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다. 적어도 어떤 이들의 정의를 따르자면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랑이 기적이라고 해석될 여지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세의 기적과 같은 어떤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며, 어떤 불가능할 정도로 가장 이상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도록 예비된 그 무엇이라고 말해서조차 안된다. 우리는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해 달리 말할 것이다.

조금 독특하게 말하자면 사랑의 불가능성은 금연의 불가능성과 혁명의 불가능성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조금 이상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우리가 땅과 바다를 가르는 어떤 실존적 결단의 첨단에 이끌려 금연센터로 결연히 나아갈 때, 우리는 되려 우리 자신의 실존의 부조리와 무의미를 극단으로 겪을 때가 있다. 이건 단순히 내가 들은 일화이지만, 그러한 금연 결심자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들어서자마자, 상담자로부터 "지금-당장" 담배를 끊을 것은 명령/권유 받는다. 금연 결심자가 가장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그는 말한다. "아니, 이제 겨우 이렇게 어려운 결심을 했는데, 저에게 쉴 틈도 주지 않는 것입니까? 최소한 담배와의 마지막 작별인사조차 나눌 기회조차 박탈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그는 금연의 결심 자체에 들러붙은 내속적 불가능성과 조우한 것이다. 다시 말해 금연이 불가능한 것은 그것이 원칙적으로 현세에서 금지되었음을, 혹은 그것의 가능성은 초월적 지평에만 머물러 있어 유한자로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확실히 미친 소리에 가깝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금연에 대한 냉소주의자들은, 골초들은, 이러한 부정신학을 믿는다. 담배란 끊는 게 아니라 평생 참는 거라고 말하면서. 물론 이러한 신학적 냉소주의에도 금연의 불가능성은 어떤 한 측면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금연의 불가능성은 보다 다른 궁극의 차원에 존재한다.

금연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을 결의하고 실행할 최적의 조건과 이상적인 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에 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 금연은 당신의 "실존으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결심과 혹은 그 결심을 이루는 삶의 배경과 미장센과도 완전히 무관하다. 그것은 단순히 일어나야하는 어떤 것이다.

사랑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랑에 대한 불가능성과 금지와 얽힌 많은 사례들에 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며 사랑에서 언제나 많은 장벽과 변질과 타락과 슬픔과 한계들을 인지해내는 많은 로맨스 가이/걸들과 냉소주의자들은 마치 금연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과 같은 포지션을 차지한다. 물론 그들이 상황을 완전히 왜곡한다고 비난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그들의 상대적인 포지션이라는 것이다. 금연에 관한한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상담가의 입장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주의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흡연을 평생 참는 것이다." 이 둘은 어떤 시차를 이룬다. 즉 둘은 동일한 상황을 말하지만 완전히 서로 다른 이면인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번역될수조차 없는 완전한 "이율배반"을 이룬다. 흡연의 불가능한 "실재"는 바로 둘의 시차를 통해 감지되는 것이다. 애당초 언급했던 금연 결의자가 당혹스러워했던 것도, 바로 고유한 정신분석적 의미에서, "불가능한 실재"와 조우했던 것이다. 즉 바로 그러한 이율배반, 시차를 느꼈기 때문이다.

금연은 상담가의 말대로 현세의 문제이면서도, 또한 냉소주의자들 말대로 초월적(?)인 문제인 것이다.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닌 것이다. 여기서부터 금연이라는 실재에 대한 완전한 주체의 연루가 시작된다. 즉 그는 어느쪽 견해에 기댈 수 없는 이율배반 속에서 그 자신이 금연이라는 사건 속에 완전히 연루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말 그대로 "불가능한" 어떤 사건일 터. 금연 자체의 성공여부도 여기서는 물론 보장할 수 없다.

혁명에 관해서도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그리 오래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혁명은 아주 간단히 말해서 민중들의 먹고 사는 문제이다. 반면에 해체주의자들이나 철학자들 혹은 이론가들의 말을 따라 그것은 "정의"라고 하는 좀 더 이론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혁명가의 입장에서 그것은 둘 다이며 동시에 어느쪽도 아니다. 여기서부터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이 혁명이라는 사건에 대한 혁명가 자신의 주체적 연루가 시작된다.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는 금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표상의 영역에 있어서, 그것이 일어나기 위해 "마련된 자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르적으로 가공된 로맨스 코미디와 멜로 드라마와 역행하는 어떤 전제이다. 사랑을 사랑으로 만드는 어떤 공통통념 속에 그려지는 그 위치, 그러한 "자리" 자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 속에서 그것들을 그린다. 이것이 정확히 말해서, 오늘날 시대에 사랑이라고 하는 사건을 불가능하거나 금지된 그 무엇으로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일어난다.

혹은 장르간의 역할을 분배해보다. 로맨스 코미디는 가령 최초의 금연 결의자와 같이, 자신의 어떠한 결의가 적절한 순간을 타고 났음을 자신의 머릿 속에서 확신하는 어떤 희극적인 상황인 것이다. 주인공은 거울을 보고 말한다. 자, 하나 ,둘, 셋, 이로써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길!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비록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아무튼 주인공은 적절한 배경과 적절한 미장센 적절한 농담과 유머 적절한 대사와 코믹하면서도 또한 매우 재치있는 반사신경들을 갖추고서, 이 모든 것들을 구비해둔 상태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 모든 것들은 물론 예비되어있는 어떤 것이다.

반면 우리의 멜로물(매우 느슨하게 정의된 장르 아닌 장르이지만)의 주된 서사는 유감스럽게도 금연에 대한 회의주의적 시선을 견지하는 그런 사람들의 생각과 부합한다. 물론 여기서 금연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초월적인 것이다. 혹은 끊임없이 다가가면서 또한 멀어지는 매우 숭고한 것이다. 로맨틱 코미디에서와 달리, 이때부터 사랑의 혹은 금연의 불가능성은 보다 더 강하게 인지된다. 혹은 이 단계에서 로맨틱 코미디는 지양된다. 왜냐하면 사랑 자체에 내속한 어떤 불가능성과 그것의 실재는 이때 더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이때의 불가능성은 오해된 불가능성이다. 왜냐하면, 이때 로맨틱 코미디에 사용된 모든 소품들은 재활용되어, 이제는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거친 파도와 암벽 그리고 장애물들을 묘사하는 데 투자되고 있는데,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칸트가 말하는 숭고한 것이지만, 모름지기 숭고한 것이란 보다 단순하고 소박한 진실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두렵고 끔찍한 상황을 자꾸만 재현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더 두렵고 끔찍한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때, 회의주의자와 냉소주의자들은 로맨틱한 사람들과 궤를 같이하며 숭고한 것에 탐닉한다.  

영화 Graduation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사랑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은 나중에 가서 그 자신이 간과하고 있던 어떤 보다 근본적인 불가능성과 마주친다. 영화 종반부에서 강압적인 결혼식에서 신부를 탈출시킨 후, 도망치는 버스 좌석에서, 남녀가 서로 교환하는 당혹스러운 시선은 바로 사랑의 실재에 빼도박도 못한 채 주체적으로 연루된, 커플의 당혹스러움 예증한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처음에 우리는 사랑이 아닌 성욕과 육체적 관계와 불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60년대의 퇴폐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말한다. 결국 진심어린 연정 자체가 거세된 공간 속에서 사랑이란 단순히 이 모든 삶의 공허의 무게를 감내하는 와중에 무한히 멀어져가지만, 동시에 모든 연정에 빠진 주체를 그 둘레로 조직화하는 어떤 <초월적 기표/부재하는 중심>처럼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이 질서가 깨지기 시작한 것은 애초에 이 질서 따위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때이다. 즉 주인공이 불륜의 상대의 딸과 사랑에 빠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애초에 영화의 그럴듯한 미장센으로 제시되던 60년대 말의 허무와 방향상실과 결핍감 따위가 대체 무슨 상관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것은 애초의 로맨틱 코메디와 완전히 다른 희극적 효과를 낳는다.

즉 애초에 사랑에 담긴 주관적 결의와 진심 따위는 없다. 아니, 금연센터에 발을 들어선 사람처럼 어떤 결단으로의 순수한 주체적 몰입 속에는 여전힌 어떤 거리두기가 있었음을 사후적으로 발견한다. 여기서 멈추면 우리는 손쉽게 비극으로 이행한다. 자기분열과 변절과 변심과 혹은 넘을 수 없는 장벽, 거리감에 대해 우리는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지쳐빠진 회의주자마냥 금연/사랑의 가능성을 저 먼 숭고한 지평 너머로 정립할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제시된 상황이 원래 희극적이었던 것은 그러한 당신의 자기분열과 관계 없이, 아무튼 당신은 금연을 해야만 한다는 어떤 사건에 속에 한 발짝 더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 졸업Graduation에서 주인공과 그를 바라보는 관객이 느끼는 희극적 당혹감의 본질이다. 여기서 사랑의 불가능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즉 달리 말해 그것은 더욱 순수한 의미에서 주체적인 것이고 되는 동시에 기존의 결함 많은 비극적 인격과 자아 따위와는 무관한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을 할 때 빠져드는 고유한 인격체의 개별적이고 심지어는 상처투성이인 특징에 빠져든다는 상황 자체와 완벽한 이율배반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우리가 경험으로 알듯이, 그러한 특질들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할만한 대상으로서의 포착불가능한 X를 발견한다. 그것은 물론 불가능한 대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떤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강하게 그것을 의식한다.

이것과 금연의 유비관계를 더욱 끝가지 밀고가자면, 금연과 사랑은 모두 "둘"과 관련된 문제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유사성은 그 변증법적 과정이다. 금연과 사랑 모두 "하나"의 결심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어떤 동일성을 가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둘"로 쪼개진다. 이때의 둘은 악순환적인 둘이며 메울 수 없는 초월적 거리이다. 이때 순수한 하나는 도달할 수 없는 거리에 놓인 것으로 정립된다. 비극적 정조의 숭고한 탄생이다. 그러나 이 이율배반이 극에 도달할 때, 우리는 다시 처음의 희극적인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이 메울 수 없는 이율배반 속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는 "대상"의 "실재"가 주어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주체가, 변명의 여지 없이, 100% 연루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궁극의 답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이미 그 안으로 한 발짝 걸어들어갔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박가분
댓글 0

자유 게시판

어떤 이야기든지 자유롭게 이야기하실 수 있는 자유 게시판입니다. 스팸성 글은 경고 없이 삭제됩니다.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자유 거울 글의 저작권과 거울 글을 퍼가는 등의 일에 대한 원칙 mirror 2013.06.04
177 리뷰 황사 그 수수께끼를 풀다 TVT 2008.06.15
176 리뷰 충사, 우루시바라 유키1 땅콩샌드 2008.06.05
175 리뷰 그려지지 않은 그림2 TVT 2008.05.18
174 리뷰 『판의 미로』 기호학적으로 읽기1 유로스 2008.05.11
173 리뷰 업스탠딩 레이디3 TVT 2008.05.09
172 리뷰 오월의 사회과학3 배명훈 2008.05.08
171 리뷰 [이야기하기]배명훈님의 마탄강유역8 felias 2008.04.20
리뷰 로맨틱 코메디v.s.멜로 드라마(?) 박가분 2008.03.17
169 리뷰 [감상] 잭 런던, <늑대개White Fang>1 현서 2008.03.16
168 리뷰 재미난 집 - 어느 가족의 기묘한 이야기2 가루 2008.03.13
167 리뷰 [re] 박가분씨께 한가지 질문이 있어요.2 현서 2008.03.12
166 리뷰 아동문학 비판 - 아자르와 톨킨 사이에서1 현서 2008.03.12
165 리뷰 판타스틱 3월호 특집 로맨스 기사에 대한 리뷰3 sandmeer 2008.03.11
164 리뷰 <밤 너머에> 리뷰 Digest판 예고2 박가분 2008.03.04
163 리뷰 jxk님 소설 비평에 대한 불만, 혹은 비평의 관성에 대하여12 박가분 2008.02.27
162 리뷰 [감상] 용의 이 날개 2008.02.23
161 리뷰 [리뷰] 얼음나무 숲 날개 2008.02.23
160 리뷰 [리뷰] 양말 줍는 소년3 날개 2008.02.23
159 리뷰 [감상] 『밤 너머에』를 읽고2 날개 2008.02.10
158 리뷰 쌀과 소금의 시대2 레몬에이드 2008.01.09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16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