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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dc.egloos.comeddbuk@hanmail.net 도심 한복판, 오후 2시의 8차선 도로 위. 한 남자가 자신의 행운을 한탄하고 있다. 남자는 수십킬로의 속도로 달리는 수톤의 차량들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유시걸. 21세기 대한민국에 행운보존법의 열풍을 가져다 준 사나이다. 유시걸을 수식하는 표현은 다양하다. 우주적 조만장자, 도박사들의 우상, 불로소득자, A국의 은인이자 B국의 등불, 동북아 연방 대통령 후보 0순위, 21세기의 마이더스. 유시걸은 8차선 도로를 지그재그로 걷는다. 차들은 매번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를 비껴간다. 유시걸은 인류 최고의 행운아였다. 그는 그 사실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시작은 고작 오백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유시걸은 당시 34세로 작은 유통업체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는 외근하러 가는 길에 동전 하나를 주웠다. 2008년에 주조된 오백원 짜리 동전 하나. 이야, 살다보니 길에서 돈을 줍는 경우도 다 있군. 유시걸은 모처럼 얻은 행운을 헛되이 써버리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의 처참한 행운은 그 선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유시걸은 지갑에 든 잔돈을 다 처리할 겸 이월식 복권을 천원어치 구매했다. 다음 날 천원은 세금 공제 후 백팔십삼억이 되어 돌아왔다.

 인생이 180도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와, 이거 좀 멋진데. 그 때까지 유시걸의 인생은 남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도박에서 크게 딴 적도 없고 유년기 불치의 병에 시달리거나 한 적도 없다. 자신의 인생을 대표할 사자성어를 뽑으라면 삼삼오오나 갑남을녀를 골랐다. 유시걸은 특별한 재능이나 높은 아이큐, 뛰어난 반사신경 중 아무 것과도 상관이 없었다. 노력한 만큼 얻었고, 농땡이 친 만큼 잃었다. 제로썸 인생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천원으로 백팔십삼억을 벌은 사람이 되었다.

 에이, 뭐 별 거 아냐. 어쨌든 일주일에 한명 정도는 복권에 당첨된다고. 유시걸은 침착하려 애썼다. 그리고 그 시도는 쉬이 성공했다. 회사도 꾸준히 다니고 사치도 부리지 않았다. 당첨금의 반을 좋은 지역의 땅과 건물을 사는데 투자하고 나머지는 통장에 넣어놨을 뿐이었다. 또 알아? 이게 열배가 되서 돌아올 지. 백팔십삼억은 기업재벌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놀고 먹기에는 충분히 많은 액수였다.

 불편한 일은 없었다. 어쨌든 세상은 복권당첨자의 편이니까. 마침 복권당첨자를 위한 새 보호법안이 개정된 덕도 있었다. 새로운 법은 완벽했다. 종교관계자든 시민단체든 유시걸에게 어떠한 연락도 할 수 없었다. 백팔십삼억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가족도 친구도.


 경사는 연이어 찾아왔다. 대박이 흥부네 박 터지듯 연달아 터진 것이다. 당시 본가에서 연락이 왔을 때, 유시걸은 복권 당첨금을 달라는 이야기리라 생각했다. 것 참, 귀찮게 돌아가는군. 돈 앞에선 부모자식도 없다 욕을 듣게 생겼네. 그러나 복권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숨겨진 유산에 대한 연락이었다. 네? 제 부모님이 사실 다른 분이셨다고요? XX물산 회장이요? 전 입양아였고요? 그런데 돌아가셨어요? 유산은 상속세 떼고 이천억쯤 된다고요? 허, 허허허허. 허허허.

 좋구만. 인생 폈어. 유시걸은 그저 묵묵히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아 평생을 놀고 먹을 수 있다니, 어찌 웃음을 멈출 수 있겠는가? 유시걸은 자신의 꿈 불로소득을 이루었다. 아니, 그 꿈은 분명 인류 전체의 꿈이었다. 그는 평소 하고 싶었던 사치의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만나보지도 못한 부모님 생각은 할 틈도 없었다. 사람의 감정이 개입하기에는 뒤에 붙은 0이 너무 많았다.

 앞서 말했듯, 대박은 계속해서 터졌다. 복권 당첨금으로 구입한 토지와 주식의 가치가 모두 세배에서 네배가량 급상승한 것이다. 재개발과 구조조정, 제 3세계의 공장설립 등 호재가 연달아 터진 덕이다. 그 뿐 아니라 시걸의 유산에 속한 주식 역시도 주가가 확 뛰어올랐다. 그는 명실상부 XX물산의 새 대주주면서 주식계의 새 다크호스였다.


 유시걸은 최고의 향락을 누리고자 마음먹었다. 회사에 사직서도 제출했다. 개인통장에 직장의 자본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많은 돈이 들어있었으니, 회사 다닐 맛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에겐 도무지 일평생 쓰기 힘든 돈이 있었고, 이후로도 꾸준히 얻을 불로소득이 있었다. 향락 말고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 향락이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값비싼 외제차를 살까 했지만 운전면허증이 없었고, 외제차를 타는 사치를 누리기 위해 지루한 면허교습을 받는 일은 졸부가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맛있고 비싼 음식만 먹고 지내려 했지만 무엇이 맛있는 음식인지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고급호텔 요리들을 먹어보았지만 딱히 맛을 느끼지 못했다. 비싼 공연들을 찾아다닐까 했지만 그는 공연도 그닥 즐기지 않았다. 귀한 보석과 옷도 생각해보았지만 영 취미가 맞지 않았다. 유시걸에게는 사치와 관련된 지식이 없었다.

 다만 그는 관심이 조금이라도 가는 물건이 생기면 바로 바로 구매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지출을 했지만 통장에 든 돈의 비율로 치면 많은 낭비가 아니었다. 유시걸의 방은 금방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찼고, 그럴 때마다 청소보다는 수거를 해야 했다.


 결국 유시걸은 돈 쓰는 일은 천천히 하기로 결심했다. 각종 주식과 땅, 건물에 투자하며 돈을 더 벌다보면 자연스레 쓰는 법도 알게 되겠지 막연히 생각한 것이다.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아무튼 손이 가는대로 구매했다. 그리고 그 투자는 어느새 열배에 가까이 불어나 있었다. 유시걸의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는 보통 부자로서 돈을 쓰는 법을 얼추 배웠지만, 평범한 부자와는 비교도 못하게 돈이 불어나버린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유시걸은 자신이 무슨 수로 돈을 벌었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딱히 경제에 대해서 공부한 적도 없었고 부동산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행운아였을 뿐이다. 그의 투자의 엄청난 성공을 그나마 설명할 수 있다면, 적어도 유시걸은 투자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시장에 급히 들어온 엄청난 액수의 거액은 잇따른 투자를 불렀다. 그렇다. 돈이 돈을 끌어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투자 역시 모험임은 분명하며, 유시걸은 언제나 그 모험에서 승리하였다는 것이 남들과 다른 점이었다.

 감당이 되지 않았다. 유시걸은 돈 쓰는 법을 배우길 포기했다. 그는 돈을 뿌렸다. 아, 좋아. 선심이나 잔뜩 써보자고. 뿌릴 곳은 많았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지원, 국가 기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핍박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일거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하여, 학생들의 학업과 취미를 위하여, 친구와 가족들을 위하여. 유시걸의 엄청난 행운은 이미 주변에 퍼질대로 퍼져 있었고, 돈을 달라고 애걸하는 단체나 사람은 그가 만족할 만큼 많았다.


 기부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남들에게 돈을 주는 순간에도 주가는 점점 올라만 갔다. 그래서, 대박 나서 졸부가 된 사람들이 뭐로 망하죠? 도박? 술? 좋아, 도박으로 하겠어요. 유시걸은 카드와 주사위를 선택했다. 좋아, 타짜 아저씨들. 여기 호구가 왔습니다. 그는 결심한 순간 곧장 카지노로 향했다. 그러나 여전히 운명은 그를 배신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어,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세번 연속으로 뜰 확률이 어떻게 된다고요? 3번마 배율이 역대 최고라고요? 거, 젠장. 어지간한 복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돈이 판돈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 돈은 배로 새끼를 쳐서 돌아왔다. 유시걸은 어느새 카지노 두곳의 소유주이자 서러브레드 다섯마리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그가 들어간 판의 다른 도박사들은 언제나 거덜이 났다. 유시걸 승리의 역사는 누군가의 패배의 역사였다.

 독자 제위는 이런 묘사에 있어 어떠한 인간적 감정이나 갈등, 고뇌에 깊이 다루지 않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시걸의 행운은 그런 것들을 묘사하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다. 그의 일상은 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소한 행운은 끝없이 반복되었다.

 그나마 유시걸의 감정을 정의내리자면 죄책감이라 할 수 있다. 고작 나는 운이 좋았고 그 사람들은 운이 나빴다고 이런 결말이라니. 그는 카지노 두 곳을 도박으로 파산시켰고 수많은 사람들을 오링시켰다. 더군다나 그 도박판이 망하자고 들어간 판이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유시걸은 속죄하는 기분으로 도박중독자들을 위한 치료 및 교육, 재활센터에 큰돈을 투자했다. 수많은 도박중독자들이 그 센터를 찾았고 개선된 것 하나 없이 다시 도박판에 뛰어들었다. 그 덕에 더욱 더 많은 이들이 도박에 빠져버렸고 도박중독을 치료하기 위한 시설은 정부지원과 민간투자의 확대로 급호황을 맞았다. 유시걸은 더욱 더 큰 죄책감에 빠졌다.


 행운은 미쳐 돌아갔다. 유시걸이 돈을 기부한 개발도상국, 사회단체, 친구들 모두 엄청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유시걸을 국빈으로 모시고 있는 개발도상국 A는 석유자원이 발견되어 국제사회에서 큰 발돋음을 했고, 부도 직전의 국가 B는 몇 가지 관광상품이 외국 TV에서 소개됨으로써 떼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업의 근간에는 유시걸의 자본이 오할 이상 들어가 있었다. 그가 돈을 기부한 몇몇 사회단체는 연대를 통해 정당의 규모로 거듭났고, 유시걸의 친구들 역시 갈비집에서 건물투자, 벤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큰 수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풍작의 결실은 당연하다는 듯 종자를 뿌린 이에게 돌아갔다. 유시걸은 온갖 산업에 종잣돈을 갖다 바친 일등 투자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수익을 걷었다. 그의 투자처, 그의 논밭은 전 세계를 걸쳐 형성되었고 수익은 우주관측 시 통용되는 단위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실로 천문학적인 영역이었다. 유시걸은 세계적 명예인사가 되었다. 미쳐가는 것을 느꼈다. 압도적인 행운 앞에 유시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벽증적 행운은 계속 되었다. 우주는 마치 유시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마냥, 기적은 꾸준히 그에게만 이루어졌다. 어디에도 그와 같은 행운은 없었다. 길을 가다 목이 마르면 바로 옆에서 음료 시음회를 하고 있었고, 물건을 사면 여지없이 사은품을 받았다. 그의 핸드폰은 경품 당첨을 연락하는 전화가 끊이질 않았고, 사막에 발을 딛은 순간 비가 내렸다. 유시걸은 21세기의 마이더스였다. 어떠한 권능도 재능도 없이 그저 운이 좋은.

 유시걸은 매 주마다 복권을 사기 시작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행운이 지속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두달만에 그는 복권 당첨금에 대한 세금만으로 국가에서 제일가는 우량납세자가 되었다. 수많은 복권회사가 그의 행운아래 무릎을 꿇었다. 국회는 매우 진지하게 유시걸 도박 및 복권 금지 특별법 제정을 고민했다. 유시걸은 차마 남은 양심을 버릴 수 없어 복권구매를 자발적으로 그만두었다.


 내 인생이 치트됐어. 어쩌면 좋지? 유시걸은 이 무시무시한 행운의 연속을 우연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국가의 음모인가? 외계인의 계략인가? 어떤 재복이 붙었길래 이런 끔찍한 행운이 계속되는 것이지? 무슨 몰래카메라야? 유시걸은 평탄한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너무 늦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더라도 행운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유시걸의 주식보유량은 양도 혹은 판매 시 세계적 금융대란을 일으킬 수준이었다.

 유시걸은 행운의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행운을 세상에 되돌려주려 노력했다. 모두 허사였다. 어떠한 음모나 간계도 없었다. 그저 운이 좋았다. 세상은 그에게 받은 것의 수배의 것을 돌려주었다. 유시걸은 언제나 불안했다. 그가 얻은 모든 것은 행운으로 얻은 것이었고, 그렇다면 언제 불운으로 잃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행운과 함께 죄책감과 공포, 허무가 그의 일상이 되었다.

 언론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터무니 없는 확률의 행운을 연달아 겪고 있는 유시걸은 분명 흥미로운 소재였다. 하지만 그들도 딱 떨어질 만한 설명을 해내진 못했다. 다만 몇군데 출판사에서 '유시걸식 행운보존법'이라는 타이틀을 건 자기 개발서적을 출간했을 뿐이다. 이 책들의 내용은 대부분 유시걸의 일대기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자신을 믿고, 성실히 일하고, 인간관계 신경 쓰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면 유시걸 같은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굳이 설명하기조차 번거롭지만, 이 책 역시 유시걸 붐에 편승해 꽤 많은 부수가 팔렸고, 유시걸의 주머니에도 꽤 많은 돈이 들어갔다.


 내가 이런 행운을 누릴 권리가 있나? 유시걸은 분명 불로불사보다는 불로소득을 꿈꾸는 평범한 젊은이였다. 그는 꿈을 이루었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행운이 부당하다 생각했다. 그는 철저하게 제로썸 게임을 신봉했다. 나는 이제까지 내가 희생하거나 노력한 만큼 얻는다고 생각했다. 1을 희생하면 1을 얻는 거지. 근데 나는 0을 희생했는데 세계 50위 안에 드는 부자가 되었다. 사업도, 정치도 하지 않았는데 50위 안에 들었다. 이게 정상인가?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유시걸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희생했다는 진실, 단 하나. 불로소득, 도둑놈 심보다. 어쩌면 행운보존의 법칙이 있을지도 몰라. 전 지구에 보급되는 행운을 일정하며, 누군가 얻은 행복만큼 누군가는 불행을 얻는 거지. 그리고 난 행운환경파괴의 주범이고.


 저, 용한 분이라는 말씀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유시걸은 정치, 재계인들이 수없이 문턱을 드나든다는 무당을 만났다. 도심 한 복판에 있는 커다란 한옥이었다. 검찰이나 탐정, 보험회사 직원도 유시걸의 행운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그는 그저 결백했고 행운아였다. 유시걸은 자신의 압도적인-아마 수치로 따지자면 분모에 0이 백쉰아홉개는 넘게 붙을-확률의 운의 원인을 어떻게든 찾으려 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이 무당을 만나 보라 추천을 한 것이다.

 아아아악! 아아악! 악! 악! 하아악?! 악?! 악?! 꺄아아아악!!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아아아!! 오지마! 오지마! 히아악! 사라져! 사라져!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이보세요, 정신 차리세요! 살려주세요!! 으아아악! 그 무당은 가열 찬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유시걸은 아무도 없는 방에 황량하게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스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유시걸이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절이었다. 무엇이 궁금하신지요? 우리, 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고요. 네, 나쁠 것 없지요. 분명히 부처님이 그러셨다지요? 어떤 말씀 말이시지요? 그러니까, 현실의 고통은 모두 전생의 업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업보들이 쌓여서 내세의 복이 되고 해탈에 이른다 아닙니까? 자세히 얘기하면 좀 틀리지만 대충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말입니다. 네. 저는 아마 꽤 전생에 복이 많았겠지요? 질문을 받은 중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아마 맞을 겁니다. 전 엄청난 운을 타고 났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운을 이번 생에서 써버리면, 내세에는 좀 곤혹스럽지 않을까요? ...네? 중은 어이가 없었다.

 전 너무 행복합니다. 뭐 이게 카운트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고 해도...그냥 이번 생에서 잠깐 참았다 내세에서 해탈하는 게 더 이득이지 않을까요? 제 행운을 보세요. 조금만 더 업을 얻으면 바로 해탈할 수 있을 만큼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지금처럼 쌓인 복을 쓰기만 하면 한 두번쯤은 더 죽어야 할 것 같아서요. 죄송하지만 저는 중이지 보험설계사가 아닙니다. 유시걸은 조용히 물러나야 했다.


 어떤 SF단편 소설이 생각나네요. 이번에 유시걸이 만난 사람은 물리학을 공부하는 대학 새내기였다. 그 소설에 행운광선이라도 나오나요? 그렇지는 않구요, 평행우주에 관한 설명을 하는 이야기예요. 승리할 확률이 수만분의 일인 도박에 도전하는 사람의 이야기지요. 그 사람도 저처럼 도박에서 이겼나요? 아니요. 져서 죽었어요. 그런데 저랑 그 사람이 어떻게 비슷합니까?

 이렇습니다. 평행우주는 무한히 많은 양자가 움직이는 경로가 모두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평행우주가 수없이 탄생한다는, 우주는 나무처럼 가지가 무한히 자라난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까요? 그 이야기에 매혹된 한 젊은이가 경마에서 자신이 건 말이 지는 경우에는 자신이 바로 죽도록 장치를 꾸며요. 이길 확률이 만분의 일이라도, 무한의 만분의 일은 무한이니까요. 무한한 평행우주에서 자신이 성공해 살아가겠지요. 유시걸씨는 그 수많은 평행우주에서 승리한 한 사람이라 이거지요. 운이 좋아서요. 아마 다른 평행우주에는 엄청 불행한 유시걸씨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제 기적과 같은 행운이 단순한 우연이라 이것인가요? 유시걸씨 배후에 아무도 없다면, 그렇지요. 아무도 유시걸씨의 행운이 조작이라는 것을 밝혀내지 못했잖아요? 애초에 누가 조작할 이유도 없고, 현재 과학기술로 가능한 수준도 아니고요. 그래서, 당신은 이 모든 불의를 그저 우연이라는 이유로 용서하란 말입니까? 유시걸은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유시걸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화풀이로 길옆에 있는 건물에 주먹을 후려쳤다. 그러자 건물의 벽이 부서지면서 안에 들어있던 시체가 나왔다. 이번에도 신문 기삿거리가 생겼군. 유시걸은 시체를 무시하고 집으로 향했다. 뭔가 이질적인 것을 밟은 느낌이 들었다. 가죽 지갑이군. 그것도 꽤 명품. 그는 이제 발에 밟히는 감촉만으로도 지갑 브랜드를 구분할 수 있었다. 지갑이 얇은 것을 보니 카드랑 수표 혹은 주인이 대단한 사람이겠군. 이번에도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갔다. 목이 말랐다. 바로 보이는 음료 자판기 잔돈배출구에는 동전 칠백원이 있었다. 누가 '또' 놓고 갔군. 신호등은 당연히 파란 불이었다.

  길을 걸으며 유시걸은 계속 물리학과 새내기의 말을 생각했다. 그래, 그 말이 옳다고 하자고. 내가 그냥 운이 좋아서 그랬다고 말이야. 만분의 일이 만번 반복되는 일이 만번 더 반복되는 행운을 만번 정도 맛보았다고 치자고. 그런 만 곱하기 만 곱하기 만 곱하기 만분의 일 확률의 우주에 내가 살고 있다고 보자. 그럼 만 곱하기 만 곱하기 만 곱하기 만분의 만 곱하기 만 곱하기 만 곱하기 만 곱하기 빼기 일의 우주에는 이렇지 않는 내가 있다는 것이지?

 그러면, 좋아. 내가 만분의 일에 계속 도전을 하다보면 어쨌든 나는 도박에 실패하는 우주에 갈 확률이 점점 높아진다는 얘기잖아? 유시걸은 결심했다. 더욱 더 큰 도박에 도전하기로. 제발 불행한 우주에 속하기를 빌면서. 유시걸은 서울역으로 향했다.


 유시걸은 셔츠를 벗었다. 빌어먹게도 여름이라 춥지도 않군. 그의 몸이 그대로 햇빛에 반사된다. 살짝 겁이 났다. 서울역 앞에서 스트립쇼라니, 이게 들키지 않을 확률은 만분의 만분의 만분의 만분의 일 확률도 되지 않겠지. 시걸은 자신의 몸매에 자신이 없었다. 그런만큼 잘된 일이었다. 찰칵하고 벨트 푸는 소리가 났다. 지퍼를 내리고 바지를 벗었다. 줄무늬 사각팬티는 내리기 겁이 났다. 지금 이걸로도 충분히 쪽 팔리지 않나? 아니야. 이제까지의 행운을 생각해보라고. 신발도 양말도 모두 던져버렸다.

 결국 그는 성기를 덜렁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이상하네. 차가 없어. 하지만 도보에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 차도 없으니 내가 횡단보도 걷듯 저기로 건너가면 사람들이 다 날 주목하겠지? 유시걸은 이런 상황에 희열을 느꼈다. 그가 새로운 성적 취향을 개발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지독한 행운에 막을 내릴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아스팔트의 감촉이 발에 전해졌다. 오, 좋아. 이대로 도로를 질주하자고. 내일 사회면은 몽땅 내 차지다. 그는 성공했다. 서울역 앞의 모든 이들이 그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성기 확대 수술이라도 받고 나올 것을, 유시걸은 살짝 후회했다. 아냐. 작을수록 좋아. 하고 자신을 위로한 유시걸은 슬슬 뜀박질을 시작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유시걸은 깜짝 놀랐다. 이 환호성은 무엇이지? 잽싸게 옆을 둘러보았지만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외친 것은 아니었다. 뒤였다. 환호성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염된 기계에서 벗어나자! 구호 소리였다. 우리 모두! 자연으로! 팔박자 구호, 시작! 유시걸은 뒤를 돌아보았다. 수천명의 나체와 수천명의 나체가 들고 있는 피켓이 보였다. 그들 역시 달리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유시걸은 깜짝 놀라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열심히 도망쳤지만 결국 시위대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스트립쇼도 행운으로 끝났다. 환경보호 시민단체는 친절히 유시걸에게 집에 돌아갈 때 입을 옷가지를 주었다.


 유시걸은 결국 다음 날 신문의 한 면을 모두 차지했다. 단, 사회면이 아니라 정치면에서. 나체 시위마저도 참가한 열성 시민단체 회원여서만이 아니라, 수많은 시민단체의 기부자로 유시걸은 분명 그 쪽에서도 유명인사였다. 곧 유시걸을 중심으로 한 시민단체들이 모여 커다란 정당을 이루었다. 정치계의 혁신이었다. 이념이나 공약보다는 이미지를 중심하는 정치계였기에, 이 정당의 지지도는 날마다 올라갔다. 사회봉사, 공헌, 유시걸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같은 이미지는 대중적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다. 어느새 유시걸은 대통령 후보 기호 5번으로 나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옷 한번 벗었다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이다.

 저는 대통령 감이 아닙니다. 낙선시켜주십시오. 그의 연설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되었다. 후보 취소 신청도 하려 했지만 언제나 정당에서는 그 신청을 무마시켰다. 사람들은 자신을 낙선시켜달라는 유시걸을 겸손하고 모범적인 후보라고 생각했다. 유시걸의 겸손함과 막대한 재산, 자수성가라는 이미지 덕분에 지지율은 그의 통장잔액만큼 올라갔다.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유시걸씨,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으셨어요. 운이 아니에요. 논리적이지요. 논리요? 이게요? 유시걸은 자신의 선거인단에게 자신의 행운에 대한 불평을 했고, 그러자 그 중 한명이 운이 아니라 대답했다. 그는 자신을 잡스러운 글을 끄적대는 사람이라 소개했다.

 분명 상식이나 헌법 상의 논리와는 다른 영역에 있지만, 분명 원칙은 있어요. 무슨 원칙이요? 유시걸씨의 행운이라는 원칙이요. 고전소설이 권선징악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진행되고 공포영화가 공포라는 원칙을 가지고 진행되는 것처럼 시걸씨의 인생은 유시걸의 행운이라는 원칙으로 진행되지요. 유시걸씨, 자살 시도한 적 있으세요? 네. 여섯번이요. 다 재수 좋게 실패했어요. 어제도 목을 매달았는데 줄이 끊어졌고요. 그렇지요? 그게 원칙이랍니다. 신이 정한 원칙이요.

 유시걸은 어색하게 말했다. 다음에는 외국, 조금 치안이 좋지 않은 곳으로 가서 차에 치일려고 했는데요. 그러면 누구도 절 보살펴주지 않을 것 같아서요. 작가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요, 만약 제가 신이라면 유시걸씨를 차로 치고, 상처 입은 얼굴을 꽃미남으로 성형할 것 같군요.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이 말도 안되는, 황당한, 비상식적인 행운이 그저 그 원칙이라는 이유로 용서가 됩니까? 받아들일 수 있으세요? 유시걸은 잔뜩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작가는 더 큰 목소리로 대꾸를 하기 시작했다. 유시걸씨는 아직도 그 사람들을 모르겠습니까? 그들은 당신의 행운이라는 논리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원칙에도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물론 경음화현상에서 방언 사용까지도요! 그들은 자장면을 짜장면이라고 써놓고도 희희낙낙할 하며 자랑하고 다닐 인종들이라니까요!


 유시걸은 작가와의 이야기를 마치고 거리로 나왔다. 그렇다. 도심 한복판, 오후 2시의 8차선 도로 위. 이야기는 맨 앞의 문단으로 돌아온 것이다. 거리는 차로 가득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무도 유시걸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지나쳐만 가니까. 도로 위를 걸어도 모두 흘낏 바라보고 끝날 뿐이다. 아니면 왜 지랄이냐고 욕 한마디 하고 끝나거나.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푸르다. 삿대질을 한다.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감자주먹을 먹인다.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고 야유를 퍼붓는다. 유시걸은 분노로 가득 찬 풍선 같다. 이리저리 휘청휘청 중앙선을 왔다갔다한다. 하늘에 적대감을 터뜨린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한다. 유시걸은 또 다시 옷을 벗고 하늘에 욕설을 퍼붓는다.

"개새끼야!" "도대체 니가 뭔데 이런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어?!" "왜 하필 나야!" "너는 왜 니가 한 일에 칙임도 지지 않는 거야?!" "병신아!" "이게 옳다고 생각해? 정말?" "유시걸이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이렇게 행복해?" "내가 무언가, 무언가 올바른 일을 했다고 이래?" "유시걸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어? 아니 적어도, 나 자신에게라도 도움 되는 일을 했냐고?" "아니잖아! 아니잖아! 근데 왜 이래!" "이 모든 걸 그냥 운이라고 다 받아들이라는 게 정말 옳아?" "니가 생각이 있으면 이리 와서 대답 좀 해봐, 이 개새끼야!!"

 그 때였다. 유시걸의 무수한 욕설이 그친다. 모든 것이 멈춘다. 도로의 차들도, 공기의 흐름도. 유시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열렸다고, 유시걸은 느낀다. 하늘이 갈라지더니 그 틈에서 빛이 쏟아져 나온다. 빛과 함께 무수한 어린 아이들이 흐르듯 쏟아진다. 그리고 아이들 가운데에는 한 사람이 있다. 흰수염과 흰머리, 하얀 옷을 두른 웅장한 노인. 유시걸은 떠올렸다. 이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잖아.

"이것 참, 죄송합니다."

 유시걸은 당황했다. 노인이 지상에 내려와 매우 공손하게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닌가. 검지를 들어올리던 유시걸은 잽싸게 손을 뒤로 뺀다. 노인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계속 말을 잇는다.

"귀하의 삶에 불편을 끼쳐드린 것에 대해 심심한 사죄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사태는 어디까지나 귀사의 본의가 아니었으며, 귀하의 행운에 실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받으신 정신적 피해를 위한 치료과정에 드는 비용은 모두 당사가 전액 변상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여기에 있어서 변상은 어디까지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행될 것이며 한푼의 빠짐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서류의 맨 아래에 사인해주시고, 네, 네, 여기입니다. 당연히 행운은 계속될 것이며 또한 보상을 드리기 위해 귀하 유시걸씨의 인생을 이십년 더 늘려드리겠" "아 시발아 닥쳐!!"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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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rnest 08.08.15 19:16 댓글 수정 삭제
    ㅅㅂ 이 두글자가 얼마나 많은 뜻을 함축할 수 있는지, 새삼스레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_-
  • No Profile
    dcdc 08.08.16 16:06 댓글 수정 삭제
    저 두글자를 쓰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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