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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지난 2006년 11월 국내에 개봉했던 『판의 미로』를 처음 관람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수많은 영화를 봐왔지만 이렇게 나를 뒤흔든 영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이 영화는 기호학적으로 매우 치밀하게 직조되어 있으며, 이러한 기호학적 치밀함은 ‘영화읽기’를 시도하는 관객들에게 매우 인상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2007년에 발매된 DVD 『판의 미로SE』를 2008년에야 접하게 되어 다시금 감상하면서 느낀 점을 정리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기호학 수업을 듣는 와중에 리포트를 쓰게 되었고, 내가 읽은 판의 미로의 기호학적 특징들을 정리하면서 리포트도 제출할 겸 하여 『판의 미로』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하였다. 이 작품은 1944년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스페인-멕시코 합작영화이며, 프랑코 정권에 대한 비판과 환상세계의 아름다움이라는 두 중심축을 바탕으로 놀랄 만큼 잘 만들어진 영화텍스트이다. 분석에 앞서 본문은 DVD 『판의 미로SE』에 실린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오디오 코멘터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본론


Ⅰ. 인물 소개



비달 대위: 세부 사항에 극도로 집착하는 반사회적 인물이다. 주위의 모든 일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용하는 부츠나 시계가 얼마나 잘 닦여있는지에 집착하고, 면도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어떠한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심지어 격분한 상태에서 오필리아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도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다듬고 모자를 고쳐 쓰기도 한다.
그에게 시민군은 확대경으로 보아야 하는 지도 위에 표시된 작은 점에 지나지 않는 하찮은 존재이다. 그는 매우 시야가 좁고, 삶과 사람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 비달 대위가 확대경으로 보는 것이 둘 있는데, 시민군의 위치를 나타내는 지도와 아버지가 물려준 시계다. 시민군은 그의 적이고, 시계는 자신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시간에 대한 부담감을 나타낸다.



비달 대위가 거대한 시계와 같은 배경 안에서 확대경으로 작은 시계를 보면서 고치고 있는 장면이다. 마치 비달 대위가 거대한 시계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구성되었다. 이 장면은 비달 대위가 시간에 사로잡힌 인물로, 영생을 얻지 못한 남성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비달 대위가 오필리아의 엄마를 통해 자신의 아들을 낳으며 대를 잇고 아버지의 시계를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려 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비달 대위의 이러한 의지는 시민군에게 아기가 양도될 때 메르세데스가 부친승계를 거절하면서 좌절된다. 이는 또한 스페인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감독의 부정으로도 읽을 수 있다.



대위가 얼마나 인간 같지 않은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대위가 식인 괴물 같은 존재로 변하는 장면이다. 실제로 대위는 지하의 식인괴물과 매우 비슷하게 그려진다. 괴물은 요정의 존재를 없애려고 하며(지하괴물은 요정을 먹어버리고, 비달 대위는 맨드레이크를 부정하며 없애버리게 한다) 희망(지하 괴물은 오필리아를, 비달 대위는 시민군을)을 없애버리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스스로의 희망을 믿는 오필리아와 시민군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 판의 처음 모습은 지하 괴물과 마찬가지로 노인처럼 그려진다. 이는 환상세계가 고대부터 존재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한 장치이다. 그와 대비하여 고대에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오필리아는 이 영화 속에서 홀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가장 나이어린 인물로 나온다. 판은 흰 머리를 하고 있으며, 지저분하고, 눈은 마치 먼 것처럼 눈동자가 보이지 않으며, 제스처는 판의 심리를 소극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염소가 몸을 떨 듯이 몸을 떠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아픈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모습은 희미해지고 낡아가는 고대 환상세계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판의 몸에 붙어있던 이끼와 나뭇가지가 없어지고 머리카락은 붉은 색을 띄며 위협적이고 큰 몸짓을 하고 눈동자도 또렷해진다. 이것은 환상세계가 점점 현실세계를 잠식하고 환상세계가 뚜렷하게 등장하는 것을 나타낸다.



요정: 요정은 처음 등장했을 때 대나무벌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오필리아의 동화책을 보고 난 이후로는 우리가 아는 요정과 같은 모습을 띄게 된다. 이 곤충요정이 대낮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일상에 숨겨져 있는 상상의 세계를 그리려는 감독의 의도 때문이다. 요정은 마치 원숭이처럼 묘사되는데, 더럽고 지저분한 육식동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환상 세계 속의 모든 존재는 육식을 한다. 지하 괴물과 판, 세 요정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나무뿌리인 맨드레이크조차 우유와 오필리아의 피를 먹는다. 요정이 육식을 하는 것은 그들이 선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데, 환상 세계의 존재들이 선과 악 그 어느 쪽도 아니라 자연을 상징하는 중립적 존재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는 환상세계가 희생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판은 마지막에 오필리아가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조건으로 순결한 아기인 동생의 피(목숨일지도 모른다)를 요구한다)







오필리아의 엄마: 비달 대위에 맞서기보다는 순응한다. 이는 안주한다기보다는 현실세계에서 폭력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뿐이다. 위의 사진은 오필리아의 엄마가 맨드레이크를 불태우기 직전의 사진이다. 전에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대위에게 저항하며 엄마답게 행동할 수도 있었다. 딸에게 마법은 살아있고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아이인지 얘기하고, 대위는 미친 사람이지만 전쟁 때문에 그를 떠날 수 없다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이미 마법의 힘에 대해 잊어버린 엄마는 오필리아에게 마법은 상상일 뿐 실제 존재하지 않으니 정신 차리고 어른답게 굴라고 야단을 친다. 결국 마법을 부정하기로 선택한 엄마는 맨드레이크를 불 속에 던져버리고 그 결과 유산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오필리아의 엄마는 치명적인 선택을 내려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가게 된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비극적 선택을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되는 전형적인 인물상이다. 이렇게 오필리아의 엄마는 끝내 오필리아가 믿는 동화 속 환상세계를 부정하고, 자신을 지켜주었던 환상세계를 저버리면서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게 되며,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어디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아는 사람만 환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 영화의 주제 중 하나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동화를 믿지 않고 영혼을 외면하는 평범한 어른이 되어버린다. 동심을 잃어버린 순간은 우리의 성장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오필리아와 엄마는 그러한 아이와 어른, 주체적인 여성과 수동적인 여성을 상징하며, 둘의 대립은 남성 중심의 세계에 편입한 여성과 남성 중심의 세계에 저항하고 불복종하는 여성간의 갈등을 대변한다. 이는 옷을 둘러싼 갈등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오필리아의 엄마가 오필리아에게 만들어준 드레스는 현실세계의 모범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엄마에게 오필리아는 외모 상으로만 공주처럼 보이면 되는 것이며, 의부인 비달 대위로 상징되는 현실세계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성인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오필리아가 실제로 공주가 될 수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오필리아는 환상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성인의 근심걱정을 상징하는 드레스를 벗어놓아야 한다. 잠시 갈등하던 오필리아는 결국 드레스를 벗고 환상세계로 들어간다. 여기서 드레스는 외부의 굴레를 벗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기 위해 버려야 하는 현실세계의 상징이다.



의사: 처음에는 의지가 약하고 비달 대위로 대표되는 폭력을 두려워하고 체념하는 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말더듬는 시민군(가장 취약한 존재)이 자신을 희생해서까지 시민군 전체(희망)를 지키려는 것을 보고 현실세계의 폭력을 부정한다. 의사는 환상세계와는 연관이 없으나 현실세계의 희망인 시민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현실세계의 폭압적 명령에 불복종함으로써 스스로의 의지를 드러낸다.



메르세데스: 메르세데스는 자유와 공화국과 합법정부는 믿지만 동화는 믿지 않는다. 동화를 믿는 대신 시민군을 믿는 것이다. 메르세데스 또한 환상세계의 희망이 아닌 현실세계의 희망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굳은 의지는 시민군의 적인 비달 대위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상처를 입히며, 마지막에는 비달 대위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결정을 내린다. 현실세계의 저항적인 여성의 대표인 메르세데스가 현실세계의 남성의 대표인 비달 대위에게 승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오필리아가 환상세계로 돌아갔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며, 현실세계 속에 남게 된다. 메르세데스의 선택은 오필리아의 엄마와 같이 동심을 잃어버리고 동화를 믿지 않게 된 어른의 선택이며, 오필리아의 엄마가 한 선택과 상반되는 동시에 오필리아의 선택과도 상반되며, 동시에 비달 대위와도 반대된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이 셋과 모두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오필리아: 사진은 오필리아가 자신이 지하세계 모안나 공주라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이다. 오필리아가 머무는 장소는 대부분 원형의 구조를 따른다. 욕실, 다락방, 판을 만나는 구덩이 등 오필리아는 원형적인 장소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원형은 따뜻하고 포근한 색감으로 표현되며 여성적이고 환상세계를 긍정하며 진정한 영생을 추구하는 오필리아의 의지를 상징한다. 반면 오필리아와 반대인 비달 대위는 직선적이고 금속성의 딱딱하고 차가우며 탁한 색감으로 표현되며 남성적이고 환상세계를 부정하며 진정한 영생의 추구가 아닌, 아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물려주고 부계의 압박감 속에서 자신을 시간의 톱니바퀴 속에 매몰시킨다.
오필리아는 동화 속 환상을 지극히 사랑한다. 엄마가 지적하고 관객들도 알 만큼 항상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나름대로 변형시킬 만큼 창작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런 오필리아가 자신의 임무를 실패하고 외톨이가 되어 다락방에 갇히고, 환상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마지막 시험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될지라도, 오필리아는 판에게 ‘나 하나의 이익을 위해 아기를 넘겨줄 수 없다’라고 말할 선택은 남아있다. 오필리아의 마지막 결심이야말로 인생의 갈림길에서의 선택을 의미한다. 이러한 갈림길의 선택은 모든 등장인물에게 동일하게 등장하는 영화의 주제 중 하나이다.

이 영화의 인물 구성은 되도록 동화의 단순성을 지키려고 한다. 동화의 등장인물에는 특유의 단순성이 있어야 한다. 복잡하면 동화 고유의 인물이 가진 단순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 동화의 구성을 보존하면서 등장인물의 구성을 바꾸거나 반대로 동화의 구성을 바꾸면서 등장인물의 단순성을 보존해야 한다. 둘 다 변경하면 동화의 본질을 잃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많이 비틀어놓고 동화의 고전적 기능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물은 단순히 동화의 고전적 기능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특징을 부여해서 인물의 단순성을 보존하면서도 인상에 깊이 남을 만한 인물을 창조한다.





Ⅱ. 현실세계와 환상세계의 대립

영화 속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 바로 전에 환상세계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환상 세계로의 도입은 수평적 장면전환 기법을 썼다. 나무뿌리와 같은 어머니의 배를 수평적 장면전환으로 처리하였다. 이는 환상 세계가 지하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서는 여태까지 영화 속에서 쓰인 차가운 색감을 탈피하고 붉은색 계통과 황금색의 화려한 색감을 사용하였다. 엄마의 자궁을 따뜻한 색감으로 표현한 것이다.



현실세계                         환상세계

차가움                              따뜻함

남성적                         모성적, 여성적
  
직선                                  원형

청색·회색·녹색          황금색 또는 붉은색

화려함                        화려하지 않음

투박하고 정적임         움직임이 정교하고
                                동적이고 활달함



판을 만나는 미로 가운데의 구덩이는 현실세계와 환상세계 양쪽에 모두 해당하는 장소이다. 현실세계와 환상세계가 서로 겹치게 되는 최초의 장소이다. 덧붙이자면, 시민군이 숨어있는 동굴은 판의 구덩이와 비슷한 모양으로, 시민군이 숲 속에 있는 환상의 존재 같은 느낌을 준다.





Ⅲ. 더 자세히 보기 - 판의 미로를 읽는 핵심 키워드

키워드1: 색깔
오필리아가 동생인 아기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환상세계는 강렬한 붉은색의 배경을 깔고 있다. 오필리아의 두 번째 임무에서, 분필로 만들어낸 문에서 이어지는 복도는 자궁과 흡사한 구조와 색깔을 가지고 있다. 이는 환상 세계가 체내에 자리 잡은 듯한 느낌을 부여한다.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는 환상세계가 힘을 더해가면서 불은 황금색을 띄고 푸른 색감에 침투한다. 특히 마지막 환상세계 장면은 전체적으로 황금색을 띄고 있다.
현실세계와 환상세계는 이처럼 대립하기도 하지만, 서로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받기도 한다. 두 번째 임무에서 현실 세계의 강력한 폭력성이 환상세계에서는 복도 끝 연회실에 있는 지하 괴물의 모습을 빌어 나타난다. 이 연회실은 대위의 식당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하 괴물의 성격은 비달 대위와 같이 폭력적이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한다.

키워드2: 열쇠
열쇠는 환상세계 현실세계 둘 다 중요하게 나온다. 열쇠는 환상세계와 현실세계 양측에게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함과 동시에 열쇠로 인해서 목표한 바에 이르지 못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키워드3: 칼
칼 또한 마찬가지로 두 세계에서 모두 중요하다. 칼은 단절을 상징한다. 현실세계의 메르세데스는 비달 대위에게 잡혀있지만 스스로의 칼로 자신을 구속한 끈을 끊어내며, 비달 대위를 공격하기도 한다. 이와는 대비되는 환상세계에서 오필리아는 요정의 충고보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열쇠를 사용하며, 그로 인해 칼을 얻게 된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아기에게 칼을 대지 못하게 하면서 타인의 희생과 단절을 부정한다.

키워드4: 자궁
나팔관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나무에서와 같이 자궁의 상징은 영화 내부에서 꾸준히 나온다. 판의 뿔과 미로 역시 닮은꼴이다. 특히 맨드레이크를 담고 있는 우유바구니는 노골적인 자궁의 모습이다. 여기서 현실세계(오필리아 엄마)와 환상세계(우유바구니)가 동일시되며 환상세계의 자궁이 파괴되면서 동시에 현실세계의 자궁 또한 파괴된다. 오필리아의 엄마는 자신이 지닌 생명과 모태의 상징인 우유바구니를 비달 대위에 의해 부정당하게 되고, 스스로도 부정하면서 자기부정 혹은 자살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선택을 한다. 주체적 여성인 오필리아보다 비달 대위를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비달 대위에 의해 스스로가 지닌 가치를 부정당하면서 엄마는 죽게 되는 것이다. 나무(자궁) 속의 열쇠를 찾아내고, 꽃이 피게 한 오필리아는 자궁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을 지키고 회복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환상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키워드5: 달
달은 시간의 흐름, 밤, 지하세계, 여성적 속성, 순환과 영생 등을 상징한다. 월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달은 여성으로 대변되는, 월경의 순환과 열매 맺음 등을 상징한다. 환상세계의 특징처럼 원형을 띄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판을 처음 만났을 때는 초승달이었으나 오필리아가 마지막 선택을 할 때에는 보름달이 된다. 또한 오필리아나 엄마가 피를 흘리는 모습은 자궁의 순환(영생)을 위해 흘려야 할 피(희생)을 상징한다.

키워드6: 마법 꽃가루
오필리아가 곤충요정을 처음 봤을 때도 그렇지만, 환상의 존재가 현실세계에 있을 때마다 꽃가루가 날아다닌다. 이는 눈에 보이는 환상세계의 증거로 감독이 환상세계가 오필리아의 상상 속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 장치이다. 시민군은 항상 마법 꽃가루가 날리는 가운데 숲 속에서 나오고, 오필리아가 나무 속에 들어갈 때나 재탄생할 때도 이 마법 꽃가루가 등장한다.

키워드7: 불복종
불복종은 영화의 핵심 키워드 중 매우 중요한 키워드이다. 오필리아는 요정이 가르쳐준 가운데 문 대신 왼쪽 문에 열쇠를 넣고 칼을 획득한다. 이는 불복종이 위험을 불러온다는 가장 단적인 예로 들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오필리아는 연회실에서 아무 것도 먹으면 안 된다는 규칙을 무시한다. 이러한 불복종을 수행함과 함께 오필리아는 동시에 자신을 믿는 법을 배우게 된다.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본능을 믿게 된다. 타인보다 스스로를 신뢰하는 것이다. 마지막 임무를 주면서 판은 오필리아에게 시키는 대로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거듭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판의 말을 거부하며 불복종한다. 그것이 설령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더라도, 자신이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강변하는 것이다.

키워드8: 미로
미로는 제목에도 등장할 만큼 중요한 키워드이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1944년은 영화의 공간적 배경인 스페인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갈림길에 섰던 시기이다. 미로는 우리가 필연적인 장소에 도달하기까지 거쳐야 하는 수많은 골목과 갈림길을 암시한다. 감독은 생명이나 우주에도 미로처럼 필연적인 중심이 있다고 믿는다. 그 중심을 향한 여행이 우리의 인생 여정이라고 믿는 것이다. 미로는 판이 살고 있는 오필리아의 상상 속 미로이기도 하고 대위가 갇혀있는 역사 속의 현실을 상징하기도 한다. 미로 문에 새겨진 문구는 라틴어로 ‘운명은 너의 손(결정)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운명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결론

『판의 미로』는 1944년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소녀가 어떻게 현실세계 속에서 투쟁하며, 환상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면서 미로를 통과하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시민군이 어떻게 희망을 잃지 않고 현실세계 내에서 투쟁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오필리아 엄마와 메르세데스, 그리고 오필리아 이 세 여성이 각자 어떠한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각자의 갈림길에서 선택하는지를 꼼꼼히 읽고, 가부장적-남성적-폭력적 세계에서 그 세계 속에 숨어있는 각종 기호학적 쟁점들을 살펴보았다. 오필리아의 엄마는 체제를 받아들이지만 그 체제가 자신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죽게 되고, 메르세데스는 체제에 반대하여 체제가 가진 폭력을 되돌려주며 체제를 부정하고, 오필리아는 체제를 탈피하여 다른 세계를 선택한다. 셋의 선택은 각자 타당하지만 부분적으로 불완전하다. 이는 세계가 여성적 가치인 모태와 생명을 존중받기에는 너무나 폭력적이고 남성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필리아의 엄마와 비달 대위가 서로를 동등한 파트너로 보았다면 어땠을까. 오필리아와 비달 대위가 서로의 세계가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려 노력했다면 어땠을까. 메르세데스와 비달 대위가 대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무엇이 수반돼야 할까. 또 다른 해답은 관객 각자의 몫일 것이지만,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여성과 남성의 억압-피억압 구도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은 물론 스스로에게도 현 체제가 바람직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달 대위로 상징되는 가부장적-남성적-폭력적 세계의 한계는 여성적 가치인 모태와 생명을 통해 극복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이 영화를 통해 세 여성이 각자의 선택에 따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는 방식을 보여주면서 여성이 여성 스스로 지닌 여성적 가치를 포함한,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다각도로 살펴보면서 사회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여성의 선택은 어떠한 것들이 있을지 고찰해볼 수 있었다.



마감의 압박과 분량의 제한 때문에 부랴부랴 날림으로 쓴 허술한 레포트입니다.
못 다룬 부분도 있고 너무 도식화에 구겨넣은 부분도 있어서 불만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언젠가 수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은 올려둡니다.
댓글 1
  • No Profile
    야키 08.06.24 00:22 댓글 수정 삭제
    판의미로. 제가 가장 뜻깊게 봤던 영화입니다. 학교신문에 기자의 자격으로 그 감삼 후기를 올려본 적도 있죠.

    지금은 아쉽게도 가물가물하지만 말입니다. 머리속 깊게 박혀있는 영화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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