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 Prologue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막심 고리키의 <첼카슈>를 읽기 전까지 내 생애 최고의 작가는 잭 런던이었다. 물론 그 시절까지 난 책을 단 한권도 읽지 않은 우수한 바보였다. 하여튼 랜달 클라이저가 영화화하였던 <늑대개>를 보고난 뒤 엄청난 매력에 이끌려 원서까지 사서 읽어보자 했었지만, 그의 풍부한 은유와 표현력넘치는 문장들은 절대로 만만한 것들이 아니었고, 나는 이 작품을 상당부분 각색된 건전한 휴머니티 드라마인 영화로만 만날 수 있었다. 대신 좀 더 쉬운 문장과 간결한 이야기로 나를 사로잡았던 <Call Of The Wild>의 문고판 원서를 친구의 도움으로 얻게 되어 고등학교 3학년때 수능이 끝나고 정신없이 읽었던 기억이 있다. (웃기게도 정확히 그 이후에 이 작품은 <야성의 외침>으로 문예출판사에서 번역소개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맥락적으로 더 정확한 번역은 <야성의 부름>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 작품을 소개할 기회가 된다면 차분히 하도록 하자)



  그러다가 어제 인천에 데이트를 하러 가는 길에 책재고 떨이하는 지하철역 안에서 책을 뒤적이다가 나는 엄청난 책을 발견했다. 책을 발견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늑대개>. White Fang이라는 원제를 가진 이 작품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한글로 번역된 적이 없었다. 책을 뒤적여보니 2001년에 규모가 작은 출판사에서 번역이 되었고, 출판사는 곧 망하면서 소위 말하는 '도서 레어아이템'의 목록에 포함된 책이었다. 이런 책을 단돈 2000원에 구입한 엄청난 행운을 안고 나는 집에 오자마자 정신없이 이 책을 읽어나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제껏 읽은 잭 런던의 책 중에 가장 훌륭한 작품이고, 20세기 쓰여진 가장 훌륭한 판타지-우화소설의 목록에 잭 런던의 <늑대개>를 포함시켜야한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은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되어있지 않은 채, 어느것이든 말할 수 있는 환상소설의 매력을 궁극적으로 발산한 명작중 하나이다.

2. 자연과 존재, 계율의 의미에 대하여



  이 작품은 그의 가장 대표적인 투톱 <강철군화>와 <야성의 부름>의 중간선상을 달리고 있으며, 동시에 두 작품의 매력을 모두 안고 있다. 이 점이 <늑대개>의 매력이며, 압도적인 무게감을 가지게 만드는 요인이다. 주인공 벅Bark을 중심으로 자연과 계율의 소속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야성의 부름>의 섭리와, 그런 시스템화 되어있는 계율의 체제하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담아낸 <강철군화>의 내용이 모두 담긴 이 소설은 20세기 초반의 알래스카 자연을 완전히 내재화된 2차세계Secondary World로 상정하여 일구어낸 판타지소설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다.



  이 작품은 1/4만 개의 피를 받은 늑대 화이트팽White Fang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며 자연 속에서 생명이 계율을 익히는 원리인 생명의 섭리와 약육강식의 체계, 그리고 그 안에서 상정되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매우 놀라운 메타포로 그려내고 있다. 자연의 존재는 생명의 섭리를 바탕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늑대든 족제비든 뇌조든 하나의 '계율'로서 경건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고 생명은 그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므로써 살아간다. 화이트팽은 처음 동굴의 아주 작은 세상 (노발리스적으로 보자면 '집')의 인식부터 시작하여 공포를 얻게 되는 과정, 그리고 약육강식의 '계율'을 습득하는 성장모습, 계율의 전환과 세상의 순치를 아주 세밀하면서도 부드럽게 스케치하면서 보여준다. 결국 생명의 섭리를 '능가하는 곳'에 도달해 있는 인간들을 화이트팽은 신으로 인식하고 그들 안에서 보여지는 새로운 계율을 익혀나간다.



  계율은 폭압적이다. 자연에서든 인간(신) 안에서든 그 계율은 수직적으로 내려온다. 계율의 세계 안의 모든 존재는 그 계율을 거스를 수 없으며, 모든 것은 그 아래에서 지배당한다. 엄청난 기근 속에서 벌어지는 무참한 약육강식은 자연의 계율 밑에서 생명의 '현현'을 보여주고, 인디언들 안에서 길들여진 화이트팽의 모습은 신에게 절대 복종을 보여준다. 거기서 거스르는 것은 곧 죽음으로의 추방이다. 하지만 그런 계율이 무한정 절대적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 부분에 있어서, 이 작품은 니체의 니힐리즘에 굉장히 비슷한 관점에 도달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 시기에 잭 런던이 니체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작품 내적으로 보여지는 신의 계율(그러니까 인간의 계율)은 부조리하며 그것은 새로운 관계를 필요로 하는 모험의 연속으로 보여진다. 처음 완전한 세상을 인식하던 늑대굴에서부터 인디언 마을로, 다시 투견장으로 이행되면서 화이트팽이 겪게되는 시스템의 계율들은 모두 절대적인 섭리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것은 파괴될 수도 있으며, 실제로는 허상이다. 하지만, 현존재로 남아있는 화이트팽은 그 안에서 지옥같은 삶에 몸부림치고 신의 계율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후반부에 이에 대한 매우 놀라운 반전을 준비해 놓고 있다. 이것은 니체의 초인사상이니, 프롤레타리안 문학이니 하는 - 잭 런던의 작품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 그의 문학적 성향을 넘어가는 판타지 소설이 가지는 내재적 리얼리티를 이용한 유쾌한 반전에 다름 아니다.



  이 작품을 끝내 자연으로 돌아가는 <야성의 부름>식으로 끝냈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늑대개>는 끝까지 그 '계율' 안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여기서 화이트팽은 중대한 사건을 만나게 된다. 바로 계율의 '관계'가 뒤집힘으로해서, 계율이라는 언어가 변증적으로 무너지고, 그리하여 새로운 계율을 만나게 되는 것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런던은 그의 어느작품에서도 보여지지 않는 '사랑Eros'를 제시하며 이런 수직적 파쇼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실로 낭만주의자들에게서나 보여질 수 있을법한 내러티브인데, 런던은 이 작품을 교묘한 2차세계의 판타지소설로 직조해내므로써 그것을 성공적으로 완성했다. 이 작품 초반부의 계율은 바로 '자연'그 자체다. 약육강식, 생명은 생명 자체의 약동이 존재이유라는 자연의 계율은 보편적이면서 초월적인 특징을 가지는데, 이것은 인간을 만나면서 '폭압적' (자연은 섭리를 강요하지만 그것이 현존재에게까지 침투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인 수직관계가 강화되고, 화이트팽은 거기에 '얽매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것을 깨치고 자유로 향하는 방법 역시 '계율'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계율은 '상대에게 강요당하는 것'이고, 사랑은 '자발적 복종'이라는 아이러니이다. 런던은 낭만주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존재와 타자의 교감관계에서 가지는 사랑의 아이러니를 매우 새롭게 풀어냈고, 여기에 이 작품의 가장 뛰어난 우화적 묘미가 있으며, 내적인 즐거움이 따라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이러한 테마와 내러티브는 경이의 문학으로서 - 환상풍이고, 매우 치밀하며 당위적이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완벽하게 새롭다.





3. <늑대개>, 그리고 White Fang



  이 작품이 한국에 처음 영화로 될 때 제목을 뭐로 써야할지 참 난감했을 것이 분명하다. White Fang이라는 원제는 '하얀 어금니'라는 뜻인데, 이것은 늑대임에도 불구하고 '개의 혈통'을 가지는 것의 간접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제목을 <늑대개>라고 의역한 것은 별 다른 도리가 없으면서도, 상당히 적절한 의역이라 하겠다.



  잭 런던의 언어는 매우 정확하고 세밀하다. 그는 적절한 낭만적인 묘사에 사색적 뉘앙스를 부여하려 하며, 그런 사색적 뉘앙스는 서사가 이어지면서 작품의 생각거리 - 테마 - 로 뭉쳐지는 독특한 문체를 즐겨 쓴다. (현재도 이런 서사적 문체를 쓰는 작가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점은 흥미롭게 주목할만하다.) 단, 작품의 번역자가 전문가가 아닌지라, 이런 부분들에서 오역이 많은 점은 조금 아쉽지만 이제 오역된 것들을 스스로 유추하여 복원하는데도 제법 요령이 생긴지라 작품을 이해하는데, 오-탈역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나중에 여유가 허락되면 원서와 비교하여 읽어보며 조금 더 세밀한 문장의 맛을 느껴보고 싶기도 하다.





4. Epilogue



  나는 종종 판타지소설의 카테고리에서 우리가 잘 아는 '장르판타지', 'SF'와 더불어 아동-청소년문학과 민담문학을 판타지 문학의 멤버로 인정하고자 이야기하였고, 그 구심점은 톨킨이 거듭 강조한 '내재적 리얼리티'라고 공공연히 주장한 바 있다. 이 작품은 호즈슨 버넷의 <비밀의 화원>과 더불어 20세기 초반 '자연의 섭리'를 바탕으로 풀어나간 판타지문학의 진수이며, 지금 읽어도 역시나 새로운 시각을 삶에 부여해줄 수 있는 굉장히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정말 간만에 아주 마음에 드는 소설을 찾아내어 매우 기쁘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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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룡 08.04.06 15:04 댓글 수정 삭제
    제가 옛날에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 83년 판인가 세계문학 전집에서 '흰 엄니'라는 제목으로 들어있는 걸 본 적 있습니다만... 그건 안 치시는건가요? ^^;

    감상 잘 읽었습니다. 저는 정작 Whitefang이 태어난 후 보다, 서장에서 인간 둘이서 죽은 나으리의 시체를 마을까지 가져가면서 늑대들의 습격에서 버텨내는 과정을 보면서 정말 숨이 멎을 정도로 압도당한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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