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기차여행

2008.12.08 16:5612.08

aomezase@naver.com-기차여행

1.  

학교 앞은 하교하는 초등학생들로 혼잡했다. 정호는 하교하는 아이들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담배를 물었다.

“빌어먹을 꼬맹이. 왜 안나오는거야.”

그는 투덜거리며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수첩을 잠시 뒤적인 정호는 수첩 사이에서 꼬깃꼬깃한 종이와 사진 한 장을 꺼 냈다.

“신수미. 나이 9세 한정식품의 사장 신정수의 막내딸이며 뛰어난 지능과 재능으로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 있음. 작년, 중학생까지 출전하는 과학, 수학경시대회에서 상을 휩쓴 경력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바가 있는 천재 소녀...라. 그래봐야 애새끼지...”

종이에 적혀있는 아이의 프로필과 사진을 다시 한 번 눈으로 확인한 정호는 사진과 종이를 수첩에 다시 끼운 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제기랄. 이런 짓 까진 안하려 했는데. 이게 전부 그 신정수, 그 사장놈 때문이야. 일 잘하는 멀쩡한 놈의 목을 막 쳐대니까 나 같은 사람이 생기는 거 아냐. 나이 40 다 되어서 모가지 날아가면 퇴직금이 무슨 소용이야.”

피던 담배를 발치에 던져 밟아 끈 정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자리를 옮겼다. 한자리에 너무 오래 있으면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리를 옮기고 10분 가량이 다시 흘렀다.

“안녕 잘가!”

인사를 주고 받으며 헤어지는 초등학생들 한 무리를 쳐다보던 정호는 눈을 번쩍 떴다.

“신수미. 찾았다.”

사진만으로는 불안해, 아침나절 소녀의 등굣길을 확인하는 김에 옷차림까지 기억해둔 정호였다. 옅은 분홍 원피스, 신수미라는 소녀가 틀림없었다.

그는 아이의 뒤를 느긋이 밟았다. 등굣길과 하굣길이 같다는 전제 하에 인적이 드문 몇 군데를 점찍어 놓았다. 이젠 인적이 없는 곳을 골라 아이를 잡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차림새를 살펴 보았다. 수염은 깨끗하게 깎았다. 머리도 단정하게 정리했다. 옷차림 역시 어제 세탁소에서 찾아온 단벌 양복 덕에 제법 때깔이 났다. 이만하면 어딜 가도 수상한 인물로 보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좋아. 여기서 하자.”

마침내 인적이 없는 골목길에 소녀가 들어섰다. 만에 하나라도 다른 사람이 골목으로 들어선다면 소녀를 자연스럽게 지나친 뒤 미리 봐 둔 장소로 가서 기다린다는 작전을 세운 그는 소녀를 향해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소녀의 바로 뒤 까지 다가갔다. 책에 집중해 있던 소녀가 그제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됐다!!!’

준비해 둔 클로로포름에 적신 손수건으로 아이의 코와 입을 재빨리 막았다. TV나 비디오에서 본 것을 흉내 낸 것이라 잘 될지 긴장하고 있던 정현은 잠시 발버둥 치던 아이가 이내 축 늘어지자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주위를 조심스레 살피며 아이를 등에 업고는 큰 도로로 나갔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누가 봐도 자고 있는 딸을 업고 가는 아빠로 보일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그렇게 봐 주리라 믿었다.

대로에서 택시를 잡아 부산역에 도착한 정호는 미리 예매해 둔 서울행 무궁화호 열차표 여섯장을 받아들었다. 여섯장이나 끊은 이유는 만의 하나 있을지 모르는 트러블에 대비해 앞과 옆 좌석을 비우기 위해서, KTX가 아닌 무궁화를 끊은 이유는 금전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정호에게 KTX 티켓 여섯장의 대금, 즉 30만원에 육박하는 표값은 무척 부담스러웠다.

‘이제 서울에 가기만 하면 돼. 창수 녀석이 차를 갖고 서울역에서 기다릴거라고 했으니... 근데 이건 완전히 나만 욕보는 거 아냐. 그러면서 죽어도 5:5라고... 개자식. 애초에 지가 차를 갖고 부산에 내려 왔으면 일이 훨씬 수월할거 아냐. 유괴한 애를 업고 기차까지 타다니... 왜 이런짓을 해야 한담... 젠장, 내가 면허가 없는게 죄다. 죄. 이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먹는거 아냐.

여하튼 기차만 타면 자신의 계획에 있어 가장 힘든 부분은 무사히 넘기는 셈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기차가 마침내 도착하고, 정호는 소녀를 업고 기차에 올라 탔다.

2.

좌석을 예약할 때 다소 소란이 일어도 괜찮도록 일부러 객실의 맨 뒤쪽의 네칸과 앞쪽 두칸을 모두 예매 해 둔 정호였다. 앞과 옆의 공간을 비워둔 정호는 이정도면 소녀가 깨어나 약간 큰 목소리를 내더라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으음...”

옆자리에서 수미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정호는 풍경에서 시선을 떼고 소녀쪽으로 눈을 돌렸다. 소녀가 눈을 깜빡이며 일어나려고 애 쓰고 있었다. 잠시 후 완전히 정신을 차린 소녀는 멍하게 주위를 둘러 보았다.

정호는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과도와는 차원이 다른 난폭함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나이프, 그는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며 나이프를 소녀의 손에 살며시 얹었다.

“꼬맹아. 똑똑한 녀석이니 아저씨가 하는 말 잘 알아 들으리라 믿는다. 아저씨는 지금 널 유괴한 거란다.”

소녀의 눈이 커졌다.

“유괴가 뭔지 알지?”

끄덕끄덕.

“아저씨 말 잘 들으면 금방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하지만 말 안 듣고 도망가거나 울거나 다른사람한테 아저씨 이야기하거나 하면 아저씨가 이 칼로 수미를... 알지? 뉴스 같은데서 본적 있지?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유괴한 아이를 어떻게 하는지.”

끄덕끄덕.

“착하구나. 수미. 이 아저씨는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러니까 얌전히 있기만 하면 돼. 아참. 네 휴대폰은 버렸으니 쓸데 없는 생각하면 혼난다.”

소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호는 제일 걱정스러웠던 부분이 무난히 넘어가자 안도했다. 만약 여기서 아이가 패닉에 빠져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짙었다. 최악의 경우 소녀를 죽일 각오까지 하고 있던 그였기에 소녀의 얌전하고 침착한 태도에 적이 안심했다.

‘애새끼 답지 않군.’

소녀는 근 한 시간 가량을 좌석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바란 것이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가만히 있는 소녀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때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보였다.

‘뭐, 상관없나. 여튼 조용히만 있어주면 돼.’

정호는 긴장을 풀고 다시 창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3.  

“아저씨,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건가요?”

한시간 가량을 침묵에 빠져 있던 소녀의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그건 왜?”

“학교에서 내 주는 이달의 숙제라는게 있어요. 학교에서 한달에 한번씩 나오는 숙제인데, 이번달은 기행문 쓰기거든요. 그래서...”

정호는 기가 막혔다. 묘하게 침착한가 싶더니, 이 애새끼는 무슨생각을 하는건가. 지금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원...

“이게 여행이냐? 아저씨 놀리는 거면 아저씨 화낸다.”

정호가 살며시 나이프를 꺼내 소녀에게 보였다. 소녀가 침을 꿀걱 삼키며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고는 정호는 만족했다.

소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저씨는 우리 아빠가 싫어서 저를 데려오신거죠?”

정호는 깜짝 놀라 소녀를 노려봤다. 정호의 시선에 소녀가 움찔하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 얼굴을 알아요. 아빠따라서 공장 견학을 할때 본적이 있어요.”

“...잘 아는구나. 그래. 전부 네 아빠 때문이야. 네 아빠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날 잘라버렸어. 이 나이에 해고를 당하면 내가 뭘 할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네 아빠에게 나쁜짓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걸 알려주려고 너를 데려 온거야.”

그래. 내가 하는 일은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어. 부당하게 해고된 다른 모든 녀석들을 대신해서 행하는 용기있고 정의로운 행동인거야.

“그럼 아저씨는 아빠가 싫은거군요.”

“그래. 정말 싫다.”

“저도 그래요.”

“...뭐?”

“저도 아빠가 무척이나 싫다구요. 재수없는걸요.”

창가로 얼굴을 돌리고 있던 정호는 소녀의 뜻밖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빠는 집에 있으면 무척이나 시끄러워요. 이거 하지마라, 저거 하지마라. 이거해라. 저거해라. 엄마도 그렇지만요.”

“그...그래?”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집에 있으면 숨이 막히는걸요.”

아이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라 잠시 당황했던 정호는 아이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적의를 갖고 있을거라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 뜻밖에 자신과 의견을 같이 한다는 사실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것이 10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녀라도 말이다.“

“네가 뭘 좀 아는구나. 사실은 이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야. 너를 이렇게 데리고 가긴 하지만, 너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조금도 없어.”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데리고 나오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한달 내내 여행같은건 꿈도 못 꿨을 거에요. 기행문 숙제도 제대로 못했을거구요.”

“그럼. 그럼. 아저씨 말만 잘 들으면 이 아저씨가 서울 구경 많이 시켜주마. 동대문도 가 보구. 청계천도 가보구 말이야.”

소녀가 기쁜듯이 웃었다.

“아저씨쪽이 아빠였으면 차라리 좋을텐데.”

정호는 소녀가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소녀를 향해 마주 웃었다.

‘귀여운 녀석이지 않은가.’

4.

“아저씨 멀미나요...”

이런 저런 대화를 주고 받으며 한시간만에 무척이나 친해진 소녀가 문득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멀미?”

“물좀 마시고 싶은데... 물좀 주세요.”

음료를 가득 실은 카트가 5분전 쯤에 수미 갔던것을 기억한 정호는 입맛을 다셨다.

“좀있다가 음료카트가 돌아오면 그때 쥬스라도 사줄게. 그때까지 참을수 있지?”

소녀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토할것 같아요. 객실 바깥쪽에 물자판기 있던데, 물 하나 뽑아주시면 안되나요?”

정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녀가 자칫 토하기라도 한다면 주위의 시선을 끌 염려가 있었다. 게다가 모처럼 호감을 가진 소녀가 그런 일로 자신에 대한 호감을 버리게 되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를 혼자 보내거나, 자신이 혼자 나가서 소녀를 홀로 두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생길 소지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아저씨랑 같이 나가자. 아저씨가 물 뽑아서 줄게.”

소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좌우를 신기하다는 듯이 두리번 거리며 통로를 걸어가는 소녀를 보며, 정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소녀의 시선이 가는 곳을 일일이 확인했다. 옹알거리는 아이. 햄버거를 먹는 아가씨. 잠을자는 샐러리맨... 수상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기차를 많이 못타봤나 보구나.”

“네. 무궁화호는 거의 못타봤어요.”

나름 큰 기업 사장의 영애이다. 그럴 만 했다.

“자 여기 물.”

자판기에서 뽑아준 물병의 뚜껑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애써 따려 하는 모습에 정호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역시 귀여운 소녀였다.

“내가 따주마.”

“네. 고마워요 아저씨.”

아이가 방긋 웃음을 지었다.

4.  

물을 마시고 얼마 있지 않아 대구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속을 진정시키려는 듯 눈을 감고 있던 소녀가 정호를 돌아보았다.

“아저씨, 저...”

“왜?”

“저...”

“...혹시 화장실?”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상관없겠지.“

조금 전 물을 뽑던 자판기 옆쪽에 화장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 정호는 소녀를 데리고 일어섰다.

“자, 가자.”

여전히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며 좌우를 살피며 화장실을 향하던 소녀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만의 하나를 대비해 소녀를 앞세워 통로를 걸어가던 정호는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왜그래?”

“아저씨, 경찰한테 걸리면 안되죠?”

정호는 바짝 긴장했다. 이애가 갑자기 무슨말을 하는건가.

“저기 뒤에 저사람들 경찰 아닐까요. 저희 옆자리의 앞자리에 앉아있는 저 사람들. 아까전부터 아저씨를 계속 보고 있어요.”

정호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애를 쓰며 소녀가 말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 둘이서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경찰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한동안 두 남자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정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었다. 어떻게 알고 경찰이 여기에 탄단 말인가. 어린애의 망상일 뿐이었다.---

“경찰이 아니야. 빨리 화장실로 가거라.”

“그런가요? 다행이에요.”

다행히 화장실은 비어 있었다. 소녀는 급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른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옆에 기대 서 있던 정호는 1분이 넘도록 소녀가 나오지 않자 초조해 졌다.

똑똑똑.

화장실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나갈게요. 잠깐만요.”

30초 정도가 더 흐르고 겨우 소녀가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죄송해요... 긴장을 해서...”

정호는 자신의 아량을 보여주려는 듯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괜찮아. 신경쓰지마. 이제 자리로 돌아가자.”

“네.”

5.  

꽤나 즐거운 여행이었다. 자신이 유괴범이고 소녀가 인질이라는 걸 잊을 정도로 말이다. 소녀는 9살이라고는 믿을수 없을 정도로 즐거운 이야기 상대였다. 덤으로 잘 웃고 귀여운데다 비위까지 맞출 줄을 알았다. 정호는 문득 언젠가 TV에서 인질범과 인질 사이에서 싹트는 신뢰관계라는 것이 있다고 한 것을 기억했다. 저 소녀가 내게 호감을 갖는 것도 그런 것일까. 정호는 유쾌한 기분에 휩싸였다.




잠시후 인천, 인천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벌써 인천역인가... 조금만 있음 서울이로군.”

“아저씨, 서울 가면 어디어디에 갈건가요?”

“우선 역에 도착하면 아저씨 친구를 만날 거야. 그리고 친구 집에 간 뒤에 네 아빠랑 전화를 할거야. 네가 싫어하는 아빠한테 벌을 줘야지.”

“그럼 에버랜드나 롯데월드 같은 곳은 안 가는 건가요?”

“아냐, 아냐. 갈 수 있어. 네 아빠랑 전화통화만 잘 되면 에버랜드든, 롯데월드든 어디든 데려다 주마. 걱정하지 마라.”

“아저씨. 고마워요”

소녀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정호의 팔에 매달렸다. 그런 소녀의 모습은 정호에게 이런저런 공상을 불러 일으켰다.

‘나도 이런 딸이 있으면 좋을텐데... 아니, 딸 삼으면 되잖아. 돈을 뜯어낸 다음, 외국으로 애를 데리고 튀는거야. 애도 부모가 싫은 듯 하니, 내가 키우면 되잖아? 그럼 놀이동산이든 어디든 맘껏 데리고 가 줄수 있을테고 말이야... 좋아. 그렇게 하자.’

6.

소녀와의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소녀의 아빠와 엄마 이야기였다. 그중 소녀의 부친의 이야기는 거의가 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화제라고는 소녀의 부친 뿐이었던 것이다.

“집에서는 잘 씻지도 않는다고 엄마가 막 그랬어요. 심심하면 엄마나 저한테 막 손찌검 하구...”

“그럴 줄 알았어.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아저씨 같이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함부로 자르거나 하지 않는 법이야. 공장에서 일할 때 아저씨 친구들도 모였다 하면 네 아빠 욕을 했단다.”

“원래 아빠는 싫었지만 아저씨 말대로라면 아빠는 정말 나쁜사람이었군요. 차라리 아저씨가 우리 아빠 하는게 어때요?”

“하하핫. 그럴까.”

소녀가 입을 가리고는 갑자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정현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에 소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니? 또 속이 안 좋은거야?”

“아뇨. 괜찮아요.”

정현은 자신이 뭔가 말이라도 실수한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당황했다. 이 귀여운 소녀에게 미움 받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행히 고개를 돌리고 있던 소녀가 다시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정호는 안심했다.

“잠시후 서울, 서울역에 도착...”

서울역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안내방송을 들은 정호는 벽걸이에 걸어놓은 겉옷을 걸쳤다. 비교적 따뜻한 날씨였지만, 서울에 들어선 지금부터가 중요하다는 긴장감이 그의 체온을 낮추고 있었다.

“저기 아저씨. 나 화장실좀...”

“또? 이번에 가면 벌써 네 번째야. 벌써 서울역에 들어왔으니 내려서 가면 안 돼?”

“못 참을 것 같아요. 아저씨. 제발...”

정호는 한숨을 내 쉬며 일어섰다. 소녀가 방긋 웃으며 정현의 팔에 매달렸다.

“사실 아까 전에 화장실 갔을 땐 못 눴어요. 정말 급했었는데 막상 누려니 안 나와서...”

“어쩔 수 없지 뭐. 그게 생리 현상이란 건 원래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잖니.”

소녀가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정호를 바라보았다. 쑥스러워진 정호는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자. 빨리 가자.”

“네.”

화장실에서 나온 소녀와 함께 기차에서 내린 정호는 사전에 약속해둔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료가 서울역으로 마중 나와 있는 것을 확인한 정호는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소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계단을 올라 개찰구로 향했다. 개찰구 건너편에서 손을 살짝 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동료가 눈에 들어오자 정호는 적이 안심했다. 위험한 다리는 이제 다 건넌 셈이다. 이제 동료의 차를 타고 사전에 마련된 안가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정호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며 개찰구를 통과해 동료에게 다가갔다.

“별일 없어?”

“별일 있을게 뭐 있냐. 얘야? 예쁘장하게 생겼네.”

동료는 정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소녀를 흘낏 보며 말했다.

“아저씨 친구에요?”

“응? 응. 아저씨 친구. 이제부터 이 아저씨 차타고 갈 거야. 가는 길에 이것저것 구경시켜 줄게.”

동료가 정호를 뜨악하게 바라보았다.

“뭔 소리 하냐.”

“시끄러. 어차피 가는 길이 잖냐. 좀 돌아서 가면 어때.”

“뭔 소리 하는 거야. 빨리 움직여야 할 것 아냐.”

“그 정돈 괜찮아.”

“야. 어디 아프냐? 왠 헛소리야.”

그때 소녀가 둘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싸우지들 마요. 전 구경 같은 거 안 해도 괜찮아요.”

“아냐. 숙제 있다며, 여기저기 구경을 해야 쓸 거리가 나오지.”

“괜찮아요 충분히 재미있었는걸요. 쓸거리도 충분하구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6섯시간 동안 기차를 탄 것뿐이잖아? 구경하나 안 해 놓고서는 쓸게 어디있어?”

“곰이 있었어요. 재주부리는 곰이.”

“곰?”

“헛소리들 하지 말고, 좌우지간 빨리 가자. 애 잘 감시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호의 동료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정호가 소녀에게 손짓을 하자 소녀가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얏.”

순간 소녀가 작은 비명과 함께 넘어졌다. 정호와 그의 동료가 동시에 소녀를 돌아봤다.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소녀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어나 원피스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는 정호를 향해 싱긋 웃음을 던지며 가운데 손가락을 불쑥 내밀었다.

“?”

이해 못할 소녀의 행동에 당황하는 정호를 두고 소녀가 갑작스럽게 옆으로 내 달렸다. 한순간 멍 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호를 향해 뒤늦게 동료가 소리쳤다.

“이새끼야 뭐해! 잡어!”

동료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정호가 깜짝 놀라며 달아나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조금전 까지 자신을 향해 방싯방싯 웃고 있던 소녀였다 필시 장난기가 발동해 한번 해본 행동이리라. 그런게 틀림 없었다.

멍청히 달아나는 소녀를 바라보는 정호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동료가 소녀를 잡기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순간 몇몇의 건장한 남자들이 갑작스럽게 둘을 덮쳤다.

“뭐야! 뭐야 이 새끼들!!!”

한순간 에 팔을 꺾이고 땅에 쳐 박힌 동료가 눈에 들어왔다.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정호는 자신을 붙잡은 남자의 팔을 뿌리치고 서울역 입구를 향해 힘을 다해 내 달렸다.

‘어떻게 알고 경찰이? 어떻게? 어떻게?’

정호는 역의 입구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점차 가까워져 가는 역의 입구를 보며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다.

“조금만!”  

일단 서울역만 빠져 나가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정호는 다리에 힘을 불어 넣었다. 그렇게 입구를 빠져 나가는 순간, 입구 옆에서 마치 구경꾼 같이 서 있던 남자 두 명이 다시 정호에게 덮쳐들었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 미리 잠복하고 있던 경찰인듯 했다.

“컥”

반항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바닥에 쳐 박힌 정호는 꺾인 팔에 수갑이 채워지는 차가운 감촉에 그만 눈을 감았다. 다 끝난 것이다. 정호는 발버둥쳤다. 빠져나가려는 발버둥이 아닌 분한 마음을 풀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제길!! 어떻게 알고!!!”

“너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진술을 거부할....”

형사로 보이는 남자가 불러주는 미란다 원칙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이의 부모가 아이의 실종을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자신이 납치한 시간으로부터 서너시간은 족히 지난후일 것이다. 아이의 실종을 알게 되는 시점까지도 시간이 걸릴 것이고, 또한 그 실종을 바로 유괴나 납치로 연관 지을 수 있을 리도 없기 때문이었다. 설령 100보를 양보해 아이의 부모가 정호가 납치한 직후 신고를 하고, 경찰이 바로 사건을 유괴로 단정 짓는다고 해도, 이 시점에 경찰이 여기 잠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꼬리를 잡히는 것을 걱정해 기차표도 미리 현금으로 예매 해 뒀던 정호였다. 만약 자신이 범인이란 것을 어찌어찌 사전에 알았다고 해도, 정호가 아이를 데리고 기차를 타고 간다는 정보를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쉽게 정리를 하자면 결국 서울역에서 경찰이 잠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호에게 있어 절대 있을 수 없는 사태였던 것이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경찰에게 소리를 지르던 정호의 눈앞에 익숙한 스커트 자락이 보였다. 어느 샌가 소녀가 자신의 앞에 다가 와 있었다.

“수미야! 수미야! 이 아저씨들한테 뭔가 말 좀 해줘. 난 너한테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었다고 말이야. 너를 데리고 잠깐 여행을 한 것 뿐이라고 말이야. 너도 좋아했잖아. 그렇지? 수미야? 날 아빠 삼고 싶다고 했잖아. 이 아저씨들한테 우리가 얼마나 친한지를 알려줘!”

“.............”

문득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정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수미가 아무런 감정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수미야?”

수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친놈... 지랄하네.”

9살짜리 소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정호뿐만 아니라 주변의 형사까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소녀가 정호를 보며 방긋 웃었다. 경멸이 담긴 비웃음.

“너.. 너... 너!!!”

“왜 그렇게 놀라세요? 당연한 걸.”

정호는 형사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와 있었는지를 한순간에 이해했다. 저 소녀가 한 일이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저 계집애가 형사들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당신 참 머리가 나쁘군요. 꼭 동물원 원숭이 같았어요. 뭐 그래서 더 재밌었지만... ”

“너...너 내가 좋다고 그랬잖아... 아빠대신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랬잖아!”

“하...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납치 유괴하는 놈을 엄마 아빠보다 좋아해요? 병신 같으니라구.”

정현은 넋을 잃었다.

“머리가 있으면 상직적으로 생각을 좀 해봐요. 뭐 그런 머리가 없으니 이모양 이꼴이겠지만말이에요.”

“...이런, 빌어먹을 계집애가...”

“비위 맞추느라 속이 뒤집어졌지만... 뭐 동물원의 원숭이든 재주넘는 곰이든 구경하는데는 요금이 드는 법이니까... 여튼 맘에도 없는 말을 한다는 건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군요.”

할 말을 다 마쳤다는 듯 정호에게서 몸을 휙 돌린 소녀는 손을 흔들며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기행문 소재거리 고마워요. 아저씨. 그리고, 참고로 우리 아빠는 나한테 손찌검 따윈 안해. 바보, 멍청이. 병신. 공기 더럽히지 말고 나가 죽어버려.”

“...!!!”

턱이 덜덜덜 떨렸다. 뭔가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자신의 지식으로는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만한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한 탓에 정호는 말을 내 뱉지 못하고 있었다. 형사들의 손을 잡고는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9살짜리 소녀, 그런 소녀에게 능멸당한 자신. 난 정말 저 소녀에게 기행문의 소재거리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던가! 정호는 결국 말이 아닌 비명에 가까운 울부짖음을 내질렀다.

“우아아아악!!!”

7.  

정호는 자신을 취조하는 형사들에게 자신의 범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범행의 동기부터 잡힐 때까지의 과정을 말이다. 그로 인해 자신이 몇 년 형을 살게 되는 가는 관심 밖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 소녀가 어떻게 자신을 이꼴로 만들었는지 뿐이었다.

“형사님. 다 털어 놨지 않습니까. 제발 말씀좀 해 주쇼. 그 빌어먹을 계집애, 아니 그 애가 어떻게 했길래 제가 이꼴이 된 겁니까. 그 정도는 괜찮쟎습니까!”

그를 취조하던 형사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그에게 소리쳤다.

“그만좀 해라. 이 자식아. 그걸 알아서 뭐 할건데?”

“형사님도 거기서 들었잖습니까. 그 계집애가 하는 말을. 애 새끼한테 그런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혀깨물고 확 죽지 않고 이 자리 까지 온건 오로지 그걸 알고 싶어서 였단 말입니다.”

자리를 뜨려던 형사는 매달리다 시피 애원하는 정호를 보며 한숨을 내 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경찰들도 혀를 내 두른 소녀의 이야기를 정호에게 들려 주었다.

8.

정신을 차리자 마자 정호에게 위협을 받은 소녀는, 정호가 위협하는 대로 얌전히 있는 척 하며 깊이 생각에 잠겼다. 소녀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하나씩 머릿속으로 정리해 나갔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a. 자신은 유괴 당했다.

남자의 얼굴은 기억에 있다. 언젠가 아빠를 따라 견학한 공장중 하나에서 본 일 이 있는 얼굴이다. 최근 회사의 사정이 나빠져 상당한 규모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엄마와 아빠의 대화중에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b. 구조조정으로 인해 해고된 직원중 한 사람이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고, 혹은 돈을 띁어내기 위해 나를 납치했다.

돈을 띁어내기 위해서라면 자신에겐 다행스런 일이었다. 최소한 돈을 받을 때 까진 생명이 보장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원한을 푸는게 목적이라면 자신이 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c. 기차에 있는 동안, 자신이 얌전히 유괴범의 요구조건을 따른다면, 그쪽이 먼저 일을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d. 남자는 무기를 갖고 있다.

소녀의 자리는 창가석. 객실 모든 좌석이 차 있음에도 유괴범과 자신의 앞과 옆 좌석은 비어있다. 이 남자가 사전에 예매 해 둔 좌석일 가능성이 높았다. 현재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가령 도움을 요청할 만한 상황에 이른다고 해도, 남자가 날붙이를 가진 이상 섣부른 행동은 자신의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그러므로 일단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빠져나간다고 하는 것은 보류할 필요가 있다.

e. 자신의 손에는 핸드폰이 없었다. 유괴범이 제거한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침착하게 정리한 소녀는 일단 이후 방침을 정했다.

A. 최대한 비위를 맞춘다. 최대한 웃는다. 최대한 애교를 부린다. 자신이 어리고 철이 없다는 것을 부각한다.

일단 유괴범과 친해진다면 자신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행동반경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말로 잘 구슬리면 도움이 되는 다른 정보를 얻을수 있을 지도 모른다.

B. 친해지는 수단중 하나로 아빠를 이용한다. 아빠에 대한 원한으로 이런 짓을 한다면, 자신이 아빠의 흠을 내 보임으로서 유괴범과 공감대를 가질 수 있었다. 친해지는 수단으로는 이 이상 가는 것이 없을 것이 분명하다.

C. 유괴범이 핸드폰을 제거했다는 것은 반드시 단점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유괴범 자신의 손으로 제거한 핸드폰은 이제 유괴범의 안중 밖의 물건이 된 것이다. 어떤 수단으로든 핸드폰을 손에 넣는다면, 범인의 허를 찔러 외부와 연락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객실 내부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청할 수 없다고 결론을 지은 지금, 핸드폰을 손에 넣는 것 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 될 것이다.

유괴범의 비위를 맞춰가며 행선지를 확인한 소녀는 일단 휴대폰을 물색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휴대폰을 확보하는 데는 두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는, 휴대폰을 손에 넣는 모습을 유괴범에게 들키지 않을 것.

둘째는, 휴대폰의 원 주인에게 자신이 휴대폰을 들고 가는 모습을 들키지 말것.

원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할 시간 따위가 있을리 없었다. 결과적으로 원주인에게는 휴대폰을 들고가는 자신은 도둑일 뿐이다. 들킨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지. 그것으로 자신은 아웃이었다. 눈뜨고 멀쩡히 휴대폰을 도둑맞는 얼간이는 드물다. 그렇다면 잠든 사람을 노리자. 기차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휴대폰을 외부인의 손이 닿는 곳에 놓아두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두가지 조건모두가 부합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소녀는 물이 마시고 싶다는 핑계로 자신이 원하는 조건의 승객이 있는지를 찬찬히 살폈다.

‘있다!!!’

객실 문 근처 좌석에서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사람이 잠을 자고 있었다. 잠을 자기 위해 벗어서 무릎위에 접어 얹어놓은 재킷의 윗주머니에서 휴대폰의 스트랩이 삐져 나와 있는 것을 확인한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8.

휴대폰의 주인이 잠을 깨기 전에 휴대폰을 손에 넣어야 했다. 아빠를 도매급으로 팔아 넘긴 덕에 유괴범과의 관계는 꽤나 호전되어 있었다. 소녀는 다시 한번 휴대폰의 주인에게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저씨, 저...”

“왜?”

“저...”

“...혹시 화장실?”

얼굴을 붉히는 소녀에게 남자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그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소녀는 천천히 객실 통로로 나섰다. 남자가 그 뒤를 따랐다.

‘앞서서 걸어 가 주기를 바랬지만... 어쩔수 없나. 일단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소녀는 휴대폰의 주인이 여전히 자고 있음을 보고 안심했다. 운이 따라주고 있었다. 마지막일지 모르는 기회를 차 버려서는 안된다. 소녀는 휴대폰이 있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왜 그래?”

“아저씨, 경찰한테 걸리면 안되죠?”

움찔하는 남자를 보며 소녀는 말을 이었다.

“저기 뒤에 저사람들 경찰 아닐까요. 저희 옆자리의 앞자리에 앉아있는 저 사람들. 아까전부터 아저씨를 계속 보고 있어요.”

남자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회를 보던 소녀는 재빨리 재킷의 윗주머니 밖으로 보이는 스트랩을 잡아 당겼다. 옷이 조금 흘러 내리며 휴대폰이 빠져나왔다.

휴대폰을 서둘러 스커트의 주머니에 집어 넣은 소녀는 고개를 돌려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는 여전히 자신이 경찰로 지목한 남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소녀의 입에서 작은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이윽고 고개를 돌린 남자가 조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경찰이 아니야. 빨리 화장실로 가거라.”

“그런가요? 다행이에요.”

화장실로 가자마자 소녀는 좌변기에 앉아 휴대폰을 조작했다. 통화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문자를 보내야 한다. 버튼음을 비롯한 각종 효과음을 무음으로 돌린 소녀는 자신의 부모를 비롯한 몇몇 고용인의 전화번호를 입력한 뒤 문자메세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저 수미. 유괴범에게 납치. 부산역 출발 서울역도착 무궁화호에 있음. 5:30 현재 대구역. 경찰, 서울역 대기.’

120자로 한정되어 있는 문자에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담아낸 수미는 문자를 보냈다. 유괴범의 이름을 들어놓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휴대폰을 끄고 쓰레기통에 버리려던 소녀는 문득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화장실을 한번만 올 필요는 없어. 올 때마다 연락을 할 수 있다면...’

똑똑똑.

“금방 나갈게요. 잠깐만요.”

빨리 나오기를 재촉하는 남자의 노크소리에 소녀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소녀는 휴대폰의 수신벨과 문자수신 효과음을 무음으로 돌렸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알람 역시 모두 확인해 해지해 두었다. 그리고는 화장실 휴지통에 휴대폰을 던져 넣었다. 소녀는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더럽긴 하지만, 그런만큼 이런곳에 손을 넣어 보는 사람은 없겠지. 숨길 장소로는 안성 맞춤이야. 이렇게만 해 놓으면 화장실에 올 때 마다 연락을 할 수 있어.

밖으로 나온 소녀는 남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살짝 웃었다.

“죄송해요... 긴장을 해서...”

9.

서울역에 도착 할 때 까지 소녀는 두 번을 더 연락할 수 있었다.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유괴범의 비위를 맞춰 호감을 산 덕에 남자는 감시를 제외하고는 소녀의 행동에 그다지 제약을 두지 않았다.

열차가 서울역에 들어설 즈음 소녀는 마지막으로 화장실에서 문자를 보냈다.

‘서울역 도착 중. 서울역에서 공범과 조우예정, 공범과 만난 후 넘어지는 것이 신호. 체포.’

화장실에서 나온 소녀는 문앞에서 기다리는 남자를 향해 방긋 웃었다. 이제껏 지었던 웃음과 모양은 같지만 내용은 다른, 희열이 가득한 웃음을 말이다.

‘즐거운 여행이었어. 아저씨. 덕분에 기행문 소재거리는 충분해. 이젠 됐으니... 죽어버려.’

10.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정호는 할말을 잃었다. 자신이 한 행동이 죄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소녀의 행위는 그것과는 또 다른 의미로 잔혹하고 가증스러웠다.

“9살짜리 어린애한테 이렇게 우롱을 당하다니... 이 빌어먹을 꼬맹이... 지금은 이렇게 넘어가지만, 석방후에 반드시 죽여버릴테다...”

정호는 너무나 분한 나머지 눈앞에 있는 사람이 형사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런 정호의 혼잣말을 듣던 형사는 정호를 향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임마. 너한테 걸린 혐의가 뭔지나 알아? 유아 납치, 폭행, 살인미수, 강간미수야. 요즘같은 시대에 애들한테 손대면 어떻게 되는지나 알고 있어? 석방? 평생 꿈도 꾸지마라.”

정호는 눈을 치 떴다. 납치까지는 알아도 폭행, 살인미수라니? 거기다 강간 미수? 기가 막힌 나머지 정호는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형사양반! 애를 납치한건 사실이지만, 난 애를 때린적도, 죽이려 든 적도, 강간하려 한 적도 없어!”

“애가 직접 그렇게 증언했어. 설사 네가 말한게 사실이라고 해도, 애가 그렇게 증언한 이상 재판에서는 못 이겨. 네편은 아무도 없어. 쉽게 말해서, 다 끝났어.”

너무나 큰 충격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떨고 있는 정호를 남겨두고 형사는 취조실을 떠났다.

절망과 분노에 찬 비명소리가 취조실 가득 울려 퍼졌다.

aomezase@naver.com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가작 비엔나 2008.12.08
가작 담배 2008.12.08
가작 기차여행 2008.12.08
가작 쥐를 잡아! 2008.12.0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12월 6일에 발표합니다. 2008.11.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4 2008.10.31
가작 어느날 갑자기 2008.10.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4 2008.10.05
우수작 신본격 추리 역사물 : 토끼 간 실종사건1 2008.10.05
가작 지성수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2008.10.05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10월 5일에 발표합니다. 2008.09.26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7 2008.09.06
우수작 치료는 하지 않습니다 2008.09.06
가작 유체이탈 2008.09.06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2008.08.29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1 2008.07.26
우수작 인형 야상곡2 2008.07.26
가작 나의 작고 어여쁜 인형 2008.07.26
가작 캄보디아인 어린 아내 2008.07.26
가작 유시걸식 행운보존법에 대하여2 2008.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