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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데리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해체주의라는 경향과 그것을 추종하는 수많은 무리들보다는 그 한 인물의 여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에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책을 소중한 사람에게서 선물 받았다. 그러나 나는 결코 마르크스에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고, 순전히 데리다의 말로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 책을 주문하고 바라 마지 않았던 것이다. 의심과 회의 그리고 부정의 극단 속에서 해체주의가 어떻게 하나의 유사-신학으로 변질되는지의 그 말로를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해체주의의 말로를 실상 처음 접해 본 것은 <법의 힘>이었다. '정의는 곧 해체가능성이다'라는 단순한 명제 속에서, 나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윤리관이, 즉 진리(정의) 도래의 끝없는 지연 속에서, 그 공백의 끝 없는 지속 속에서 정의 자체의 부정적 경계를 발견하는 데리다의 그러한 윤리적 태도는, 그가 왜 지젝으로부터 '유대교적 부정신학'이라는 꼬리표를 얻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어느 소문에 듣자하니, 데리다는 그의 말년의 저작에서 마르크스를 해체주의의 선지자로서 내세웠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해체의 영속적 운동 속에서 그 자신의 도래를 기다리며 끝 없이 경계선에서 출몰하는 유령이라는 것이다. 80년대 후반 공산권 붕괴 이후 그러한 유령에 대한 푸닥거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순간에, 역사의 종말을 내세우던 후쿠야마에 대하여 내세운 것이 마르크스라는 유령이다.

  여기서 우리는 메타언어에 대한 한 해체주의자의 어렴풋한 자기성찰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것이다. 공산권의 종말과 사회주의 이상의 종말은 곧 하나의 메타언어의 도래를 가져왔다. 즉 이것이 가능한 세계 중의 최선의 세계이며, 이것이 유일한 세계이다라고. 해체주의자들은 그들다운 성향대로 그것에 대항할 수 밖에 없었다. 즉 '메타언어'의 어떠한 역설적인 위상이 그들의 포스트모던한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그들은 메타언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역사에는 해체의 작업에 저항하는, 그러한 육중한 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저항하고 싶어 안달이 났으리라. 그러나 메타언어에 대한 그들의 부인은 곧 메타언어의 이면, 메타언어 자체의 유령적인 위상으로 이끌고 갔다.

  그것이 프랜시스 후쿠야마 V.S 유령 마르크스의 '대칭적'인 구도가 아닌가?

  해체주의자들은 1차 언어와 2차 언어 사이의 근본적인 간극을 부인함으로써, 작품-텍스트에 대한 주석 자체가 이미 작품의 차원에 침투해 있다는 사실에, 작품(1차 텍스트)에 대한 비평(2차 텍스트)의 거리두기는 실상 1차 텍스트가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거리 두기에 다를 바 없다는 아이러니를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

  이로써 그들은 이론적 비평을 마치 그 자체로 문학처럼 보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온 것이다. 자기 자신의 명제에 대한 아이러니한 거리두기, 주석에 대한 주석, 스스로에 대한 패러디, 뒤집기, 문학적인 비유와 이론적 명제의 혼융, 등등의 전략들을 구사한다.

  문제는 이들의 지나치게 경박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태도 자체가 극단적인 정신적 귀족주의와 엘리티즘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을 선사한다는 점에 있다. 문제는 그들이 이론을 문학으로 만들고, 메타언어를 1차적 작품의 가벼운 수준으로 끌어내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작품'을 고급이론으로 정향시킨다는 점에 있다. 이는 비평가 내지는 이론의 월권행위와도 연관되어 있다. 문제는 해체주의자들의 겸손함이 아니라 오만함이고, 작품을 작품이게끔 하는 창작열과 대조를 이루는, 이론적인 매개에 대한 강박증의 위장된 소망인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의 비평가 내지는 이론가로서 윤리적 태도가 아니라, 해체를 논하며, 텍스트의 무한한, 비완결적인 해석학적 순환을 논하며, 작품의 개방된 구조를 논하며, 그러한 논의의 위치 즉 메타언어의 위상을 오히려 건드리지 않고 보존한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마치 페미니즘에 관대한 마쵸의 역설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한 마쵸는 모든 남성적인 특권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런 것을 관대하게 포기 할 수 있는 자신의 입장을 제외하고 말이다. 우리는 이런 과정에서 어떻게 해체주의 비평가들이 자신의 비평적 입장과 위치를 성공적으로 보존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오히려 그들이야말로 메타언어의 가장 외상적이고 두려운 진실을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닐까.

  해체주의 이후의 시대에서 우리는 메타언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존재exsist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외설적인 보충항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끈질기게 잔존insist한다."

  그것이 바로 '유령'의 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죽어있되 살아있는 그러한 산죽음의 영역을 포착했으면서도, 그것이 바로 메타언어 자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자들이 해체주의자들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을 보면, 가령 한 부르주아지가 '나는 나의 계급적 이해를 관철시키려는 의도에서, 저 노동자를 보다 성공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저기 있는 노동자에게 부르주아의 진리를 납득시키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런 메타언어적 위치에서 '직접 서서' 자신의 객관적인 행위를 그대로 완수한다. 이러한 문학적인 아이러니를 통한 형상화야말로 해체주의자들은 현란한 어느 수사보다 더 완벽하게 메타언어의 불가능성을 예증한다는 지젝의 지적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브레히트의 미덕은 그가 객관적이라고 가정된 좌파적 메타언어의 위치를 억지로 끼워맞춘다는 통상적 비판을 비껴나가, 오히려 그러한 위치에 직접 '섬으로써' 메타언어가 (현실 따위가 아닌) '자기 자신'과 불일치한다는 외상적인 진실에 '직면할' 용기(정확히 해체주의자들에게 결여된 그러한 용기)를 보였다는 점에 있다.

  '나 곧 진리가 말한다'는 연극적인 제스추어가 이미 바로 그 진리의 위상을 체현하고 있다는, 진리는 그 자체로 허구적인 구조를 지닌다는, 라깡의 공식이 어느 해체주의자의 사변보다 더 정곡을 찌른다는 사실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메타언어적 진리는 허구라는 것이 아니라, 허구 그것이 곧 진리라는 외상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감수하는 것이 바로 '주인'의 형상이다.

  후기 데리다가 도달한 사적유물론의 '유령학', 혹은 마르크스의 유령은 메타언어의 불가능한 그럼에도 엄존하는 위상에 대한 절반의 통찰이다. 마르크스 자신은 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요란한 선전 속에서 거대담론 혹은 메타언어의 부당한 선점자로서 격하되었던 자가 아니었는가. 실상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도 메타언어라기보다는 메타언의 종말의 또 다른 판본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은 그 자체로 메타언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크스가 메타언어의 우파적 판본의 대립물로 상정되는 것은, 즉 세계화 시대의 담론적 경계선 상에서 끊임없이 출몰하는 유령으로 간주되는 것은, 자기 도래의 끝 없는 지연 속에서 메타언어의 불가능한 윤곽을 그려내고자 하는 데리다의 욕망을 반영하고자 하는 어떤 전환을 표시한다.

  즉 메타언어는 자신의 불가능성 속에서, 자기 자신과의 끊임 없는 불일치 속에서 자신 일관된, '음화된 형상'을 보존한다는 결론에 데리다는 마침내 도달한 것이다. 그의 저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이런 사상사적 전도의 측면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해체주의가 그 극단에서 유대교적 부정신학에 이른다는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맹점'이자 곧 해체주의 맹점을 이루는 것은 바로 그러한 확정적 메타언어의 도래, 역사의 목적론적 여정의 완결의 끝 없는 지연 그 자체이다. 이는 곧 강박증자의 경제를 이룬다. 강박증자들의 증상은 자신의 욕망의 대상에 대한 회의가 오히려 욕망의 대상을 극도로 물신화시키고, 급기야 그것을 피하는 데에 전 존재를 걸어버린다는 것에 있다.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믿지 않으면서' 마치 '믿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데에 있다.

  문제는 해체주의가 문자 그대로 유대교적인 방식으로, 절대적 진리 현존의 부정성(가령 신의 절대적 부재)을 물신적 위치로까지 고양/숭배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함으로써 그들이 피하고자 하는 진실은, '진리'란, 메타언어란, 바로 그들이 유희하고 말장난의 놀이터로 삼아왔던 바로 '그곳'에 방문해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진정한 전도는 우리가 그것을, 역사의 최종 목적을, 이상을, 진리를, 정의를, 메타언어의 최종적 승리를 <믿으면서도> 마치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듯이 행하는 것에 있다. 가장 전복적인 것은, 이론적 회의주의자이면서 실천적 유아론자인 것이 아니라(이런 부류들은 오늘날 학계에서나 일상에서나 널리고 널려 있다), 이론적 교조주의자이면서 실천적 현실주의자인 데에 있다. 이것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진정한 <주인>의 형상이자, <진리>의 주체이며, 그들은 사도바울과 예수와 같은 '스승'이라는 형상들과 혹은 레닌과 마오 쩌둥이라는 혁명가의  형상으로 '현존'한다.

  비평의 위치란, 비평가의 입장이란, 곧 메타언어라는 가장 까다로운 주제/주체Ticklish Subject를 떠맡는 '입장'을 감수하는 자들이며, 그러한 한에서 그들은 출몰하는 유령이 아니라, 현존하는 산 죽음 그 자체인 것이다. '유령'의 비유를 선호하는 해체주의의 수사적 전략과 '좀비'의 비유를 선호하는 정신분석적 수사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유령'은 안전한 거리를 둔 채 섬뜩한 매혹을 느낄 수 있는 상대인 반면에, '좀비'는 바로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끔찍한 산죽음의 "현존('출몰'이 아닌)" 그 자체인 것이다. 진리와 대면하는 한 우리의 세계의 일상적 현실성을 상실하고,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행하며, 반쯤은 죽은 주검으로서 현존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차원이 해체주의자들에게는 사고 불가능한 차원이며, 다른 이들에게는 비범한 차원에서 돌파 가능한 <좁은 문>인 것이다.  
박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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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서 08.01.04 00:51 댓글 수정 삭제
    제가 데리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데리다의 저서들을 읽어볼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데리다에 대해서는 꽤 관심이 있었고, 이 글을 읽으며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네요. 뭐, 우선 간만에 각잡고 즐겁게 읽었습니다. 이쪽 책을 안읽은지 3년이 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도 하구요.

    다만, 글을 읽으면서 한가지 혼란스러웠던 건, 해체주의자라는 굉장히 모호한 개념때문이었는데요. 여기서 박가분씨는 데리다와 해체주의자를 같은 위치에 놓고 글을 풀어나가는건지, 아니면 데리다를 위시한 '해체주의자'들과 '해체주의 비평가'를 같은 선상에 놓고 글을 풀어나가시는건지,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스트로서, 문화 해체론자'의 입장에서 글을 써나가신건지가 매우 모호합니다. 제가 간략하게 이렇게 구분하긴 했지만, 쓰는 경우에 따라서'해체'라는 말은 독자로 하여금 무한한 의미로 쪼개질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붙었으면 읽는 이로 하여금 훨씬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읽어본 해체주의 비평가는 끽해야 롤랑 바르트나, 폴 리쾨르, 츠베탕 토도로프, 줄리아 크리스테바, 파스칼 키냐르 정도인데, 이들은 실제로 데리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데리다의 철학에서 어느정도 거리가 있고, 위의 글들이 그런 '실제적인 해체주의 비평가'들에게는 먹히지 않는 부분들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글의 표적이 되는 '해체주의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저는 조금 정확히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 뿐입니다. 이 부분은 조금 확실히 해주셨으면 하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왜냐면 분명한건 데리다는 철학자이자 언어학자이지, 비평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문예비평으로 끌어내리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사람은 롤랑 바르트라고 알고 있습니다 (영미 비평가인 라만 셀던도 <문학이론 입문>에서 이런 설명을 붙여두고있습니다.)

    실제로 박가분씨가 위에 써나간 '해체적 비평'에 대한 글 중에서는 "메타언어를 1차적 작품의 가벼운 수준으로 끌어내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작품'을 고급이론으로 정향시킨다는 점에 있다"라고 지적한 부분이 있는데,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평은 하나의 놀이고 게임이라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굉장히 잘 나타나 있죠.) 또한 크리스테바나 키냐르의 정돈된 비평들은 그런 소위 말하는 '고급이론'을 바탕으로 '실재 비평'에 굉장히 적절히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파스칼 키냐르의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경우는 아주 대중적인 경지까지 해체된 '언어학 텍스트'라고 뒤에서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들의 글은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경계가 없지요)

    저는 사실 해체주의자, 혹은 해체적 비평가들이라고 한다면, 이런 작가들 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그들이 데리다의 해체철학에 묶여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물론 데리다의 철학이 언어학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별개로 쳐두더라도 말이죠. 글의 제목 자체가 해체주의 '비평'에 대한 논의니까요.)

    덕분에 데리다에 대해서 아주 약간은 엿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안그래도, 데리다의 책을 다시 좀 읽어볼까 생각하고 있던 차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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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서 08.01.04 00:56 댓글 수정 삭제
    실제로 비평에서의 '해체'와 철학에서의 '해체'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부분이 너무나 모호해가지고, 저도 읽는 내내 혼란이 와서 덧글 달아둔 것이니 이해 바랄게요.

    그리고 제가 달아놓은 덧글은 4년전 기억에의존해서 쓴 글이라 조금 엇나간 이야기들이 있을수도 있어요. 하지만 맥락적으로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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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가분 08.01.04 10:48 댓글 수정 삭제
    비평에서의 해체와 철학에서의 해체의 구분을 정확히 해두지 안한 건 제 불찰입니다. 지금에서야 요약하자면 철학에서의 해체주의는 간단히 말해서, 본문에서 말한 법, 정치, 문학 비평에서의 사고 전반을 규정하는 '유대교적 부정신학'이고 현전의 형이상학에 대한 전복적 경향입니다.(전 그것이 불완전한 시도라고 보고요) 이에 반해 비평에서의 해체주의란 예컨대, 드라마 '프렌즈'를 보며 그것의 해체가능성을 논하는 그런 따위의 지적 유희활동을 말하며( 제가 가장 혐오해 마지 않는 활동입니다.), 롤랑 바르트가 아니라, 미국 예일학파가 그런 천박한 경향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폴 리쾨르, 츠베탕 토도로프,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해체주의 비평가라는 것은 금시초문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상사가가 그런 폭력적인 범주짓기를 한 것이죠???

    데리다가 언어학자라는 말도 금시초문이고, 해체주의를 비평의 수준으로 최초로 끌어내린 사람이 공식적으로 롤랑 바르트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데리다가 실제 비평을 안한 것은 아닌 데다가, 적어도 제 논점은, 비평을 창작의 스타일과 접합시키려는 그러한 경향을 나타낸 게 그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론', '비평', '창작' 이 세 가지 중 이론과 비평을 구분하지 않고 쓴 건 사실인 것 같군요. 하지만 적어도 저는 1차 언어와 2차 언어의 경계를 흐뜨러뜨리고자 무던히 애를 쓰는 그러한 경향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실제로 저는 바르트의 경우에 대해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바르트의 귀족적인 문학 취향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고, 그가 유희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고도의 이론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본인도 알고 있으며 바르트에 대한 이런 저런 평가를 풀어내는 현서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그런 역설을 말하고 싶은 것일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 바르트는 이미 특권적인 비평가의 위치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마치 포기하려는 가장된 제스처 속에서 그 위치를 보존하려는 욕망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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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가분 08.01.04 12:00 댓글 수정 삭제
    사실 제가 워낙 정신분석에 경도되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람 말을 워낙 안 믿어서요^^; 가령 바르트가 '나는 결코 권위적인 고급 이론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텍스트의 가장 경박한 차원에서 유희할 따름이다.'라고 말해도 결국 정 반대의 지점에 도착해버리는 걸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머 암튼, <텍스트의 즐거움>은 저도 읽어봤지만 재미있더군요^^ 해체주의라는 범주로 묶기는 조금 망설여지는 분입니다.

    보다 정치한 철학적 경향으로서의 해체주의는 방금 말했듯이, 그 정점에 도달할수록, (문학) 비평이나 텍스트의 유희에만 국한되지 않는 매우 야심찬 프로젝트입니다. 그 외에는 해체주의를 소비하는, 그것으로 텍스트에 대한 말장난이나 일삼는 폴 드 만의 추종자들이 있겠습니다. 물론 폴 드 만 자신은 미국의 권위적이고 경직되고 고지식한 비평경향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정단한 평가가 되어야 할 사람이겠지만, 어쨌든 해체주의를 희화화하는, 데리다와는 별 관련 없는 사람이겠죠.

    하지만 제가 정진정명의 해체주의를 두고 말하든, 속류 해체주의자들을 두고 말하든, 그들의 공통점이란, '메타언어'에 대한 물신적 부인을 행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메타언어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게 있다는 것처럼 행동할 거야." 그것은 자신의 언어를 어떻게든 메타언어처럼 안 보일려고 무진장 노력하는 그들의 강박적이고 고된 작업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보기 안쓰러울 지경입니다. 여기서 저는 매우 통상적인 독자의 수준에서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통상적인 독자들은, 어느 종류의 해체주의자들을 접하든 간에, "몇 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저들의 주장을 왜 저렇게 복잡하고 머리 아프도록 정교하게 계산된 형태로 개진하지 않으면 안될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곤 하지요.

    그런 통상적인 의문 이면을 보자면, 해체주의의 경향이라는 것이, 그 전복과 회의와 의심의 절차가, 결국에는 어떤 주제를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지를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특권적 '메타언어'란 저기 어딘가에 있다는 듯이 상정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글을 쓰는 것은 정작 해체주의자 본인들입니다. 그들이 알아야할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메타언어란 사실은 그들이 유희희 장으로 여겼던 가장 범속한 텍스트의 차원, 기표들의 매끄럽고 무한한 순환의 연쇄가 어느 순간 교란되고 멈추고, 파열되어버리는 수행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공백'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바르트 역시도, '유희적 텍스트', '매끄러운 텍스트'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기표의 질서가 폭발하고 광기에 사로잡히는 그러한 지점이 있다는 것을 바르트는 끊임 없이 지적하죠. 저는 정확히 바로 그것이 해체주의자들이 부인하는 메타언어의 순수한 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표의 논리만으로는 환원불가능한 그러한 순수한 광기, 주인의 권력,

    그것을 저는 다름 아닌 '진리의 효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해체주의자들은 정면으로 다루지 못한다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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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서 08.01.04 22:42 댓글 수정 삭제
    아하.. 이해가 됩니다. 어떤 책에 보면, 제가 언급한 바르트나, 리쾨르, 키냐르, 아니면 박가분씨가 말씀하신 폴 드만같은 사람들을 몽땅 묶어서 '해체주의자'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컨데 몇몇 책에서는 탈구조주의나 후기 구조주의에 바탕을 둔 사람들을 모두 해체론자로 뭉뜽그려 놓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기민한 개론서나 이론서에서는 이것을 분명하게 구분지어야한다고 하지만, 각 매체에서 쓰는 말이 중구난방이라, 말씀드렸다시피 이'해체주의자' 혹은 '해체론자'에 대한 어떤 선이 좀 분명했으면 하거든요. 사실 저도 극단적인 경우로 예를 든거지만, 리쾨르나 키냐르가 해체론자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치졸한 태클에 상세한 답변 달아주셔서 덕분에 명쾌하게 읽고 있습니다. 요새는 미학쪽에 빠져있어서 문예비평쪽에는 굉장히 소홀하고 있는데, 다시 공부해볼 의향이 새록새록 생기고 있어요.
    근데, 정말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_-;

    롤랑바르트의 의견엔 저도 동감하는 부분이 매우 많아요. 사실 바르트가 텍스트를 '유희'한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실제로 중요한 저서인 <현대의 신화>나 <텍스트의 즐거움>같은 건 만만한 책은 아니지요. 반대로, <사랑의 단상>이나 <롤랑 바르트가 쓰는 롤랑바르트>같은 경우는 박가분씨가 말씀하신것처럼 고급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저도 역시 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 토도로프와 바르트에 굉장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고, 박가분씨와 비슷한 의미에서 굉장한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이야기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해봤으면 좋겠군요.

    그 전에 데리다부터 공부해야겠습니다. 상세한 덧글을 읽어보니, 박가분씨의 말에 다시 십분 공감하게 되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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