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존재하지 않던 별

2008.05.30 23:2605.30

기림은 격렬한 노동으로 야위기도 하고 굳세 지기도 한 두꺼운 가슴팍을 기운차게 편다. 남색 머리카락은 땀에 젖은 이마에 붙어 반짝거리고 선홍빛 눈동자에서는 빛이 뿜어 나온다. 기림이 헬멧 안 공기 중 70% 이상을 차지하는 헬륨 때문에 높고 가늘어 듣기 고역이었겠지만 이젠 데면데면해진 목소리로 말한다.
<자, 친구들. 어서 밀자. 고장난 원자 변환기 끼고 앉아 있는 우리 동지들이 툴툴거리기 전에>
노란 머리를 길게 기른 아람이 새하얀 앞니를 드러내며 밝게 웃는다. 그녀의 멋진 몸매를 방열복 때문에 못 보는 게 못내 아쉬운 기림이다.
<기림이는 여전하네. 안 본 지 하루나 되었는데도>
<물론이지. 쉴 틈이 없었거든. 나를 부르는 곳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거절 할 수 없었어. 거절하길 깜빡 잊은 몇 곳에서는 아쉽게도 너희들을 만나지 못 했단 말야>
<우릴 만나면 잡아먹기라도 할 작정이었니?>
<니네 만큼 좋은 파트너들이 어디에 또 있겠어>
<밉지........는 않네, 호호홍~~>
<평소처럼 웃어 줄 수 없니. 하하하, 이렇게>
알루미늄으로 가장 내벽을 싼 둥그런 통로 끄트머리에서, 사람 몸통 보다 배나 큰 납덩어리를 굴리며 보들이 나타난다. 보들은 요즘 들어 청회색 머리카락에 황금빛으로 포인트를 넣었다. 남자답게 넓은 어깨는, 그 보다 덩치가 다소 큰 기림 만했다.
<자, 자, 비켜 비키라구, 씩씩한 아저씨 아줌마들>
납덩어리가 터널을 구르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어린 아이가 재잘거리는 듯한 화사한 느낌에 아람이 환한 미소를 짓는다. 금새 표정을 바꾸더니 납덩어리를 통로에 있는 고정 핀에 묶어두는 보들을 쏘아본다.
<레버는 내리고 오셨나, 덜렁아>
<내리고 왔어>
<5구역이야. 잊지는 않았지? 만약 잊었으면 뽀뽀해 줄 꺼야>
<차라리 꼬집어 줘>
방열복을 꼬집으면 니 손가락만 아프겠지.
아람이 말한다.
<농담이 아니라구. 같이들 가서 확인해 보고 와야지>
기림이 말한다.
<슬기를 기다리자. 걔가 확인하고 오겠지>
보들이 희고 섬세한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한다.
<그렇게 쉽게 말할 문제는 아니야. 5구역 레버가 내려가지 않았다면 다른 구역 레버를 내릴 수가 없어. 더 이상 진전이 안 된다구>
기림이 말한다.
<그러면 차라리 좋지. 요즘엔 장비가 몽땅 다 엉망이 되어 가. 나사 하나 녹슬지 않은 데가 없어. 고쳐 쓰래도 고칠 수단이 없어 못 고칠 판이야. 얼마못가 맨손으로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진 열탕을 만져야 할거야. 그럼 끝장이 날 테지… 아, 미안해. 내가 너무 앞서 나갔군. 어쨌거나 5구역 레버가 내려가지 않았다 손쳐도 다른 구역 레버를 당기면 그 구역은 내려가려고 들 판이야>
아람이 말한다.
<그럼, 이의 없지. 함께 가는 거다>
보들이 말한다.
<불안해서 그러는데, 우리 셋이 한꺼번에 뛰는 바람에 온기 전달 통로가 내려앉으면 어쩌지?>
아람이 말한다.
<그 지경까지 갔으면, 인류는 예전에 끝장났겠지. 오늘따라 둘 다 그렇게 앞서가고 그래? 뇌라도 고장났냐?>
그들은 이미 5구역으로 가고 있다. 그들이 아는 한 인류 모두가 모여 사는 갈색 난쟁이별 에코의 표면 온도는 아주 낮았다. 스스로 핵융합 반응을 일으켜 타는 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표면 온도다. 섭씨 16도에 가까울 정도라서 인간 생활에 딱 들어맞는다. 아쉬운 건 섭씨 16도라는 게 평균 온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표면 보다 몇 십 km 쯤 밑바닥에서 쌀알 무늬라도 나타나면, 수백 분의 1초 사이에 표면은 섭씨 400도 이상까지도 끓어오를 수 있다. 다행스러운 일은 핵 가까이 전자기 발전기와 감지기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핵 상태를 제대로 감지할 수만 있으면 표면이 어떻게 바뀔 지를 최소 몇 시간 전에 알고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행스런 일은 발전기도 감지기도 요즘 들어서는 신통치 않다는 점이다. 발전기, 감지기 모두 지금은 만들 수도 없는 소재로 이루어져 있기에 수리할 수 없다. 이들은 목숨을 내놓고 일한다. 에코의 대류 현상을 이용하여 표면 근처의 열기를 도시로 운반하는 온기 전달 통로를 수리 보수 개선하는 일을 책임지고 있으니까.
두려움을 다소나마 잊겠다는 듯 기림이 큰소리친다.
<슬기야, 슬기야, 나와라!>
아람이 귀를 막았다 떼더니 말한다.
<귀가 멍하잖아!>
<쨘!>
,하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슬기가 나타난다. 눈매가 다소 매서우면서도 젖어 있지만 미소로 평소엔 가려져 있어 그녀의 사람됨을 조금이나마 말해 준다.
아람이 묻는다.
<슬기야, 5구역 레버는 내려져 있니?>
<응. 내가 6구역 레버도 내렸어>
그렇다면 지금 있는 이 통로는 조금씩 에코 핵 가까이로 가라앉고 있을 것이다. 통로 안쪽의 공기가 요동치는 게 느껴진다. 도시에서 오는 식은 공기와 이쪽의 데워진 공기가 서로 더욱 거칠게 엇갈리면서 빗어지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에코가 식어 가고 있기 때문에 온기 전달 통로를 더욱 가라앉힐 필요성이 있다. 도시는 긴축을 거듭하고 있지만 산목숨을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죽어 가고 있는 거야, 우리 모두가. 그것으로부터 오는 동류 의식도 조금은 우리 네 사람이 뭉치는데 이바지하고 있겠지.
언제였을까. 아직 자연 발생된 양성자가 마지막 한 톨까지 중간자랑 양전자로 붕괴되지 않았던 때는. 도시의 누구도 그때가 언제인지 떠올리지 못한다. 우주 안에 양성자라고는 몇 톨 밖에 남지 않았던 전설의 시간에 우리 조상들은 가까스로 블랙 홀 하나를 증발시켰다. 당시 인간이 통제 가능하던 에너지 보유량으로 증발시킬 수 있는 한계선에 있었던, 막 만들어질 때의 크기를 지닌 블랙홀이었다. 블랙홀은 급속 증발되면서 에너지를 토했다. 그때까지 모은 중력 에너지와 증발 에너지를 모아, 아직 죽지 않았던 진공 속에서 미립자를 걸러 낼 수 있었다. 그것으로 마지막 인공 양성자를 만들어 모아 에코의 심지를 태웠다. 그들의 육체도 이때 태어난 양성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10의 33제곱 년만큼 집행 유예된 양성자들의 죽음. 언제였는지 아는 이는 없다. 도시가 썩어 버릴 때는 에코보다 이르고 에코의 붕괴는 양성자들의 죽음보다 빠를 거라는 것만 알 따름이다.
기림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한다.
<무진장 덥네. 확 방열복을 벗어버릴까>
보들이 입맛을 다신다.
<고마운 일이지. 그러면 힘들게 장례식 치를 필요가 없어질 테니. 공기가 널 끓여서 조각 내겠지>
슬기가 말한다.
<둘 다 끔찍한 소리는 그만하셔. 더 더워. 후아 후아>
아람이 말한다.
<잠깐 이거 무슨 소리야>
그들의 세포 안으로 금속의 소리가 파고든다. 우주가 공간이 3차원인 우주일 뿐 아니라 탄소 원자의 준위나 4대력 사이의 균형 따위마저도 생명이 만들어지기에 알맞다 하여도 초창기 핵융합 때 철이 대량으로 만들어진다면 영원히 깜깜해질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탄수화물로 이루어진 그들이 철로 대표되는 금속에 반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알루미늄 표피가 오그라들고 있다. 어떤 곳은 솟아오르고 어떤 곳은 갈라지기까지 한다. 수소의 흐름도 바뀌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다.
아람, 보들, 슬기가 일제히 기림을 쳐다본다. 아람은 몽상가, 보들은 정보 포식가, 슬기는 신관이기 때문에 알짜 베기 기술자라고는 기림 하나다. 기림이 말한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어. 감지기가 낡아서 제대로 알 수가 없었던 거야. 이건 흑점이야>
아람이 미심쩍어 한다.
<틀림없는 거야?>
지금으로선 기림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는 그래>
기술자라고는 기림뿐이다. 게다가 기림은 그리 뛰어난 기술자라고는 말할 수 없다. 설령 뛰어난 기술자라 하더라도 장비가 낡아버린 상황에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기 십상일 터이다.
보들이 말한다.
<어떻게 해야 하지?>
기림이 말한다.
<뛰자! 되도록 빨리 도시로 가야 해>
그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린다.
슬기가 말한다.
<엘리베이터가 있는데까지 가려면 10분 남짓 걸릴 거야. 그 안에 피할 수 있을까?>
기림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추스르며 말한다.
<추위라면 피할 수 있어. 문제는 중력이야. 우리 유전자가 아주 옛날 지구를 걸었던 이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지? 변온동물로 바뀐 것뿐이 아니야. 우리는 지구 보다 표면 중력이 열 몇 배는 되는 에코에 적응하고 있어. 그것도 비슷한 모습과 구조를 가진 체로 말야>
옛날 조상들 보다 체력이 좋다는 소리군. 그게 뭐가 중요한가?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가라앉는다.
기림이 말을 잇는다.
<흑점이 나타나면 전파 교란 뿐 아니라 중력 변동도 일어나. 작은 흑점이라면 좋겠는데…>
만약 이게 큰 흑점이라면? 중력파는 빛과 같은 계열이라 속도가 같아. 빛은 열을 운반하기도 하지. 하지만 중력파가 먼저 이르렀을 거야. 가스들이 대류 하면서 통로에 열을 주는 거니까 온도 변동은 중력파나 빛 보다 결국 늦게 오게 되는 거야. 중력 변동이 있더라도 거의 영향을 주지 않을 만큼 작은 거였어. 그러니 작은 흑점이야. 살 수 있어.
아냐. 큰 흑점이라도 작은 중력 변동만 일으킬 수도 있어. 흑점이 크다면 우리를 얼려 죽일 수 있을 만치 온도 변동이 심할 수도 있지. 둘레가 적어도 5만 km는 될 테니까. 온도 변동은 중력 변동 보다 속도가 느려.
그들이 한순간 허공에 뜬다.
<으아악!!!>
통로가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에코 전체로 보았을 때에는 미미하지 짝이 없을테지만.
보들이 말한다.
<큰 흑점이야! 중력이 커지고 있어>
기림이 말한다.
<아닐 지도 몰라. 흑점이 일어나면 온도가 내려가. 대류 현상도 뜸해지게 되지. 기체 압력은 대류가 활발할수록 커! 기체 압력이 떨어지면 통로는 떨어져. 아마 이어진 통로들이 무더기로 떨어지고 있을 거야. 하지만 통로가 워낙에 얽혀 있어서 많이 떨어지지는 않을 거야. 모든 통로가 이 흑점 위에 있을 리는 없잖아>
슬기가 말한다.
<그러면 살 수 있는 거니?>
<아마도. 통로는 아주 튼튼하고 방열 효과도 좋아. 그렇지 않고서야 수백만 도가 넘는 대류권 속에 있을 리 없어>
<빌어먹을. 에코를 둘러싼 코로나 공이나 고치러 갈 걸 그랬나 봐!>
마치 굴러가는 것 같다. 가끔 튀는 것도 같다. 온도 변동이 일어났든 중력 변동이 일어났든 기체들이 영역에 따라 다르게 분포되어 있기에 현상은 비슷할 것이다.
구조를 믿는다는 것. 컴퓨터에 전자 펄스가 흐르면 움직일 거라고 기대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건 물리학을 통해 예측해서 믿는 것에 비한다면 안전성이 떨어진다. 우주 공학을 무기로 수백억의 미리내를 종횡 하던 인류의 전성기 때에는 컴플렉시티라는 것이 있었다. 컴플렉시티가 있던 때라면 구조 따위를 믿었을 리 없다. 시계 바늘은 거꾸로 가고 있다.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역사처럼. 몽상가 아람은 제 숙명을 받아들이고 싶어 한 적이 없다. 역사를 공동체의 구성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그리고 그것을 좀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는 숙명. 내뱉을 때에는 마치 꿈꾸거나 상상한 것처럼 여기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숙명. 그렇게 여기도록 만들지 못했을 때조차 여러 금기를 지켜야 한다.
죽음이 느껴지자 아람은 금기를 거부하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토한다.
<우리는 죽지 않아도 돼!>
헬멧 안에 있는 스피커를 통해 그 소리는 보들, 슬기, 기림의 뇌리로 파고든다.
슬기가 말한다.
<이제 우리는 살았어! 가끔씩 아람이는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맞추곤 했었잖아, 우리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아람 님이시여, 근거가 뭐니?>
침묵만이 들려 온다. 슬기가 허공에 뜬 채 키득거린다.
<그러면 그렇지. 이번에도 말하지 않는구나. 하지만 맞을 거야>
적어도 근거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 신비함을 유지한다. 아람은 신비에서 오는 권력을 통해 뭔가를 얻으려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스스로 안에 있는 명령에 충실하고자 한다. 물리적 위해가 있는 건 아니다. 심리적 압박감이 사람을 많이 힘들게 한다는 걸 아람은 느끼고 또 느낀다. 이 시대 누구도 알 수는 없겠지. 내가 행복하면 남의 불행은 더욱 더 안 보인다.
기림이 말한다.
<우리는 살아 남을 거야. 팔다리쯤 부러질 수도 있겠지만, 그쯤이야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지!>
얼마나 허공에 떠 있었을까. 몇 십 km는 족히 떨어진 것 같다. 에코의 지름은 25만 km이므로 정말 짧게 간 것이다.
그들은 통로 바닥에 곤두박질친다.
<아하하하!>
<하하하하!>
바닥을 구르면서 실컷 웃어댄다.

그들은 바에 모였다. 헬륨 농도는 언제나 70% 정도로 맞춰져 있다.
<진짜 큰일날 뻔했군>
슬기가 과장된 몸짓으로 한 말이다.
보들은 턱을 손으로 괸 채 말한다.
<10.3 짜리 지진 발생지가 겨우 2300km 남짓 떨어져 있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거기 걸려들었다가는 통로야 큰 탈 없었겠지만 우리는 끝장났을 거 아냐>
바텐더이기도 한 기림이 생맥주를 하나 가득 부어 돌리고는 말한다.
<자 손님들, 마침 다른 사람들이 없으니 까놓고 말해 볼까>
아람이 말한다.
<우리말고 언제 다른 손님이 있었니>
보들이 말한다.
<거의 없었지. 인류와 존망을 함께 하는 숭고한 종족, 파리 몇 마리만 빼고 말이야>
아닌게 아니라 파리 몇 마리가 기어다니고 있다. 파리들은 흰개미랑 개미랑 벌이 걸었던 진화로 갔다.
기림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 한다.
<그렇군. 실패한 이들은 서로 다 다르지만, 성공한 이들은 다들 비슷비슷하다는 법칙을 따르면서 말야. 이 법칙 알아?>
보들이 말한다.
<뭘 말하고 싶어? 선동가 선생>
<이미 실패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하고 싶으시겠지, 그 멋지고 박식한 우리의 선동가는 말야. 지난 엄청난 세월 동안 인류는 초시공 공학에 이르고자 애썼어. 우리 우주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려는 원대한 시도이자, 우리 같은 꼴로 후손을 몰아가지 않겠다는 절박한 마음의 표현이었지. 하지만 웜홀을 넓힐 수 있는 방법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고 공간을 구부렸다 펴는 워프 항법은 에너지 낭비가 지나쳤지. 에너지주의는 우주 전쟁을 수도 없이 일으켜댓지만 힘이 넘친다는 표시였지. 지금 우리를 보라구! 싸울 여력조차 없어 버트란드 러셀 같은 20세기 몽상가가 구상해 낸 사회 수준에 징글맞게 머물러 있잖아>
슬기가 말한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만약 공동 작업장 같은 걸 트집 잡을 생각이라면 사양하겠어. 뭇 성의 평등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들고 나오지는 않겠지. 설마 내 친구가>
<그랬다가는 오지랖 넓기로 소문난 너한테 남아나겠어. 당장 대부대를 끌고 달려와서 한동안 골방에 짱박혀 있는 신세로 전락시킬텐데>
아람이 말한다.
<러셀 경의 사회론은 당시에는 유토피아즘으로 취급되었어. 그러니 너무 폄하하지는 말라구. 하지만 보아하니 우리 친애하는 기림 경께서는 아주 커다란 구상이 있으신 것 같에. 어디 말해 봐>
기림이 맥주를 홀짝거리더니 말한다.
<애코에서 30억 km 떨어진 곳에는 지름 320km짜리 블랙 홀이 있지. 아직은 빛, 뉴트리노, 전자, 양전자 따위가 심심찮게 블랙 홀에 떨어지고 있어서 증발되지는 않고 있는 우리의 희망이지. 애석한 일이다. 한때 우주가 좁다고 날뛰던 인류가 이제는 작은 블랙 홀 하나 바라보고 그 근처를 못 떠나고 있어. 전파 망원경, 중력파 탐지기, 뉴트리노 검색기로 다른 블랙 홀 어디 있나 찾고 있지만 그 긴 긴 세월 동안 못 찾은 걸 보면 앞으로도 찾기는 힘들어>
슬기가 말한다.
<블랙 홀은 상당히 오래 버틸 거야>
<그야 그렇겠지>
우리 우주는 죽지 않는 우주다. 그런 우주 속에 있는 블랙홀은 진짜 진공을 좀처럼 만날 수 없고, 진짜 진공에 둘러 싸여 있어야만 가능한 증발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나 긴 시간이 흐른 덕분에 거의 모든 블랙홀은 사라졌다. 한때 지름이 몇 십 억 km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블랙홀이지만 지금은 겨우 320km다.
죽어 가고 있어. 어떤 뜻에서는 그렇지 않겠지. 죽어 간다는 건 우리와 우주를 동일시했을 때에야 가능한 거야. 우주는 상태가 바뀔 뿐이다.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단지 상태만 바뀐다. 에너지가 없어지지 않으므로 우주는 영원할 것이다. 하지만 에너지가 모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것을 존재 기반으로 삼는 인류도 파멸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 훨씬 앞서 사라지겠지. 기림은 가끔 죽음에 초연하기라도 한 것인 양 허세를 부린다. 신관인 슬기는 허풍으로라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슬기는 밝고 아름답게 살고 싶다. 그게 사명이고 운명이고 숙명이기도 했다. 슬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우주랑 우리를 똑같이 여기는 어리석은 시각에서 떨어져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중심을 잃을 것 같다. 에코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마음에서 벗어나면 그저 미아인 것만 같은. 식어 가는 우주에서 아무 것도 못 하고 죽어 간다는, 앓아 간다는 느낌.
다들 생존만을 바라고 있다. 즉물적인 가치에 감겨 에코라는 낙원을 잃어버리기를. 서로 보듬다가 죽어 가는 건 아름다운 거라는 생각이 언 듯 들지만 그런 패배주의에 빠지기는 싫다. 패배주의에 빠지느니 도전하는 게 과학의 정신이니까.
<너는 위선자야>
슬기가 기림을 쏘아본다.
<너 뭐라고 했니?>
기림에겐 한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이 없다.
<위선자. 너는 요즘 동료 신관들과 짜고 야릇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더군 그래. 뭐? 우리의 블랙홀이 이제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초시공이랑 이어진 4차원 웜홀을 통해 지속적인 에너지 유입이 있기 때문이라고?>
미신은 당대의 과학과 약간씩 야합을 하여 당대 정통 과학 보다 못한 자식을 낳는다. 점성술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 나왔듯이. 그런 식으로 말하기 전에 슬기가 맞받아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살자가 늘어나게 될 꺼야. 아직 많이 살 수 있는데 그렇게 몰아 갈 수는 없어. 얼마든지 보람차게 삶을 가꿀 수 있는데 죽음으로 내몰 수야 없지. 나도 허무맹랑한 수작이라는 것쯤은 알아. 무가치하고 비루한 일상만을 늘여간다고 이야기해도 괜찮아. 마음속으로까지 속는 인간들을 보면 저능아 같기도 해. 나도 믿고 싶어.
자연 과학은 위대해. 그것은 육체와 물질이 있다는 걸 가르쳐. 우리로 하여금 너무 내면에 빠지지 말라고, 신경이 만드는 환상에 빠져 세상을 그르치지 말라고 이야기하지. 다윈은 무시당하던 육체를 발견한 거야. 덕분에 우리는 여기까지 살아남았어. 하지만 우리 마음은 어쩌지? 자연 과학으로 본 세상은 너무 무서워. 공허해. 철학이나 종교는 적어도 싸늘하기라도 하지. 우리를 도망칠 길 없는 곳으로 내모는 대자연이라면, 그러면서도 우리가 그 일부일 수밖에 없는 대자연이라면 그걸 내면화할 수 있는 환상이 필요한 거야. 신관의 전통적 역할 가운데서는 사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 것도 있어.
초시공 공학을 통해 가짜 진공을 식힌 거품들 속에서 우주들을 마구 찍어낼 수 있는 권능을 얻더라도 지성은 대우주 앞에 나약할 수밖에 없어. 그런 무력감을 받혀 주고 권력 감정을 보듬어 우리가 겸손해지고 아름다운 삶을 향한다면 그것이 종교고 철학이야. 적어도 난 그렇게 믿어. 그게 다 분자가 만들어 낸 방어 기제라는 걸 알면서 말야>
기림이 잠깐 숨을 고르더니 말한다.
<너는 모두가 힘을 합쳐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을 막고 현실에 안주하라고 말하고 있어. 뭇 종교들 가운데 성공한 것들은 언제나 사회와 영합한 것들이지 사회를 배척한 것들이 아니야. 물론 너는 믿거나 말거나라는 토를 달면서 말하지. 하지만 그런 사탕발림에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그 사탕은 공짠데. 솔직히 나도 믿고 싶어. 우리 정신 연령은 사이버네틱스가 나온 초창기 수준까지 떨어져 있어. 조금만 더 밀어 주면 원시인 수준이 될 판이지. 때문에 그런 주장이 통하겠지만.
우리는 더불어 나아가야 해>
정치가 투로 기림이 말을 끝내자마자 보들이 말한다.
<갑자기 왜 곁가지로 나가는 거야. 괜히 시비 붙지 말란 말야. 우리는 무슨 일을 하건 함께 노력해 왔잖아. 혹시 알아? 이번에는 실현 가능한 말을 할지. 아무리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해 왔더라도 또 알아?>
아람이 뇌까린다.
<기림이 무슨 말을 하건 불가능할 거야>
세 사람의 눈길이 한꺼번에 아람을 향한다.
기림이 화를 삭이느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듣지도 않고 왜 그래? 독심술까지 배운 거야? 텔레파시는 역사이래 합법이었지만 독심술은 불법이었다구>
둘 다 없어진 기술들이다. 기술은 쓰고 가꾸지 않으면 잊혀지고 잊혀지면 잃어버리는 법이며 잊혀지거나 잃어버린 기술들이 많은 사회는 멈춰 가고 있는 것이다.
아람이 말한다.
<지금 하고 있는 게 가능한 최선이니까. 이 이상의 길이라곤 없어. 우리 우주의 법칙이 거품들 속에서 정해지던 때부터 결정 난 일이야. 시공도 물질도 무의미하던 때에 맺어진 일을 우리 우매한 지성이 풀 길은 없어>
잠깐 침묵이 흐른다. 아람이 말한다.
<미안해, 정색하고 말해서. 나도 이런 거나 기억해 내는 내가 싫어. 그런 나에게 화가 나. 너무 너무 끔찍해>
보들이 말한다.
<니가 맞출 때마다 그랬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아무래도 초 좀 쳐야겠는 걸. 같이 잘 때 우리는 진짜 다정한데 이런 때만 되면 왜 이렇게 싸늘해지는 지 모르겠어>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진다. 보들이 말을 잇는다.
<한 사람에게만 어떤 능력이 집중되고 있다는 건 퇴화의 증거지. 아람이 그 좋은 예잖아. 진짜 엄청난 능력이지만 좀더 많은 사람이 함께 누리고 좀더 희망적인 기억이 난다면 오죽 좋겠어. 기림은 퇴화를 막으려고 이러고 있는 거잖아. 한 번 들어 보자>
슬기가 손뼉 친다.
<우후후~~! 어서 허풍 쇼를 벌여 봐>
기림이 말한다.
<쇼라니 너무 하는군. 우리 우주는 영원히 죽을 수가 없는 상태야. 팽창 과정에서 다른 우주랑 만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알 수야 없으니 생략. 우리 우주의 각 영역은 팽창하는 속도나 각이 다를 수밖에 없어. 영역에 따라 질량 분포가 다르니까. 질량은 중력을 만들어 팽창력에 제동을 걸려고 들겠지. 그 다른 차이를 낙차처럼 써서 그것에서 지속적인 에너지를 만들 수가 있어. 그러면 우리는 다시 드넓은 우주에서 날아다닐 수 있지>
아람이 말한다.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는 아주 적어. 때문에 엄청나게 넓은 영역에서 시행되어야 하지. 적어도 몇 천 억 광년을 휘어잡아야 할 걸. 그걸 하는 데 드는 에너지는 또 어쩌고. 게다가 우리가 인간의 속성을 유지하면서 그 방식을 고를 수는 없어. 팽창하는 데에 따라서 옮겨다녀야 하니까. 우리는 결코 체내 시계로 하루를 25시간으로 인지하는 본능을 지켜 낼 수 없겠지. 그 뿐이 아니라 세포도 분자도 양성자조차 포기해야 할 지도 몰라. 공간에 물리학적 패턴을 그릴 수 있어야만 그런 생활을 받아들일 수 있어. 전자기파로 이루어진 물리 지성이 되어 수 백 억 년을 1초로 느껴야만 할거야>
오래 가꾼 사랑스런 몸을 버리면 정신은 오롯히 바뀌어버리고 만다, 또 다른 무엇 인가로. 조금도 탐탁지 않다. 아람은 입안에 쓴맛이 고이는 걸 느낀다. 몸에 아로새겨진 기억들을 많이 버린 채 물리 법칙들을 직접 느끼며 우주를 유령 마냥 헤매면서 그 안에서도 부대끼는 삶.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상처받지 않으리라고 꿈꾸는 모든 이들을 역겹게 여긴다. 기림이 남자이기 때문일까. 훗, 아람이 기림을 그렇게 보다니. 우스운 일이다.
기림이 말한다.
<그러면 죽음을 받아들이자는 말이야? 앉아서? 그게 성공만 하면 인류는 영생할 수 있어>
보들이 말한다.
<모든 이가 영생을 바라지는 않는다는 말을 하지는 않겠어. 네가 방금 쓴 논리처럼 억지가 될 소질이 다분하니까. 그걸 바라는 이들끼리만 하면 되는 일이지. 하지만 그건 죽음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을 것 같은데. 계산을 조금이라도 잘못 하면 적자가 날 테고, 이득을 내기도 전에 파산할 거야. 파산은 곧 죽음이 되겠지>
기림이 고개를 잠깐 숙였다가 일으키며 말한다.
<그러니까 모험이지. 반드시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 이러고 있어야만 하나? 난 답답해. 블랙홀에 언제 빠질지 모르는 주제에 열심히 쓰레기를 사상 지평선에 져 나르지. 그러면 블랙홀이 커지고 중력 에너지도 늘어나니까. 중력 에너지가 엄청나다는 건 확실하잖아. 에코의 양성자가 없어질 때를 대비해서 우리 모두를 물리 지성으로 바꿀 작정으로 거의 모든 중력 에너지를 저장만 하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그것도 수명이 870억 년 밖에 안 되는 에코가 무너지기까지 충분한 힘을 모아 둘 때 이야기지. 그때 가면 결국 내가 말한 방식과 비슷하게 가게 될 거야. 좀더 빨리 해서 좀더 좁은 영역에서 보다 큰 효과를 얻자는 거야. 우리 같이 해 보자>
보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림을 쏘아만 보고 있는 아람에게 묻는다.
<아람, 넌 알고 있겠지. 이번에 기림의 말은 사리에 맞았어. 아까 네가 기림이 어떤 말을 하건 불가능할 거라고 했지. 그렇다면 이번 말도 결코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거야. 우리 조상의 컴플렉시티가 니 무의식 속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틀릴 리가 없잖아. 컴플렉시티는 제약을 받지만 이런 일에서는 틀림없이 인간보다야 정밀하겠지. 컴플렉시티는 관측자의 한계에 있지 생명의 한계에 있는 게 아니니까.
진실을 말해 줘. 이번엔 피해 갈 수 없을 거야. 우리를 납득시켜. 아니 나를 납득시켜 줘>
아람이 말한다.
<말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걸로 아는데. 나랑 하루 이틀 지낸 사이였나요?>
보들이 웃더니 말한다.
<웃음으로 넘길 생각 마>
기림이 말한다.
<그래. 나는 이날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했어. 약간의 무기도 있어. 니가 나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나랑 보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보들이 말한다.
<혁명을 벌일 생각이라면, 난 반대야. 혁명은 불행한 일이라구. 역사를 봐 봐. 모든 혁명은 한결같이 미친 상황에서 나와서 나름의 광기에 휩쓸린 체 진행되었어. 참아 줘>
아람의 눈 근처 살이 실룩거린다. 왜 이렇게 힘든 거지. 내 안에 남이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무언가를 쌓아 두고 지낸다는 건. 감성이랑 지성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사회성만큼은 최고 수준에서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공동체에서 지내고 있는데도 힘이 든다. 모두가 서로에게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을 베풀지만, 나는 내 안에서만 돈다. 그러지 않으려면 다른 뭔가가 돼야겠지. 가득찬 행복, 작은 긴장에서 오는 기분 좋은 아련함,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데서도 오는 고요함. 이곳 모든 이들의 공통된 마음가짐을 아람은 가질 수 없다. 도망칠 방법이라곤 죽음 밖에 없을 능력 때문에 흔들거리고 상처 주고 그만큼 아파한다.
아람이 말한다.
<대답하지>
아람은 세차게 일어나서 나가버린다.

보들은 기림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게 무엇인 지 알고 있다.
초시공 공학, 그걸 얻고 싶은 거야. 하지만 말하지 않았지. 적어도 10의 33제곱 년을 넘는 너무나 긴 세월 동안 그토록 많은 기술자들이 이르러 보고자 했던 궁극의 기술에 겨우 이 정도 실력으로 모험하듯 덤벼들자고 주장한다는 건 기림으로서도 터무니없어 보였겠지.
기림은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영원히 작은 방 안에서 작은 기억들을 변주하고 싶어하는 것 뿐. 끝없이 비슷한 경험들이 끝없이 작은 잣대를 들이대면 서로 달라 보인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뿐이다.
낡아진 장비들이 주는 불안감에서도 벗어나고자. 그런 작은 것들로부터, 하지만 결국 대우주의 일부로 우리랑 동등하게 부대끼는 것들로부터 좀더 많은 것들을 찾으려고.
보들 스스로가 그걸 바라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정보를 모으고 해석하는 이다. 그의 능력은 꽤 뛰어난 편이다. 특히 사람 정보를 모으고 풀어내는 데에는. 다른 정보 처리 능력은 별로였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기림을 관찰하여 풀이한 것에 별다른 잘못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기림이랑 아람은 자기들 방에 각각 틀어박힌 채 나올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다. 기림은 무기를 손질하고 아람은 혼자 생각에 빠져 있을 거라 여겨보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이버네틱스가 넓게 열려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던 때조차 억지로 알려 하는 건 비효율로 간주되었으므로 보들도 이를 따르고자 한다. 억지로 하려면 힘드니까.
하지만 슬기를 찾아가지 않을 수는 없다.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했어>
<무슨?>
<기림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슬기, 네가?!>
<안 믿어지니?>
<핏대 높여 반대한 게 누군데>
알다가도 모르겠어. 보들은 고개를 살짝 젓는다. 숲이랑 밭엔 개울이 휘돌아 흐르고 옆으로는 올망졸망 건물들이 맞붙어 있다. 전형적인 공동체 마을 풍경이다. 에코의 양극 지방을 중심 잡아 둘로 나뉜 채 흔들리듯 떠다니며 지표의 가느다란 길로 가까스로 이어져 있는 건물 안에 들어 있는 마을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여유 있고 기름졌다. 결국 다가 올 죽음 앞에 평온한 체념을 방패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아기들에게서 눈을 돌린 체 시들어 가는 불로불사를 누려 간다.
사랑은 대상을 가리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은 애초에 내 안에 있는 환상을 겨누고 있으니까. 보들은 마을을 사랑한다. 생명이 지닌 원초적 이중성, 안과 밖으로만 가르는 것. 그에 다시 묶여 버린 인류는, 사이버네틱스의 전성기 때 맛 본 방대한 남을 향한 인식을 모두 잃었다. 우주만큼 넓어졌던 큰마음을 모두 잃고 다시 좁디좁은 외부관을 가진 이들로 떨어졌다. 하지만 덕분에 다시 신비를 찾아가는 지도 모른다.
우주 공학조차 인류에겐 감당하기 힘든 버거운 짐이었다. 아무리 인격 공학으로 마음을 넓혀 가도 언제나 우주 공학은 저 먼 앞에 있었다. 언제나 따라오라고 부르며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처지를 비웃었다. 물리 사상들을 지배한다는 것이 그것들에게 붙들려, 감당할 수 없을 대우주의 엄혹한 힘들 속에 깊이 빨려 들도록 몰아쳤다. 만약 초시공 공학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설혹 그 기술이 참된 영생과 전능으로, 심지어 잃어버린 양자역학적 가능성들조차 모두 찾을 수 있는 부활의 권능으로 이끈다 하여도 대우주라는 늪 속에 더욱 깊이 빠져드는 것 이상이 될 수 있을까.
마음의 지평선에 닿아도 기술은 멈추지 않는다. 인간이 깃들 필요가 없는 참다운 물질문명이 찾아 든다. 그래도 둘은 대립되지 못한다. 레벨이 다르다고나 할까.
거대하기 짝 없는 것이 날아든다.
가짜 진공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그 무엇과도 상호 작용하지 않는 상태인 점근적 자유를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가짜 진공이 우리 우주의 연약한 피막을 뚫고 들어온다. 모든 건 가끔씩 서로 엇갈린다는 물리 법칙을 오차 없이 따른다.
가짜 진공이 식으며 수많은 거품들로 쪼개진다. 거품 하나 하나는 우주가 된다. 너무나 많은 진화가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우리 우주는 새로운 우주들 틈새에 치여 빨아들여지고 찌그러져 흔적도 남기지 못한 체로 사그라 든다.
보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놀란다.
어느새 다가와 같은 벤치 위에 도사리고 앉은 슬기가 말한다.
<신관인 내 능력 가운데 하나가 이미지를 머리에 직접 쏘는 거라는 거 알고 있지. 옛날엔 아주 쉬운 능력이었다던데. 그냥 쏘아 봤어>
<무슨 뜻이니?>
<이런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럴듯하지 않니. 우리 우주는 언제나 죽음에 직면해 있었던 거야. 지성의 전성 시대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겠지. 그때 사람들이 이걸 몰랐을까. 아니겠지. 너무 잘 알았겠지. 권력 현상에 지나지 않는 목숨 뿐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태어나 더욱 더 높은 곳에 이른 것들을 위해서도 나아갔을 거야. 자기 시대의 나쁜 점과 옛 시대의 좋은 점을 견주는 못 된 습관이 도졌다고 하여도 좋아>
보들이 일어나곤 분수 앞에서 한바퀴 사뿐히 돌더니 슬기에게 말한다.
<무슨 말인 지 알겠어. 내 능력을 쓰라는 거지?>
<응. 남으로 하여금 진실을 토하게 만드는 능력. 니가 그토록 아끼고 아끼는 능력. 하긴 대부분 사람들은 솔직하니까 별 쓸모 없겠지. 권모술수가 판치는 못 되어 먹은 세상이 아니니까. 하지만->
<아람은 예외. 아주 특별한 예외지>

아람, 기림, 슬기, 보들은 한 자리에 모였다.
보들이 말한다.
<아람아 진실을 말해 줘. 니가 왜 기림의 그럴싸한 제안을 거부했는 지 말야. 우리는 지금 이대로 가면 기림의 제안대로 몰리게 되어 있어. 그걸 좀더 일찍 해도 큰 잘못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초시공 공학은 영원한 꿈으로 남겨 두더라도 우주 공학의 시대를 다시 열 수 있을 지 모르잖아. 물리 지성이 꿈꾸는 인간의 세상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이들은 내가 계속 예외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친구임을 떠올리니 마음에 좀 가라앉는다. 더 이상 내가 바라는 걸 멈추는 것을 무의식의 명령이 바라지 않는다. 준비가 끝난 듯하다. 욕망에 이끌린다. 아람은 더 거부할 수 없다는 걸 느낀다.
아람이 말한다.
<진실을 말하라고 했니. 말해줄게. 이유는 간단해. 우리는 이미 기림이 말한 제안이 이루고자 하는 상태에 있어. 에코는 물리 지성의 환상이야. 그 일부인 우리 모두 다 똑같이. 블랙 홀 따위는 옛날에 모두 사라진지 오래야. 지구가 태어난 지 벌써 10의 515제곱 년 가까이 지났는 걸.
그렇다고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다면 정신적인 공황이 적어도 일부 사람들에겐 닥쳤을 거야. 공황을 걱정한 우리는 스스로 기억을 봉인했지. 어리석음을 벗어나 조금씩 자라나기를 바라면서. 난 너희가 결코 공황에 빠지지 않을 거라 믿기 때문에 말하는 거야>
기림, 보들, 슬기가 거의 한꺼번에 속삭인다.
<고마워,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해줘서>
과학이라는 메아리가 허공 속으로 퍼져나간다. 모든 신화와 전설이 휩쓸려 사라져버린 자리에 참 된 설화, 역사만이 남는다.


작은 님프에게

에코여,
사랑하는 이를 만났지만
끝내 진리의 질투에 걸려
육체는 대우주 깊숙이
떨어지고
모두 안에서 울리지만
스스로는 외로운
한 줄기 메아리 되어
영겁 속 헤맨다
하지만 잊지 말아요
그대는 비로소
살게 되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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