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있어선 안되는 장소 따윈 아무한테도 없어."
"이 세상 모두가 네가 있어야 할 곳이다."
우루시바라 유키의 충사는 묘하다. 주인공 깅코는 언뜻 보기에는 21세기의
사람인지 아니면 중세 시대 사람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은색 머리와 초록색
눈, 입에 언제나 물고 있는 담배. 그는 마치 사립 탐정 같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가 레인 코트 깃을 세우는 것처럼, 혹은 험프리 보가트가 말보로를
피우는 것처럼 그렇게 깅코는 일본의 중세를 걸어간다.
충사는 다분히 일본적인 작품이다. 우선 시대 배경 자체가 그렇다. 깅코를
제외한 사람들의 머리 모양이라든가 복식, 생활 방식을 보면 아직 국가가
세워지지 않은, 지역 영주 중심의 봉건 사회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영주의 힘은 거의 혹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촌락 중심으로 살 뿐이며
배운 자들이나 행정력을 가진 자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백성들은 산을 중심으로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 모여 고기를 잡는다. 산에는
주인이 있어서 백성들의 삶을 관장한다. 일본 특유의 정령 신앙이라고 해야
할까. 작품의 중심이 되는 [벌레]는 어쩌면 에테르 같기도 하고 그들이 모여
결국 산의 주인이 되는 듯도 하다.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다. [벌레]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여기가 정말 일본이긴 한 걸까. 모를 일이다.
깅코의 모델이 사립 탐정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벌레]를
끌어들이는 체질이다. [벌레]는 항상 사건을 일으킨다. 김전일이나 코난이
가는 곳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면 깅코가 가는 곳마다 [벌레]가 꼬이고
문제가 일어난다. 그건 깅코의 몸이 가진 고유의 체질이다. 흔히 탐정 만화에
붙는 '살인을 부르는 탐정'이란 농담이 깅코에겐 농담이 아니다.
하지만 충사는 탐정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요괴물도 아니다. [벌레]는 요괴가 아니기 때문이다. [벌레]는 하나의 생각이
굳어진 것이기도 하고, 땅에 흐르는 기운이 뭉친 것이기도 하다. [벌레]는
바이러스처럼 생물이면서 무생물이다. 그들은 하나의 관념, 사유를 전하는
매개체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을 때가 많다. 유전 정보를 전하는
RNA라고 하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깅코는 항상 외롭고 충사의 등장인물들 또한 언제나 그렇다. 사람을 그리워하다
[벌레]가 되기도 하고 [벌레]와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자신을 잊기도 한다.
망각.
깅코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깅코는 자신이 누군인지 알기 위해
헤매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단지 머물 곳이 없을 뿐이다.
깅코가 어떻게 해서 충사가 되었는지를 밝혀주는 9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한 인물은 깅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있어선 안되는 장소 따윈 아무한테도 없어."
"이 세상 모두가 네가 있어야 할 곳이다."
우리는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집 값이
올라서 혹은 집 값을 올리기 위해서. 직업이 변해서, 단지 새로운 곳에 살고 싶다는
이유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말도록 하자.
그저 풀을 요 삼아 하룻밤을 지새울 뿐.
"이 세상 모두가 네가 있어야 할 곳이다."
우루시바라 유키의 충사는 묘하다. 주인공 깅코는 언뜻 보기에는 21세기의
사람인지 아니면 중세 시대 사람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은색 머리와 초록색
눈, 입에 언제나 물고 있는 담배. 그는 마치 사립 탐정 같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가 레인 코트 깃을 세우는 것처럼, 혹은 험프리 보가트가 말보로를
피우는 것처럼 그렇게 깅코는 일본의 중세를 걸어간다.
충사는 다분히 일본적인 작품이다. 우선 시대 배경 자체가 그렇다. 깅코를
제외한 사람들의 머리 모양이라든가 복식, 생활 방식을 보면 아직 국가가
세워지지 않은, 지역 영주 중심의 봉건 사회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영주의 힘은 거의 혹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촌락 중심으로 살 뿐이며
배운 자들이나 행정력을 가진 자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백성들은 산을 중심으로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 모여 고기를 잡는다. 산에는
주인이 있어서 백성들의 삶을 관장한다. 일본 특유의 정령 신앙이라고 해야
할까. 작품의 중심이 되는 [벌레]는 어쩌면 에테르 같기도 하고 그들이 모여
결국 산의 주인이 되는 듯도 하다.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다. [벌레]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여기가 정말 일본이긴 한 걸까. 모를 일이다.
깅코의 모델이 사립 탐정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벌레]를
끌어들이는 체질이다. [벌레]는 항상 사건을 일으킨다. 김전일이나 코난이
가는 곳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면 깅코가 가는 곳마다 [벌레]가 꼬이고
문제가 일어난다. 그건 깅코의 몸이 가진 고유의 체질이다. 흔히 탐정 만화에
붙는 '살인을 부르는 탐정'이란 농담이 깅코에겐 농담이 아니다.
하지만 충사는 탐정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요괴물도 아니다. [벌레]는 요괴가 아니기 때문이다. [벌레]는 하나의 생각이
굳어진 것이기도 하고, 땅에 흐르는 기운이 뭉친 것이기도 하다. [벌레]는
바이러스처럼 생물이면서 무생물이다. 그들은 하나의 관념, 사유를 전하는
매개체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을 때가 많다. 유전 정보를 전하는
RNA라고 하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깅코는 항상 외롭고 충사의 등장인물들 또한 언제나 그렇다. 사람을 그리워하다
[벌레]가 되기도 하고 [벌레]와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자신을 잊기도 한다.
망각.
깅코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깅코는 자신이 누군인지 알기 위해
헤매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단지 머물 곳이 없을 뿐이다.
깅코가 어떻게 해서 충사가 되었는지를 밝혀주는 9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한 인물은 깅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있어선 안되는 장소 따윈 아무한테도 없어."
"이 세상 모두가 네가 있어야 할 곳이다."
우리는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집 값이
올라서 혹은 집 값을 올리기 위해서. 직업이 변해서, 단지 새로운 곳에 살고 싶다는
이유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말도록 하자.
그저 풀을 요 삼아 하룻밤을 지새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