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소환장

2009.12.26 23:4512.26

부산의 태양은 적당히 이글거린다. 태양은 장산 너머로 떠올라 해운대와 수영만을 골고루 핥은 뒤 내륙으로 도망간다. 부산에 비하면 대구는 거대한 양은 냄비다. 대구의 태양은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싸늘하게 식는다. 부산은 한여름 밤에도 에어컨을 켤 필요가 없고 한겨울 밤에도 수도관이 동파되지 않는다. 부산의 넉넉한 햇살은, 여름에 자제하고 겨울에 저항한다. 부산 시민들은 말한다. 경기만 좋으면 살기 딱 적당한 곳이지예, 경기만 좋으면…
2005년에 육군 군수사령관으로 부임한 정해일 중장은 부산의 적당함이 싫었다. 부산은 처음부터 싫었고 갈수록 끔찍했다. 정 중장은 최전방의 맵고 알싸한 공기를 그리워했다. 11사단장으로 일하던 시절, 겨울에는 주먹만한 눈송이들이 툭툭 군화코 위로 떨어졌으며, 한여름에는 태양이 정수리 위에서 작렬했다. GOP 이중철책 앞에서 정 중장은 어떤 열정의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사선(死線)의 긴장감에서 나오는 열정이었다. 부산에 부임함과 동시에 정 중장의 열정은 사라졌다.
2007년 11월8일 저녁 6시 정 중장은 육군본부 방문을 마치고 부산역에 도착했다.
“다 왔는가?”
정 중장은 얕은 잠에서 깨어 부관에게 물었다. 요즘 정 중장은 한밤 중에도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밤마다 꿈과 현실이 몸을 섞으며 악다구니를 썼다. 아침이 되면 속옷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네, 그렇습니다. 내리실 때입니다.”
비서실에 발령 받은 지 한달 밖에 안된 강진호 중위가 서류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중위의 얼굴은 곱상했다. 명문대 ROTC 출신들은 한결같이 피부가 고왔다. 정 중장은 강 중위의 뒤를 따라 플랫폼을 나섰다. KTX는 폭주하는 괴물이라고 정 중장은 생각했다. 속도에는 품위가 없다. KTX의 플라스틱 의자는 새마을호 특별석의 우아한 플란넬 좌석에 미치지 못했다. 빠르기만 하면 체면이고 뭐고 필요 없단 말인가… 부산역을 나서며 정 중장은 살갗에 달라붙는 햇살을 털어버리듯 두 팔을 내저었다.

정 중장은 이날 새벽 네시에 일어났다. 아내가 침대에 누운 채로 말했다.
“여보, 이렇게 일찍 안가도 되잖아.”
아내는 가을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아침 저녁을 생식 분말로 때우는 아내의 얼굴은 주름 투성이였다. 아내의 뱃가죽은 지방질이 빠지는 만큼 늘어졌다. 정 중장은 대답하지 않고 세면대로 갔다. 고혈압 때문에 상복하는 아스피린 통들로 화장실 찬장이 가득했다. 정 중장은 아스피린 두 알을 삼키고 세면대에 찬물을 가득 받았다. 아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 문 앞에 섰다.
“여보, 무리하지 마. 이제 쉴 때도 됐어.”
“알았어. 들어가 자.”
정 중장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찬물은 피로를 마비시켰다. 정 중장은 천천히, 오랫동안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았다. 얼굴이 일그러진 초로의 사내가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2007년은 정 중장의 계급 정년이었다. 진급하지 못하면 이듬해 봄 인사 때 군복을 벗어야 했다.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정 중장은 육군본부를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참모총장과 인사과장은 갈 때마다 딴청을 피웠다. 애들은 잘 크는가… 건강 관리 잘 하게, 나는 심비대증이라네… 심장이 심히 비대해졌다지… 피로 푸는 데는 터키탕이 최고야… 유성탕 미자년 방뎅이 때문에 요즘 회춘 중이지… 회충 같은 년이야…. 술자리에서 총장은 과묵했고 인사과장은 수다스러웠다. 그뿐이었다. 늦가을이 되자 2군 사령관 자리에 2군단장이 낙점 되었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육본은 군수물자나 나르는 자리에 정 중장을 처박아 두고 서서히 말려 죽였다.
정 중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해 가을 정 중장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했다. 참모장에게 정보화시대에 맞는 새로운 물자관리 시스템을 개발하라고 지시했고, 병사 사기 진작 방안을 직접 입안했다. 명령은 잘 이행되지 않았다. 다그칠 때마다 참모장은 예하 부대를 분석 중이라고 말했다. 참모장은 내년엔 누가 책임질 거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던 참모들은 정 중장이 나타나면 황급히 경례를 하고 사라졌다. 소위부터 소장까지, 모두가 정 중장을 기피했다.
한달 전부터 정 중장은 권총을 품에 넣고 귀가 했다. 38구경 K-5 리볼버의 손잡이는 묵직했다. 품안에 넣고 손잡이를 어루만지면, 권총은 쪼그라든 남근을 대신해 안도감을 주었다.
이날 오후 1시 육본은 군수물자 관리 시스템의 선진화에 대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정 중장이 이날의 발표자 중 한 사람이었다. 군수사령부 비서실은 한달 전부터 빔 프로젝트용 AVI  파일을 만들고 수 차례 시연했다. 정 중장은 발표 내용을 한 자도 빠짐없이 외우고 또 외웠다. 잠자리에 누우면 빔 프로젝트의 뿌연 광선 속에 드러나는 영상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정 중장은 직접 해외의 관련서적을 뒤져서 내용을 보완했다.
이날 새벽 정 중장은 세수를 마치고 미리 다려놓은 군복을 입었다. 아내는 다시 코를 골았다. 정 중장은 침실장 서랍 깊숙한 곳에서 K-5를 꺼내 안주머니에 넣었다.
육군본부 강연장은 만원이었다. 정 중장은 심포지엄 세 시간 전에 도착하여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다. 발표자 중 한 사람인 2군단장은 총장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했다. 정 중장은 그 동안 빔 프로젝트를 조작하는 관리병들을 감시했다. 한치의 오차도 용납될 수 없는 자리였다. 오후 1시5분에 총장은 2군단장과 함께 나타나서 자리에 앉았다. 총장은 단상 위의 정 중장을 향해 미소를 지은 뒤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정 중장은 미리 연습한 어조와 음량으로 발표를 진행했다. 정 중장의 연설에는 막힘이 없었다. 모든 단어에 적당한 리듬과 악센트가 가미했다. 해외 사례가 공개될 때, 어렵사리 구한 미군 동영상들이 스크린을 압도했다. 청중들은 조용했다. 총장은 발표 5분 뒤부터 눈을 감고 다시는 뜨지 않았다. 영관급들은 시계를 흘끔거렸다.
“이상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군의 비효율적인 재고 물자 관리를 개선하기 위해 통합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며…”
정 중장은 발표 후반부에 더듬거렸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영관급들이 허리를 잔뜩 굽히고 강연장을 빠져나갈 때부터, 정 중장의 발표는 리듬과 악센트를 잃었다. 저런 개새끼들이…어떻게 감히 내 앞에서…어떻게 감히…. 정중장은 남은 발표를 최대한 빨리 마치고 착석했다. 발표문의 마지막 문장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입천장에 갇혀 헐떡였다.
영관급들은 2군단장이 발표를 시작할 때 뒷문을 열고 돌아왔다. 2군단장은 빔 프로젝트도 발제문도 준비하지 않았다. 예하 부대의 사례를 열거하며 2군단장은 자신 있는 어조로 군수지원체계의 개혁 필요성을 역설했다. 짧은 발표 뒤에 박수가 터졌다. 박수는 우레와 같이 강연장을 뒤덮었다.
정 중장은 야전점퍼 안주머니에 넣어둔 권총이 발기하는 것을 느꼈다. 권총의 손잡이가 점점 뜨거워졌다. 권총은 정 중장의 심장고동에 맞춰 요동쳤다. 늑골을 사이에 두고 권총과 심장이 터질 듯이 부풀어올랐다. 정 중장은 권총을 꺼내 2군단장의 주둥이에 총알을 박아 넣고 싶었다.
여보, 무리하지 마….
아내는 새벽에 그렇게 말했다. 무리하지 말라고? 이 세상에 무리하지 않고 살아남을 길이 있나? 내가 얼마나 몸부림치는지 알아? 당신은 짐작도 하지 못할 거야.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어.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정 중장은 이를 악물었다.
심포지엄은 2시30분에 끝났다. 참모총장이 일어나 발표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저녁에는 장성들만 참석하는 간단한 회식이 예정돼 있었다. 정 중장은 부산에 긴급회의가 있어서 회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총장에게 보고했다. 그것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군수사령부 참모들이 긴급대책회의를 요청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심포지엄이 끝나기 직전에 정 중장에게 전달됐다. 정 중장은 황급히 육군본부를 빠져나왔다.

부산역 주차장에 운전병 김인식 상병이 차를 대기해 놓았다. 차는 붐비는 역 앞을 지나 도시 고속화도로에 진입했다. 수영구의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와 신세계백화점이 멀리 보일 때부터 정체가 시작됐다.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수영만의 바닷물이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보트 한대가 뽀얀 거품을 물고 바다를 가로질렀다. 신세계 백화점 건물을 짓기 시작했을 때 지하에서 해수온천이 터졌다. 백화점은 온천물을 이용해 대형 사우나를 만들었다. 주말에 사우나는 시민들로 미어터졌다. 되는 놈은 뭘 해도 돼…. 부산의 부자들이 다 모여 있다는 수영구에 아파트를 사놓지 않은 것을 정 중장은 후회했다. 정 중장은 군복무 내내 관사를 고집했다. 정 중장은 인생을 바보처럼 살았다.
“인식아…. 밥은 먹었나.”
“네, 먹었습니다. 사령관님.”
운전병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사령관이 급작스럽게 내려왔으므로, 김 상병은 허겁지겁 차를 몰고 부대를 나왔을 것이다. 김 상병은 숫기가 없었다. 아침에 관사 앞에 차를 대놓고 담배를 피우다가, 대학교 2학년인 정 중장의 딸이 나오면 김 상병은 얼굴을 붉혔다. 정 중장은 딸을 보는 운전병의 눈 안에서 감춰진 성욕을 읽었다. 어린 것들은 억눌린 성욕을 낙인처럼 가슴에 담고 있는 법이다.
“인식아…. 광안대교 건너봐라. 좀 돌아가자.”
“네? 네, 알겠습니다.”
번호판에 은색 별 세 개를 붙인 군수사령부 1001호 그랜저는 저녁노을을 뒤로 하고 광안대교로 달렸다. 조수석의 부관이 의아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흘낏거렸다. 지금쯤 사령관실에 모인 참모들은 애가 달아 있을 것이다. 정 중장은 그들을 기다리게 하고 싶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누군가를 지배하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림의 대상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다.
저녁 7시32분 차는 마침내 군수사령부 정문을 통과했다. 위병들이 요란한 몸짓으로 일동 경례를 쏘아붙였다. 정 중장은 천천히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참모장, 법무실장, 정훈실장, 탄약사령관이 모과차를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기다림에 지쳐 있었다. 정 중장은 그들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이거 미안하네. 내가 좀 늦었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참모장이 일어서서 경례를 올리고 말했다. 아무도 심포지엄이 잘 진행됐는지 묻지 않았다. 그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응. 그런데 무슨 일이라고? 투서가 왔어?”
“예. 익명의 투서입니다. 어떤 놈이 10년 전에 탄약사령부에서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적어 보냈습니다. 사령관님 자리 앞에 편지 원본이 있습니다.”
정 중장은 A4 용지에 워드프로세서로 입력한 편지를 읽었다. 편지는 발신자의 마음 속에 고인 어둠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장은 거칠고 투박했으며, 분노로 가득찬 비명처럼 보이기도 했다. 불가해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의 수렁이 편지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미친놈이군. 미친놈.”
정 중장은 중얼거렸다. 법무실장이 말했다.
“장난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령관님을 기다리면서 당시 상황에 대해 저희끼리 얘기를 나눴습니다. 편지에 적힌 10년 전 날짜에 실제로 자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날씨나 주변 정황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정 중장이 물었다.
“아직 육본이나 국방부에 보고하진 않았지?”
탄약 사령관이 말했다.
“네. 아직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사령관님께서 결정하실 문제라고 판단했습니다. 제 앞으로 배달된 편지를 읽자마자 군수사령부 참모실로 연락했습니다. 당시 부대일지를 뒤져보면 당직 근무자가 누구였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투서를 한 놈의 신원은 금방 파악이 가능합니다.”
“아직 파악하진 못했나?”
“네. 행정과에 기록을 뒤져보라고 지시는 해 놨습니다.”
“그때 가혹행위를 한 아이는 어떻게 됐지?”
법무실장이 말했다.
“오늘 오후에 헌병대와 군형무소에 전화해서 알아봤습니다. 그 상병은 구타와 가혹행위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고 불명예제대를 했습니다. 항소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민간 형무소에서 1년 반을 살고 출소했다고 합니다.”
정훈실장이 말했다.
“그냥 덮어둘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투서를 한 놈은 살인에 대해 묘한 환상 같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제대 뒤에 그 놈의 환상은 더 커졌을 겁니다. 환상을 실현시키고 싶어서 매일 안달이 날 겁니다. 이런 놈은 잡힐 때까지 계속 범행을 저지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아마 몇 명쯤 더 죽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추가 범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경찰과 공조해서 놈을 잡아야 합니다. ”
정 중장은 1분 동안 눈을 감았다. 60초 사이에 정 중장의 가슴 밑바닥에서 어떤 결단이 떠올랐다. 그 결단은 군생활 중 처음 해보는 일탈 같은 것이라고 정 중장은 생각했다. 그 결단에는 쾌감마저 묻어났다.
“미친놈이야. 그냥 묻어둬.”
군수사령관실에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동의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령관의 결정에 참모들은 무언으로 저항했다.
“그만 가서 저녁들 먹어.”
참모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탄약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제 부대에서 일어났던 일이라 두고만 볼 수가 없습니다. 제 느낌에 이놈은 정말 심상치 않은 놈입니다. 놈의 신원이라도 파악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만 됐다니까. 군수사령부 전체가 미친놈 장난에 놀아났다고 말이라도 나오면…”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탄약사령관이 군수사령관의 말을 잘랐다. 원스타가 감히 쓰리스타의 말을 가로챘다. 탄약사령관은 사과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조사를 철저히 진행해야 합니다. 나중에 진짜 큰 사건이 터지면 누가 책임을 집니까?”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당신이 책임질 수 있는가… 퇴출이 몇 개월도 남지 않은 퇴물이…. 탄약사령관의 말은 정 중장에게 이런 의미로 다가왔다. 정 중장은 분노를 느꼈다. 분노가 너무 갑작스럽고 맹렬하게 치솟아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심장이 헐떡였다. 점퍼 안주머니의 권총이 다시 뜨거워졌다. 권총은 정 중장의 가슴에 착 달라붙어 거머리처럼 꿈틀거렸다. 정 중장은 고개를 들었다. 머리 속에서 수백개의 창문이 갑자기 열리고 부산의 폭풍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윙윙 거리는 바람 소리 때문에 정 중장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바람은 고함을 쳤다. 네가 뭘 원하고 있다면 지금 바로 해! 지금이야! 권총 손잡이가 발기했다. 손바닥이 다시 축축해졌다. 정 중장은 벌떡 일어섰다.
축축한 주먹을 꼭 쥐고 정 중장은 창가로 걸어갔다. 사령관실 뒷편 공터에서 의장대 신병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군수사령부 깃발 서너개가 똑 같은 각도로 떠올랐다. 처음부터 다시! 의장대 고참 한명이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정 중장은 심호흡을 했다. 머리 속의 창문들이 서서히 닫혔다. 여보,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이제 쉴 때도 됐다고? 여보, 당신말이 맞아… 정 중장은 다음주부터 주말마다 아내와 등산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더 이상 무리한 프로젝트를 밀어붙이지 않겠다고, 육본 문턱이 닳도록 들나들지도 않겠다고 정 중장은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몇분 전에 내린 한 가지 결단만은 수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 나가. 해산해. 투서 건은 더 이상 조사를 진행하지 않는다. 편지는 내가 직접 폐기한다. 향후 이 일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지휘관이나 참모는 중징계 하고 인사고과에 반영하겠다.” 참모들이 떠난 뒤 정 중장은 창틀에 기대 편지를 정독했다. 편지는 누군가의 소환장 같았다. 10년 전의 살인자는 죽음에 관련된 가해자와 피해자와 그들의 동료들과 징계권자와 군수 사령부 전체를, 자신만의 법정으로 소환하고 있었다. 정 중장은 다시 창가로 몸을 돌려 의장대 신병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야, 이건 내 소환장이야…
정 중장은 군대가 만들어낸 이 괴물이 세상을 활보하도록 놓아 두고 싶었다. 세간을 흔드는 연쇄살인사건이 터지고 군대에서의 첫 살인이 밝혀지고 군 관련자 모두가 소환됐으면 좋겠다고 정 중장은 생각했다. 정 중장은 결국 군대를 용서할테지만, 복수의 희미한 가능성 하나는 남겨두고 싶었다. 결국 내 책임은 아니야… 정 중장은 편지를 찢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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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약지원사령관 귀하.
나는 나의 시작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없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시작했거나,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했을 지 모른다. 나는 나의 계기들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 내가 새로운 세상에 눈뜬 첫 계기는 군복무 시절에 찾아왔다. 그 계기는 찰나의 순간에 정확하게 나를 찔렀다.
상병 계급장을 갓 달았을 때 얼굴이 하얀 신병이 들어왔다. 내무반에서 각을 잡고 앉아 있는 박현철의 얼굴은 찐빵 같은 군모 밑에서 진빵의 속살처럼 허여멀건 했다. 소위 명문대 국문과 재학생이라는 박현철은 관심사병이었다. 중대 역사상 그만큼 뜨거운 관심을 받는 사병은 없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면 박현철은 두려움에 온몸을 떨었다. 박현철은 삽질을 하다 기절하기도 했고 훈련 중에 탄띠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자대배치 첫날, 말년 병장이 박현철에게 총을 피엑스에서 사오라고 말했다. 박현철은 피엑스로 달려가 만원짜리 한장을 내밀었다. 피엑스 관리병은 선임을 대동하지 않고 들어온 신병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총을 유류고 뒷편에 두었으니 빨리 가져오라고 말했다. 박현철은 그날 밤 늦도록 민들레가 진을 치고 있는 유류고 뒷편 공터에서 총을 찾았다. 중대가 발칵 뒤집혔다. 말년 병장은 제대를 두 주일 남겨놓고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을 돌았다. 자대배치 둘째 날 식당에서 고참이 퍼주는 대로 밥을 받아먹던 박현철은 식당 바닥에 음식을 게워냈다. 그날 저녁 인사계가 중대원들을 집합 시켜서 신병 가혹행위에 대한 소원수리를 받았다.
어머니가 처음 위병소로 면회 왔을 때 박현철은 면회를 거부했다. 관물대 모서리에 부딪혀 박현철의 눈가는 시커먼 멍 투성이었고 눈동자가 섬뜩하게 충혈돼 있었다. 박현철은 자신의 이런 꼴을 어머니에게 보여주기 싫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머니는 두 시간 동안 위병소에서 기다리다가 서울로 돌아갔다. 어머니가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박현철은 막사를 뛰쳐나가 연병장을 뛰었다. 박현철은 숨이 막혀 쓰러질 때까지 달렸다.
나는 박현철에게 관심이 많았다. 스무해를 살아오면서 나는 박현철만큼 속살이 여린 아이를 보지 못했다. 나는 그런 여린 존재가 육식동물들의 세계에서 처절하게 짓밟히고 무너지고 단련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즐거웠다.
박현철을 가장 괴롭힌 선임은 이중엽이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이중엽은 박현철 옆에 앉아 새끼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살짝 건드렸다. 이런 개새끼! 고참이 건드렸는데 관등성명도 안대? 이중엽은 잠에 젖어 흐물거리는 박현철을 끌고 보일러실로 내려갔다. 박현철은 주먹과 각목으로 1시간 동안 맞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박현철이 다시 침상에 누우면 이중엽은 엉덩이를 붙잡고 흘레붙는 흉내를 냈다. 하복부를 신병의 엉덩이에 문지르는 소리가 밤마다 들렸다. 박현철의 동기들은 종종 목욕탕에 집합했다. 여덟명의 동기들은 목욕탕 타일 바닥에 머리를 박고 일렬로 늘어섰다. 이게 다 너희 잘난 동기 박현철 때문이야, 라고 이중엽은 느물거렸다. 이중엽은 맨발로 동기들의 배를 걷어찼다. 물에 젖은 알몸들이 10센티쯤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타일바닥에 추락했다.
박현철은 어떻게든 버텨냈다. 나는 병장이 되었다. 그 해 여름에 중대단위 사격훈련이 있었다. 박현철은 그날따라 침착했다. 박현철이 사격장에서 허둥대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박현철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늘이 없는 사격장 앞 공터에서 박현철은 이중엽 상병을 보고 있었다. 땀이 이마를 지나 눈동자 위로 뚝뚝 떨어졌다. 이중엽 상병이 히히덕거리며 공터를 돌아다닐 때 박현철의 눈동자는 그를 좇아 좌우로 움직였다. 박현철은 짐착하고 평안해 보였다. M16 총신에 삽입된 꽂을대가 방향을 잃고 덜거덕거렸다.
나는 중대 서무계를 불러 박현철을 사격에서 제외시키라고 말했다. 서무계는 고개를 내저었다. 빼란 말야, 새꺄! 몸이 안좋다든지 정신상태가 불안해 보인다든지 인사계한테 무슨 이유를 둘러대서라도 빼! 빼! 나는 으르렁거렸다. 그날 박현철은 사격을 하지 못했다. 박현철은 막사로 돌아오는 대오의 뒷줄에서 이중엽 상병의 뒷통수를 노려보았다.
탄약지원사령부는 부산에 있는 탄약 보급기지다. 그날 밤 태풍이 남지나해를 건너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은 태풍의 오른쪽 반원 안에 들어왔다. 비가 사선으로 들이쳤고 막사 지붕 위에서 떨어진 기왓장이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나는 그날 당직하사 완장을 차고 행정반에서 철야근무를 했다. 초소로 근무를 나가는 병사들의 복장을 점검하고 암구호를 확인한 뒤 나는 공포탄을 지급했다. 병사들은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둘씩 짝지어 막사 현관을 나섰다. 현관문이 열리면 판초우의들이 맞바람을 맞아 펄럭거렸다.
새벽 1시에 당직사관을 서던 이상진 중사가 중대장실로 들어가 잠들었다. 바람이 유리창을 핥으며 웅웅 거렸다. 각 초소에 연결된 TA는 딸각거리지도 않았다. 나는 졸았다. 경계가 풀어진 내 의식 속으로 빗발이 휩쓸어버린 창 밖의 세계가 고여 들었다. 들창이 덜그럭거리는 각 초소에서 사수들은 부사수를 세워놓고 졸았다. 바람은 해운대를 지나 장산 능선을 넘어 수영만을 흔들었다. 새벽 2시에 전화벨이 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탄약지원사령관 당번병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사령관이 지금 각 탄약중대 행정반을 순찰하고 있다고 당번병은 말했다. 아, 씨발, 그걸 왜 인제 얘기해요? 나는 당번병의 변명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이 중사가 중대장실에서 버클을 풀어헤치고 뛰어나왔다. 불침번들은 중대 복도에 일렬로 늘어섰다. 씨발, 오늘 된통 걸렸군, 씨발, 씨발. 이 중사의 입에서 씨발이라는 단어가 끝나기도 전에 복도에서 불침번들이 경례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충성 구호는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비명 같았다. 준장 한명이 중대 행정반으로 걸어왔다. 이 중사와 나는 입구에서 동시에 거수 경례를 붙였다. 사령관은 백발의 잘생긴 오십대 사내였다. 그래, 수고들 하는군. 사령관은 빙그레 웃으며 이 중사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관등성명을 내질렀다. 온몸에 식은 땀이 흘렀다. 이마에서 땀방울 하나가 내려와 왼쪽 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별 하나’와 조우했다. ‘별 하나’는 그냥 피곤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태풍 피해를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령관이 복도 너머로 사라질 때 나는 군화를 내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 왼쪽 군화에는 군화끈이 없었다.
이 중사는 30분 동안 각 초소 상황을 점검했고, 사령관의 귀가를 확인한 뒤 중대장실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의자에 기대 잠을 청했다. 새벽 3시에 유류고 초소의 TA가 달각거렸다. TA 수화기를 들자마자 이중엽 상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바람소리에 섞여 쏟아졌다. 현철이가 없습니다, 자다가 깨보니까 없습니다, 다 찾아봤는데 없습니다… 이중엽의 이야기에는 두서가 없었다.
나는 이 중사를 깨우지 않았다. 불침번 한명을 행정반에 앉혀놓은 뒤 나는 판초우의를 쓰고 유류고 초소로 달려갔다. 빗방울이 콧속으로 들어와 숨이 막혔다. 나는 이상한 희열에 사로잡혔다. 천둥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부짖었다. 이중엽은 초소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저는 아무 짓도 안했습니다, 그냥 잠만 잤습니다… 이중엽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나는 이중엽을 데리고 유류고 깊숙이 들어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럼통들의 숲 사이로 샛길을 찾아가며 나는 깊숙이, 더 깊숙이 들어갔다.
유류고 담장 끝에서 허공에 매달린 검은 물체가 바람에 흔들렸다. 이중엽이 손전등을 비추자, 밤송이처럼 짧게 깎은 머리가 허연 빛을 반사했다. 이중엽은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담장 끝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박현철이 거기에 있었다. 번개가 칠 때마다 줄에 묶여 대롱거리는 박현철의 몸이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박현철은 지붕의 서까래에 군화끈을 연결하여 목을 맸다. 박현철의 발끝과 10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드럼통 위에는 군용수첩, 사진첩, 어머니가 선물한 무좀 파우더, 편지들이 놓여 있었다. 박현철이 간직해온 소중한 생의 파편들이었다.
나는 이중엽에게 지체없이 행정반으로 달려가 이 중사에게 보고하라고 말했다. 이중엽이 휘청거리며 빗속으로 달려나갔다. 죽은 박현철의 얼굴은 하얗고 순결했다. 나는 박현철에게 속삭였다. 이제 만족하니? 편안하니?
나는 드럼통을 밟고 올라가 박현철의 목에서 군화끈을 풀었다. 박현철은 지상으로 추락했다. 나는 박현철의 체액이 묻은 군화끈을 도로 내 왼쪽 군화에 채우고 박현철의 군화에서 끈을 풀어 서까래에 묶었다. 나는 박현철의 체액을 갖고 싶었다.
사령관 순찰 30분 전에 나는 초소 근무 교대자의 신고를 받았다. 박현철의 사수는 이중엽이었다. 박현철은 낮에 사격장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박현철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서서 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박현철을 화장실로 끌고 들어갔다. 박현철에게 88라이트를 한대 건네고 나는 물었다. 너, 중엽이 죽일 거지? 오늘 끝장을 볼 거지? 박현철은 아무말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속삭였다. 중엽이를 죽이면 끝날 것 같아? 속이 후련할 것 같아? 아냐 아냐. 너만 평생 낙인 찍혀 살아가는 거야. 더 근사한 해결책이 있어. 네가 죽는 거야. 중엽이가 낙인 찍힌 채 살게 하는 거야… 나는 왼쪽 군화끈을 풀어 박현철에게 건넸다. 이걸로… 유류고 뒷편은 눈에 띄지 않아… 박현철은 또 아무말 하지 않았다.
유류고 정문으로 중대 지프차의 헤드라이트가 스며들었다. 나는 판초우의를 벗어 박현철의 주검에 덮었다. 나는 주검과의 적막한 조우를 조금 더 연장하고 싶었다. 나는 처음으로 행복했다. 박현철이 내 첫 제물이었다. 군용수첩과 사진첩과 무좀 파우더가 있는 드럼통 위로 빅토리아풍의 갑갑한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날아와 앉았다. 나는 속삭였다. 누나… 여자의 이름과 얼굴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냥 누나라고 부르고 싶었다. 여자는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같았다. 이 중사가 달려와서 시신을 지프차에 실었다. 여자는 이중사의 발소리를 듣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박현철은 자신과 이중엽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폭력은 효과적이었다. 이중엽은 가혹행위로 군사재판을 받았다. 재판 전까지 이중엽은 사단 영창에 부동자세로 앉아 성경책을 읽어야 했다. 폭력은 과거를 불사르고 미래의 문을 연다. 누가 법이 폭력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가. 법은 모든 폭력에 선행하는 폭력이며 모든 폭력에 뒤따르는 최종적 폭력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모든 것은 폭력이다. 세상에는 체계적인 폭력과 무질서한 폭력이 있을 뿐이다. 나는 무질서한 폭력을 더 사랑한다. 그것은 약자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가능성이다.
박현철을 죽인 뒤 나는 이런 일이 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폭력이 나와 세상을 동시에 정화할 것이다. 그것은 최초의 깨달음이었고 나는 그 깨달음대로 살아왔다. 나를 찾아라. 나를 당신의 법정에 세워놓고 단죄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들을 단죄하겠다. 나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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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냠냠 10.01.14 09:46 댓글 수정 삭제
    글을 쓰는데 무척이나 익숙하신 분 같군요. 탄탄하게 짜여진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다만 편지 후에 뭔가 사건이 나올 법한데 중간에 끊겨서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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