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많은 글이 올라와 즐거운 비명을 지른 한 달이었습니다. 새로이 보이는 작가분들도 많고 오랜만에 글을 올리신 작가들도 있어 반가운 마음이었군요. 늦더위로 오래 힘든 여름이 어느새 지나가고 가을이 불쑥 들어왔습니다. 결실의 가을에 독자 여러분들도 풍성한 결실을 맺으시기를 바라며, 2년간 독자 단편란에서 좋은 글들을 선보여 주셨던 작가분들 모두에게 행복한 가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100호에서는 우수작 없이 가작으로 밤조심 님의 ‘아마존 바이러스'를 선정하였습니다. 더욱 건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8월 16일부터 9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총 19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12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분량미달 : 감옥과 동정에서의 탈출 (Leia-Heron, 원고지 44매), 돌산 (균, 원고지 43매), 도마뱀 여인 (김진, 원고지 53매), 사희월도(思姬月刀) (이니 군, 원고지 50매), 마치 좀비처럼(균, 원고지 60매)

2) 분량초과 : 큐어 (박재권, 원고지 173매)

3) 연작 : 아몬-레(먼지비)



가을의 Surprise : 나경

A : 라이트 노벨 같은 빠른 전개 속에서 인물들의 대사가 전체를 지배하고 있군요. 인물들의 설정이나 세계가 전형적인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 순진한 판타지입니다. 소년과 소녀의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판타지 세계는 타블렛PC가 등장하지만 전형적인 판타지 배경과 별로 다를 게 없고, 귀여운 여자아이가 사실은 위대한 마법사의 애제자라는 설정도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듭니다. 거기에 소년과 소녀가 만난 것이 실은 아주 오래 전이었고, 그 둘이 지팡이 제작자와 마법사라는 운명적인 커플이라는 설정이 덧붙여지네요. 작가분이 이런 설정들을 처음부터 의도하신 게 아니라 이야기를 써 나가면서 즉시적으로 설정을 덧붙인 느낌이 드는 것이 아쉽습니다. 소녀를 공격한 적의 정체도, 위대한 마법사가 소녀를 위해 무엇을 해 주었는지도 끝내 알려지지 않고, 전형적인 소녀 감성의 연애 에피소드만 남고 말았습니다. 단편 하나로서 완결성을 가지기 보다는 장편의 한 일부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서두 부분처럼 느껴지네요.

B : 서툴고 풋풋하지만 십대 소년소녀의 순수한 설렘이 묻어나는 사랑의 느낌이 아기자기하게 살아있는 글입니다. 스토리보다는 두 인물이 이야기 자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복잡하지 않는 단순한 구성도 어울리겠지요. 그러나 스승을 매개로 소년과 소녀를 이으려는 곳에서 작가의 욕심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화자의 말에서 묻어나는 관계의 사연이 이야기 속에 충분히 풀어나지도, 두 사람을 매개하는 존재 이상의 큰 역할을 하지 않지요. 오히려 부각되기만 하고 상세히 밝혀지진 않은 스승 때문에 주의가 분산되는 단점이 발생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슬픈 오마주 : 김진영

A :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인물들과 보통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는 미국의 마블 시리즈를 포함해서 대중이 오래 전부터 즐기던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서도 차별과 평등 등, 철학적인 주제를 포함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많은 마니아층을 형성할 정도이지요. 이 글 역시 그런 글들에서 다루는 이야기에서 별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초능력자의 원인이 운석이라는 것도 그러한 만화들에서는 흔히 보이는 설정이죠. 국가적으로 그들을 양성하려고 했고, 그들 사이에 반목이 생기고 결국은 국가 전체가 위기에 휩싸인다는 상황은 엘리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겠군요.
요즘의 넘쳐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을 생각합니다. 분야를 불문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탈락자들과의 경쟁에서 성장했다’ 는 소설의 문장은 씁쓸합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이 느끼는 성취감이 오히려 이 글의 후반,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이 국가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게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요.

B : 매번 정서된 문장을 보면서 작가의 정성들인 퇴고를 짐작해 보곤 합니다. 잠시 사라졌던 작가의 사회의식이 귀환했군요. 작가의 사회의식은 그 자체로 귀한 가치가 있겠습니다만, 소설을 매개로 하여 만나는 독자에게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고 싶은지 고민할 필요가 있겠지요. 주장을 하고 싶은지, 설득을 하고 싶은지, 한 번쯤 사회문제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은지 등등 작가가 의도하는 바는 여러 가지 일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라면 작가의 목소리가 이야기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묻어났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인트 프롤레타리아 : 천공의 도너츠

A : 오직 한 사람이 한 사람만을 후계자로 낳는 사회. 철저하게 인구와 생산과 소비가 계획되어 더 이상의 빈곤은 걱정하지도 않은 유토피아 같은 세계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는 국제노조의 이야기는 현실과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는군요. 작가적인 상상력이 유토피아 같은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리얼하게 그려내면서, 그 세계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무척 감상적이고 서정적입니다. 마지막 장면을 현실을 개혁하지 못하고 사라져 간 것이 아니라 전설로 진입하는 광채로 그려내는 것이 작가가 이 인물들에 대해 가지는 강한 애착을 보여주는군요.

B : 사회의식과 SF, 재기발랄한 농담이 엮어진 재미있는 글입니다.



마지막 무기(The Last Weapon) : DOSKHARAAS

A : 속도감있게 펼쳐지는 이야기 전개가 작가분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내고 있군요. 하지만 이야기의 시작부터 너무나 많은 고유명사들이 쏟아져 들어와서, 독자로서는 당혹스럽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인물들의 이름들에다 그들의 대사나 행동이 명확히 구별되지도 않지요. 그러다보니 이 글의 장점인 긴박감과 속도감, 그리고 인물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제대로 독자에게 와 닿지 못합니다. 반 보트와 P.K.Dick에 대한 오마주로서 쓴 글이라고 작가분은 글의 후반에 밝히고 있습니다만, 인물들의 이름이 모두 기존 작가들의 인물을 뒤집어 읽은 것이다보니 인물들의 이름들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낯선 어감을 만들어내고 말았지요. 크씨득, 트고브나브, 랫시태드, 트랄룩, 인헤, 같은 말들이 스페이스라크 호, 파이로-사이코네시스, 크루 등의 영어식 표현과 섞이다보니 이야기 내용이 산만해져 버립니다. 이 글이 담고 있는 존재에 대한 고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 등 장점을 제대로 살려내기에 작가분이 택한 오마주 기법은 어울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B : 음모와 반전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시시각각 종말을 향해 가는 글입니다. 존재에 대한 환멸을 담은 오마주라고 해야겠지요. 속도감 있는 전개와 흡입력 있는 대사는 여전히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앞을 들추면서 다시 확인해봐야만 하는 다양한 고유명사들이 쉽지 많은 않군요. 설정광(?)인 SF 작가들이 가끔 보이는 습관이긴 합니다만, 독자들이 명칭에 익숙해질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단편에서는 절제도 미덕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합니다.



[Agipunkt] : K. kun

A : 탄탄한 문장이 독자를 끌어당기면서 이야기는 흥미롭게 이어지는데, 스토리와 구성을 독자가 따라가기에는 쉽지가 않네요. 진서의 정체는 무엇인지, ‘나’의 정체는 또 무엇인지. 이야기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것은 ‘아내’ 혹은 ‘나’, ‘진서’이지만 누구도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습니다. 인물들의 대사에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뉘앙스가 강하게 남고, ‘진서의 몸은 좌측으로 지구의 자전축만큼이나 기울어져 있다’ 와 같은 문장이 설명조차 없이 던져집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나’가 찾아다니던 녀석의 얼굴이 거울 속에 있다는 것으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던져 주긴 하지만, 그것으로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글 속에 녹은 난해한 문장과 복선들이 너무 많군요. 독자가 적절히 수용할 수 있으면서도 신비감을 갖추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독자에게 주어지는 힌트가 너무 인색하면 이야기 전체가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 버립니다.

B : 흡입력이 있고, 부분에서의 전개는 치밀합니다. 그러나 부분이 모두 갖춰진 전체에서 통일성을 이루지 못하는 점이 아쉽습니다. 진서와 납치범, 나의 사정, 아내의 이야기가 각각을 보면 흥미롭게 전개되지만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 듭니다. 게다가 갑자기 등장하는 정치적인 연설, 작가가 계속 집착해서 독자에게 되뇌는 “하나는 적고, 셋은 많다. 둘이 적당하다.”는 문장 등은 작가의 의도를 막연하게 짐작하게 하지만, 너무 막연해서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모래 늪 : 조미선

A : 일일 연속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드는 글이었습니다. 미혼의 여성이 기혼의 남자와 불륜으로 빠져 들어가는 감정과, 그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분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철저한 일인칭으로 진행하는 글은 독자의 눈치를 보는 것도 없이 정말로 철저하게 화자의 감정에 집착하지요. 한 사람의 심리를 묘사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한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듭니다. 독자의 눈에 ‘아름답게’ 그리기 위한 치장조차도 없는 사실성입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감수성이 풍부한 독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일 수 있는 글이겠지요. 마치 일인칭의 웹툰을 보는 듯도 하고, 막장 논쟁이 일어나면서도 시청률은 수위를 달리는 일일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일인칭의 글이긴 하지만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인물의 감정이 교묘하게 장막을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인물이 그리는 것은 자신의 외부의 세계, 그리고 그 외부의 세계에서 느끼는 자신의 상처와 고통입니다. 회사에서는 성격파탄자인 상사에게 괴롭힘당하고, 불륜 관계에서는 아무 것도 인정받지 못하며, 불륜의 남자의 부인은 자신보다 아름답기까지 하지요. 이 모든 관계에서 ‘나’는 피해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이 관계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대신에,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다가 관계를 끝내고, 서러워 눈물을 흘리고 도망치는 것을 택하지요. 그런 그를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다시 살아날 것 같은 모래늪의 흔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B : 모래 늪처럼 빠져 나올 수 없는 불륜 속으로 빠져들었다가 벗어나는 미혼 여성의 감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었습니다. 감정은 질척거리고, 여자는 때로 궁상맞고 쿨하지 못해서 찌질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가망 없고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 여자의 혼란을 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는 특별한 어떤 사건을 내어놓지 않습니다. 여성은 사랑에 적극적인 대신, 예기된 종말을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리며 한없이 자신의 감정에 빠져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자신의 안에서 극적으로 치밀어 오른 감정이라기보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반응으로 나아오는 것들뿐입니다. 큰 사건 없이 그저 그럴 수  밖에 없는 불륜의 시작과 중간, 끝을 따라가며 여자의 감정 변화를 서술해 나가는 구성이라면 여자의 심리가 훨씬 더 깊고 농밀하게 표현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영원의 단면 : 샤유

A : ‘흉터’로 상징되는 다양한 관계가 인상적입니다. 자신이 흉터를 남겼기 때문에 결코 잊지 못하는 ‘그녀’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흉터를 지우는 의사가 되고, 달의 흉터에 집착하고, 달이 지구에 떨어져 만들어 낸 흉터에 집착합니다. 그가 집착하는 것은 ‘흉터’가 아니라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주는 깊은 영향력일 지도 모릅니다. 그가 지우려는 흉터는 급기야 모두 같은 것이 되고, 그는 다음 단계의 흉터에 마음이 넘어가는 것은 당연할 지 모릅니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가 누군가에 남긴 미련이며, 주체가 지우고자 하는 없어져야 할 것들이니까요.
마지막에 다시 만난 그녀가 더 이상 흉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그녀의 얼굴조차 잊어버린 ‘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가 그녀에게 집착한 것은 그가 그녀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울을 보면 항상 흉터를 보게 되듯이 늘 그가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존재일 거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녀가 더 이상 그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게 그녀 역시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글 전체에 대사는 하나도 없으면서도 글을 읽게 만드는 힘은 탁월합니다. 하지만 흉터에 집착하는 과정이 달과 지구까지 넘어갈 필요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네요.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을 이야기 하고 싶으셨던 거라면, 지구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일의 과정이나 이후의 성공 등은 단순한 서술로 축약해 버리는 편이 글에겐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B : 옛 여자의 얼굴에 흉터를 남긴 남자가 모으는 흉터 사진, 흉터를 가진 달에 대한 집착,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주 일어나는 사고로 인해 몸에 생기는 흉터. 남자의 삶은 모두 흉터로 통하고, 그것에 대한 집착은 죄책감입니다. 그러나 다시 보면 그 흉터는 여자의 얼굴이 아닌 남자의 마음에 남은 흉터이고, 그가 가진 죄책감은 그리움이고, 집착은 미련이죠. 흉터를 다양한 은유로 사용한 점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이 다소 비약적으로 느껴지고, 여자와 만나 심적 갈등이 일시 해소되는 것이 느닷없게도 여겨지는군요.



밤은 흐르고 있다 : kuchiblue

A : 담담하게 서술되는 탄탄한 문장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편안하게 다가옵니다. 긴 문장과 짧은 문장을 적절히 배치해서 리듬감도 살아 있네요. 34세의 여자가 18세의 여고생의 자살을 우연히 막게 되면서 열 세 번의 만남이 이어집니다. 여고생은 당찬 성격으로 자신이 죽으려고 했던 이유를 과장하지 않고 이야기하지요. 두 사람의 만남은 서서히 둘의 교감을 형성하면서 이야기는 세대간의 화해 혹은 공감으로 마무리 될 것 처럼 흘러갑니다. 하지만 돌연 이야기가 급변하면서 두 사람이 실은 동일인이고, 자살한 여고생이 만들어낸 두 명의 '자신'이라는 결론이 나지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두 사람이 만나면서 삶의 중요한 가치를 생각하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둘 다 허상이라는 이야기는 독자를 당혹하게 만들고 맙니다. '4주간의 통원치료'를 받아야 했던 나는 어떤 의사를 만난 것일까. 자신의 모교 교복을 보고서 나는 왜 '교복을 추적해서 그녀의 학교로 찾아가'야 했을까. 그것은 모두 '나'라는 허상의 만들어진 기억에 지나지 않고 실은 그들은 긴 밤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인가. 이야기의 마무리에서 작가가 이 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없어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탄탄한 문장과 구성, 이 스토리에 더 깊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도 있었을 텐데요. 전작과 비교해서 더욱 아쉬움이 깊습니다.

B : 현실의 나와 미래의 내가 만난다는 설정은 드물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시기가 미래인 점이 다른 글이나 영화들과 차별화 되지요. 서로가 자신인지 모른 채 이어가는 대화는, 둘의 정체를 아는 순간 아주 흥미로워지면서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두 ‘나’가 모두 허상이라는 점이 다소 의아합니다. 이미 존재로서의 의미를 잃은 허깨비들의 만남에 어떤 의미를 담고자 하셨는지요? 현재 죽은 자의 텅 빈 머릿속에 남은 과거와 미래의 자의식이라는 포인트 외에는 무엇이 더 있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Spanish Guitar : 김진

A : '쿠바 산 시가'를 문 중년이 바 테이블에 앉아 'Spanish Guitar'를 듣는 첫 장면은 외국의 장면 같더니 이야기의 배경은 우리 나라인 모양입니다. 중년의 움직임이 40대 이상의 남자로 보이기엔 너무 생경하기만 하네요. 중년의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꼼짝 못하는 모습이라든가, 꼬시려고 한 여자가 실은 조카의 애인이라든가 하는 우연이 비현실적인 배경에 비현실적인 대사와 함께 나열됩니다. 여자의 이상한 행동은 애인을 잃은 상실감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중년' 남자의 행동은 일반적인 중년 남자의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지 않은지요? 행인들이 꽃다발을 들고 있는 중년 남자에게 '와 꽃을 든 미중년이다' 와 같은 대사를 건넬 정열적 외모의 아가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였던 자리가 실은 사진관이며 현실과 과거 환상이 교차되는 구성은 인상적이지만 중년 남자가 글의 완성도를 떨어뜨리고 만 것 같아 아쉽기만 하네요.

B : 친절하게 BGM까지 일일이 지정된 이 글은 완결된 한 편의 소설이라기보다 시리즈로 이어진 영상편지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나 배경도 인물도 비현실적이어서 공감을 하기엔 너무 동떨어진 느낌도 드는군요. 그래서 잘 차려놓은 분위기에 젖어들기 힘든 것이 단점입니다. 그리고 글 전체의 분위기에 비해 중년남자에 대한 이해가 편향되어 있는 느낌도 의아합니다. 전체적으로는 지향하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중년남자와 연결되는 본능적인 성애(性愛)가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인지 의문이 남습니다.



용사냥 : 이정도

A : 사형을 벗어나기 위해 용사냥에 내몰린 사형수들은 어느새 신수라고 불리는 용사냥의 매력에 빠져 헤어나지 못합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산에는 용에게 짓눌려 초식이 된 호랑이가 살고, 매로 사람으로도 변하는 용은 비늘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보물인, 우리가 아는 용과 조선과는 조금 달라 보이지요. 작가의 독자적인 설정을 시대적인 배경 안에 녹여낸 솜씨가 좋습니다.
수단이 되었던 것이 목적으로 바뀌고 용사냥에 홀린 듯이 쫓아가는 인물들이란, 현대 생활에서 생존경쟁에 내 몰리는 사람들이 일말의 희망을 갖고 투자상품에 모든 것을 거는 모습과 참 닮았군요. 용사냥에 처음 내몰릴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배경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함께 하고 있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쫓게 되는 이기적인 모습에 고개를 젓게 됩니다. 이 모습 역시도 경쟁 앞에서 인간적인 가치는 점점 소외시하는 현대인과 얼마나 닮았는지요.
하지만 '용사냥꾼이 아니기 때문'에 용이 '나'만을 살려 보냈고, 거기에다 귀한 비늘까지도 잔뜩 싸서 보낸 이유가 아무래도 궁금하네요. 용사냥에 함께 가세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단지 방임했을 뿐인데요. 아니, 처음부터 '막뚜 아저씨'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고 하면 어째서 용은 막뚜 아저씨까지 보내면서 '나'를 용사냥터에 끌어낸 것일까요.
풀리지 않은 의문은 해결되지 않고 돌연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좋은 글의 매력이 반감된 것이 아쉽습니다.

B : 용 사냥에 얽힌 이야기를 설화처럼 풀어낸 글입니다. ‘사냥’이 주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쫓고 쫓기는 사냥에 따라옴직한 긴박함이나 긴장 그리고 뚜렷한 클라이맥스가 없는 점이 아쉽습니다. 아버지, 비늘, 변신 등의 소재들이 유기적으로 엮어져서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완성되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죽음에 익숙한 사냥꾼의 아내라지만 주인공의 어머니는 너무 쿨하시군요.(웃음)



폐허로 만들어진 성 : Leia-Heron

A : 제목이 이야기 전체의 결론이네요. 하지만 이야기를 다 읽을 때까지 제목의 의미가 바로 와 닿지 않아서 신선함이 떨어지지 않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서 유령의 모습이 변화한다는 발상은 그렇게 특이한 것이 아니지만 이 글에서는 유령의 정체에 대한 미스테리를 더해주는 효과를 내는군요. 유령의 정체를 추적하다가 성의 정체까지 추적해 내고 보니, 성은 폐허순례의 마니아가 스스로 만들어 낸 폐허였던 거군요. 다만 반전으로 기능해야 할 결말이 너무나 담담하게 흘러가버려 아쉽네요. 글 전체가 집중되는 부분이 없이 장편처럼 서술되어 클라이막스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네요. 하지만 미스테리가 실은 과거의 '마니아'들이 후세에게 던진 퀴즈였다는 발상은 무척이나 매력적이므로, 글의 구성을 조금 손보아 다듬아 보시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B : 재기발랄한 소재와 구성에 비해 다소 밋밋한 점이 아쉽습니다. 성을 조사하는 부분이나 성에 대한 묘사 등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아닌지요? 직접적인 사건과 관련 없는 부분에 많은 할애를 하여 반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야기가 다소 지루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합니다. 인물들에게 독특한 개성을 부여해서 이런 부분을 보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마존 바이러스 : 밤조심

A : 외모 지상주의를 꼬집는 글이 많이 올라오지만 비슷비슷한 글이 많아 식상하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 글은 '아마존 바이러스'라는 독특한 소재로 독자의 관심을 끌면서,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면서 인물의 극적인 인생의 전환기를 그려냅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에 쉽게 남자에게 차이고, 인생에 지쳐 아마존 밀림을 찾은 주인공에게 아름다워지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한 구원을 제공할 것 같지요. 하지만 투자물로 밖에 주인공을 보지 않은 시댁의 식구들,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남편은 더 이상 주인공에게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주인공이 그들에게 복수하고자 손을 뻗은 남자 역시 구원이 되지는 못하지요. 5년의 시간이 흐르고 자신의 '미'가 사라지고 나서야 주인공은 자신의 구원은 외부에 있지 않다는 걸 깨닫지요. 아마존의 여전사들의 상징인 잘려져 나간 가슴은 주인공이 앞으로 지내야 할 인생이 스스로 싸워 나가는 전사의 삶이라는 것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흔한 주제라고 하더라도 어떤 소재와 어떤 방식을 사용해서 이야기를 녹여내는가에 따라서 독자에게 새롭고 신선한 글이 될 수 있다는 표본 같습니다.
다만 시간 순서로 배열했을 때 이야기가 지루해 질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신 것일까요. 시간을 뒤섞어 단락을 배치했기 때문에 이야기에 속도감이 더해졌지만, 독자가 이야기를 파악하기는 어려워진 것이 아쉽습니다.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다시 돌아가 이야기의 과거-현재를 시간 순서로 재배열해 보는 과정이 저에겐 즐거웠습니다만, 독자들 가운데엔 두 번 이상 읽어야 하는 글은 다시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속도감과 가독성을 동시에 고려해서 구성을 조절해 보시면 더욱 좋아질 것 같습니다.

B : 과거와 현재를 단락으로 교차하는 방식은 일전에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가히 읽기가 쉽진 않습니다. 이 글의 주제를 고려하면 타당한 구도이고 작가의 의도도 읽힙니다만, 인내심이 적은 독자들도 많다는 것도 한 번쯤은 고려할 사항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 글은 루키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교차로 흘러가는 혜정의 과거와 현재는 어쩌면 외적인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젊은 시절과 내적인 강함-능력, 경력, 자신감 등이 중요해지는 시절을 상징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존 전사들은 전투하기 위해 한쪽 유방을 도려내는 의식을 치룹니다. 이것은 전투 같은 사회생활에서 승리하기 위해 억압할 수밖에 없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마존 바이러스란 화무백일홍( 花無百日紅), 덧없이 짧은 아름다움을 시들게 하는 대신 내면의 자신감을 가져오는 인생의 궤적이겠지요.

100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euseoha @ gmail. 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 (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7
  • No Profile
    샤유 11.10.01 01:41 댓글 수정 삭제
    으으 세심한 평 감사합니다. 쓸 때는 몰랐던 문제점들을 알게 되니까 좋네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조화 11.10.01 03:53 댓글 수정 삭제
    선정작을 99호 작품으로 써놓으셨네요. 힘드시겠지만 빠른 수정 바랍니다.
  • No Profile
    밤조심 11.10.01 04:14 댓글 수정 삭제
    정말 감사합니다! 거울의 100번 째 우수단편으로 뽑히디니요. 가문의 영광입니다.
    말씀대로 속도감을 위해 교차 편집을 이용했는데, 오히려 독자를 피곤하게 만든 결과를 낳았네요. 심사평 감사합니다. 꾸벅.
  • No Profile
    심사단 11.10.01 08:51 댓글 수정 삭제
    수정하였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김진 11.10.01 10:57 댓글 수정 삭제
    막 가는 글에, 소중한 평 대단히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설명을 좀 달아보자면 이렇습니다.
    우선 이것은 기본적으로 '코메디'를 염두해 썼고 거기다 싸이키델릭적인 아트락이나 프로그래시브음악의 색체를 버무리려 시도했던 것입니다. 고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현실성에서 벗어난 경향이 무척 심하죠.
    주인공인 중년남자는 Culture Club의 곡 Karma Chameleon 뮤직비디오에 http://www.youtube.com/watch?v=5MdOYG4SZjM&feature=fvsr 등장하는 좀도둑에서 약간 영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인하여, 이와 같이 개싸이코변태적인 글이 나오고 말았다는 말을 붙임으로 얘기를 매듭짖기 전에,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100호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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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미선 11.10.01 11:30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부족한 처녀작에 이렇게 성심성의껏 심사 코멘트를 주시다니.. 뜻깊은 100이라는 숫자에 더불어 심사된것이 더욱 기쁘네요. 날씨 추운데 감기 조심하시고,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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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되고 가감없는 비평의 여백에 감사를 드려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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