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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3대 거장을 꼽으라면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가 꼽히듯... 호러의 3대 거장을 꼽으라면 전 스티븐 킹, 러브크래프트, 그리고 클라이브 바커를 꼽으렵니다.

 

스티븐 킹 식 호러는 이 셋 중 가장 캐쥬얼하고 대중적입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자주 마주치는-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고 꺼림칙한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익숙한 이웃이라거나, 도로를 질주하는 거대한 몬스터 트럭, 퇴근길에 한잔 하고 나오는 술집 문에 붙어 있던 광고와 같은 '일상적 존재'에서 불현듯 느껴지는 이질성과 섬뜩함을 캐치해 내는데 특히 능숙하지요.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공포'를 리얼하게 묘사하는데 있어 스티븐 킹만큼 뛰어난 호러 작가는 없을 겁니다. 자연스레, 스티븐 킹 식 호러는 세밀한 디테일의 묘사와, 그러한 묘사를 통해 쌓아올린 '일상성'의 이미지를 전복하는 데서 발생시키는 전율감에 중점을 둡니다. 킹이 워낙 다작을 하는 작가기도 하고, 초자연적 공포 요소가 배제된 스릴러 내지는 순문학(쇼생크 탈출이라거나 그린 마일 같은)도 있다 보니 그렇지 않은 작품도 많긴 하지만, 그래도 대체적인 기조는 그렇습니다.

 

러브크래프트 식 호러는 그보다 훨씬 심원하고 깊숙한 영역에서 '공포감'을 이끌어냅니다. 인류가 이 지상을 걷기 한참 전부터 대륙의 산맥 지하와 깊은 바닷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인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고대의 신들과 그 수하들이 주로 문명에서 벗어난 오지에 일종의 '식민지'를 건설하고서,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그 광기를 퍼뜨리고 있다... 인간이 신봉해 마지 않는 이성과 합리성은 그 초월적인 광기와 불가해함에 직면하는 순간 산산히 깨져버릴 나약한 장막에 불과하다... 는 큰 틀 아래에서 독자의 심리 깊숙한 곳에 도사린 '근원적인 불쾌감'을 이끌어 내는데 강점을 보이지요. 러브크래프트 식 호러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잔혹한 묘사 없이 도입부터 천천히 쌓아올리는 특유의 그 불길하고 스멀스멀거리는 '분위기'와, 그러한 분위기의 고조 끝에 흘깃 모습을 드러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 공포의 끝자락을 잠시 접하고 미쳐 버리거나 자살하는 인간 정신의 나약함을 강조하는데서 공포감을 이끌어 냅니다.

 

클라이브 바커 식 호러는 앞의 둘과는 전혀 다릅니다. 바커의 작품 대부분에서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전제는 '모든 존재는 저마다 욕망의 대상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욕망이 결코 완전히 채워지지 않기에 괴물 역시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받는 불행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클라이브 바커의 작품에 등장하는 '괴물'들은 그와 접촉한 인간에게 공포심을 주지만, 그 괴물들 자신도 저마다의 공포나 고뇌, 고통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그리고 그러한 공포나 고뇌, 고통을 가장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어필하는 것이 잔혹한 고어 묘사고. 그래서 바커의 작품 대부분은 대단히 고어하고 끔찍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묘사 저변에 깔린, '진정 두려워 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고통의 본질은 어떤 것인가' 라는 문제 의식은 놀랄 정도의 깊이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커 식 호러는 킹이나 러브크래프트의 그것과는 궤가 다릅니다. 킹의 캐쥬얼함은 상업적 천박함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러브크래프트의 찐득거리는 불쾌함은 작가 자신이 품고 있던 외국인 혐오와 편집증의 소산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바커가 묘사하는 '공포'에는 일종의 예술적인 격조와 품위가 있습니다. 그 '예술'이 온통 피로 덧칠된 것이라서 그렇죠.

 

이런 걸 갑자기 쓰는 이유는.... 그냥 별 이유 없이 '쓰고 싶어져서' 관련 컬럼 같은 걸 쓴 참인데, 마땅히 투고할 데가 없어서 그렇습니다....ㅇ<-<

댓글 3
  • 아이 13.02.26 02:46 댓글

    별 이유 없이 쓰는 글이 최고죠!!

    개인적으로는 셋 중 클라이브 바커 식이 좀 땡기네요.

    제가 좀 격조와 품위가 있다 보니...;;;;;;

    잘 읽었습니다. ^^

  • No Profile
    pena 13.02.28 15:14 댓글 수정 삭제

    마땅히 투고할 데가 없다니! 그냥 투고하세요! 여기여기!

  • No Profile
    잠본이 13.02.28 22:35 댓글

    그리고 저 셋을 적당히 짬뽕하여 별 알맹이 없는 킬링타임용 불량식품을 팍팍 찍어내는 희대의 공장장 딘 쿤츠 성님이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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