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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담배

2008.12.08 16:5712.08



담배



Chaos



첫날밤, 그녀의 담뱃내를 잊지 못한다.


※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특히 임신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습니다.

건강을 해치는 담배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


담배를 물다


간단히 말하자면, 소년은 '어쩌다가 태어난' 자식이었다. 상대가 콘돔 살 돈이 없었는지, 찢어진 콘돔을 샀던 것인지, 안전한 날이라고 생각했는지, 웃돈을 더 얹어주고 생으로 하는 것을 원했던 건지 이도 저도 아니면 목구멍으로 삼킨 것이 어쩌다 식도 대신 다른 곳으로 들어갔던 건지. 어쨌든 그 때문에 소년이 처음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병원 천장에 반사되는 하얀 형광등 빛이 아닌 눈을 찌를 듯이 강렬한 붉은 빛이었고, 소독한 위생용 고무장갑 대신 쓰고 버린 피임용 고무 콘돔이 널브러진 방에서 담당의사의 축하한다는 말 대신 얇은 벽 틈새로 점점 격해지는 여자의 신음 소리를 먼저 들어야 했다. 갓 태어난 생명에게 무익한 것들만 온통 가득한 공간에,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찌그러진 양철 세숫대야 속에 반쯤 담긴 물이 터진 양수와 함께 흘러나온 핏물과 섞인 것뿐이었다. 미처 내지 못한 첫 울음소리는 옆방에서 터뜨린 절정의 순간에 묻혀 사그라지고, 그래서 소년은 입 대신 눈을 더 크게 떴다. 흐릿한 시선에는 자신을 토해낸 구멍이 다시 삼키려는 듯이 좌우로 쩍 벌어져 있었고, 그 옆으로 뻗은 미끈한 두 다리는 세숫대야의 양 옆으로 멀찌감치 발을 대고 있었다. 구멍 위로는 땀에 젖어 착 달라붙은 꼬부랑 털이 마치 거무튀튀한 무엇처럼 붙어 있었으며, 소년은 착 달라붙은 털 몇 가닥이 축 늘어진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다. 시야가 점점 뚜렷해지자, 털 한 가닥 너머에서 마주친 시선. 소년은 처음 맞이한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뻗었다. 찌를 듯이 가늘고 긴 손가락 끝에서 날카롭게 반짝이는 붉은 손톱에 소년은 지레 겁을 먹었다. 하지만, 가는 손가락은 겁먹은 소년의 눈동자 대신 그 옆에 두었던 담뱃갑을 집어들었고, 날카로운 손톱은 대야를 찢어 버리는 대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어 능숙하게 입에 가져다 대었다. 불꽃은 그녀의 손톱처럼 튀어 올랐다. 연기가 시선을 가리자, 소년은 붉은 천장을 뒤덮는 매캐한 연기가 아른거리며 사라지는 모습이 거무튀튀한 그녀의 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지독한 담뱃내가 소년의 코를 두드리자, 그녀의 그곳이 닫혔다.

그녀는 소년에게 '담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담배는 막 지은 듯한 그 이름이 싫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담배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대부분 '야'나 '이 도둑놈이' 혹은 '사생아새끼가' 등의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곤 하였다. 그 애칭들은 과히 좋지 않았지만, '담배'라는 성의없는 이름보다는 차라리 그런 애칭이 신경이라도 써 주는 것 같지 않은가. 가끔 누군가 그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 담배는 머릿속에서 불꽃이 이는 듯하였다. 더욱 이상한 것은, '담배'라는 단어가 단순한 기호품의 뜻으로 사용될 때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지만, 그 단어가 '이름'으로 뜻을 할 때에는, 같은 입에서 나온 같은 발음임에도 고통이 강하게 전해져왔다. 그 고통은 정수리에서 불꽃이 튀어 올라, 핏줄을 타고 온몸을 불태우는 듯한 과히 좋지 않은 기분이었다. 언젠가 담배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왜 이름을 담배라고 지어주었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입 끝에 실소를 짓고는, 입에 머금었던 담배연기를 소년의 얼굴에 뿜었다. 잿빛 입김에는 그녀 특유의 냄새가 섞여 있었고, 네 아버지가 담배를 물고 있었어. 그것이 그녀의 대답. 그러나 자신을 안았던 수많은 상대 중에서, 어떻게 그녀가 담배의 아버지를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일까. 그 사람한테 배운 거야. 의심하는 소년을 향해 다시 뿜어나온 잿빛의 대답. 소년은 코를 찌르는 냄새를 피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다른 시선은 여전히 가늘고 앙상한 손가락이 담뱃갑에서 익숙하게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손톱이 불꽃을 품자, 입 끝에서 새어나오는 꼬부랑 잿빛 연기는 천장에 거무튀튀한 무엇처럼 달라붙었다. 이내 살랑거리다가 어른거리며 사라지는 모습에, 소년은 방문을 닫았다.

그녀의 방은 항상 붉게 물들어 있었고, 담배는 항상 바깥에서 그녀를 기다려야 했다. 그녀가 항상 절정에 달하면, 상대는 항상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방을 빠져나오고, 남은 방 안에는 항상 꼭지 선 콘돔 속에 잔뜩 들어 있는 상대의 흔적과, 항상 그 자취를 가리기 위한 짙은 담뱃내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잿빛의 방 안에서도 날카로운 손톱이 불꽃을 뿜는 것은 확실히 보였고, 그래서 지워지지 않는 그녀의 냄새는 소년에게 항상 같은 액수의 돈을 건네주었다. 그러면 항상 소년은 그 돈을 받고는, 온종일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년이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정을 파는 시장, 거칠게 내뿜은 정을 고스란히 품는 것은 언제나 여자들의 벌어진 다리 사이였고, 그곳에서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이 내 놓은 제품이 상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항상 욕망 속에 거칠어지는 남자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고, 다른 방법으로 상대할 수도 없었다. 어느 순간 소년의 다른 이름은 '꼬마 기둥서방'이 되었다. 비록 지키는 것은 그녀가 아닌 방 안에 가득한 담뱃내가 가시지 않도록 담배를 사오는(혹은 훔쳐오는) 일이었지만.

담배 심부름을 할 때마다 떠올리는 것인데, 소년의 이름은 담배였지만, 담배는 담배가 정말 싫었다. 냄새를 지독하게 태우는 담뱃내에는 이미 무뎌진 지 오래다. 눈을 멀게하는, 자욱하게 가려진 짙은 잿빛 연기도 그의 시선에선 안개와 같이 스러질 뿐이다. 다만, 사람들이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고, 라이터를 들어 불을 붙이는 순간, 튀어오른 불꽃은 소년의 가슴속에서도 섬광을 일으키며 튀어 올랐다. 그것은 담배의 이름을 이름으로써 들었을 때와 같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순간이 지나자 조금씩 피어오르는 가늘고 구불구불한 잿빛 연기는 소년의 마음을 더없이 편안하게 만들어놓았다. 마치 불꽃이 일며 튀어오른 모든 신경을 연기 속에 태워 가라앉게 하는 느낌. 담배는 그 기분만큼은 싫어하고 싶지 않았다.


불을 붙이다


사건은 어느 날과 같은 날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어느 날과 같지 않은 순간의 틈을 박차고 튀어나오는 법이다. 어느 날과 같이 붉게 물든 그녀의 방문 앞에서, 담배는 어느 날과 같이 바깥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어느 날과 같이 그녀가 절정에 달하자, 어느 날과 같이 방문이 열리며 그 속에 든 붉고 어두운 빛을 창 밖으로 마구 쏟아냈다. 어느 날과 같이 낯선 그녀의 상대,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과 달리 낯설고 두툼한 손에는 수북한 털이 그녀의 그곳처럼 숭숭 나 있었고, 목이 잡힌 빈 소주병은 초록빛 외형에 검붉은 빛깔이 섞여 탁하고 이상한 빛깔을 만들어내었다. 담배가 문득 그의 얼굴을 쳐다보자, 상대는 반쯤 풀린 눈을 끔벅거리며 소년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피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야, 따까리. 담배 있냐. 담배는 주머니에서 따지 않은 담뱃갑을 꺼내, 신속하게 비닐을 벗기고는 담배 한 개비를 건네주었다. 남자는 근육에도 술기가 낀 듯 굼뜬 움직임으로 주머니를 더듬는데, 그 움직임이 새로 나온 아이돌 그룹의 춤과도 얼핏 비슷해 보였다. 라이터가 없는 것을 알자, 그는 천천히 뒤로 돌아 방 안을 향해 한마디를, 아니 한 음절을 던졌다. 불. 그 한 글자는 그녀를 천천히 일어서게 하고, 방구석에 있는 서랍을 천천히 뒤지고는 라이터를 던져주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두툼하고 커다란 손을 가지고도, 굼뜬 움직임 때문에 날아오는 라이터를 받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지게 하였다. 땅에 떨어지고도 한동안 바닥을 미끄러진 라이터는 방 바깥으로 튕겨나가 소년 바로 앞에 떨어졌다. 내놔. 고작 한 단어를 내뱉는데도, 술에 잔뜩 마비된 혓바닥은 사정없이 발음을 뭉개고 있었다. 소년은 라이터를 건네주었다. 그의 두꺼운 엄지손가락이 부싯돌을 잡는 것을 보며, 담배는 불똥이 튀지 않도록 눈을 질끈 감았다. 근데, 니 이름도 담배라매? 하지만 불똥은 다른 곳에서 번졌고, 소년은 마음속에서 튀어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이를 악물고 눈을 찔끔 뜨자, 두꺼운 손끝에서 계속 헛돌며 그르렁거리는 불꽃이 소년의 눈을 사정없이 찔렀다. 애비는 누꼬? 대꾸하지 않는 소년 대신, 라이터의 부싯돌이 헛도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공간을 가득 메웠다. 아직 살아있는 청각도 마비시키려는 듯, 잔뜩 취한 목소리는 고막을 흔들며 소년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새끼, 벙어리가? 소년은 머릿속에서 연이어 터지는 고통에 말을 제대로 이을 수도 없었다.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여기서 썩고 있으면 되나. 니 애미처럼 몸 팔아 살 수도 없는 기고…. 근데 씨발, 이거 불이 와 이리 안 붙노? 남자는 혀 꼬인 소리를 내뱉으며 신경질적으로 불꽃만 내다가, 마침내 라이터를 바닥에 내팽개쳐버렸다. 펑하는 소리를 내며 라이터가 산산이 부서지자, 잔해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제서야 눈을 뜬 소년은 남자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돌아서는 모습을 보았다. 니미, 술 맛 다 떨어졌네. 꼬이는 발음만큼이나 걸음도 자기들끼리 꼬이고 꼬여 남자는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담배의 마음은 어땠을까. 순간, 담배는 멀어지는 남자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술과 붉은 빛에 취한 비틀걸음에 비해, 담배의 발걸음은 타들어가는 것처럼 빨랐다. 남자가 미처 못 보는 사이, 담배의 가는 손가락은 두툼한 그의 손에 목이 잡힌 소주병을 뺏어내었다. 돌아보는 순간은 연기처럼 느렸지만, 내리치는 순간은 불꽃처럼 빨랐다.

병목만 남은 초록 소주병을 잡고 돌아오는 담배의 앞에는 그녀가 서 있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침묵이 이어졌고, 그 공간에서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던 소년을 지나서 방금 자신과 정을 나눴던, 하지만 지금은 달아오른 순간마저 싸늘하게 식어버린 상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손을 뻗었다. 찌를 듯이 가늘고 긴 손가락 끝에서 날카롭게 반짝이는 붉은 손톱에 소년은 지레 겁을 먹었다. 하지만, 가는 손가락은 깨진 초록빛의 유리조각 대신, 그 옆에 떨어져 있던 담배 한 개비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서 새 라이터를 꺼내고는, 불꽃을 일으켰다. 불은 한 번에 붙었고, 담배에 불을 붙인 그녀는 폐 속 깊숙이 연기를 빨아들인 후, 잿빛으로 흐려 시야를 가리는 말을 뱉었다. 어떻게 할 거야? 담배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깨진 병목만을 손 끝에서 헛돌렸다. 들어가자. 그녀는 짧게 말했다. 담배를 쥔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그녀만의 장소를 가리켰다. 빨갛게 칠해진 날카로운 손톱 끝에서 피어난 잿빛 연기는 숨 막힐 듯 내리쬐는 붉은 빛에 섞여 시선이 탁해지고, 담배는 그때까지 잡고 있었던 깨진 병목을 놓았다. 병목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의 발끝에서 초록빛의 가루가 되어 으스러졌다.

그녀가 방문을 닫자, 방 안은 강렬한 붉은 빛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타다 만 담배를 재떨이에 놔두고는, 담배를 놔두고는 화장실로 갔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잠시 기다리자, 샤워를 마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비눗기가 살짝 남은 젖은 머릿결, 닦아내지 않은 물방울이 그녀의 매끈한 살결에 붙어 있었고, 하지만 가시지 않는 그녀 특유의 냄새. 담배는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담배 옆으로 가서는, 재떨이 위에 놔두었던 담배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깊이 들이쉬는 숨에 빠르게 타들어가는 담뱃불. 끊어질 듯 붙어 있는 담뱃재가 재떨이에 떨어지자, 소년은 허공으로 흩날리는 연기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찾아내었다. 담배야. 이상하게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소년의 이름은 그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 네. 소년이 답했다. 불꽃이 무섭니?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그러자 소년은 말했다. 불꽃이 반짝이는 순간, 제가 타 버리는 것 같아요. 그녀는 담배를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미소 지은 입술의 끝이 살짝 벌어지며, 잿빛 연기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불꽃을 네게 줄게.

그녀가 먼저 옷을 벗었다. 단 한 겹의 옷감을 벗자,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그녀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주름 따윈 볼 수 없는 매끈한 피부, 한 아이를 낳은 적이 있는 여인이라고 볼 수 없을 가느다란 몸매, 하지만 그에 반해 유난히도 크고 둥그런 젖가슴. 그녀의 상대는 얼마나 저 커다란 것을 원했기에 돈을 주고 아기처럼 굴었을까. 그리고 그녀의 매끈한 다리 사이, 은밀한 그곳에 숭숭 나 있는 여전히 거무튀튀한 털들. 물기 하나 없이 보송보송하여 부드럽게 살랑이는 모습, 그리고 그 아래에는 소년을 토해냈던 구멍. 하지만 지금 그것은 수줍은 꽃잎처럼 조용히 닫혀 있다. 아주 친숙한 기억이지만, 유난히도 적나라한 모습에 순간 담배는 두려워하였다. 두려워하지 마.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천천히, 불을 붙이는 거야. 그녀는 벗은 몸으로 소년을 끌어안았다. 풍만한 젖가슴이 소년의 얼굴을 파묻자, 그의 아랫도리에도 반응이 왔다. 그녀는 아들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담배처럼 꼿꼿이 솟은, 하지만 그보다 훨씬 커다랗게 변해버린 물건을 꺼내었다. 그녀의 그곳처럼 수북이 난 꼬부랑 털, 그녀는 웃으며 그 털들을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소년의 그것을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불꽃이 튀었다. 느낌은 소년의 이름처럼, 깊숙한 곳에서부터 빠르게 튀어 올랐다. 소년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 그녀는 자신의 벌어진 그곳으로 소년을 이끌었다.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다시 들어가는 기분은 과연 어떤 것일까. 확실한 것은, 불이 붙었다. 튀어오른 불꽃이 온몸을 타고 소년을 태웠다. 타오르는 두 사람에겐 피붙이의 관계보단 살붙이의 관계가 더 적당할 것이다. 가쁜 숨, 헐떡이는 순간, 합쳐진 둘의 입술. 혀끝을 타고 느껴지는 부드러운 혓바닥의 움직임, 조금은 쓴 담뱃내, 잊을 수 없는 그녀의 냄새. 그리고 어느 날과 달리, 서로 다다른 화려한 절정.

그녀가 재떨이에 놓아두었던 담배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두 남녀가 불꽃을 나누는 사이, 다 타버린 담배는 재만 남아있었다. 멋쩍게 웃어 보이던 그녀는 다른 담배를 꺼내 들었다. 언제 지워진 것일까, 담배를 꺼내는 그녀의 가는 손가락 끝에서 날카롭게 반짝였을 빨간 매니큐어가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새 담배를 입에 물고 그녀와 정을 나누었던 담배를 바라보자, 담배는 침대 위에 놓인 라이터를 들어 불을 붙여주었다. 불꽃이 튀는 순간은 흔적처럼 시선에 남았지만, 더는 그 순간을 품어 튀어오르지 않는 고통. 이제 두렵지 않니? 그녀가 물었고, 담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를 집어들었다. 바지를 차려입고 지퍼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입에 머금었던 연기를 내뿜는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코를 찌르는 담뱃내도, 매캐한 잿빛 연기도 아닌 그저 깊은 한숨 뿐. 담배가 돌아섰다. 천천히 걸어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방문을 열고 사라질 때, 잠깐. 마지막을 멈춰 세우는 그녀. 담배가 돌아서고. 순간, 담배의 입술 위에 포개지는 그녀의 입술. 그러자 입 안에서 느껴지는, 진한 담뱃내와 함께 혀끝에서 타오르는 그녀의 냄새. 가지고 가. 순간의 입맞춤을 떼며 그녀가 말했다. 담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잠시 끄덕이고는, 바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을 뿐. 어쩌면 그녀는 문틈 사이로 떠나는 담배의 뒷모습을 잠시 훔쳐보았을지도 모른다. 동이 트기 전, 검붉은 어둠 속에서 자취를 감추는 자식의 마지막 모습은 그녀의 눈에 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여태껏 보았던, 마치 그녀가 품었던 수많은 다른 상대처럼 떠날 뿐이었고, 그녀 또한 그녀가 품었던 수많은 다른 상대처럼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연기를 내뿜다


소년이 있던 세상은 낮에는 두꺼운 커튼에 가려진 모든 것이 잠들고, 밤이 되어 가려진 붉은 빛이 드러나면 신음과 주정, 호객행위와 간혹 있는 폭력으로 시끄러워지는 곳이었지만, 지금 서 있는 이곳은 낮에는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이 손바닥만 한 무언가에 대고 한없이 내뱉는 목소리와 귀에 거슬리는 수많은 자동차 경적소리가 시끄럽게 뭉치면서도, 밤에는 그 시끄러웠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놀랄 만치 조용해진 공간 안에서 때로 은밀한 구석에서 그의 귀에 익숙한 소리만이 조심스럽게 들리는 곳이었다. 집을 나선 담배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먹을거리와 잠자리였다. 어릴 때 배워둔 소매치기가 약간의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이제 소년이 아닌 그는 더는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몸이 커서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기도 어려워졌고, 아이라서 봐 줄 수 있었던 것들도 사라졌으며, 무엇보다 그가 언제든지 숨을 수 있었던 붉은 방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어느새 담배는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처럼 무료 신문지를 그러모아 바닥에 깔고 잤으며, 밤에는 음식점 뒷골목의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의 생활패턴은 그 때에 비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담배의 일상은 달이 뜨면 시작되었고, 낮이 되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잠에 들어야 했다. 햇빛이 쨍쨍한 어느 날이었다. 어느 때처럼 담배는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 중, 성한 것을 골라 먼지를 털어내고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그를 보고 웅성대는 사람들의 모습도 이제는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는 바구니 하나를 앞에 같다 놓으면 사람들의 무딘 감정을 일게 하고, 사회의 어려움을 일러준 값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당연히 그 값은 언제나 가변적이었다. 때로는 동전 한 푼, 때로는 동정 한 마디, 대부분은 역정을 내며 피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는 일을 구하고 싶었다. 한두 푼 받아먹어도 편안히 재워주고 잘 먹여주면 그것만으로도 족할 것 같은데. 그는 그가 떠나온 곳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이 생활이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자네, 못 보던 얼굴인데. 담배는 고개를 들었고, 그의 눈앞에 보이는 늙은이 한 명. 꾀죄죄한 옷과 덥수룩한 수염, 마구 풀어헤친 머리는 동종업계 종사자라는 것을 온몸으로 알려주었다. 담배는 조용히 일어서서 빈 바구니를 집어들었다. 그는 처음 바깥에서 멋모르고 잠을 자다, 자신을 둘러싼 부랑자들에게 이곳에서 존재하는 서열과 구역을 온몸으로 깨우쳤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려는 사내를 향한 노인의 한마디. 자네, 일 필요하지 않나. 순간 담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따뜻한 햇볕에 사람들이 축 늘어지는 시간, 병원의 뒷문이 조심스레 열리자 담배와 비슷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수십 명씩 모여들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병원장은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사람 수 대로 소주를 한 병씩 나누어주었다. 담배는 술을 하지 못했지만, 노인이 주는 한잔을 기어코 거부할 수가 없어서 입으로 들이켰다. 혀를 쏘는 쓴맛이 목구멍을 지나자, 담배는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병원 안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갔고, 담배도 노인의 뒤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갔다. 시체 닦이는 꽤나 고단한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의 몸을 닦는 것과 달리, 피가 돌지 않는 시체에 힘을 잘못 주면, 썩어가는 살이 형체 없이 무너지거나 걸레조각과 함께 날아가기 일쑤이다. 근육에 잘못 손을 대면 죽어 있던 시체가 눈을 뜨거나 벌떡 일어서는 일도 있다고 한다. 안치소의 어두운 공간에는 군데군데 수많은 사람이 보였지만, 대부분 담배처럼 처음 이곳을 찾은 것인지, 한계까지 차오른 비위를 참지 못하고 바닥에 각자 먹었던 것을 아까 마신 술과 섞어 뱉어내고 있었다. 담배도 처음 겪는 환경의 어려움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와 비슷한 역겨운 광경은 많이 봐 왔고, 아까 마신 술의 취기가 약간 도움이 되었던 것인지 다른 사람들처럼 심한 역겨움을 겪지는 않았다. 그때 담배의 뒤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담배는 껄껄 웃는 늙은이의 모습을 보며, 그가 엄청난 담력을 가졌거나 이미 이 환경에 뼛속까지 익숙해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담배가 닦아야 할 시체는 뚱뚱한 남자의 것이었는데, 반쯤 함몰된 머리에는 산산이 깨진 유리조각을 박아넣고 있었다. 한 조각을 뽑아내자, 언뜻 틈새로 들어오는 빛은 유리조각을 스쳐 지나갔고, 유리조각은 제 푸른 초록빛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털이 숭숭 난 시체의 두툼한 손을 보며, 담배는 앞으로 사람을 죽일 때는 손이 가지 않게 죽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담배는 문득 노인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건장한 시체 앞에서 눈을 감고 합장한 노인의 모습. 그 앞에 엎드려있는 시체는 커다란 등에 황금빛 잉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다음 날에는 어제 왔던 사람들의 반 정도가 왔고, 그 다음 날에는 남은 사람들의 반 정도가 왔다. 일주일이 지나자 시체를 닦으러 병원 뒷문을 찾는 사람은 노인과 담배뿐이었다. 젊은 놈들 담력이 이렇게 없어서야. 노인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그러고는 그는 돌아서서 담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왜 안 갔는가? 노인의 질문에 담배는 대답했다. 돈을 벌어야지요. 노인이 다시 물었다. 무섭지 않은가? 자네가 본 것처럼 일주일도 못 견디고 뛰쳐나갈 만큼 고단한 일인데. 담배는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런 것에 익숙합니다. 노인은 돌아서선 그 특유의 껄껄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내 참, 이런 것이 익숙하다는 놈은 또 처음 보는군. 하지만 익숙한 것은 사실이었다. 오히려 담배에게는 이 모든 것이 친근하게만 느껴졌다. 칠흑 같은 어둠, 산 것보다 죽은 것에 가까운 사람들을 닦으며 그가 느낀 왠지 모를 친숙함. 어쩌면 생의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순간, 욕정마저 모두 불사르는 광경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한밤의 환희가 끝나면 버려지곤 했던 콘돔 속의 수많은 생명의 씨앗들을 보아서 그럴까, 그도 아니라면 그저 붉은 피가 붉은 그곳을 떠올리게 하는 것일까. 어쨌든 어느 정도 이 일에 요령이 붙은 담배는, 시체들을 비교적 훼손하지 않고 깨끗하게 닦아낼 수 있었다. 요령이 붙은 데는 노인의 도움이 컸다. 노인은 담배에게 시체를 닦는 요령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적응하려면 알아야 하는 수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순식간에 담배와 노인은 친해졌고, 스스럼없이 말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언제 담배는 옆에서 시체를 닦고 있던 노인에게 지나는 말처럼 물어본 적이 있다. 어르신은 왜 이 일을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노인은 그 특유의 껄껄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연놈들 궁둥짝이나 한없이 보고 죽으려고 하지. 그 대답을 들으며 담배는 왠지 모를 익숙함을 노인에게서 느꼈고, 어느새 마음속으로 그를 존경하며 따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와 같이 병원의 뒷문이 열리자, 담배는 노인과 함께 안치소의 어두운 구석으로 들어섰다. 그날따라 새로운 시체가 들어온 것인지, 시체 썩는 냄새가 유난히 지독하게 느껴졌다. 안치소 중앙에서 왼쪽의 시체들은 노인의 몫이었고, 오른쪽의 시체들은 담배의 몫이었다. 그날따라 시체는 별다른 문제없이 고분고분히 말을 들었고, 그 때문에 담배는 별 탈 없이 자신의 몫을 모두 깨끗하게 닦아내었다. 담배는 뒤돌아섰다. 이쯤 되면 노인도 자신의 몫을 거의 다 닦았을 테니, 나머지 일을 도와주고 각자의 몫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시체를 닦고 있으리라 생각한 곳에는 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담배의 시선은 어두운 구치소 안을 한참이나 방황한 뒤에야, 노인이 아직도 처음 서 있던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닦으십니까. 빨리 안 하면 해집니다. 담배가 다가갔다. 그러나 노인은 담배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는지,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었다. 어르신, 뭐하십니까? 담배의 의아한 목소리에, 노인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담배의 눈에 들어오는, 초점 없는 두 눈과 잘게 떨리는 두 팔. 두려움이 가득 찬 그 모습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이라도 보았던 것일까. 하지만, 신입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껄껄 웃을 정도로 큰 담력을 가졌던 사람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것인가. 안 닦으십니까? 담배가 묻자, 노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을 시체 위로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손, 서툰 손짓에 썩은 살들은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그답지 않다. 담배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노인의 앞으로 문득 보이는 시체는 여자의 것이었는데, 가늘고 아름다운 몸매에 비해 둥그런 가슴은 유난히도 커 보였다. 뭡니까, 몇십 년 만에 흥분이라도 하신 겁니까? 하지만 질 낮은 농담에 벼락처럼 호통쳤을 꾸중 대신, 파르르 떨리는 노인의 입술에선 가는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 것일까. 담배는 노인의 바로 옆으로 다가갔다. 그는 멍청히 굳어버린 노인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시체로 눈을 돌렸다.

아냐, 아냐. 멱살을 잡힌 노인의 첫 마디였다. 아냐, 아닐 거야. 중얼거리는 노인의 목소리는 이미 깊이 잠겨,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뭐가 아니야! 하지만 노인의 멱살을 움켜쥔 담배는,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 따위 쓰지 않았다. 불꽃을 품은 두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담배의 첫말은 비명처럼 내질렀고, 부서지는 감정 사이로 소리는 맥없이 흐트러졌으며, 목소리 끝에서는 느닷없는 물음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죽은 거야. 순간의 침묵이 영원한 안치소의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손끝을 타고 잔잔하게 전해져왔다. 당연하지, 죽었으니까 이곳에 온 거야. 담배는 노인과 시선을 마주쳤다. 아직도 차오른 흥분을 가시지 못하는 담배의 모습과는 달리, 너무도 평온하게 가라앉은 잿빛의 눈동자. 아닙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담배는 멱살을 움켜쥔 손을 놓지 않은 채, 그의 눈동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점 없는 눈동자로 두려워하고 있었던 사람이, 지금은 어떻게 저렇게 평온할 수 있는 것일까. 자네, 어디에서 왔는가. 암흑과도 같은 안치소 구석에서 바라보는 노인의 눈동자, 불꽃을 태우는 담배의 그것과는 달리 너무도 잔잔한 그의 시선. 순간, 연기가 피어올랐다. 노인의 잿빛 눈동자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연기는, 어느새 담배의 시선을 꽉 채우고는, 그 어떤 시선도 섞이어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다. 붉은 곳에서 왔습니다. 침묵 같이 내지른 대답. 그렇군…. 연기 속에 남아있는 어떤 씁쓸한 목소리의 체념. 잘 듣게.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양지 바른 곳에 잘 묻어주게. 그리고…. 올 거네. 연기 속에 깊이 잠긴 노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누가 오는 거죠? 찾아올 거네…. 마지막 기력을 짜 내듯, 노인의 목소리는 조여드는 목구멍 사이로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담배는 그제서야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노인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담배는 죽은 노인의 시신을 정성스레 닦았다. 일그러진 그녀의 썩은 살을 밀어 넣고는, 미처 닦지 못한 그녀의 시신 또한 정성스레 닦았다. 그는 두 사람의 시신을 양팔에 들고는, 병원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시간은 밤이었고, 담배의 도주를 바라보는 것은 녹슨 가로등 불빛과 고장 난 CCTV, 그리고 벤치 아래에서 눈을 번뜩이는 도둑고양이뿐이었다. 담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밀한 신음이 화장실 뒤쪽에서 들려오자, 병원과는 한참 떨어진 곳까지 왔다는 것을 알았고, 그제야 두 시신을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담배는 노인의 옷을 뒤졌고, 비닐을 채 따지 않은 담뱃갑과 라이터가 주머니에서 나왔다. 담배는 담뱃갑을 꺼내 비닐을 벗기고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가 섬광을 일으키는 순간, 그는 잊고 있었던 고통이 아주 깊숙한 곳에서 다시 튀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담배는 그 고통을 연기 속에 파묻으려 담배를 깊게 빨았다. 입 안 한가득 들어차는 담배연기, 그러나 삼킬 수는 없었고. 담배는 조심스레 담배연기를 내뿜어내었다. 자욱한 잿빛 연기가 시선을 뒤덮자, 문득 입속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익숙한 냄새.


담뱃재를 털다


담배는 자수했다. 법원은 그의 자수를 참작하여 형을 어느 정도 감면해주었다. 판결을 선언하는 망치가 내려치는 순간에서 교도관이 그를 험악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으로 밀어 넣는 순간은 순식간처럼 지나갔다. 하얀 시멘트벽이 사방을 메운 몇 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도 부랑자들의 세계와 비슷한 서열이 존재했다. 하지만 다행히 담배는 따까리 노릇을 오래 하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담배가 있는 방에 등에 황금 잉어를 그려넣은 건장한 사내가 새로 들어왔는데, 담배는 그의 얼굴이 왠지 낯이 익다고 생각하였다. 건장한 남자들만 꽉 들어찬 작은 공간에는 일종의 하극상이 일어났고, 순식간에 왕고의 자리에 올라간 신입은 모두가 잠에 든 어느 시간 담배를 깨워 물었다. 야, 너 나 정말 기억 안 나냐? 담배는 막 잠에 깬 머릿속을 흔들며 모든 기억을 총동원해 그의 얼굴을 기억해내려고 애썼고, 그제야 어디선가 낯익은 그의 얼굴이 어릴 적 붉은 공간에서 자주 마주쳤던 모습임을 알아차렸다. 그래 이 새꺄, 내가 니 엄마도 좀 먹고 그랬잖아. 담배도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껏 거드름 피우며 그녀의 공간으로 들어가서는, 왠지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나오던 그의 뒷모습을. 그때부터 담배는 방 안에 존재하는 서열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적의 관계가 이렇게 그에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담배보다 몇 살이 많았던 동네 형. 그가 들어온 이유를 듣자니 그는 원래 조직의 일원인데, 어느 날 두목의 죄를 뒤집어씌우고 감방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는 자랑스럽게 감방에서 나가면 조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모든 이야기에는 어느 정도의 허풍과 과장이 섞여 있었다. 그는 잉어가 헤엄치는 자신의 떡 벌어진 뒷모습을 보여주며 모든 여자들이 내 허리 짓에 아주 뻑 갔다고 말했지만, 한구석에서 담배는 비실비실했던 그의 어린 모습을 떠올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또 그는 담배의 그녀가 자신의 첫 경험이라고 같은 방 사람들에게 말하곤 하였다. 그가 자신의 첫날밤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약장수가 만병통치약을 소개하듯이 과장해서 말할 때마다, 담배는 말없이 철창 구석에서 담배를 피웠다. 쓴 담뱃내 속에 그녀의 냄새가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XXX번, 면회다. 교도관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담배는 의아해하였다. 면회라니, 누가? 면회실로 향하는 걸음을 밟을수록, 담배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찾아올 사람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나마 떠올릴수록 더욱 확실해지는 것은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의 모습뿐, 담배는 그 둘이 살아있었다면 기꺼이 면회를 와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투명한 벽 너머에 앉아있는 상대의 모습은 적어도 담배의 눈에는 너무도 낯선 얼굴이었다. 어리둥절해 있던 담배가 송화기를 들자, 수화기에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은 괜찮으세요? 담배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먼저 물었다. 넌 누구냐. 소녀는 대답 대신, 손 하나를 벽 너머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가느다란 손가락, 날카로운 손톱 끝에는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담배는 다시 물었다. 여기엔 왜 왔어? 수화기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을 보려고요. 돌아가. 담배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쩌면 잊고 있었던 고통을 억누르고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담배가 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며 뒤돌아서는 순간, 목소리는 수화기가 아닌 투명한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기다릴 거에요.

왕고는 담배가 모르고 있었던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녀가 죽기 며칠 전에 한 여자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자라서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되었다고.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핥는 그의 모습에 담배는 이를 악물었다. 왕고는 담배의 어깨를 거칠게 두드리며 장난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 아이, 아직도 처녀야. 왕고는 골칫거리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당최 남자를 안으려 하지 않더라고. 연애를 안 하려는 것 같은데, 이 바닥에서 그럴 수도 없다는 거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담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그 험한 곳에서 소녀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았던 것일까.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여기서 널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냐. 담배는 왕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담배의 어깨를 거칠게 쳤다. 너 내가 없었으면 쟤 만나지도 못했을 거다. 갑자기 니가 사라져버렸으니 우리가 어떻게 그 애를 너랑 만나게 해 줬겠냐. 왕고는 씩 웃으며 담배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다음에 면회 오면 잘 구슬려봐라. 늙어서 몸 팔면 마음만 더 고생한다. 담배는 대답하지 못하고 계속 침묵을 삼켰다.

두 번째 면회가 왔다. 담배는 그전처럼 면회실에 앉아서 송화기를 들었고, 수화기 너머에선 전처럼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은 많이 괜찮아지셨어요? 그분께서 잘 보살펴 주고 계시죠? 담배는 이번에도 대답보단 자신의 말을 먼저 하였다. 왜 또 온 거야.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린다고 했잖아요. 담배는 물었다. 나를?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내겐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형량만 있어. 한동안 날 기다리느라 흘려보낸 네 꽃다운 시절은 내가 되돌려 줄 수 없어. 담배의 말에, 소녀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드리우고는 대답했다. 당신에게 받을 것이 있어요. 그리고 그녀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주머니에 들어가자, 잠시 후 비닐을 따지 않은 담뱃갑이 튀어나왔다. 피실래요? 그녀가 묻자, 담배는 고개를 저었다.


재떨이를 비우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왕고는 두목의 도움으로 원래 내려진 형보다 꽤 빨리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담배는 모범수로서 형이 감면되었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담배가 출소하는 날, 교도소 바깥에는 새하얀 눈이 내려 모든 것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눈물로, 환영으로, 때로는 장난으로 출소자들을 반기는 수많은 무리 속에서, 소녀의 모습은 외따로 떨어진 모습을 보는 것처럼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소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와서는 봉지 속에 담긴 것을 꺼내었다. 까만 비닐봉지의 겉과 달리 온통 하얀 것들밖에 없는 속. 새하얀 두부, 새하얀 담뱃갑, 그리고 새하얀 봉지….

담배와 소녀는 강가로 나섰다. 흐르지 않는 강은 모두 얼어붙어 있었다. 때문에 얼어붙지 않은 흐르는 강물을 찾아야 했다. 몇 시간이 걸려서야, 두 사람은 얼어붙지 않은 거대한 강을 찾을 수 있었다. 담배는 주변에 정박한 나무배 중에서 풍화에 썩지 않고 강물에 얼어붙지 않은 것을 찾아내었다. 반대편에서 소녀가 노로 쓸만한 기다란 나무판자를 구해왔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음에도 배는 별 탈 없이 강 한가운데까지 나아가 주었다. 담배가 노를 젓자, 두 사람을 태운 나무배는 잔잔한 물결을 따라 정처없는 나그네의 여유처럼 떠내려갔다. 이윽고 강줄기는 커다란 만으로 이어지고, 그 중간에서 담배는 배를 세웠다. 소녀는 까만 봉지에 손을 넣었다. 가는 손가락이 새하얀 봉지를 꺼내자, 담배는 그것을 받아 조심스럽게 매듭을 풀었다. 하얀 봉지가 열리고,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새하얀 뼛가루들. 담배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위에 풀어놓았다. 그의 손끝에서 날아가는 고운 뼛가루들이 물 표면에 조심스럽게 깔릴 때, 구름 한점 없는 하늘도, 새하얀 백골을 실어 보내는 바다도, 한숨 같은 연기를 내뱉는 담배의 마음도 새하얗게 가라앉는다.

그들은 강어귀에 배를 대었다. 소녀가 먼저 깡충 뛰어 땅에 올라서서는, 담배를 향해 가녀린 손을 뻗었다. 담배는 가냘퍼 보이는 소녀의 팔이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소녀는 별 무리 없이 담배가 육지에 올라서는 것을 도와주었다. 어느새 해는 산을 넘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담배와 소녀는 강 주변의 민박집을 찾았다. 주인아주머니가 끓여주신 백반상을 먹고, 어둠이 다가오자 둘은 전등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사방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공간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무세요? 담배는 대답했다. 응. 생기발랄한 소녀의 웃음소리는 침묵을 타고 어둠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이제 어디로 갈 거냐. 하지만 담배의 진지하게 내뱉은 목소리에, 소녀의 발랄하던 목소리도 덩달아 침묵을 삼키다가 조금 느린 대답을 내뱉는다. 돌아가야죠. 담배가 물었다. 어디로? 소녀가 대답했다. 그곳으로요. 담배는 물었다. 그곳을 싫어하는 것 아니었나? 싫어해요. 소녀는 대답했다. 그러면 왜? 담배가 물었고, 대답은 없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공간을 수놓은 시간, 담배는 어둠에 몰래 숨겨두었던 말을 내뱉었다. 괜찮다면, 나랑 같이 살지 않을래? 그러나 대답은 역시 쉽게 나타나지 않았고, 침묵 속에서 한동안 담배는 신중하게 다음 말을 생각하였다. 더 잘 살 거라는 보장은 못 하지만, 같이 살아가면 최소한 고통만큼은 서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대답이 들렸다. 역시 당신은 당신답군요. 담배는 무심결에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둠에 익은 그녀의 두 눈은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고. 하지만, 전 그럴 수 없어요. 왜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담배의 물음에, 소녀의 대답은 너무도 조용한 침묵으로 다가왔다. 제가 떠나면, 그곳엔 누가 남나요. 담배는 무심결에 자신이 떠났던 그곳을 떠올렸다. 붉은 빛이 눈을 뜨겁게 찌르는 곳, 신음과 주정과 호객행위와 폭력의 소리가 섞이는 곳, 이성보다 본능에 더욱 가까운, 넘치는 환희와 생이 들끓는 곳, 순간을 뜨겁게 불태우는, 절정에 타오르는 사람들이 정을 섞는 곳. 그리고 여전히 그 곳에 존재하는…. 담배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두 검은 별빛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 무엇을 원하지? 별빛은 조용히 대답하였다. 불꽃을 제게 주세요.

소녀가 이불을 걷고 천천히 일어섰다. 어둠에 익은 눈이 가느다란 소녀의 몸을 더듬자, 두 손은 그녀의 몸을 몇 겹으로 감춘 옷가지를 너무도 손쉽게 벗겨 냈다. 아름다운 몸매, 가느다란 허리, 매끈한 다리. 그리고 그 사이로 문득 비치는, 문틈으로 새어나온 달빛과 맞닿은 그녀의 그곳. 수줍은 그곳에 막 돋아나기 시작한 털들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어둠 속에서 적나라한 그녀의 부끄러움. 검은 별빛은 깜박거리며 담배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두려워하지 마. 담배가 말했다. 천천히, 불을 붙이는 거야. 담배는 벗은 몸이 된 소녀를 끌어안았다. 가슴으로 느껴지는 소녀의 젖가슴은 옷가지에 가려진 외형과 달리 꽤나 부풀어 있었고, 때문에 그의 아랫도리에도 반응이 왔다. 이번에는 소녀의 손이 더 빨랐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아랫도리를 움켜쥐자, 지퍼가 빠르게 내려가고 그의 물건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보였다. 작은 두 손아귀에 고이 쥐어진 그것. 소녀는 작은 입술을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불꽃이 튀었다. 느낌은 오래전 기억처럼, 깊숙한 곳에서부터 빠르게 튀어 오른다. 이윽고, 익숙해진 소녀는 벌어진 자신의 그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소녀의 씨앗을 품었던 그것을 자신의 깊숙한 곳으로 끌어안는 기분은 과연 어떤 것일까. 확실한 것은, 불이 붙었다. 튀어오른 불꽃이 온몸을 타고 둘을 태웠다. 타오르는 두 사람에겐 피붙이의 관계보단 살붙이의 관계가 더 적당할 것이다. 가쁜 숨, 헐떡이는 순간, 합쳐진 둘의 입술. 혀끝을 타고 느껴지는 부드러운 혓바닥의 움직임, 조금은 쓴 담뱃내, 잊을 수 없는 그의 냄새. 그리고 이전과 같이, 서로 다다른 화려한 절정.

그녀가 담배를 꺼내었다. 비닐을 따지 않은 담뱃갑, 담배는 그 담뱃갑을 뺏어 주머니에 넣고, 대신 자신의 담뱃갑을 내밀었다. 돛대만 남은 담뱃갑을 받아 마지막 한 개비를 꺼내는, 가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날카롭게 반짝이는 빨간 매니큐어. 그녀가 담배를 입에 물고 그녀와 정을 나누었던 담배를 바라보자, 담배는 자신에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라이터를 들어 불을 붙여주었다. 불꽃이 튀는 순간은 흔적처럼 시선에 남았고, 그 순간을 품어 튀어오르는 지독한 고통. 순간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괜찮아요? 그녀가 물었고, 담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두렵지 않니? 그녀도 담배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를 집어들었다. 바지를 차려입고 지퍼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입에 머금었던 연기를 내뿜는다. 작은 입술 끝에서 나오는, 코를 찌르는 담뱃내와 매캐하게 어둠을 채우는 잿빛의 연기. 담배가 돌아섰다. 천천히 걸어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방문을 열고 사라질 때, 잠깐. 마지막을 멈춰 세우는 그녀. 담배가 돌아서고. 순간, 담배의 입술 위에 포개지는 그녀의 입술. 그러자 입 안에서 느껴지는, 진한 담뱃내와 함께 혀끝에서 사라지는 그녀의 냄새. 안녕히 가세요. 순간의 입맞춤을 떼며 그녀가 말했다. 담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잠시 끄덕이고는, 바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을 뿐. 어쩌면 담배는 문틈 사이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잠시 눈에 밟혔을지도 모른다. 동이 트기 전, 검붉은 어둠 속에서 자취를 감추기 전 맞이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그의 눈에 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녀가 보게 될, 마치 그녀가 품어야 할 수많은 다른 상대처럼 떠나는 것뿐이었고, 그녀 또한 그녀가 품어야 할 수많은 다른 상대처럼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꽁초를 줍다


그는 오랜만에 바깥 세계로 돌아왔다. 평소처럼 병원의 뒷문이 조심스레 열리자, 담배와 비슷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수십 명씩 모여들었다. 병원 원장은 두 구의 시체가 사라진 것은 어렴풋이 기억했어도, 그의 얼굴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담배는 병원장이 나눠준 소주 한 병을 따서 단숨에 들이켰다. 혀를 쏘는 쓴맛이 목구멍을 지나자, 담배는 오랜만에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병원 안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대부분이 약한 비위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다음 날에는 어제 왔던 사람들의 반 정도가 왔고, 그 다음 날에는 남은 사람들의 반 정도가 왔다. 일주일이 지나자 시체를 닦으러 병원 뒷문을 찾는 사람은 담배뿐이었다. 이거 원 몫이 많아진 건 좋지만, 적적해서 견딜 수가 있나. 햇빛이 쨍쨍한 어느 날, 담배는 바깥으로 나섰다. 어느 때처럼 길거리에는 깡통이나 바구니 하나 앞에 같다 놓고 계속 절을 해대며 동전이나 동정, 혹은 역정을 빌어먹는 부랑자들이 넘쳐났다. 담배의 흐릿한 눈동자는 그들 중에서 최소한 일주일은 견딜 수 있을, 담력 있고 건장한 젊은이를 찾고 있었다. 그때였다. 낯익은 거리에 보이는 낯선 한 모습. 꾀죄죄한 얼굴에 볼품없는 생김새, 하지만 담배는 그 모습에서 왠지 잊었던 기억을 떠올린 듯한 익숙함을 느꼈고. 그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의 눈동자 속에서 반짝이는 불꽃은 순간 담배의 깊은 곳에서부터 타오르는, 꽤나 익숙한 고통을 다시금 느끼게 하였다. 그는 녀석에게 다가가서 말을 던져보았다. 자네, 못 보던 얼굴인데. 그러나 녀석은 고개를 들어 담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용히 돌아서서는 빈 바구니를 집어들었다. 이런, 뭔가 오해한 모양이군. 하지만 저 녀석은 얼마나 절박할까. 어쩌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려는 사내를 향한 담배의 한마디. 자네, 일 필요하지 않나. 어쩌면 담배의 예상대로, 녀석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따뜻한 햇볕에 사람들이 축 늘어지는 시간, 병원의 뒷문이 조심스레 열리자 담배와 비슷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수십 명씩 모여들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병원장은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사람 수 대로 소주를 한 병씩 나누어주었다. 녀석은 술을 하지 못했지만, 담배는 기어코 한잔을 녀석에게 먹이고야 말았다. 잠시 후, 병원 안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갔고, 녀석 또한 담배의 뒤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치소의 어두운 공간에는 군데군데 수많은 사람이 보였지만, 대부분 녀석처럼 처음 이곳을 찾은 것인지, 한계까지 차오른 비위를 참지 못하고 바닥에 각자 먹었던 것을 아까 마신 술과 섞어 뱉어내고 있었다. 익숙지 않은 신입들의 꼴불견을 보자 담배는 저도 모르게 껄껄 웃음소리를 내었다. 한참 웃고 있다가, 담배는 등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담배가 데리고 온 녀석은 분명히 처음 겪는 환경이 익숙지 않을 텐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담배가 웃는 모습을 뻔히 보고 있었다. 괜히 멋쩍어진 담배는 그 시선을 외면하며 익숙한 움직임으로 시체를 닦아내었다. 몇 구의 시체를 닦고 그는 다음 시체가 누워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담배의 앞에 누워 있는 어떤 남자의 시체. 남자의 건장한 몸체는 옆구리에 칼을 찔린 듯, 벌어진 상처 속으로 내장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담배는 일단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시체를 조심스럽게 닦고, 등을 닦고자 시체를 뒤집었다. 그러자 담배의 눈에 들어온, 시체의 커다란 등에서 헤엄치는 황금 잉어의 모습. 문득 담배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그녀의 공간으로 들어갔다가,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나오던 어릴 적 그의 뒷모습. 그리고 떠오르는, 두툼한 손에 소주병을 끼고 저 멀리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 사라지는 순간은 어째서 다 혀끝에 씁쓸하게 남는 것일까. 담배는 조용히 그의 등에 합장하고, 등에 새겨진 황금 잉어를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다음 날에는 어제 왔던 사람들의 반 정도가 왔고, 그 다음 날에는 남은 사람들의 반 정도가 왔다. 일주일이 지나자 시체를 닦으러 병원 뒷문을 찾는 사람은 담배와 녀석뿐이었다. 젊은 놈들 담력이 이렇게 없어서야. 담배는 혀를 끌끌 차며 늙은이 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는, 담배는 돌아서서 녀석에게 물었다. 자네는 왜 안 갔는가? 녀석이 대답했다. 돈을 벌어야지요. 담배가 다시 물었다. 무섭지 않은가? 자네가 본 것처럼 일주일도 못 견디고 뛰쳐나갈 만큼 고단한 일인데. 녀석은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런 것에 익숙합니다. 녀석의 꼴은 여전히 볼품없었지만, 타오르는 불꽃을 품은 눈동자는 담배의 마음을 불태우고. 담배는 껄껄 웃음소리를 내었다. 내 참, 이런 것이 익숙하다는 놈은 또 처음 보는군. 하지만 담배는 녀석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담배는 녀석에게 시체를 닦는 요령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적응하려면 알아야 할 수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녀석은 순식간에 요령이 붙었고, 이제는 시체들을 비교적 훼손하지 않고 깨끗하게 닦아낼 수 있었다. 둘은 어느새 스스럼없이 말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녀석은 옆에서 시체를 닦고 있던 담배에게 지나는 말처럼 물어본 적이 있다. 어르신은 왜 이 일을 하시는 겁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담배는 그 특유의 껄껄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연놈들 궁둥짝이나 한없이 보고 죽으려고 하지. 농담같이 뱉은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담배는 녀석이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평범한 날. 평소와 같이 병원의 뒷문이 열리자, 담배는 노인과 함께 안치소의 어두운 구석으로 들어섰다. 그날따라 새로운 시체가 들어온 것인지, 시체 썩는 냄새가 유난히 지독하게 느껴졌다. 안치소 중앙에서 왼쪽의 시체들은 노인의 몫이었고, 오른쪽의 시체들은 담배의 몫이었다. 녀석이 먼저 빠르고 깨끗하게 시체들을 닦는 모습을 보며, 담배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고는 돌아섰다. 그러자 그의 앞에 누워있는 어느 여인의 시체. 가늘고 아름다운 몸매에 비해 둥그런 가슴은 유난히도 커 보였고, 왠지 낯익은 그 얼굴에 담배는 긴장을 삼켰다. 아닐 거야. 담배는 고개를 저으며, 먼저 팔부터 닦고자 손을 들어 올렸다. 가녀린 손가락 끝에서 반짝이는, 새빨간 매니큐어….

순간,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닦으십니까. 빨리 안 하면 해집니다. 하지만 담배는 그것에 대답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폭발해 온몸을 하얗게 불사르는 고통. 순식간에 눈앞이 흐려졌다. 안 닦으십니까? 녀석이 묻자, 그제야 담배는 자신의 손을 시체 위로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마음, 서툰 손짓에 썩은 살들은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뭡니까, 몇십 년 만에 흥분이라도 하신 겁니까? 녀석이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다가오지 마! 노인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잘게 떨리는 입술은 흐려진 말을 채 뱉어내지 못하고 신음만을 흘렸다. 녀석은 멍청히 굳어버린 담배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시체로 눈을 돌렸다. 담배의 눈이 저절로 감겼다.

아냐, 아냐. 멱살을 잡힌 담배의 첫 마디였다. 아냐, 아닐 거야. 하지만 중얼거리는 담배의 목소리는 이미 깊이 잠겨,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뭐가 아니야! 담배의 멱살을 움켜쥔 녀석은,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 따위 쓰지 않는 듯했다.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녀석의 불꽃을 품은 눈동자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그 때문에 담배는 온몸에서 불꽃이 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녀석은 첫말을 비명처럼 내질렀고, 부서지는 감정 사이로 소리를 맥없이 흩트렸으며, 목소리 끝에서는 느닷없는 물음을 뱉어내었다.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해지며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

죽은 거야. 녀석은 담배와 시선을 마주쳤다. 당연하지, 죽었으니까 이곳에 온 거야. 순간의 침묵이 영원한 안치소의 어둠 속에서, 담배의 목소리는 손끝을 타고 잔잔하게 전해져왔다. 아직도 차오른 흥분을 가시지 못하는 녀석의 모습. 아닙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녀석은 멱살을 움켜쥔 손을 놓지 않은 채, 담배의 눈동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자네, 어디에서 왔는가. 담배는 숨이 막혔지만,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붉은 곳에서 왔습니다. 순간, 어디에선가 피어오르는 연기가 담배의 시선을 하얗게 덮었다. 지독한 연기는 숨을 막히게 하고 모든 것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그 끝에서 느껴지는 것은 너무도 확실한…. 그렇군…. 어떤 시선도 섞이어 구분할 수 없는 혼란.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담배는 마지막 체념을 뱉어내었다. 잘 듣게. 담배는 이것이 마지막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양지 바른 곳에 잘 묻어주게. 그리고…. 올 거네. 연기 속에 깊이 잠기는 목소리. 누가 오는 거죠? 마지막 기력을 짜 내듯, 조여드는 목구멍 사이로 신음처럼 담배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찾아올 거네….

녀석은 그제서야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담배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녀석은 죽은 담배의 시신을 정성스레 닦았다. 일그러진 그녀의 썩은 살을 밀어 넣고는, 미처 닦지 못한 그녀의 시신 또한 정성스레 닦았다. 그는 두 사람의 시신을 양팔에 들고는 병원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시간은 밤이었고, 녀석의 도주를 바라보는 것은 녹슨 가로등 불빛과 고장 난 CCTV, 그리고 벤치 아래에서 눈을 번뜩이는 도둑고양이뿐이었다. 병원과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녀석은 두 시신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녀석은 담배의 옷을 뒤졌고, 비닐을 채 따지 않은 담뱃갑과 라이터가 주머니에서 나왔다. 녀석은 담뱃갑을 꺼내 비닐을 벗기고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가 섬광을 일으키는 순간, 녀석은 고통을 연기 속에 파묻으려 담배를 깊게 빨았다. 입 안 한가득 들어차는 담배연기, 그러나 삼킬 수는 없었고. 그는 조심스레 담배연기를 내뿜어내었다. 자욱한 잿빛 연기가 시선을 뒤덮자, 문득 입속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냄새.


타오르는 불꽃을 잊지 못한다.


※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특히 임신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습니다.

건강을 해치는 담배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




- 끝







원래는 실천문학 응모작이었고, 후에는 문장을 비롯한 많은 곳에 올렸습니다.
어쩌다 검색발이 닿아 이 웹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 재평가받아보고 싶습니다. 카오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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