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비엔나

2008.12.08 16:5812.08

비엔나

손 지상(DOSKHARAAS)




전 상권.

중키에 깡마른 몸, 매부리코, 성격은 온순, 짜증 한번 제대로 부려본 적이 없는, 뭘 물어볼작시면 화들짝 놀라기 일쑤에다, 자기 농담이 썰렁한지도 모른 채 지껄이고, 얼어붙은 분위기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는 그런, 흔한 중년 남자, 52세, 말단 공무원, 곧 정년, 하는 일 없이 기웃거리다, 시간 맞추어 가고, 결국엔 은퇴하면 되는, 어려울 것 없는 사람.

*              *              *

07시 30분이 울렸다.

샌드위치 먹고 우유 한잔 마시고 옷 챙겨 입고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 커튼 치고 자동 잠금장치 열고 삐리릭 소리 나고 문을 열었다 닫고 엘리베이터 버튼 누른고 잠시 휴식.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올라탄다. 안에 사람이 있지 않길 빈다.

젠장.  

거울을 본다. 거울 속 와이셔츠를 본다. 후줄근하다. 와이셔츠를 다리는 것은 6년 전부터 그만 두었다. 목둘레 칼라는 기름을 오랜 기간 먹어 와서 번질거렸다. 문이 열리면 참았던 오줌처럼 튀어나간다.

통근 버스를 기다린다. 변색된 종이처럼 누런색에 OO시라는 글자가 퍼렇게 멍들어있다. 미니버스다. 목례를 하면서 탄다.

내 인사는 언제나 입술을 거치기도 전에 기화한다. 기화된 인사말이 말 풍선으로 변해 상대의 눈에 보이면 좋겠다. 남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연놈들.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야?

이 연놈들은 다 조그만 상자 하나 끌어안아서는 뚜껑을 열어보고 싶어서 안달이다. 자기 손으로 열어보기는 무서우니까 남들보고 열어달라고 징징댄다. 서로가 안 열어 준다고 욕한다. 그 남이 거울 속에 자기 모습인지는 모른다. 그러다 그게 거울인 줄 알면, 지가 바보 짓 한 게 다 거울 탓으로 돌리고 깨부수기 바쁘다.

나는 서류가방을 껴안고 자는 척을 한다.

시청 건물 앞에 통근버스가 섰다. 나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내렸다. 회전문은 번쩍번쩍 닦여있다. 손잡이에 손을 대고 밀자 회전문이 투덜대면서 돈다.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여기에도 엘리베이터가 있다. 홀수 층만 서는 엘리베이터. 사람도 이렇게 가려가면서 만나면 좋을 텐데.

사무실에 들어와 인사를 건넨다. 개미가 밟혀 죽을 때 내는 비명처럼 작은 목소리 밖에 안나온다. 소리 한번 크게 지르고 싶은데, 나오는 건 어째 이렇게 작을까. 나쁜 놈들, 남이 이렇게 힘든데 그것도 몰라주고.

11시다.  

잘 쓸 줄 도 모르는 컴퓨터 때문에 눈이 아프다. 나이를 먹을수록 눈은 흐려진다. 마음만큼은 흐려지면 안 되는데.

이럴 때, 귀신처럼 담배 피러 가자고 말을 걸어주던 직원이 있었는데. 얼마 전 다른 부서로 인사발령이 났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젊은 친구에게 말을 걸어봤다.

“담배나 피러 가세.”

“담배 안 피우는데요.”

그래 담배 피우는 놈은 죽일 놈이지. 네 놈들이 왜 담배를 싫어하는지 난 알아. 네 놈들은 담배 연기가 목을 타고 넘어갈 때 그 따듯함을 모르지? 쭈욱 빨아 당길 때 말이야. 엄마 젖을 먹던 옛날 생각이 나는 거겠지. 엄마를 따먹고 싶다고 느끼던 죄악의 시절 말이야.

“미, 미안.” 머리 속과는 다른 말이 입에서 나왔다.

에세 1미리를 들고 흡연실로 간다. 같은 또래의 남자들이 있다. 그 놈들 말은 서로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는다. 대부분 정치나 재테크, 술집 여자, 사무실 내의 권력투쟁 이야기다.

오늘따라 담배가 맛이 없다. 타르가 얼마 없어서 그런가.

점심시간이다.  

병원서는 모르면 다 신경성이라고 한다. 마음을 편히 먹고 취미생활을 즐기라는 처방. 나라도 하겠다. 위장약이 어디 간 거야.

근무 시간이 끝나간다.

나는 계장을 찾아가 물었다. 일찍 가실 거냐고. “일찍 가야지? 왜? 오늘 회식 있나? 없잖아. 전 주사, 오늘은 일찍 집에 가야지. 맨날 야근했잖아.”

젠장, 야근 하는 놈도, 일직 서는 놈도, 술 한 잔 하자고 하는 놈도 없고, 하자고 해도 집에 간다고 하고, 요새 사람들은 왜 이리 이기적일까?

버스에서는 중 고등학생들이 떠든다.

앞자리에 앉은 중학생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목소리도 크고 쓸데없는 소리에 욕을 간간히 곁들인 말투였다. 나는 화가 나서 몇 번이고 주의를 주려고 했다. 이 놈의 목소리는 목구멍만 넘어오면 드라이아이스 마냥 기화해버렸다.

“아 씨발, 아빠가 쌔 거 신품 나왔는데 안 사준데 자나.”

“존나 졸라버려. 뭘 모르잖아. 애들한테 가오 좀 잡으려면 있어야 하는데, 그걸 몰라.”

“야, 조용히 안하냐? 씨발 여기 니네만 있냐? ㅇㅇ중 새끼 들이 존내 떠들어. 뒤질래? 닥치고 있어라 병진아. 응? 입 좀 닥치고 있으라고. 여기서 떠들면 씨발 존내 쎄 보이는 줄 아냐? 병진새끼가 쎄 보이려고 지랄을 한다. 아주. 야. 그냥 아가리 쳐 다물고 가라.”

공고 교복을 입은 녀석이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그 두 중학생 말고는 제대로 들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공고생의 욕이 재갈 역할을 해준 듯 더 이상 떠들지 않았다.

그 공고생은 뒤로 기대고 앉았다. 다리를 쩍 벌리고 핸드폰의 키패드를 두들겼다. 엄청 빠른 속도였다. 얼굴에는 여드름이 잔뜩 똬리를 틀고 누런 가래를 뱉으려고 하고 있었다.

바깥 풍경을 보니, 벌써 우리 집을 지나치고 있었다. 눌러야만 할 벨, 나는 누르지 않았다. 정류장을 2개 째 지나쳤을 때가 되서야 내렸다. 마을산책이라도 하는 느낌으로 집 근처를 배회하면서 걸었다. 직선으로 가면 될 길을 괜히 횡단보도를 건너기도 하고 빙 둘러 가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울 속에 남자는 대머리다. 머리카락은 촉수처럼 정수리로 기어올라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루 종일 매달려 지친 모습이다.

아무도 없어서 소리도 나지 않았고, 불을 켜지 않아서 어두웠다. 가을이 지나서인지 7시만 되도 캄캄하다.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고 벽에 붙은 스위치를 켰다. 형광등은 눈을 껌벅거리다 겨우 떴다.

몸이 짐처럼 느껴졌다. 맞지 않는 양복 마이를 입은 것 같다. 주머니가 무거워 어깨도 무거워 지는 양복 마이 같다.

와이셔츠를 벗어 던진다. 빨래 통 위로 팔을 걸치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발로 차 넣는다. 난닝구에 삼각팬티 바람으로 소파에 기댔다. 텔레비전을 틀었다. 무엇을 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소파에서 그대로 자고 있었다. 콧물이 코에 꽉 차서 간질거리다 재채기가 몇 번 터졌다. 널부러진 기지 바지를 주어 입고 장롱에서 새 와이셔츠를 꺼냈다. 주말 동안 한꺼번에 빨아다가 매주 새로 꺼내 입는다. 잔뜩 구겨진 마이를 턴다. 싸구려 포리에스테르라 금방 펴 질 것이다.

*              *              *

하루가 지났다. 소파에 드러누워 있다. 맥주 캔과 김이 테이블 위에 웅크리고 졸고 있다. 어제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아마 내일도 같을 것이다. 내일의 나 자신이라도 초대해서 같이 한잔 하고 싶을 만큼 거실은 텅 비어있다. 난 텅 빈 것이 싫고 조용한 것도 싫다. 형광등의 푸르다 못해 허여멀거니한 빛이 방 안을 채운다. 차곡 차곡 쟁여놓은 빛은 모든 것을 희미하게 보이게 한다.

조용하다. 무료함과 침묵은 고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고문이다. 예전에 절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탄생한 것은 당시의 인도가 너무도 풍족해서 지루함에 질식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도에서는 인생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된다고 했다. 자살도 소용없다. 높은 곳에 끈을 매달아 둥근 고리를 공중에 띠워 놓고 그 안에 머리를 집어넣은 다음 끈에만 의지한 채 공중에 매달려 막혀오는 숨과 차단된 경동맥 때문에 두피 전체가 맥을 뛰면서 필름이 끊길 때와 같은 몽롱함을 맛보더라도, 얼마 뒤면 찰싹거리는 엉덩이의 통증 때문에 숙취를 울음으로 토해내면서 처음부터 70에서 80년을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고문이고 지옥이 따로 없다.

사람이 없는 방은 괜히 더 춥게 느껴진다. 푸른색으로 된 벽지와 천장과 장판 때문에, 냉기가 올라오는 바닥에서 푸른 색 서릿발이 솟아올라 갈대마냥 하늘거리는 것 같은 꼴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히야시가 안 된 맥주가 이럴 땐 고맙다. 목으로 넘어가는 보리차 같은 맛 다음에는 짧은 트림.

조용하고 텅 빈 집안을 배회하는 무언가가 있다. 기억이다. 아름답고 희미하게 채색된 기억은 셀로판지처럼 얄팍하다. 구겨진 채 방 여기 저기 돌아다닌다.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환하게 웃기도 한다. 망령들. 망령들은 조용한 틈을 타 사람을 괴롭히는 법이다. 셀로판 기억 망령들이 점차 나에게 다가온다. 바닥을 기기도 하고 천장 위에 뜨기도 하면서 점차 나를 향해 다가온다. 다가올수록, 그들과 나의 거리가 좁혀질 수 록 나는 점차 왜소해진다. 나 자신이 셀로판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나의 목을 조르려 다가오는 셀로판에게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 전자파. 전자파를 쬐면 셀로판 기억 망령들은 다 죽을 것이다. 텔레비전이 가운데에서부터 점차 밝아진다. 소리는 한참 있다가 나온다. 어서 켜져야 하는데. 어서. 텔레비전 빛이 기억을 죽이고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는 어제 한 재방송을 또 하고 있었다.

소파에 다리 하나를 올리고 옆으로 기댄 채 벌써 1시간 반이나 지났다. 시계는 새벽 3시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담배는 벌써 다 떨어졌다. 재채기를 하면서 벽을 본다.

벽에는 아직 어렸던 사랑스러운 딸의 흔적이 있다. 제 몸집만한 색연필을 쥐고 벽에다 내가 여기 있노라 선언하던 못 견디게 귀여운 딸의 흔적이 있다.

그러나 딸은 없다. 지금 여기에.

소주를 찾아 냉장고를 열었다. 비어 있었다. 담배가 땅겼다. 담배는 이미 없다. 돛대도 없이 난파하는 담뱃갑을 쓰레기통 안으로 구겨서 던져 넣고 점퍼를 찾았다. 만 원짜리 한 장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이얼 록을 눌렀다. 삐리릭.

편의점에는 알바 생이 졸고 있었다. 삼각 김밥 하나, 비엔나소시지 6개들이, 소주 2병을 들고 에세 1미리를 부탁했다. 에세가 다 떨어졌단다. 말레를 부탁했다.

“네?”

젠장. 말레, 말보로 레드. 인마.

“말보로 레드…….” 이제야 알아들은 것 같다. 말보로 레드를 건네준다.

비닐 봉다리를 손목에 꿰고 밖으로 나왔다. 잔돈 소리가 났다.

별이 보고 싶어졌다.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길거리에는 주황색 혀를 날름거리는 가로등 말고는 아득한 엔진 소리 뿐 이었다. 횡단보도를 무시하고 길을 걸었다. 오랜만에 동네 순찰이라도 돌아볼 요량으로 걸었다. 슬리퍼 사이로 들어오는 찬 공기가 의외로 기분 좋았다. 새벽의 아파트 단지는 죽음, 혹은 잠으로 은유할 수 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도 뭔 소린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구석, 구석을 돌았다.

“끼잉.”

소리가 난 곳에는 절룩거리는 개가 한 마리 있었다. 어느 종이라고 딱히 말 할 수 도 없는 녀석이었다.

비엔나소시지를 꺼내 이로 포장을 찢었다. 비닐 관 속에 운명 중인 돼지 살코기 들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하나 꺼냈다. 비닐을 뜯어서 당기자 나선형으로 벗겨진다. 소시지를 던져줬다. 며칠 굶었는지 금세 먹어 치웠다.

말레 한 까치를 물고 불을 붙였다. 오렌지색이 깜빡이고 셀로판 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깊게 빨아들이자 머리에 망치라도 맞은 것처럼 충격이 왔다. 타르 덩어리가 폐포 하나하나를 찔러 버리는 것 같았다. 몽롱함은 두어 번 더 빨자 줄어들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비엔나소시지를 계속 던져 주었다. 2개 밖에 남지 않았다.

“인제 없어 인마. 니 갈길 가라.”

나는 개를 뒤로 하고 걸었다.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걸었다. 아파트 건물을 타고 돌아 아파트 현관까지. 막대기로 바닥을 두들기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단속적인 숨소리도 들렸다. 숨소리에서 혀의 붉은 색을 들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1층에 그대로 있었다. 새벽에 나 말고는 나온 사람이 없는 듯 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몸이 짓눌리는 느낌을 받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때 까지도 붉은 색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의 다이얼 록 자판을 열었다. 삑빅삑삑삐비빅 비밀번호를 누르고 별표. 띠로릭.

문이 열렸다.

“얌마. 여기까지 따라오면 어떻게 해.” 나는 녀석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 녀석을 비엔나로 부르기로 했다.

샤워하고 나온 녀석의 털을 말렸을 땐 이미 새벽 5시였다. 그날 밤은 녀석과 함께 소주를 마셨다.

*              *              *

빙 둘러 가는 퇴근길 대신 직선 루트를 택했다. 정류장도 제때 내렸다. 버스 안에서 그 변화를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자기 일에 바쁘니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더 이상 현관문 안은 어둡지 않았다. 춥지도 않았다. 조용하지도 않았다. 다이얼 록 자판이 열리는 소리만 나도, 안에서는 거친 숨소리, 개 짖는 소리, 문을 긁는 소리가 났다. 안에 들어가 퇴근길에 사온 비엔나소시지와 맥주를 부어 주었다. 나도 같이 맥주를 마시고 소파에서 잤다. 아침의 알람소리에 깨어 출근을 할 때, 비엔나는 꼬리를 흔들며 아쉬워한다.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요사이 골프를 시작했다. 중고 골프채와 골프 비디오도 샀다. 집 안에서 퍼팅 연습을 하면 비엔나는 옆에 앉아서 나를 본다. 녀석은 최고다. 가족 중의 가족이다. 녀석은 나를 위해 모든 신경을 쏟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내가 무엇을 하기 싫은지, 내가 녀석의 준거기준이고 녀석의 삶이다. 내가 녀석의 모든 것이다. 내가 녀석의 주인이다. 난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녀석에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담배가 떨어져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점퍼 차림으로 나서다가 옆집 아줌마를 만났다. 손에는 냄새가 심하게 나는 음식쓰레기 통을 들고 있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밤중에 어딜 나가세요?”

“담배 사려고요.”

“미정이 엄마 왔나 봐요?”

“예? 아니에요. 안 왔어요.”

“그래요? 아니,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이셔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띵. 문이 열렸다. 아줌마와 함께 탔다. 서로 대화를 하기에도 무시를 하기에도 어려운 상황. 거울에 비치는 수없이 많은 모습들. 내리자마자 인사를 하고 담배를 사러 갔다.

집안에 들어와 비닐 봉다리를 열었다. 말레 한 보루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소파에 엉덩이를 던졌다. 소파가 깊숙이 꺼졌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라, 그럼 좋지.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봉다리에서 맥주를 두 캔 꺼냈다. 맥주 뚜껑을 다고 비엔나 밥그릇에 부어주었다. 히야시가 잘 되어 있어서 들고 오는 동안에도 미지근해지지 않았다. 개운하게 넘어간다.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돌린다. 프로레슬링, 틱, 미국 드라마, 틱, 홈쇼핑 광고, 틱, 이상한 가수들, 틱, 재재재재방송 중인 쇼 프로, 틱, 다큐멘터리, 틱, 틱, 틱, 틱, 틱, 다시 프로레슬링, 틱, 틱, 티틱, 틱, 티티틱, 다시 프로레슬링, 무슨 놈의 방송이 볼 것이 없다. 채널은 40개도 넘는데. 뉴스를 틀어 놓았다. 오늘도 누군가가 죽고, 누군가가 뇌물을 먹고, 누군가가 무언가를 했다고 한다. 그런가 보군. 그지 비엔나?

“컹.” 이렇게 착한 자식이 또 있을가?

아, 맞다. 비엔나, 오늘 아빠가 너한테 줄 선물이 있다. 개목걸이를 꺼냈다. 동전만한 은색 플레이트에 비엔나라는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목걸이에 사슬을 걸었다. 녀석, 흥분해서인지 내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완전한 복종의 표시니까. 가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괜히 흥겹게 들렸다.

아파트 단지를 돌았다. 경비 아저씨들과 인사를 하고,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이 비엔나를 쓰다듬고, 이름을 묻고, 비엔나라는 이름을 재미있어하고, 서늘한 공기에 흔들리는 주황색을 뚫고 달리는 비엔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편의점에 들려 비엔나소시지를 사서 먹이고, 나도 같이 먹고, 맥주를 서로 나누고, 다시 들어왔다.

두 갑 피우고 잤다. 오랜만에 담배가 달았다.

*              *              *

“담배 바뀌었네?” 동기생 박 광모다. 오랜만에 본청으로 일 보러 와서 담배나 피러 가자고 한 것이다. 녀석은 에세 1미리를 꺼냈다. 불을 붙여 주었다. “씹할, 맛대가리 없네. 담배는 언제부터 바꾼 거야? 너 나처럼 에세 1미리 피운다고 하지 않았냐?”

“맛없어서 못 피겠더라고.” 말레를 깊숙이 빨았다. 입 안에 머금고 한번 삼켰다가 다시 꺼내고 삼켰다 잠시 숨을 멈추고 코로 길게 뿜었다. 광모는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댔다.

“아, 좋다. 씹할. 나도 이렇게 찐한 거 빨아보고 싶다 진짜. 아, 아냐. 됐다. 그냥 이거 피워야지. 이것도 안 끊는다고 얼마나 지랄하는데. 마누라가 뭐라고 안하냐? 냄새난다고?”

“마누라랑 딸내미 서울에 있잖아.”

“아, 맞다. 좋겠다, 야. 귀찮게 굴지도 않고. 조또 내가 무슨 돈 버는 기곈지, 우리 집 아들은 나만 보면 돈 달라고 난리야. 아니 성적도 안 좋은 놈이 무슨 염치로 핸드폰을 신삥으로 뽑아 달라 그러냐고? 한 게 뭐 있다고? 야 마누라는 요새 무슨 문화센턴가 하는 데 가서 뭐 문화인이라고 배우고 다니더라. 가만, 오늘이 금요일이지? 오늘은 무슨 꽹과리 치러 간다더라.”

“야, 아무리 그래도 자식이고 마누란데, 기대고 살 데가 거기 밖에 없는 거 아니겠냐.”

“웬일이냐? 오늘 점심때 뭐 처먹었기에 맛탱이가 갔냐?”

“내가 요새 맘이 좀 따듯하다.”

“왜? 이거라도 생겼냐?” 오늘따라 박 광모의 새끼손가락이 천박해 보인다.

“아니, 그냥 개 한 마리 키워.” 박 광모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무슨 아줌마냐.” 박 광모는 웃었다.

박 광모가 돌아갔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공문 작성을 한다. 오늘은 회식이 있다고 한다. 나는 오늘 불참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벗고 비엔나 밥그릇의 남은 것을 비워주고, 비엔나소시지를 새로 담아주었다. 맥주도 잔뜩 말아주었다. 난닝구 차림으로 퍼터를 잡았다. 담배 한번 빨고, 골프채 한번 흔들고, 다시 한번 빨고, 다시 한번 흔들고.

10시가 지나도 연락이 없다. 골프채를 텔레비전 옆에 기대어 놓고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엔나는 발치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다. 비엔나, 너도 아빠처럼 좋아? 좀 있으면 누나가 올 거야. 근데 왜 이리 안 올까?

“여보세요.”

“여보세요? 미정이니? 아빠야.”

“왜?”

“아, 아니, 그게, 언제 오나 하고.”

“몰라. 엄마한테 물어봐. 나 수업 시작해, 끊을게.” 비엔나를 소개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수업? 오늘 안 내려올 생각인가? 뭘 잘못이라도 했나? 마누라에게 전화를 걸 기력이 나지 않았다. 담배를 재떨이에 뭉개고 담뱃갑으로 손을 뻗었다. 흔들어 보았다.

안은 비어 있었다.

빈 갑을 꾸겨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쓰레기가 꽉 차 있었다. 발로 밟았다. 밟았다. 밟았다. 밟았다. 퍼터를 쥐었다. 휘둘렀다. 몇 번이고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 금속성 소리가 났다.

긴장을 많이 해서인지 근육이 굳었다. 텔레비전을 틀고 담배를 피웠다. 6갑 정도 피운 것 같다. 비엔나에게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아빠가 던지는 꽁초의 불빛을 쫒아가 발로 밟는 것이다. 그 덕분에 그냥 바닥에 꽁초를 버려도 불이 날 염려는 없어졌다.

땀과 눈물이 말라서인지 피부가 땅겼다. 머리가 아팠다. 술을 너무 마셔서인지 담배를 너무 많이 펴서인지 머리가 아팠다.

필름이 끊겼나보다.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              *              *

“이게 뭐야? 이게 무슨 꼴이야? 바닥이 왜 온통 담배꽁초야! 내가 못살아 진짜! 나는 애 때문에 객지에서 혼자 고생하는데 청소도 안하고 이게 무슨 꼴이냐고! 당신 나랑 웬수 졌어? 어? 이게 뭐냐고? 이건 또 무슨 냄새야? 술 냄새 아냐? 당신 술도 쏟았어? 아유 진짜!”

“아빠! 방이 이게 뭐야. 콜록. 아유 담배냄새! 아 진짜 짜증나. 이러니까 오기 싫다고 했잖아! 이게 뭐야! 그렇게 보고 싶으면 아빠가 올라오면 안돼? 나 인제 바쁘단 말야! 이러다 대학 못가면 책임 질 꺼 야? 책임 질 꺼 냐고? 아 진짜 짜증나! 이게 뭐냐고! 주말에 바쁜데 기껏 내려왔더니!”

저 미친년들은 누구지? 누군데 남에 집에 함부로 들어와서 떠들고 지랄이야?

“컹컹컹!” 저 미친년이 우리 비엔나를 발로 차?! 아빠가 구해줄게 비엔나!

휘둘렀다. 몇 번이고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 금속성 소리가 났다. 비명이 새 나오려 했다. 밟았다. 퍼터로 관자놀이를 쳤다. 둔탁한 소리. 바닥에 쓰러졌다. 어린년이 도망치려 했다. 정강이를 노렸다. 쓰러졌다. 퍼터를 휘둘렀다. 휘둘렀다. 퍼터가 휘었다. 아이언을 들었다. 아이언을 휘둘렀다. 기분이 개운해진다. 마음속에 막힌 것이 뚫린 것 같다. 한 번 더 휘둘렀다. 입 밖으로 환호성이 터지려했다. 웃음이 터지려 했다. 이를 악물었다. 입술 양쪽 끝으로 숨이 빠져 나간다. 아이언이 원을 그렸다. 홀인원. 홀인원. 홀인원. 구멍으로 제대로 들어간다. 한번에. 미끄러졌다. 바닥이 미끄러웠다. 꽁초 더미가 붉게 스며들었다. 젠장. 골반이 아팠다. 퍼터 위로 넘어진 것 같다. 이게 다 이년들 때문이다. 찼다. 찼다. 찼다. 찼다. 이가 앞꿈치에 박혔다. 씹할. 아프다. 뒤꿈치로 밟았다. 밟았다. 밟았다. 이 커다란 비엔나소시지들. 무겁다. 나는 베란다로 두 덩어리를 옮겼다. 비엔나가 두 덩이의 육즙을 핥고 있었다. 맛있지? 오늘은 포식이네? 아빠가 잘 두들겼으니까 부드러울 거야.

그 날 저녁은 담배를 5갑은 피웠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비엔나도 내가 집어 던지는 덜 꺼진 꽁초를 밟으며 즐거워했다. 너도 기분 좋은가 보구나? 그지 비엔나?

컹. 착하기도 하지. 옛다, 꽁초.

주황색 불빛이 깜빡이며 궤적을 그렸다. 마지막 깜빡임을 짓밟은 비엔나가 혀를 내밀고 짖는다.

컹.

*              *              *

1주일 동안, 나는 출근도 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골프채를 휘두르고 비엔나와 꽁초로 노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다. 1주일이 지난 것은 사실 의식하지 못했다. 내가 나타나지 않아서 박 광모가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야, 전 상권이. 집에 있냐?”

문이 열렸다. 다이얼 록은 이미 귀찮아서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뭐야? 열려있네? 야 인마. 있으면 대답을 해야지.”

박 광모는 비명을 질렀다. 왜 그러지?

박 광모는 놀란 듯 무언가를 떠들었다. 뭐라고 말하는 지는 알아들을 수 가 없었다. 이 새끼가 특대 사이즈 비엔나소시지를 먹는 비엔나를 발로 걷어찼다. “이 개새끼가! 뭘 처먹고 있는 거야! 야! 상권아!” 나는 아이언으로 박 광모를 후려 쳐 버렸다.

“이 새끼야.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잖아. 그러게 왜 남에 자식 교육에 신경을 쓰냐?”




사표를 냈다. 원래는 사표를 내더라도 며칠을 더 나가야 하는데, 나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리고 비엔나가 혼자서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며칠 뒤였다. 담배 사러 나왔다. 옆집 아줌마가 말을 걸어왔다.

“미정이 아빠! 요새 개 키우죠!”

“예?”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면 어떻게 해요! 매-일 밤마다 짖어가지고 잠을 못자잖아요! 개를 딴 데로 보내던지, 성대제거수술을 시키든지 하세요! 그리고, 왜 이렇게 요새 시끄러워요! 좀 조용히 해 줄 수 없어요?!”

뭐야, 씹할. 시끄럽구만. 왜 아줌마라는 종족은 이렇게 천박할까.

머리를 잡고 벽에 찧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기절한 것 같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엔나. 밥 먹자.”

살이 너무 쪄서 맛이 없을 것이다. 비엔나는 부드러운 고기를 좋아한다. 좀 만 기다려. 아빠가 부드럽게 해서 줄께?

고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는 두들기는 것이 최고다.

*                      *                      *

베란다로 나갔다. 얼마나 썩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뼈랑 내장이 조금 남아서 썩기 시작했다. 얼굴은 이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아 내려서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입술이 모두 뜯겨나가 있어서 그런지 웃고 있는 듯 보였다. 이가 부러진 것도 있었는데, 아마 아이언 때문일 것이다.

베란다가 완전히 밀폐되어 있기 때문인지, 벌레가 꼬이지는 않았다. 발로 한번 뒤집어 보았다. 배에 찬 가스가 빠져나온 것인지 썩은 내 나는 방귀가 새어 나왔다. 젠장. 배를 걷어찼다. 빵 하는 큰 소리가 나면서 배가 터졌다. 썩은 내장이 흘러나왔다. 어떤 것이 장인지 자궁인지 알 수 없었다.

비엔나도 이제는 입을 대지 않았다. 맥주를 부어 주어도 냄새 때문인지 더 이상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걸 버려야 하는데. 검은 비닐 봉다리를 사 왔다. 들어가기 쉽도록 부엌칼로 여러 토막으로 나누었다. 찌를 때 의외로 쑤욱, 하고 들어갔다. 살을 써는 감촉은 의외로 생선이나 고기를 썰 때와 다르지 않았다. 자를 때 마다 육즙 대신 썩은 물이 흘렀다.

이 칼은 버려야겠다.

몇 겹으로 싸서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했다. 쓰레기를 버릴 때 냄새가 나면 안 되니까. 그 다음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그 다음 검은 봉투가 보이지 않도록 쓰레기를 둘러쌓듯 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티가 나지 않았고 냄새도 나지 그다지 나지 않았다.

쓰레기를 들고 나가는 길에 옆집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완전히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인사를 했다. 조금 미안한 기분도 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직…?”

“아, 예…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 안,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도 그런 것 같았다.

“저, 쓰레기가 많이 나오네요. 저희 집 보다 더 많은 것 같네요.”

!

“아, 아, 예. 몇 달 씩 쌓여서 그런가봅니다.”

“어? 검은 봉투를 쓰시면 안 될 텐데.”

“아, 이거요. 좀 부끄러운 거라 감추려고요. 그냥 좀 넘어가주세요” 나는 웃어보였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은 매우 어색해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나는 그가 사라질 때 까지 기다렸다 다시 쓰레기를 들고 들어갔다. 들키지 않기 위해 무언가 더 채워 넣지 않으면 안 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현관을 열려고 할 때, 옆집 문이 열렸다.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남자는 수첩을 꺼내들고 웃고 있었다.

“△△서 강력반 박 지동이라고 합니다. 전 상권 씨 되시죠?”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그는 힐끗, 내 손에 들린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보고 다시 나를 보았다. 그 다음 말을 계속했다.

“아시겠지만, 실종신고가 들어와서요. 혹시 무슨 소리를 듣거나, 뭐 특별한 일이 없었나 하고요.”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얼버무리고 다시 들어갔다. 밤이 될 때 까지 기다렸다.

맥주 캔과 담배꽁초가 잡초로 가득한 공터처럼 장판 위에 피어 있었다. 이 잡초들 중 담배꽁초만 골라서 규격봉투 안에 채웠다. 검은 봉다리가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                      *                      *

며칠을 더 기다렸다. 경찰이 몇 번 더 집으로 찾아와 귀찮게 했다.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정식으로 영장도 나오지 않았으니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럴 땐 텔레비전으로 본 미국 드라마가 도움이 된다.

며칠 동안을 텔레비전을 보았다.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집 안에는 비엔나소시지가 잔뜩 쌓여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말보로 레드도 몇 십 보루나 쌓여있다. 적금을 깼으니 돈 걱정은 없다. 쓰레기는 전부 쌓아 넣었다.

이제 주위 분위기가 조금 식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편의점을 나가면서 들리는 소문을 바탕으로 판단한 바로는 지금이 바로 쓰레기를 버릴 때가 되었다.

들키고 싶지 않다. 내 머리 속에는 그 것 말고 없었다. 들키고 싶지 않다.

나는 새벽 4시, 무인, 무음, 암흑에 주황색 가로등 사이를 지났다. 비엔나가 따라 왔다. 버리고, 두리번거리고, 다시 돌아왔다.

맥주를 마시고 골프 연습을 했다. 그리고 잤다. 꿈도 없이 개운하고 깊은 잠이었다.

*                      *                      *

비엔나는 더 이상 비엔나소시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듯, 아빠가 주는 사람 고기를 원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자식이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공중전화부스와 주차장, 길거리에 주차된 차를 돌면서 집으로 찾아오는 매춘 찌라시를 찾았다.

집으로 불렀다.

“어머, 사장님 집이 왜 이래요?”

시끄러.

비엔나, 맛있지? 이거 또 버리려면 고생 좀 하겠는데.

홈쇼핑 채널에 칼을 쉽게 가는 제품이 나왔다. 나는 3개를 주문했다. 쓰레기 불법 투기를 해도 모를 만한 으슥한 장소도 찾았다. 집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다.

썩은 물이 나오기 전에 살만 발라내고, 호일에 싸서 냉동실에 보관했다. 썩기 쉬운 내장 같은 것을 먼저 먹였다. 그래도 좀 남아 있었다. 잘라내기 힘든 것은 쇠톱을 이용해서 잘랐다. 땀을 흘려가면서 절단을 마치자 베란다가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비엔나는 즐거운 듯이 피를 핥았다. 머리나 뼈다귀 몇 개를 모아다가 검은 봉다리에 나누어 담았다. 이 봉다리를 쓰레기 봉투에 담고 담배로 채우고 불법 투기를 했다.

이런 일이 세 번 더 있었다.

*                      *                      *

박지동은 며칠을 더 찾아왔다.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요사이 매춘부가 실종되고 있다는 말을 했다. 의심받고 있는 것 같다. 혼자서 집에만 있으면 주위 사람들이 더 의심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들에 눈이 달려서 내가 하는 짓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반상회가 있는 날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몇 번 비틀었다. 요즘은 자고 일어나도 상당히 개운하고 상쾌하다. 비엔나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는 비엔나소시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아래 채소 칸에는 맥주 캔이 가득했다. 비엔나를 꺼내 씹고 맥주를 들이켰다. 속이 개운했다.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누고 똥을 싸고 거울을 보았다. 웃고 있었다.

세수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면도도 해야겠지. 비엔나가 옆에서 “캉캉”거리고 있다. 꼬리를 흔들고 있다. 나는 샤워기를 틀어 뿌려주었다. 몸을 흔들며 물을 털어냈다. 웃었다. 웃음이 알아서 터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비엔나를 안고 반상회에 나왔다. 마누라가 요새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마누라?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비엔나를 부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질투하기는.

불만은 쓰레기에 관한 것이었다. 규격 봉투가 아닌, 검은 봉다리 같은 것을 사용하는 점, 불법 투기 같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얼마 전부터, 쓰레기 불법 투기가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만, 어제 단서가 잡혔습니다.” 동대표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배가 나온 중년 남자로 집 앞에 있는 상가에서 청과물상을 하는 사람이었다. 천박하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여러분께는 아직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상습 쓰레기 투기 지역에 씨씨티브이를 설치해 두었습니다. 어제, 자주 찍히던 사람이 찍혔다는 이야기가 관리사무소에서 전해져 왔습니다. 쓰레기 투기 상습범을 잡았다고 합니다!” 뭐라고?

“아, 저기.” 내가 말했다.

“예?”

“아, 저, 그, 씨씨티브이, 비디오로 녹화 해 두었나요?” 어색하지는 않겠지?

“예. 관리사무소에 있어요. 내일 관리 사무소에서 틀어 드릴 테니, 수사에 협력 부탁드립니다.”

반상회가 끝나고, 나는 쓰레기를 버린 곳으로 가 보았다. 도둑고양이들이 냄새를 맡아서인지 봉투가 찢어져 있었다. 손가락이 보였다. 나는 급히 다른 쓰레기봉투로 가렸다.

씨씨티브이.  

뒤를 돌아보니 무기질의 외눈박이가 검은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었다.

*                      *                      *

나는 등유를 사러 갔다. 벌써부터 난로를 꺼내느냐는 주유소 주인의 농담에 적당히 대답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왔다. 돌아다니는 페트병에 등유를 나눠 담았다. 집에 남아 있는 소주병에 등유를 채웠다. 와이셔츠 하나를 세탁기에서 꺼내 찢었다. 등유가 담은 소주병에 천 조각을 집어넣고 고무 밴드로 묶었다. 완성이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내 뿜을 때 마다 보라색 연기가 천장을 간질이고 있었다.

*                      *                      *

새벽 4시, 아무도 없는 아파트 단지에 페트병을 여러 개 들고 걷는다. 내 뒤에는 비엔나가 쫒아온다. 그리고 그 뒤를 담배연기가 쫒아온다.

관리사무소는 경로당 2층, 검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다. 사무실에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경로당 주위에 등유를 뿌린다. 2층으로 올라가 계단에도 뿌린다.

많이 뿌리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 할 거다.

화염병을 꺼낸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휘휘 흔들어서 연기가 내 쪽으로 오지 않게 한다.

휙!

주황색과 노란색 궤적이 날아간다.

비엔나! 거기 가면 안돼! 아빠한테 와!

화염병이 깨진다. 불이 붙는다. 비엔나한테도.

비엔나!

비엔나에게 달려간다. 비엔나가 소리를 지른다. 손으로 불꽃을 털어낸다. 살타는 냄새와 터럭 타는 냄새가 코와 눈을 찌른다. 젠장.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야? 왜 그리로 간 거야? 비엔나! 뜨겁다. 등유가 몸에 튀었었나보다. 옷에 불이 붙어 있다. 손으로 털어낸다. 구른다. 경로당 간판이 불에 타 떨어진다. 내 얼굴로 떨어진다. 횡경 막이 폐를 쥐어짜는 것 같다.

새벽 4시의 어둠, 비명 소리가 울린다.

<終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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