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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맥락 없는 패러디

2003.09.22 20:4509.22

맥락 없는 패러디

                                               임시혁 shark ( http://legoshark.x-y.net )



  소설은 재미만 있으면 된다. 그것으로 족하다. 내가 읽어 즐거우면 그걸로 좋은 거다. 이러한 세태는 혼종 된 문화 속에서 맥락 없이 재미있는 것만 따다가 작품 속에 집어넣는 현상으로 나타났다.(고양이, 2003)

  비유하자면 얼마 전부터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늘어나고 있다는 ‘미각 장애’와도 같은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인스턴트식품과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다양한 식생활 속에서 혼돈스럽게 살아온 아이들이 자라나서는 흰쌀밥에 마요네즈와 진간장을 넣고 비벼먹는 등 기상천외한 음식을 즐기는 미각 장애를 보인다고 한다. 보통 사람이 보면 음식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쯤으로 보일 터이지만, 그들로서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맛을 만들어 먹고 있다는 것이니, 이야말로 자기가 좋아하는 맛만 맥락 없이 뒤섞어 먹는 가장 원초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 미각 장애가 동서고금의 음식 재료들을 두서없이 섞어서 만들어 먹는 차원을 넘어, 아예 완성된 음식들을 뒤섞어 먹는다고 말이다. 흰쌀밥, 마요네즈, 진간장 같은 ‘음식 재료’들을 섞는 수준을 넘어, 커틀릿, 자장면, 스튜, 햄버거, 된장찌개 같은 이미 제각각 ‘완성된 음식’들을 뒤섞고 있다면 어떨 것인가? 그리고 그런 문화현상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자기가 재미있는 것들만 맥락 없이 따다가 엮어내는, 이 미각 장애와도 같은 문화현상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 기존의 논의에서는 주로 ‘휴전 환상문학’에 대해 다루었다.(고양이, 2003) 근래 한국에서 발표되고 있는 환상문학 작품들 중에는, 무협과 환타지, 공상과학물 등이 뒤섞인 흥미 본위의 맥락 없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예리한 필치로 풀어낸 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자기 취향의 ‘음식 재료’들만 골라 섞어서 만들어낸 음식과도 같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지적하려는 것은 이 음식 재료를 섞는 차원을 넘어, 아예 제각각 ‘완성된 음식’들을 섞어 만드는 더 노골적인 미각 장애 현상이니, 아마추어 만화계 쪽에서 유행하는 이른바 ‘패러디’라는 것이다.

  이 패러디라는 것들은 주로 아마추어 만화 ‘동인지’나 ‘인터넷 사이트’를 무대로 확산되고 있다. 만화 동인지라는 것이, 원래 일반명사로서 동인지의 의미를 잃었듯, 이 패러디라는 것도 지금까지 생각해온 일반적인 의미의 ‘패러디’가 아니다.

  이 패러디는 유명한 작품들을 원작으로, 그 원작을 각색 변형하며 만들어진다. 이런 표면적인 설명만으로는 패러디 본래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나타나고 있는 이 독특한 패러디들은 ‘맥락이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휴전 환상문학 작품들처럼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만 골라 넣어 맥락 없이 이야기를 꾸며나간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휴전 환상문학 작품들과 서로 통하기도 하지만, 휴전 환상문학 작품들이 ‘음식 재료’를 뒤섞은 수준이라면, 이 패러디라는 것들은 이미 ‘완성된 음식’들, 즉 이미 완성된 작품들을 뒤섞어 제2, 제3의 새로운 작품으로 생산해낸 데에 차이가 있다.

  “아즈망가 대왕”의 주인공들이 나오고, 그러다가 갑자기 “포켓몬스터”의 주인공들이 등장해, 두 가지 만화의 인물들이 함께 하나의 패러디 작품 속에서 어울려 놀아도 상관없다. 아무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귀여운 모습으로 계속 독자에게 다가오던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성행위를 해도 내용상 문제될 것이 없다. 패러디 작가 자신이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고 싶고, 그게 좋아서 그랬다는 데 누가 뭐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원작 만화보다 패러디 작품이 더 인기를 끄는 일도 생긴다. 이 패러디 작품이라는 것은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미각 장애를 보이기 때문이다. 한 작품씩 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온 독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만화의 주인공들이 한꺼번에 등장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패러디를 더 좋아한다. 아이들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가? ‘태권브이랑 울트라맨이랑 싸우면 누가 이겨요?’ 바로 이 허무맹랑한, 그러나 정말 누가 이길까 궁금해지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게 패러디 작품들이란 말이다. 패러디 작품에는 태권브이랑 울트라맨이 함께 등장해 싸워도 된다. 서로 출신국가도 다르고 소속사도 다른 두 만화 주인공이지만, 패러디에서는 가능하다.

  커틀릿, 자장면, 스튜, 햄버거, 된장찌개를 다 좋아하는데, 어찌 한 끼에 하나씩만 먹으며 만족할 수 있겠는가. 그냥 다 섞어서 먹어보는 거다. 그리고 그것들이 뒤섞이며 새로이 또 다른 맛까지 탄생하게 되니, 그 조신하던 여자 주인공이 음탕한 여자로 변신해서 속살을 다 보여주고, 내심 그 나체가 궁금했던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이 정말 훌러덩 벗고 등장해 독자들의 숨어있던 욕망까지 시원스럽게 긁어주는 것이다. 패러디에서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

  앞으로 어떤 형태로 발전할지, 혹은 잊혀질지 모르는 분야가 이 독특한 패러디라는 것이고, 맥락 없이 따오는 문화현상이니, 지금 뭐라 판단하기에는 이를듯하다. 앞으로 그 추이를 더 지켜보며, 되도록이면 적절한 방향으로 진화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고양이 저,「백가쟁명 팬터지 ― 드래곤부터 처녀귀신까지」『거울』3, 환상문학웹진 거울( http://mirror.pe.kr/ ), 2003


* mirror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1-30 21:27)
댓글 1
  • No Profile
    해랑이 03.09.24 13:27 댓글 수정 삭제
    드디어 새 글이 올라왔군요.
    제 이름만 보여서 글 쓰기가 뭣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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