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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유령들

2009.04.24 23:3104.24


“시골 내려가서 농사라도 지어야지.”
총무 형이 잔뜩 꼬부라진 혀로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해야지. 벌써 여섯 번째 낙방이니, 원….”
깊고도 진한 한숨이 방안을 맴돌았다. 고시원 생활만 4년째인 총무 형은 6년 동안 공무원 시험만 쳤다. 결과는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낙방.
“옛날에 우편이나 전화로 합격 여부를 알려줄 때는 말이야, 그 뭐냐, 운치라도 있었지. 요즘은 인터넷에서 클릭 한 번으로 알게 되니까 더 허무하다야.”
안내 창구 겸 총무 형의 방으로도 쓰는 202호는 다른 곳보다 2배 정도 넓다. 그래봐야 장(掌)평인 건 변함없지만 동쪽으로 난 큼지막한 창문만은 다른 방과 비교가 안 된다. 그 창문으로 고시원 간판이 보인다.
‘공문 고시원.’
본래는 ‘공부의 문’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공’자 밑의 이응이 떨어져 나가 ‘고문 고시원’이 되어 버렸다. 이름 그대로 사는 게 고문인 변두리의 낡은 고시원.
수도꼭지에서 살금살금 물이 새듯 ‘졸졸졸’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총무 형이 울고 있었다. 역시 고시원 생활을 오래 한 사람답게 최대한 소리를 죽인 울음이었다. 숱이 적은 그의 이마가 민망할 정도로 빨갛다.
나는 쓰러지듯 옆으로 눕는 형을 뒤로하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4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안내 데스크와 창고, 그리고 텔레비전이 있는 ‘공용 층’이고 3층은 여자 층, 4층은 남자 층이다.
4층 복도로 들어서자 욕설과 함께 반찬그릇 하나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어떤 놈이 또 몰래 처먹은 거야!”
속옷 차림의 사내가 플라스틱 뚜껑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405호 남자다. 누군가가 반찬을 훔쳐 먹었는가 보다. 가끔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이름까지 써 붙여서 냉장고에 넣어놔도 쥐새끼처럼 몰래 집어가는 것이다. 화를 내며 씩씩거리는 것도 잠깐, 사내는 미끄러지듯 405호로 들어가 버렸다.
“에이 시끄러워. 공용 냉장고에 먹을 걸 넣어 둔 게 잘못이지.”
앞쪽 어딘가의 방에서 짜증 섞인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가만히 서 있자면 폭이 점점 줄어들 것만 같은 길고 좁은 복도. 그 복도 양 옆으로 늘어선 벽은 ‘벽’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얇은 베니어판으로 되어 있다. 서랍처럼 칸을 질러놓은 방과 방 사이의 벽도 마찬가지다. 한 평, 그러니까 3.3제곱미터의 공간을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나눈 베니어판 사이로 인간의 내밀한 소리들이 여과 없이 넘나든다.
옆 방 남자 속이 좋지 않군. 맞은 편 학생은 여자 친구와 이별했나 보지. 첫 번째 방 아저씨는 밤마다 야한 영화를 본단 말이야.
얼굴만 모를 뿐, 방 안에 틀어박혀서도 다른 방의 사정쯤은 훤하다. 그래서일까, 복도나 주방에서 다른 사람과 마주치기라도 할라치면 모두 고개를 푹 숙인다. 그리고 잰 걸음으로, 바퀴벌레가 흩어지듯 그렇게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고시원에 사는 이들은 점점 유령이 된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는, 한 평짜리 꿈을 꾸는 가난한 유령.
생각에 잠겨 한참을 복도에 서 있다가 내 방으로 들어갔다. 412호. 3만원을 더 얹어서 얻은 창문 있는 방이다.


고시원에 흘러든 건 2년 전 가을, 사시 공부를 시작하면서였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운 탓에 당장이라도 돈을 벌어야 할 처지였지만 부모님께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덕분에 어머니는 파출부 일을 시작했고, 나는 변두리 재래시장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고시원 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 한 달은 새우처럼 허리를 접고 잠드는 법을 배우는 기간이었다. 시골 고향집보다 고시원이 편하다는 총무 형의 조언에 따라 베개를 끌어안고 자기도 했지만 침대 밖으로 튀어나오는 발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한 달이 지나고, 또 한 달이 지나자 조금씩 익숙해졌다. 소리를 죽여 방귀 뀌는 법도 터득하고, 낡은 침대 위에서 조용히 돌아눕는 법도 배웠다. 노을이 유독 짙은 날 밤이나, 오랜만에 부모님과 통화한 날 새벽에는 베개를 입에 물고 조용히 울기도 했다. 때로는 밥상 대신으로, 때로는 부둥켜안을 누군가의 품 대신으로…. 베개의 다양한 용도를 알게 된 것도 바로 그때쯤부터였다.

똑. 똑. 똑. 똑.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과거의 상념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한밤중이다. 오늘이 금요일이었던가? 아니면 토요일? 지금은 몇 시지? 요즘은 점점 시간이니 날짜 관념이 희박해진다.
노크 소리는 잠시 후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방이 아니었다. 옆 방, 그러니까 413호 쪽이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형태로 늘어선 방은 총 스무 개. 한쪽 면에 열 개씩이다.

똑. 똑. 똑. 똑.

또 다시 들려온 노크 소리. 이번에는 건너편 쪽이다. 소리의 방향으로 봐서 403호나 404호. 그나저나 이 밤에 누가 문을 두드리는 걸까? 고시원에서 누군가의 방문을 두드린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은 문, 건너편의 숨소리 하나도 막아주지 못하는 문 앞에 서면 누구든 마음이 먼저 오그라든다. 총무 형도 방세를 받으러 다닐 때 헛기침이나 전화로 먼저 불러내지 절대 문을 두드리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호기심에 슬쩍 복도로 나왔다. 하지만 불 꺼진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크 소리에 내다보는 이도 없었다. 방안에 틀어박힌 사람들은 놀란 거북이처럼 목을 잔뜩 움츠리고 방문만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안 봐도 훤하다.
조금 있자니 내 옆 방, 413호 문이 열리며 대머리 남자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불안한 듯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주위를 살피던 남자가 어둠 속 한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서둘러 문을 닫았다.
413호 남자는 파계승이다. 아침이면 승복을 입고 출근했다가 저녁에는 사복을 입고 술에 절어 들어온다. 여름에는 육교 밑 그늘에 앉아 목탁을 두들기고 선선한 계절에는 음식점을 돈다. 여자들과 통화하면서 자기가 법력이 있어 귀신을 본다고 떠드는 한심한 남자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튼 순간 어둠속에서 무언가가 빛났다. 가만히 보니 구슬이었다. 작고 투명한 구슬이 복도 끝 쪽에서 어둠을 넘어 굴러왔다. 그리고 나는 봤다. 복도 맨 끝 방, 420호의 방문이 살짝 닫히는 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디다 삿대질이야?”
“이 아저씨가 미쳤나? 어디서 놈이래?”
아침부터 고시원이 시끄럽다. 유령처럼 조용히 스쳐지나가는 게 고작인 고시원에서 대놓고 싸움을 벌인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싸울 일은 부지기수다. 남의 음식을 훔쳐 먹거나, 밥을 해 먹고 설거지를 쌓아 놓거나, 신발이나 옷가지를 훔쳐가는 얌체들이 엄연히 존재하니까. 하지만 화가 나도 혼자서 삯일 뿐 지금처럼 드잡이 직전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
“이야. 이놈이 끝까지 바락바락 대드네!”
“그러니까 증거를 대 보라고! 문 두드린 게 나라는 증거 있어? 있냐고?”
후드티를 입은 젊은 쪽은 403호 대학생이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나이 든 남자는 등짝에 문신이 가득한 404호 남자다. 덩치는 문신 쪽이 크지만 악다구니를 써 대는 대학생의 기세에 눌렸는지 조금 주춤한다.
“어제 노크 소리 들리고 나서 네가 방문을 열고 닫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래도 아니라고? 술김에 장난친 거라면 그냥 잘못했다고 빌어라. 알겠냐? 이걸 확!”
두 사람이 다투는 이유는 간밤의 노크 소리 때문이다. 이곳 4층에 기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젯밤 들렸던 정체불명의 노크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고시원 전체에 긴장감이 감돈다.
“거 좀 조용히 합시다.”
뭐라고 또 소리 지르려는 대학생의 입을 410호에서 들려온 중후한 목소리가 막아 버렸다. 이 고시원의 최고령자. 자식들에게 쫓겨난 뒤 지하철 폐지 수집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할아버지 목소리다.
“나도 그 노크 소리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니까.”
대학생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렇게 말한 뒤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언제나 그렇듯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고시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감정의 진폭도 점점 줄어든다. 아무리 화가 나도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면 저용량으로 압축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압축 된 화는 옆 방 사람의 방귀나 트림을 듣는 순간 서글픔으로 변해버린다.


낮 동안 고시원은 아무 일 없이 평온했다. 딱히 출근할 곳 없는 사람들 몇몇이 다른 사람이 쓰고 나오길 기다렸다가 화장실을 사용했고, 누군가는 밀린 빨래를 돌렸다.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고, 소리조차 없이 유령처럼 그렇게.
총무 형은 2층 홀에서 밤이 깊을 때까지 텔레비전을 봤다. 누군가가 틀어놓은 뉴스를 멍하게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슬퍼보였다.
뉴스에서는 고시원 화재가 주로 다뤄졌다. 사회에 앙심을 품은 20대 남성이 자기 방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였단다. 보고만 있어도 얼굴이 핼쑥해지는 고시원 방을 떠올리면 왠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시원 뉴스 이후에는 자살자가 많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자살 방지 위원회의 아무개 교수라는 사람의 말을 뒤로하고 4층 내 방으로 향했다. 불 꺼진 어두운 방 침대에 앉아 한참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신문지 반 장 정도 크기의 창문으로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도시의 불빛이 비쳐들었다. 그 사이 고시원에는 누군가 지친 몸을 이끌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고, 또 누군가는 세수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선사시대의 유적처럼 낡고 오래된 고시원은 이내 조용해졌다.

똑.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한 시간 정도 지나서였다. 가볍고 선명한 그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가 싶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내 방을 지나쳤다. 노크는 간밤과 달리 입구에서 시작해 복도 끝까지 이어졌다. 경쾌하기까지 한 그 노크 소리의 마지막 음절이 사라질 때쯤 나는 복도로 나왔다.
여전히 어둡고,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복도 양쪽 벽에서 일제히 ‘끼익’하는 소리가 들리며 대부분의 방문이 조금씩 열렸다. 그리고 달팽이가 껍질에서 나오듯 사람들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제식훈련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그 동작이 너무나 똑같아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대번에 문을 닫아 버렸다. 철커덕하고 자물쇠를 거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방문 몇 개가 다시 열렸다. 하나, 둘, 셋…. 모두 다섯 개다. 그 방문을 통해 다섯 명의 남자가 복도로 나왔다.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엉거주춤한 모습에 또 다시 웃음이 나왔다. 아침에 다퉜던 403호와 404호, 그리고 410호 할아버지와 내 옆 방 413호 가짜 스님. 나머지 한 사람은 나와 총무 형을 빼면 이 고시원에서 제일 오래 된 401호 고시생. 그는 이제 고시원에 남은 유일한 수험생이다. 나를 포함해 그렇게 여섯 명이 늘어서자 좁은 복도가 가득 찼다.
“다들 소리 들었죠?”
가짜 스님이 손동작으로 노크하는 시늉을 해 보이며 그렇게 물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씨! 어떤 놈이 장난질이야? 잡히기만 해 봐라. 아주 그냥…….”
404호 남자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를 냈다.
“일단 조용히 하고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나? 여긴 좁고 다른 사람들한테 방해도 되고 말이야.”
410호 할아버지의 말에 다들 눈치만 보다가 누구랄 것 없이 옥상으로 향했다. 공식적인 흡연 장소이자 빨래를 널기도 하는 옥상은 24시간 개방이다.
“이제 좀 후련하네.”
옥상에 들어서자마자 가짜 스님이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독방처럼 갑갑해서 원.”
404호 문신도 담배를 빼 물었다.
“자, 자. 담배 피고 체조하는 건 다음에 하고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누가 용의자 같은 가?”
할아버지의 말에 문신이 펄쩍 뛰었다.
“아니 용의자란 말을 뭐 그렇게 함부로 쓰신 답니까?”
“미안하네. 습관이 돼 나서. 이래봬도 왕년에 형사였거든.”
할아버지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야. 보기완 다르네요. 할아버지, 범인도 많이 잡으셨어요?”
연신 하품을 하던 403호 대학생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저…… 죄송한데요. 빨리 이야기하고 내려가면 안 될까요? 시험이 얼마 안 남아서…….”
체육복 바지를 명치까지 올려 입은 고시생이 뿔테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게 좋겠네요. 자, 단도직입적으로다가 물을게요. 이 중에 범인 있습니까? 문 두드리고 도망간 사람 있냐고요.”
가짜 스님의 말에 모두 멀뚱히 서로만 바라봤다.
“그럼. 이 중에는 없다고 보고, 의심 가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귀는 멀쩡하거든. 가만히 들어보니까 오늘 밤에는 401호에서 시작해서 복도 끝까지 이어지더군. 그리고 또 작지만  발소리도 들렸어. 그래서 나는 누가 노크를 하면서 달려간다 싶었지.”
“누가, 왜 그랬을까요?”
대학생이 호기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왜는 왜겠어? 이 고시원에 미친 사람이 한 둘이야? 미쳐가지고 장난친 거겠지.”
가짜 스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시생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사람의 장난이면 다행이게요? 전 아무래도 유령 짓인 것 같아요.”
“유령? 귀, 귀신 말이야?”
“다들 생각해 보세요. 이 좁은 고시원에서 잡힐 걸 뻔히 알면서 누가 이런 유치한 장난을 하겠어요? 제가 고시원을 숱하게 옮겨봤지만 이런 장난은 처음이에요. 아시잖아요? 여기선 다른 사람하고 마주치는 게 제일 무섭다는 걸.”
“그러고 보니 여기에 딱 오자마자 섬뜩한 음기가 느껴지더라고. 지난밤에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도 나는 밖을 살짝 내다봤거든. 그랬더니 어둠속에 뭔가가 서 있는 것 같은 거야! 무서워서 얼른 문을 닫았지.”
가짜 스님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우리가 방금 올라온 계단을 바라봤다. 어둠속에서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유령이라고 치부하는 건 너무 황당하다 싶네만…….”
할아버지가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니라니까요. 다른 분들은 오신지 얼마 안 돼서 모르겠지만 여기는 옛날부터 유령이 나오기로 유명한 고시원이었다니까요!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다보면 복도에서 이상한 소리도 들리고, 2층 텔레비전이 저 혼자 켜지기도 한다니까요! 무서워도 여기보다 싼 고시원이 없어서 옮기지도 못하고 있어요. 제가 오고 얼마 후에 실제로 자살한 사람도 둘이나 있어요. 바로 여기서 뛰어내렸죠.”
고시생이 가리킨 옥상 난간에 모두의 시선이 멈췄다.
“아니, 아니, 아니. 이상한 이야긴 그만하고, 나는 그게 아닌 가 걱정스럽더라고.”
문신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거라니?”
“영감님 혹시 오늘 텔레비전 보셨어요? 고시원 방화사건 때문에 난리잖아요. 거기서 나왔는데 고시원에 불 지른 이 자식이 사람들이 방에 있나 없나 알아보려고 노크를 해 봤다네. 사람이 있어야 더 많이 죽일 수 있으니까 그랬다나 봐요.”
“사, 사실은 저도 문을 열면 갑자기 칼이라도 쑥 들어올까 봐 문손잡이를 잡고 한참을 숨  죽이고 있었다니까요.”
대학생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럼 사람 짓이란 건가? 그것도 이 고시원에 불을 싸지르려는 사람.”
“413호 아저씨는 성격도 급하네. 딱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지. 요즘엔 워낙 흉흉한 일들이 많으니까.”
문신이 이 사이로 침을 찍 뱉었다.
“그나저나 나는 솔직히 말해서 복도 끝 방 남자가 조금 의심스러워. 아 왜 얼굴 험악하고 덩치 큰 사람 있잖아. 다들 한 번씩 마주쳤지? 내가 또 그런 쪽에 있어봐서 척 보면 알거든. 그 남자는 백퍼센트 수배자야. 화장실이나 식당 오고가며 몇 번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시선을 피하면서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는 게 뭔가 켕겨서 그런 걸 거야. 확실해.”
“말도 안 돼. 그럼 뭐예요. 그 복도 끝 방, 그러니까 420호 남자가 범인이라는 거예요? 수배자라면 왜 이런 장난을 치겠어요? 오히려 쥐 죽은 듯 숨어 있어야지.”
대학생의 말을 할아버지가 손을 들어 막았다.
“사실은 나도 그 남자가 약간 의심스러웠네. 난 딱 한 번 마주쳤는데, 아마 3주 정도 전 일거야. 굉장히 큰 여행 가방을 낑낑거리며 들고 들어오더라고. 그런데 말이야…….”
모두가 할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안쪽에서 꿈틀거리더라고.”
“네에?”
“그러니까 내 말은 그 남자가 뭔가 구린 구석이 있다는 거지. 수배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범죄의 냄새가 난다고 할까? 게다가 더 결정적인 건 우리 방문을 두드리던 그 노크 소리, 그게 복도 끝에서 멈췄다는 사실이야. 복도 끝에 뭐가 있나? 바로 420호지.”
“그러니까 영감님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420호 남자가 이번 노크 사건의 범인인 것 같다 이 말씀이죠?”
가짜 스님이 확인하듯이 물었다.
“이유야 뭐 다양하지. 노크 해 보고 사람 없으면 문 따고 들어가 돈을 훔칠 수도 있고.”
문신이 말했다. 뒤를 이어 대학생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쇄살인범 아닐까요? 여행 가방 속에 든 건 죽기 직전의 사람이고, 이번에 문을 두드린 것도 죽일 사람을 정하는 자기만의 의식이랄까, 하여튼 뭐 그런 거죠! 왜 수박 고를 때도 두드려 보잖아요.”
“아니면 유령한테 쓰였을 수도 있죠.”
마지막 말은 고시생의 입에서 나왔다. 그 말을 끝으로 옥상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누구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마 다들 고시원 생활 이후 가장 많은 말을 한 것이리라.


잠시 후 우리는 옥상을 빠져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서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목적지는 똑같았다. 420호 앞.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좁은 복도에서는 자연스레 일렬이 되었다. 누가 제일 앞에 설 건지로 잠시 혼란이 있었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문신이 앞에 서고, 그 뒤는 할아버지가 서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복도는 유난히 조용했다. 앞 뒤 사람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우리는 천천히 420호를 향해 걸었다. 평소에는 가깝기만 하던 거리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영화에서처럼 전기톱이라도 들고 갑자기 뛰쳐나오면 어쩌죠?”
420호 문 앞에서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학생이 물었다.
쉿.
모두 입에 검지를 가져다댔다.
문신이 호기롭게 한 발 앞으로 다가가 420호 문에 귀를 가져갔다. 그러고는 손짓으로 모두를 불렀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문신의 입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슥삭슥삭.

아닌 게 아니라 420호에서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들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쯤 가짜 스님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거 칼 가는 소리 아냐?”
바로 그때, 소리가 뚝 멈췄다.
복도에 선 사람들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누른 채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좁은 복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도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 닫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렇게 한밤의 탐정 놀이는 끝이 났다. 나름 재미있었기에 생각보다 빨리 끝난 게 아쉬울 정도였다. 420호 남자는 누굴까? 다른 이들의 짐작처럼 정말 범인일까? 범인이라면 왜 한밤에 문을 두드리며 다니는 걸까? 고등학교 때 즐겨 읽었던 탐정 소설의 헤드카피에나 어울릴법한 궁금증들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해결할 수 있다는 유혹을 뿌리치며 방안에 앉아 한참동안 추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문 쪽이 아닌 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똑. 똑.

옆방인 411호와 붙은 벽이다.
“무슨 일이죠?”
옆방에서 신호를 보내오는 건 처음 겪는 일이라 적잖이 당황하며 물었다.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411호 남자는 근처 김밥 집에서 배달 일을 한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그가 벽에 얼굴을 대고 소곤거리는 모습이 훤히 그려졌다.
“저도 당황스러운데요, 420호 남자가 연쇄살인범인가 그렇다내요. 왜 노크 소리 들렸던 거 아시죠? 그게 우리를 죽이려는 수작이었다나 봐요. 아직 확실한 게 아니라서 내일 아침에 4층 사람들 모두 모여서 420호에 가 보자고 해요. 저도 옆방에서 전달 받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거니까 더 자세히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생각해 보니 그 남자가 조금 이상하긴 했어요. 일전에 주방에서 마주쳤는데 식칼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더라니. 어휴 섬뜩해. 아무튼 문단속 잘하고 주무세요.”
이야기가 재미있게 흘러간다. 끝난 줄로만 알았던 탐정 놀이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방으로 뛰어 들어갔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옆방 문을 두드려 이야기를 전했고, 새벽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돌고 돌아 나에게까지 왔다. 게다가 모든 소문이 그렇듯이 꽤 살이 붙어 있다. 이 기세라면 419호 사람이 이야기를 들을 때쯤엔 420호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흉악범이 되어 있으리라. 심약해 보이는 419호 사람이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다. 그래도 나는 413호와 붙어 있는 벽을 두드려 들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413호 가짜 스님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예” “예” 대답하기에 바빴다.
유령처럼 떠돌던 사람들이 바야흐로 연대를 시작했다.
어쩌면 내일은 이 고시원 역사상 가장 시끄러운 아침이 될 지도 모른다.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밤을 꼬박 새웠다.


“자, 여길 보세요.”
문신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볼일이 있어 아침에 나가야 했던 사람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옥상에 모였다. 뚱한 표정으로 서 있거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등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문신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우리 고시원의 최신 연락망을 통해 이미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최신 연락망이라는 대목에서 몇 명이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나도 그 중 하나.
“그래도 다시 정리해 보죠. 모두가 피해를 입었던 야밤의 노크 소리. 그 정체는 바로 420호 남자가 먹잇감을 고르는 소리였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밖으로 나오는 사람을 채 가려는 계획이었죠.”
모인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삼류 추리 소설보다도 못한 이야기였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보에 따르면 그 남자는 연쇄살인범이고, 전과가 10범이 넘는 아주 악질적인 놈이랍니다. 주방에서 식칼을 휘두르는 걸 본 사람도 있고, 그 남자가 들고 온 여행가방 속에 시체가 든 걸 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요즘 들어 우리 고시원 주위에 검은 옷 입은 사람 두어 명이 어슬렁거리더라고. 인상 더럽게 생겼던데 그 놈들도 한팬가?”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나도 봤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 검은 옷의 이인조는 나도 봤다. 옥상에서 밑을 내려다보는데 낯선 두 남자가 고시원 간판을 뚫어져라 쳐다  보고 있었다.
“아마 한패일 거요. 요즘은 범죄가 조직화 되거든.”
뒤쪽에 서 있던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 참고로 저 분은 전직 형사셨습니다.”
문신의 소개에 사람들이 일제히 할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몇몇은 “아!”하는 감탄을 쏟기도 했다.
“전 최근에 420호 방 앞에 크레파스 조각이 떨어진 걸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것도 사건과 관련이 있을까요?”
반찬통을 던졌던 405호 남자가 물었다.
“관련 있지 않을까요? 왜 영화에서도 나오잖아요. 살인마가 사람을 죽이기 전에 잔인하게 고문하는 장면. 어쩌면 이 사람은 크레파스를 먹이는 걸지도 몰라요.”
대학생의 호들갑에 몇몇이 얼굴을 찌푸렸다. 텁텁한 크레파스를 깨무는 상상을 하며 나도 얼굴을 찡그렸다.
“그냥 경찰에 신고하면 안 됩니까?”
깡마른 419호 남자가 물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얼굴이 창백하다.
“여기 형사 영감님이 계신데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제가 경찰 쪽 하고는 인연이 많은데 제 경험으로는 지금 경찰 불러봐야 아무것도 안 됩니다. 걔들은 확실한 증거나 영장이 없으면 꼼짝을 안 해요. 만약에 우리가 경찰 불렀다는 게 알려지면 나중에 그 해코지를 어떻게 감당합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확실한 물증을 잡은 다음에 신고해야죠. 그래서 지금 이렇게 모인 거고요.”
문신의 말에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지지를 표했다. 딱히 반론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내려가 보죠. 설령 놈이 반항을 하더라도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할 겁니다.”
참으로 간단하고 단순한 논리다. 내려가서 420호 남자가 있으면 캐물을 심산이고 만약 없으면 문이라도 따겠다는 이야기다. 나는 슬며시 웃으며 사람들을 따라 내려갔다. 어젯밤과는 다르게 복도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힘찼다.
“그나저나 이렇게 중요할 때에 총무란 인간은 어딜 간 거야?”
“예비군 동원 훈련 때문에 삼일 동안 고시원 비운다고 입구에 공지 붙여놓은 거 못 읽었어요? 내일인가 온대요.”
“뭐 무기라도 있어야 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래서 전 이 아령이라도 챙겨왔어요.”
잡담하는 군중을 이끌고 선두로 걷던 문신이 420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주먹을 한껏 말아 쥔 뒤 거칠게 노크를 해댔다.

쾅. 쾅. 쾅. 쾅.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열어봅시다.”
언제 챙겨왔는지 가짜 스님이 젓가락 한 짝을 문신에게 내밀었다. 문신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젓가락을 집어 들고 열쇠 구멍에 쑤셔 넣었다. 몇 번 돌리는 가 싶더니 문은 ‘톡’ 소리를 내며 맥없이 열렸다.
차가운 긴장감이 복도를 훑고 지나갔다.
“자, 그럼.”
문신이 사람들을 돌아보고 중얼거린 뒤 천천히 420호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저, 저게 뭐야?”
사람들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420호의 방 안 풍경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벽과 창문 아래, 그 외에도 조금의 틈이라도 있는 곳이면 모두 그림이 가득했다. 꽃, 기차, 구름, 그리고 활짝 웃는 어른과 아이. 모두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다. 아마추어의 솜씨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멋들어진 그림도 있고, 아이가 그린 듯 알아보기 힘든 그림도 있다.
“세상에. 이게 웬일이야?”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엄청 멋지구먼.”
“여길 봐. 여기도 그림이 있어.”
그제야 모두들 침대와 바닥을 바라봤다. 곳곳에 과자 봉지가 널린 바닥도 온통 그림이다. 한 옆으로는 라면 국물이 말라붙은 냄비도 보인다. 침대에는 나무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목각 비행기가 날개를 접고 쉬고 있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한 평짜리 고시원 방이 사뭇 달라 보였다.
“가만있어 봐. 이건 우리들 아닌가?”
할아버지가 침대 머리맡의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열 댓 명의 얼굴이 퍽 괜찮은 솜씨로 그려져 있다. 가만히 보니 다 고시원 사람들이다. 주름 가득한 할아버지도 있고,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문신도 보인다. 늘 이어폰을 끼고 다니는 대학생의 얼굴도 있다. 그리고 그 멋진 그림들 아래 눈코입만 간신히 붙은 얼굴 하나도 보인다.
그때였다. 모두가 그림 감상에 여념이 없을 때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는 짓이야?”
420호 남자였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씩씩거리며 4층 입구에 서 있다. 놀랄 새도 없이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다들 얼이 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남자의 기세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한데 뭉쳤다.
“조, 조심해요.”
문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남의 방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큰 키로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 그, 그게 아니고…….”
어쩌다 맨 앞에 서게 된 가짜 스님이 턱을 덜덜 떨었다. 얼어붙기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사람들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방을 한 번 둘러본 후 뜻밖의 소리를 했다.
“어쨌어? 어쨌냐고?”
“뭐, 뭘요? 우리는 안 어쨌어요.”
대학생이 고개까지 가로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 아들 어쨌냐고?”
“네? 아들?”
그 순간, 우리는 분명히 들었다. 침대 밑에서 조용히 새어나오는 앳된 아이의 음성을.
“아빠. 아빠.”
모두가 입을 딱 벌리고 침대를 주시하는 사이, 낡고 삐걱거리는 그 침대 밑에서 많아야 여섯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사내아이가 꼼지락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나무아미관세음보살.”
가짜 스님이 불경을 중얼거렸다.


공원에서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던 420호 남자는 그 지역 건달들이 괴롭히는 통에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남자 집의 가세가 기울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마저 병이 들어 그동안 모아놨던 병아리 눈물만큼의 돈도 다 날려버렸다. 결국 사채를 끌어 썼다. 그런 식의 이야기가 다 그렇듯이 사채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전세금마저 뺏긴 남자는 고시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사이 아내는 끝내 하늘나라로 갔다. 자기 한 몸이야 막노동판이고 야밤의 빌딩 청소건 할 것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여섯 살 난 아들이었다. 집도 절도 없으니 아이를 키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아이를 고시원에 데려 올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게 바로 3주 전 일이다. 그 후로 한 평 공간에서의 아들과 아빠의 아슬아슬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유일한 놀이라고는 그림 그리기. 하지만 스케치북을 사줄 형편이 안 돼서 방바닥과 벽에 그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그림을 그리면 아들도 곧잘 따라 그렸다.
“쯧쯧쯧. 얼마나 힘들었을까. 말이라도 하지 그랬수.”
420호 남자의 말을 듣던 할아버지가 가만히 혀를 찼다.
“그럼 고시원에서 나가라고 할까봐….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쳐서. 아들 녀석이 하도 심심하니까 장난삼아 노크를 하고 다녔나 봅니다. 그저께 밤에 처음 그렇게 하는 걸 보고 따끔하게 야단을 쳤는데 간밤에 일하러 나간 사이 또 그랬나 봅니다. 다른 방에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애들 호기심이라는 게……. 정말 죄송합니다.”
그랬으리라. 아빠가 일을 하러 나간 뒤 심심함과 적막함을 견디지 못한 이 꼬마는 나랑 제발 놀아달라는 심정으로 다른 방의 문을 두드리고 다닌 것이리라.
“아니 뭐, 그렇게 죄송해 하실 것까지야 없고. 이제 사정을 알았으니….”
문신이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섰다. 날카롭게 찢어진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에휴. 사는 게 뭔지….”
가짜 스님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다시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4층 입구 문이 벌컥 열렸다.


“이진성이 어딨어? 빨리 나와! 어서!”
“돈 떼먹고 도망가면 다야? 빨리 안 나올래?”
복도로 불쑥 들어온 사람은 그 이인조였다. 고시원 근처를 맴돌던 검은 정장의 이인조.
순간 420호 남자의 얼굴이 하얘졌다. 다른 사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뭐, 뭐야?”
“그놈들입니다. 사채업자들. 잘 피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이인조는 신발도 벗지 않고 성큼성큼 420호 앞까지 걸어왔다.
“어휴. 냄새. 이런 구질구질한 고시원에 처박혀 사는 인간들 얼굴 좀 보자. 어이구. 마침 한 자리에 다 모였네? 흐흐흐.”
“당신들 누군데 이렇게 막무가내요?”
405호 남자가 호기롭게 항의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비켜 이 자식아. 어디서 깝죽대? 야! 이진성이! 네가 이런데 숨어 있으면 우리가 못 찾을 줄 알았냐? 너 신체포기각서에 서명했지? 우리 그걸로 대화 좀 하자. 이 유령처럼 희멀건 한 것들은 뭔데 여기 다 모여 있냐? 빨리 꺼지라고 해.”
이인조 중에서도 더 사나워 보이는 키 작은 남자가 우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여, 여러분 이제 방으로 돌아가세요. 여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420호 남자가 절망적인 표정을 애써 감추며 더듬더듬 그렇게 말했다.
“어쭈? 아들까지 한 방에 있어? 꼴사납다, 정말. 이 애새끼는 아빠 잘못 만나서 무슨 고생이래. 크크크.”
남자의 얼굴이 고통과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자자. 관계없는 것들은 빨리빨리 흩어져. 괜히 험한 꼴 보지 말고. 알겠어? 대신에 경찰에 신고하거나 하면 죽을 줄 알아!”
키 작은 남자가 품 안에서 칼을 꺼내 우리를 향해 한 번 휘둘렀다. 모두 다 놀란 얼굴로 한 발 물러났다. 하지만 할아버지만은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못 비키네! 난 이 방에서 절대 안 나갈 거니까 이 양반하고 이 양반 아들한테 해코지 할 거면 나를 먼저 죽이든지 살리든지 해!”
“뭐라고? 이 영감탱이가 미쳤나! 진짜 죽여줘?”
“나, 나, 나도 죽여라. 이 나쁜 놈들아. 빨리 죽고 극락왕생 할 거니까 이 사람들 손 델 거면 나도 죽여라.”
이번에는 가짜 스님이었다.
“퇘! 지금까지 나쁜 짓 숱하게 하고 살았지만 적어도 어린 애들은 안 건드렸다. 저 애한테 뭐라고 할 거면 나도 상대해라!”
문신이 윗옷을 벗으며 외쳤다. 그제야 이인조의 얼굴에도 당황한 빛이 서렸다. 그것은 참으로 묘한 광경이었다. 오늘 아침이 오기 전까지는 한 번의 교류도 없던 사람들이 마치 자기 가족을 보호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칼날 앞에 섰다. 문신이 버티고 선 앞은 아령을 무기로 가져왔다는 남자가 가로막았다. 그 앞에는 여전히 힘겨워 보이는 얼굴이긴 했지만 419호 남자가 섰다. 그렇게 인간 벽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아니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고시원 버러지면 버러지답게 살아! 확 그냥.”
맨 앞에 선 대학생이 두 눈을 질끈 감고 팔을 양 옆으로 벌린 채 외쳤다.
“그래 미쳤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할 거다. 나, 나를 찌르기 전에는 절대 이 아저씨랑 꼬마 애 못 괴롭힌다!”
이인조가 난감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더니 자기들끼리 슬쩍 눈빛을 교환했다. 무언가 독한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형. 처리해야겠죠?”
나는 이인조의 뒤에 선 총무 형을 향해 물었다. 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른쪽 손을 뻗어 키 작은 놈의 몸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뭐, 뭐야? 갑자기 몸이 왜 이래? 으아악.”
“왜 그러세요? 몸이 왜요?”
“몰라. 이 자식아. 갑자기 따끔거리고 춥고 아무튼 기분이 너무 이상해. 으아아악! 나 좀 어떻게 해 봐.”
나는 키 작은 놈을 부축하려는 또 다른 남자에게 다가가 귓가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이제 그만 나가지. 그리고 다시 오지 마.”
“아아아악! 무, 무슨 소리야? 누가 나한테 말했어? 엉?”
귀를 잡아 뜯을 듯 비벼대던 남자가 키 작은 놈보다 먼저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아악! 귀, 귀신이다.”
“같이 가. 이 자식아. 으아아악!”
이인조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쟤들 뭐야? 미친 건 자기들 아냐?”
문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즘 사채업자들은 마약도 같이 파는 건가?”
할아버지도 중얼거렸다.
“아무튼!” 가짜 스님이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잘 끝나서 다행이다. 아이고! 죽는 줄 알았네.”
“아까는 극락왕생 할 거니까 빨리 죽여 달라면서요?”
대학생이 장난 끼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 그건 그냥 한 말이지. 죽더라도 이 고시원은 벗어나서 죽어야 할 거 아냐?”
가짜 스님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아빠 옆에 꼭 붙어있던 꼬마 아이도 덩달아 맑게 웃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생긋 웃으며 벽에 그려진 그림을 가리켰다. 고시원 사람들의 얼굴 맨 아래 아무렇게나 그려진 내 얼굴을. 꼬마는 언제 나를 봤던 것일까? 어두운 복도를 지나거나 주방 한 쪽에 우두커니 서서 상념에 빠져 있던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녀석은 내 얼굴을 그려줬다. 나는 가지고 있던 구슬을 아이의 호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었다. 망자가 산 사람의 물건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다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자장면이랑 탕수육 어때요?”
누군가가 신나게 외쳤다.
“그럼 고량주도!”
또 다른 누군가의 대답이 이어졌다.
“돈은 정확히 더치패이입니다! 허허허.”
문신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유령들만 떠돌던 고시원이 졸지에 시장 통처럼 시끄럽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오래 가지 않으리란 사실을 잘 안다. 아마 일주일 정도 지나면 다시 모른척하며 스쳐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420호의 사정도 여전히 그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또 안다. 이 순간의 즐거움이 ‘고문 고시원’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희망이 되리란 사실을. 그리고 그 희망이 있는 한, 고작 시험에 떨어졌다는 이유로 목숨을 버리는  나와 총무 형 같은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는 않으리란 사실을, 나는 안다.
“그나저나 어젯밤에 서로 벽을 두드려서 말을 전하는데, 왠지 짜릿한 게 재밌지 않았습니까?”
고시생이 모처럼 환한 얼굴로 말한다.
“그러게. 나도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더라니까!”
가짜 스님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받았다.
“그나저나 413호 아저씨는 어떻게 말을 전달 받았어요? 그 옆방인 412호는 오래전부터 빈방이거든요. 말씀 안 드렸나? 옥상에서 자살한 두 사람 중 하나가 412호에 살았거든요. 그래서…….”
“뭐?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총무 형과 나는 2층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산 자들의 뉴스를 본다. 그리고 죽기 전의 상황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총무 형은 방에 틀어박혀 훌쩍거리고, 나는 부유하는 영혼이 되어 고시원 곳곳을 누빈다. 살아생전의 방에서, 어두운 복도에서,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렀던 옥상에서 나는 상념에 젖는다. 시간을 잊을 만큼 그렇게 길고도 오래.
고시원과 함께 낡아가는 우리, 나와 총무 형은 고시원의 진짜 유령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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