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어느날 갑자기

2008.10.31 23:4810.31

지희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 망할 년! 당장 김사장 바꾸지 못해?"
전화기 속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지희는 당황했지만 예의 바르게 대꾸했다.  
" 실례지만.. 전화를 몇 번으로 거셨나요?"
" 허, 이것 봐? 야. 좋을 말 할 때 니 옆에 있는 김사장 바꾸란 말야. 똥갈보년아!"
" 정말 죄송합니다만 아무래도 전화를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 이년이 이제 수작이네? 그래, 김사장 잡기 전에 네 년 면상 좀 보자. 썩을 년아, 네 어미는 어떤 년이길래 지 딸년 가랑이 벌리는 걸 못 막아? 너 그렇게 살면 천벌 받아. 남의 남편 함부로 넘보는 게 아니지!"
" 저런,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어요. 그런데 전화를 잘못 거신 것 같아요. "
" 뭐? 전화를 잘못 걸어? 이년이 이젠 시치미까지 떼네? 010-8765-7508맞잖아, 처 죽일 년아!"
" 이를 어째. 제 번호는 010-8765-7503인데요.. "
" 뭐? .......... "
전화가 끊겼다. 액정화면에는 상대편의 발신번호가 떠 있었다. 지희는 심호흡 한 번 하고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목구멍에 잔뜩 모래가 걸린듯한 목소리가 받았다. 목소리는 한바탕 악다구니를 써댄 탓인지 기운이 빠져있었다.
"저, 아까 전화 잘못 거셨던, 그 전화 받았던 사람인데요."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남편이 바람이 나셨나 봐요. 저런..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어요.  저도 아버지가 바람이 나셔서.. 그런 거 잘 알아요. 지금 얼마나 힘드신지.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없을까요?"  
전화기 너머로 여자가 조금씩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옥탑방을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디디려는데 주인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 여자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지희는 몸을 돌려 대문 밖으로 나갔다. 태반이 꺼져 있는 가로등 말고는 골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남편이 저번에 와서 뭐라는 줄 알아? 그렇게 관리를 안 하니까 남자가 바람이 나는 거래..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학생? "
"에고.. 아주머니 탓이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걱정 마시고 일단 행복한 꿈이라도 꾸세요. 행복한 생각을 하면 행복한 일이 생기니까요."
  그 때 머리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지희는 핸드폰을 쥔 왼손에 힘을 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파마머리에 덩치 큰 여자가 있었다. 여자의 왼쪽 눈가는 붉었다. 그리고 여자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여자가 다시 망치를 내려쳤다. 지희는 정신을 잃어가면서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자의 눈가가 왜 붉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지희는 바다에 있었다. 잔잔한 물결이 몇 번 지나는가 싶더니 강력한 물굽이 지희의 머리를 후려쳤다. 짭짤함도 느껴졌고 울렁거리는 것도 느껴졌다. 파도가 올 때마다 고통이 느껴졌다. 간간히 말소리와 이상한 소리도 들렸다. 차라리 큰 거 몇 번만 맞고 끝나려면 좋으련만 파도는 끝없이 이어졌다. 화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싶었지만 팔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 때 멀리서 큰 파도가 보였다. 크다, 크다! 강렬한 고통이 지희를 사로잡자 지희는 눈이 번쩍 뜨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몇 번 깜빡여봤자 변한 것은 없었다. 두통만 심해져 지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두통이 심상치 않아서 머리가 괜찮은지 지희는 만져보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결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목과 발목 모두가 거친 것으로 결박되어 있었다. 손목을 돌려보았지만 아프기만 했다. 지희는 소리를 질렀지만 나오는 것은 갈라진 여자의 목소리와 목구멍에서 나는 피 맛 이었다. 소리를 지른 지 몇 분이 지났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그 때, 지희의 눈에 한 줄기 빛이 보였다. 문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고 있었다. 지희는 엉덩이로 기어가 가는 틈새에 눈을 가져다 댔다. 아이들 웃음소리였다.  지희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변하는 건 없었다. 지희는 소리 지르기를 그만두고 손가락을 움직여서 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틈새가 너무 얇았다. 지희는 혀를 가져다 댔다. 왠지 피 맛이 나서 그만 두고 말았다. 어느새 눈이 적응되고 얇은 빛 사이로 공간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 곳은 2평 가량 되는 직사각형의 방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답답한 마음에 지희는 발로 문을 쾅쾅 쳤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생각하자 한지희. 아까 무슨 일이었지? 불쌍한 아주머니와 전화를 하고 있었어.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지? 기억나지 않았다. 별안간 엄습하는 두통에 이를 앙다물 뿐이었다. 아냐, 생각해야 해. 무슨 일이지? 그래. 붉은 여자. 그 여자가 망치로 내 머리를 친 거야. 하지만 왜?
생각이 막혔다. 누군가 자기의 머리를 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지희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다. 지희는 밝게 웃었고, 연락을 씹지 않는 사람이었고 무거운 짐이 있으면 빼앗아 드는 사람이다. 지희의 지인들은 그녀의 생일을 까먹었지만 그녀는 어떤 이의 생일도 까먹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만나게 된 친구의 친구라도 생일을 기억했다가 문자를 보내곤 했다. 더치페이를 할 때 딱 돈이 안 떨어지면 자기가 더 많이 내는 사람이다. 혼자 밥 먹기 싫어 매일 후배의 밥을 사주는 사람이다. 후배가 좋아하는 것이면 아무거나 먹는 사람이다. 지하철 잡상인의 물건을 꼭 사는 사람이고 지하도의 걸인에게 100원이라도 놓고 가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이런 점을 이용하는 사람은 꽤 많았다. 그녀의 3번째 남자친구가 자신의 월급 200만원을 떼어먹은 뒤 그녀는 한 달 내내 라면으로 버텨야 했다. 그 와중에 지희는 남자친구가 라면이라도 먹고 있을지 걱정하고 했다. 어떤 친구는 지희에게 말했다. "너 이렇게 착해서 어떻게 세상을 사니?" 지희는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내려칠 정도로 악의를 품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여자는 왜? 다른 이유가 있다.
  지희는 애써 두통을 참아가며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지? 얼굴이 큰 편이었어. 파마머리인 덕에 얼굴이 더욱 커 보였지. 눈가가.. 그래 눈가가 붉었고. 왜 눈가가 붉었을까? 알레르기? 알레르기는 꽤나 고생일 텐데. 누구한테 맞았나? 남편이 폭력을 쓰나? 하여간 예쁜 편은 아니었지. 아, 외모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는데 왠지 보기 싫다는 인상이었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눈동자. 여자의 눈동자는 흐리멍텅했다. 그런 눈동자를 어디서 봤지? 맞아. 지난 번 마약중독자 재활을 돕는 자원봉사 때 본 눈동자였다. 초점이 맞지 않고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던 눈. 여자가 약을 구하려고 지희를 납치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해서 범죄까지 저지르게 된 것이겠지. 하지만 지희는 돈이 없다. 돈을 내줄 부모님도, 애인도 없었다. 사업을 하는 남자친구를 만나다 보니 지희에게 남은 거라고는 월세 20짜리의 옥탑방과 차압을 제외하고 80만원 정도의 월급 밖에는 없었다. 여자는 왜 자신을 택한 것일까?
  그 때 문이 열렸다. 지희는 뒷걸음을 쳤지만 2평 안에 도망갈 공간은 없다. 눈 앞이 환해져 지희는 눈을 찌푸렸다. 찌푸린 눈 사이로 형체가 보였다. 여자였다. 여자는 지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 왜? "
여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지희는 여자의 팔목을 확인해보고 싶었으나 여자는 긴 팔이었다.
" 돈.. 약이 필요한 거죠? 그렇죠? 돈은 .. 별로 없어요. "
여자의 입 꼬리가 조금 실룩거렸다. 빛 아래서 보니 여자는 말상이었다. 길고 퉁퉁한 얼굴, 사각형의 억센 턱. 얼굴형과 어울리지 않게 입술은 앵두 빛에 작고 귀여운 편이었다.
" 나 당신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약 끊는 거 내가 도와줄게요. 나 재활센터에서 일해서 잘 알아요. 당신보다 더 심각한 환자들도 치료했어요."
여자의 볼 살이 움찔거렸다. 반응이 있다. 좋은 징조였다.
" 걱정 말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
여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에 비해 높고 새된 목소리였다. 웃음소리가 어찌나 따가운지 귀를 막고 싶었지만 손이 묶여있었다.  여자는 출렁이는 뱃살을 부여잡으며 웃었다.  
" 큭... 큭.. 너 정말 재미있는 년이로구나?" 지희는 간신히 입을 떼었다.
" 당신 마약 하는 거 아니에요? "
" 약? 그런 것도 해봤지. 하지만 더 재밌는 걸 찾아냈어. "
여자가 점점 다가왔다. 지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몰랐다. 웃어서 여자에게 안심을 시켜야 하나? 여자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매직이었다. 여자는 지희의 티셔츠를 끌어올리고는 배에 4개의 숫자를 써넣었다. 1014.
" 이.. 이게 뭐죠?"
" 네가 죽을 날짜. "
여자의 목소리는 평안했다. '오늘 저녁은 김치찌개야'를 말하듯이 여자의 목소리에는 어떤 쾌감이나 협박이 담겨있지 않았다. 일상적이고 단조로운 목소리에 지희는 여자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죽음에 대한 감각은 소낙비처럼 소스라치게 몰려왔다.  
" 왜요? 내가 왜 죽어야 하는 거죠?"
지희의 모든 신경은 여자의 입술로 쏠렸다. 여자의 입술에서는 지희를 증오하는 사람의 이름이 나올 것인가? 아님 돈인가? 아니면 영화에서처럼 빨간 블라우스를 입었다던가 머리가 길다던가? 여자가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 넌 웃는 게 헤프거든. "
숨어있던 두통이 다시 공격했다. 몸이 떨렸다. 지희는 마른 목구멍을 떼어 겨우 소리를 냈다.
" 말... 말도 안돼. 제발 살려주세요. 돈.. 얼마든지 드릴게요. 제발요. 부탁이에요"
여자는 지희의 턱을 잡았다. 그녀의 손아귀 힘이 얼마나 억셌는지 지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너무 그러지 마. 네가 살 날이 3일밖에 안 남았는데 내내 소리지를 거야? 자자, 착하지. 그래도 네가 어떻게 죽을지는 결정하게 해줄게. 약 먹을래? 가장 깔끔하지. 난 재미없지만. 아님 교살? 목 졸리는 쾌감이 그렇게 좋다더라. 저번에 어떤 애는 황홀한 표정도 짓더라고. 아님 망치는 어때? 그렇게 아프진 않을 거야. 일단 이 정도가 추천할 만 하고 네가 원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 것도 고려해볼게"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말할 게 없었다. 지희는 처음 사람을 만날 때는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가 지희의 청순한 모습을 좋아하는지, 애교를 좋아하는지를 잘 파악했다가 다음에 그가 원하는 모습대로 굴었다. 지희는 잘 몰랐지만 그가 k-1을 좋아한다면 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다가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찾아보고는 효도르와 최홍만의 경기장면을 이야기했다. 그가 와이너리에 관심이 있으면 서점에 가서 책을 사다가 빈티지 와인에 대해 말하고 했다. 온갖 사람을 만나면서 지희는 아는 게 많아졌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자는 달랐다. 여자는 드라마나, 돈이나, 명품 같은 지희가 다룰 수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여자는 단순히 지희를 원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벌벌 떨다가 자신의 손 안에서 숨이 끊어질 지희를 원하는 것이다. 지희는 여자를 응시했다. 이 여자는, 아니 이 것은 자신과 다른 존재다. 거대한 장막이었으며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비로소 지희는 여자의 눈이 텅 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역질 나는 사람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것 같았다.  
  여자가 손을 휘둘렀다. 갑작스런 억센 힘에 지희는 바닥으로 뒹굴었다. 여자가 지희를 일으켜 세웠다.
"미안해. 누군가 날 그렇게 쳐다보는 게 익숙하지 않아.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지?"
냄새는 지희의 몸에서 나고 있었다. 아랫도리가 축축했다. 지희는 몸이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지희의 상황을 곧장 눈치채고는 깔깔거렸다.
" 얘는……화장실이 급하면 미리 말하지. 이리와, 목욕하자."
여자는 지희를 번쩍 안아 들고는 방을 나왔다. 거실이었다. 아이들 두 명이 지희를 보고 있었다. 지희가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여자가 문을 열더니 지희를 내려놓았다. 욕실이었다. 타일 틈새마다 자줏빛 때가 껴있었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거울은 없었고 수도꼭지, 비누, 하수구멍, 바가지 몇 개, 변기가 전부였다. 여자는 익숙한 솜씨로 지희의 바지를 벗기려고 했다. 지희는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여자의 힘은 엄청났다. 여자가 물을 뿌리고는 자신의 손에 비누를 묻히기 시작했다. 지희는 가까스로 소리쳤다.
" 제발, 제발 비누질만은 제가 할게요!"
여자가 아쉽다는 듯 지희를 내려다보았다. 여자가 대야에 손을 씻는 사이 지희는 제발 여자가 나가주길 바랐으나 여자는 흥얼거리기만 했다. 지희는 등을 돌려 다리를 오므리고는 머리를 살폈다.  다행히 큰 상처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묶인 손으로 묶인 다리를 비누질 하는 것은 못할 노릇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비누질을 하는 손이 점점 느려지고 지희의 눈은 등 뒤의 여자를 훔쳐보았다. 미끄러운 욕탕에서 내가 비누질한 손으로 여자를 넘어트린다면….? 세상에, 내가 남을 해칠 생각을 하다니. 지희가 자신의 생각에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는 순간, 여자가 말했다.
" 얘, 너 저기 하수구 근처에 붉은 거 보이니?"
여자 말대로 물이 빠지는 수챗구멍 주위에는 유독 붉은 기가 심했다. 지희는 붉은 이유에 대해서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지희가 고개를 돌리자 여자는 또 입을 떼었다.
" 저거 다 피야. 여기서 시체를 절단해서 버렸거든. 한 둘이 아니다 보니 닦아도 저렇게 핏자국이 남는구나? 네 핏자국은 어디에 남기는 게 좋겠니? 네 피 색깔은 예쁠까?"
지희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번쩍 떼었다. 자세히 보니 목욕탕 타일이 아니라 사람의 피부조각과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지희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려던 때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여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썩은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소리 내어 웃고 싶었지만 참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여자의 눈은 더 이상 비어있지 않았다.  기쁨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저절로 구토가 나왔다. 여자의 얼굴에 토하고 싶었으나 차마 사람의 얼굴에 그럴 수는 없었다. 아니, 저 여자가 사람이긴 한 걸까? 지희는 변기뚜껑을 열고 구역질을 했다. 구역질을 할 때마다 여자는 크게 웃어댔다. 여자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구토가 나왔다. 변기는 고장이 나 물이 내려가지 않았다. 지희는 눈을 감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 비누질을 계속했다. 등 뒤에서 아쉬워하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 물로 헹구고 있어. 갈아입을 옷 가져올게."
여자가 나가자마자 지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앉았다. 자줏빛 때, 붉은 자국 타일 위에 토사물에 뒤덮인 자신의 모습. 지희는 넋을 놓고 울었다. 왜 자신이 이런 처지가 되어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자기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항상 착하게 살기만 했는데. 그 때, 지희는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니 여자가 숨어서 지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지희는 찬 대야에 고개를 박았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한지희, 정신차려야 해. 살아남자. 지희는 몸을 헹구고는 밖으로 나왔다. 여자가 옷가지를 내밀었다.
" 이거 저번에 죽은 애가 입던 건데, 사이즈가 너랑 비슷하네?"
청치마였다. 안감에는 붉은 얼룩이 잔뜩 배어있었다. 지희가 기겁을 하고 치마를 던지자 여자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여자가 지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 걔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지. 네 비명소리는 얼마나 끔찍할까?  "
지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정신을 잃었다.
  
어릴 때,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지희는 장롱으로 숨어들었다. 그날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것 같아 어린 지희는 장롱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저녁이었다. 엄마의 밥 먹자는 소리가 들렸다. 지희는 자신이 없어진 걸 알면 놀라는 가족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장롱 틈새로 구수한 밥 냄새가 밀려들어왔다. 그 날 저녁은 불고기였다. 맛있는 불고기. 엄마, 아빠, 오빠, 큰 언니, 작은 언니, 동생은 너나 할 것 없이 불고기에 달려들었다. 식탁이 치워질 때까지 장롱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희는 울고 싶었지만 엄마 아빠는 울보가 싫다고 했다. 그래서 지희는 불고기 냄새를 맡으면서 장롱 안에 오래 누워 있었다.  

지희는 지금도 누워있다. 누군가 지희의 다리에 바늘을 꽂고 있었다. 달콤했던 고통은 점차 강도가 심해졌다. 아야,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렸다. 머리에 온통 열이 나고 지끈거렸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 앞은 캄캄했다. 문으로 보이는 작은 틈새로 빛이 들어왔다. 얇은 빛 줄기 사이로 뭔가 움직이더니 다시 다리가 따끔거렸다. 지희는 짜증을 실어 다리로 그 것을 힘껏 찼다. 아이 울음소리와 함께 빛이 생겼다. 빨간색 티셔츠의 아이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울고 있었다. 초록 티셔츠의 아이는 스위치에 손을 대고 서 있었다. 두 아이의 손에는 모두 바늘이 들려 있었다.
" 뭐,,, 뭐야 너흰!"
초록색티셔츠의 아이는 대답도 않고 빨간색 티셔츠에게 다가갔다. 초록색 티셔츠가 몇 번 다독이자 빨간색 티셔츠는 금새 울음을 그쳤다. 둘이 바늘을 다시 바싹 쥔 채 지희를 보았다. 지희는 묶여있는 발을 최대한 위협적으로 쳐들었다.
" 다가오지마!"
2평도 안 되는 방 안에 긴장이 가득했다. 초록색 티셔츠는 가만히 지희를 쳐다보더니 빨간 티셔츠를 데리고 나갔다.
" 아냐, 아냐. 제발 문 닫지마!"
문이 철컥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틈새 사이로 웃음 소리가, 빛이, 떠드는 소리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더욱 잘 들렸다. 빛이 있는 문 밖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어두운 문 안쪽에서는 지희가 아파오는 머리를 싸매면서 훌쩍이고 있었다. 문으로 자꾸 눈이 향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을 무렵, 문이 열렸다. 쏟아지는 빛의 홍수 속에 거인 두 명이 서 있었다. 거인의 손에는 칼이 들려있었다. 지희는 다시 눈을 감았지만 고통은 찾아 오지 않았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목이 자유로워졌다. 작은 거인 두 명은 지희를 일으켜 세우더니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 곳은 자신의 방과 매우 닮은 익숙한 곳이었다. 10평 남짓한 직사각형의 방에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현관문으로 보이는 문, 욕실, 지희가 나온 방, 그리고 거실이 전부였다. 창문은 있었지만 검은 천으로 막혀 있었다. 소파도, 식탁도, 장롱도, 전축도 없었다. 가족사진도 없었다. 아이들의 장난감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한 쪽 구석에 놓인 컴퓨터와 몰두하는 남자, 그리고 브루스타 옆에 높인 냄비와 라면 몇 봉지, 반짇고리와 이불뿐.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희가 이리 저리 둘러보는 동안 아이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신문지를 깔고 양은 냄비를 가져오고 젓가락을 3벌 놓았다. 엉겁결에 붉은 티셔츠가 주는 젓가락을 잡아들긴 했지만 먹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냄비 뚜껑이 열리고 아이들이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니 지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얘들아, 먹기가 불편해서 그런데 이 손목 끈 좀 풀어주면 안 될까?"
아이들은 대꾸도 않고 접시에 코를 박기에 바빴다. 지희도 먹으려고 애를 썼지만 먹는 양과 흘리는 양이 거의 비슷했다.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라면 맛은 꿀맛이었고 냄비는 거의 끝을 보였다. 지희는 손목이 쓰라린 고통도 참고 마지막 가락을 붙잡았다. 아이들의 시선도 같이 따라 올라왔다. 어쩔 수 없이 지희는 빨간 티셔츠 입에 면발을 넣어주었다.
" 고마워요, 누나."
" 너 이름이 뭐니?"
" 지용이요. "
" 너.. 엄마 맞지? 파마한 분 말이야. 어디 가셨어? "
" 일 나갔어요."
바늘에 찔린 상처는 아직도 피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웃는 얼굴은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설득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 너 몇 살이야? 형은 몇 살이고? 이름은 뭐야? "
" 저는 5살이고요 형아는.."
그 때 초록 티셔츠가 말했다.
" 누나, 누나가 이래 봤자 누난 죽어요. 엄마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거든요.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 없어요. 그럼 더 빨리 죽어요. 조금이나마 오래 살고 싶으면 가만히 있어요."
  아이의 입술은 묘하게 엄마와 닮아있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가볍게 뱉은 것이 그 것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초록티셔츠의 말이 이어지자 지용이는 절로 입을 다물었다. 지희가 할 말이 없어 가만이 있는 사이 초록티셔츠는 냄비를 가져다 놓고 신문지를 치우고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모든 것은 효율적이고 빠르게 이뤄졌다. 숙련된 솜씨였다. 빨간 티셔츠는 지희의 목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희의 십자가 목걸이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초록티셔츠는 그런 빨간 티셔츠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인 뒤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반짇고리를 열고 다시 바늘을 꺼내고 있었다. 아까의 고통이 떠올라서 지희는 지레 겁먹었지만 지희는 이번 타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희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히죽거리면서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지희가 옆에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남자의 눈은 동공이 풀려 있었지만 순진해 보였다. 잘 설득하면 여자 몰래 지희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저기.. 저기요"
남자는 여전히 컴퓨터 화면만 보고 있었다. 지희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컴퓨터로 향했다. 남자는 제로보드 형식의 게시판 '사과'에 접속하고 있었다. 그 곳은 자기 비밀이나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 토닥이는 곳으로 꽤 유명했다. 특히 "Honey"라는 유저는 인기가 높았다.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의 글에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리플을 달았다. 당연한 결과지만 Honey팬을 자청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Honey는 바로 지희다. 지희는 순간 멍했다. 우연의 일치인가? 하여튼 이 남자는 친절한 Honey, 지희를 도와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지희가 남자의 목을 조르다시피 흔들며 말을 걸었다.
" 저기요. 이 게시판에서 자주 놀아요? 그럼 Honey가 누군지 알죠?"
남자가 망가진 태엽인형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동공은 더 이상 풀려있지 않았다. 남자는 동공 가득 지희를 담고 있었다. 결박 당한 채, 그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지희를.
" 당연히 알지. 존나 잘난 척 하는 년, 너잖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지희는 당혹감을 느꼈다. 이 남자는 누구지? 상관없다. 여자가 없는 틈에 도망가야 한다.
" 당신... 나... 알아요? 당신은 누구죠? 제발 나.. 나 좀 도와줘요."
남자는 낄낄거렸다. 지희는 답답했다. 지희는 현관문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남자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고 지희는 더욱 답답했다. 남자가 말했다.
" 너 아직 상황파악 안 되는구나. 널 납치한 여잔 내 마누라야. 여기서 퀴즈! 그 여자는 인터넷을 안 해. Honey 가 누군지도 모르지. 나는 알아. 그럼 어떻게 된 걸 까요?"
남자는 비죽비죽 웃으며 까-요 부분을 길게 발음했다.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희는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현관문은 다섯 발자국 안에 있었다. 손은 묶여있었지만 남자는 아직 컴퓨터 의자에 앉아있었고 문고리만 잡으면 된다.  
"빨리 대답해줘 친절한 Ho---ney. 어떻게 된 걸까?"
남자는 컴퓨터 의자를 뒤로 밀었다. 남은 건 세 발자국. 그리고 문고리.
" 당신이... 당신이 시킨 거야? 하지만......왜?"
지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가 지희에게 달려들었다. 지희는 몸을 던졌다. 손에 문고리가 잡혔다. 문고리를 돌려...... 하지만 지희는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는 지희의 머리채를 잡았다. 남자는 흥얼거리면서 지희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갔다. 지희가 지나간 자리에 핏자국이 남았다.  남자는 지희를 일으켜 세우고는 의자에 앉았다.
" 즐거운 퀴즈 시간입니다. 맞추면 안 맞고요, 틀리면 맞고요. 첫 번째. 자, 친절한 Honey. 내가 누군지 맞춰 봐. 마누라가 날 때려서 무서워요 잉잉.. 애새끼들이 싫어요 잉잉…."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모든 것에 투덜거리던 사람. 다른 유저들은 그를 찌질이라고 부르며 놀렸지만 지희는 항상 따뜻한 리플을 남겼다.
" 설마.. 슈퍼맨?"
남자가 박수까지 쳐가며 신이 났다. 하지만 지희의 머리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 하지만 당신이 왜? "
남자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남자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남자는 버럭 소리를 쳤다.
" 질문은 내가 해! 게시판에선 네 년이 설쳤을지 몰라도 여긴 내 구역이라고. 내가 법이야!"
지희가 숨이 막혀 켁켁거리는 동안 남자는 얼굴을 자꾸 문질러댔다. 남자의 얼굴에는 땀이 맺혔다.
" 자자, 다시 퀴즙니다. 두 번째 문제, 내가 어떻게 네 년 주소를 알았을까---요?"
“.... 해킹이라도 한 거야?"
명치 끝에 정확히 발 뒤꿈치가 맞았다. 지희는 바닥을 뒹굴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폐에서 피가 올라왔다. 지희는 발작스런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남자가 히죽거리며 지희가 뱉어낸 피를 자기의 얼굴에 묻혔다.  
" 게시판에서는 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 지가 납치된 까닭도 모르고. 다 네 년 업보야.  해킹할 필요도 없었어. 리플이랑 글에 다 있더만. "
남자는 낄낄 웃더니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친절한 허-어-니. 한지희여요. 전 존나 착해서 여러분 고민을 다 들어드려요 호호"
지희가 숨을 쉬든 말든 남자는 새로운 놀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 옆집 할머니가 돈을 꿔달래요. 불쌍하신 분인데 이를 어째요. 어머 18번지세요? 저는 23번지의 옥탑방이에요. 네, 그 파란 지붕이요. 동네 분을 만나다니 참 반가워요, 호호호."
남자는 손으로 입을 막아가며 웃었다. 불쌍한 옆집 할머니. 지희의 월급날에 만 꼭 와서 돈을 빌리던 할머니. 지희가 사기 당했을 때 문을 절대 열어주지 않던 할머니. 아냐, 할머니는 그 때 주무시고 계셨을 거란 말이야.
"여고생을 도와줬는데 사기였다고요?...이를 참 어떻게 하나요. 그런 비슷한 사기 당해봐서 다 속상하네요. 흑흑. 속상한 일 있으시면 전화하세요.  제 전화번호는 010--7503이에요. "
숨이 막혔다. 가출했다던 여고생. 지희가 자는 사이 커플링까지 가져간 그 여고생. 거울에 멍청한 년아 라고 써놓은 여고생.  한지희 멍청한 년. 아니야 그래도 그 애는 나를 착하다고, 멋진 언니라고 해줬어.
“.. 애인이 저보고 못 생겼대요. 이건 제 사진이에요. 저 정말 못생겼나요? 조금 있다 펑할게요. 예쁘다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역시 사과식구들 밖에 없어요 흑흑 "
그 놈이 통장을 가지고 날랐지. 답답해, 그러면서도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내가 못 생겼다는 거였어. 숨을 못 쉬겠어. 숨을 쉬어야 한다. 지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멈췄다. 제 멋에 취해 혼자 깔깔거리던 남자는 지희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희의 몸을 발로 툭, 건드려보았다. 하지만 눈만 부릅뜨고 숨을 내뱉지 않았다. 남자가 지희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려는데...지희는 비명을 질렀다. 앞에 있는 남자를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하지마, 이 자식아. 하지마!"
" 그러게 누가 친절하게 살랬니? 자기 혼자만 고결한 척이야."
남자는 큭큭 거리며 웃었다. 지희는 가슴이 답답했다. 손이 묶여있지 않았더라면 가슴을 쥐여 뜯었을 것이다. 남자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지희는 소리를 질렀다. 욕이 섞여있었던 것 같다. 평생 처음 해보는 욕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답답했다. 가슴의 답답한 것을 없앨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것 같았다. 지희는 바닥을 마구 구르고 소리를 쳐대기 시작했다. 남자가 당황해서 지희를 붙잡았지만 지희는 그런 남자를 마구 걷어찼다. 남자는 지희의 기색에 겁을 먹고는 욕실로 도망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희는 계속 날뛰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유 없이 욕을 하던 정신 나간 아줌마가 생각났다, 매일 돈이 없다며 맛있는 걸 사달라던 친구 년이 생각났다, 월급을 가지고 날랐던 개새끼가 생각났다, 그리고 장롱, 불고기, 쩝쩝대는 소리들!
" 으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아악, 아악, 아악. 악악악.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찬물이 쏟아졌다. 빨간 티셔츠가 욕실에서 한 바구니 붓더니 형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르 달려갔다. 지친 지희의 눈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사로잡혔다. 아이들은 고슴도치를 만지고 있었다. 그 하얀 고슴도치는 몸을 움찔거리면서 피하고 있었다...... 아니 그 것은 고슴도치가 아니라 강아지였다. 강아지의 온 몸에 바늘이 빽빽하게 박혀있었다. 아이들은 무표정하게 보이는 빈 틈에 바늘을 하나 박았고 그럴 때마다 강아지는 깨갱거리지도 못한 채 꿈틀거렸다. 아이들이 지희를 돌아보는 순간 지희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정신을 잃었다.

지희는 집에 있었다. 집이라고 해 봤자 월세 20짜리 옥탑방이지만 지희의 공간이었다. 라면을 먹고 한숨 자려는 찰나였다. 밖에서 깨갱거리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웃으면서 강아지의 눈알에 바늘을 꼽아놓고 있었다. 지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강아지를 안고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강아지의 눈에서 바늘을 하나씩 뽑아주었다. 그런데......

손길이 느껴졌다. 보드라운 손이 지희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지희가 항상 바라던 손, 하지만 가질 수 없었던 손이었다. 우는 아이에게만 오지 말 잘 듣는 지희에겐 오지 않았다.
" 악몽이라도 꿨니?"
여자였다. 목이 잔뜩 쉬어있었지만 지희는 입을 떼었다.
" 당신, 정말 나를 죽일 거야? 당신 남편이 시켰다는 이유만으로? "
"  내가 그런 놈의 말 대로 움직이는 년 같아? 그 놈이 네가 어떤 년인지 말해줬을 뿐이야. 난 너 같은 애들을 잡아 족치는 게 재밌을 뿐이고. "
여자와 더 이상 대화는 무의미했다. 지희는 침을 모았다가 삼켰다. 목구멍 가득 통증이 느껴졌다. 망할 년놈들. 망할 년놈들. 여자가 말을 이었다.
" 너 아까 지랄발광 떨었다며? 조용히 하지 않으면 좀 더 빨리 골로 가는 수가 있어. 저번엔 남자애가 난리법석을 떠는 바람에 하루 만에 내가 보냈지. 나이프로 말야."
여자가 손가락으로 지희의 목덜미를 베었다. 지희가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며 여자가 말했다.
"…허긴 네가 그렇게 난리 치는 바람에 하루하고 반 나절밖에 안 남았지만."
여자는 웃으면서 기대하는 기색으로 지희를 내려다보았다. 여자가 웃는 꼴을 더 이상 볼 수는 없다. 지희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 걔는 왜 죽였는데?"
여자는 놀란 듯 했다. 하지만 여자는 다시 심술궂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 내 남편한테 욕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저런 놈한테 누가 욕을 안 하겠어?"
여자의 입 꼬리가 조금씩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듣기 싫은 음색으로 남편을 비웃고 있었다. 지희는 그런 여자의 모습을 보며 으흐흐흐,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신경질적인 웃음소리와 신음소리는 제법 잘 어울렸다.

"자, 하여간.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뭐 하고 싶은 일은 없어? 내내 소리만 지르고 오줌이나 싸다 뒈질 거야? "
지희는 생각했다. 뭔가를 해야 했다. 그리고 생각나는 것이라곤...
" 배고파."
" 배고파? 근데 우리 집엔 먹을 거라곤 없어. 나중에 네 시체 가지고 불고기나 해먹는다면 모를까. "
여자는 몇 번이고 불고기, 불고기라고 되뇌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지희는 애써 뒷말을 무시했다.
" 그래도 쌀이랑 김치는 있지? 나 김치볶음밥 잘해. 내가 만들어 먹을게."
여자는 지희를 올려다 보았다. 의심 가득한 눈초리 앞에서 지희는 흐흐흐 하고 웃었다.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발의 조임이 심해졌다. 지희는 틀렸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자는 끈을 풀려던 것이었다.  
"따라와."
지희는 쉽게 얻어낸 자유가 믿어지지 않아 손목과 발목을 어루만졌다. 쓰라렸지만 그녀는 자유로웠다. 지희가 일어서려는데 여자가 주먹을 휘둘렀다.  
"근데 넌 왜 아까부터 반말질이야. 썅, 3일이라고 했지만 맘에 안 들면 바로 끝장낸다."
여자는 바닥에 쓰러진 지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거실로 나갔다. 만약 여자가 고래를 돌렸다면 독기 찬 눈동자에 흠칫 놀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자는 지희 앞에 부루스타, 양은냄비, 쌀, 김치를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입으로 쌀과 김치만 있으면 됐다던 지희였지만 막상 이것만 보자니 막막했다.
"참기름은 혹시 없어…요?"
여자의 대답이 없었다. 지희는 물은 어디서 떠오는 걸까 고민했다. 둘러봐도 싱크대 같은 건 보이지 않았고 욕실에 물을 떠다 먹는 것 같았다. 지희는 쌀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수도를 틀어놓고 지희는 생각에 빠졌다. 지희는 이 공간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아파트인지, 연립주택인지, 단칸방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창문은 다 막혀 있어 이 곳이 어디에 위치한 곳인지, 몇 층이나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완벽한 직사각형 모양에 싱크대도 없는 걸 보니 컨테이너 같기도 했다. 아니, 애들 둘을 키우면서 싱크대도 없다니, 뭐 하는 여자야? 지희는 잠시 여자를 상식적인 사람으로 생각한 자신의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때-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했지만 뭔가 폭파되는 소리였다. 지희는 수도꼭지를 잠그고는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심장박동 소리만 크게 들렸을 뿐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것으로도 충분했다. 지희는 물을 가지고 여자에게 돌아왔다.    
"누나, 지금 뭐 만드는 거에요?"
빨간 티셔츠가 어느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희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희는 김치볶음밥이라고 대답했고 빨간 티셔츠는 기쁜지 팔짝 팔짝 뛰었다. 빨간 티셔츠는 뛰다가 그만 라면박스에 걸려 넘어졌다. 라면봉지가 바닥에 흐트러졌다. 빨간 티셔츠는 일어나더니 잔뜩 긴장된 자세로 여자를 훔쳐봤다. 여자는 끓고 있는 냄비만 응시할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붉은 티셔츠는 재빨리 라면 상자를 원상 복귀시켰다. 안절부절하며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그리고.. 라면상자 옆에는 칼날이 번쩍였다. 저것만 잡으면 여자가 두 번 다시는 못 웃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여자의 시선에서 피하기 위해 지희는 지용이에게 말을 걸었다.
"지용아, 너는 김치볶음밥 좋아해?"
"그게 뭔데요?"
"누나가 만들고 있는 거. "
"그거 맛있어요? 나 한 번도 안 먹어 봤는데?"
"너 누나가 이거 만든다니까 좋아했잖아."
"뭔가 새로 들어본 거라서 그랬어요. "
지희는 잠시 할 말이 없었다. 지용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덩치가 작은 편이었고 목의 때를 보니 언제 씻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밥이 다 되고 지희는 프라이팬에 기름도 두르지 않고 김치를 볶기 시작했다. 그 때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지용아, 가서 칼 가져와."
지희 어깨에 올려져 있던 지용이 손이 바싹 굳었다. 지희는 온 몸이 떨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용이는 천천히 걸어가더니 떨리는 손으로 칼을 잡았다. 눈을 감은 채 그저 프라이팬을 잡고 있던 지희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여자가 칼을 잡고 익숙한 자세로 몇 번 빙빙 돌리더니 다시 지용이에게 줬다.
"지용아, 누나가 맛있는 거 해주지. 그러니까 지용이가 지용이 특제 양념을 넣어야지?"
지용이가 칼을 잡고 프라이팬으로 다가갔다. 목이냐, 동맥이냐, 위냐, 칼이 자신의 몸 어디로 박히게 될 것이냐. 지용은 칼자루를 단단하게 잡고는 칼을 휘둘렀다. 붉은 피는 김치 국물 속으로 배어들었다. 김치국물이 붉고 진해졌다. 그리고 지용이의 팔에는 칼자국이 하나 더 생겼다. 지용이는 혀로 상처를 핥으면서 여자에게 칼을 돌려줬다. 지희는 진해진 김치국물만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김치 국물은 매혹적이었다. 지희는 눈을 질끈 감고 밥을 넣었다. 김치국물이 자글자글 튀었다. 한 방울이 지희의 팔에 튀었다. 여자의 시선을 느끼면서 지희는 국물을 핥았다. 밥이 다 되고 초록티셔츠가 일사불란하게 식탁을 차렸다. 하지만 지희는 전혀 식욕이 나지 않았다. 지희가 숟가락 잡는 시늉만 하든 말든, 초록 티셔츠는 맛있게 밥을 먹었다. 심지어 지용이마저 상처를 종종 핥아가며 밥을 우겨 넣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지희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자의 눈길이 찔렸지만 지희는 도저히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그 때, 등허리에 아픔이 느껴졌다.
찔렸다-지희는 본능적으로 등허리를 잡았다. 하지만 피는 없었다. 여자는 칼등으로 지희를 찌른 것이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기처럼. 순수한 기쁨에 가득 찬 눈이었다. 지희는 분노가 치밀었다. 지희는 저 여자가 못 웃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는 숟가락 가득 밥을 퍼서........입에 넣었다. 밥알에서는 비린 맛이 났다. 지희는 밥알 하나 하나가 여자의 몸이라고 생각하고는 힘을 주어 씹어 넣었다. 이번엔 머리다, 이번엔 칼을 들고 있는 팔, 이번엔 웃고 있는 입! 김치볶음밥은 맛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지희는 칼을 노리며 재빨리 그릇을 정리했다. 여자는 덩치에 비해 빨라 그 칼을 빙빙 돌리면서 욕실에 들어가는 지희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희는 여자의 존재를 잊은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했다. 느릿느릿하고 침울한 곡조는 어떻게 들으면 장송곡 같기도 했다. 여자는 재미가 없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몇 시냐고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7시라고 했다. 출근할 시간이었다. 지희는 설거지를 끝낸 그릇을 쟁여두고 있었다.
"내가 널 납치한 게 7시쯤이었지. 축하해, 이틀이 지났어. 내일이면 그릇대신 네가 누워있겠네."
지희는 반응이 없었다.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여자가 빨래 줄을 다시 들고 오는데도 지희는 순순히 손목을 내밀 뿐이었다. 여자가 문고리를 잡는 순간 지희가 말했다.
" 마지막으로 생일파티를 하고 싶어요. 케이크와 술을 사다 주세요. "
  여자는 집을 나섰다. 케이크와 술이라니. 그 동안 살려달라고 싹싹 빌거나 헛된 저항을 하는 것들은 봤어도 순순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년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여자는 횟가루가 날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에는 쓰레기가 쌓여있었다. 여자가 살고 있는 곳은 버려진 아파트였다. 70년대 초 아파트가 처음 보급될 당시만 해도 꿈과 희망과 경제발전이 걸려있는 아파트였지만 시공사가 부도나고 말았다. 부도처리를 끝내느라 몇 년이 흐른 사이 10평짜리 소형 아파트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재건축에 들어가는 수밖에는 없었는데 걸려있는 부채와 재건축비용을 감수하면서 덤벼드는 회사는 없었다.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지역에 아파트는 유령 같은 모습으로 남았다. 여자는 여기에 살았다. 케이크, 케이크 따위가 다 뭐람. 여자는 계속
소리를 질렀다. 혼자 바늘을 가지고 놀던 지용이는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들어가 있던 방에서 볶음밥 누나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누나를 보러 가면 형에게 혼난다. 근데, 너무 시끄럽고.. 누나가 어디 아픈지도 모른다. 엄마가 사람들을 욕실로 데려가기 전에 사람들이 아프면 혼난다고 했다. 저번에 어떤 형이 혀를 먹어서 입가에 잔뜩 피가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화를 냈다. 지용이는 자고 있는 형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방문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서 지용이는 머뭇거렸다. 누나? 누나? 소리가 그쳤다. 지용이는 문을 열었다. 누나가 웃고 있었다. 엄마가 웃을 때랑 비슷했다. 누나 어디 아파요? 흐흐, 지용이 왔구나. 누난 괜찮았다. 지용이가 나가려는데... 지용아! 너 목걸이 갖고 싶지? 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어째 형이랑 지용이랑 누굴 줘야 하나. 형 자요! 나, 나 줘요. 그래? 그럼 지용이 줘야겠다. 근데 지용아, 이 목걸이 풀려면 누나만 아는데 누나 손이 묶여있네? 손 좀 풀어줘.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지용이 목걸이 갖기 싫구나? 그래 그럼 누나가 갖지 뭐. 지용은 재빨리 뛰어나가 칼을 가지고 왔다. 끈이 풀렸다. 우리 착한 지용이, 그래. 누나가 목걸이 줄게 뒤돌아봐.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목걸이가 풀렸다! 누나가 목에 목걸이를 걸어줬다. 그리고는 누나는 목걸이의 줄을 천천히 당겼다. 목이 조여왔다. 답답해, 지용이는 숨을...  
  쉴 수가 없다. 빌어먹을. 오늘도 전화는 쏟아지고 온갖 병신들은 지랄을 하고 쉴 틈이 없다. 특히 지금 전화를 거는 남자는 미친 놈이었다. 그거 세금 좀 더 나갔다고 얼마나 욕을 하는지. 컴퓨터 화면에는 남자의 주소가 떠 있었다. 어디, 잘난 성대가 뽀개져도 욕을 할 수 있는지 보자. "감사합니다 고객님"을 끝으로 휴식시간이 있었다. 팀장이 여자를 불렀지만 여자에겐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팀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여자는 옥상에 올라갔다. 눈 아래로 차가 보이고 수많은 개미가 보였다. 빨간 코트를 입은 개미가 보여, 여자는 손가락을 가져다 놓았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손아래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살아있는 것이, 여자의 손가락 아래 있었다. 여자는 손가락을 지긋이 눌렀다. 산성액체과 함께 환희가 손가락 끝에서 온 몸으로 퍼졌다. 여자는 손가락을 핥았다. 손가락 끝에선 방 안에서 떨고 있을 한지희의 피 맛이 났다. 발 끝에서부터 기쁨이
  몰려왔다. 이번에 엄마가 죽일 사람은.. 나다! 도망가야 한다. 도망칠 곳이라고는 욕실뿐이다. 꿈에서 매번 그랬듯 이번에도 엄마가 죽인 사람들이 걸려있을 것이다. 갈고리에 매달려 원망스런 눈으로 볼 형을 ..어느새 엄마가 이름을 부른다. 엄마가 왔다, 문고리를 연다. 형이 매달려서 말한다. 왔니, 널 기다리고 있었어. 형, 미안해. 엄마가 형 죽이게 해서 미안해. 형이 목을 조른다. 의식을 잃어갔다. 어디선가 으흐흐흐 하는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하지만 여자는 집에 가는 길이다. 팀장은 여자를 자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박봉을 받고 이런 일을 하려는 사람은 없다. 여자는 팀장을 무시하고 퇴근한다. 집으로 오는 길. 지루하다. 여자는 입술에 손가락을 살짝 올려놓는다. 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꿈틀거림이, 피 냄새가, 비명소리가 벌써부터 여자를 설레게 한다. 지루한 퇴근길은 상상 덕에 빨리 지나간다. 버스정류장에 내려 여자는 공터를 쳐다본다. 많은 개미들이, 여자의 손을 거쳐 누워있다. 이제 하나의 개미가 저기에 눕게 될 것이다. 이런, 케이크를 빠트렸다. 여자는 투덜거리면서 번화가의 케이크 집으로 간다. 요건 어떻고 저건 어떠세요. 촛불은 몇 개나 드릴까요. 웃는 직원의 말에 대꾸도 않고 케이크를 빼앗아 온다. 뒤에서 욕하는 소리 또한 들리지 않는다. 케이크라. 생일이란 빌어먹을 것. 누구의 생일상에 앉아본 적도 누구의 생일상을 차려준 적도 없다. 물론 여자 자신의 생일상도. 현관에 들어가기 전, 여자는 케이크를 꺼내 지희의 마지막 생일상을 어떻게 차려줄 것인지 생각해본다. 생일 축하 합니다, 아니야. 당신의 죽음을 축하합니다, 아니야. 내가 케이크 사온 수고를 하게 만들었으니까 케이크에 얼굴을 파묻는 방법으로 죽여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순백색의 케이크. 여자는 새끼손가락으로 아주 조금, 크림을 떠서 입에 넣으려는데…. 뭔가가 떨어져 박힌다. 온 몸에 바늘이 박힌 강아지였다.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위로 들었다.
지희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 있는 여자의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은 지금 웃고 있어? 또 기뻐하고 있는 거야? 지희는 묶여있는 초록 티셔츠를 창가에 앉혀놓았다. 누나 발버둥치지 말아요 라던 아이는 잔뜩 겁먹었다. 너는, 이름이 뭐니. 엄마와 닮은 아이의 입이 움직이려는 찰나 지희는 아이를 밀었다. 비명소리 인지, 뭔지 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 떨어진 초록 티셔츠를 살펴보지도 않고 여자는 자신의 작품에 감탄한 제빵사처럼 그저 케이크를 들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지희를 응시했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착한 한지희, 잘했어. 지희가 잘 했으니 오늘 저녁은 불고기야. 난 너를 사랑한단다, 얘야. 지희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빨간 티셔츠를 창가에 올려놓았다. 당신의 표정을 보여줘. 내가 잘했다고 말해줘. 여자가 으으으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지희는 티셔츠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일은 끝났다. 지희는 피곤했다. 집에 가야 하는데, 몸이 무거워 자고만 싶었다. 지희는 장롱을 찾아 방을 헤맸다. 하지만 장롱은 보이지 않았고 지희는 방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지희는 집에 있었다. 집이라고 해 봤자 월세 20짜리 옥탑방이지만 지희의 공간이었다. 라면을 먹고 한숨 자려는 찰나였다. 밖에서 깨갱거리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웃으면서 강아지의 눈알에 바늘을 꼽아놓고 있었다. 지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강아지를 안고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강아지의 눈에서 바늘을 하나씩 뽑아주었다. 그런데..어느새 바늘이 다 빠졌고 강아지가 꿈틀거리더니 조금씩 방을 뛰어다녔다. 강아지가 즐거운 듯이 짖었다. 지희도 웃었다. 그런데 지희의 눈에 방바닥에 찍힌 발자국이 보였다. 흙으로 범벅이 된 강아지 발자국은 지희의 방을 더럽혔다. 더럽다, 더럽다. 지희는 가차없이 강아지를 집어 들고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세제를 가져다가 발자국을 닦았다. 붉은 세제 거품 한 방울이 톡, 눈가에 튀었다. 지희는 자신의 눈가가 붉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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