - 우선 어디든 가서 부딪쳐라."

"너랑 내 분야가 다르긴 다르구나."

"그래도 이것저것 하다 보면 뭔가 나오지 않겠어? 가만 보면 세상 일이 대체로 다 그렇던데."

진지한 내 목소리에 상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을 들었다. - 하긴 있지도 않은 존재를 두고 원망을 하느니 그게 낫겠지. 커피를 입에 모금은 그는 그제야 내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나저나 네 일은 어찌 돼가니? 사무관 자살 사건?"


4.

그 자살은 쉬이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건처럼 보였어. 우선, 그녀가 투신한 옥상의 휴식 공간에서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만 둘이었거든. 그녀가 우아하게 난간 넘는 것을 본 직장 동료는 아직도 얼이 빠져 있었지.

자유 낙하 혹은 명품 의류의 내구성을 살필 그 끔찍한 자기희생적 실험은 지상에서도 관찰되었대. 관찰자는 24시간 야식 전문식당의 배달원. 그는 놀랍게도 그 광경을 목격한 뒤 우선 떡만두국과 제육덮밥부터 배달했는데,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은 다름아닌 중국산 찐 쌀 때문이었어. 질 나쁜 떡만두국이 퉁퉁 불기까지 하면 답이 없다던가?

상하 입체적인 목격담으로 자살 결론이 내려진 뒤에도. 배로 씨는 자살하기까지의 정황 중에 무언가 특이점이 있을 거로 의심했지. 분명히 기자로서는 좋은 자세였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원하는 결론을 납득할 수 있었던 건 아니야.

우선, 배로 씨와 나는 업무의 중압감과 스트레스라는 요인에 합의했어. 다만 내가 제법 경쟁이 심하고 업무강도가 높은 중앙부처의 업무 형태라든가 여론의 뜻하지 않은 반응에 완벽주의자로 보이는 그녀가 압박을 받았을 거로 생각했다면, 배로 씨는 근래 시국과 관련한 부당한 명령이 그녀의 도덕심과 정치의식을 압박하고 있었다는 판단을 한 거지. 한 걸음 더 나가 그녀는 대단한 비밀 은폐를 위한 상부의 강압적 지시가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는데, 난 바로 그 점에 동의할 수가 없었어.

취재를 해보니 가족들에게도 업무나 일상의 어려움을 좀처럼 토로하지 않았더군. 뛰어난 업무 능력과 자질. 미모. 여러모로 훌륭한 인재인데 안타까운 일이지. 얼핏 외향적으로 보이긴 했어도 내심은 여린 사람일 것 같더라니. 가족들도 그녀의 어린 시절을 그리 회상했어. "형제들이 다 떼를 쓰며 뭔가를 받아가도 저혼자 부끄러워 달라는 말을 못하던 아이였어요."

그 후, 경찰 내부의 정보통을 불러 소주잔을 기울이고 삼겹살을 구웠지. 이런 국민성으로 우리나라가 G8에 들 수 있을까? 글쎄. 중요한 건 덕분에 그 사무관이 남몰래 정신 상담을 받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는 사실일 뿐야.

그녀를 상담한 의사는 비교적 젊은 남성으로, 전에는 기업들의 직원 상담과 자문을 맡아오다 근래 따로 개업을 한 터였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시장을 찾아 개척하는, 능동적이며 진취적인 상담의. 그러나 우리를 만날 당시로는 몹시 피로한 기색이었고, 덕분에 정력적인 엘리트 의사를 기대하던 - 미혼의 젊은 - 배로 씨는 적잖이 실망했지. 난 그의 짙은 피로가 어쩌면 자신의 환자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아니면 죽은 환자와 내연 관계? 로맨틱하지만 답은 아니겠지. 그건 예전에 마누라와 함께 본 일일 연속극의 얘기거든.

그가 우리를 냉정히 문밖에서 돌려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직접 대면한 이유란 게 그저 예절을 갖춰 취재를 거절하기 위함이었지. 그게 실수였는데 그 의사는 배로 씨가 그런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란 걸 몰랐을 거야. 애원에 가깝게 설득을 하더니만 일부 사실을 기사에 싣지 않는다는 약속을 걸고 기어이 취재를 성사시키더라고.

"예, 그렇습니다. 개인적 소견으로 환자는 높은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적인 환경에서 중압감에 시달린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외향적이어도 내면은 내성적이었고요. 그녀의 무의식과 페르소나 간의 괴리가 스트레스를 증폭시켰을 겁니다. 그 탓에 심각하진 않지만, 우울증의 전조도 있었어요."

"그것이 그녀의 업무 내용과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배로 씨는 인터뷰 내내 그녀의 업무 내용과 자살을 연관지으려 했고,

"업무 내용은 모릅니다. 환자는 자신의 업무 내용을 자세히 말하진 않았으니까요."

"그럼 상담의로서의 개인적 판단이나 의견은요?"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집요한 질문이 계속 이어졌지. 그곳이 법정이었다면 난 변호인 측의 항의가 없이도 내 후배에게 경고했을 것 같아. '이봐요, 정 검사, 함부로 상황을 단정하거나 유도신문을 하지 마세요.' 그러면 배로 씨는 이렇게 답하겠지. '최 검사님? 우리는 한편이잖아요!' 음모론이야 체계적 망상의 일종일 수 있겠지만, 사실 배로 씨보다도 더 지루하고 집요한 환자들을 접해왔을 상담의잖아. 때문에 그가 금세 짜증스런 기색을 내비친 것이 나로서는 뜻밖의 일처럼 느껴졌어.

"글쎄요. 업무의 내용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아닐 수도 있고요. 대체 어떤 답을 정해놓고 물으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전 그 부분에 대해 뭐라 단언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배로 씨도 그런 기세에 위축될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럼 뭔가 다른 특이점은 없었나요?"

"기자님께서 생각하실 그런 특이점은 없습니다. 다만 특이한 증상이 있었죠. 그녀는 자신이 꿈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 아니오. 그냥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희망이나 장래에 대한 계획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잠을 자며 경험하는 그 꿈을,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상실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5.

"흥미로운 얘기네. 꿈을 잃은 여자의 자살이라." 상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표현만 두고 보자면 슬프면서도 조금은 낭만적이고. 그 의사는 뭐라 했어?"

"그게 더 흥미로울 거야. 의사는 처음엔 이 여성이 지나친 강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불면증을 겪고 있거나 으레 그렇듯 꿈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란 판단을 내렸어. 그리고 스트레스로 인한 각종 문제를 '꿈의 부재'라는 현상과 연관을 짓는 편집증적 사고를 하고 있다 생각했던 거야. 그녀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합리적인 설명 같아. 그런데 '처음엔'이라는 단서는 뭐지?"

처음과 지금이 다르다는 거지. 나는 그에게 의사가 한 말을 들려주었다. - "하지만, 그녀의 증상이 정말로 그런 편집적인 망상 탓인가를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저 역시도 꿈을 잃은 상황이니 말입니다."


6.

왠지 불안해 뵈던 그 상담의를 취재한 후, 그리고 경찰의 추가 조사를 접한 후로는. 어지간한 후배님께서도 2보에서는 단순한 자살 사건으로 정리해 기사를 내지 않을 수 없었어. 3보, 4보 계속 내려고 했는데, 라며 배로 씨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지.

그러나 정작 그 사건에 깊은 미련을 가진 것은 배로 씨가 아니었어. 꿈의 부재? 상실? 그런 것이 정말 가능한 걸까. 동료 기자들, 특히 배로 씨에게 달리 내색은 안 했지만, 왕왕 떠오르는 의문 덕에 바쁜 중에도 틈틈이 뒤적여 본 책이 여러 권이야.

우선, 프로이트는 꿈이 뇌를 거쳐 발현되는 무의식의 작용 즈음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런 꿈은 사람의 억눌린 리비도를 발현하며 원망을 충족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는가 하면, 무의식의 메시지를 의식 표층에 검열을 통해 전달한다는 거였지. 상일이, 너도 정신분석학 입문 같은 책을 읽어보면 알 거야. 묘하게 설득력이 있더라고.

그 후에 뇌와 신경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는 과정에서 꿈은 한층 더 흥미롭고 과학적인 모습들을 보여줘. 이 과정은 프로이트의 꿈 해석을 부정하고 다시 시인하고 또 부정하다 결국 타협하는 과정이야. 여기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특정한 뇌 손상이나 약물,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한 사람으로부터 꿈을 빼앗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이지.

좋아, 그럼 만에 하나 그녀의 자살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원인이 꿈의 부재에 있다면? 그러니까 엄밀히 꿈 때문이라기보다는 특정 질병이나 사고에 의한 뇌손상을 가정하는 거야. 질병이나 특정 요인에 연관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매개가 가능한 것이라면! 젊은 상담의가 말하던 '꿈의 상실'은 제법 타당한 얘기가 될 수 있잖아. 무엇보다 수입 육류로 인한 미신적 믿음 - 그러니까 '수입 육류 = 뇌송송 구멍 탁' 같은 -과도 절묘하게 맞아 드는 구석이 있었고, 하필 자살한 사무관이 관련 부서 소속이므로 현장 업무를 통해 접촉의 가능성도 살필 수 있는 일이었지.

아, 이런. 이건 딱 배로 씨나 할 법한 생각인데! 나는 그녀가 그런 꺼리들을 놓쳤다는 것이 - 그리고 외려 내가 이런 생각들을 했다는 사실이 우습게 느껴졌어. 이건 누가 필론이고 누가 당황한 승선객인 거지? 하지만 묘한 흥분과 흥미는 감출 수가 없더라.


7.

"흠, 그래서 지금까지도 혼자 그 사건을 붙들고 있다? 하지만, 그 의사 역시 편집증이라든가 망상적 사고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잖아. 왜, 그 '레드 드래건'이라는 소설 기억나?"

상일의 말에 난 어깨를 으쓱였다.

"영화로는 봤어."

"거기서 주인공인 윌 그래엄은 범인을 잡기 위해 렉터와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되려 자신의 정신을 해치고 말지. 렉터 박사의 감정과 사고란 게 아무래도 정상적인 건 아니니까."

"아, 그런 가능성을 물론 염두에는 두고 있어. 난 내 후배님처럼 음모론자는 아니니까. 그래서 배로 씨에게도 미리 알려주질 않았지. 이 재밌는 음모론에 일말의 근거가 있는지 좀 자료를 살펴보려고. 헌데 말이야……."


8.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일이 쉽지 않더군. 광우병 희생자가 많았던 영국 쪽에서 관련 사례를 수집해봤는데 전문가의 자문 없이 수집한 자료는 정밀성부터가 떨어지더라고.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자살한 여 사무관의 상담의야. 그 사람은 스스로도 꿈을 상실한 상태라 진단했으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액션을 취했으리란 생각이 든 거지. 게다가 그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잖아.

오후 중에 다른 취재 건으로 나섰다 오는 길을 잡았어. 헌데 가는 길에 미리 연락을 했더만 전화를 안 받는 거야.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보니 빌딩 안 병원의 문이 굳게 닫혀있네? 신문이 더러 쌓인 것이 수상해 관리실을 찾았지. 그곳에서 푸른 제복을 입은 늙수그레한 경비원이 놀랄만한 소식을 알려줬어.

"말도 마시구려. 그 의사라는 양반이 이 건물에서 뛰어내려 죽었소. 거 어찌나 끔찍하던지. 난 늘그막 노년기의 끝에 운 좋게 일자리를 얻어, 일도 좀 하며 건강하게 지내려 한 건데. 아, 썩을. 아이고,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되려 마음만 버렸어요."

"자살을 했다고요?"

직업적 습관 탓에 수첩과 펜부터 꺼냈는데, 그 늙고 불행한 경비원이 눈을 흘기며 묻는 거야. "혹시 기자 양반이오?" 입을 굳게 다물 태세더라. 나는 멋쩍게 웃으며 수첩을 마의 안 주머니로 다시 갈무리했지. 기사로 싣거나 하려는 건 아니고요. 그냥 습관이라 그래요. 행여 피해 안 가게 조심하겠습니다, 어르신.

그제야 경비원은 다시 입을 열었어. 암, 그래야지. 여기 건물주가 엄청 화가 났거든. 안 좋게 소문나면 나나 댁이나 큰일이라오.

"암튼, 자살인 건 맞소. 경찰들한테 듣기로 유서도 발견되었다 했고. 아닌 게 아니라 근래 들어 사람이 좀 이상하긴 했지." 내가 답을 재촉하자 그 노인은 말을 이었어. "예전엔 참 유하고 건강해 뵈는 치였는데, 요즘은 좀 무뚝뚝해졌는가 하면 걸핏 화를 내서 다른 사람과 언쟁을 벌인 일도 있소. 여하간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졌고 안색도 안 좋아 보였어."

사실 본령으로 삼던 취재도 아니었고 누구에게 보고나 의견을 내놓은 적도 없는 건인지라 뭐에 쫓길 급박한 성질의 일은 아니었는데, 이즈음 되니 돌아가는 일이 더욱 수상쩍잖아.

신문사로 돌아가 먼저 신문사의 자문인 명부를 뒤졌어. 꿈이나 뇌와 관련된 건 어느 쪽으로 자문을 구하는 것이 좋을까? 우리 신문사의 의료 전문 기자가 누구였지? 문득, 지난번 생명 윤리 관련해 기사를 담당했던 이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었지. 아니야. 그러다 소문을 내느니 차라리 다른 쪽을 파보자.

그렇게 결심을 하고는 자살한 상담의의 간단한 인적 사항을 추려내 동문의 친구와 선배들, 출신 대학의 교수들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지. 이들은 동종의 전문가 집단이었고, 어쩌면 이들 중에 죽은 상담의가 자신의 문제를 토로하고 도움을 청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도 했고.

네, 여보세요? 누구누구 맞으시죠? 네, 초면에 실례가 많습니다. 저는 민국일보의 최동현 기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전화를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옵고…….

선배들의 전설 같은 격언은 틀리는 법이 없더라. '모르겠어? 그럼 그냥 막 부딪치는 거야! 부딪치다 보면 길이 보인다니까?' 과연 수차례의 통화 끝에 슬슬 자살한 상담의의 학연 관계가 그려지기 시작했지.


9.

"이게 성훈이가 죽기 전에 남겨준 자료들입니다."

흘러내린 금테 돋보기 안경을 추어올리며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가 복사한 자료 뭉치와 CD를 한 장 건네줬어.

"여기에 담긴 내용이 뭡니까?"

"뭐, 대단한 건 없습니다. 꿈을 꾸지 못하는 건에 대해 나름 자료를 모으고 살폈던 모양이에요. 성훈이는 그걸 사소한 부재라고 불렀는데……. 아마 직접 자료를 살펴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사무적이고 냉랭한 목소리에는 짙은 피로가 배여 있는 것 같았어.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넌지시 물음을 던졌지. 선생님께서는 김성훈 씨의 생각에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스스로도 비슷한 증상을 느끼셨다든가.

"아니요." 그는 내 말에 씩 웃더니 고개를 가로저었어. 아, 이 사람의 본래 표정은 이런 거구나. 웃는 얼굴이 자연스럽더군. "요 며칠 진찰 일정이 빡빡했던 데다 학회 준비가 바빠 밤샘을 해서 그럽니다. 거기에 성훈이 상(喪)도 있었고. 성훈이가 그렇게 떠난 것이 참 가슴 아프고 또 그 녀석의 생각이 제법 흥미롭기는 합니다만, 전문가 입장에서 온전히 동의를 하긴 좀 그렇군요."

그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어.

"사실, 꿈을 꾸지 않는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엄밀히는 꿈을 꾸고 있지만 그 방식이 일반과 다르고 인식하기 어려워지는 경우죠. 뇌 속의 백질이 손상된 경우가 그렇습니다. 꿈의 시상 처리를 못하거든요. 하지만 성훈이에게 달리 뇌 손상이 발견되지도 않았고, 수면을 방해할 물질이 검출된 것도 아닙니다. 아마 꿈을 기억하지 못할 뿐은 아니었던가. 일종의 망상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가슴이 좀 무겁습니다.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중증인 걸 알았다면 좀 더 살뜰히 살펴주고 선배가 아닌 의사로서 대해줘야 하지 않았던가 해서요."

"여기서 성훈 씨가 따로 검사를 하셨었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MRI나 CT 장비 같은 건 그런 작은 상담 병원에서는 갖추기가 어렵기도 하고."

그랬어. 그 상담의는 선배에게 도움을 청하고 스스로를 진단하려 했던 거야. 나는 내처 답안 채점을 기다리는 국민학생처럼 조바심을 내며 물었지!

"그럼 혹시라도 수입 육류에 의한 질병이라든가 뇌손상의 가능성은……."

"수입 육류요?"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웃음을 터뜨렸어. 아, 그거요? 하하.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검사를 했을 때 나왔겠지요. 성훈이도 그런 생각까지는 안 했었는데요.


상담의가 선배에게 넘겨주었다는 자료에는 인터넷 검색 자료나 학회지의 일부를 복사한 자료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어. 학회지는 전문 용어가 많아 쉽게 이해가 어려웠지만, 인터넷 검색 자료는 그에 반해 이해가 쉽게 잘 정리되어 있더라. 한편으로 흥미로운 구석도 있었고. 개중에 눈에 띈 건 인터넷의 한 자각몽 카페에 관한 거였는데, 이런 카페도 있었나 싶었지. 무슨 심리 연구 학회 같은 건가.

헌데, 자각몽 카페는 학회 같은 것이 아니었어. 인터넷을 통해 검색하니 그런 클럽에 대한 글이 있더군. 해리포터에 나왔던 그 소망을 비추는 거울처럼 자기 안위를 찾는 도구로 자각몽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나? 덧대어 '꿈을 통한 소망 실현에 몰두하면 현실을 도외시할 수 있죠. 전 자각몽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라는 커멘트가 달려있었고.

나는 카페에 인터뷰를 요청했어. 주말의 약속 장소에 나온 사람은 모두 넷. 한 사람의 운영자와 세 사람의 회원으로 젊은 축이었고 개중 둘은 어린 학생. 잠, 꿈, 환상, 현실도피 따위와 결부해 가졌던 내 선입견과 달리 이들은 제법 평범하고 건실해 뵈는 사람들이었는데, 다만 그중에 고등학생 즈음으로 보이던 아이 하나가 피로하고 불안한 기색이었지. 그 아이에게서 죽은 상담의의 모습을 투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고.

"그걸 어떻게 사소한 부재라고 부를 수 있죠?"

과연, 굴국밥집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 식사를 나누며 대화를 진행하던 중, 녀석이 내 말 몇 마디에 대뜸 화를 내고 말았어. 때마침 나는 굴 보쌈을 말던 중이었지. 새빨간 보쌈김치를 집어들던 젓가락을 내려 놓았어. "기분이 나빴나요? 미안합니다." - 머리에 피는 말랐지만. 호적등본 잉크도 다 말랐을 듯하지만. 그렇다고 새파랗지도 않았고 내게 녀석만한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어린 녀석이었는데. 그래도 나는 어색하나마 사과를 건넸고 죽은 상담의가 남긴 자료집 중의 하나를 꺼내 거기에 붙은 라벨을 보여줬지.

'사소한 부재로 우리가 겪는 문제들'

이분이 붙인 명칭이어서 생각 없이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분도 사소한 부재라고는 썼지만 실제로 사소하게 여긴 건 아니고요.

"그래요?" 그러나 녀석의 날카로운 기색은 사그라질 줄을 몰라.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죠. 꿈이란 건 정말 중요한 거예요. 수면 그 자체보다도 사람에겐 더욱 중요한 요소일지도 몰라요. 리비도의 억압으로 인한 무의식의 원망을 충족해주는 필수적인 기재이니 말이죠."

그래 자각몽에서 삶의 위안을 얻는 네겐 더더욱 그렇겠지. 그래도 왠지 이 학생에게 분이 나질 않더라. 녀석이 겪고 있을 고통을 다소나마 이해하려 했기 때문일지도 몰랐고, 아니면 '리비도의 억압으로 인한 무의식의 원망을 충족해주는 필수적 기재'라는 그 복잡다단한 말을 이해가 될 때까지 곱씹어야 했던 때문인지도 모르지. 아, 프로이트의 저서를 읽어본 건 맞아. 다만 시간에 쫓겨 건성으로 읽은 게 문제였을뿐. 어쨌든 난 그 학생을 이해하려 노력했다고. 그사이 입안의 국밥을 꼭꼭 씹어 삼킨 카페의 운영자가 어색해진 상황을 구원하고 나섰어.

"그 사소한 부재라는 거요. 사실 우리 카페에서는 화제가 된지 좀 지났어요."

"그래요?"

"네, 아무래도 카페 회원들에게는 꿈을 꾸는 행위가 무척 중요한 거니까요."

그때 가장 어린 까까머리 학생이 무심히 말하더라. 얼굴이 유독 까만 아이였지.

"난 꿈을 못 꾸게 되면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슈퍼걸스를 더 만날 수 없을 테니까."

그게 어떤 꿈일지를 궁금해 한 건 순간이었는데, 뭐 답이야 뻔하지. 야, 모르는 척 순진한 척하지는 말자, 상일아. 우리도 그 나이를 다 지나봐서 알잖아? 그래, 하긴 싸인 받고 악수하는 내용은 아닐 텐데 말이야. 그새 피곤한 얼굴의 고등학생이 까까머리를 노려보더라. '뭐야, 이 새끼. 지금 날보고 죽으라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나는 철없는 아이의 말로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에 운영자에게 서둘러 물었어.

"카페에 그런 사람이 많은가 봅니다?"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요. 지금 여기 계신 예니체리 님도 그렇고. 옐로싸인 님, 드림캐스터 님, 윈드드리머 님, 인큐버스 님. 또 누가 있었죠?"

그간 말없이 앉았던 여 회원이 그제사 입을 열었어.

"듀론9G 님이랑 로이엔탈 커플도요."

"암튼, 당장 기억나는 사람만도 이 정도예요."

"단순한 불면증이라든가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로 생각진 않으셨고요?"

"처음엔 그렇게들 생각했죠. 개중에 누군가는 병원에 가 검사를 받았는데도 딱히 신체적인 이상은 없다 하더래요. 그런데도 지금은 회원 대부분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원인은 알 수 없더라도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카페를 가보셨으면 아시겠죠. 지금 카페는 뭐랄까. 공황 상태에 빠져있는 느낌이에요."


10.

"그 의사도 자살했다니 좀 의외다. 무슨 스릴러 소설 같아."

"그렇지? 나도 내가 탐정이 된 기분이라니까."

내 말에 상일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생각처럼 큰일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세상은 별일 없이 돌아가고 있잖아."

빨대에서 공기가 섞여 후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답을 하던 상일의 커피잔에서도, 매미 주둥이 같은 빨대가 꽂힌 내 레모네이드 광산에서도. 달콤한 자원은 고갈되어가고 있었다. 하긴 그랬다. 음모론은 물 건너 간 듯했고, 여 사무관과 정신과 상담의의 자살. 자각몽 카페의 혼란. - 그러나 세상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 사무관의 빈자리에도 정부는 이상 없이 돌아가고, 정신과 상담의 하나가 자살을 한들 치료받지 못한 그의 환자가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을 해치는 일도 없었다. 하물며 자각몽 카페 회원들의 혼란 따위는 인터넷의 수십만 커뮤니티 중 한 곳에서 일어난, 일상에 가까운 소동 중의 하나일 뿐이다. 바쁜 우리 사회는 현실을 외면하고 꿈에서 위안을 받는 잉여구성원들에게 진지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지부진해지는 중에도 여전히 내게 호기심과 불안감을 떠안겼다. 갚을 길이 막막한 교묘하고 음험한 채무였다. 자각몽 카페 회원들과의 인터뷰 중에 혹시나 하며 자살한 상담의의 선배가 일하는 병원 주소와 연락처를 남겨줬건만. 어느 편으로부터도 연락은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의 시간이 맥없이 흐르던 중 - 사실은 다른 취재 건들로 정신이 없었지만 - 나는 급한 마감 작업을 끝낸 신문사의 월간지 쪽 친구들과 심야의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 월간지 기자인 윤의 작업 모니터를 보았다.

"이봐, 윤. 이게 무슨 기사 준비하는 거야?"

"아, 그거요?" 윤이 모니터를 돌아보곤 말했다. "경찰청 통계 자료에서 나온 건데요. 제호 그대로 자살률이 급증했다나요? 이게 무슨 사회 현상은 아닐까 싶어 좀 알아보려고 우선 제목만 잡아뒀어요. 요즘 증시가 출렁출렁했잖아요. 잘하면 다음 달 기사가 되는 거죠, 뭐."


11.

어쭙잖은 탐정 놀이는 여기까지다. 나는 이것이 암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느릿한 초기의 진행 과정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급속히 진행되며 다른 부분으로 전이되고 마는 것이다. 내 취재는 결론도 나지 않았고 지금 와 돌아보면 결론을 낸들 별 소용이 없을 일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그런 증상들이 이처럼 치명적인 문제로 귀결되리라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어쨌든 나는 이제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건 그리 오래전의 일은 아니며 내 인생의 반려가 겪은 일이었다. 나는 내 부인이 죽음에 이르던 매 순간을 아릿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나의 비밀스런 취재 대상이긴 했지만 - 사소한 부재는 물론이거니와 신경 쇠약 따위도. 수입 육류의 음모론이 걷힌 과거의 시점에서, 내게는 그저 별세계에 놓인, 심약한 사람들의 처치 곤란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시간이 뚝 하고 단절된 것처럼. 그리하여 과거와 나 사이에 연속되는 연결점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내 주변은 별세계가 되었고, 내 아내는 어느덧 사소한 부재를 호소하며 신경 쇠약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즈음의 인류는 이미, 참으로 많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항생제의 남용으로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슈퍼 바이러스의 잠재적 위험과 대기를 뒤덮은 전자파의 맹위로 인한 벌의 개체 수 감소, 온난화에 따른 기후의 급변에 그로 인한 자연재해들. 이런 위기에 비한다면 탐욕으로 순수성을 잃은 자본주의의 악성 종양은 차라리 철부지 아이들의 조금 위험한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금융위기가 인류의 존망을 위협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바로 그 다층적 위기의 혼란스러운 지점에서.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닥친 셈이었다.

거짓말처럼. 너른 갯벌 위로 소리없이 밀물이 차오르듯 다가와서는. 썰물처럼 흩어지며 인류의 꿈이 함께 쓸려나가고 있었다.

처음 이 문제는 자살률 급증과 신경질환에 관한 이슈로만 부각이 되었지만, 높아져 가는 자살률과 각종 신경질환에 의한 범죄의 급증, 신경쇠약으로 인한 사회의 쇠락과 침체는 살금살금 혼란을 쌓아갔다.

"꿈의 상실이 이토록 소리없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병실의 TV 속에서는 수십, 수백 번을 들어, 나같이 우유부단한 성격의 얼간이조차 외워버릴 법한 레퍼토리의 대화가 다른 프로그램의 제목을 달고서 반복되고 있었다. 화면 속 머리가 벗겨진 남자는 초췌한 얼굴로 인터뷰 진행자에게 답했다.

"그것은 꿈이 가진 원망충족 기능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의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주어지는 정신적 압박과 자기 본성의 억제로 인한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깊은 숙면과 거기에 동반되는 꿈이 큰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꿈이 자주 동반되는 렘 수면을 박탈하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헌데 재미있게도 이렇게 박탈당한 렘 수면은 다음번 잠에서 렘 수면을 더 오래 지속해 벌충하는 반동 효과를 보여주었지요. - 물론, 깊은 서파 수면에서도 동일한 반동 효과가 나옵니다만. 이는 꿈이 인간의 신체 메커니즘에서 없어서는 안 될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을 반증하는 셈입니다. 이런 꿈을 상실하면 인간의 정신은 부하를 일으키고 고장을 내는 것이지요."

그랬다. 꿈을 꾸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신이 산만했고, 성욕이 과잉되었으며, 이상 식욕을 보이는가 하면 공격성이 증가했다. 무언가에 화가 난 사람들처럼. 저하된 정신 기능에 대한 좌절감. 공포. 그리고 불안. 그래서 그들은 결국 자살하거나.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거나. 혹은 쇠약해져 죽어가거나.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들리는군요. 그러나 꿈은 수면과 다른 것이 아닙니까? 홉슨 같은 사람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불신하던 데요.(*5)"

"네, 물론 프로이트의 이론을 의심하던 앨런 홉슨 같은 이는 꿈을 뇌의 제3의 상태로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그저 뇌의 활동에 따른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홉슨은 마찬가지로 솔름스에 의해 논박을 당하지 않았던가요?(*6)"

지나치게 전문적인 얘기로 빠져들 기미를 보이자 토를 달았던 진행자가 앞서 한 발을 빼고 말았다.

"흠, 그보다는 현재 꿈을 잃는 증상이 전염성이 아닌가 하는 대중의 우려가 큽니다. 뇌에 손상을 주는 질환 말입니다. 그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차 반복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정보입니다. 보건 당국의 역학조사 결과로 이 증상은 어떤 매개체를 통해서도 전염이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백질 손상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것은, 증상을 겪는 환자들의 행동이 백질 손상에 따른 일반적인 행동 변화 패턴과는 다르다는 데 있어요. 이 정체불명의 증후군을 겪고 있는 사람들 중 사회에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변화를 보이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때때로 보이는 정신분열 증상은 백질의 도파민 생성을 반증하는 것이고요."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사람이 같은 증상을 겪게 되는 이 문제를 질병적인 관점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 설명이 가능할……."

내 부인은 참으로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다. 신경 쇠약과 우울증에도 끝내 자살을 택하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일도 없었다. 그녀는 늘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입가에 힘을 주어 나와 아이에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나는 부인의 유언대로 그녀를 화장했고, 범법자가 되는 일을 무릅쓰고 재를 강가에 뿌렸다. 상일은 내 아이를 감싸 안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울다 지친 아이는 상경하는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장례 내내 굳은 얼굴로 섰던 내 낙천적인 친구가 도중에 운전대를 건네받았다. - 나는 이미 그의 부모와 애인과 형제의 장례식에 참석한 바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초대받은 한 사회심리학자의, 마치 기력이 다 빠진 늙은 고승처럼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느릿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성과 식욕 등 여러 자연적 욕동은 여전히 우리 정신의 심층 깊숙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런 생물적인 본성들이, 자연적인 삶에서 벗어나 인위적이고 사회적인 조직 체계 속에서 사는 인간들의 표면 의식과 계속해 긴장 관계에 놓여 있게 되지요. 인간의 대부분 정신 질환들은 인간이 문화적인 삶을 선택하며 받게 된 필연적인 페널티라 봐야 합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진화 메커니즘은 그렇게 억압되어야 하는 본능을 치환하고 상징화하고 왜곡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보상하는 방향으로 이뤄졌습니다. 꿈은 바로 인간이 사회화를 선택하며 발달한 보상 전쟁의 최전선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인위적 삶도 그 한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현대인이 겪는 정신적 문제들은 과거보다 깊고 넓어졌습니다. 우리가 향유한 진화의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일종의 그레이트 필터(Great Filter) 같은 것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때 상일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레이트 필터는 SF 소설에서 봤던 얘기야.(*7) 하지만, 일리가 있군. 이건 진화의 대가일 수도 있겠어." 백미러 속에서 내 시선이 상일의 눈에 닿았다. "그리고 정확히는 유전자의 문제겠지. 네 후배, 배로 씨가 자살하고, 내 애인이 살해당한 일. 그리고 네 아내 수진이가 신경 쇠약으로 메말라 죽어간 것. 그 모든 일의 원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잠긴 목은 말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유전자라고. 틀림없어. 바늘 두더지에 대한 얘기를 들어 본 일이 있어? 얼마 전 방송에도 나왔었는데."

"바늘 두더지?"

"그래. 고슴도치와 두더지의 중간 즈음? 호주에 사는 단공류 생물이지. 왜, 거긴 그런 이상한 짐승이 많잖아. 오리 너구리라든지. 캥거루라든지. 그 녀석은 난생 포유류야. 파충류에서 진화한 최초의 포유류라는 거지. 그런데 이 녀석의 수면 단계는 보통의 포유류와는 다르대."

"다르다니?"

"녀석은 렘 수면을 경험하지 않아. 논렘 수면과 렘 수면의 중간 단계에서 수면을 경험하지. 꿈이 가장 활성화되는 렘 수면은 이 바늘 두더지의 이후 단계에서 발견되기 시작하는 거야.(*9) 꿈은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지. 실제로 어떤 학자는 이런 렘 수면과 꿈의 과정이 포유동물과 인류가 지금의 지각과 인지 능력에 도달하기까지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보았어. 꿈은 유전적으로 부호화된 정보를 각인시키는 과정이란 것이지. 그러니 결국 이 문제의 해법은 유전자에 있을지도 몰라. 아니, 틀림없어. 유전자야. 홀의 연구를 봐도 그래. 인류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꿈에 관한 한 공통분모를 갖고 있잖아."

그는 다소 흥분한 기색마저 보였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를 봐. 렘 수면이 박탈당한 것도 아니고, 뇌간의 뇌교 부위 이상도 좀처럼 발견되질 않는다고 했어. 그렇다고 뇌간의 신호들을 이리저리 짜맞추는 전뇌의 작업에도 이상이 없다고. - 하기사, 전뇌가 작업을 못해도 뒤죽박죽이 된 꿈이나마 꿀 수 있었겠지. 백질이 없어도 이미저리가 되지 않을 망정 꿈의 과정은 계속 될 거고." 상일은 자신의 말을 확인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유전자 코드 속에 분명히 뭔가가 쓰여져 있었을 거야. 홉슨은 카를 융에게서 꿈이 뇌의 창조적 활동의 결과라는 데에만 동의하고 집단 무의식과 원형적 상징은 무시했지만, 글쎄. 그는 인류가 공통된 DNA의 분모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어. 윈슨의 말처럼 꿈이 진화를 해왔다면 DNA에 기록이 되어왔을 거야. 그리고 그 진화의 메커니즘이 한계에 다다른 걸지 모르지. 우리 인간의 지나친 사회화와 지성의 발달. 어쩌면 말 그대로 그레이터 필터일지 몰라. 마치 프로그램의 조건문처럼 말야!"


12.

아이를 방 안에 눕히고서 나 역시 침대를 찾아 누웠다. 아내가 함께 눕던 더블 침대는 한 사람이 눕기에는 너무 넓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이날 하루 아내를 떠나보낸 슬픔과 고단함 탓인지 그 빈자리를 어루만지던 나는 오래지 않아 몸이 침대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 내 눈꺼풀은 감겨 있다. 뇌에서는 느리고 고른 뇌파를 방출하고 있다. 전전두엽 피질이 침묵에 빠져들고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이 떨어진다. 시점을 파악한 뇌간은 서서히 화학 변화를 유발한다. 그로 말미암아 작은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 조직이 자극을 받는다. 이 편도체는 나로 하여금 불안과 공포를 자아내 뇌파의 움직임을 활발하게 만들고, 눈꺼풀 뒤의 내 안구는 불안에 휩싸인 사람처럼 분주히 시선을 옮기고 있다.

아세틸콜린이 늘어난다. 적잖은 시간이 지나고 다시 아세틸콜린이 빠져나간다. 아세틸콜린이 늘어난다. 다시 아세틸콜린이 빠져나간다. 이 긴 순환 주기 속에서 내 뇌는 보다 깊은 수면과 그보다는 얕은 수면을 오간다.

뇌간에서 발사된 신호가 기저전뇌핵에 닿고 있다. 시동이 걸린다. 내 전뇌가 각 수면의 깊이에 맞춰가며 수많은 신호들을 짜 맞추기 시작한다. 도파민은 증가한다. 인간의 의식이 정보들의 파편을 엮어 시를 만들고 짧은 소설을 써내려간다. 수만 년 진화의 메커니즘이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감각정보와 기억정보를 엮어 나가는 이 문학적인 재간꾼의 이름은 연합피질이다. 그러나 각성 시와 달리 신경전달물질의 부족으로 인하여 나는 의도치 않은 꿈의 검열 현상을 겪는다. 그러나 내 전두엽은 그것을 개의치 않는다. 철저한 DNA 프로그래밍에 의거해 자신에게 주어진 작업을 진행한다. 꿈은 사실과 논리보다는 허구와 환상에 의존하고 있다. 나는 그곳에서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한 여자를 바라본다.

현재의 시점에 나의 가장 우세한 감각은 다름 아닌 시지각이다. 15% 이하의 촉각과 운동감은 내 꿈의 생동감을 더한다. 미각과 후각은 박탈당한 채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언어 청각계가 우세하게 활성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행히 - 혹은 불행히 - 나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진 않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시각적 이미지는 깨어 있을 때와 그 질이 다르지 않지만, 모노톤의 이미지로 구성되고 있다. 그 흑백의 질감이 나의 오래지 않은 추억과 향수들을 자극한다. 편도체와 기타 피질 영역이 활성화되고 내 정서적 기억들은 분주히 처리된다. 그녀가 나를 보며 해맑게 웃었을 때 나는 거기에서 비로소 아내의 얼굴을 보게 된다. 내 심상이 자극된다. 나는 꿈속에서 왈칵 눈물을 쏟고 만다.

이제 급격히 아세틸콜린이 감소하고 도파민의 수치가 낮아진다. 현재의 렘 수면 주기가 끝나가고 있다. 그러나 논렘 수면을 향한 새로운 주기를 맞는 것은 아니다. 슬픔이 내게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베갯맡이 축축하다. 내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다. 홉슨이 부정했던 프로이트의 망령이 내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13.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자살. 엽기적이거나 충동적인 살인. 혹은 건조하게 말라가는 정신을 따라 육신이 급격히 쇠락한다. 오래전, 우리의 삶 속에 더없이 달콤했던 잠은, 이제 꿈을 잃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루하루 사형의 언도를 확인하는 고통스러운 일과가 되고야 말았다. 꿈의 상실을 벌충하려는 사람들은 술과 마약을 찾았다. 환호하는 환경 운동가도 없건만 원전까지 폐쇄한 정부였다. 그들에겐 이런 사태를 통제할 여력이 없었다.

인류는 물론 노력했다. 그들은 도파민을 주사하거나 실험참가자- 대개는 이미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들 -의 동의를 얻어 인위적으로 기저전뇌핵을 손상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성 상태에서조차 환상을 접할 수 있었지만 엄밀히 꿈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솔름스의 뉴로싸이콜로지(*8)는 결국, 21세기의 문제에 대해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셈이다.

유전학자들은 과거의 한 때, 당장의 진척은 느릴지라도 공학 기술의 가속적 리턴이라는 기하급수적 발전을 감안하면, 멀지 않은 적정한 시점에는 당시의 중요한 연구들이 완료될 것을 낙관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과 환경의 변화마저도 가속적 리턴의 법칙을 따르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상일은 문제의 답이 유전자 속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전 인류가 공통으로 갖고 있거나, 혹은 수많은 염기서열의 조합 속에 감춰진 복호화된 암호코드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인류는 사회화와 꿈에 관한 유전적 퇴화를 일으키거나 우리의 DNA가 생성하고 있을지 모를 특수한 단백질을 찾아 억제함으로써 이 멸망을 피해갈 수 있을 거라 말했다.

나는 이런 일들이 있기 전, 상일이 카페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느낌은 있지만 접근방법은 없는 거지."

그에대해 나는 이렇게 조언했었다.

"흠. 하긴 나도 특정 주제를 취재할 때, 어디부터 접근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할 때가 있어. 그럴 때마다 선배들이 하던 충고를 떠올리지. - 우선 어디든 가서 부딪쳐라."

그래, 한번 부딪쳐 보자고. 어쩌면 너와 네 아이가 꿈을 잃기 전에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너흴 구할게. 수많은 반복과 실패를 거치면 말이야. 수많은 조작과 그 결과를 살피면 말이야. 그리고 살아남아 제수씨나 죽은 수진이의 가묘에 꽃도 갖다 놓고. 함께 추억하고. 그리고…….

그러나 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할 것이란 걸. 이미 사람들이 유전자 속에서 그렇듯 많은 기록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 기록 속에서 문제가 되는 특질 하나만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 문제 역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특질일 테니까. 인과적 귀납추론이란 이처럼 속성이 많은 상황에서는 차이가 있는 비교 대상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용이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인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사소한 부재는 현재 진행형이었으며 누가 이 부재를 피해가는 특질을 갖고 있을지 인류는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신체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도 유전적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면, 하물며 인류의 문명화와 사회화 따위에 관한 유전적 코드를 찾는 일은 규칙에 의해 놓인 유전자의 배열조차 혼돈에 수렴케 하진 않을까.


이제 유전 연구자들은 증후군이 전 인류 혹은 연구자들을 모두 무력화시키는 시점에 이르기 전, 자신들이 그 해법을 찾아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직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가까스로 사회라 부를 수는 있을만한 틀을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유전 연구소는 다른 3세계 연구소들의 뒤를 이어 프로젝트 실패의 발표를 준비했다. - 결국 우리는 슈퍼 컴퓨터가 대한민국에 제시한, 멸망을 피하기 위한 합리적 기일을 맞추지 못한 것이다.

나는 때때로 생각했다. 각기 다른 대(代)를 거친 사람들이 가진 유전자 속의 코드가 진화의 결과로 임계점에 이르러 활성화되다니. 마치 13일의 금요일 바이러스처럼 말이지?

아이 엄마의 죽음 이후 나는 다소 감상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지만, 여전히 우유부단했고. 여전히 회의론자였다. 그리하여 난 상일이나 다른 유전학자들의 생각을 수긍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들 사이에도 이견이 너무 많았고, 심지어 유전자가 꿈을 박탈한다는 메커니즘에 대해 이렇다 할 가설조차 통일하지 못한 채였다. 혹자는 상일처럼 내재된 코드라고 했고, 혹자는 전자파나 오늘날 대기에 축적된 특정한 화학물질에 의한 집단적인 DNA의 변형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만약 그들, 특히 상일의 생각이 옳은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종에 관해 신이 예정한 멸망의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정말 섬세한 필치와 정교한 기술로, 신이 우리의 유전자 속에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질서를 예정해둔 것은 아닐까?

과거 우주를 떠돌던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거대 파충류 거주지였던 지구 궤도 진입을 예정하던 그즈음에. 그(혹은 그녀 혹은 그것)는 차후, 지구를 지배할 우점종의 운명을 재단해보며 스스로의 센스에 감탄했을지 모른다. '이건 공룡의 멸망에 보다 훨씬 세련되고 지적인 방식이야!'라고. 누군가의 말을 빌자면. 이건 쓰고나서 수고로이 고물을 처리해야 할 20세기의 거대한 구식 기계에서, 조건을 충족하면 자동소멸되는 - 비록 우리는 누릴 수 없게 되었지만 - 21세기 말의 나노봇같은 개념으로의 발전인 셈이었다.

나는 문득 다음 세상의 우점종이 궁금해진다. 개미나 바퀴벌레? 그러나 지금의 위기가 핵이나 기상이변 따위는 아니다. 게다가 사람이 없어진 세상에선 바퀴벌레도 크게 번성할 수가 없다지. 그래, 어쩌면 돌고래나 개 같은 사회성 높은 포유동물이 다음 세상을 지배할지도 모르겠군. 아니면 늑대? 미국의 보호구역에 방생된 수십 마리의 늑대는 10년 만에 수십배로 늘었다 했어.(*10) 이들은 개보다 강하고 사회성도 높으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아닌게아니라 신은 언제나 겸손하던 이 포유 동물들에게서는 꿈을 앗아가지 않았지!

상일은 발표 전 따로 내게 연락을 취했고, 연구소의 응접실에서 몹시 피로한 얼굴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 상일은 스푼으로 젓던 커피 잔에 조심스럽게 크림 액을 부었다. "이런 사소한 문제로 우리 인류가 멸망을 겪게 되리란 걸 말이야."

그리고 그는 연구의 실패를 시인했다. 그의 말처럼 그의 분야와 내 분야는 달랐던 것 같다. 암호는 너무 복잡했고 우리 손에 쥐어진 건 주판에 지나지 않았던 거겠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상일이 말했다.

"아무튼 미안해."

뭐가?

"혼자 오리가 된 일 말이지?"

"아니, 답을 찾지 못한 거. 너나 네 아이에게나."

"사과는 우리 부자에게가 아니라 인류에게 해야하는 거 아냐?"

이제 담담함은 내 무의식이나 본능 따위가 아닌, 정신의 표상 위로 떠오른다. 그것이 상황을 더욱 견디기 어렵게 했다. 그러나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그에게 대꾸했고 상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그냥 여기서 널 인류의 대표로 삼아 사과하려고. 미안해."

그래. 정해진 각본 따위는 내버리라지. 바보들이 가열차게 떠드는 인생의 무대에선 애들립이야말로 가장 멋지고 진솔한 대사가 되는 법이다.

"괜찮아. 수고했어"

나는 그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한다. 신문사로 돌아가 이 마지막 기사를 정리하면, 이제 나는 아직 꿈을 잃지 않은 내 어린 아이와 함께. 그 사소한 부재가 우리 부자를 찾아올 때까지. 함께 꿈을 꾸고 과거를 추억하며 마지막 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終)
댓글 4
  • No Profile
    손지상 08.12.09 09:42 댓글 수정 삭제
    qui-gon 님, 잘 읽었습니다. 고백합니다만 [행운의 동위원소], 제가 프린트 해서 혼자 제본을 해 읽고 있습니다. 이번 것도 개인 소장 용도로 프린트 해 공부해도 괜찮을지요?

    ps. 저는 이 곳에서 본명으로 활동한답니다. ;-)
  • No Profile
    qui-gon 08.12.09 16:53 댓글 수정 삭제
    손지상// 저야말로 문장에서 손지상(도스까라아스)님이 글을 올리기 시작하신 이후로 제가 갖지 못한 글의 깊이나 내공에서 저 자신의 부족함을 많이 반추하곤 했습니다. 그런 손지상 님께서 제 글에 대해 이렇게 높게 평가해주시니 부끄럽기 그지없네요. 개인적으로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영광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손지상 08.12.09 21:46 댓글 수정 삭제
    qui-gon 님, 무;;; 무신 그런 과찬의 말쌈을;;;;; 저야말로 감사할 따름이지요! 다시 한번 우수작에 선정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 No Profile
    일넷 08.12.10 00:49 댓글 수정 삭제
    뭐지 이 훈훈한 장면은..

    의의 독자우수단편 선정글에 있는 [사.우.문] 단평을 보니까, 확실히 이야기가 다른 식으로 뻗어나갈 여지도 있었네요. 사소한 부재에 적응한다라. 처음 읽을때 사소한 부재라는 아이디어 자체에 매료되서 다른 상황이나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을 안해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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