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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생명의 나무

2009.07.31 22:5107.31

  생명의 나무


바람은 분명 불지 않았다. 하지만 어른의 허벅지만한 나뭇가지들은 거대한 태풍을 맞이한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리며 수많은 잎들을 지상에 뿌려댔다. 흡사 방사의 절정에서 희열에 차 몸을 떠는 인간처럼 쉴새없이 떨리는 거대한 나무는 자신의 아래에 웅성대며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죽으로 국부만 대충 가린 채 수염과 머리털이 덥수룩한 그들이었지만, 눈만은 한결같이 짐승 같은 광기가 서려 있었다. 지금 그들은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크고 작은 손들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나뭇잎들을 낚아챘다. 잎들은 불빛 아래 모여드는 날파리떼처럼 압도적인 양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귀다툼을 해 가며 악착같이 잎들을 움켜쥐었다.
그들 중 유일하게 서 있던 사내가 있었다. 아니, 사내의 기능은 오래 전 상실하고 지금은 죽어가는 짐승 쪽에 더 가까운 노인이었다. 살이라곤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 듯한 성마른 손에는 꼬부라지고 끝이 썩은 길다란 나뭇가지 하나가 잡혀 있었다. 노인이 그것으로 땅바닥을 쿵 하고 내려찍자 사람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그대로 땅에 엎드렸다. 하지만 몇몇은 그것을 보지 못했는지 계속 뛰어다녔다. 아니, 보고도 못 본 척했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땀으로 범벅이 된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과 좌절과 공포가 기름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것을 용납할 마음이 없었던지 흰 눈썹을 찡그리며 있는 힘껏 고함을 내질렀다. 나무의 흔들리는 소리 때문에 뭐라고 하는지 사람들은 듣지 못했지만 최소한 그 의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곧 무리의 예외자들도 무릎을 털썩 꿇으며 땅에 엎드렸다.
검은 자 대신 흰자만 가득한 노인의 가느다란 눈이 휙 돌아갔다. 무리의 손에는 한결같이 나뭇잎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다들 워낙 많이 들고 있던 터라 누가 가장 많은지를 따지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간단하게 나왔다. 한 손이 조막손인, 그래서 남들의 반 정도밖에 수확하지 못한 작은 사내가 누런 땀을 연신 흘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제 와서 잎을 더 받기 위해 뛰어다닐 수도 없거니와, 수많은 이의 소유욕을 벗어나 무사히 땅에 안착한 잎들을 몰래 줍는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대지에 속한 나무의 잎은 대지에 닿는 순간 썩어 흙이 되었고, 잠시 후면 다시 자신이 떠났던 그 위치에서 잎으로 재생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나무도 잠시 요동치는 것을 멈추고 발치의 인간들을 응시하였다. 사내의 조막손은 많은 것을 애원하고 있었지만 노인의 흰자위는 아무것도 비추어지지 않은 채 그저 공허하기만 했다.
찰나의 정적은 곧 막을 내렸다. 잠시 잠잠하던 나무에서 우르릉,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센 흔들림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노인은 잠시 비틀대다가 간신히 지팡이를 붙잡아 중심을 잡은 후 급히 사내를 가리켰다. 그 손짓 한 번에 수많은 손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삽시간에 인간의 벽이 형성되었고, 그 중심에서 단말마의 외침이 발산되어 흩어졌다.
잠시 후 산 채로 넝마가 된 불행한 사내의 시신이 거목 주위에 흩뿌려졌고, 뒤이어 수많은 잎들이 애도하는 것처럼 그를 덮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깃덩어리와 피, 피를 머금어 붉어진 잎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갔다.
노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내려놓고 나무를 향해 엎드렸다. 다른 이들 역시 하던 일을 멈추고 노인과 마찬가지의 행동을 취했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밤의 의식은 이제 그 막바지를 맞이하고 있었고, 거목의 움직임도 그에 맞추는지 서서히 진정되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목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바로는 삼천천밤의 전에도 나무는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진위 여부야 알 수 없었지만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본 적이 있는 자라면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떠받드는 기둥인 양 높은 것도 그렇지만, 마을 전체를 자신의 그늘로 뒤덮을 정도로 무성한 가지와 잎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끝간데모를 경외감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거목은 크기만 남다른 게 아니었다. 거목은 특이하게도 매일 한 차례씩 스스로 몸을 흔들어 자신의 모든 잎들을 미련 없이 털어내었다. 잎들은 순식간에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나무는 그것을 맹렬한 기세로 빨아들인 후 종래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수많은 잎들을 다시 매달고 그늘을 드리운다. 다른 나무들은 수백 밤이 지나야 누래진 잎을 떨구고 싱싱한 새 잎을 잉태하곤 했지만 거목만은 그런 법칙을 무시한 듯 수백 밤을 하루로 압축하고 있었다.
거목이 잎들을 털어내면 잠시 벌거숭이가 된 나무의 가지들 사이로 뜨거운 햇살이 비집고 들어온다. 사람들은 이 햇빛을 견뎌내는 대신 피하는 것에 익숙하게 되었고 이 시간엔 집 안에 처박혀 잠을 잔다. 그래서 밤이다. 햇살이 사라진 대지는 차갑게 식고, 열기가 사라진 대지 위에 사람 짐승 할 것 없이 엉금엉금 기어나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시작한다. 이것이 낮이다. 결국 이들이 구별하는 것은 하늘에 햇빛이 있느냐 잎들이 있느냐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오직 짐승만을 잡아먹고 살았다. 나무 아래에는 작고 약한 동물들이 풀을 뜯으며 살아갔다. 그들은 돌칼과 돌도끼로 짐승을 사냥하고, 그 얼마 안되는 가죽들을 이어붙여 허리에 둘렀다. 짐승만으론 배가 차지 않았기에 그들은 늘 어두운 토굴 안에서 뼈다귀를 핥으며 다음 사냥 준비를 하곤 했다. 집을 지을 재료가 없는 이들에겐 토굴 이외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깊숙하게, 넓게 토굴을 짓는 게 그들의 몇 안 되는 행복의 조건이었다.
지천에 널린 식물이며 열매를 먹는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 생각에 식물을 죽이거나 먹는다면 반드시 거목의 보복을 받을 것이라 여겼다.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백 밤의 백 밤 전에 마을 근처에 삐죽하게 솟아오른 나무 한 그루를 벤 자가 그 순간 땅에 파묻혀 죽었다고도 하고, 혹은 거목이 분노하여 몸을 뒤트는 바람에 쓰러져 죽었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던 위협적이었고, 게다가 거목의 압도적인 덩치를 생각해 보면 자칫 개인이 아닌 마을의 파멸로 직결될 수도 있었다. 이들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파헤치려 들지 않았다. 모두는 거목에게 복종하기로 합의를 본 터라 살아 있는 식물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당장 쳐 죽였다. 시체가 흙이 되어 사라지면 액막이를 했다 여겼다. 만에 하나라도 그 죽어 마땅한 놈을 살림으로써 거목의 분노가 사실일지를 시험해 보려는 자는 없었다.
이렇게 하나의 불문율이 만들어지자 이번엔 이것을 좀더 구체화시킨 법이 등장했다. 하루에 한 번 이루어지는 나무의 용트림이 언젠가 자신들을 뒤집어엎지 않으리란 보장이라도 있느냐, 따라서 우리 미천한 짐승들은 마땅히 마음과 몸을 다해 거목에게 정성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만든 이는 현재 마을의 우두머리인 백안(白眼)의 노인이었다. 그는 젊었을 무렵 길을 걷다 거목의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이 손댈 수 없는 신성한 나무가 자신에게 징표를 내려주었다고 생각한 그는 그것을 잡고 한달음에 족장의 집으로 달려갔고 신물(神物)의 권위를 족장의 입에서 직접 확인받았다. 그는 거목의 ‘당굴’이 되었다.
이때부터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휘적휘적 걸어다니며 거목의 위대함과 인간의 미약함을 설파하고 다니는 그의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인신공양, 즉 미천한 인간의 희생으로 나무의 분노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의견은 어느날 그가 당연하다는 듯 내놓은 법이었다. 필요불가결한 잡목들을 구해 장례를 지내는 의식, 제물을 선택하는 의식 등을 만들어낸 것도, 가끔 자신과 거목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자를 처단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노인의 피부가 거목의 껍질처럼 굳어지고 갈라질 때까지 노인은 자신의 신성한 책무를 멈추지 않았고, 거목 또한 하루에 한 번 요동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족장과 사람들은 나무가 마을을 뒤집어엎지 않은 건 오직 노인의 공이라며 그를 칭송했다. 노인이 거목에 들인 정열과 인생, 신심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거목에는 인신공양된 자들의 대가리가 끊이지 않고 걸려졌다.

한 절름발이 청년이 있었다. 병으로 그리 된 게 아니라, 소년 시절에 한쪽 다리가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진 까닭이었다. 분명 사냥하다 넘어지는 따위의 시시한 상처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주변에는 변변찮은 맹수도 없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가 간신히 돌아왔을 때 이유를 캐물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기절해버렸고, 사흘 뒤에 깨어났다가 최초의 대가리가 거목에 걸리는 걸 본 직후 한번 더 기절했다. 그 이후 그는 통 말이 없어졌다. 질린 듯한 그의 표정에는 언제나 희미한 공포가 칠해져 있었다.
하지만 다리 하나가 그렇게 되었다고 먹는 걸 관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에선 스스로 자기 사냥감을 찾는 것이 원칙이었다. 일어나기 힘든 정도로 큰 병을 앓고 있거나 몸을 움직이기 힘든 노인들은 식구들이 남긴 뼈다귀를 핥으며 위태롭게 살았고, 때론 당굴의 훌륭한 표적이 되곤 했다. 그는 아직 죽을 맘이 전혀 없었기에 사방이 어두워져 낮이 되면 한 다리로 겅중거리며 나와 사냥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장단을 맞추는 사냥감이 없어 번번이 허탕을 치기 일쑤였다.
어느 날 당굴과 청년이 맞닥뜨렸다. 외출을 삼가는 당굴이 몸소 그를 찾은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가 시야에 보이자 당굴은 한 손을 들며 얼굴을 찡그렸는데, 이는 나무의 흔들림이 막바지에 이르러 눈부신 햇살이 어둠을 반 이상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굴로서는 그저 눈이 부셔 취한 행동이었지만 청년에게는 그렇게 인식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것이 당굴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그는 큰 보폭으로 전진했다. 쿵 쿵 바닥을 찧는 소리가 밤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당굴은 다시 한걸음 나아갔다. 노인의 시선이 청년의 다리를 옭죄어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햇빛이 정면으로 비쳐와 눈부신 걸 참을 수 없었다. 한 숨, 두 숨…굼벵이처럼 기어가는 시간을 참지 못해 그는 살짝 눈을 떠 보았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뒤돌아보니 햇빛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거처로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당굴의 굽은 등이 보였다.
놀던 아이들이 하나 둘 자기 토굴로 뛰어들어가고 출입구마다 가죽으로 만든 거적이 쳐졌다. 그 역시 한 다리로 껑충껑충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다른 움집보다 한결 깨끗하고 정갈해 보이는 곳이었다. 그는 거칠게 거적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짐승 가죽 위에서 마치 노동처럼 숨을 헐떡이며 거친 방사를 치르고 있는 두 명의 노인과 맨바닥에서 쓰러져 자는 두 쌍의 남녀, 피묻은 고기를 조금씩 떼어 우물거리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퀴퀴한 악취가 신음소리, 코고는 소리와 뒤섞여 우중충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청년은 신경쓰지 않았다. 이곳은 그가 태어나 자라왔던 집이었으므로.
고기를 먹던 둘째 아버지가 수염에 묻은 피와 살점을 떼어내며 손짓을 했다. 장막을 다시 내리라는 의미였다. 거목의 그늘 아래 지금까지 살아온 그들은 햇빛을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짐승의 비곗살을 태운 불 정도는 괜찮겠지만, 온 땅을 가득 덮는 눈부신 태양빛은 그들의 시력을 빠른 속도로 잡아먹기 일쑤였다.
청년은 거적을 원래대로 해 놓고 안으로 들어섰다. 불빛 한 점 없었지만 오히려 한밤중의 강렬한 빛 안에서보다 훨씬 사물이 뚜렷하게 보였다. 불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으며 두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둘째 아버지도 고기를 내려놓고 청년을 노려보았다. 과거, 그는 다친 이유를 끝끝내 말해주지 않는 동생을 앞장서서 내쳤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데다 항상 따로 떨어져 있으려고만 하는 병신은 우리 식구가 될 수 없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쫓겨난 자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가끔 구걸하러 왔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청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모두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고, 그들의 시야에 어두운 천장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듯 청년의 손은 더 위로 올라가 천장에 보일 듯 말 듯하게 나있는 구멍을 가리켰다. 구멍 사이로 빗줄기처럼 새어들어오는 빛이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비추며 묘한 각도로 굴절되었다.
탁하게 풀려 있던 첫째 아버지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첫째 아버지는 마을에서 가장 많은 전설을 알고 있는 존경받는 현자였다. 당굴의 출현 이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으며 조용히 지내왔지만 사람들은 다음 당굴이 틀림없이 이 노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그래서 다른 자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무슨 의미인가를 생각해볼 때, 그만 홀로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늙고 주름진 손으로 먼지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청년도 쭈그리고 앉아 그의 대화상대가 되었다.

이것은 나무가 자라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사실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랜 옛날 하늘과 땅은 붙어 있었는데, 그때는 누런 태양과 흰 태양 모두 하늘이 아닌 땅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누런 태양은 항상 뜨거운 열기를 내뿜어대서 근처에 풀 한 포기 자라기도 힘들었지만, 흰 태양의 주변은 그나마 좀 살만했던지 사람이나 짐승 모두 그 주변에 자리잡았다.
그래서 누런 태양은 언젠가부터 흰 태양을 시기하게 되었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는데, 사람들은 멀리서 그의 온기를 받아들이며 감사하고 있었는데, 누런 태양은 그걸 모르고 그저 흰 태양 때문에 자신이 고독해졌다고 단정지어 버렸다. 그 울분이 쌓이고 쌓이다 마침내 폭발했을 때, 누런 태양은 힘껏 몸을 날려 흰 태양과 충돌했다. 누런 태양의 힘이 소 수천 마리만큼 강했기 때문에 흰 태양은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가 버렸고, 그때 사람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온몸에 달아주었던 보석들도 모두 떨어져 까만 하늘 여기저기에 박히게 되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흰 태양은 보석들보다 무거웠기 때문에 하늘에 머무르지 못하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건 예사 문제가 아니었다. 믿기지 않지만 저 앞에 보이는 산만큼이나 거대한 그것이 추락하면 흰 태양이 부서지는 건 물론이고 아래의 사람들도 모두 산산조각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평소 흰 태양 옆에서 아주 조금씩 성장하고 있던 어린 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가 갑자기 놀라운 속도로 자란 것이다. 순식간에 하늘까지 솟구쳐 오른 나무는 마치 기둥처럼 땅에서 하늘을 떼어내 스스로 하늘을 떠받쳤다. 덕분에 흰 태양은 땅에 처박히는 대신 하늘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고, 누런 태양 또한 스스로의 잘못을 뒤늦게 깨우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하지만 흰 태양이 여전히 자신을 무서워하자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걸로 만족하였고, 여기서 밤과 낮이 생겼다고 한다.  

노인은 여태까지 바닥에 끄적인 것들을 손으로 문질러 지운 후 거적을 들추고 거목을 바라보았다. 비록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청년은 그에게서 거목에 대한 존경, 그리고 자신에 대한 애정을 볼 수 있었다. 자칫 당굴이 노인의 이런 지식에 대해 알게 된다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런 얘기를 해준다는 것은 그만큼 청년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번에는 청년이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거대한 나무와 그 위에 달라붙은 매미 같은 물체였다. 이제 다른 사람들은 둘에 대한 흥미를 잃고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노인이 눈을 부릅뜨고 입을 막으며 신음을 누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청년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품 안에서 작고 둥그런 열매 하나를 꺼냈다. 아니, 열매라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한 모양이었다. 먹음직한 내음이 풍기는 과육은 호두껍질처럼 단단했고, 꼭지 부근에는 흰 꽃이 무더기로 달려 있었다. 열매에 꽃이라니, 이만큼 부조화스러운 것도 없을 테지만 그건 분명 한 덩어리였다. 눈에 보이는 진실이 보이지 않는 가치관과 상식을 뒤집어엎는 순간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열매를 받아들고 한참을 살펴본 노인은 긴 한숨을 토하며 그것을 청년에게 돌려주었다. 그의 손에서 열매가 떠나자마자 노인은 청년의 짓이겨진 다리를 움켜쥐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인 후 굳은 얼굴로 다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아까와 같은 거목, 그리고 어째서인지 거목 위가 아니라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매미같은 물체와 둥그런 열매, 그리고 기다란 작대기 하나.
오랜 시간이 걸려 그 의미를 깨달은 노인은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혼절해 버렸다.

첫째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그는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 벗어났다기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마을 외곽, 소나무와 전나무가 바늘다발처럼 빽빽이 자라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곳에 청년은 자리를 잡았다. 숲 깊숙한 곳에는 조그마한 샘이 하나 있었고, 청년은 거기에 숨어 있으면서 간간히 물을 마시러 오는 동물들을 사냥했다. 가끔 뱃속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열기를 달래려 발버둥치는 짐승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이를 박고 솟구치는 뜨거운 피를 마시며 그는 가끔 생각해보았다. 이런 시체같은 삶을 사는 내게도 뜨거운 피와 육체가 있는가. 그럴 때면 그는 손을 가만히 심장 부근에 얹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그 박동은 흡사 썩은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오는 당굴의 발걸음 소리 같았다.
하늘에는 여전히 누런 태양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 거목의 잎들이 그 열기와 눈부심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밝은 밤은 초목들의 세상이었고, 낮은 그런 초목의 눈치를 살피며 터전에서 기어나오는 짐승들의 몫이었다. 빛 한점 없이 어두운 대지에는 가끔 보잘것없는 관솔불 정도가 깜박거릴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멀리 떨어진 아련한 깜빡임을 볼 때마다 청년은 고함질렀다.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고함을 상처입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질러댔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그를 둘러싼 숲을 채 반도 벗어나지 못하고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에게 귀기울여주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고, 청년은 결국 지쳐 쓰러져 노곤하게 잠들며 자신이 보았던 그 숨막히는 투명함과 반짝임의 향연을 찾아 꿈결 속을 헤메곤 했다.
첫째 아버지는 가끔 그를 찾아왔다. 둘은 다른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그림들을 그려가며 의견을 나누곤 했다. 하지만 유일한 방문자인 노인이 돌아가고 나면 숲에는 또다시 긴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의 기간은 점점 길어졌다. 세월의 무게가 노인의 허리를 더욱 꺾어놓고, 이윽고 그 힘겨운 발걸음마저 아예 끊겨 버렸다.
이제 짐승들은 자신들처럼 숲의 일부가 되어버린 짐승이 몽둥이를 휘둘러대는 것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고, 가끔 바람이 불 때면 그 짐승의 포효가 헛되이 숲을 울리는 것을 들었다.
그렇게 밤과 낮은 거목의 나뭇잎 사이에서 수백, 수천 번을 명멸해 갔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음에도 숲 전체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고개를 곧추세우고 하늘바라기를 하던 소나무들이 모처럼 아래를 보며 몸을 떨었고 풀숲은 저절로 좌우로 갈라서며 방문객에 대한 예의를 표시했다. 환한 밤중이라 곤히 잠들어 있던 짐승들마저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숲 안에서 방문객에게 예의를 표시하지 않는 건 오직 한 마리의 초라한 짐승 뿐이었다.
이제는 중년이 되어버린 사내가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찾아온 당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굴의 백색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가 다시 뜨여졌다.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백색 눈 깊숙이 감추어진 분노가 그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당굴은 짚고 온 지팡이를 쳐들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순간 까만 흙으로 이루어진 지면이 갑자기 푸르게 변했다. 흙을 뚫고 솟아나온 초목들이 하나의 생명으로 확고히 자리잡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 숨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당굴의 뒤를 바라보았다. 당굴의 지팡이가 닿은 곳마다 풀밭이 형성되어 마치 길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당굴이, 정확히는 그의 지팡이가 만들어낸 권능이었다.
당굴은 사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그려가며 대화하지 않아도 그와 사내 모두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지팡이를 손에 넣은지 일만 밤과 낮이 지나갔고, 그 오랜 세월을 수양한 끝에 비로소 그는 지팡이의 권능을 수족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그 지팡이가 그를 이곳으로 인도하였다. 어렴풋이 느껴지던 거목의 일부가 점차  뚜렷한 감각으로 변한 덕분이었다.
사내는 여전히 당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체념이되 체념이 아닌 눈빛이었다. 어둠 속에서 어둠과 섞이지 않은 그런 눈빛이었다. 당굴이 언젠가 자신을 찾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고, 그때 자신이 어떻게 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날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다.
항상 웅크려 있던 그의 몸이 모처럼 쭉 펴졌다. 그는 그 상태로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우둑, 우둑하는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당굴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 아니, 그 이전에 당굴에게서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그의 호위들이 먼저 반응하였다. 그들은 불쾌한 표정으로 다가와 그의 성한 다리를 쳐 넘어뜨리고 무릎을 꿇렸다. 한 사람이 그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땅에 처박았다. 본의아니게 당굴에게 절을 한 셈이 된 사내는 신음을 흘리며 억지로 머리를 들었고, 당굴이 여전히 탐욕을 감춘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진실이 진실이 되고, 거짓마저도 진실이 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을은 모처럼 활기가 흘렀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거목 주위로 몰려왔다. 끈적한 어둠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녔지만, 이미 그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관솔불 하나 켜지 않았다. 기실 그들은 기묘한 흥분에 사로잡혀 있어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자신이 지목될 염려가 전혀 없는, 따라서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살육의 본능에 충실할 수 있는 축제가 곧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수많은 발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먼저 당굴이 한껏 위엄있게 단장한 모습으로 썩은 지팡이를 오른손에 짚은 채 거목 앞에 도달했다. 그 뒤를 이은 건 건장한 네 명의 전사와 그들이 질질 끌고 온 고깃덩어리였다. 처참한 모습의 그자에 대해 전사들이 손짓 발짓으로 설명했다. 오래 전 당굴이 가지고 있던 신령한 거목의 일부분을 훔쳐 달아났다가 당굴의 신통한 능력으로 붙잡혀온 죄인이었다.
감히 그런 귀중한 물건을 훔쳐 하마터면 마을을 멸망하게 할 뻔한 그런 죄인을 동정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는 한 몸처럼 주먹을 휘두르며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몇몇 사람은 돌을 던지기도 했지만 사내를 둘러싼 전사들이 눈을 부라리자 슬그머니 군중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하지만 그 정도로 군중 전체가 동요하지는 않았다. 질서는 빠르게 소멸되어가고 그 자리를 광란하는 짐승들의 포효가 메워 나갔다.
전사들이 부싯돌을 쳐 당굴이 장례를 지낸 잡목의 가지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미리 마련한 횃대에 걸었다. 작은 불이 바람 부는 대로 너울거리며 사방으로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나갔다. 어둠 속의 미약한 불빛은 차라리 어둠만도 못할 만큼 어두웠지만, 그 어둠을 낮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환각과도 같은 빛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오히려 불이 켜지자 도대체 이 안에 사람이란 존재가 있나 싶을 정도로 모두는 광분했다.
군중들의 소란이 극에 달했다고 판단한 당굴은 슬슬 의식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미 수많은 사람을 제물로 바친 바 있는 그의 지팡이가 높이 치켜들어졌다. 이제 그것을 내리면, 어리석게도 끝끝내 비밀을 고하지 않은 저 어리석은 사내 역시 다진 고깃덩이가 되어버릴 것이다. 사내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새 오줌을 지리며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굴이 원하는 최상의 결론은 아니었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아직 미련이 남아 있었다.
당굴은 지팡이를 든 채 사내를 힐끔 보더니 전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이미 사전에 당굴의 첫 번째 행위는 위협용이라는 바를 전달받았던 그들은 서둘러 사내를 묶은 줄을 풀고 뒤로 물러섰다. 당굴은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가 자신감이 넘치는 동작으로 손을 내밀었다. 사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품안을 뒤적이는 것을 보며 당굴의 주름진 입술이 살짝 오므라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입술 사이로 한 움큼의 피가 토해졌다. 사내의 품 안에서 나온 뾰족한 돌칼은 어느새 소통자의 뱃속 깊숙이까지 침입해 있었다.
당굴이 자신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던지라 군중들은 어째서 그가 푸들거리며 떨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당굴의 발 아래 시뻘건 웅덩이가 생기고, 곧이어 그 작은 몸뚱이가 급소를 꿰뚫린 짐승처럼 고꾸라지자 그제서야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선뜻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전지전능하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던 당굴이 이런 일 하나 예측 못하고 당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기도 했다.
군중들이 웅성거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은 채 사내는 당굴이 움직임을 멈출 때까지 돌칼을 계속해서 쑤셔박았다. 이윽고 푸들거림이 멈추자 그는 돌칼을 힘겹게 뺀 후 아직까지 당굴이 움켜쥐고 있던 지팡이를 빼앗아들었다. 마치 오래 전 헤어졌던 친구를 보는 것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잠시 그것을 응시하던 사내는 당굴의 시체를 툭 걷어차 옆으로 굴린 뒤 지팡이를 굳게 잡고 군중들 앞에 섰다. 그 당당함에 오히려 주눅든 것은 다수 쪽이었다. 당굴은 늘 이 지팡이는 신물(神物)이며, 따라서 자기 외의 사람이 자칫 손이라도 대면 거목의 분노가 임할 것이라 누누이 강조하곤 했다. 그렇다면 그 지팡이를 쥐고도 아무렇지 않은 저 사내는 무엇이란 말인가? 답은 곧 나왔다.
방금 전까지 당굴을, 아니 노인을 지키던 전사들이 제일 먼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들은 당굴이란 직책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었고, 따라서 저렇게 초라한 몰골로 변한 노인에게 지킬 의리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의 뒤를 이어 군중들 역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섬겨왔던 건 노인이였지만 노인이 섬긴 것은 바로 거목이요, 그 징표는 거목의 일부였다. 소명제가 대명제에 흡수됨으로써 지팡이는 여전히 그 자체로 거목이었고 그 지팡이의 주인 또한 당굴이 될 수 있었다.
사내는 아무 감정도 섞여있지 않은 눈으로 삽시간에 태도를 바꾼 군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까지의 자신은 다리병신이요 당굴에 감히 맞선 쳐죽일 죄인이었지만 당굴의 지팡이를 노인에게서 빼앗았다는 것만으로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과연 이것이 그가 바라던 것이었던가? 그건 아니었다. 현실에 충만하기 위해서는 무지해야 한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알려고 들지도 않은 채 맹목적으로 눈앞에 닥치는 일들을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최소한 이들 무리가 알지 못하는 진실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에 장단을 맞출 생각도 없었다. 또 이것은 여지껏 진실을 추구하고 그것을 알아낸 댓가로 인생을 망쳐버린 사내가 내리는 복수이기도 했다.
사내의 손에 들린 지팡이의 끝이 바로 옆에서 희미하게 타오르는 불로 향했다. 미처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나무는 자신의 천적과 조우하였고, 그 천적이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올라탄 것을 용납해야 했다. 거목의 일부이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지팡이는 마치 누런 태양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강렬하고 뜨거운 빛과 열기를 내뿜었다. 몇몇 사람이 급히 불을 끄기 위해 앞으로 나서보았지만 그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이때 죽은 줄로만 알았던 노인이 눈을 번쩍 떴다. 지팡이와의 공명으로 알게 되었을까.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괴성을 지르며 타오르는 지팡이를 온몸으로 덮었다. 자신의 몸을 바쳐서라도 불을 잡겠다는 의도는 가상했지만 정작 현실은 그 반대로 전개되어갔다. 불은 꺼지기는커녕 노인을 단숨에 잡아먹고 한층 거세게 타올랐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숯덩이로 변한 노인이 털썩 쓰러지면서 그 불은 대지에 옮겨붙었다. 바싹 마른 풀들은 빠르게 스스로를 연소시켰고, 동시에 그것을 옆으로 전달하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팡이와 노인을 중심으로 번져나간 불은 삽시간에 거목을 둘러싸고 축제라도 벌이는 것처럼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이제 군중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장 밝은 밤보다도 더욱 환해진 사방 속에서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줄 지도자를 찾았지만 그런 자는 이제 없었다. 당굴의 권위에 눌려 유명무실해져 있던 족장 역시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불길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화염이 번지는 기세는 순식간이었고, 사람들은 불끄기를 포기한 채 미친 듯이 달아났다. 기껏해야 관솔불을 비벼 끄는 정도밖에 해보지 않은 그들이 이런 큰 불을 어찌 해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때마침 우르릉 소리가 나며 거목의 흔들림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일부가 사라진 데 대한 분노였을까, 여느 때와는 달리 엄청난 기세였다. 이는 혼란스러운 사람들에게 가해진 일격이 되었다. 격렬한 진동은 사람들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고, 넘어진 그들의 몸은 순식간에 수북한 나뭇잎들로 덮였다. 몸에 달라붙은 무수한 나뭇잎들을 애써 떼어내며 버르적거리던 그들은 나뭇잎과 함께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거목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흩날리는 나뭇잎들은 땅에 닿기도 전에 불이 붙어 살아있는 모든 생물에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몇 마리 되지 않는 개나 닭들은 통구이가 된 지 오래였다. 이 지옥 안에선 짐승과 사람의 구별도 없었다. 곧게 치솟은 나무들이 하나 둘 우지끈 꺾여 쓰러지며 자신들의 영화에 종언을 고했다. 미개한 인간들을 비웃으며 바람이 불 적마다 가볍게 흔들리던 갈대밭은 이미 흔적도 없었다. 모든 것이 불타오르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나마 아직 다리가 붙어있는 것들은 다리로, 다리를 잃은 것들은 두 팔로 기어서 마을 외곽의 시냇가로 달아났다.
여지껏 자신을 보좌하는 신하들처럼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던 나무들의 최후를 지켜보며 거목은 한층 심하게 몸을 떨었다. 그 진동 때문에 그나마 서 있던 것들 모두 우르르 넘어져 뒹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애써 일어나려 했다. 이제는 불타 없어진 지팡이 대신,거목을 직접 짚고 일어나기를 수차례 시도한 끝에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최초의 불이 시작된 곳은 바로 그가 있던 장소였고, 그렇기에 그의 몸 여기저기에도 조금씩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애써 피묻은 돌칼을 집어들어 자신의 발 밑을 파 작은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안에 항상 품에 넣고 다녔던 열매를 넣은 후 잘 덮어 놓았다. 이것은 그의 사명이자 의무였다.
열매를 심는 것을 마친 사내가 돌칼을 들어 거목을 찍었다. 거목의 진동이 느껴졌지만 그 역시 돌칼을 쥔 손에 남은 힘을 모두 쏟아부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거목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목은 결국 다리가 땅에 박혀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는, 자신만도 못한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불꽃의 벽은 거목을 둘러싼 포위망을 점점 좁혀들어왔다. 타닥, 탁 불 튀는 소리와 끝없이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절규도 이 공간 안에서는 마치 꿈결처럼 아득한 소리로 변했다. 애초부터 온 세상 천지에 거목과 사내, 둘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극히 엄숙한 분위기가 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장작이라도 된 것처럼 온몸이 바작바작 타들어갔지만 사내는 평온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수행했고, 이제야 비로소 안식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과 함께 대지의 일부로 돌아가게 될 거목에게 비로소 따스한 시선을 줄 수 있었다. 거목에 어째서 올라가면 안되는지, 왜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갖고 어느날 몰래 올라가기를 시작했던 그. 하루 밤낮을 꼬박 올라간 거목의 정상에서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고, 누런 태양과 흰 태양의 아름다운 교차도 보았다. 하늘에서 물줄기가 떨어져 거목에게 흡수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죽어가는 거목을 보았다.

마치 자신에게 부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정상에 단 하나 맺혀있던 열매꽃. 사내는 그것을 거목의 간절한 소망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내려오던 중 가지가 부러져 추락할 때도 끝끝내 열매만은 부서지지 않도록 온몸으로 보호했다. 그렇게 간직한 열매는 거목의 생명의 정수였지만 거목 자체는 아니었다. 이전의 거목은 결국 당굴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썩어가는 나무였을 뿐이었다.
온몸에 불이 붙은 사내와 거목은 한 몸처럼 재로 화해 갔다.

거목이 쓰러졌다.
화염의 바다가 대지를 휩쓸었다.  
하늘이 열렸다.
누런 태양과 흰 태양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두 개의 태양이 몸을 섞었다.
둥그런 금빛 고리가 환상처럼 하늘에 새겨졌다.
어두워진 하늘에서 삼천천개의 물줄기가 대지에 뿌려졌다.
화염의 바다가 물바다로 변하고 대지가 가까스로 그것을 빨아들였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자들은 보았다.
무수히 많은 꽃과 열매와 씨앗을 간직한 생명의 나무가 대지에 우뚝 서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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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완료.
늦은 감은 있지만...


중간의 '첫째 아버지'와 '둘째 아버지', '동생'은 짐작하시다시피 중혼에서 비롯된 관계입니다. 주석으로 달려다 난삽해 보일까봐 이렇게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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