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오랜만에 읽은 선집이고 오랜만에 읽은 두꺼운 책이다. 부록까지 해서 총 717P. 베개로 쓰기에 적절한 분량이다. 실제로 아버지가 베고 주무셨다. 나도 한번 써 봤는데 의외로 편했다. 황금가지에서 야심차게 출간하고 있는 환상문학전집의 열아홉번째 책이다. 그야말로 전집이라는 표제에 어울리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선집의 기본적인 방향은 "톨킨보다 최소한 5년은 일찍 태어나, 앞선 시대에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봄으로써 톨킨의 문학을 되돌아보는 것에 있다. 엮은이인 더글러스 A. 앤더슨은 서적상이면서 톨킨 연구가로 톨킨 작품의 주해를 담당했다. 그러나 실제로 살펴본 선집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다. 딱히 톨킨풍이라고 할 수 없는 작품도 많았고 어떻게 보면 프로토 호러나 프로토 SF에 어울리는 작품도 있었다. 그것은 선집을 엮은이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때문에 "톨킨이 읽어봤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이란 문구가 남발되는 느낌이다. 때문에 이 선집은 톨킨에게 강조점이 있다기보다는 톨킨 이전 시대의 환상 문학 흐름을 훑어본다는 느낌이 강하다.

  즉 톨킨이 이전 환상 문학의 전통에 기대고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에 근거를 제공해주는 책이다. 그러나 학술적인 의미 말고도 [톨킨의 환상 서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을만큼, 완성도 있는 작품을 다수 수록하고 있다. 오즈의 마법사로 유명한 프랭크 바움의 흥미로운 단편에서부터, 마치 스티븐 킹을 보는 듯한 아서 매켄의 [공포의 엄습], TV용 장편 애니메이션에 어울릴만한 [검은 심장과 하얀 심장], 요정 이야기의 섬세한 변용인 [요정의 덫]까지 다채로운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훌륭한 선집이 언제나 그렇듯이 또 다른 독서로의 다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부록으로 유명 작가와 대표작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물론 톨킨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관심을 가질만한 선집이다. 달리 이름이 [톨킨의 환상서가]이겠는가. 호비트의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는 [도깨비 골리도스], 톨킨이 가운뎃땅을 구성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가상 세계를 완성한 [알위나 이야기] 등은 톨킨에게 편집증적인 애정을 가진 사람에게 일독을 권할만하다. 또한 톨킨이 어린 시절에 열광했던 환상 문학 단편이 수록되어 있어 톨킨의 환상 문학적 독서 배경을 음미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유용한 선집이다. 아마도 예민한 독자라면 [호비트]나 [반지의 군주]에서 경험한 정서를 선집에 수록된 단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집은 사실 일반 독자에게는 그다지 이점이 없는 책이다. 서구의 환상 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서적광, 혹은 민간 연구자에게 입문서로서 가치가 있다. 어떻게 보면 황금가지에서 전집의 구색을 맞추려고 내놓은 작품 같기도 하다. 그게 아니라면 기획 실패가 낳은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먹물 냄새 풀풀 나는 선집은 한번쯤 읽을만하다. 시야를 넓혔다는 착각과 허영심을 가지기에 매우 적절하기 때문이다. 말했듯이 베개로 쓰기에도 적절하고.
땅콩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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