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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필진 정보라(「지향」), 천선란(「검은 혀」) 작가님의 단편이  퀴어단편선 『서로의 계절에 잠시』에 수록되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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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끝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불안정하고 불투명하지만 그럼에도 반짝이던지난 계절의 안부

1년에 한 권, 국내 작가들과 함께 엮어내는 퀴어문학 시리즈 큐큐퀴어단편선이 여섯 번째 책을 선보인다. 큐큐퀴어단편선은 2018년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를 시작으로, 2019년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2020년 《언니밖에 없네》, 2021년 《팔꿈치를 주세요》, 2022년 《나의 레즈비언 여자친구에게》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삶과 사랑을 세상에 내보였다. 2023년 출간되는 《서로의 계절에 잠시》에는 천선란, 이반지하, 오호두, 서장원, 정보라, 박선우 작가가 함께했다.

《서로의 계절에 잠시》에는 퀴어가 겪고 있는 고립감과 무력감, 혼란과 상처의 시간을 쓸쓸하지만 담담하게 그린 여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여섯 개의 이야기는 상처의 기억을 간직한 채 오늘을 마주하고 있는 마음의 풍경을 살피고 안부를 묻는다. 검은 혀를 가진 코딧 사이에서 차별당하지 않고 살아남으려 붉은 혀를 검게 칠하는 지구인 ‘세실라’의 분투기 <검은 혀>(천선란), 숨 막히는 엄마와의 동거를 피해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흐르는 원어민과 교포들이 가득한 영어 캠프에 교사로 지원한 ‘제이’의 여름을 그린 <잉글리시 캠퍼>(이반지하), 노래하지 않는 박새 ‘모노’가 긴 모험 끝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는 이야기 <모노의 봄>(오호두), 결혼이민자를 대상으로 하는 센터에서 만난 ‘수인’과 ‘나’의 특별한 수업을 담은 <흰 밤>(서장원), 동지 ‘강’의 죽음을 두고 그의 자취를 따라가는 <지향>(정보라), 갑자기 휴식기를 갖자는 애인의 결정을 ‘사랑의 방학’이라 부르며 극복해 보려 애를 쓰는 과정을 그린 <사랑의 방학>(박선우)이 수록되었다.

“너는 코딧이야. 너는 코딧이야. 너는 코딧이란다…….”
검은 혀를 가진 코딧 사이에서 살아남으려 혀를 검게 칠하는 지구인 ‘세실라’
- 천선란, <검은 혀>

지구인과 비슷한 외양이지만, 검은 피를 가져 혀과 입술이 검은 코딧. 지구인은 코딧의 행성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지만, 혀의 색으로 서로를 구분 짓는 은근한 차별은 여전하다. 코딧으로 살기 위해 매일 아침 붉은 혀를 검게 칠하는 ‘세실라’는 그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붉은 혀를 내보였다는 이유로 모두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학생과 마주한다. 혼란에 휩싸인 채 단골 바에 간 세실라는 그곳에서 붉은 혀를 태연하게 날름거리는 한 여자를 만난다.

종을 표기하지 않아도 지구인과 코딧은 피의 색이 다르다. 지구인은 가죽을 벗기면 붉겠지만, 코딧은 검다. 지구인의 피는 붉고, 코딧의 피는 검다. 그 선명한 차이는 입술과 혓바닥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입술은 언제나 갖은 색으로 감추어져 있다. 모두가 빨갛고, 노랗고, 검고, 파란 색깔을 입술에 덧칠한다. 입술은 가장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으로 다름을 감춘다. 그러니 그저 혓바닥 하나. 입을 여는 순간 지구인은 자신의 붉은 속살을 내비칠 수밖에 없다.
-천선란, <검은 혀>, 16쪽

“쟤네 백인 아니고, 믹스야.”
청춘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영어 캠프 교사들의 뜨거운 여름
- 이반지하, <잉글리시 캠퍼>

‘나’는 원어민과 교포들로 가득한 영어 캠프에 단기 일자리를 얻었다. 예쁘고 잘생기고 늘씬한 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서로를 향한 뜨거운 눈빛들이 오간다. 은근한 질시와 차별까지도 뒤섞인 묘한 공기 안에서 견제와 수작은 일상이 되고, 뜨겁게 끓는 청춘의 에너지는 곧 폭발할 듯 넘실거린다.

그의 잇새에서 새어 나온 프(F)— 소리는 애(A)— 소리를 지나, 기어이 단단한 트(T)— 소리로 마감되었다. 웬만해선 단어의 마지막 철자까지 정성 들여 발음하는 일이 없는 페드로였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FAT 소리가 완성되는 동안 그의 입가 근육은 슬로우모션이 걸린 스포츠음료 광고 모델의 미소처럼 느리고 아름답게 움직였다. 나는 아마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바로 헐거운 추리닝 바지 고무줄이 여전히 내 뱃살을 잘 붙들고 있는지, 고추장색 티셔츠 밖으로 굴곡이 생기진 않았는지를 빠르게 확인했다. 본능적으로 티셔츠 끝을 쭉 당겨 판판하게 만들고 재빨리 고개를 들자, 페드로는 아직 자신이 보낸 미소의 답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단속하듯 한 번 더 입술을 단단히 말아 물고, 있는 힘껏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FAT 쪽에서 있는 힘껏 분리되어 페드로 쪽에 속하고 싶었다.
- 이반지하, <잉글리시 캠퍼>, 51~52쪽

“숲의 끝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노래하지 않는 박새 ‘모노’가 숨겨진 자신을 찾는 이야기
- 오호두, <모노의 봄>

박새인 ‘모노’는 봄이 와도 노래하지 않는다. 모두가 짝을 찾아 떠나는 봄, ‘모노’는 날지 못하는 박새 ‘우즈’와 함께 남아 있다. ‘우즈’는 ‘모노’에게 노래하지 않는 박새 ‘디드’를 찾아가길 권하고, 그렇게 찾아간 ‘디드’는 멋진 춤을 보여주지만 새호리기에게 잡혀가고 만다. ‘모노’에게 숲의 끝으로 가라는 말을 남긴 채로. ‘모노’는 숲의 끝에 도달해 진짜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모노는 도망쳤다. 디드는 새호리기에게 목덜미를 물리지 않은 새처럼 다시 노래했다. 그 노래는 멀어졌고 더 이어지지 못했다. 모노는 쌍둥이 계수나무에 간 일을 후회했다. 그러나 디드는 쌍둥이 계수나무에서 겁도 없이 춤추고 노래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모노는 궁금해졌다. 디드를 노래하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숲의 끝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 오호두, <모노의 봄>, 86쪽

“나는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너무 많이 겪은 것 같아요.”
결혼이민자를 대상으로 하는 센터에서 만난 ‘수인’과 ‘나’의 특별한 수업
_서장원, <흰 밤>

센터에서 수업을 하는 ‘나’는 술에 의존해 하루를 보낸다. 그런 모습을 ‘수인’에게 들키고 만다. ‘수인’은 겨울에 ‘나’의 수업을 들은 청강생이다. 결혼이민자를 대상으로 하는 센터의 수업에 ‘수인’은 자녀 자격으로 청강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수인’이 청강한 수업은 ‘발음교정수업’이었다. ‘나’는 곧, ‘수인’이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사고’를 겪었음을 짐작한다.

“저는 괜찮으니까 마음 편히 드셔도 돼요.”
나는 잠시 수인의 차분한 얼굴을 바라봤고, 가방에서 술병을 꺼내 잔에 조금 부었다. 테이블 위로 잠시 동안 알코올 냄새가 맴돌다 증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수인이 베트남에서 나고 자랐으려니 짐작하고 있었다. 발음이 좋지 않은 이유도, 이런 말을 무람없이 꺼내는 것도 한국의 말과 의례에 익숙지 않은 탓이라고 내 나름대로 이해한 것이다. 수인은 김이 오르는 머그잔을 양손으로 잡은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는 위스키를 탄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머리 위의 스피커에서 청명한 종소리가 삽입된 캐럴이 흘러나왔다.
- 서장원, <흰 밤>, 129쪽

“내가 혹시 먼저 죽으면 내 장례 치러줄 수 있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은 동지 ‘강’, 죽음 후 선명해지는 그의 자취
_정보라, <지향>

‘나’는 ‘강’을 평등행진에서 만났다. 그 후에 퀴어문화축제에서 다시 만난다. ‘나’와 ‘강’은 서로에게 매혹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성 혹은 동성을 욕망하지 않는다. 우리 둘은 함께 데모하는 사이다. 우리는 규정할 수 있는 것들만 정상적인 삶으로 인정하는 세상에 대항하며 더 많고 더 다양한 선택지를 위해 데모한다. 나아가는 삶을 위해 몸부림치던 ‘강’은 죽는다. ‘나’는 ‘강’이 손수 만든 피켓을 보며 ‘강’과의 시간을 다시 되짚는다.

나는 강이 지향했던 세상을 지향한다. 그것은 ‘지속성, 안정성, 확정된 의미를 약속하지 않는,’ 혹은 약속할 필요가 없는 미래이다. 아무런 약속이 없어도 강이 세상에 존재했던 시간은 의미를 가진다. 나는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강이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은 지속하지 않고 미래가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다. 궁극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약속도 가질 수 없는 모든 존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엄할 수 있기를 나는 원한다. 그것이 강이 원한 세계이다.
- 정보라, <지향>, 162쪽

“폴리아모리든 오픈릴레이션십이든 엔딩은 다 똑같아. 결국에는 헤어져.
방식이 조금씩 다르고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커플에게 예고도 없이 찾아온 ‘사랑의 방학’
_박선우, <사랑의 방학>

평온하던 커플이 한 달의 휴지기를 갖기로 한다. ‘나’는 이를 ‘사랑의 방학’이라 명명하고 나름의 공존과 평화를 찾으려 하지만 그것이 큰 착각이었음을 곧 깨닫는다. 외파될 것이라 의심하고 추궁했던 사랑이 내파될 위기에 처한 ‘나.’ 과연 이 커플은 사랑의 방학을 무사히 견뎌내고 다시 찬란한 계절을 맞이할 수 있을까? 사랑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H를 꼭 끌어안은 채 잘 지내라고, 한 달 후에 보자고, 그동안 건강하라고 인사할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이 지경으로 무너져 내릴 줄 몰랐다. 손을 흔든 뒤 돌아서서 광화문역으로 향하는 동안만 해도 뭐, 그래, 서로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1400일 넘게 무탈히 만났으니 한 달 정도는 휴지기를 가져봐도 좋겠지, 방학, 사랑의 방학이라고 하자, 러브 베케이션, 그리고 너도 나의 빈자리를 느껴봐야 소중함을 깨닫게 되겠지, 그래야 진정한 사랑에 눈뜨겠지, 라고 멋대로 낙관했으니까. 대로변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에 셔츠 자락이 부드럽게 휘날리는 걸 느끼면서 묘하게 후련한 듯 조금은 설레기까지 했으니까.
- 박선우, <사랑의 방학>, 172쪽은 설레기까지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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