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풀빛, 1999년 초판, 2005년 재판. 품절.
5월만 되면 생각나는 이 책은, 찾으려고 보면 맨날 품절 돼서 구할 수가 없다. SF도 아닌데.. 최정운 선생님은 우리 과 교수님. 우리 과가 얼마나 희한한 과인지는 이 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이 분으로부터 국제정치학개론과 국제문화론과 막스 베버와 한국 근대소설을 배웠는데, 심지어 의열단에 대한 석사논문도 이 분 밑에서 쓸 뻔했다. 결국은 1차 대전 쪽으로 기울고 말았지만.
이 책은, “사회과학 책 읽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해 준” 책이다. 지금은 외교관이 된 우리 과 동기의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 주변 사람들도 다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책은 1980년 5월의 광주를 다루고 있다. 나는 저자를 개인적으로 잘 알기 때문에 이 책의 압권은 역시 서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콜라를 먹고 자랐다는 진짜 부르주아 교수님이 이 어마어마한 주제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좋다. 살면서 부르주아 계급 사람들을 본 적이 별로 없지만 이 분은 무늬만 부르주아가 아니라 진짜 부르주아가 틀림없고, 이 분을 보고 있으면 돈 많다고 진짜 부르주아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서양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제일 힘들었던 부분 중 하나가, 부르주아들이 절대 만만치 않은 학식과 인품과 세계관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것.
책으로 넘어가서, 이 책은 한국 민주주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80년 5월의 광주에 대한 연구다. 80년 5월의 광주! 얼마나 상투적인 표현인가. 운율마저 느껴질 정도다. 수많은 사람들이 5.18을 소재로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지만, 이 책은 그런 담론에 얽매이지 않고 사료로 넘어간다. 5.18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 남긴 수많은 증언들. 이 책, <오월의 사회과학>은 막스 베버의 방법론에 따라 사료들을 타고 현장으로 날아간다. 저자는 사료 안으로, 80년 5월의 광주 속으로 들어간다. 그날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다시 옆으로 좀 새서, 나는 민주주의를 중고등학교에서 배웠다. 교과서에서 배웠다는 뜻이 아니다. 선생님들로부터 배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전교조 선생님들한테서 배웠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을 개 패듯이 패는 선생님들을 보고 배웠다. 옆에서 사람이 사람 이하의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 나는 나도 그렇게 되는 게 무서워서 못 본 척 숨을 죽인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좌절해서 돌아서면 무언가 울컥하는 것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른다. 그 순간에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하면 안 되는지를 절절히 깨달았고,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노로 깨우쳤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 책은 사람이 사람을 짐승처럼 죽이는 장면을 보고도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힘없이 돌아서던 80년 5월 광주의 좌절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짐승처럼 죽는데 말없이 돌아선 나는, “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80년 5월의 광주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서서히 깨닫게 된다. “아니야. 나는 사람이야!” 그리고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그들은 다시 거리로 나온다. 그리고 싸우기 시작한다. 군대와 싸운다. 그 어마어마한 폭력과 맨몸으로 맞선다.
“우리를 죽이려고 온 군인들, 당신들이 무슨 대한민국이야? 대한민국은 바로 우리야!”
그들은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대통령과 대한민국 육군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이 진짜 대한민국이라는 선언. 이것이 바로 한국 민주주의의 핵심이고 본질이고 모든 것이다. 민주주의가 대의제에서 나온다고? 천만의 말씀.
<오월의 사회과학>이 전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핵심은, 놀랍게도 “사랑”이다. 무참한 폭력에 짓밟혀 인간 이하의 상태로 내려갔던 사람들의 깨달음. 인간이 실로 존엄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느끼는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 절대적인 신뢰. 예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믿음과 희생, 용기. 이 책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80년 5월 광주의 공동체를 “절대공동체”라고 부른다.
이 책이 나오고 몇 년 뒤에 어느 대학원 수업에서 최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한다. “한국 사람들이 그때부터 군대를 만만하게 보기 시작했다고. 얼마나 지독한 독종들이야! 세상에 어느 나라 사람들이 군대하고 맞짱을 떠 보겠다고 저렇게 뻑하면 달려들겠어?” 그 절대공동체의 경험이 87년의 민주화로, 그리고 지금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내가 기억하는 이 책의 함의다. 책을 구할 수가 없으니 확인할 길이 없지만.
2002년 거리에서 우리는 누구를 보았던가.
빨간 옷을 입은. 촛불을 든. 인간의 존엄성.
2008년 청계천에는 누가 나와 있던가. 교복을 입은..
길 위로 나온 민주주의를 무시하지 말라.
놀라지 마라. 우리의 민주주의는, 무려 “사랑”이다.
최정운, 풀빛, 1999년 초판, 2005년 재판. 품절.
5월만 되면 생각나는 이 책은, 찾으려고 보면 맨날 품절 돼서 구할 수가 없다. SF도 아닌데.. 최정운 선생님은 우리 과 교수님. 우리 과가 얼마나 희한한 과인지는 이 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이 분으로부터 국제정치학개론과 국제문화론과 막스 베버와 한국 근대소설을 배웠는데, 심지어 의열단에 대한 석사논문도 이 분 밑에서 쓸 뻔했다. 결국은 1차 대전 쪽으로 기울고 말았지만.
이 책은, “사회과학 책 읽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해 준” 책이다. 지금은 외교관이 된 우리 과 동기의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 주변 사람들도 다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책은 1980년 5월의 광주를 다루고 있다. 나는 저자를 개인적으로 잘 알기 때문에 이 책의 압권은 역시 서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콜라를 먹고 자랐다는 진짜 부르주아 교수님이 이 어마어마한 주제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좋다. 살면서 부르주아 계급 사람들을 본 적이 별로 없지만 이 분은 무늬만 부르주아가 아니라 진짜 부르주아가 틀림없고, 이 분을 보고 있으면 돈 많다고 진짜 부르주아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서양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제일 힘들었던 부분 중 하나가, 부르주아들이 절대 만만치 않은 학식과 인품과 세계관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것.
책으로 넘어가서, 이 책은 한국 민주주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80년 5월의 광주에 대한 연구다. 80년 5월의 광주! 얼마나 상투적인 표현인가. 운율마저 느껴질 정도다. 수많은 사람들이 5.18을 소재로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지만, 이 책은 그런 담론에 얽매이지 않고 사료로 넘어간다. 5.18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 남긴 수많은 증언들. 이 책, <오월의 사회과학>은 막스 베버의 방법론에 따라 사료들을 타고 현장으로 날아간다. 저자는 사료 안으로, 80년 5월의 광주 속으로 들어간다. 그날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다시 옆으로 좀 새서, 나는 민주주의를 중고등학교에서 배웠다. 교과서에서 배웠다는 뜻이 아니다. 선생님들로부터 배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전교조 선생님들한테서 배웠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을 개 패듯이 패는 선생님들을 보고 배웠다. 옆에서 사람이 사람 이하의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 나는 나도 그렇게 되는 게 무서워서 못 본 척 숨을 죽인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좌절해서 돌아서면 무언가 울컥하는 것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른다. 그 순간에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하면 안 되는지를 절절히 깨달았고,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노로 깨우쳤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 책은 사람이 사람을 짐승처럼 죽이는 장면을 보고도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힘없이 돌아서던 80년 5월 광주의 좌절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짐승처럼 죽는데 말없이 돌아선 나는, “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80년 5월의 광주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서서히 깨닫게 된다. “아니야. 나는 사람이야!” 그리고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그들은 다시 거리로 나온다. 그리고 싸우기 시작한다. 군대와 싸운다. 그 어마어마한 폭력과 맨몸으로 맞선다.
“우리를 죽이려고 온 군인들, 당신들이 무슨 대한민국이야? 대한민국은 바로 우리야!”
그들은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대통령과 대한민국 육군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이 진짜 대한민국이라는 선언. 이것이 바로 한국 민주주의의 핵심이고 본질이고 모든 것이다. 민주주의가 대의제에서 나온다고? 천만의 말씀.
<오월의 사회과학>이 전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핵심은, 놀랍게도 “사랑”이다. 무참한 폭력에 짓밟혀 인간 이하의 상태로 내려갔던 사람들의 깨달음. 인간이 실로 존엄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느끼는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 절대적인 신뢰. 예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믿음과 희생, 용기. 이 책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80년 5월 광주의 공동체를 “절대공동체”라고 부른다.
이 책이 나오고 몇 년 뒤에 어느 대학원 수업에서 최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한다. “한국 사람들이 그때부터 군대를 만만하게 보기 시작했다고. 얼마나 지독한 독종들이야! 세상에 어느 나라 사람들이 군대하고 맞짱을 떠 보겠다고 저렇게 뻑하면 달려들겠어?” 그 절대공동체의 경험이 87년의 민주화로, 그리고 지금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내가 기억하는 이 책의 함의다. 책을 구할 수가 없으니 확인할 길이 없지만.
2002년 거리에서 우리는 누구를 보았던가.
빨간 옷을 입은. 촛불을 든. 인간의 존엄성.
2008년 청계천에는 누가 나와 있던가. 교복을 입은..
길 위로 나온 민주주의를 무시하지 말라.
놀라지 마라. 우리의 민주주의는, 무려 “사랑”이다.
2 . 입만 살아 나불댄다 해도 제대로만 나불댄다면 소위 '지식인'의 존재 이유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3. 글쓴이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척 하지만 , 사실은 너도 나약한 지식인일 뿐이지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 하지만 위 손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는 분이 아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