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나와 그녀 사이

2008.12.26 22:2912.26

1.
그녀는 그녀와 닮았다.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그녀를 보고 처음으로 든 생각이다. 가을의 잔재를 붙잡고 있는 색의 코트를 입은 그녀는 지하철 좌석에 앉은 채로 책을 읽고 있었다. 책속에서 헤엄치는 문자들에 집중하는 그녀의 눈은 마치 유리병안의 금붕어를 보고 있는 고양이의 눈과 같았다. 길지 않은 머리를 뒤에서 묶고는 앞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활동적으로 보였다. 머리스타일에 의해 드러나야 할 운명이었던 그녀의 무력한 목덜미는 설익은 겨울 냄새에 흠뻑 젖은 목도리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그렇게 목도리를 감고 있는 그녀를 보자 예전에 그녀가 자주 감기에 걸리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의 그녀도 감기의 세례를 받았는지 이따금씩 코를 훌쩍이는 소리를 낸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손가락을 뻗어보았지만 닿는 것은 살짝 붉은 기운이 도는 그녀의 볼이 아닌 새파랗게 차가운 내 손가락의 그림자다. 그대로 수직선을 그으며 손가락을 내렸지만 그녀와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는다. 내가 보고 있는 그녀는 지하철 출입문에 비친 그림자 세상 속의 그녀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림자를 보고 있던 나는 눈이 피곤한지 고개를 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나와 그녀의 눈은 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동시에 마주 보고 있지 않기도 했다. 지하철 출입문이라는 그림자의 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같은 곳을 보고 있지만 보이는 것은 다른 것들이었다.
왜곡된 시선의 나선을 부유하는 것도 잠시 뿐, 그녀의 눈은 다시 문자의 세계로 걸어 나갔다. 나는 조금 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려 했지만 갑자기 어떤 남자의 그림자가 들어와 그녀의 그림자를 덮어버렸다.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잡이에 매달린 남자의 뒷모습만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자 나는 작게 칫, 소리를 내며 눈을 돌렸다. 씁쓸한 아쉬움의 뒷맛을 없애기 위해 귀에 이어폰을 꽂고 MP3플레이어의 음량을 높이자 달콤한 음악이 조금은 마음을 달래준다. 적당히 좋은 기분에 취한 나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2.
내가 창고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머릿속의 광경에 어울리는 형용사는 ‘복잡함’과 ‘난잡함’의 중간 어디쯤일 것이다. 어두운 방을 희뿌연 조명이 비추는 가운데 그 숫자를 센다고 하면 당장 내 눈이 파업을 주장할 것 같은 수의 상자들이 특별한 규칙 없이 각자의 탑을 쌓아가고 있는 모습은 정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경기를 일으킬 만한 모습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각 탑들은 노란 포스트잇으로 분류가 되어 있다. ‘질풍노도 사춘기의 증거목록 1항’, ‘내 인생의 꼴사나운 사람 모음집’ 등의 글이 작고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포스트잇에 쓰여 있는 것을 훑어보며 나는 창고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창고안의 몇몇 책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어 한번쯤 청소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본 TV프로그램’을 지나 ‘요 근래 가장 묻어두고 싶은 일’쯤에 이르렀을 때 내가 원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빈 과자 봉지와 책들이 기본 바탕을 깔고 그 위에 과자 부스러기들이 양념으로 얹혀 혼돈의 요리처럼 보이는 책상에서 남자는 스스로 요리의 일부가 되듯이 책상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었다. 왼손에는 글자가 빼곡히 적힌 파일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볼펜을 돌리고 있는 그는 나다. 나는 나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지만, 나는 돌리던 볼펜을 멈추지도 않은 채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상당히 정붙이기 힘든 모습이지만 나는 나한테 물어봐야 할 것이 있다.
“저기, 찾고 싶은 기억이 있어 왔는데.”    
“...어떤 기억?”
“예전의 걔 말야, 기억나?”
“머릿속에서 기억유무를 물어보는 건 바보짓이지만, 내가 바보란 걸 인정하면 나도 바보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군.”
어딘지 기분 나빠 보이는 표정을 짓는 나는 돌리던 볼펜을 멈추고는 왼손의 파일을 뒤져본다. 내가 파일을 보는 사이 나는 책상 주위를 둘러본다. 책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의 선물상자가 알록달록한 색을 자랑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등 뒤에서 내 목소리가 들렸다.  
“3년 전의 기억 쪽에 있어. ‘잊고 싶은지 잊고 싶지 않은지 헷갈리는 기억’ 바로 옆이야.”
“그래? 찾기에는 좀 힘들려나.”
“꼭 그렇지만도 않아. 내가 오기 직전에 두 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걔의 기억에서 일어난 화재신고였어. 최근에는 관리를 안했으니 일어날 만도 하지.”
나는 나를 탓하는 표정을 짓지만 나는 무표정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말을 담고 있는 표정으로 되받아 친다. ‘나는 나이고 나는 나인데 내가 나를 탓해봤자 내가 나를 탓하는 것 밖에 안 돼.’ 대신 친절하게도 나는 책상 서랍에서 녹색 플라스틱 자루의 빗자루를 하나 꺼내준다. 엉겁결에 빗자루를 받아든 나는 나에게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나는 더 할 말이 없어 보였다. 나는 누구한테 보내는 건지 애매모호한 한숨을 내쉬고는 탄 내 비슷한 냄새를 맡으려고 노력하며 다시 걸어갔다. 몇 걸음 옮기고는 나에게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는데 내가 먼저 말을 건다.
“저거는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오기 직전에 온 건데.”
내가 가리키는 ‘저거’는 아까 봤던 선물상자이다. 내가 오기 직전에 왔다면 짚이는 구석이 없지는 않다. 나는 잠시라고 하기에도 조금 짧은 시간을 고민하고 나에게 말했다.
“열지 말고 적당한 데 처박아 둬.”
“...정말 열지 않을 거야?”
“안 열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선물상자로 걸어 가 끈을 풀고는 포장지를 벗겨 버린다.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가까스로 떠올려 내 얼굴에 가져왔을 때에는 나는 이미 상자 속의 내용물을 보며 입에 볼펜을 물고 있었다. 입에 문 볼펜을 까닥이던 나는 나를 보면서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괜찮은데?”
“그래서 열기 싫었던 거야. 다시 싸서 넣어 놔.”
“과연, 이 여자 때문에 불이 난 거군. 이해가 되는데.”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나는 나와 눈을 마주친다. “닮았네.” “닮았지?” 동시에 말하며 두 나는 히죽거린다. 하지만 곧 나는 내가 손가락으로 손에 들린 빗자루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는 그녀를 떠올린다. 잠시나마 정말로 잊어버렸던 것에 대해 그녀에게 사과하며 나는 그녀의 기억을 찾아 달려갔다.
3.
그녀의 기억, 정확하게 풀이하자면 그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찾기 어렵지 않았다. 초등학생이 불장난한 쓰레기통만큼이나 연기를 내뿜고 있으니까. 내가 기억이 담긴 종이박스를 들어 재빨리 뒤집자 내용물들이 쏟아진다. 나는 불에 먹히고 있는 그녀의 기억들 위로 사정없이 빗자루를 내리쳤다. 다 사랑해서 이러는 거야. 하지만 내 마음을 모르는 지 기억들은 빗자루가 만든 바람을 타고 타작을 피해 도망가기 바빴다.
달래고 어르면서 빗자루를 수십 번 휘두르자 불은 흔적만 남기고는 사라졌다. 처참한 잔해들을 보고 있던 나는 그 자리에 바로 쭈그리고 앉았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타다 만 기억 중 하나를 손으로 집자 부르르 떨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동시에 내 가슴 속에서도 자그마했던 무엇이 고드름처럼 커지며 사정없이 찔러댄다. 조금씩 아픔이 가슴을 조여 온다. 그래도 나는 기억이 조금 더 선명해질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녀의 모습은 기억에서 보기만 하는 것인데도 미소가 날라 와서 입가에 걸리게 하였다.
아이러니다. 지하철에서 본 그녀는 예전의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을 덮어 지우는 위기를 가져다 준 존재였지만, 동시에 나 자신도 잊어버렸던 그녀의 기억을 되살리기도 했다. 사실 그녀 본인에게는 이쪽에도 저쪽에도 특별한 의지가 없었겠지만. 어쩌면 그녀 입장에서는 멋대로 남을 이용한다고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기억들도 하나씩 살려냈다. 캔커피, 입술, 손, 옷소매, 눈, 모자, 바지, 미니스커트, 목도리, 어그부츠, 발놀림, 냅킨장미, 조명, 목소리, 향기...단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닌 수많은 기억들이 차례로 내 가슴에 멍을 내고는 도망간다. 크기도 종류도 다른 그 모든 것들은 전부 그녀의 것들이었다. 나는 후회했다. 조금씩 수도꼭지를 열어가며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연속되는 아픔을 견디지 못한 내 가슴은 터져 있었고, 가슴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온 눈물이 눈에서 쏟아졌다.    
4.
나는 돌아온 나를 보고도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친 채 손만 살짝 들어 보일 뿐이었다. 그을음이 여기저기에 묻고 얼굴이 지저분해 진 것에 대한 질문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나한테는 그쪽이 더 편했다. 어쭙잖은 소리를 지금 들어봐야 위로가 되기는커녕 겨우 잠재워 둔 심장을 다시 깨우기만 할 것 같으니까. 어쩌면 나는 나름대로 나한테 신경을 써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애써 아무 일 없었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그 물건은 제대로 처리했어?”
“응.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랑 ‘외로움을 느낄 때’ 사이에 갖다놨어. 분명 오늘 밤이라도 열어보고 싶어질 걸.”
“사양하겠어. 내일 아침쯤이라면 모를까.”
내 대답에 나는 그래? 라면서 씨익 웃고는 종이를 한 장 건넸다. 스케치북에서 바로 뜯어낸 듯 한 종이에는 다소 간단해 보이면서도 내용전달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없는 어린아이의 그림체로 나와 지하철의 그녀가 크레파스로 그려져 있었다. 현실과 다른 점이라면, 내가 그림자가 아닌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물음표를 눈 속에 집어넣고 쳐다보자 나는 턱을 긁으면서 대답했다.
“깊숙한 곳에 있는 어린애가 그린 그림이야. 아까 그녀를 보고는 창작욕이 불타오르는 겉 같더라.”
“언제나 그렇지. 그렇게 노력해도 결국은 다 백일몽이라는 걸 깨달아야 할 텐데.”
“아직 어리잖아? 어릴 때는 모르는 게 낫지.”
내가 똑같은 나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냐는 말을 입안에서 질겅질겅 씹어대고만 있는 가운데 나는 파일에 뭔가를 쓰면서 말을 이었다.
“아는 게 많을수록 꿈은 재미없어지지. 개인적으로는, 그 녀석만은 절대로 늙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어이, 밖에서 철이 덜 들었다는 소리를 직접 듣는 건 나라고?”
내 반박에도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시선을 파일에만 두었다. 나한테 뭔가 더 말하려는 순간,  손에 들린 그림이 내  주의를 붙잡았다. 크레파스로 그려진 나와 그녀. 서로 마주보고 초등학생 그림의 전형적인 웃음을 머금고 있는 나와 그녀. 유치하다. 아무래도 조금은 어른의 세계를 강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나는 나를 내버려 두고 나를 찾아 머릿속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5.
툭하면 크레파스로 있지도 않은 일을 그려대는 나를 찾아 창고보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가니 도서관이 나왔다. 창고와는 다르게 깔끔하고 정리된 모습의 도서관은 거대한 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따뜻한 갈색 톤으로 만들어진 가운데 천장의 채광창에서 들어오는 정체모를 빛이 친근한 분위기를 더욱 살려주고 있는 형태이다. 찾아온 손님을 빙 둘러싸고 있는 책들은 ‘덧셈 및 뺄셈’같은 기초적인 내용부터 ‘응용 철학’같은 여간해선 손을 대고 싶지 않은 것까지 다양했다.
도서관에 있던 나는 창고의 나보다는 조금 더 예의가 발랐다. 책장을 정리하고 있던 나는 나를 보고는 흘러내린 안경을 바로 하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같이 살짝 끄덕여 인사하고는 나를 지나가려 했다. 딱히 도서관에 볼 일이 있어 온 건 아니니 굳이 말을 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는 나한테 볼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저기, 최근에 새로 들어온 지식들에 대한 얘기입니다만.” 나는 어딘지 세상에서 서른여섯 번째로 쓸모없는 물건을 보는듯한 눈으로 안경 너머의 나를 보며 얘기했다.
“어째서 학문적인 내용보다 ‘뱃살빼기’라든지 ‘여자를 한눈에 반하게 하는 법’같은 것들이 더 많은 거죠? 지금 그런데 신경 쓸 여유가 있는 분이셨나요? 아니면 현실도피? 우리가 무슨 틴에이저입니까? 조금은 더 건설적인 지식을 골라 습득해줬으면 합니다.”
“저기, 하지만 그런 것들도 인생을 보다 윤택하게 해주는 데는 도움이 된다고. 결국은 다들 행복해지려고 사는 건데 뭘 그리 빡빡하게 굴어.”
나는 이 순간을 대충 넘기고 싶어서 실실 웃으며 대답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나의 성미를 더 돋우기만 한 것 같다. 나의 얼굴에 경멸적인 표정이 기어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윤택 어쩌고 하는 얘기도 길거리에 나앉으면 못할걸요. 삶의 질 향상 타령은 재력과 능력을 겸비한 자나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말 들어봤어? 돈으로는 행복을 살 수 없다.”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돈을 손에 거머쥔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정론이 끝없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피로함이 발밑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째서 내 머릿속의 나는 전부 다 이런 녀석들뿐일까. 이마에 손을 짚고는 눈을 감고 나한테서 도피해보려 했지만 내 머릿속에서 말하는 녀석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러니 이런데서 헛짓거리나 하지 마시고 빨리 나가서 영어단어라도 외우시죠. 예, 저도 압니다. 그런 생활이 힘들다는 거. 하지만 지금 이렇게 해놔야 나중에 편해진다는 건 본인 스스로도 알잖아요? 인생을 즐기시는 건 그 때 하시고-”
“웃기지마.”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내 목소리가 한참 설교하던 내 얼굴을 석고를 부은 것처럼 굳어지게 했다. 뒤를 돌아보니 창고에 있던 내가 비웃음의 정석이라고 할 만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나중에? 네 잘난 지식들은 그 ‘나중에’라는 시간이 실존한다고 말하냐? 내가 알기론 그런 시간은 서력에도, 마야식 달력에도 없어.”
안 그래? 라는 투로 웃는 나를 보자 나는 사태가 좋아질지 악화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더 복잡해 질 거라는 것. 나와 나와 나의 3자 대면이라니. 그런 건 기억 쪽에도, 지식 쪽에도 없다. 곧 충격에서 깨어난 내가 내게 소리를 지름으로 해서 내 예견은 인류역사의 예언 상 최단 시간내에 실현되었다.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음습한 창고에서나 처박혀 있어야 할 분이!”
“뭐야, 그 꼬맹이식의 반박은. 여기 가득한 지식은 논리라는 걸 가르쳐주지 않디?”
“일단 조금 진정들 하지 않을래? 나는 단지 나를 만나러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니-”
“그런 애나 만나고 있으니까 발전이 없는 겁니다! 우리 나이가 도대체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정신연령은 우리 나이와는 조금 갭이 있다고 보는데.”
“저기, 자극하는 발언은 그만두는 편이-”
“어차피 저도 나고 나도 나고 나도 나인데 정신연령이 뭔 상관입니까!”
“그럼. 이 나와 저 나와 그쪽의 나도 다 같은 나이지. 그리고 이 건너편 방의 나도 나란 걸 잊지 마.”
“아, 그러니 나는 이제 나를 만나러 갈 테니까-”
“나도 분명 저이지만 저는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이 싫습니다!”
“내가 나를 만나겠다는데 왜 내가 반대하는데. 내가 나를 만나든, 아니면 내가 나를 만나든 내가 상관할 일은 아냐. 그러니 나는 이제 나를 만나러 가지 그래? 나는 나랑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을 테니-응?”    
내가 나한테 말을 걸었을 때는 이미 나는 일인칭이 정체성을 잃은 혼돈의 장소에서 빠져나와 도서관의 문을 열고 있었다. 나와 내가 만나는 장소에는 절대로 다신 안가겠다고 다짐하면서.
6.
도서관의 문 너머는 밝은 형광등이 백색으로 칠해진 벽을 비추는 기다란 복도이다. 그것만으로는 어딘지 정신병원의 분위기가 나지만, 벽면에 가득히 채워진 색색의 크레파스 그림들로 인해 복도는 조금 더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도서관과 연결된 문을 닫자 나와 내가 만들어내던 소음은 손쉽게 격리되었다. 기분이 나아진 나는 중간에 방은 하나도 없는 복도를 따라 계속 걸어가면서 크레파스 그림들을 감상했다. 일관된 주제 없이 다양한 그림들이 있었지만 모든 그림의 공통점은 있었다. 이것들은 전부 상상화이다. 과거에 있었을 수도 있고 미래에 있을 수도 있지만 현재에는 일어나지 않는 인들인 것이다.
벽에 손을 뻗어 만져보자 색감과는 달리 차갑지는 않았다. 미적지근한 백색이라니. 어딘지 어울리지 않지만 납득할 수는 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그 미묘한 느낌을 즐기면서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겼다. 내 발걸음에 맞춰 구두 소리가 메아리를 만들어 내며 복도에 울린다. 왠지 이 장소에 실례되는 일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복도의 끝에는 입구와 마찬가지로 문이 하나 있었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이번 문에는 손잡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턱을 긁으면서 잠시 생각했다. 여기에도 있구나, 악취미의 내가. 힌트라도 어디 적혀있나 해서 문과 그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그런 친절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 참, 도대체 나는 나를 어디까지 힘들게 할 생각인 걸까. 한숨을 쉬며 정중하면서도 고압적이고 무게를 실은 노크를 하였다. 똑, 똑.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가 울리는 것이 귓가에서 없어질 때쯤에서야 대답은 나왔다.
“나는 조금 더 재미있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적어도 노크소리로 젓가락 행진곡은 할 줄 알았어.”
바랄 걸 바래라. 한 차례 쏘아주고 싶었지만 나는 나 중에서도 가장 세심한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특히 방문을 열어주지 않은 상태에서는.
“나도 하고는 싶은데 요새는 외우고 있는 음악이 없어서 말이지. 일단 문 좀 열어줄래? 이번에 새로운 소재를 찾았다면서?”
“응, 보자마자 영감이 확 떠올랐어. 근데 창고의 나는 칭찬해줬지만 도서관의 나는 조금 싫어하는 것 같아.”
“도서관의 나는 원래 싫어하지 않는 게 없어. 그런데 나도 그 그림 좀 봐도 될까?”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찔러 보기에는 조금 일렀나, 싶었지만 다행히 부끄러워하는 내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대신 보고 웃으면 안 돼.”
“걱정 마. 안 웃을게.”
내가 웃기 전에 나를 울려버릴 생각이거든. 나를 탓하지는 마. 그게 어른이 되는 길이야. 내가 음흉한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어딘지 그 소리가 단말마의 느낌이 난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복도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흰색의 벽은 같았지만 조명은 형광등이 아닌 방구석의 벽난로가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바닥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크레파스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는 벽난로 앞에서 엎드린 채로 스케치북을 앞에 펼쳐두고 있었다. 내 손가락은 쉬지 않고 스케치북에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림속의 나와 그녀는 지하철 좌석에서 서로 머리를 기댄 채 자고 있었다. 역시 유치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 그림속의 내 표정이 너무 평화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웃지 않기로 했잖아.”
“아니, 그래서 웃은 건 아냐.”
“다신 안보여 줄 거야.”
삐진 목소리의 나는 볼을 부풀리며 스케치북을 덮었다. 나는 스케치북을 꼭 껴안고 앉아 있는 나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눈을 보자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이 이야기를 꺼낼 적기라고 생각한 나는 입을 열었다.
“그만하자.”
“그만?”
“응, 이제 그만.”
나는 왜? 라는 단어가 무한대로 나열되어 있는 눈을 나에게 향했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 서며 대답했다.
“이런 공상은 분명 즐겁기는 하지만, 의미가 없어. 시간낭비야.”
“그럼 쓸데없는 짓 인거야?”
“응. 다 쓸데없는 짓이야.”
난 나의 반응을 지켜보았지만 의외로 나는 울거나 떼를 쓸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나는 스케치북을 내려놓고는 내 목을 끌어안았다. 사람의 온기에 내 가슴 속의 무엇인가가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느슨해진 틈을 따라 내 말이 흘러들어왔다.
“괜찮아.” “저기, 나는 아무렇지도-” “괜찮아.” “그러니까-” “괜찮아.”
말에는 마법이 걸려 있다. 틀림없다. 나는 나를 끌어안고는 오늘 두 번째로 울어버렸다.
7.
시원하게 눈물을 두 차례나 쏟아내서 그런지 머릿속은 개운해졌다. 나는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내가 그리는 그림을 감상했다. 그녀는 내릴 역에 도착했는지 지하철 밖에 있었고, 나는 지하철 안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마주 본 상태로 우리는 둘 다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궁금해진 나는 나한테 물었다.
“여기 이 표정은 뭐야?”
“궁금해 하는 표정.”
더 혼란에 휩싸인 나를 보며 나는 빙긋 웃고는 다시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나는 크레파스를 쥔 손을 움직이는데 있어서 주저함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떠오르는 것을 물 흐르듯이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다음 장면을 보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말이다.
“넌 언제까지 여기 있을 생각이냐?”
갈라진 내 목소리가 벽난로 속에서 나온 것은 별다른 일에 속하는 것일 테지. 벽난로 속을 유심히 살펴보자 흐릿한 형상이 불꽃 너머로 보였다. 내가 그 형체를 어떻게든 잘 보려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다시 한 번 내 목소리가 벽난로 속에서 나왔다.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움이 숨어 있었다.
“그렇게 본들 똑바로 보이지는 않을 거다. 내가 좀 모호하거든.”
“아, 그래. 근데 내가 여기에 있으면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
“내가 곤란하면 나도 곤란하니까. 계속 여기서 공상만 즐기고 있을 생각이라면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벽난로 속의 나는 히히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깝게 들렸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던 나는 왠지 그 웃음소리를 즐기는 것처럼 같이 웃었다.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조합인 두 나의 연관관계가 궁금했지만, 그보다 더 먼저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다.
“준비라니, 무슨 준비?”
“눈을 뜰 준비. 슬슬 다리가 풀릴 때가 됐어.”
다리? 순간 벽난로가 있는 방전체가 덜컹 거렸다. 내가 몸의 균형을 잃는 것과 동시에 방이 무너져 내린다. 무력하게 나락으로 자유낙하를 하는 가운데 나의 웃는 얼굴이 보이면서 동시에 소름끼치는 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지 마. 우린 모두 나야.”
8.
다리가 풀리며 쓰러지던 나는 반사작용의 힘으로 가까스로 지하철 바닥을 뒹구는 불명예는 얻지 않았다. 몸을 추스르고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승객들 중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단 한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굉장한 속도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다시 몸을 돌려 지하철 문을 향했다. 그림자 세상은 아까 눈을 감기 전과 똑같았다. 평온한 무기질의 공간. 하지만 곧 그 세상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읽고 있던 책을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잠시 후 그녀가 옆에 서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시각적으로는 회피할 수 있어도 다른 감각까지 차단하는 것은 무리였다. 어느 샌가 날아온 그녀의 향기가 기도를 타고 가슴으로 내려오자 심장은 무력하게 조여들어갔다. 호흡이 힘들어진 나는 어색한 발걸음으로 한 발짝 그녀한테서 물러났다.
이제 그녀는 그림자 세상속의 그녀가 아닌 내 눈앞의 그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잠시 후 지하철이 역에 도착하고 그녀가 내릴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은 언제나 이렇게 끝이 난다. 나는 이런 결말을 애초에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꾸려 들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바꿀 수 없다. 기회가 오지 않는 이상 나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을 터이다. 하지만 세계가 내 편의만을 봐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건 단지 내 바람이었던 것일까? 확실한 건, 나는 이 세계를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멋대로 나에게 기회를 던져주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멀어지려던 그녀는 어느 샌가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돌렸다. 이제 나와 그녀는 우발적이 아닌 인위적으로, 그림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동시에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눈을 모르는데 왜 당신의 눈은 나를 안다고 하는 거예요?”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내 눈은 그녀에게서 자유롭지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그물에 얽혀든 나는 결국 포기하고는 시선에 질문을 담아 되 날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만이 그림자 세상을 보는 건 아네요.”
그리고 그녀는 기다렸다. 내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당신 덕분에 과거의 그녀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혹은 당신 때문에 그녀의 기억이 지워질 뻔 했습니다, 같은 얘기들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 허공의 무거움이 버거워 질 때쯤, 시간종료를 외치며 지하철 문이 닫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에게 향했지만 내 손은 차가운 유리창에 닿을 뿐이다. 그리고 그 차가움 너머에서 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사실에서 안도감이 느껴졌는지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걸로 된 거다.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9.
“과연 그럴까.”
어디선가 특유의 갈라진 목소리가 현실의 벽을 뚫고 들려왔다. 난데없이 들어온 그 목소리는 난폭하게 주변의 모든 것을 일그러뜨리며 퍼져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새 다시 벽난로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나는 없고 벽난로의 목소리만이 방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운명을 멋대로 가져다 쓰지 마라. 그렇게 숨을 수는 있겠지만, 도망치지는 못해.”
방안을 걸어 다니며 둘러보았지만 바닥에 크레파스가 널려 있고 스케치북만이 있을 뿐 나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크레파스를 하나 주워 들며 말했다.  
“그런 게 아냐. 단지 여유가 없을 뿐이지.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해볼까. 그 여유들은 누가 없앤 거지?”
어떤 대답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꺼내든 전부 거짓말이기 때문에. 단 한 가지, ‘나’라는 답을 빼고는 말이다. 벽난로의 내 목소리도 그 답을 직접 말해주지는 않은 채 히히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 쪽이 더 내 신경을 긁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을 하나 해볼까. 이런저런 자기변명의 틀에 갇히면서도 어떻게든 그녀의 모습을 계속 쫓은 건 누구냐?”
“신경 꺼.”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크레파스를 벽난로를 향해 집어던졌다. 하지만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렸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우린 모두 나라고. 너 스스로가 인정하지 못할 뿐이지.”
목소리를 향해 다른 크레파스를 던지려고 바닥에 시선을 향했을 때, 펼쳐진 스케치북이 보였다. 그림속의 나와 그녀는 아까처럼 아무 일 없이 서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내가 그린 그림. 내가 그린 공상.
“...이 쪽도 저 쪽도 결국은 다 나라는 얘기군.”
“늦게나마 굴러가는 머리로군. 알았으면 이제 가 봐. 다리가 풀릴 시간이다.”
다리? 내가 어떤 대응도 하기 전에 방은 아까전과 같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발밑이 허물어지며 떨어지는 가운데 나는 소리쳐 질문했다.
“잠깐, 잠깐!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애절한 내 목소리에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건 맥 빠진 내 목소리뿐이었다.
“어쩌긴, 마음대로 해야지.”
10.
다리가 풀리며 쓰러지던 나는 다시 한 번 반사작용의 힘을 빌려 가까스로 지하철 바닥을 뒹구는 불명예는 얻지 않았다. 이번에는 몸을 추스르고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는 대신 바로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굉장한 속도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나는 싱긋 웃어보이고는 다시 몸을 돌려 지하철 문을 향했다. 그림자 세상은 언제나 똑같다. 차가운 무기질의 공간. 그리고 곧 깨어질 좁은 세상.
그녀는 읽고 있던 책을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잠시 후 그녀가 옆에 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흘긋 돌려 그녀의 얼굴을 봤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내가 아닌 그녀만의 그림자 세상을 보고 있었다. 어느 샌가 날아온 그녀의 향기가 대신 나를 상대해 주었다. 달콤한 향기를 즐기며 그녀 옆에 계속 서 있자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다.  
이제 그녀는 그림자 세상속의 그녀가 아닌 내 옆의 그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잠시 후 지하철이 역에 도착하고 그녀가 내릴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결국은 언제나 이렇게 끝이 나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니다. 결말 같은 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세계가 내 편의를 봐줄 필요도 없다. 기회 같은 건 이미 내 손에 들어와 있으니까.
지하철에서 내려서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멀어지려던 그녀는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이제 나와 그녀는 우발적이 아닌 인위적으로, 그림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동시에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눈을 모르는데 왜 당신의 눈은 나를 안다고 하는 거예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는 지하철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는 답하기가 싫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답할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머리는 한계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외모를 칭찬해야 할까? 아니면 뭔가를 질문해야 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전화번호 같은? 나이는 물어보면 안되겠지. 아, 남자친구를 먼저 물어봐야 실례되는 일을 하지 않으려나?
까짓 거 어떻게든 되겠지. 그녀가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입을 열었다.
“저기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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