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위의 불길
버너 빈지 지음, 김상훈 옮김, 행복한책읽기
우리가 아는 물리법칙이 전 우주에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주는 여러 ‘권역(圈域)’으로 나뉘어 있으며, 태양계와 인류가 있는 ‘저속권’에서는 어떤 물체도 빛의 속도 이상으로 움직일 수 없지만 이 권역을 벗어나 ‘역외권’으로 가면 초광속통신과 초광속항행, 진정한 인공지능과 같은 마술 같은 일들이 가능해진다. 스케일 큰 스페이스 오페라인 《심연 위의 불길》은 위와 같은 설정을 깔고 있다.
● 장쾌하고 교활한 허풍
대체로 내 경우,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얻는 즐거움은 각각 뜨겁고 차가운 두 종류다. 위장된 서부극이자 모험 활극에서 얻는 뜨거운 재미, 우주적 규모의 허풍을 들으며 느끼는 차가운 재미다. 《심연 위의 불길》은 이중 후자에 치중한다. 이 소설의 뻥은 거대하고 뻔뻔하며 천연덕스럽기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에 맞먹는다. 시속 25광년으로 달리는 우주선이 등장하고 몇 백만에 이르는 우주 종족들이 절멸하는 이야기다. 장쾌하다.
이 장쾌한 세계관은 내용을 실제보다 매우 거대하게 보이도록 비추는 볼록 거울과 같은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는 점에서 교활하기도 하다. 숨이 막힐 듯한 광활한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제시해 독자의 눈을 사로잡지만 그 배경 앞에서 진짜로 벌어지는 이야기 자체는 그렇게 크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사건의 절반 이상은 다인족 행성의 한 대륙과, 다인족 행성으로 향하는 우주선 아웃오브밴드 2세 호 주변에서 일어나며, ‘우주의 로빈슨 크루소’ 식의 표류기와 간단한 궁중 암투, 단선 구조의 추격전이 혼합된 형태다. 복잡한 세계관과 설정은 주로 인용이나 회상으로 소개되며, 들어낸다 해도 이야기 진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인 경우가 꽤 많다.
● 스케일에 눌려버렸다?
냉정히 말해, 이 소설에서 이야기의 매력은 압도적인 세계관과 아이디어가 주는 그것에 비하면 몇 수 낮은 수준이다. 거대하고 빽빽한 세계관과 아이디어 소개에 이야기가 치이기도 하고, 수학과 교수 출신인 작가가 이야기의 호흡이나 완급을 조절하는 재주에는 상대적으로 서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이 소설을 가장 잘 즐길 독자들은 책의 내용보다 권말 연표에 환장하는 ‘설정광’들, 또는 반중력미사일을 쏘는 인물이나 미사일이 일으킬 결과보다 이 무기에 대한 설명에 열광하는 ‘가제트광’일 것이다. 하나 하나 파고 들면 SF 서너 권은 쓰고도 남을 각종 아이디어들이 그야말로 부글거리는 소설이니까. 초광속통신을 바탕으로 하는 우주적인 규모의 정보 네트워크(공교롭게도 초창기 인터넷을 빼닮았다), 문명 하나가 정보의 형태로 저장되고 되살릴 수도 있는 아카이브, 집단 지성과 그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고 실험들, 정신 조작과 인격 창조 및 개조, 초월 지성의 행동 묘사, 외계 지성체에 의한 의도적인 진화…… 대략 생각나는 것들만 적어봤는데도 몇 줄이다. 이 몇 줄에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쫑긋해지는 SF 팬들에게는 강력 추천한다.
작품의 장단점을 정확히 설명한 리뷰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