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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감상] 용의 이

2008.02.23 17:4602.23


용의 이

  『용의 이』는 북스피어 출판사에서 출판된 듀나의 SF 작품집이다. 여기에는 3편의 단편과 1편의 장편이 실려 있다. 듀나는 1994년부터 PC 통신망에 여러 작품들을 발표해온 인지도 높은 장르 작가 중 한 명이다.(SF작가로는 국내에 몇 안 되는 인지도를 가진 작가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듀나는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듀나의 영화낙서판(http://djuna.cine21.com/movies )이라는 사이트도 운영하고 있다.   그 동안 듀나는 『면세구역』(국민서관, 2000), 『태평양 횡단 특급』(문학과지성사, 2002), 『대리전』(이가서, 2006) 등의 작품집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은 전부 단편집이었는데 이번 『용의 이』에는 장편이 1편 실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과연 듀나가 쓴 장편은 어떠한 모습인지. 그리고 듀나가 최근에 발표한 단편들은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는지.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너네 아빠 어딨니?

  첫 번째 실려 있는 단편은 장르문학 월간지 『판타스틱』에 실렸던 「너네 아빠 어딨니?」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현재 영화화도 진행 중인 작품인데 그만큼 시각적으로 상상이 잘 가게 쓰여 있다. 또한, 이 단편은 문체가 대화체라서 읽기에 수월했다. 이 소설은 시종일관 화자가 누군가를 앞에 두고 ‘이랬어, 저랬어. 그랬는데…….’ 식으로 쓰여 있다. 이런 방식은 읽는 이에겐 상당히 친숙하게 받아들여지고 또 쉽게 읽힌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문체의 형식은 기존에 작품집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점인데 그만큼 작가가 변화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너네 아빠 어딨니?」는 소녀가 주인공인 좀비 이야기다. 주인공인 새별이는 아빠에게서 동생 새봄이를 지키기 위해서 아빠를 죽이게 된다. 그 다음에 간신히 아빠를 묻었지만 밤마다 좀비로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실제로 어린 여자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무서운 공포만이 주로 강조되겠지만, 여기에 나오는 새별이는 굉장히 침착하고 똑똑하다. 또한 조숙하기 그지없다. 작가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캐릭터라고 할까? 사건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것 같으면서도 주인공이나 읽는 독자 모두 위기의식을 느낄 새가 없다. 차분하게 사태를 관망하듯이 바라보면서 세상이 좀비화가 되는 것을 지켜본다. 작가의 어린 아바타 같은, 어린 새별이의 조숙한 점이나 주위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도 무심하게 대처하는 태도 같은 곳에서 재미와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판타스틱』에 게재 되었을 때도 호평이 많았던 단편.

  천국의 왕

  일러스토리 소설 무크 『파우스트』에 실렸던 단편이다. 이 단편은 예전 대산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대산문화에 실렸던 SF콩트를 확대해서 단편으로 만든 버젼이다. 일단 영혼이라는 존재와 SF의 결합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영혼이란 것은 죽음 뒤에 잠시 그림자처럼 남았다가 햇빛에 녹아 사라진다는 설정이 인상적이었고 그럴 듯하게 생각되었다. 아예 존재치 않는다는 것보다 잠시 있으나마나 한 상태로 있다가 사라지고 또한 그것을 붙잡아 유지시키는 장치는 꽤나 매력적인 소재였다.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

  이 작품은 청소년 문학 웹진 글틴에 기성작가 초대란에 실렸던 단편이다. 갑자기 세계를 전복시키는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당시 출간되었던 『대리전』 보다 이 단편 하나가 더 낫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흥미롭게 읽었고 인상에 깊게 남았던 작품이다. 이제는 왠지 그 때의 충격이 시들해진 감이 있지만, 그래도 읽어볼만한 단편임은 확실하다. 이 글은 한 소녀가 자신의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너네 아빠 어딨니?」처럼 문체 자체가 대화체인 것은 아니지만, 화자는 회고담처럼 과거부터 현재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차분하고 당돌하게 이야기한다.

  용의 이

  장편 「용의 이」는 이 작품집을 통해 처음 공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받아보자마자 바로 잡고 읽은 소설이다. 그 동안 듀나가 발표한 작품들이 대부분 분량이 짧은 편이었기 때문에 금세 읽으리라 생각했지만 진도는 빨리 나가지 않았다. 그것은 이 작품이 장편이기 때문에 분량이 상당한 까닭도 있고 또 내용 전개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초반에 이상한 행성에 불시착한 소녀를 바로 보여줌으로써 다른 배경은 독자가 스스로 추리해야 하는 점도 작품에 빠져들기 힘든 점이었다. 나중에 차근차근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에 소녀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뭐고, 소녀는 왜 이런 행성에 불시착 하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상세히 알 수 있지만, 초반에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소녀는 초염력을 가지고 있어서 상대방의 기억과 생각을 읽고 마음대로 세뇌할 수 있으며 회로를 구성해서 유령을 만들 수 있기도 하다. 이 기기묘묘한 능력은 이 소설을 더욱 복잡한 구성으로 인도하는 요소이다. 초반에 작품에 몰입하기 힘든 까닭은 이러한 능력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깔리지 않았음이 크다. 그러나 분량이 긴 만큼 읽어나가면서 점점 설정들을 받아들이고 읽는 속도가 빨라지게 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외래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은 작품이라는 점이다. 듀나는 자신의 사이트에서 이 작품을 쓰고 있는 과정에 대해 언급하곤 했는데(그 전에 발표했던 「대리전」과 마찬가지로), 그때 몇몇 물건들을 우리말 혹은 한자어로 어떻게 적당하게 바꿀지 고민하는 모습을 비추기도 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볼 때 과연 그 작업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성공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꽤 그럴 듯했다는 것이다. 어색하거나 혹은 오히려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적당한 것 같다. 이상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근사하게 잘 어울리는 것도 아니었다. 외래어를 쓰지 않고 한글과 한자만으로 SF 장편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런 실험을 계속하는 한 앞으로 더 색다른 작품을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듀나가 지금껏 쓴 작품 중에서 가장 긴 분량이다. 그렇다면, 듀나가 쓴 장편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내려야 할까? 일단은 아쉬움이 먼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읽고 나서 장편에 걸맞는 이야기였는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말이 밝혀지는 부분이 갑작스럽기 때문인지 그 중간에 서사가 약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혹은 둘 다겠지만) 이렇게 굳이 긴 분량으로 빙 둘러서 말하기보다 깔끔하게 짧은 분량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어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물론 긴 이야기여서의 장점도 있지만 왠지 주인공 소녀가 벌이는 모험에서 긴박감이 너무 적기 때문에 소설에 몰입이 안 되고 이야기에 흥미가 덜 가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장편 정도의 분량이라면 순간순간 계속 몰입할 수 있어야 전체 분량을 읽어나가면서 지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데 소녀의 태도가 너무도 침착하고 반응이 재미가 없어서 독자 역시 무심하게 읽어나가게 된다. 그로 인해 긴박감이 떨어져 소설의 긴장감이 떨어지고 이는 이 긴 소설 분량의 회의가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감이 든 정도는 아니었다. 긴 이야기를 시도해준 것만으로도 만족한 부분도 있었고 이토록 자유로운 설정을 마음껏 펼쳐 보인 이야기도 즐거운 면이 있었다. 회로를 연결해서 부서질 것 같은 유령들을 구축해 나가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이야기와 이미지였다. 작품 전체적으로 강렬한 인상과 이미지를 받아 읽고 나서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아직까지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아있다. 어둡고 음울하면서도 유머가 섞여 있는 한 편의 강렬한 영화를 본 듯한 기분이다.

  듀나의 다음

  이번이 네 번째 읽는 듀나의 작품집이다. 그 중에서 무엇이 가장 좋았는가는 각자에 따라 다를 것이고 나 같이 각 작품마다 독특한 색깔과 재미가 있다고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번 작품집 역시 기존에 나온 작품집과는 차별화된 이야기들이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인상적인 표지 때문에 또는 ‘세계 몰락 프로젝트 혹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앨리스’라는 부제 때문에 일반 서점에서 작가를 모르고 구입하게 되는 독자도 많은 것 같다. 그럼에도 그들은 실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만족하는 서평을 올리기까지 한다. 그만큼 이 작품집은 하드SF가 아니기 때문에 SF에 정통한 독자만 읽어야 하는 작품집은 아니다. 오히려 장르적이지만 장르의 관습을 벗어난 점도 많고 또 무엇보다도 읽기 쉽게 쓰인 작품들인지라 SF 장르와 많이 찬하지 않은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고 공감하며 재미를 느낄 수 있다.(게다가 첫 번째 실린 단편 「너네 아빠 어딨니?」는 SF가 아닌 호러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듀나의 작품을 접해보지 않았던 독자라도 한 번쯤 읽어봐도 재미있을 작품집이다. 또한 이 작품집을 읽고 나서 과거에 나왔던 듀나의 작품들을 찾아보게 될 지도 모르고.
  듀나는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더 이상 어두운 지구 멸망 이야기가 아니라 순수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발랄깜찍한 글을 쓰겠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라며 농담 섞인 이야기로 끝냈다. 다음 작품집이 그렇다고 밝고 화창하게 나올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작품집과는 또 다른 색깔을 가진 발전한 모습의 작품집을 보게 될 거란 생각이 든다. 새 책이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다음 책이 기대가 되는 건지. 그만큼 이 작품집이 충분히 흡족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나온다면 곧바로 구입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작가 듀나. 듀나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며 짧은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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