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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필진 전혜진 작가님 여성 영웅 열전 『규방의 미친 여자들』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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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언니들’, 남자들이 금지한 세계로 진격하다

“생존을 위한 분투를 통해 자신, 나아가 타자와 세계를 구하는 영웅들의 이야기”_권김현영(여성학자)
“현대 여성 영웅 지침서로도 손색이 없는 책”_박서련(작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붐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여성서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런 흐름을 타고 나온〈스트릿 우먼 파이터〉〈술꾼 도시 여자들〉〈닥터 차정숙〉 등은 새로운 여성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멋지고 당당한 ‘언니들’은 현대물에만 있을까? 우리의 전통에서 이런 ‘언니들’을 찾아볼 수는 없을까?
장르문학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가려진 여성의 삶에 주목해 온 전혜진 작가는, 이 책에서 낡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쉬운 우리 신화와 고전 속 여성 영웅들을 재조명한다. 태초의 여성 신화 〈바리데기〉부터 ‘정상가족’에 도전한 《방한림전》까지, 다양한 우리 고전 속 여성 영웅들은 때론 시대의 제약을 뛰어넘어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때론 가부장제에 저항하며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간다. 이렇듯 멋진 ‘언니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은 다양한 여성서사에 갈증을 느끼는 독자들에게 낯익고도 새로운 여성서사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순간 시작되는 ‘여성 잔혹사’

영웅의 ‘웅’이 수컷을 뜻하는 말이란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기존의 영웅 이야기는 “강철 같은 근육으로 뒤덮인 이상화된 남성”(20쪽)들의 활약으로 가득한 남성 중심의 서사다. 따라서 전형적인 영웅상에서 탈피한 ‘여성 영웅’의 이야기는 남성 영웅의 이야기와는 시작부터 다르다. “가족과 나라를 위해 외부의 적에 맞서 용감하게 나서는 것이 남성 영웅의 서사였다면 여성의 곤경은 여자로 태어나는 순간 가족 안에서 시작된다.”(여성학자 권김현영)
우리의 여성 주인공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게 되는 ‘여성 잔혹사’에 맞서 생존을 위한 분투를 벌이면서 영웅으로 거듭난다. 따라서 우리 고전 속 여성 영웅의 이야기는 단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특별한 능력을 갖춘 한 여성의 성공담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과 제약에 맞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들,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 영웅들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걸림돌은 아버지라는 ‘숙명적 비극’이다. 여성 영웅의 아버지들은 대개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딸에게 큰 관심이 없기에 딸의 시련을 방관하고,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딸을 버리는 〈바리데기〉처럼 비극의 원인 제공자가 되기도 한다.
《장화홍련전》과 《콩쥐팥쥐전》은 사악한 계모가 전처소생의 딸을 구박하는 이야기로 우리에게 기억되지만, 사실 두 소설에서 딸에게 정말 위협적인 존재는 ‘사악한 계모’가 아니라 ‘무관심한 아버지’다. 소설 속 가부장들은 한정된 재산이나 집안의 기득권을 두고 계모와 전처소생의 딸 사이에 생긴 갈등을, 자신이 신경 쓸 필요 없는 ‘집안일’로만 여겨 방관했다. 두 아버지는 장화가 처녀의 몸으로 임신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누명을 쓰자 딸을 살해하는 것을 묵인하고, 팥쥐가 콩쥐를 살해하고 감사 부인 행세를 하느라 집에 없는데도 딸을 찾지 않는다. 이렇듯 딸의 고난에 무관심했던 아버지들, 그리고 아버지들의 무관심을 용인한 당대 사회가 딸들의 비극을 낳았다.
성장한 여성 주인공들은 이제 결혼이라는 또 다른 장애물을 만난다. 《숙영낭자전》의 주인공은 원래 하늘의 선녀로 지상에 귀양을 왔지만, 시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결혼을 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는다. 그녀는 결혼한 뒤 8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해 별당에 머무르고, 여기서 비롯된 오해 때문에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누명을 쓰자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자결한다. 《숙영낭자전》은 “설령 하늘의 선녀라 해도 시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시집살이란 죽기만큼 힘든 것”(161쪽)이라는 당대 여성들의 수난을 보여준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어도 조선의 며느리들이 마주친 현실은 대개 가혹했다. 고단한 시집살이를 소재로 한 부요(부녀자들이 부른 민요)를 보면, 시부모와 시누이를 모시느라 “아홉 솥에 불을 때고 열두 방에 자리 걷”(〈시집살이 노래〉, 경북 경산 지방)는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격려는커녕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이런 며느리들의 수난은 “똑같이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왔지만 남자들이 TV를 보는 사이 여자들은 제사 음식을 준비”(163쪽)해야 하는 것과 같은 미묘한 형태의 차별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부장제를 교란하고 전복하는 상상력

그러나 우리의 여성 주인공들은 가부장제가 설치한 장애물들에 가로막혀 좌절하는 대신 당당히 맞서 싸우는 쪽을 선택한다.
《운영전》의 주인공 운영이 꺼내든 무기는 사랑이다. 성리학적 질서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억압하던 시대에 그녀는 자유로운 사랑을 꿈꾼다. 권력자의 소유물로 여겨져 다른 남자와의 사랑이 철저하게 금지된 궁녀였지만, 궁녀 운영이 아니라 인간 운영으로서 살기 위해 김 진사와의 사랑에 목숨을 건다. 둘의 사랑을 가로막았던 안평대군의 수성궁이 몰락한 뒤에도 두 사람이 때때로 그곳에서 사랑을 속삭인다는 결말은 “마침내는 사랑이, 인간됨이 엄혹한 권력을 이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96쪽)
여성으로서 늘 부딪히는 ‘유리천장’을 뚫기 위해 남장을 한 뒤, 공을 세워 입신양명하는 여성 영웅들도 있다. 《홍계월전》과 《이학사전》의 두 주인공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무예나 군사 면에서도 남자들을 압도하는 능력을 발휘해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높은 벼슬을 얻는다.
이런 이야기는 때론 여성 영웅들이 생물학적 성별만 다른 ‘명예남성’이 되어 가부장제에 편입되는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박씨전》도 그렇다. 처음에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남편에게 무시당하던 박씨는 시아버지와 국왕이라는 두 가부장의 권위에 힘입어 마침내 가문에서 인정받는다. 또한 박씨는 남편이 밖에서 국왕을 모시는 동안 실질적으로 가문을 이끄는 ‘여성 가장’이며, 소설에서 박씨의 아버지는 등장하지만 박씨의 어머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박씨는 “남성의 세계에 받아들여진 여성, 명예남성이자 ‘아버지의 딸’이다.”(256쪽) 이런 점에서 박씨는 얼핏 보기에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가부장제의 일부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만 해석하기에는 《박씨전》의 서사가 단순하지 않다. 《박씨전》에서 박씨의 대척점에 선 인물은 적국의 왕이 아닌 그 아내, 호귀비다. 그리고 박씨와 호귀비는 각각 계화와 기홍대라는 유능한 ‘여성’ 후계자를 길러낸다. 남성 영웅을 대체하는 단 한 명의 탁월한 여성 영웅이 아니라 그를 적대하는 다른 여성 영웅과 그들의 제자 등 다양한 여성 영웅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박씨전》은 남성 영웅을 대체한 명예남성의 성공담이 아니라 ‘명예남성이길 거부한 여성 영웅들의 계보’를 다룬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방한림전》은 오늘날에도 논쟁적인 동성혼이라는 소재를 통해, 가부장제를 전복하는 당대의 가장 급진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방관주는 어릴 때부터 남장하고 사회에 진출해 열두 살에 장원급제하는데, “여자는 모든 일을 제 뜻대로 하지 못하고 남편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불만 때문에 비혼을 선언했던 영혜빙은 방관주와 함께라면 평등한 결혼생활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해 결혼을 결심한다. 부부가 된 둘은 입양한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면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린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굳건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쉽지 않은 대안가족의 꿈을,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앞질러 실현한 것이다.

우리가 ‘규방의 미친 여자들’이다

우리 고전 속 여성 영웅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은 가문과 국가라는 이름의 가부장제였다. 《이학사전》의 주인공 이현경은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은 외적은 쉽게 물리치지만, ‘여자답게 결혼해서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가부장제의 압력은 이기지 못한다. 황제의 주선으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한 뒤에는 시어머니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벼슬이 더 높은데도 남편에 대한 굴종을 강요당한다.
하지만 그들은 무기력하게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가부장제가 금지한 세계로 당당히 진격한다. 사랑으로 낡은 세계에 균열을 내고, 담장 밖의 세계로 나아가 여성의 몸으로 장수가 되며, 정상가족에 도전하는 대안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늘날의 여성들도 ‘좋은 며느리’에게 요구되는 임출육(임신‧출산‧육아)과 가사노동의 높은 기준, 그에 따른 경력 단절 등 여성에게만 유난히 무거운 짐들에 맞서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매일 분투를 벌인다. 그렇게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를 쟁취하려 했던 ‘규방의 미친 여자들’의 이야기는, 또 다른 담장 안에서 끊임없이 세계와 불화하며 2023년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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