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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작 안내 10월 심사평

2023.11.15 00:0011.15

안녕하세요. 독자우수단편 선정단입니다.

 

우수작으로 2차례 이상 선정되시거나 연말에 최종 우수작으로 선정되신 분께는 거울 필진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번 호 독자우수단편은 2023년 10월 1일부터 2023년 10월 31일 사이에 창작 게시판 단편 카테고리로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심사 기준을 만족한 작품 10편을 심사하였습니다.

 

2023년 10월 독자 단편 후보작으로는 hummchi님의 〈여자아이〉를 선정하였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천가연,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법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법〉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이야기임에도 그들의 인원과 바이러스의 전파 범위를 극히 제한했다는 점이 독특하게 읽히는 단편입니다. 보통 ‘바이러스’는 넓게 전염된다는 특성 때문에 사회를 디스토피아적 혼란에 빠트리는 요소로 등장하곤 하는데 천가연 작가의 새로운 시선과 해석이 가미된 좀비 바이러스는 특정 지역에 좁고 강하게 퍼진 채 정체됩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무는’ 행위는 쉽게 통제될 수 있습니다. 또한 좀비 바이러스는 오직 체액의 접촉으로만 전파되기 때문에 공기 중으로 퍼지는 타 바이러스에 비해 전염성이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발상의 전환을 이룬 작가의 시선은 독자로서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소설 안에서의 좀비 바이러스는 모든 사람을 혼란으로 몰아넣기보단 특정 몇몇 인물의 세계를 완전히 망가뜨립니다. 좀비가 되거나 안타깝게 사망한 사람들, 그들의 주변 인물이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초점을 맞춘 신선한 전개가 눈여겨볼 만합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인혜’는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돼 생존을 위한 수술을 받지만 사망합니다. 그의 엄마인 혜영은 친구인 여진이 쏜 공기총이 인혜의 사망에 어느 정도 일조했다고 생각하는지 봉안당에서 만난 그를 멀리합니다. 인혜의 죽음으로 인해 혜영과 여진의 관계는 자꾸만 어긋납니다. 흥미로운 점은 혜영과 여진이 이해하고 있는 인혜의 인물상에도 차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혜영은 인혜의 사망 당시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고 여진은 인혜의 말로만 그녀의 가정 형편을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니 편혜영 씨의 기억과 저의 기억을 합치면 온전한 인혜의 기억이 되는 거겠죠“라는 여진의 말은 이 소설이 남겨진 자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요약합니다. 인혜는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이 조합되어 완성되는 존재라는 작가의 표현법이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처럼 전반적인 서사의 전개는 인상적입니다만, ‘좀비 바이러스’가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정확히 부합하는,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 소재인지에는 약간의 의문이 듭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인혜가 교통사고로 사망해도, 투병 중 사망해도, 피살되어도 이야기의 진행에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새롭게 해석된 ‘좀비 바이러스’가 독자에게 일면 신선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이 소설 안에서 크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른 것으로 충분히 대체가 가능한 요소는 그 개성이 이야기 안에서 보완되거나 더 적합한 것으로 교체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좀비 바이러스’라는 소재에 관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수정 방향을 권해드립니다.

첫째로 반드시 좀비 바이러스가 아니라면 인혜와 주변 인물이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을 중요한 위치에 놓을 만한 사건이나 장면을 추가해보세요. 좀비 바이러스는 한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와해하고 동물적인 본능만을 남긴다는 관습적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을 활용해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인혜 주변의 세상을 좀 더 여러 인물의 관점에서 극적으로 표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둘째로는 ‘인혜’라는 인물의 특징을 더 적절하고도 개성 있게 드러낼 수 있는 죽음의 방식을 고려해보시길 권합니다. 좀비 바이러스를 아예 소설에서 들어내고 인혜의 죽음을 완전히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인혜의 곁에 있던 모두의 기억법을 송두리째 뒤흔들 정도로 급작스럽고도 강렬한 죽음이나, 그것에 단지 미묘한 금을 낼 정도의 별것 아닌 죽음처럼 다양한 ‘죽음의 스펙트럼’을 생각해 본다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중도에 인물의 시점이 한 번 교체되는데 여진의 시점에서 쓰이는 후반부는 사실상 삼인칭으로 쓰인 전반부에 흡수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법이라는 제목을 살리기 위해 삼인칭의 시점을 고수하며 다양한 인물에 초점을 맞춰 보면 어떨까요. 지금 ‘인혜’를 보는 두 사람의 시선 차이는 이미 매우 의미 있는 메시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 많은 인물이 알고 있는 인혜의 조각을 맞춰가는 방식으로 서사가 길고 묵직하게 진행된다면 훨씬 다층적인 매력을 가진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즐겁게 읽은 단편이라 뜻하지 않게 여러 가지로 첨언하게 되었네요. 평이 조금 길어졌지만 추후 수정 및 보완 작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좋은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반신, 〈일루미나티
반신 작가의 〈일루미나티〉는 광신주의 ‘일루미나티’의 존재를 믿는 일인칭 주인공 ‘나’의 입장에서 쓰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세상에 끊임없이 스스로 과하게 확신하는 신념을 드러냅니다. 결국 그것이 거짓임을 아는 독자들에게는 소문의 허망함 내지는 무용함을 알리려는 듯한 단편으로 보입니다. ‘나’는 일루미나티의 존재를 믿지만, 그것을 적대합니다. 전반적으로는 ‘나’의 입장을 흥미롭게 보았으나 이 소설에 완성도 있다는 평가를 드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서사의 개연성을 살피시길 권해드립니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을 택하고 있는 만큼 이 소설은 ’나‘라는 인물과 그의 세계(정신적 또는 실제적 세계)가 긴밀한 연관을 맺습니다. 주인공이 흔들리는 것은 곧 세계가 흔들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소설 속 ’나‘는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그의 심리가 아닌, 설정이 불안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오히려 대단히 안정된 입장을 끝까지 고집합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세상을 봅니다. 그러나 독자가 판단하기에 그의 행동은 크게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는 단지 불시에 날아온 축구공을 맞은 다음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삶에 누군가 개입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습니다. 이후 기행을 거듭하며 자신의 확신을 증명해야 할 때가 오면 구체적인 증거를 대기보다는 남을 깎아내립니다. (“이봐요, 복지사 선생, 사회복지사면 학생 때 공부는 잘했을 텐데, 세상 공부는 잘 못했나 봐”) 계속해서 그는 불리한 상황에 놓일 때마다 일루미나티와는 전혀 관련 없는 그의 업적과 사회적 지위를 내세웁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후에는 일루미나티라는 집단이 그의 삶에 작용하는 영향력도 줄어듭니다.

이 소설은 제목으로 〈일루미나티〉를 택하고 있지만, 소설 안에서 이 집단은 크게 개성을 갖지 못합니다. 쉽게 말하면, ‘일루미나티’를 그와 비슷한 여느 사이비 종교 집단의 이름으로 바꾸거나 그가 단지 과대망상증에 빠져 비합리적인 말만 늘어놓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읽어도 소설의 진행에는 큰 영향이 없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을 단순한 과대망상 환자로 설정하거나, 이미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일루미나티’가 아닌 조금 더 작가의 개성이 가미된 완전한 가상의 광신 집단을 경계하는 인물로 그려도 괜찮습니다. 또는 환상적으로라도 ‘나’와 일루미나티의 직간접 접촉을 한번쯤 등장시켜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를 자연스럽게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광신도의 무리를 과장된 주인공의 시선에서 창조해 소설 속에 등장시킨다면 어떨까요.

실제 존재했던/존재하는 집단을 소설 안에 등장시킬 때 작가는 크게 주의해야 합니다. 현실을 곡해하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그 안에서 독자의 기존 인식을 깨고 새로움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야기의 세부를 직조하는 데에 서툴다고 스스로 느낀다면 실제를 차용해 사실 확인에 큰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 좀 더 자유로워도 괜찮은, 조금 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서사의 완성도에 집중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 과정에서 ’1984‘, ’감시‘, ’광신주의‘ 등 ’감시‘를 주제로 한 콘텐츠에서 흔히 사용되어 온 소재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창의적인 소재를 활용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남킹, 〈버스 민폐녀
단편 〈버스 민폐녀〉를 평가하기에 앞서 이 이야기는 흔히 여성에게 습관적으로 사회가 붙이는 ’-녀’라는 호칭을 전복해야만 의미가 있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 현재 ‘비혼주의’, ‘민폐녀’, ‘성평등주의’ 등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며 사회적으로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되지 않은 상태로 쓰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 특히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사용하려는 단어를 정확하고도 민감히 파악한 이후에 활용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주요 쟁점이 되는 몇몇 주제들을 전면으로 내세우고자 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남킹 작가의 이 단편은 한때 비혼주의였던, 성평등주의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여성이 성적 쾌락에 눈을 뜨고 소위 육체적 쾌감의 만족을 위한 ‘파트너’를 구하고자 맞선을 보는 과정을 짧게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개연성과 표현을 조금 다듬는다면, 도입부는 그럴듯한 전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 실제 맞선을 보는 장면에서 남성과 나누는 대화는 작가가 소설 내부에서 활용하고자 삽입한 주제와 요소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를 의심하게 합니다.

많은 소설에서 남성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페미니즘과 성평등주의에 몰이해한 인물로 그려지곤 합니다. 이 소설 역시 맞선남을 그런 인물의 대표격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적어도 여성 인물은 자신이 여성으로서 겪은 불합리함과 사회의 부조리함을 직간접적으로 암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주된 여성 인물인 ’나‘는 과거 사회가 지속해서 재생산해 온 수동적인 여성 인물상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한, 현대의 독자가 크게 공감하기 어려운 전형적이고도 구시대적인 모습을 반복해서 보입니다.

저는 소설 속 모든 여성 인물이 주체적일 필요는 없다는 의견에 개인적으로 동의하는 편입니다. 픽션이 기반하는 실제의 세상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이유로 수동적인 인간은 성별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발견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당대가 추구하는 성적 감수성을 평균 이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매우 날카롭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젠더 논의를 기반으로 한 단편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남킹 작가는 본인이 이해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사회 일반의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이야기 안에서 분명한 메시지를 형성했어야 합니다. 앞의 의견을 기반으로 판단하건데 이 소설에서 가장 큰 문제로 느껴지는 부분은 작가가 여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짐작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독자로서 가장 의아한 부분은 상대 남성에게 더치페이를 제안받은 여성이 크게 분노하는 장면입니다. 작가는 주인공 여성과 그의 맞선 상대인 남성을 둘 다 성평등주의자로 설정했음에도 그들의 대화에서 어떤 의미도 끌어내지 못합니다. 이 맞선 장면이 ‘반드시’ 유의미해야 하는 이유는 작가가 소설의 제목을 ‘버스 민폐녀’라고 정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존재를 격하하는 이 단어를 소설의 첫머리에 적어두고 젠더와 여성에 관해 쓰겠다는 뉘앙스를 전면에 드러낸 이 이야기에서 성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두 인물이 맞선을 보는 장면은 상투적이긴 해도 사실상 내용의 정점입니다. 그러나 두 인물은 ’평등‘의 근본적인 의미를 곡해한 반복적인 대화를 주고받다가 남성이 여성에게 큰 금액의 더치페이를 요구하는, 더 나아가 여성이 그에 의미 없이 분노하는 매우 깔끔하지 못한 관계로 끝나고 맙니다.

여기서 ’나‘가 분노를 표출해야 하는 지점은 ’비상식적인 금액의 더치페이를 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이 아니라 차별의 역사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단순하고도 이분법적인 계산으로 ’평등‘을 재단하는,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입니다. 결국 이 장면을 통해 어떤 인물에게도 독자는 동의하지 못합니다. 그저 여성이 자기가 개발한 앱 안에서 ‘버스 민폐녀’로 낙인찍힌 채 소설은 마무리됩니다.

남킹 작가는 이 소설을 두 가지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성 혐오주의를 비판함’의 논조로 쓰고 싶다면 여성 인물이 남성 인물의 왜곡된 ’평등‘에 관한 시각과 상식에 맞지 않는 더치페이 제안에 비생산적인 분노만을 표출하기보다는 조금 더 의미 있는 반감을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표해야 합니다. 맞선 장면의 도입에서 이미 이 여성이 남성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장면을 넣어도 괜찮겠지요. 그리고 소설 전반적으로도 단지 열심히 살아가며 성과를 달성하기만 하는 이 여성의 전형적 인물상에 더해 조금 더 작가의 해석이 가미된 개성적인 면모가 드러나도록 수정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이 소설이 ’여성을 관습적으로 혐오하는 사회 자체‘를 드러내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여성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사는 보통의 인물 또는 수동적 인물처럼 그려져도 좋습니다. 그녀는 사회에 큰 불만을 품지 않은 채 중매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삶을 살고자 하지만 반복되는 불쾌함에 노출됩니다. 이런 이야기에서는 남성의 더치페이 제안을 여성 인물이 수용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성평등을 내세우며 여성에게 더치페이를 제안하는 남성은 실제로 있고 젠더 이슈에 크게 관심 없는 여성도 늘 차별에 노출되는 사회니까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일인칭 여성 주인공은 상대 남성의 제안을 수용하는 와중에서도 반드시 그것에 일말의 불편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불편함에는 단순히 남성의 제안을 불쾌해하는 것을 넘어서는 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이 소설이 어떤 방식의 수정을 거치든 관습적 사회의 시선에 투영된 여성상이 주인공에게 불편하게 여겨지는 지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이 글이 웹진 ‘거울’에 올리신 첫 단편인 듯하여 평소보다 길게 평을 남겨드립니다. 쓰고자 하는 것에 도달할 수 있는 다방면의 시선을 입체적으로 고려하여 더욱 독자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동시대의 이야기를 쓰시기를 진심으로 격려드립니다.

hummchi, 〈여자아이〉 
단정하고 깔끔한 문장이 군더더기 없이 독자를 이끄는 힘이 특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치매 초기의 노인 혜령이 의문의 여자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친밀감을 쌓지만, 결국 그것이 전부 망각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는 점이 결말의 반전으로 작용합니다. 혜령이 만난 여자아이는 손녀 은주와 그의 친구 희정의 이미지를 적당히 섞어 그녀가 만들어낸 이미지였던 것이지요. 여자아이와의 대화 장면, 꿈처럼 등장하는 손녀, 가족 관계에 대한 짤막한 기억과 혜령이 치매 환자라는 암시가 적당한 비율로 순환되기 때문에 읽기에도 불편함이 없습니다. 할머니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대화를 걸어주던 아이가 허구였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쓸쓸하게 남겨진 치매 노인을 더욱 강조하는 것 같아 인상적인 단편입니다.

일가친척이 모두 모여 즐거워야 하는 명절에 홀로 지내는 노인과 아이가 만나 서로의 떠나 버린 가족에 관해 대화함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이 공감대는 인물 사이의 유대감으로 발전하지만, 머리핀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두 인물 사이의 관계는 위기를 맞습니다. 이 ’위기‘는 굉장히 극적입니다. 혜령이 아이를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이 내적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머리핀의 행방이 밝혀짐과 동시에 혜령의 기억에 관한 혼란스러운 진실이 비로소 등장하는 결말도 갑작스럽지 않고 자연스럽습니다. 추억의 작은 소품으로 소모될 수 있었던 머리핀이 알뜰하게 활용되어 한 인물의 심리를 크게 뒤흔들었다는 점과 그 직후 이야기의 가장 큰 비밀이 밝혀진다는 점에서 영리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소설에서 반드시 수정해야 하는 오류가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자아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구체성을 획득한다면 독자에게 조금 더 오락적인 즐거움을 줄 수 있겠다 싶어 그에 대한 한 가지 첨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자아이’는 혜령이 손녀 은주와 그의 친구 희정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상상한 가공의 인물입니다. 결말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게는 이 점이 잘 와닿지 않겠지만,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난 이후, 독자는 자연스럽게 처음으로 돌아가 ‘여자아이’와 실제 인물들의 정보를 맞추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여자아이’는 여러 인물의 조합으로 탄생한 가공의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말에서 주어진 은주와 희정의 정보가 매우 적기에, 이 ‘퍼즐 맞추기’는 금세 끝나고 맙니다. 이를테면 아이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거나 아이가 트램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는 등의 정보는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모호합니다. 물론 혜령이 치매 노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특정 인물이 아닌 그녀의 상상이 오롯이 만들어낸 여자아이의 속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상의 여자아이를 구성하는 조각조각의 정보값이 분명한 출처를 지니고 있을 때, 독자에게 퍼즐을 맞추는 듯 재미있는 경험이 더해지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자아이를 구성하는 정보가 어디서 왔는지를 재설정하는 것은 서사의 진행에 영향을 주지 않는 과정일지 몰라도 읽는 이들에게 복선과 암시를 찾아가는 유쾌한 경험을 추가로 선사할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아이의 인물상과 정보가 구체적일수록, 그리고 그것이 혜령의 손녀와 그의 친구, 또는 제삼자에게서 뜻하지 않게 더해질수록 소설은 게임적으로 변합니다. 급작스럽게 마무리되는 결말을 조금 연장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여자아이에게 혜령이 알고 있는 더 다양한 인물의 속성이 중첩된다면 그 아이는 혜령의 삶을 관통한 새로운 자아라는 의미까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환상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여자아이‘에 관해 입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재미있는 단편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동란, 〈포자〉 
감동란 작가의 〈포자〉는 포자로 가득한 행성에 공공 폐기물 처리 시설을 만든다는 기발한 생각에서 출발한 이야기입니다. 원숭이로 보이는 동물과 포자식물이 공생하는 그 행성에서 생물종 다양성을 무시한 채 시설을 지으려는 집단과 행성 생태계를 지키려는 집단이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그려집니다. 자정 능력을 초과한 쓰레기의 포화 상태로 행성 밖의 폐기물 처리장을 지어야 한다는 배경 설정이 조금은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인간이 지구를 넘어 우주까지 오염시키는 생물종이 되어 버렸네요.

생물학자의 관점에서 행성의 종 다양성을 지키고자 한 희수와 인간으로서 마지막 양심을 지키고자 한 인혁, 그들에게 맞서 무자비한 개발로 대응하며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를 대표하는 최 팀장의 인물은 충분히 전형적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습니다. 수많은 이야기에서 반복되어 온 보존과 개발의 관념 대립이 자칫 흔하게 사용될 수 있는 소설이었지만, 배경을 미래의 우주로 설정함으로써 독특하고도 새로운 색이 가미됩니다. 작가만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새 행성과 그곳에 사는 포자식물, 원숭이 같은 동물 등의 묘사가 흥미롭습니다. 더 많은 동식물 또는 새로운 형태의 생물군이 등장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큰 요철 없이 읽을 수 있는 단편이지만, 몇 가지 수정을 통해 보완된다면 더욱 나은 방향성을 가질 수 있을 듯합니다. 먼저 이 행성에서 최 팀장이 가장 먼저 포자에 감염된 이유가 좀 더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이미 타 동물로 감염이 가능한 포자가 발견되었다면 그곳의 누구도 헬멧을 벗지 말아야 한다는 건 상식입니다. 설령 그 사실이 밝혀지기 전이었다고 한들, 낯선 우주에서 섣불리 외부 자극에 신체를 노출하는 건 상당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최 팀장은 고작 담배를 피우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외부 공기와의 접촉을 시도합니다. 차라리 최 팀장이 의견 대립으로 희수 또는 인혁과 다투던 중, 물리적인 충돌로 인해 잠시 공기에 노출되었다면 어땠을까요. 최 팀장 자신이 아닌, 외부 요인이 그를 감염되도록 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충분히 타당한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인물의 개성을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단편의 도입부 첫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수정 또는 삭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발아 조건에 인간이 개입했을 때, 인간들은 오만하게도 그들이 인간들의 행동에 대해 그들의 존재 자체를 통한 복수를 행했다고 생각한다”라는 이 문장은 모호합니다. 짧지만 도입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직관적인 내용으로 수정하거나 삭제하지 않으면 초반부터 독자들의 유입을 방해하는 요인이 됩니다. 셋째로 결말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조금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욕심과 이익만을 챙기던 최 팀장은 죽었지만, 선장은 살아서 행성을 탈출했습니다. 생태계 보호를 위해 노력했던 희수와 인혁은 오히려 그 행성의 포자에 잡아먹힐 위험에 빠진 채 서사는 종결됩니다. 여기에서 독자는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할까요. 차라리 희수와 인혁이 행성을 탈출했다면, 뻔하지만 권선징악의 구도를 완성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계획대로 모선을 부수고 다같이 죽음을 맞는 결말을 그대로 끌고 갔어도 좋았을 듯합니다. 사실 그편이 가장 깔끔합니다. 희수의 제안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혁의 태도도 어색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이미 모두가 이 행성의 생태계에 흡수되는 마무리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군더더기처럼 보이는 인혁의 개인적 고뇌보다는 결국 욕심을 부리다 함께 최후를 맞는 인간들의 죽기 직전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강조한다면 괜찮은 결말이 될 것 같습니다. 인간을 자연이 이기되, 가장 극적이고도 깔끔한 방식은 무엇일지 깊이 고민해보시길 바랍니다.

이미 적절한 대립구도와 선과 악의 상징이 형성된, 새로운 미래의 드라마에 과할 정도의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을 추가하기보다는 필요 없는 장면과 문장을 덜어내고 본질의 메시지에 집중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전반적으로 즐겁게 읽은 단편이었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반신, 〈와해〉 
〈와해〉는 짧지만 명료한 인상의 단편입니다. ‘둘 중 하나다. 내가 미쳐버렸거나 무슨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거나‘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갑자기 스스로 여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주인공의 집에 등장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후로 ‘나’에게는 현실을 헷갈리는 증상이 계속되는데 그는 유독 주변의 여성 인물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 소설은 인물을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세우려는 글쓴이의 의도가 돋보입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작가가 이 환각과도 같은 혼란의 ‘원인’을 무엇으로 설정했을지를 궁금해하며 글을 읽게 됩니다.

후에 그 착각의 원인은 ‘뇌진탕’으로 밝혀집니다. 하지만 이 결말이 독자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거나 앞 이야기와 매력적인 개연성을 형성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나‘는 뇌진탕 때문에 여동생도, 여자친구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라는 결론이 혼란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사실적인 설명이 될 수는 있으나, 이 이야기가 단계적으로 쌓아 온 그럴듯하고도 환상적인 이미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최적의 결론이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뇌진탕이 결론으로서 부적합해 보이는 이유는 분명 앞의 이야기가 환상 소설로서 귀결될 수 있는 좋은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결론을 설정하는 데에 도움을 드리기 위해 독자로서 눈여겨보았던 ’나‘의 특징을 두 가지 꼽아보겠습니다. 먼저 ‘나’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두 명의 여성을 존재부터 까맣게 잊습니다. 그가 잊은 두 인물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리고 분명 친밀한 관계에 놓은 사람들이었을 것이기에 독자들은 그 둘을 공통으로 관통하는 망각의 원인이 있으리라는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나’는 망각에 관한 일기를 씁니다. 분명 ’일기‘는 기억을 잃는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되는 기록물입니다. (관련된 창작물로 이치조 미사키의 장편소설과 동명의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그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와 고바야시 야스미의 『분리된 기억의 세계』를 추천해 드립니다) 하지만 ’와해‘에서는 그가 쓰는 일기가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한 채 이야기가 종결됩니다. 저는 ’나‘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망각의 단서가 ’일기‘에서 발견된다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이 소설을 수정하실 예정이시라면 문단을 조금 더 자주 나누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단편소설이 두 개의 문단으로만 나뉘어 있다면 독자들의 시각적 피로도가 높아집니다. 두 문단이 나누어지는 부분이 서사적으로 큰 변화의 맥락에 있는 것 또한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한 번만 나눈 작가의 의도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기도 힘듭니다. 중요한 의도가 없다면 6~7줄에 한 번 정도 문단을 나누어줄 때 독자가 느끼는 가독성은 훨씬 좋아진다는 것도 염두에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뇌진탕이라는 현실적인 결말로 빠르게 인물을 이끌어가기보다는 그가 조금 더 기억과 망각, 더 나아가 환상과 현실 사이의 줄다리기를 할 수 있도록 서사 진행을 자유롭게 활용하신 다음,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증상을 관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매력적인 사건을 기억 상실의 원인으로 지목해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좋은 방향으로의 수정이 이루어진다면, 분명 더 풍성한 내용을 그럴듯하게 담는 소설이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즐거운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임희진, 〈워프 스테이션〉 
‘워프 스테이션’이라는 신기술의 개발 이면에 숨겨진 위험성을 경고하는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입니다. 분량이 매우 짧은 엽편에 가깝지만 진아가 워프 스테이션을 이용하기 전의 갈등과 그럼에도 유나가 진아에게 그것을 체험시키고자 하는 과정, 기계의 고장과 진아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의 장면이 개연성 있게 이어지기 때문에 즐겁게 읽었습니다.

다만 결말의 부분을 조금 더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풀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소각된 진아가 어떻게 기계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명확히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이해한 바로 소설 속 워프 스테이션은 탑승한 사람이 소각되고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가 걸어 나오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 같습니다. 워프 항법을 통해 시간이 조금 앞당겨져서 과거의 진아가 스테이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상상도 해보았지만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환기구에서 연기가 나는 장면이 해석되지 않는 등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 스테이션이 탑승자를 소각하고 매번 다른 이를 복제해 내보내는 방식이라 볼 때, 잠시 읽기에는 섬찟한 기분을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기술적으로 크게 모순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술을 발명한 사람과 이용자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까요. 보편화된 기술은 사업적 이익이나 대중의 편의성을 필수로 합니다. 그러나 이 워프 스테이션의 소각 시스템은 오히려 이에 반하는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술은 어떻게 스테이션에 도입되었을까요. 저는 이 결론을 좀 더 환상적이고도 그로테스크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스테이션에 ‘자아’를 부여하면 어떨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AI 시스템이 가미된 이 시스템이 자아를 갖게 되어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인간을 소각하게 된 것입니다. 〈워프 스테이션〉은 이렇게 작은 재미 요소를 결말에 추가하기만 해도 기묘한 두려움을 독자에게 줄 수 있는 소설입니다.

한 가지 더 제안을 드리자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가 ’워프 스테이션‘이 개발된 당시뿐 아니라 현재로부터 미래에 이르는 다양한 시간대를 단순히 뛰어넘지 않았으면 합니다. 워프 스테이션이라는 초고도화된 기술이 개발되는 시점은 지금보다는 훨씬 미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배경을 주의 깊게 살피면 작가가 생각하는 현재의 모습과 초고도화된 미래가 크게 시간 차이를 두지 않고 겹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례로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워프 스테이션이 개발될 시기에 스마트폰으로의 전환기를 기억할 사람이 몇이나 생존할 것인지, 과연 이동 수단의 고도화 없이 자동차와 지하철에서 바로 워프 스테이션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질지에 대한 질문이 발생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워프 스테이션의 개발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의 간격이 있을 것임에도 그 사이의 기술적 진보에 대한 상상이 소설 안에서 누락되고 있습니다. 비록 이야기에 등장하는 분량이 적더라도, 설정된 미래와 현재의 사이 존재하는 연속적 시간을 상상해보는 것은 빈틈없는 소설 쓰기에 필수입니다. 독자들은 그 작업이 되었는지를 직감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워프 스테이션의 작동 방식에 대한 보강과 배경의 공간을 촘촘히 메우는 작업이 동반된다면 충분히 독자를 과학적 상상으로 끌어들이는, 흡인력 있는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짧지만 흥미로운 내용 잘 읽었습니다.

박낙타, 〈수행자들〉 
미스터리한 숲속에서 눈을 뜬 사람들. 알 수 없는 암호를 왼쪽 엉덩이에 새긴 채 그들은 운명처럼 서로를 만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단하라는 미지의 지령을 받은 그들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서로를 예수의 제자로 부르는 설정과 그들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흥미로운 의문들이 이 수수께끼 같은 모험을 독자들이 지치지 않고 함께하도록 돕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지령을 주었는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지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단계적으로 단서를 얻어가는 그들의 행보가 마치 미션을 해결해야 하는 게임처럼 보이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스스로 ‘제자들’로 명명한 수행자들이 동굴에 들어가 비로소 ‘예수’의 실체를 알게 될 것이라 짐작되는 장면에서 중단되고 맙니다. 작가의 의도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의 모험에서 절정을 이룰 동굴 속 탐험이 완결되지 않고 끝나는 결말은 갑작스럽습니다. 인물들이 당면한 상황이 신비롭고 비밀스러우면서 조금은 환상적이기에, 그리고 예수의 열두 제자가 펼쳐가는 소설의 진행이 꽤 탄탄하고 즐거우며 완성도 있기에 독자는 그의 걸맞는 충격적이고도 타당한 결말을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전개부에서 위기와 절정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맺어지는 이 서사는 분명히 미완입니다. 열린 결말과 미완의 소설은 다릅니다. 열린 결말은 독자에게 다방면으로 충분히 활용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결론의 선택지를 주고, 그 안에서 작가가 설정한 복선과 예고가 완성될 충분한 여지를 둔 채 이야기를 맺는 것입니다.

제가 이 소설을 미완이라고 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가장 중요하게 해결되어야 할 여러 가지 큰 의문이 서사 내에서 전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들에게 이 일을 지시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처단하는 행위는 이 소설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처럼 이야기의 주된 의미를 형성해야 하는 장면들이 전혀 답을 찾지 못한 채 수행자들이 동굴로 진입하는 장면에서 종결되는 이 단편을 완성도의 면에서 평가하기에는 어려울 듯합니다. 앞서 박낙타 작가가 창작 게시판을 통해 도전적으로 선보인 몇몇 단편의 우수한 완성도를 참고하였을 때, 이 소설 또한 충분한 숙고를 거친다면 합당한 결말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꿈꾸는작가, 〈2054년〉 
〈2054년〉은 약 20년 후의 미래 모습을 작가 스스로 상상해 쓴 연작 엽편의 모음입니다. 흉악범을 집단 수용하는 ‘희망의 섬‘이나 로봇의 상용화로 일자리를 잃는 외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용한 정치인들까지 다양한 시각으로 미래의 모습을 조망하고자 한 시도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굳이 배경을 2054년으로 하지 않아도 좋았을 정도로 현재를 답습합니다. 미래상으로 해석할 만한 장면은 ’희망의 섬‘ 둘레에 로봇 경찰을 배치하거나 출생률이 곤두박질친 등의 관습적이고도 단편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그 외에는 지금 2023년의 한국에 벌어져도 크게 이질감 없는 상황과 사건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꿈꾸는작가 님께 권해드리고 싶은 것은 독자가 읽었을 때 정말 새로움을 느낄 만한 2054년의 장면을 추려보는 작업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참고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2000년대에 가장 두드러졌던 신기술의 등장은 아이폰과 갤럭시 첫 세대의 등장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0년 뒤인 지금, 스마트폰은 누구도 떼어놓지 못하는 장비가 되었습니다. 20년의 시간은 짧게 보이기도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 대중화되거나 모두의 이목을 끌던 것이 구시대적으로 바뀌기에 충분한 기간이기도 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시어 좀 더 자유로운 새로움을 지닌, 극단적이고도 예측 가능한 미래상을 창조해 보시길 바랍니다.

덧붙여 이 새로운 미래의 모든 사건이 정치적 음모론이라는 결말은 독자에게 크게 공감되지 않습니다. 만약 한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정치적 배후를 설정하고 싶으시다면, 좀 더 구체적이고도 독자의 이목을 끄는 사회적 사건이 하나 정도는 등장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로서는 정치적 배후가 조종해서 크게 이익을 볼 만한 일이 서사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한 〈2054년〉이라는 제목을 고려할 때 이 소설은 갑작스러운 정치적 세력을 등장시키기보다는 2054년의 사회에 비추어 현재를 반추할 수 있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에 적합합니다. 여러 시도가 이루어진 단편인 만큼 분리하거나 삭제할 수 있는 내용은 과감히 덜어내어 깔끔하고도 단정한, 그러나 환상적인 미래의 이야기가 탄생하기를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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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꾸는작가 23.11.14 22:33 댓글

    상세한 분석과 비평 감사합니다.

  • hummchi 23.11.17 16:09 댓글

    영광입니다. 비평 감사합니다. 매번 이런 비평을 받을 수 있어 글 쓰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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