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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기 독자우수단편 우수작을 선정합니다. 우수작으로 2차례 이상 선정되시거나 최종 우수작으로 선정되신 분께는 거울 필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4분기 우수작 후보작은 10월 후보작인 hummchi 님의 「여자아이」, 11월 후보작인 사피엔스 님의 「너는 스노볼 속에」, 12월 후보작인 사피엔스 님의 「너희는 그저 싶었던」, BB 님의 「이 게시물은 커뮤니티 규정을 위반합니다」 4편이었습니다. 심사단은 4편 중에서 hummuchi 님의 「여자아이」를 4분기 우수작으로 선정하였습니다.

 

A
4분기에는 각 월별 후보작 네 편이 모두 특색이 있고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마지막 12월 후보작인 BB님의 <이 게시물은 커뮤니티 규정을 위반합니다>는 소셜미디어의 유해게시물의 삭제를 결정하는 직원을 통해 SNS 문제와 노동문제를 동시에 그려내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비인간적인 작업 환경에서도 오직 한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잠시 미뤄둘 수 있다고 사람들은 쉽게 자신에게 말하지만, 그 목표는 정말 그 정도로 가치있는 것인지, 성취 가능한 것인지 무거운 질문이 독자에게 닿습니다. 

사피엔스 님은 12월 후보작인 <너희는 그저 싶었던>과 11월 후보작 <너는 스노볼 속에>에서 언제나 멋진 필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너희는 그저 싶었던>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던 사람이 죽은 뒤에 좀비가 되는 세계에서 자신도 죽으면 좀비가 될 것을 알고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좀비화 된 시신들을 만나는 장면이 지나치게 생생하게 반복되는 점은 아쉽지만, 좀비가 된 뒤에도 서로를 원하는 두 인물의 모습조차 누군가에게는 비웃음거리가 된다는 점에서 질병과 죽음의 서글픔이 잘 나타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너는 스노볼 속에>는 테라포밍을 위해 우주선에서 태어난 인물들이 계속 우주로 나아갈 것인지 새로운 행성에서 삶을 시작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문제를 통해 생존과 꿈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대조적으로 다루었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고 꿈을 쫓는다는 것은 우주선에서만 일어날 일은 아니죠. 새로운 설정은 아니지만 경장편으로의 개작도 가능해 보이는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humchi님의 <여자 아이>는 현대처럼 보이는 배경에서 노인의 시점으로 그려지는 상실의 감정이 생생한 작품이었습니다. 치매 환자를 화자로 한 작품은 드라마를 포함해서 몇 편이나 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식상한 느낌이 들 수 있지요. 이 작품은 자녀로부터 버려진 것 같은 상실감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화자가 말하는 현실과 실제가 조금씩 어긋나는 것 같은 위화감을 서서히 고조시키면서 결말까지 나아가는 서술이 압권입니다. 결말에 이르러 위화감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어지게 만듭니다. 4분기 후보작 네 편 중에 서술의 힘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었습니다. 

B
치매에 걸린 주인공이 어떤 여자아이와 교감을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는 노인의 상상이 만들어 낸 존재로서 소외된 노인이 느끼는 가족들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입니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소설이며 시의적절한 소재와 내용을 갖추었습니다. 문장은 잘 다듬어져 있고, 구성도 전보다 상당히 발전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윌리엄 포크너의 ‘고함과 분노’를 떠올리게 합니다. (한번 읽어보아도 좋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치매에 걸렸음은 초중반 부에 쉽게 유추할 수 있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또한, 남편의 사인 역시 아쉽습니다. 보통은 고혈압을 사망원인으로 보진 않죠. 고혈압에 의한 뇌동맥 파열이나, 심근경색 등 다른 결정적인 합병증에 의해 사망하니까요. 

다만, 이것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반전으로 승부를 보는 작품이 아니며, 이미 주제를 끌고 가는 서사야말로 이 작품의 미덕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전체적으로 벨런스가 잡힌 좋은 작품입니다. 순문학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C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빼어난 작품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간 거울을 이용해 오며 여러 번 느꼈던 바고 작년 한 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양질의 소설들이 쏟아져나와 이 중 한 작품만을 꼽아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애석했습니다. 특히 언급하고 싶은 작품은 사피엔스님의 <너는 스노볼 속에>와 <너희는 그저 싶었던>입니다. 참신한 상상력과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핍진한 세계관, 흠잡을 데 없는 문장 솜씨와 서사가 어우러져 흔히 말하듯 ‘체험이 되게 하는 소설’의 경지에 다가갔습니다. 한 해의 최우수작으로도 손색이 없겠으나 쟁쟁한 경쟁작들이 많아 안타깝게도 분기 우수작으로 선정되지는 못했습니다.

hummchi님의 <여자아이>는 가까운 미래, 치매 증상을 앓는 노인의 모습을 담담한 필치로 담은 소설입니다. 서술트릭을 이용한 반전이 결말부에서 색다른 충격을 주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이처럼 과감한 상상력을 배제하고 대신 현실성과 주제 의식에 무게를 둔 SF 작품들이 거울에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대부터 꾸준히 흥행하고 있는 <블랙미러>의 영향일까요? ‘근미래 현실주의 SF’라 칭할 법한 이 장르는 현대 사회와 기술, 인간 세 꼭짓점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며 특히 IT, AI 등의 첨단 기술에 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소 과장된 기대일 수 있겠으나 저는 이 장르가 거울을 대표하는 특색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습니다. (웹진의 이름이 ‘거울’인 것조차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 비록 심사위원 과반수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저는 소수의견으로서 BB님의 <이 게시물은 커뮤니티 규정을 위반합니다.>를 분기 우수작에 추천했습니다. 극단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거대 자본 기업. 그리고 AI 기술. 이 두 가지가 결합하면 노동자에게 어떤 참상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 작품의 설정은 이미 여러 갈래로 현실이 되어 인류를 덮쳐오고 있습니다. 골든 티켓이라는 환상 속 사다리를 쫓아 이 시스템에 복무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인간으로서 저항하고 고발할 것인가는 온전히 이 소설을 읽는 독자의 몫이 될 것입니다.

좋은 소설을 읽게 해주신 모든 독자 작가분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D
단정하고 깔끔한 문장이 군더더기 없이 독자를 이끄는 힘이 특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치매 초기의 노인 혜령이 의문의 여자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친밀감을 쌓지만, 결국 그것이 전부 망각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는 점이 결말의 반전으로 작용합니다. 혜령이 만난 여자아이는 손녀 은주와 그의 친구 희정의 이미지를 적당히 섞어 그녀가 만들어낸 이미지였던 것이지요. 여자아이와의 대화 장면, 꿈처럼 등장하는 손녀, 가족 관계에 대한 짤막한 기억과 혜령이 치매 환자라는 암시가 적당한 비율로 순환되기 때문에 읽기에도 불편함이 없습니다. 할머니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대화를 걸어주던 아이가 허구였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쓸쓸하게 남겨진 치매 노인을 더욱 강조하는 것 같아 인상적인 단편입니다.

일가친척이 모두 모여 즐거워야 하는 명절에 홀로 지내는 노인과 아이가 만나 서로의 떠나 버린 가족에 관해 대화함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이 공감대는 인물 사이의 유대감으로 발전하지만, 머리핀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두 인물 사이의 관계는 위기를 맞습니다. 이 ’위기‘는 굉장히 극적입니다. 혜령이 아이를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이 내적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머리핀의 행방이 밝혀짐과 동시에 혜령의 기억에 관한 혼란스러운 진실이 비로소 등장하는 결말도 갑작스럽지 않고 자연스럽습니다. 추억의 작은 소품으로 소모될 수 있었던 머리핀이 알뜰하게 활용되어 한 인물의 심리를 크게 뒤흔들었다는 점과 그 직후 이야기의 가장 큰 비밀이 밝혀진다는 점에서 영리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소설에서 반드시 수정해야 하는 오류가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자아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구체성을 획득한다면 독자에게 조금 더 오락적인 즐거움을 줄 수 있겠다 싶어 그에 대한 한 가지 첨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자아이’는 혜령이 손녀 은주와 그의 친구 희정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상상한 가공의 인물입니다. 결말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게는 이 점이 잘 와닿지 않겠지만,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난 이후, 독자는 자연스럽게 처음으로 돌아가 ‘여자아이’와 실제 인물들의 정보를 맞추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여자아이’는 여러 인물의 조합으로 탄생한 가공의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말에서 주어진 은주와 희정의 정보가 매우 적기에, 이 ‘퍼즐 맞추기’는 금세 끝나고 맙니다. 이를테면 아이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거나 아이가 트램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는 등의 정보는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모호합니다. 물론 혜령이 치매 노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특정 인물이 아닌 그녀의 상상이 오롯이 만들어낸 여자아이의 속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상의 여자아이를 구성하는 조각조각의 정보값이 분명한 출처를 지니고 있을 때, 독자에게 퍼즐을 맞추는 듯 재미있는 경험이 더해지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자아이를 구성하는 정보가 어디서 왔는지를 재설정하는 것은 서사의 진행에 영향을 주지 않는 과정일지 몰라도 읽는 이들에게 복선과 암시를 찾아가는 유쾌한 경험을 추가로 선사할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아이의 인물상과 정보가 구체적일수록, 그리고 그것이 혜령의 손녀와 그의 친구, 또는 제삼자에게서 뜻하지 않게 더해질수록 소설은 게임적으로 변합니다. 급작스럽게 마무리되는 결말을 조금 연장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여자아이에게 혜령이 알고 있는 더 다양한 인물의 속성이 중첩된다면 그 아이는 혜령의 삶을 관통한 새로운 자아라는 의미까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환상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여자아이‘에 관해 입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재미있는 단편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
소위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등장시키는 작품은, 그 균열을 어떻게 보여주는지가 작품의 질과 독자의 즐거움을 좌우하는 핵심적 지점이 됩니다. 이 작품은 그 점에서 매우 훌륭합니다. 여자아이의 성정과 캐릭터가 노인의 시선에서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고, 마지막에 가서 그 어긋남이 밝혀지는 과정도 무척 좋았습니다. 마지막이 약간 급작스럽다는 감은 있지만, 독자를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는 큰 장점이 있네요. 현실에 기반하지 않았음에도 연대감과 감정 그 자체는 진실이었다는 점 또한 아름답습니다. 소설이란 원래 요약으로는 언급되지 않는 누군가의 이야기적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그 본질에 충실한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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