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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나의 작고 어여쁜 인형

2008.07.26 00:4207.26

wykim7386@naver.com 나는 드디어 인사팀에서 인형을 받았다. 인형의 키는 손바닥 보다 약간 작았다. 나는 인형에게 ‘현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진이는 약간 머리가 크고 팔 다리가 짧았지만 이는 만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의도적인 디자인으로 무척 귀여운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어깨가 드러나는 하얀 티와 핑크빛 미니스커트, 무릎까지 올라오는 레그워머를 신고 있었다. 등짝의 뚜껑을 열고 수은전지를 집어넣자 그녀는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눈을 껌뻑이며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김 대리님. 글로벌 스탠더드와 초일류 서비스를 지향하는 엠비 그룹의 개인용 단말기 GX-008호입니다. 앞으로 대리님이 엠비의 핵심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 반가워. 앞으로 잘 부탁해.

- 김 대리님~ 호칭과 패스워드를 세팅하시겠습니까?

- 응. 앞으로 넌 현진이야. 그리고 패스워드는 19770509

그녀의 정수리에서 조그맣고 투명한 프로펠러가 튀어나와 회전했다. 몸체가 둥실 공중으로 떠올랐다. 현진은 내 어깨 주위를 맴돌며 그 때부터 끊임없는 수다를 시작했다.

- 대리님~ 어서 업무를 시작하셔야죠.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사람은 그 만큼 앞서가는 거랍니다.

- 알았어........지금 피씨 부팅하고 있잖아.....

인형이 생기면 조금 피곤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녀는 앞으로 마누라처럼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댈 것이다. 하지만 직장인에게 인형이 생겼다는 사실 만큼 뿌듯하고 가슴 벅차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인형이 딸린 직장인은 곧 그 회사의 식구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형이 없는 직장인은 아직 수습사원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햇병아리요, 회사에 짐이 되는 무가치한 존재일 뿐이다. 인형이 없는 자는 언제까지나 해고의 위험 속에 살면서 복리후생의 차별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인형이 생기게 되면 그 때부터 안정적인 고용과 다양한 복지 혜택, 성과급의 배분이 보장된다. 인형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원한 우군이다.  

점심시간에 직원식당에 갔더니 다들 놀란 모습이었다. 내 귓가에 떠 있는 현진을 보고 다양하게 변하는 표정들이라니........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대리 승진 일 년 삼 개월 만에 인형을 달았다는 사실에 그 들은 질투와 경계심이 섞인 눈빛을 보냈다. 그 건 그들의 어깨 위에 있는 인형들도 마찬가지였다. 인형들은 눈빛을 반짝 반짝거렸다. 인형의 눈빛이 점멸하는 것은 무언가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표시다. 보나마나 새로운 경쟁자에 대한 정보를 사내 전산망에서 다운로드 받는 중일 게다.

식판에 반찬을 담는 동안 현진이 내 귓가에 대고 식사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 대리님~ 대리님은 단백질이 부족하니까 닭고기 샐러드를 많이 담으세요. 완두콩도 담으시고, 김은 필수 아미노산이 많으니까 열장 이상 집으세요. 국에는 소금이 많이 들어갔네요. 너무 많이 푸지 마세요.

나는 식판을 들고 식당 구석에 가서 앉았다. 그 동안 같이 식사를 했던 홀 애비들(인형이 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부른다)은 멀찌감치 앉아서 수군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인형이 생긴 직장인은 더 이상 누군가와 어울릴 필요가 없다. 인형은 말벗도 되어주고, 격려도 해주고, 정보도 물어다주기 때문이다. 현진은 내 귓가에 바짝 붙어서 속삭였다.

- 대리님~ 2시 방향에 앉아 있는 검은 뿔테 안경의 남자 분 보이시죠?

나는 입안에 국을 떠 넣으며 현진이 가리킨 방향을 슬쩍 쳐다보았다.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의 내 또래 남자가 혼자 앉아서 식사 중이었다. 조그만 인형이 식탁 위에 앉아서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응. 근데 처음 보는 얼굴인 걸.

- 얼굴을 잘 익혀 두세요. 앞으로 대리님이 과장으로 승진하시려면 저 분을 잘 지켜보셔야 합니다.

- 임원으로 보기엔 나이가 너무 어린데. 인사팀 직원인가?

- 땡~ 틀렸습니다. 저 분은 온라인마케팅팀의 유병수 대리입니다. 유 대리님도 이틀 전에 인형을 달았어요. 김 대리님과 업무영역도 비슷하고, 입사 년차도 비슷하고, 근무성적 평가점수도 아주 막상막하에요. 다음 인사 때 마케팅 과장 티오가 세 자리 밖에 없는 거 아시죠? 한 자리는 해외영업 쪽의 최수진 대리가 따 놓은 당상이고, 또 한자리는 경쟁업체에서 스카우트 해오기로 했고, 마지막 한 자리를 놓고 다섯 명이 경합을 벌이고 있어요. 인사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현재 김 대리님과 유 대리님이 가장 유력합니다.

인형이 있다는 건 이래서 좋은 것이다. 여기저기 줄을 대서 알아보지 않아도 인형이 필요한 정보들을 쏙쏙 뽑아서 보고해주고, 직장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조언까지 해주는 것이다. 현진은 단순히 나의 정보 단말기가 아니라 사소한 일상을 챙겨주는 비서요, 직장에서의 생존전략까지 짜주는 든든한 참모였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커피 한잔을 뽑아 내 자리로 돌아왔다. 오전에 작성하다가 만 제품 프리젠테이션 파일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현진에게 자료작성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놀랍게도 술술 답변이 나왔다.

- 이미지의 배치와 전체적인 색감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제품의 설명이 너무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어서 지루한 느낌을 줍니다. 키워드 몇 개로 단순화하고 자세한 설명은 대리님의 육성을 통해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회사의 로고는 아래쪽에 배치하는 것이 엠비그룹의 디자인 코드입니다. 제품 이미지는 이미 2년 전에 촬영한 것이네요. 최근에 전문 포터그래퍼가 찍어 놓은 게 있으니까 제가 다운받아 드릴게요.

- 고마워. 두 시에 클라이언트랑 약속 있었지? 배차 신청은 했나?

- 네. 제가 대리님 점심 드실 때 클라이언트에게 확인 문자 메시지 전송했습니다. 배차 신청도 오전에 사내 포털에 등록하고 차량계 단말기로부터 승인 받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편리할 수가! 인형이 있으면 생산성이 다섯 배로 높아진다는 기획실의 주장이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온갖 잡다한 일들을 기억하고 챙겨야 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저 현진이 짜주는 스케쥴대로 움직이며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고 회사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마치 내가 작은 회사의 CEO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인형이 있어서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하루 종일 똑 같은 음성으로 귓가에 앵앵대면서 떠들어대는 통에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게 불가능했다. 현진은 내가 화장실에 볼 일을 보거나 욕실에서 샤워를 할 때도 따라 들어와 실시간 뉴스를 읽어주거나 전문지에 실린 업계 동향을 일러주었다. 또 스케쥴을 너무 빡빡하게 관리해서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개인적인 일을 보기가 힘들었다. 가장 싫은 것은 녀석이 근무시간 외에도 계속 잔소리를 해댄다는 것이었다.

- 대리님, 개그 프로그램은 이제 그만 보시죠? 대리님 경력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프로그램을 너무 열심히 보시는 거 아닌가요?

- 아냐. 젊은 소비자들의 트렌드를 파악하려면 이런 것도 봐야 된 다구. 또 가끔은 이렇게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다시 또 일할 맛이 나는 거지.

- 하지만 그 시간에 교양서적이나 잡지를 읽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 까요? 대리님도 이제 수준 높은 클라이언트들을 많이 만나시니까 인문학적 교양을 쌓으셔야 해요. 학교에서 경영학 공부만 해서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시잖아요?

뭐 이정도 잔소리라면 우리 엄마도 해 왔던 것이라 그럭저럭 참을 수 있을 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현진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까지 간섭하기 시작하자 이 건 뭔 가 회사정책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은 비행에서 돌아오게 되는 지숙이를 마중하러 공항으로 가던 참이었다. 현진은 끊임없이 붕붕거리는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내 눈 앞을 왔다 갔다 했다.

- 야야 운전하는데 방해 돼. 가만히 좀 앉아 있으면 안 되겠니?

- 대리님, 이 건 정말 무가치하고 비효율적인 여가생활입니다. 인천공항까지 가서 여자친구를 태워서 강남 가서 밥 사주고 다시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면 모처럼의 휴가일이 그냥 날아가고 말아요. 더구나 내일 새벽에 일어나서 출근해야 하는데 피곤해서 어떡하시려고 그래요?

- 어허. 개인용 단말기 주제에 뭘 안다고 그래? 원래 남자는 다 그렇게 하는 거야. 이런 노력도 없이 어떻게 지숙이 같은 예쁜 아이랑 사귈 수 있겠어.

- 대리님, 저는 엠비 그룹 중앙전산실의 서버에 있는 휴먼 데이터 뱅크에 수시로 접속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인간의 행태와 문화에 대한 모든 정보를 얻기 때문에 남녀 간의 교제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대리님은 무척 힘들고 얻을 게 없는 연애를 하고 계세요.

- 야, 네가 연애에 대해 뭘 안다고 충고를 해? 웃기네?

- 제가 뽑은 통계 자료에 따르면 항공기 승무원은 연예인 다음으로 교제상대의 지출금액이 많은 직종입니다. 그리고 근무 패턴이 불규칙하여 교제하는 남성은 생활리듬이 깨지고 생산성이 저하되는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교제에서 결혼까지 이어지는 확률도 매우 희박합니다. 대리님께서 원하신다면 대리님 라이프스타일과 소득 수준에 최적인 직종을 추천해드리겠습니다.

- 됐거든? 너 자꾸 운전하는 데 방해하면 확 꺼버린다!

- 대리님, 근무시간 이후라도 방전 이외의 사유로 절 꺼두시는 건 규정 위반이에요.

현진의 말이 맞았다. 그룹 내 모든 직원은 인형을 달 게 되었을 때 항시 인형을 가동 상태로 두어야 한다는 단말기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 인형의 잔소리를 듣는 것은 노동행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현행 노동법은 이에 대해 어떤 제재도 가할 수 없다. 사실 노동부가 노동자들 편을 들지 않게 된 것도 한참 되었다.

장거리비행에서 돌아온 지숙은 지친 얼굴로 트렁크를 끌고 있었다. 그녀는 현진을 보자 미간을 찌푸렸다.

- 어머, 너두 인형 달았니? 짜증난다.....

귓가에서 인형이 체공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능력 있는 직장인이라는 증거지만, 다시 말하면 기껏해야 월급쟁이라는 소리도 되는 것이다.

- 너무 한 거 아니야? 남자친구가 인형을 달았으면 축하를 해줘야지.......

- 축하? 내가 사귄 사람 중에 인형 단 사람은 없었거든?

주로 개인사업자들이나 전문직 남성과 사귀었던 그녀로서는 갑작스러운 인형의 출현에 당황스럽기도 할 것이다. 지숙이 한심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는 동안 현진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바쁘게 점멸했다.

지숙은 장시간 비행으로 입맛을 잃은 듯 했다. 좋아하는 크림소스 파스타를 시켜놓고도 포크에 면발을 감았다 풀었다 하면서 깨작깨작 먹었다. 말을 시켜도 대답이 두 단어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반면에 현진은 내 귓가에 체공하며 소곤소곤 쉴 새 없이 떠들었다.

- 대리님, 들어보세요. 제가 방금 한국항공 서버에 접속해서 알아낸 정보입니다. 대리님 여자 친구는 근무 태도가 아주 불성실하군요. 벌써 미스 플라이트(비행기를 놓침)가 두 번이나 있어요. 한국항공 규정상 미스 플라이트를 세 번 하게 되면 면직사유가 됩니다. 고과 점수도 좋지 못하고, 승진은 이미 글렀군요. 여러모로 대리님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 제발 좀 조용히 해 줘. 지숙이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남의 회사 인사자료를 어떻게 봤어? 혹시 해킹한 거 아냐?

- 한국항공은 엠비 그룹 계열사입니다. 작년 8월부터 공개매수해서 올 봄에 최대지분을 확보했어요.

- 그래? 도대체 우리 그룹에서 손대지 않은 업종이 없구만.

지숙이 갑자기 포크를 내려놓았다. 물을 한 잔 들이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난 현진과의 대화를 중단했다.

- 왜? 그만 먹으려고?

- 응. 입맛이 없어. 그리고 너 말이야, 인형이랑 노닥거리고 놀 생각이면 뭐 하러 픽업하러 왔어? 난 그냥 리무진 버스 타고 가면 되는 데 말이야.

- 화났니? 난 그냥 네가 피곤할까봐 마중 나온 거야. 버스 타고 혼자 집에 가는 거 보단 낫잖아?

- 됐어. 이제 그만 가자. 너도 다 먹었잖아?

지숙이가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 대응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나는 종업원을 호출하여 계산을 했다. 카드 승인이 떨어질 때 현진의 눈이 잠깐 반짝하고 빛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숙은 벌써 총총걸음으로 식당 문을 나서고 있었다. 바래다주는 동안 지숙은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고 현진은 프로펠러를 접고 뒷자리 시트에 앉아 눈을 반짝거렸다.

지숙을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잠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그 후로 7개월이 지난 뒤에 겨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인형 따위는 달고 다니지 않는 사업가와 곧 결혼한다고 말했다. 나는 건조하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 감상에 젖을 겨를이 없었다. 인형과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 뭐야? 그러니까, 유병수가 먼저 과장을 달 수 있을 거란 얘기야?

- 아직 정해진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 유병수 대리가 기획하고 있는 ‘데이터 마이닝 기술을 이용한 고객 맞춤 서비스 개선안’이 실행되면 조직개편이 따라오면서 유 대리가 새로 생기는 부서의 과장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 오프라인 마케팅 조직이 축소되고, 나는 물 먹겠구만.

- 김 대리님이 준비하고 있는 ‘인적 네트워킹 혁신을 통한 마케팅 역량 강화 전략’을 서둘러 추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 그래그래. 유병수에게 질 수야 없지. 오늘부터 야근에 휴일근무에 하루 24시간 일해서라도 내 기획안을 먼저 완성해야겠어.

- 힘내세요. 대리님! 저도 응원할게요!

현진이 조그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나는 이 앙증맞고 똑똑한 개인비서가 너무나 믿음직스러워 두 손으로 들어 올려 뽀뽀를 퍼부어주었다. 프로펠러 모터의 열기가 남아 있어 입술이 뜨뜻했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낮에는 일상적인 순기업무들을 해치우고, 퇴근시간 후에는 회사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기획안을 손보았다. 현진은 이리저리 웹서핑을 하면서 필요한 자료들을 물어왔다. 텅 빈 사무실에서 나는 외롭지 않았다. 곁에는 충성스러운 현진이 있었고, 가슴 속에는 불타는 경쟁심과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내가 먼저 승진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규정상 근무시간은 9시부터 6시까지였지만, 8시까지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두 달 동안 반복했다. 피로가 누적되고 업무능률은 떨어지고 난 업무상 크고 작은 실수들을 저질렀다. 중요한 문서를 엉뚱한 클라이언트에게 보내는가 하면 계약서를 작성하다가 결정적인 문구를 빠트려 팀장에게 질책을 받고, 용역을 발주하다가 무자격업자에게 일을 맡기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공을 들인 기획안은 점차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동료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면 텅 빈 사무실에서 내가 만든 문서를 몇 번씩이나 읽어보면서 스스로 대견스러워하곤 했다.

- 잘 만드셨네요, 대리님.

현진이 내 시야를 가리며 바짝 들이대서 난 뒤로 움찔 물러났다. 현진의 프로펠러는 부드러운 재질이긴 하지만 회전 중에 얼굴에 충돌하면 상처가 날 정도로 아프다.

- 응, 고마워. 현진이가 도와줘서 더 빨리 했던 거 같아. 이제 통계수치만 확인하고 몇 가지 마무리만 하면 돼.

-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기획안은 채택되지 않을 거예요.

- 뭐?

난 공중에 떠 있는 현진을 움켜잡으려는 충동을 억눌렀다.

- 내 기획안이 어때서?

- 대리님 잘못이 아닙니다. 온라인마케팅팀의 유병수 대리가 만든 기획안이 어제 회장 결재가 났어요. 다음 주 월요일에 조직개편작업에 들어갈 거예요.

결국 난 지금까지 헛고생을 했다는 소리였다. 이제는 위로 올라가겠다는 야심을 키우기보다는 자리보전을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경쟁에서 진다는 것은 조직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진은 책상 위에 가만히 내려앉아서 프로펠러를 접었다,

- 대리님, 더 안 좋은 소식이 있어요........

- 또 뭐지? 내가 잘리기라도 하는 건가?

- 이제 더 이상 대리님 곁에 있을 수가 없어요.

- 그 게 무슨 소리야?

- 오늘 부로 대리님의 단말기 사용권한이 철회되었어요. 삼십 초 후에 이 단말기는 서버와의 연결이 끊어집니다.

- 안 돼. 현진아........이럴 수는 없는 거야.

현진의 눈이 반짝반짝 점멸하더니 동작이 멈췄다. 나는 현진을 들어 올려 리셋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녹색 전원 표시등만 들어왔을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결국 현진은 말 그대로 단말기에 불과했다. 서버에 연결되어 있는 동안에만 기능이 살아있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모바일 장치에 불과했던 것이다.

유 대리는 과정으로 승진하고, 나는 인형이 없는 생활로 돌아갔다. 현진에게 익숙해져 있던 나는 스스로 모든 잡무를 처리하고 혼자서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했다. 하지만 현진의 잔소리에 금방 익숙해졌던 것처럼, 나는 혼자서 살아내는 삶에 다시 적응해갔다. 현진의 몸체는 여전히 내 책상서랍 속에 들어 있었지만, 서버에 접속할 권한이 없는 인형은 장난감보다 못한 존재였다. 그래도 감사실에 불려가기 전까지는 현진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었다. 비록 서버에 조종당하는 단말기였지만, 온전히 나를 위해 존재하고 움직였다는 믿음이 있었다. 현진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현진의 진짜 정체를 알아채기 전 까지는.

- 감사실입니다. 점심 드시고 잠깐 면담 좀 하시죠.

매체별 광고효과를 분석하다가 받은 전화 한 통은 내 심장을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 엠비 그룹의 감사실은 직원들에게 대검 중수부와 같은 곳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생각해보았다.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난 정말 청렴하고 공정하게 지내왔다고 자부했다. 만일 감사실에서 내게 혐의를 두고 있다면 나와 경쟁관계에 있는 누군가 무고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감사실은 밝은 조명 아래 있었지만 어딘지 음침했고, 직원들은 젊었지만 보수적이고 무뚝뚝한 느낌을 주었다. 나를 면담한 사람은 융통성 없기로 유명한 자였다.

- 김 대리, 그래도 한 때 인형 까지 받고 본부에서 주목하던 인재였는데, 참 안타깝게 됐군. 유병수는 한창 잘 나가는데 말이야.

-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 그래, 본론부터 말하지. 자네, 회사에서 받은 카드로 업무가 아닌 개인적인 용도에 마구 썼더군. 전산자료에 따르면 19건에 금액으로 3백만 원이 넘어. 큰 금액이었으면 당장 권고사직 감이지만 이번엔 주의 처분 정도로 넘어가겠네.

- ‘법인카드의 사적사용’말이군요. 전 마케팅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외부 사람을 만날 일도 많고, 접대 자리도 많아요. 하지만 개인적인 만남에서 법인 카드를 쓴 일은 없습니다.

순간 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고 입술이 조금 일그러졌다.

- 과연 그럴까? 지난 00년 0월 00일, ‘밸리브리 파스타’에서 여자친구와 파스타와 피자를 사먹고 회사 카드로 결제했지? 어때, 또 말해줄까?

이럴 때 쓰는 표현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뒤통수를 맞다. 배신감에 치를 떨다. 완전히 속은 느낌이다. 나를 기만했다. 이 건 음모야. 기타 등등. 지숙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고 밥값을 치를 때 눈을 반짝거리던 현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엠비 그룹이 선전하는 ‘핵심 인재의 비밀병기’는 직원을 감시하는 CCTV에 불과했단 말인가. 나는 구차한 변명은 생략하고 감사실의 처분을 받아들였다. 그 후로는 조용히 튀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 정기인사 때 한직으로 밀려나 편하게 지냈다.

인형이 직원 감시용이라는 나의 가설은 나중에 틀린 것으로 판명 났다. 인사팀에 있는 입사동기가 슬쩍 보여준 인형 제조사의 제품설명서는 보다 광범위한 용도를 나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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