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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쥐를 잡아!

2008.12.08 16:5512.08






나는 행복하다, 정말로 행복하다.
라고 박 달국 씨는 생각한다. 따져보면 정말로 그렇다.

오후 햇살은 따땃하고 평상 위는 나른한 것이 그만이다. 앞에는 두부 한 모에 김치 통 그리고 두 병째인 소주병이 놓여 있다. 매사가 태평하고 운치를 아는 남자인 우리의 달국 씨는 정말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하늘 아래 싸나이가, 세상의 시름을 잊고선 쐬주 한잔 기울이니, 이 아니 좋지 아니한가... 딸꾹!

달국 씨는 소주 한 잔 따라 마시곤 두부 한 조각에 김치 쪼가리 얹어 어그적 씹어 먹는다. 그리곤 좋아진 기분으로 낄낄거린다.

“거 멋지네. 잘 올라간다, 자알 올라가.”
텃밭 담 아래를 내려다보며 달국 씨가 하는 소리다.

달국 씨네 집에서,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달국 씨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월세 집 마당 텃밭 옆에 놓인 평상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래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이래봬도 달국 씨는 전망 하난 끝내주는 집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산 아래 동네에선 뉴타운 단지 개발이 한창인데, 재작년 겨울부터 건물들을 밀어버리고 곧바로 땅을 파 쿵쿵거리며 철근을 박아 넣는가 싶더니 어느새 콘크리트 아파트가 쑥쑥 올라간다. 말 그대로 일사천리다. 그 뒤에도 그 옆에도 아파트 건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있다. 그렇게 날이면 날마다 커가는 콘크리트 덩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내년 이맘때면 죄다 들어서겄네. 달국 씨는 혼자서 가늠해본다. 뉴타운이 들어서면 이 너저분한 달동네도 반듯하고 사람 살 만해 지겄지? 도로도 뻥 뚫리고, 지하철도 새로 들어선다고 했던가? 어라, 그럼 요 동네 집값도 올라가겄네? 캬하. 좋네, 좋아.

자기 일인냥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달국 씨는 다시 소주 한 잔을 비우곤 두부 한 모에 김치를 얹어 어그적 씹어 먹는다. 그리곤 또 느긋하니 읊조린다.

“어허, 저 많은 집들 중에 나 하나 줌 안 되나?”

그러다 달국 씨는 서늘해지는 기운을 느끼곤 말문을 닫는다. 쪽대문 밀며 누군가 들어오는데, 돌아보지 않아도 척하니, 마누라다. 이제는 마누라 신발 끌리는 소리만 들어도 다 안다.

“또 혼자서 지랄 염병하고 자빠졌네.”

아니나 다를까, 마누라는 들어오자마자 달국 씨를 째려보며 한 소리 늘어놓는다.

“거기서 그렇게 술만 처먹고 있으면, 누가 아파트 한 채 옜다 하고 거저 준대?”

저 여편네가 왜 또 성질이래? 사장 여편네한테 구박이라도 들었나.
마누라는 요즘 점심시간 동안 아래 현장의 함바집 일을 도와주면서 돈 좀 벌어온다고 기세가 아주 등등이다.

“그새를 못 참고 대낮부터 또 술을 퍼먹어? 내가 못 살아 아주 그냥.”

슬그머니 마누라 시선을 피하는 우리의 달국 씨. 혼자서만 들을 량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일절만 해라, 응?

“그러구 있을 시간이면 나가서 일자리라도 찾지! 남들은 죄다 노가다 자리라도 잡겠다고 다들 새벽부터 열심이구만!”

제미, 누군 이러고 싶어 이러는 줄 아나······.
오토바이 택배 일을 하던 달국 씨는 작년 여름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게 됐고 그때부턴 힘쓰는 일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누라는 그걸 알면서도 막노동 일이라도 찾아보라며 허구한 날 잔소리다.

달국 씨는 그런 마누라가 야속한데, 한번 늘어놓기 시작한 마누라는 끝을 볼 줄 모른다.

“일이라도 못하면 술이라도 퍼먹지 말던가, 어떻게 된 게 하루도 안 걸러. 하루도!”

이쯤 되면 우리의 달국 씨도 슬슬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저놈의 여편네가 진짜. 어디 한마디만 더 해봐라!

“저눔의 인간 저 술버릇을 어찌 고치나 몰라. 내가 콱, 혀 깨물고 죽고 말지.”

드디어 폭발하고 마는 달국 씨. 입을 씰룩이며 마누라를 흘겨본다. 그리곤 엄하게 한마디 한다.

“그만 좀 해라, 쪼옴······.”

이래봬도 할 말은 하는 달국 씨다.

그러나 이놈의 마누라 역시 지지 않는다.
“그만하긴 뭘 그만해! 내가 열불 안 터지게 됐어? 지 마누라는 날마다 허리가 휘도록 남의 집 설거지 하고 들어오는데, 그눔의 술이 넘어가니? 넘어가?!”

이럴 때 달국 씨가 할 수 있는 건 꼭 한 가지다. 마누라에게서 획하니 돌아앉은 달국 씨는 괜히 텃밭을 향해 에이 진짜! 윽박지르곤 소주병을 들어 남아 있던 술을 나발 분다. 그리곤 거칠게 손으로 두부와 김치를 집어 입안에 쑤셔 넣고 어그적어그적 씹어댄다.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지만 그래도 몸 안에서 쏴아, 하니 올라오는 게 화를 식히는 덴 그만이다. 캬아. 이슬아, 내가 너 때문에 산다. 딸꾹!

그런 달국 씨를 째려보던 마누라는 씩씩대며 제 성질을 죽이는 것 같더니, 이내 부엌으로 휑하니 들어가 버린다. 달국 씨의 터프한 행동에 주눅이 든 게 분명하다. 역시나, 여편네들은 강하게 나가야 찍소리 못하는 법이다.

마누라 잔소리를 모면한 달국 씨가 스스로 만족해하며 꺼억 시원한 트림을 풀어놓는데, 그때 부엌에서 마누라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꺄악!

달국 씨는 돌아보지도 않고 혼자서 낄낄댄다. 쥐로군. 고소하다 여편네.

아니나 다를까, 덜컥 문을 열어젖히며 뛰어나온 마누라는 새파랗게 질린 채 어쩔 줄 모르더니, 달국 씨 앞으로 쫓아와 커다란 몸뚱이를 부들부들 떨면서 울려고 그런다.

“저, 저 놈의 쥐새끼, 내가 잡아달라고 몇 번이나 말 했어!”

고소를 참으며 달국 씨는 능청스레 대꾸한다.

“어떻게, 못 잡는다니깐 쥐는.”

“그럼 어쩔 거야, 쥐가 저렇게 돌아다니게 놔 둘 거야?!”

달국 씨는 씩씩대는 마누라 얼굴을 피하며 혼자서 헤죽 웃는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오.

“내 오늘은 진짜 못 참아, 못 참는다고! 지금 당장 잡아, 저 쥐새끼를 잡아 달라고!”

“에이 참, 못한다니깐 그러네.”

“대체 집구석에서 하는 게 뭐야, 할 줄 아는 게 뭐냐구 당신! 저 쥐새끼가 저렇게 부엌에 숨어선 나 들어갈 때마다 찍찍대는데, 그거 하나 못 잡아 주냐고. 인간아!”

에헤 여편네, 2부 시작했네. 오늘은 어째 쉬이 끝낼 것 같지가 않다, 이럴 땐 피하는 게 상책이다.

달국 씨가 어기적거리며 노인정 장기판에라도 기웃거려볼 요량으로 평상에서 나와 신발을 찾아 신는데, 마누라 역시 쉽사리 놓아줄 것 같지가 않다.

“이눔의 인간, 또 어딜 내빼려고! 오늘은 못 가, 저눔의 쥐새끼 잡기 전엔 못 가!”

“어허, 쥐 하나 갖고 진짜.”

“쥐 하나라니, 쥐 하나라니! 내가 저 쥐 땜에 하루에도 몇 번씩 배지도 않은 애가 다 떨어지는데! 잡아, 잡아! 어서 들어가 쥐를 잡으라고!”

“에이, 진짜.”

달국 씨가 그렇게 닦달을 해대는 마누라를 피해 빠져나가보려 애를 쓰는데, 그때 달국 씨를 긴장시키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영미다.

학교가 끝났는지 어느새 돌아온 딸 영미는 쪽대문 앞에 서선 아빠와 엄마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영미와 눈이 마주친 달국 씨는 괜히 모골이 송연해진다. 아무리 달국 씨라도 딸아이 앞에선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는 것이다.

말똥말똥 쳐다보는 딸아이 표정에 달국 씨는 괜히 욱하는 것을 느끼면서, 어쩌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른다.

“아, 잡으면 될 거 아녀!”

그러자 마누라와 딸아이가 놀랍다는 듯이 달국 씨를 쳐다본다.
이에 용기가 난 달국 씨는 가장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다시 한 번 윽박을 지른다.

“잡아, 잡는다고! 그놈의 쥐새끼, 잡는다고!”

좋다, 시원하다! 이제야 비로소 가장의 권위가 서는 것 같다.

그런데 이놈의 여편네, 좀 고분고분해져야 하는데 그게 아니다. 되레 큰소리다.
“그래 잡아! 못 잡기만 해봐라 그냥! 그눔의 쥐새끼 못 잡음, 내 두 번 다신 저 쥐 소굴 같은 부엌엔 안 들어간다!”

그러더니 솥뚜껑만한 손으로 달국 씨 등짝을 연신 때려대며 부엌 안으로 밀어 넣는다. 도살장으로 밀려들어가는 소 돼지라도 되는 기분이다.

취한 김에 비틀대며 어어, 떠밀리는 달국 씨에게 마누라는 찢어진 눈을 부릅뜨며 마지막 경고를 해댄다.

“못 잡음 저녁밥은 다 얻어먹은 줄 알어! 슈퍼 갔다 올 테니 그때까정, 그눔의 쥐새끼를 잡으라구!”

그리곤 철창을 채우듯 부엌문을 덜컥! 닫는다.

에이, 진짜.
달국 씨는 연탄아궁이에 엉덩이를 붙여 앉으며 분을 삭인다. 영미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다. 딸아이 앞에서 꼬락서니가 말이 아닌 것이다.

밖에서는 마누라와 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넌 또 언제 온 거야?
아까 전에.
이눔의 기집애, 왔으면 숙제먼저 할 것이지 어딜 또 나가?
놀이터 갔다가.
어이구 서방이나 자식이나 하나같이, 내가 못 살아 진짜.
그리고는 신발 끌며 나가는 마누라 소리.

달국 씨는 담배를 꺼내 물며 낄낄댄다. 됐네, 담배 한대 태우고 나가면 되겄네. 노인정 갔다 와선 쥐새끼는 쫓아냈다고 하면 그만이지. 그때면 마누라 성질도 가라앉겄지.

그러면서 달국 씨는 생각을 한번 해본다. 가장으로서 당연히 생각해야 할 문제다. 가면 갈수록 마누라 잔소리가 늘어만 가는데,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연애 시절만 하더라도 마누라는 통통하니 귀여운 맛이 있었다. 수줍은 눈으로 생글거리며 달국 씨 말이라면 철썩 같이 믿곤 했다. 근데 이 여편네, 결혼을 하고 영미를 낳더니만 어느새 돌변해 남편 머리 위에 앉으려고만 한다. 아니, 아니다. 이건 결혼이나 출산하곤 상관이 없다. 마누라는 지금 나를 무시하고 있는 거다. 돈 못 버는 남편이라고, 무능한 남편이라고 개무시를 하고 있는 거다 지금.

망할 여편네, 그렇다고 집안의 가장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여? 이 박 달국이를 뭐로 보고!

씰룩대며 입이 나온 달국 씨는 딸아이에게로 생각이 옮겨간다. 언젠가부터 영미가 아빠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분명 작년부터다. 사고로 달국 씨가 집에서 쉴 때부터인 게 분명하다. 전에는 일하고 돌아오면 환하게 웃으면서 아빠에게 안겨오곤 했는데, 요즘엔 통 그런 게 없다. 아빠를 보면 슬금슬금 피하기부터 한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학교에서 돌아왔으면 학교 다녀왔습니다, 인사부터 해야지! 그저 문 앞에 삐딱하니 서선 아빠를 째려보기만 한다. 그래서 달국 씨는 영미 앞에선 마누라한테 잔소리 듣는 게 싫은 거다. 오늘 뿐만이 아니다. 영미는 가끔씩 달국 씨를 한심하다는 듯이 보기까지 한다. 분명히 아빠가 돈 못 벌어온다고, 집에서 놀고 있다고 개무시하는 게 분명하다.

고것이 제 엄마를 닮아가고 있어. 지금도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는 데, 나중에 더 크면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젠장헐!

에이! 달국 씨는 꽁초가 된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일어선다. 그런 건 마누라와 딸내미가 반성하고 고쳐야 하는 것이지, 지금 달국 씨가 어떻게 할 문제가 못된다.

부엌문에 귀를 대고 들어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마누라도 영미도, 다 나간 것이 분명하다.

또 한 번 모면했다고 생각하니 달국 씨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다. 우리의 달국 씨는 천상에 낙천가인 것이다. 그렇게 밖을 살피며 나가려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온다.
찍, 찍.

화들짝 놀란 달국 씨는 그 자리에 굳고 만다. 쥐다, 진짜로 쥐다!

달국 씨는 등골이 오싹해지며 좁은 부엌 안을 돌아본다. 아궁이 옆에 작은 구형 냉장고가 있고 그 반대편에 부러지기 직전인 낡은 싱크대와 유리 없는 찬장 그리고 연탄 몇 장과 잡다한 박스와 플라스틱 통들이 쌓인 선반······. 그 사이 그 어딘가에 정말로 쥐가 숨어 있는 것이다.

다시 찍, 찍.

달국 씨는 부들부들 떨며 눈을 크게 뜨고 부엌 안을 흩어본다. 오금이 저려오고 몸 안에선 화악, 술기운이 올라온다. 비틀거리며 싱크대를 잡고 벽에 바짝 붙어 서는 달국 씨. 차마 말은 못 했지만, 달국 씨는 세상에서 쥐가 제일로 싫다. 징그럽고 무섭다.

어딨지? 어딨는 거야, 이 놈의 쥐새끼가.

있다, 있다! 냉장고 밑에서 시커먼 쥐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밀곤 킁킁거리고 있다. 명석한 달국 씨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려고 애를 써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해?

쥐는 냉장고 밑에서 고개만 내민 채 꼼짝도 않는다. 잘 하면 잡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달국 씨 머리 위로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면 그 놈의 여편네, 다시는 날 무시 못 하겄지?

두리번거리던 달국 씨는 싱크대 설거지통에서 숟가락 하나를 집어 들어 쥐새끼를 향해 던진다. 숟가락이 냉장고에 맞고 떨어지자 놀란 쥐새끼는 냉장고 밑에서 나와 쪼르르 부엌을 가로질러 찬장 밑 틈으로 사라진다.

어쭈, 저 놈 보게?

달국 씨는 연탄 위에 꽂혀 있는 연탄집게를 잽싸게 뽑아들곤 찬장 밑을 노려본다. 잠시 기다려 보지만 쥐는 나오지 않는다. 나올 생각을 않는다. 아하, 요 놈. 겁먹었구먼.

그때 다시 찍, 찍.

엄마야! 오히려 깜짝 놀란 달국 씨가 찬장 주변을 요리조리 살펴보니, 쥐는 아니 쥐새끼는 어느새 찬장 꼭대기에 쌓아둔 냄비와 유리접시들 위에 앉아있다. 찬장 뒤를 타고 위로 올라간 것이다. 달국 씨가 집게를 치켜들지만 그러나 놈은 도망칠 생각조차 않는다. 작고 까만 눈을 말똥이 뜨고는 달국 씨를 내려다볼 뿐이다.

찍, 찍. 병신.

뭐, 뭐야! 달국 씨는 황당한 눈으로 쥐새끼를 본다. 내가 잘못 들었나? 쥐새끼가 마, 말을 하다니······ 근데, 저 놈이 뭐라고 지껄인 거지?

찍, 찍. 병신.

저, 정말이다! 저, 저놈이 말을 한다. 나한테. 그것도, 병신이란다.

한순간 이성을 잃은 달국 씨는 쥐새끼를 향해 집게를 내려친다. 와장창! 접시들과 냄비들이 떨어져 내리고, 다시 찬장 뒤로 사라지는 쥐새끼를 보며 달국 씨가 씩씩거린다. 이, 이놈의 쥐새끼가 누구한테 욕을! 감히 쥐새끼 따위가!

그러다 우리의 냉철한 달국 씨는 다시 이성적으로 생각한다. 쥐가 말을 할 리 없잖아? 내가 잘못 들은 거야. 그래, 그런 거야.

달국 씨는 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누라 때문에 마지막에 병나발을 분 것이, 과하게 술기운이 올라온 거다. 술이란 점잖게 잔에 따라 음미하며 마셔야 하는 법인데 말이지······.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려온다.

찍, 찍. 병신 같은 놈.

맞다, 분명 쥐새끼의 소리다! 이놈의 쥐새끼는 이 부엌 어딘가에 숨어선 달국 씨를 향해 마누라마냥 씩씩대고 있다. 아니 찍찍대고 있다.

분을 못 이긴 달국 씨는 대놓고 쥐새끼를 향해 소리친다.
“나와, 나와. 이 쥐새끼야!”

그러자 쥐새끼가 이번엔 냉장고 위에서 보란 듯이 모습을 드러낸다. 꼬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쬐그만 입을 오물거리며 달국 씨를 내려다본다. 마치 달국 씨를 째려보며 이죽거리는 것 같다.

저, 저 놈이 날 가지고 놀고 있어! 괜한 분노가 인 달국 씨는 눈을 부릅뜨며 쥐새끼를 향해 엄포를 놓는다.

“이놈의 쥐새끼, 내 네놈을 아궁이에 처넣어 구워버릴 테다!”

그러나 쥐새끼는 전혀 겁먹는 기색이 아니다. 놈은 이제 대놓고 달국 씨를 향해 찍찍댄다.

찍, 찍, 찍. 낙오자.

으아! 달국 씨가 냉장고를 향해 집게를 휘두른다. 이 쥐새끼야, 내가 왜 너한테까지 그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냉장고 문이 휘두른 집게에 맞고 열리며 반찬 통들이 쏟아진다. 쥐새끼는 열린 문을 타고 쪼르르 아래로 내려와 다시 싱크대 밑으로 모습을 감춘다. 달국 씨는 싱크대를 내려치고, 밑으로 집게를 쑤셔 넣어 다짜고짜 쑤신다. 나와. 나오라고, 이놈의 쥐새끼야!

찍, 찍, 찍. 병신 같은 낙오자 놈.

달국 씨는 부들부들 떨면서 주위를 살펴보지만 놈은 보이지 않는다.
“이, 이 쥐새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테다!”

그러자 달국 씨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쥐새끼가 찬장 밑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놈은 대범하게도 달국 씨 다리 사이를 가로질러 냉장고 쪽으로 달려간다.

이 쥐새끼, 이번엔 안 놓친다!

달국 씨는 쥐새끼의 진로방향을 앞서서 집게를 내려친다. 그러자 쥐새끼는 방향을 틀어 잡동사니들 쌓아둔 선반 밑으로 도망친다. 선반 밑을 내려치고 집게를 쑤셔 넣고 흔들자 선반 위에 쌓아놓았던 박스며 플라스틱 통들이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진다. 달국 씨는 그것들을 맞고 정신을 못 차리다가, 열린 냉장고 문 모서리에 정통으로 머리를 찍히며 바닥에 나자빠진다. 그 사이에 선반 위로 올라간 쥐새끼는 천장에 늘어진 백열등 전깃줄을 타고 쪼르르 달려가 냉장고 위로 펄쩍 뛰어 내린다.

널브러진 달국 씨는 허탈하니 그 꼴을 보기만 한다. 골통이 욱신거리며 꼭 제리를 쫓다가 된통 당한 톰이라도 된 기분이다.

제기럴, 그 놈은 귀엽기라도 하지! 저 시커먼 쥐새끼 놈은 아주 악의적으로 달국 씨를 가지고 놀고 있다. 지금도 냉장고 위 모서리에 거만하게 앉아선 달국 씨를 비웃고 있지 않은가.

찍, 찍. 병신 같은 낙오자 놈.

내가 뭘! 달국 씨는 지지 않으려 쥐새끼를 올려다보며 항변해 본다. 내가 뭘 어쨌다구!

찍, 찍. 마누라 잔소리에 한마디 대꾸도 못하는 주제에.

이 씨, 그게 내 잘못이야?! 달국 씨는 울컥하며 다시 항변한다. 다리 때문에 일자릴 못 찾는 게, 그게 어디 내 잘못이냐구!

하지만 쥐새끼는 아랑곳없이, 마치 마누라마냥 잔소리를 해댄다. 아니 찍찍댄다.
찍, 찍. 병신 같은 낙오자, 패배자 놈.

이, 이놈의 쥐새끼! 한마디만 더 찍찍대 봐라, 어디!

찍, 찍. 영미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그 순간, 기어이 달국 씨의 눈이 뒤집히며 흰자위로 가득 찬다. 영미 얘기만 안 꺼냈어도, 딸아이 얘기만 찍찍대지 않았어도······.
그 뒤에 우리의 달국 씨가 보인 행동은 결코 달국 씨의 의도가 아니다. 오로지, 오로지 저 새까만 쥐새끼 때문이다.


                                     *  *  *  *  *


놀이터엔 아무도 없었다. 경구네 집 앞 공터에도.

영미는 산동네 골목들을 한 바퀴 돌아봤지만 오늘따라 친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영미는 모두 학원에 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좁은 산동네 밑에도 보습학원들은 존재했고, 친구들은 저마다 영어다 수학이다 아니면 태권도다 한원 한군데씩은 다니고 있었다. 이 골목 아이들 중에 학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는 영미뿐이었다.

영미는 입을 내밀며 다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골목 입구에 도착하니 구멍가게 앞에서 가게 할머니와 수다를 떠는 엄마가 보였다. 영미는 달려가 엄마한테 과자 하나 사달라고 조르려다가 그만두었다. 엄마가 큰 소리로 아빠의 험담을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시작이다, 엄만.”

영미는 엄마를 못마땅하니 흘겨보고는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요즘 들어 영미는 엄마가 영 마음에 안 든다. 엄마는 날마다 아빠를 혼내고 꾸중하는 것이다. 그것까진 괜찮다. 그렇지만 밖에서도 동네 아줌마들한테 아빠 험담을 늘어놓을 땐 엄마가 정말로 싫다. 요번 달엔 구청에서 하는 공공근로 일을 며칠밖에 안 나갔다느니, 맨날 술만 먹어 지겨워죽겠다느니, 이젠 남편이 아니라 웬수라는 등. 엄마는 왜 다른 아줌마들한테까지 아빠 욕을 하는 걸까? 창피하지도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영미는 쪽대문을 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그 자리에 멈칫 섰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그것은 부엌에서 나는 소리였고 그리고 괴상한 소리였다. 누군가, 어떤 네 발 달린 짐승이, 그도 아니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지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무슨 소리지? 아빤가?

아까 전에 아빠가 쥐를 잡겠다고 부엌으로 들어간 것을 기억한 영미는 부엌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다가 다시 멈추었다.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빠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의 소리인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손잡이를 잡은 채 영미는 생각했다. 아빠는 요즘 정말 이상하다.

영미는 그것이 아빠가 다리를 다친 뒤부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에는 아빠는 맨날맨날 잘 웃는 아빠였다. 진호나 수진이는 걔네들 아빠한테 맞기도 했지만 영미는 한 번도 맞거나 혼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아빠는 자상하고 좋은 아빠였다. 하지만 요즘은 매일같이 술만 먹으면서, 취하면 뭐라고 혼자서 중얼중얼 한다. 어떨 땐 그런 아빠가 무섭기도 하다. 그래서 영미는 옛날처럼 아빠한테 웃으며 안기기가 꺼려지는 것이다.

그때 부엌 안에서 다시 소리가 새나왔다. 영미가 문에 귀를 대고 들어보니 분명 아빠의 목소리였고, 아빠가 숨을 몰아쉬며 끄응, 끙 거리고 있었다.

“이, 이 새끼······ 죽어, 죽어······.”

잠시 주저하던 영미는 용기를 내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영미는 어찌된 영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미네 조그만 부엌 안은 전쟁이라도 난 듯이 엉망진창이었는데, 냉장고 문은 열려 반찬 통들이 쏟아진 채였고 선반과 찬장은 부서진 채 쓰러져 있었다. 바닥엔 깨진 그릇들과 박스, 플라스틱 통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아빠가 엎드린 채 뭔가를 앞에 두고선 끙끙거리며 중얼중얼 하고 있었다.

“내가 뭘······ 내가 뭘 어쨌다구······.”

그것은 한 마리의 쥐였다.
아빠는 쥐의 네 다리를 찢어발기면서 손으로 쥐의 몸뚱이를 내려치고 있었다. 쥐는 이미 흉측하게 내장을 드러내 놓고 있었는데, 내려칠 때마다 시뻘건 피가 터져 튀기면서 아빠의 얼굴을 물들였다. 영미는 작은 쥐의 몸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나오는 줄은 옛날엔 몰랐었다. 아빠의 두 손과 얼굴 그리고 주위 바닥은 온통 피로 범벅이었다.

그런데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아빠는 이미 죽은 쥐를 찢어대면서 물컹거리는 몸뚱이를 연신 내려쳐댔다. 그러면서 혼자 중얼중얼 했다.

“그게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이냐구······ 죽어, 죽어. 이 쥐새끼야.”

비로소 상황을 파악한 영미는 주저하다 나지막이 아빠를 불렀고 아빠가 멈칫,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떨면서 딸을 보았다. 겁에 질리는 눈으로.

아빠의 얼굴엔, 시뻘건 피를 뒤집어쓰고 그 속에서 흰자위만 가득 드러낸 아빠의 눈에 두려움이 가득 고이고 있었다. 시커멓고 건방진 쥐새끼와, 허구한 날 잔소리를 해대는 마누라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딸아이에 대한 억눌린 두려움이. 그리고 뒤섞인 다른 것들에 대한 미처 알지 못하는 두려움이. 그것들은 어느새 공포로 승화되어 아빠의 얼굴에 각인되기 시작했고, 벌벌 떨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빠와 눈이 마주친 영미는, 그 공포가 전염이라도 되었는지 그만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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