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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

SF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솔직히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강렬한 편도 아니었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 SF에 상당히 빠져있는 매니아 친구들이 있었고, 판타지 담론은 곧 SF문학담론의 그것과 공유하는 것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SF에 대한 관심은 나름대로 지속적이었고, 약간은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추천받은 책들은 대개가 당시(고교시절) 내게 읽어야할 필수 목록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었고, 여유가 되어 읽어보려고 서점을 돌아다닐 때 즈음에는 책들이 이미 절판 되었던 것이다.

  아마 유로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SF에 대한 나의 관심은 아마 관심으로 끝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이 인연으로 나는 SF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기본적인 매뉴얼을 받게 됐는데, 책을 몇권 소개 받은것이 가장 중요하고도 간단한 그것이었다. 하지만 판타지 문학과 마찬가지로 SF 소설도 이 땅에서는 극히 매니악한 팬들만이 향유하는 ‘장르문학’에 속하기 때문에 구하기 쉬운 책은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 이번에 탐독한 책은 유로스가 극찬해 마지않던 그렉 이건의 <쿼런틴> 내가 이 작품에 관심 있다기보다는, 가장 먼저 추천한 책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 하드SF, 그리고 추리소설 -

  이 작품은 50년정도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태양계에 검은 구체인 ‘버블’이 드리우면서 어느순간 지구 위에 모든 별들이 사라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사립형사 닉이 맡은 수사의뢰는 정신병원에서 사라진 정신 지체자 로라를 찾아내는 것. 로라를 잡아간 ASR의 프로젝트와 ‘버블’의 연관성, 그 속에서 밝혀지는 음모를 추적한다는 이 작품의 줄거리는 어찌보면 대중소설 강튼 박진감 넘치는 스릴러물이라고 보여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나 제3세계라는 작가적 특성때문인가? 이 작품의 구도는 영미 전통적인 추리물이나 SF소설보다는 오히려 중남미의 노벨라네그라Novella Negra(검은소설 - 추리소설의 기법을 순수문학에 본격적으로 융합한 중남미 소설의 한 특징)에 더 가깝다.

  이 작품은 겉으로 보기에 흥미진진한 SF추리물이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그러한 서스펜스가 아니다. 작품은, 물론 서스펜스로 인한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그에 선행하여 그러한 추리물적인 하드SF를 통하여 주인공 닉의 자아정체성을 찾는 모험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 작품에서는 두가지 과학이론이 핵심을 이룬다. 하나는 근미래적인 시각을 가지고 현대 과학의 비전을 제시하는 고전SF의 방향이다. 여기에 입각해서는 NT(Nano Tech)가 이 작품의 핵심이 된다. 작품 내의 2068년은 이미 신소재 나노공학이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어서 세포크기만한 칩들에 ROM들을 집어넣고, 그것을 모드Mod라는 형식으로 뇌에 ‘인스톨함’으로써 가상 공간과 전자처리들이 모두 뇌속에서 일어나는 기능을 해준다. 생체 심리학과 더불어 생리학에 의해 뇌의 구조가 밝혀지면서,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는’ 뇌하수체나 ‘고통과 감각을 억제하는’ 뇌하수체들을 이들 모드로 ‘조절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닉은 P3같은 모드 프로그램을 깔아놓으므로써 아내가 죽었을 당시에도 감정을 억제하고 자신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는 양자역학이다. 역자에 따르면 현대 물리학에서 과학은 크게 두가지로 이분된다고 한다. 거시적인 관점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미시적 관점에서의 양자역학이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양자는 행동패턴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진행하고, 그에 라서 카오스로 혹은 그렇지 않게 진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 양자에 대한 ‘관찰자’가 개입하므로써 그 관찰자의 관측행위에 의해 무한한 가능성 중에서 하나의 ‘현실’만 남게 되는 ‘사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 양자이론에 따르면 양자의 가능성은 여러 가지 다세계에서 가능성의 씨앗으로 무한히 ‘확산’하고, 그 중에서 관측되는 단 하나의 사실만 남아 ‘수축’되어 현상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작품 내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 패러다임을 가지고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작품에 90년대 포스트-사이버펑크 이후 등장하는 하드SF의 걸작이라는 칭송이 뒤따르는 것도 이런 두가지 이론에 대한 치밀한 놀리구조가 ‘추리소설적인 사유’로 자아의 사고를 전개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렉 이건의 <쿼런틴>에서 이런 하드SF의 형식이 가장 중요한 심미적 요소는 아니다. 역자가 지적했듯이, 그렉 이건은 하드SF를 위한 하드SF를 창작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이 작품에서 하드SF의 고풍스런 분위기는 결국 형이상학적이고 실존적인 자아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놀랍도록 SF적이면서도 철학적이다.



- 나노공학과 모드Mod, 수많은 확산 속에서 자아 찾기 -

  유로스가 지적한것 처럼 최인훈의 <광장>이 궁극적으로 ‘사랑 이야기’이듯이, 그렉 이건의 <쿼런틴> 역시 궁극적으로 ‘자아찾기’로 수렴된다. 이점이야말로 그렉 이건이 ‘현존하는 최고의 SF작가’라는 평판을 듣는, 가장 커다란 이유일 수가 있다. <쿼런틴>은 지극히 하드한 SF의 문법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 작품은 나노공학의 미래를 외삽적으로 보여주면서 이들이 가져오는 윤리적 문제를 조망하고, 양자역학의 의의에 대해서 심도있게 진단하다. 이 부분에서 많은 SF팬들이 열광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소설적 구조는 결국 주인공 ‘나’, 즉 닉의 정체성으로 수렴된다. 이것이 바로 아시모프의 <아이로봇>이나 하인라인의 <스타십트루퍼스>같은 소설들과 차별되는 최근 SF의 동향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마도 뉴웨이브운동으로 돌아가는 복고주의적 성향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것은 SF문학도 역시 ‘문학’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본질을 공유할 가능성에 상당히 밝은 빛줄기를 내려 줄 수 있다는 전망이 가장 개인적인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젤라즈니같은 경우 문학의 여러 모더니즘 기법을 SF로 수렴하면서 소설기법적으로 ‘문학성’과 ‘SF’성을 동시에 획득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러티브적으로 이러한 인간 본질의 존재론적 문제에 대해서 이건만큼 철저하고 치밀한 접근은 보여지지 않는다.)

  나노공학의 발전으로 이제 인류는 자신의 모든 감정과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모드mod라는 나노 프로그램들은 여기에 전력을 집중한다. ‘행복,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해드립니다’라는 액슨사의 광고카피는 이 시기가 나노에 의해서 자신의 원하는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최첨단 시대라고 말한다. 주인공 닉도 이에 맞춰 살아가는 평범한 대중의 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P3라는 모드의 통제로 인해서 극복하며, 자신의 외상은 P1이 모두 알아서 진단하고 고통의 정도를 보고한다. 인간은 이제 스스로의 ‘마음’을 완전히 통제하고 장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본래 ‘나’의 감정일까? 그렉 이건은 본작에서 나노공학의 이런 ‘가능성’들이 가져오는 모랄적인 문제들에 의문을 던진다. 즉 ‘마음과 자아의 외부-감관-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나의 아픈 기억은 무감각하게 만들고, 즐거운 일들은 저장된다면, 그리고 강한 육체적 고통은 치료만을 남겨둔 채 자신의 감각에서 제외된다면, 내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은 자신의 ’기억‘에서 취사선택되어 저장된다면, 그렇다면 결국 자아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다소 실존적인 질문이다. 이것은 고전SF에서처럼 미래과학을 현실에 대입하는 외삽법에 의한 예측과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역시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도 톨킨이 지적한 내재적 리얼리티에 따라 당위적으로 구축된 이러한 2068년 현대 지구에 존재하는 ’닉‘이라는 자아를 통해서 작가가 되묻고 싶은 질문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이다. 사르트르가 현상학적 인식을 기반으로 <구토>에서 자아의 실존문제를 다루었듯이, 그렉 이건은 나노공학과 양자역학이라는 과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쿼런틴>에서 감각과 자아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매우 독창적으로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본질적으로 이런 윤리적 비전이 와해된 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의 ’자아찾기‘를 집요하리만치 면밀히 추적한다.

  여기서 작가는 이러한 작품의 질문과 과학의 문제, 그리고 작가의 생각을 도식적으로 채워넣지 않는다. 즉, 의도적 플롯을 배치하고 독자에게 주입하려는 외상적 시도는 애초부터 없다. 이것은 최근 순문학이 가지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 (플롯의 미학에 빠져서 작품의 아우라를 간과하는)의 늪에서 탈출하는 ‘문학작가 그렉 이건’의 탁월한 작가적 역량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쿼런틴>은 비단 SF 문단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계문학 자체 내에서도 진지하게 비판적으로 탐색해볼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현대에 다시 쓰여지는 토마스 핀천과 비슷하다.

  이 작품에서 이 세가지 키워드 (자아찾기, 양자역학과 나노공학, 그리고 추리소설적 이야기)는 한 이야기와 일관된 직선적인 사건에 엮여서 중층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모드mod는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왜냐면 모드과학을 대변하는 나노공학은 이미 2068년 인간의 가장 일상적인 삶의 영위방식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고전SF적인 화두도, 작가의 자아찾기도, 추리소설의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도 바로 이 모드에서 시작된다. 모드는 이 작품의 ‘파르메니데스적 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플롯적 도구는 닉이 ASR에 취직하면서 머리에 인스톨되는 ‘충성모드’라는 것이다. 이 모드를 깔면, 그 프로그램을 작성한 사람이 입력한 하나의 ‘존재’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브레인워싱Brainwashing이다. 하지만 닉은 이것도 하나의 ’모드‘이기 때문에 자신은 이 모드가 발현하는 최고의 가치 - ’앙상블‘은 인류 지고의 가치를 지향한다는 - 를 삶의 우선순위에 맨 앞에 놓는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모드‘의 선택이다. 하지만, 닉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모드가 선택하든, 자신이 선택한 것이든,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되는 모드는 자신의 가치관을 관할하고 있으며 그러므로써 자신은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이유야 어쨌든 자신이 ’앙상블‘을 위해 봉사하고 있을때는 ’충성모드‘를 만족시키기 때문에 행복 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닉의 ‘행복’은 나는 누가 됐든, 어떤 생각을 가지든 나의 행복을 쫓아서 살아가고, 내 머릿속에 심겨진 모드만이 진실한 가치로 삼고 살아가면 된다는, 다분히 사르트르의 ‘자기기만’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닉의 기만이 깨어지는 것은 바로 실험자 포콰이를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로부터 양자역학의 이론을 듣고 자아를 ‘확산할 수 있을때’부터다.

  양자역학과 다세계 이론에 따르면 자아는 비선형성 시간 속에서 수많은 또다른 내가 있고, 그런 무한대에 가까운 자신(확산)중에서 단 하나의 최적한 선택을 통하여 ‘하나의 현실이 되는’ 현상(수축)을 우리는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양자역학의 ‘슈뢰딩거 고양이’이론은 이 작품에서 첩보성을 가지는 모드개방의 핵심으로 부각되지만, 무엇보다도, 주인공 닉이 그러한 자아 확산을 경험하면서 겪게되는 가장 커다란 충격은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 나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이 점은 <쿼런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무한대의 내가 존재하고, 그 중에서 단 하나의 나로 ‘수축’되는 것이 ‘현실’이라면, 나머지 수많은 나는 나를 가장한 타자인가? 아니면 나를 기만하는 허상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분열된 자아인가? 닉은 끝까지 이러한 것에 확답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쓰잘데 없는 질문인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왜냐면 닉은 이러한 확산의 경험을 통하여 ‘자아찾기’라는 실존적으로 ‘성실한’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작중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포콰이가 확산하는 과정을 ‘관측’하는 닉에게서 가장 냉철하다는 P3모드가 에러를 일으키고, 닉 자신이 확산을 하고 나서는 자신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앙상블’의 충성모드까지 박살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이후 닉은 ‘모드 정체성’을 잃어버리면서, 자아를 찾는 과정을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게 된다. 그에게 ‘앙상블’이란 자아찾기였으며, 그것은 그러한 모드들이 파괴된 작품의 결말부터 진짜로 시작되는 것이다.



- 쿼런틴, 우주속의 자아 -

  이 작품의 제목이 ‘쿼런틴’이라는 것은 문학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쿼런틴Quarantine은 ‘격리’를 뜻한다. 그것은 작품에서 일차적으로 지구가 검은 구체 ‘버블’에 의해서 별들로부터 격리되는 상황을 말해준다. 그리고 닉이 찾아야하는 로라 역시 병원에서 격리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닉 자신의 정신부터가 모드에 의해 격리되어 있다. 이 세가지는 개인적인 문제와 우주적인 문제를 동일한 관점으로 상정하고 파악하는 귀납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그 키워드는 SF답게 양자역학으로 풀이되고 있다. 관측은 즉 ‘수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관측으로 인한 수축, 그러니까 확산의 가능성이 학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버블, 그리고 로라의 격리상태가 인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양자역학을 인문학적으로 조금 더 본질적인 질문에 던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왜 확산을 막는 ‘격리’인가, 그리고 ‘수축’이란 무엇인가 하고.

  지구를 격리시킨다는 것은 수축에 의한 고정이 은하 외부에서 일어날 수 있을정도로 지구의 ‘관측’이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라의 격리와 완벽한 격리상태를 능숙하게 빠져나가는 로라의 ‘확산능력’은 이 작품의 ‘격리’가 말해주는 하나의 코드를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이 작품에서 상징적으로 사용되는 격리와 해방의 문제는 곧 양자역학의 ‘수축과 확산’의 문제로 치환되어 다루어 지는 것이다. 이러한 뛰어난 SF적이면서도 동시에 대단히 문학적인 메타포들은 그렉 이건이라는 작가의 탁월한 소설가적 역량을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지표가 된다. 따라서 나는 그렉 이건을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나 레오나르도 파두라와 같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입지를 가진 뛰어난 문학작가로서 인정하고 싶다.

  결국 확산이라는 것은 격리상태를 뛰어넘으려는 행위고, (다소 비약적으로 말하자면) 자유의 본질일 수 있다. 그것은 작중에서 확산되는 포콰이와 닉이 얻는 결과물처럼 기적에 가까운 결과를 도출할 수 있고, 어찌보면 신에 가까운 능력을 얻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인물들은 이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수축되어 보여지는 현실은 ‘하나’라는 것. 즉 확산은 하나의 가능성이지 현실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환상이나 허상임은 아니다. 여기서 작가는 이런 확산의 가능성을 말 그대로 ‘가능성’ 즉 다세계 이론을 빌어서 설명한다.) 그리고 현실은 확산이 수축되어 이루어진 그 ‘하나’이다. 이것은 로라가, 닉이, 포콰이가 수많은 자아로 확산하면서 얻게되는 결론은 결국 하나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작품 결말에서도, 그리고 ‘버블’이 태양게에 씌워진 이유도 결국 ‘세계의 동시적 확산’과 ‘영원한 수축’을 막기 위해서였다. <쿼런틴>에서 1:1 메타포관계는 로라-닉-포콰이의 ‘확산’은 지구로 귀납되고, 그의 확산과 수축 행위 사이에 ‘버블’ (즉 정체성)이 막고 있는 셈이다. 이런 도식구도는 사실 독창적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섬세하지 않고 다소 거칠지만 이 작품 안에서는 굉장한 설득력을 가지고 상당히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유로스가 지적한 것 처럼 현대SF가 ‘내우주와 외우주의 소통’의 관계로 우주를 관찰하여 자아를 탐구하는 특징을 가진다면 (이를테면 테드 창의 작품들) 그렉 이건의 <쿼런틴> 역시 그러한 소통, 또는 ‘통섭’의 주요한 작품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그렉 이건은, 그래서 지구가 ‘검은 구체인 버블’이 씌워지고 별이 사라지며 관측할수 없는 상황이 되어도. 자아의 무한한 확산을 경험하고 꿈같은 기적을 이루어낸 다음에도, 지구가 한번 무한히 확산해버렸다가 결국엔 뉴홍콩의 국지적 현상으로 ‘수축된’ 순간에도, 이러한 것 뿐만이 아닌 아주 일상적인 어느 사건을 접할때라도, 주인공 닉의 아주 명쾌하고 섬뜩한 그러면서도 아주 감동적인 하나의 문장으로 이러한 ‘우주와 자아의 격리Quarantine'에 대한 작가의 텍스트를 모조리 단 한 문장으로 수축시켜 대변해준다.

“결국 모든 것은 평범한 일상 속으로 귀속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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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문학적으로 접근해도 대단해 재밌는 것 같아서 한번 올려봅니다.
댓글 4
  • No Profile
    니카 07.09.06 15:24 댓글 수정 삭제
    멋진 분석이군요. 그렉 이건은 골수 하드 SF팬들한테는 감로수이지만 문학성은 꽝이다라는 편견을 씻어주는 글이었습니다. 소설로서는 그렉 이건보다 한수 위라는 테드 창 평도 읽고 싶어지네요.
  • No Profile
    현서 07.09.07 15:04 댓글 수정 삭제
    테드창을 분석하려면 엄청난 시간을 감내해야하는것은 사실입니다만 (일단 두께의 압박), 한번 시도해 보고 싶긴 합니다. ^^
  • No Profile
    078호 07.12.17 06:33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테드 창 분석도 기대하겠습니다. ^^
  • No Profile
    노인네 08.01.04 03:23 댓글 수정 삭제
    ㅎㅎ 그랙 이건의 쿼런틴... 반정도 읽다가 책장에 꼽아두었는데 다시한번 꺼내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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