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이번 달은 단편의 미덕을 잘 살린 글보다 장편을 특징을 갖춘 글이 많았습니다. 압축된 사건이나 집중된 정서를 다룬 글보다는 이야기 구성과 진행에 초점을 많이 둔 경향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글이 짜임새 있는 설정을 보였지만, 구성이 치밀하지 못한 경우가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느슨한 인과관계, 약한 개연성, 납득하기 어려운 비약, 타당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설정 등을 문제로 지적하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이번 달은, 글의 골격은 잘 세웠으나 세밀한 연결고리나 논리적인 흐름 등의 구성이 아쉬운 글이 많았다 하겠습니다. 소설을 쓸 때는 치밀한 전략이 중요하다는 점을 모두가 다시 한 번 되짚어보았으면 합니다. 또한 선택한 소재의 특징을 잘 살려서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달의 글 가운데 심사에서 제외한 글은 아래의 8편입니다. 단편의 범주 안에서 장편의 매력을 충분히 발휘한 글들을 더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벌써 한 해가 끝나는 지점입니다. 한 해 동안 감평에 썼던 쓴 소리가 작가분들의 창작 혼에 상처를 낸 것이 아니라 독려하는 채찍이 되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것이 우리 심사단이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올해 부족한 심사단을 믿고 감평을 맡기신 분들 모두 올해 했던 작업을 밑거름 삼아 내년에도 계속 발전하시길 빌겠습니다.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 분량 미달  
        창생 - 먼지비 (원고지 26매)
        유명전 - 먼지비 (원고지 37매)
        탑과 공주와 새 - 먼지비 (원고지 35매)
        비밀의 복음 - 먼지비 (원고지 33매)
        기어다니는 용 - 먼지비 (원고지 48매)        
2) 분량초과
        청뢰장군 - Mothman (원고지 200매)
3) 타 공모 수상작
        불온한 병 - 김몽 (문장 단편공모 장르부분 11월 주간 우수작)


사소한 복수 - 조그만 하늘

A: 장편 프롤로그 같은 글입니다. 단편으로서의 특징도 매력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작은 거짓말이 살육을 부르는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흐름이 주요 소재이지만, 작은 거짓말과 전쟁을 연결하는 이야기의 고리가 매우 느슨하여 설득력이 적습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 상단의 단주와 성주가 한낱 상인의 이야기만을 듣고 상단과 성의 운명을 바꿀지도 모를 일을 계획하는 것은 너무 안일한 동화적인 구성이 아닌지요? 아예 동화였다면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나, 거대한 상단과 성주, 권력자 등 방대한 설정에 고려한다면 이러한 구성은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탁월한 이야기꾼인 상인의 술수가 뛰어났음을 표현하고자한 의도였다면 상인의 성격이나 지략을 보다 더 꼼꼼하게 표현했어야 할 것입니다. 글 속의 상인은 아무리 보아도 촐랑대고 가벼운, 그저 말솜씨가 좋은 거짓말쟁이로 밖에 묘사되지 않았군요. 다만, 도시의 활기찬 모습은 생동감 있게 잘 묘사가 되었습니다.


B: ‘두번째 델룬’, ‘탈루엣터’ 대륙, ‘델루미오르’, ‘가름’, ‘신할티자르’ 와 같이 국적을 알 수 없는 많은 지역명과 함께 ‘모래막이 강’ ‘붉은 지붕’ ‘바람받이’ 등의 우리말식 고유명사가 섞여서 나타납니다. 원고지 100장 정도의 길지 않은 단편 안에서 주인공 ‘살찐 남자’는 넓은 대륙의 여러 지역을 오가며, 상술 좋게 물건을 팝니다. 그러던 중에 한 젊은 남자와 거래 중 불쾌한 일을 겪게 되고, 이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고, 그 결과 상인의 의도와는 다르게도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말았다는, 어떤 전쟁의 서두를 알려주는 것으로 글은 마무리됩니다.
길지 않은 글이지만 읽으면서 단편을 읽고 난 뒤의 느낌보다는 아직 한참이 남은 장편 소설에 앞부분 조금을 읽고 난 기분이 드는군요. 글쓴이가 장편의 무대가 되는 세계를 열심히 지도를 그려가며 구상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지만 이 단편 안에서 무대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역명은 많이 나오지만 그 지역의 설명은 충분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지극히 간단하고 단순할 뿐이네요. 번역문 같은 문장 안에서 상인은 여기저기 뛰어 다니며 입심 좋게 말을 늘어놓습니다만, ‘붉은 지붕’의 성주도 ‘풍요로운 남자’도 인물의 개성이 잡히지 않습니다. 작가가 장편을 구상하시면서 만든 세계라면 장편을 쓰시면 될 일입니다만, 단편을 위해서 만드신 세계라면 이것저것 복잡한 지도를 그려 놓고 그 위에 이런 저런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그 세계가 더욱 사실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단편의 분량 안에서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다면, 복잡한 지도는 오히려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 뿐입니다.


신천지의 빛 - 김정호

A: 도시에서 차별과 폭력을 겪은 인물들의 감정을 고조시키다가 도심을 산화시키며 도시에 복수하는 것으로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이루고자 한 글입니다. 도시에서 겪은 차별과 폭력은 각 인물의 개인적 차원의 비극이고, 도심을 산화하는 것은 도시, 곧 불특정 다수에 대한 복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근친상간의 폭력을 저지른 아버지, 자식을 버린 부모 등 개인적 차원의 비극이 어째서 불특정 다수를 상징하는 도시 자체를 향한 복수심으로 이어졌는지 개연성이 약합니다. 그래서 결말이 뜬금없이 보이기도 하지요. 개인적 차원의 비극이 도시에 대한 증오로 확장되는 과정이 보다 구체적으로 추가되어야 타당하지 않을까요? 도시 속에 있는 사회가 행하는 잔인함과 차별 그리고 폭력이 보다 직접적으로 그려져야 하지 않았을까요? 반면,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들의 비극적인 정서가 잘 묘사된 글입니다. 기승전결 구성도 잘 되었고 약한 개연성만 제외한다면 잘 쓰인 글입니다.


B: 지구와 식민지가 존재하는 SF적 세계관에서, 식민지 행성의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김 진의 ‘샹그릴라’를 연상시키는 어두운 우주 세계의 이미지가 인상적이군요. 다만 지구와 식민지 행성이 공존하면서 식민지 행성이 상대적으로 차별받는 상황은 SF 만화나 소설 등에서 꽤 다루어졌던 소재라서 아쉽습니다.
어두운 과거를 가진 주인공이 역시 어두운 과거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과 배에서 만나, 그들의 과거를 듣고 마지막의 비극적 결말을 목격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주인공 ‘폴’의 시점에 밀착한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됩니다. 한 단락으로 묶었을 때 자연스러울 문장들이 하나씩 따로 떨어져 있다거나, 두 문장으로 나누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지나치게 긴 문장이 보이는 등, 전체적으로 손을 보았으면 좋을 부분이 보입니다만, 글 안의 기-승-전-결의 흐름이 매끄럽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작가가 글을 확실히 계획하고 쓰고 있다는 안정감이 있는 점은 높이 살 부분입니다.
이상향을 뜻하는 ‘샹그릴라’라는 이름은 수많은 글에서 그 이름과 상반된, 삶의 부조리가 극도로 드러나 있는 공간에 붙여진 이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도 그러합니다. 다만 이 글에서의 식민지와 샹그릴라의 본질적인 문제,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불행의 근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개개인의 불행을 곧 그 사회가 문제라는 것으로 연결 지은 점은 아쉽습니다.
끔찍한 불행을 겪은 소녀 ‘제니퍼’는 마지막에 ‘카미카제 특공대’를 연상시키는 결말을 맞게 됩니다. 불행한 이들의 대부인 ‘남자’도 불행한 이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 뿐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고, 불행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해결안은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과 폭력 밖에 없다는 해석도 가능해 보여서 아쉽습니다. 작가분이 의도한 것이 어느 쪽인지, 혹은 그밖에 또 다른 해석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결말의 의미가 독자에게 잘 와 닿을 수 있도록 조금 보충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화이트 스타 - 이경원

A: 아주 극적이고도 큰 반전을 지닌 글입니다만, 이런 형식의 반전이 다소 흔한 편이어서 작가가 놓아둔 암시만으로도 반전을 짐작할 수 있는 점이 흠입니다. 외계인을 지구인처럼 여기게 하려고 외계인의 역사와 문화를 지구와 똑같이 설정을 하였습니다만, 같은 지구 위에서도 서로 다르게 발전해 가는 종족들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설정에 대한 타당한 설정이 언급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외계인의 모성이 지구인의 말로 ‘화이트 스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흰 별’일 수도 있고, ‘바이싱’일 수도 있고, ‘바이스 쉬테른’이 될 수도 있는데 굳이 영어로 표현이 되었다면 영어가 지구 공용어라든지 하는 등의 타당한 이유가 언급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타당한 설명 없이 ‘화이트 스타’라고 사용한 것은 어감이 주는 피상적인 아름다움만 추구한 안일함이 아닌가 합니다. 안일한 희망과 아름다움만을 피상적으로 추구한 점은 이 글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합니다.


B: 글의 서두에 작가가 말합니다. “이 글은 외계어로 쓰여져야 합니다. 하지만 독자를 위해 편의상 한글로 씁니다. 그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이 한 줄로 이 소설은 스스로 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모두 알려주고 말았습니다. 독자에게 이 글은 실은 이러한 반전을 품고 있어요, 모두 일러주고 시작한 셈입니다. 이런 식으로 독자에게 반전을 알려주고 시작한 글이라면, 독자의 예상을 뒤집을 다른 반전을 준비하고 있거나 혹은 반전 외의 것, 독자에게 무언가 남을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네요.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면서 마치 지구의 우리들의 모습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독자는 이 글이 외계인의 이야기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글은 사실 외계인의 이야기였어요, 라고 떡하니 내어놓습니다. 이미 독자들은 알고 있는 사실인데요.
이 글에서는 지구인들이 자신이 사는 별을 ‘지구’라고 부르면서 외계인들이 사는 별은 ‘화이트스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만, 이 두 호칭이 다른 나라의 언어라는 건 모순이죠. Earth 와 White Star 이거나 지구와 샛별(이거나 백성이거나)이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연구원 월급이 대학원 수위보다 못하다는 대사는 작가 자신이 직업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글의 전체에서 ‘나’의 고민과 별에 대한 호기심에 대해서 치밀하게 서술하고 있는 점은 높이 살 부분입니다만, 특별하지 않은 플롯과 흔한 반전 때문에 장점까지 묻혀 아쉽습니다.


피터팬 설명서 - 김진영

A: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피터팬 이야기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고자 시도한 글입니다. 피터팬 이야기는 많은 영화, 소설, 만화 등으로 재해석 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신선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왜 굳이 피터팬을 소재로 끌고 왔는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피터팬과 후크 이름 대신에 철수와 영수를 넣어도 이야기 진행에 거의 지장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소재를 선택했다면 왜 선택했는지, 소재가 가진 특징과 의미는 무엇인지 우선 파악하고 글을 구성해야 합니다. 그저 이름만 빌려와 특징 없는 글에 구색을 맞추는 정도로 활용을 한 것은 작가가 소재를 다룰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음을 의미하겠지요.


B: 전체적으로 상당한 분량의 글이고, 흐름 역시 장편에 가깝습니다. 기자 진원이 기묘한 제보 전화를 듣고 취재를 나가다가 기묘한 오두막을 만납니다. 그 오두막의 노인은 돌연 피터팬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후크 선장이나 웬디가 나오는 걸 보면 우리가 아는 피터팬이 맞는 것 같지만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피터팬의 환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니 돌연 진원은 소녀와 남자의 격렬한 전투를 보게 되고, 소녀가 1대 피터팬의 환생이라고 하더니 후크 선장이라고 하는 남자와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진원은 오두막을 나옵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산만하고, 플롯은 빈약합니다. 글의 묘사나 전개가 장편처럼 느슨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원고지 130매에 가까운 글로도 사건에 필요한 만큼의 묘사와 서술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진원과 편집장의 대화가 뒷부분의 피터팬 이야기와는 어떻게 관련이 있을까요. 진원이 차 안에서 듣는 라디오방송의 단골 멘트는 글에서 필요한 부분일까요? 글 전체에서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걸러지지 않고 마치 붓 가는 대로 쓴 것 같이 전개되다 보니 이 긴 글에서도 사건은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어서, 이 글이 무엇을 말하는지조차 모호해지고 말았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인물 피터팬을 다르게 해석하는 설정이 산만한 전개 안에서 인물의 입을 빌어서만 나타나다보니 설정은 글 안에서 녹아들지 못하고 생뚱맞게 느껴지기까지 하네요.
글의 플롯을 생각하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중심을 두는 것은 단편 쓰기의 기본입니다. 전체적인 글의 내용 안에서 각 부분의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서 글을 쓴다면 이 글의 결말처럼 갑작스럽고 허무한 마무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별을 먹는 고래 - 안단테

A: 밴드를 하는 젊은 청춘들의 모습을 통해 꿈과 현실, 희망과 좌절을 대비시키는 구성은 흔하고 또한 새롭지 않습니다. 인물들이 자주 인용하는 명언들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작품에 억지로 갖다 붙인 장식품처럼 종종 어색하게 글의 조화를 해칩니다. 너무 많은 인용은 조금 안이하지 않나 싶습니다. 같은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작가로서 보다 바람직하고 도전적인 자세가 아닐까요? 명언을 몽땅 머리에 외우고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인용을 즐기는 인물들의 모습은 현실에서 흔한 모습은 아닙니다. 인용을 주고받는 독특한 풍경이 밴드 구성원들 사이에서 자연스러워진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테면, 인용을 즐기는 인물의 성격, 혹은 그런 풍경이 생겨나게 된 사건 등이 서술되었다면 훨씬 더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또한 은아의 탈퇴로 인해 생겨난 멤버들의 심리와 갈등을 진행시키다가 주인공의 일탈적인 독창으로 비약되어 마무리 되는 결말은 이 글의 목적이 오로지 현주에게 스프라이트가 비추는 독무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니었나 의심하게 합니다. 그 장면이 작가의 자의식이 추구한 카타르시스였다면, 작가가 글의 구성보다 자의식에 너무 치중한 셈이 되겠지요. 그러나 섬세한 정서를 표현하는 담담한 어조나, 자연스러운 감정의 전달은 이 글에 썩 잘 어울렸습니다.


B: 인디밴드, 예술과 현실 사이의 갈등, 꿈을 추구하는 주인공과 현실에 타협한 주변 인물들, 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난관, 그리고 주인공의 극복. 청춘드라마에서 즐겨 다루는 소재들입니다. 밴드의 일원이 메이저에 스카웃되면서 밴드가 휘청거리면서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는 건 영화화도 된 만화 NANA와도 닮았군요. 10대와 20대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한 번쯤 상업화되지 않은, 인디밴드에서 활동하는 자신을 꿈꾸어 본 적이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적죠. 밴드의 이야기가 청춘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건 그런 이유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디밴드의 인물들을 글에서 다루기 위해서는,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그 직업군의 특징에 대해서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디밴드에서 단지 얼굴이 예쁘다는 것만으로 리드싱어가 인기가 있고, 그 리드싱어의 인기 때문에 밴드가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요. 게다가 그 리드싱어는 메이저에서 스카웃하기까지 하는 인물인데 말입니다.
이 글에서 ‘은아’는 밴드의 해체를 일으키는 갈등의 요소입니다만, 조금 들여다보면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 ‘나’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지만 밴드에서는 노래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은아가 더 예쁘기 때문에, 라고 나는 생각하죠. 밴드를 계속하는 것은 음악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음악으로 나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에게 있어서 밴드의 해체는,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해소의 실마리입니다. 은아가 없기 때문에 나는 중요한 크리스마스 무대에서 관객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죠. 은아는 [언니의 노래에 반해서] 밴드에 들어왔다는 말로 나의 짓밟힌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는가 하면, 본격적인 음악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사람을 소개시켜주기까지 합니다. 결국 이 글에서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나’의 의지와 움직임이 아니라, ‘은아’가 구원해 주었기 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크리스마스 무대는 실패로 끝났지만 글은 구성상 그 부분을 앞으로 돌려 역순으로 배열함으로써, 무대에서 노래하는 나의 멋진 모습으로 마무리합니다.
인디밴드 이야기가 청춘물에 등장하는 건, 그 안에 깨지고 부딪히고 성장하는 청춘의 본질이 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인디밴드 ‘블루와인’ 안에는, 깨지고 부딪히는 청춘이 아니라 소심하게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나’의 모습이 너무 크게 보이네요. 아쉽습니다.


청전 - 먼지비

A: 심청전을 가져와 재해석한 글입니다. 그러나 심청이 아니라 다른 여자였다고 해도 전혀 글의 진행에 무리가 없습니다. 심청전에 담긴 주제도 전혀 사용되지 않았지요. 말하자면 설화 속 주인공의 이름과 몇 가지 설정, 이를테면 연꽃 등만을 가져와서 사용한 글입니다. 소재를 선택했다면 왜 선택했는지, 소재가 가진 특징과 의미는 무엇인지 우선 파악하고 글을 구성해야 합니다. 청의 사연은 독특하지도 않고 외려 심청전의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한 것처럼 억지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굳이 이름만 빌려와 구태의연한 글에 억지스러운 틀을 놓은 이유가 무엇인지요? 문장은 수준이 고르지 않고 널뛰기를 합니다. 날 것인 문장부터 ‘허위허위’, ‘전횡’ 등 한자어를 사용한 문장까지 안정되지 않고 문장이 요동치는 판국입니다. 문장은 글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그릇이 엉망이라면 안에 담긴 내용물도 영향을 받지 않을까요? 집중력을 가지고 안정된 문장을 구사하지 않은 점이 아쉽습니다.


B: 작가분이 군대에 계시다보니 짧은 글밖에 올릴 수 없어 아쉽던 차에, 처음으로 어느 정도 분량이 되는 글을 읽게 되어 반가웠다는 말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심청전을 재해석하면서 심청이 여성들을 대표하는 전사가 되는 글이네요. 판소리 ‘심청전’은 지역별로 상당히 많은 판본이 존재합니다. 현재 북한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판본에서는 심청이 몸을 던지게 되는 이유가 상당히 다르게 나타나 있으니 심청전에 흥미가 있으시다면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달에는 심청 외에도 피터팬의 재해석을 다룬 글도 있었습니다만, 두 글 다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인물의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를 토대로 어떤 식으로 인물의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할 것인가, 그것으로 얼마나 새로움을 느끼며 재미를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용왕의 이미지를 재해석하기 위해서 심청이라는 인물을 가져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글에 등장하는 심청은 오히려 북한에서 현재 통상 받아들이고 있는 춘향전의 ‘춘향’과 오히려 닮아 보입니다. 용왕이 실제로는 용왕이 아니라 바다를 장악하고 있는 해적 중의 하나라는 설정은 독특합니다만, 용왕과 심청의 마지막은 갑작스럽습니다. 심청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왜곡되어 지금의 심청전이 되었다는 마지막 맺음말은 흔하고 진부합니다. 이 글에서 지금의 심청전으로 이어질 고리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요괴의 이름은 기계 - Mothman

A: 기계 안에 소년이 탑승한 부분까지는 흥미진진했습니다만, 그것이 전부입니다. 오직 전투장면 묘사가 주류를 이루지요. 기 작가는 몇 편에 걸쳐서 계속 전투장면 묘사에 비중을 크게 두는 편입니다. 인물의 이름만 바꿔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한 창작행위에 어떤 의미를 두시는지요? 이야기를 위해 전투장면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전투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 낸, 주객이 전도된 글이 아닌가 합니다.


B: 글의 제목을 정하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  뿐만 아니라 글의 내용을 어느 정도 반영해서 정할 것인가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죠. 백야행과 탐정 갈릴레오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제목에 글의 가장 중요한 핵심, 그것도 스포일러에 해당한다고 생각할 정도의 말을 담는 경우가 많아서 출판사 측에서 당황할 정도라고 합니다. ‘용의자 X의 헌신’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죠. 하지만 그러한 글들은, 독자가 글의 내용을 뻔히 안다고 생각하며 읽더라도 숨어 있는 진짜 반전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쉽게도 이 글의 제목은 그렇지 못합니다. 요괴의 이름은 기계, 라는 제목에서부터 기계(아마도 로봇)가 요괴로 보일 세계, 과거 시간대이거나 혹은 그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 환상 세계에 나타나는 이야기일 거라는 짐작이 가능해집니다.
초반부의 묘사는 상당히 흥미진진했지만 후반부로 들어가서는 작가의 다른 글과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중편 이상의 분량으로 심사 대상에서 제외된 ‘청뢰장군’이나 이 글이나, 전투장면에서 작가가 힘을 쏟고 있다는 느낌만이 남는 것이 아쉽습니다.


소환장 - 남재홍

A: 군대문화 속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다룬 글입니다.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억압이 한 개인을 어떻게 심리적 부적응 상태로 몰아가는지 보여주면서 군대 문화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글입니다. 독자를 배려하지 않은 비약적인 부분이 흠입니다. 박현철이 ‘나’를 믿고 죽게 되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계속 관찰자로 존재하는 나는 글 속에서 박현철과 어떤 정서적 유대나 공감을 이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박현철이 내게 설득당해서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경위는 비약적입니다. 박현철이 ‘나’가 아니라 작가를 믿고 행동하는 느낌이 강하지요. 작가가 ‘나’와 지나치게 동일시한 결과로 비약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어떤 암시도 없이 끝부분에 등장하는 ‘여자’의 존재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독자에게 추측이나 해석의 여지 대신 의아함을 던집니다. 이러한 부분만 보강된다면, 기승전결 구성이 잘 되었고 주제가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있는 글입니다.


B: 탄탄한 문장과 서술, 묘사,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집단적 폭력의 희생자를 이야기하면서 폭력과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깊이 있는 문제의식. 이달의 글 가운데 단연 처음 눈에 들어오는 글이었습니다. 작가분이 글을 많이 써 보신 듯, 필요한 묘사와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구별하는 것도 탁월해, 묘사가 치밀하면서도 군더더기인 부분이 거의 없는 점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다만, 정중장이 ‘나’의 편지를 읽고 난 뒤의 행동이 사건으로 직접 이어지지 않고 앞으로의 힌트만을 남겨 두고 마무리되는 것이 아쉽습니다. 진급이 좌절된 정중장이 ‘군’ 전체에 하는 복수로서 ‘나’의 편지 속 사건의 이중적 의미를 만들어 내고자 한 것이라면 조금 더 사건의 진행을 보여 주어도 좋지 않았을까요. 정중장이 편지를 무시할 때의 심리는 묘사하지 않은 채로 그 뒤의 사건을 보여주어 정중장의 심리를 짐작하게 하는 방법은 어땠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글이 편지의 중반 이후로 다소 속도의 완급 조절이 부족했는지 박현철이 자살을 택하던 날의 사건이 급박하게 진행되면서 실제 박현철의 심리가 제대로 잘 드러나지 못한 점도 아쉽습니다. 박현철은 ‘나’의 충고를 따라 자살의 길을 택한 것일까요. 아니면 이중엽을 죽이려고 했던 최후의 시도가 좌절되면서 마지막의 희망조차 잃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박현철의 죽음의 현장에서 ‘나’가 본 여자는 사신일까요 혹은 박현철의 사진 속의 이미지였을까요. 안정된 글 속에서 클라이맥스인 박현철의 주검 앞 장면이 다소 균형을 잃고 의문을 남겨 안타깝습니다.
문장 하나, 대사 하나를 만들 때에도 글쓴이는 마지막까지 가장 효과적인 한 줄을 만들기 위해 고심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글은 좋은 모범이 됩니다. 단편 안에 담기에 적절한 사건, 적절한 인물의 수, 배경의 설명 등, 과도하지 않은 적정선의 설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였습니다.


79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사진관 - 하늘 깊은 곳

A: 구성과 진행이 무난한 글입니다. 인물이 겪는 기묘한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이 매끄럽게 잘 진행이 됩니다. 소재가 조금 흔하긴 하지만, 큰 단점이 없고 동시에 큰 장점도 발견하기 힘든 글입니다. 골격만이 잘 세워진 글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문제는 글에 자신만의 색깔, 분위기 등 살을 입혀나가며 강점을 찾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흡입력 있는 문장이냐, 독특한 묘사법이냐, 인물의 성격 설정이냐 등을 찾아가는 것은 작가의 몫이겠지요.


B: 사진이 생활에서 조금 더 거리감이 있는 존재였을 때에 비해 지금처럼 사진이 가까운 존재인 시대에서는 사진을 소재로 하는 글은 오히려 줄어든 것 같습니다만, 디지털 사진이 일반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예전보다 사진관은 생활과 더 거리감을 가지게 되었군요. 이 글은 컴퓨터나 핸드폰 화면 속이 아닌 종이 사진과 사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우리 생활과 약간 동떨어진 느낌을 줍니다.
전체적으로 문장이 개성적이거나 독특한 인물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인물들이죠. 그러나 그 인물들의 대사가 섞여 혼란스럽거나 하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사실적인 대사가 적절하게 압축되어 제시되고 있어서, 글에서 대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은데도 글이 산만한 느낌보다는 잘 정리된 느낌이 듭니다.
서술이 대사보다 적으면서도 글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것은 이 글에서 플롯이 그만큼 탄탄하기 때문입니다. 돌출되어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없고, 특이하지 않은 인물들은 각자 살아있습니다. 사진관을 처음 본 묘한 호기심에서부터 사건과의 관련을 느끼고 사진관에 들어가고, 마침내 유진의 실종으로 글이 마무리 될 때까지 글은 점차로 고조되어 가장 긴장되는 절정을 지나 최종 결말로 이어질 때까지도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구성을 유지합니다.
가장 적절한 대사를 고민해서 쓴 것 같은 탁월한 대사에 비해서 글의 서술 부분은 개성이 다소 부족하고 평범합니다. 무대 각본이나 드라마 각본 등 대사의 비중이 높은 글을 많이 써 보신 분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대사를 제외한 소설의 서술 묘사의 중요성을 생각하시고, 안정된 지금의 문장에다 조금 더 맛깔스럽게 글의 완급과 흥미를 조절하는 양념을 더하는 법을 고민해 보시길 권합니다.


79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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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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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단테 09.12.27 14:08 댓글 수정 삭제
    이번에도 세심한 평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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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에 새기고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쉬는 날에도 정말 고생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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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재홍 09.12.28 11:46 댓글 수정 삭제
    정확한 평입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구상하고 있는(실은 늘 구상만 하고 있는) 장편 중에서 한 대목을 뚝 떼서 써본 것이라, 전후 맥락이 거세되고 비약이 생겼군요. 다음에는 좀더 완결성 있는 단편을 올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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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지비 09.12.28 14:03 댓글 수정 삭제
    평 잘 보았습니다. 원래 제목은 <용왕사냥>으로 하려던 걸, 비슷한 제목의 다른 단편을 쓰게 되어 적당히 바꿨는데 심청전의 재해석으로만 비치게 되었군요. 해룡진은 청해진이고 남해 용왕은 장보고였습니다만,(정말 장보고가 노예는 사고 팔지 않았을까... 하는 삐딱한 생각에서 나온-_-) 역시 역량의 부족으로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그저 뻔한 심청전 다시 쓰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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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항상 고민하던 부분에 대해 정확히 지적해 주셨네요. 자기만의 문체를 가지는 게 가장 어려우면서도 원하는 일인데..습작을 통해 더 많이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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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ror 10.01.02 22:23 댓글 수정 삭제
    남재홍 님/ ltpimento @ paran.com 으로 주소, 연락처(전화번호), 우편물 수령하실 성함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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