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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리뷰] 양말 줍는 소년

2008.02.23 17:3002.23



양말 줍는 소년

  그 신비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만으로 『양말 줍는 소년』은 가치가 있다.
  새로운 상상력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확고한 성취를 이루어냈다.

  ― 문화평론가 김봉석

  한국 독자들에게 건네는 인사. 태평양 건너에서 따뜻한 인사를 건넵니다! 한국에는 매혹적인 이야기와 문학적 전통이 있다고 알고 있어요. 한국 작가들이 상상력을 끌어내는 한국만의 방식을 찾아내길 기대합니다. 남미 작가들이 했던 것처럼요.

  ― 장르문학 월간지 『판타스틱』 2008년 2월호, 어슐러 크로버 르 귄 인터뷰 中

  나는 르귄 여사의 저 글을 읽고 한 가지 소설을 떠올렸다. 『양말 줍는 소년』. 비록 한국의 전통 설화를 소재로 한 소설도 아니고 한국적인 소재를 녹여낸 소설도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특별하다. 기존에 중세 시대 전형적인 에픽 판타지에 영향을 받은 판타지 소설들과도 다르고 일본에서 시작된 각종 라이트노벨의 영향에서도 벗어나 있다. 그만큼 독자적인 환상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한국 판타지 소설 시장을 연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3년 만에 국내 작가의 환상 소설을 출간했다. 황금가지는 초기를 제외하곤 이영도 작가의 작품과 황금드래곤문학상 수상작들을 출간하는데 그쳤었다. 그만큼 출판사 기준에 만족스러운 국내 작품을 찾기 힘들었으리라. 그런 황금가지가 오랜만에 국내 작가의 작품을 선택했다고 하니, 당연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작품 이름을 접하고 나서는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뜻밖이라거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황금가지에서 출판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형 출판사인 만큼 책은 깔끔하게 잘 만들어 줄 테고 언론 홍보 영향력도 클 테니까.

  『양말 줍는 소년』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독특한 환상소설이다. 대여점에 주로 판매되는 양산형 판타지 소설들과도 다르고 일본에서 수입해온 라이트 노벨과도 다르다. 그야말로 세계 어디를 가도 보기 힘든 낯선 환상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는 소설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은 환상의 나라에서 양말을 줍는 일을 하게 된 소년이다. 왜 갑자기 양말을 줍느냐고? 그보다 환상의 나라에는 왜 갔으며, 거기는 어떠한 곳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자, 이제 잠시 환상의 나라 속을 들여다보자.

  1. 한국판 어린 왕자, 양말 줍는 소년

  엄마는 내가 크면 훌륭한 일을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하셨다.
  나는 환상의 나라에서 낡은 양말 줍는 일을 하고 있다.

  첫 연재부터 매 연재분마다 시작을 장식하는 두 개의 문장. 이 문장이 이 소설을 나타내는 핵심 문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소설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파악이 되고 기대가 됐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주인공의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주인공에게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했지만, 주인공이 막상 환상의 나라에 가서 하게 된 일은 낡은 양말 줍는 일이었다. 나는 이 소설이 책으로 나올 때까지, 이 궁금증을 묵혀 둘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소년은 양말을 줍게 된 것일까?
  그러나 여기서 바로 정답을 얘기하면 재미가 없어진다. 이 소설의 시작도 바로 환상의 나라 이야기부터 하지 않는다.

  내가 어쩌다가 환상의 나라에서 낡은 양말 줍는 일을 하게 됐는지를 이야기하려면 무척이나 말할 게 많다.
  뭐부터 말할까? 흔히 그러듯 내 소개부터 시작할까? 몇 살이고 이름이 뭐고, 어디 살고 하는 소개부터 말이다.
  그런 건 싫다. 너무 어른들 방식 같다. 어린 왕자에도 나오잖아. 어른들은 “창가에 제라늄 화분이 있는 분홍 벽돌집이에요.”라고 말하면 모르고, “10만 프랑짜리 집이에요.”라고 말해야 “참 좋은 집이구나.”라고 한다고.

  ― 『양말 줍는 소년』 1권, 김이환 지음, 황금가지, 11쪽

  주인공은 고등학교 1학년이다. 이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화자의 목소리가 일관성 있게 변함없다는 것이다. 즉 소설이 끝날 때까지 소설의 주인공은 정말 고등학생 1학년 같다. 갑자기 어른처럼 똑똑해져서 장광설을 늘어놓거나 사건을 확 뒤집어엎지도 않는다. 숨겨진 능력이 있어서 각성을 하는 것도 아니다. 처음 모습 그대로 항상 어린 말투로 이야기를 차분하게 이끌어 간다. 이 점이 가장 인상 깊은 부분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단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 것도 아니다. 가끔은 그 또래 아이들처럼 성질도 부리고 혼나기도 하고 때로는 슬퍼서 울기도 한다. 지혜롭게 생각할 때도 있고 어리석은 짓을 벌일 때도 있다. 그런 점들 때문에 캐릭터는 살아있게 되고 이야기는 매끄럽게 진행된다.
  그리고 그런 캐릭터 때문일까? 본문에서도 언급되듯이 어린왕자가 떠오르기도 한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두 소설은 같은 위치에 서 있다. 그만큼 어른이 아닌 어린이, 혹은 청소년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본 이야기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주인공이 하고 싶은 이야기부터 하는 식이기 때문에 깔끔하면서도 흥미롭게 진행된다. 즉, 재미없는 부분은 넘어간다. 뒤에 이야기해야 할 것은 뒤로 넘긴다. 시간의 순서대로 스토리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과 관계에 따라 플롯을 짰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화자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라 사실감이 느껴진다. 능청스럽게 이 모든 게 전부 다 진짜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야기에 몰입이 더욱 잘 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때론 이야기를 건너뛰고 뒤로 미루는 부분에서는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다른 식으로 이야기 될 거라면서 이야기를 전환하는 부분 등에서 말이다. 소년이 다른 세계에 가게 되고 그곳에는 다양한 사람들과 신기한 나라들이 있다는 점, 목숨을 건 모험을 하고 시험도 당하고 좋은 사람도 만나는 점에서 비슷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그건 다음에 따로 이야기 할 자리를 마련하고 일단 이 소설의 다른 점들을 살펴보자.

  2. 우리가 바란 환상의 체험

  언제까지고 중세를 배경으로 싸우는 이야기는 질렸다. 비록 그 배경이 가상현실로 바뀐다 하더라도 그건 작가가 좀 더 이야기를 편하게 전개시켜 나가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친숙한 소재라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쉽고 사실성을 높여 진입장벽을 낮출 뿐이었지 소설의 환상이 달라지진 않았다.
  그렇다. 환상! 환상 소설에서 보여줄 수 있는 환상은 다른 소설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환상 소설 고유의 매력이다. 이 장르가 왜 존재하는가? 그 근원에는 우리가 꿈꾸는 환상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국내 장르 소설에서는 판에 박힌 듯 똑같은 환상의 일면만 보여주는 작품이 많았다. 차별화 된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어 경이롭기까지 한 환상을 보여주는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한번쯤 가보고 싶은, 살아보고 싶은 세계가 그려진 작품은 적었다. 어쩌면 해리 포터가 그토록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환영 받을 수 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을 해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매일 똑같은 하루와 재미없는 학교가 아닌 마법이 존재하고 신기한 아이템들로 가득 찬 마법의 나라. 그곳이 우리 근처에 있다는 것. 단지 개찰구 하나만 통과하면 된다는 사실이 해리포터의 인기 요인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이 『양말 줍는 소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마법의 분필과 번호만 알고 있으면 얼마든지 이 세계와 맞닿아 있는 환상 세계에 갈 수 있다는 것)
  지루한 일상에서 탈출해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다른 세계를 통해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다른 세계는 그야말로 다른 세계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세계. 화폐는 황금 동전. 우편으로 책을 빌리기도 하고, 소화전에 물을 주기도 하고, 기린이 구름을 몰고 다니고, 청소를 안 하면 풀이 자라고, 비밀요원과 중계자와 균열과 무질서가  있는 세계.
  이 환상의 나라에는 처음 온 사람들을 위한 십계명이 있다.

  1. 계산기 없이 나이를 묻지 말 것.
  2. 시계를 폼으로 차고 다니지 말 것.
  3. 완성되지 않은 소화전을 발로 차지 말 것.
  4. 맨홀 그리는 사람을 바라보지 말 것.
  5. 허락 없이 마법을 사용하지 말 것.
  6. 화분에 물주는 걸 잊지 말 것.
  7. 『세상의 모든 마법을 너에게』를 끝까지 읽을 것.
  8.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쑤셔 넣지 말 것.
  9. 우산을 가지고 다니지 말 것.
  10. 특이한 외모의 사람을 낯설게 생각하지 말 것.

  처음 읽었을 때는 이게 다 뭔 소린가 싶었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작가가 아무렇게나 지어낸 거 아냐?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주인공은 몸으로 부딪쳐가며 이 십계명의 의미를 하나 둘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읽는 독자 역시 이 십계명의 의미들을 하나씩 깨달으면서 자연스럽게 이 환상 세계에 적응하게 된다.
  강제로 세계관 설정을 주입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겪는 사건들은 황당하면서도 재미있다. 사건의 전환 속도가 상당히 빨라서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처럼 계속 연달아 스릴 넘치는 사건들이 터진다. 책을 잡은 손을 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다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작가는 완전히 다른 세계 하나를 창조해냈다. 그리고 그 세계가 말이 되도록 능숙하게 부연 설명을 달았다. 소설은 지루하지 않게 이 설명을 해내고 있다. 우리는 어느새 이 세계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인공은 환상의 나라에 적응하면서 시민권을 따기 위한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는데 독자 역시 주인공과 함께 시민권을 따는 기분이다.
  낯선 세계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을 때. 당신은 어느새 환상의 나라의 주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는 얼마든지 아직 환상의 나라를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 가이드를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3. 소설의 재미, 이야기의 재미

  “글쎄 자기가 송혜교 흉내 내서 ‘너의 죄를 사하노라.’ 한 번만 해볼 테니 나보고 송승헌 대사를 해 보래. 그래서…….”
  급기야 엄마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세금 내가 낼게. 제발 그 이야기 좀 하지 마.”
  “그 정도로는 어림없죠, 사모님.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엄마는 아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기까지 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일주일에 두 번씩 청소하는 아주머니 보낼 테니 하지 마. 내 돈으로 할게, 내 돈으로.”
  아빠는 팔짱을 낀 채 짐짓 거만하게 말했다.
  “그 정도와 바꾸긴 아까운 이야기지만 당신이 정 원한다면 뜻대로 하는 수밖에.”
  의기양양한 아빠와 침울해진 엄마를 번갈아 보고 있자니, 나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말했다.
  “아빠는 채연을 너무 좋아해서 이런 일도 있었어요. 화장실에서…….”
  
    ― 『양말 줍는 소년』 1권, 김이환 지음, 황금가지, 276쪽

  앞에서 이 소설이 보여준 놀랍고 신기하고 재미있는 세계관을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한 마디로 하자면 멋진 세계관이라는 것이겠지만. 세계의 중심에는 등대가 있고, 등대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는 존재. 그리고 그 등대와 환상의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연결해주는 등대지기가 존재하는 세계. 이런 다양한 설정들은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소설의 재미를 더해준다. 예를 들자면 대원에서 NT노벨로 출간된 『마술사 오펜』처럼 독특한 세계관의 설정이 궁금하여 소설을 더욱 읽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 놀라운 세계관만이 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도 전부 매력 있고 소설의 매력을 배로 만들고 있다. 성격 있고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기린을 좋아하는 여자친구 연두. 어떤 일에도 쉽게 놀라지 않고 대범하게 툭툭 일을 처리하는 엄마와 게임을 좋아하면서도 기계치인 아빠. 그 외에 양말관리국의 하균씨, 나영이. 비밀요원 동건이 형. 가끔씩 나타나서 도움이 되기도 하는 실적 1위 빨간 앵무새까지.
  항상 착한 사람들만 나오지는 않는다. 소설에서도 이야기하지만 환상 세계에서도 고통은 있었다. 주인공은 심하게 맞기도 하고 죽을 뻔한 고비도 여러번 넘긴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으면 정이 가는 인물들이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에서 전부 살고 싶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만약, 스토리가 금세 두려움 때문에 환상 세계를 포기했다면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완성되지 못했을 수밖에. 아무튼 주인공은 끝까지 앞으로 향해 나아갔고 결국 멋진 엔딩을 맞는다.
  환상적인 세계관, 개성 있는 캐릭터,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 있는 주인공까지 다양한 장점들로 가득 찬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소설 본연의 재미가 있다. 아무리 많은 것이 갖춰졌더라도 이야기 자체가 재미없다면 결국 책을 덮게 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아니다. 한 번 펼치면 끝을 볼 때까지 멈출 수 없다. 삶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잠언이 곳곳에 박혀 있는 것도 아니고, 미소녀들이 잔뜩 쏟아져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이야기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다고. 소설이란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항상 똑같은 상상력에 질린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야기의 재미를 품은 새로운 상상력이 여기에 나타났으므로.

  4. 가족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장르 판타지 소설을 부모님과 함께 읽기는 어렵다. 장르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마법사가 “파이어볼!”이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모두 동일한 연산 작용을 거친다. 마법사가 주문을 외워 마나의 힘으로 허공에 불덩어리를 생성하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판타지를 읽지 않는 독자들에게는 저게 무슨 소리인지 의문일 뿐이다. 결국 대여점 위주의 소설은 대부분 관습적으로 읽는 매니아층 만이 소화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 장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깔려 있지 않는 한 접근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양말 줍는 소년』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은 글이다. 『어린 왕자』를 남녀노소 누구나 읽을 수 있듯이 『양말 줍는 소년』 역시 누구나 거부감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또 누구에게나 똑같은 재미를 줄 것이다.
  그야말로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누나, 동생, 친구에게도 아무 부담 없이 권할 수 있는 재미있는 소설이다.(실제로 나 역시 설에 시골에 가져갔더니 아버지가 읽기도 하셨다. 지금은 기숙사에서 같은 방 쓰는 후배에게도 쉽게 권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김이환 판타지 장편 소설이란 타이틀을 달지 않고 김이환 장편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을 것이다.

  엄마 : 너라면 상대편이 하자는 대로 하겠니? 그러면 일단 네 검으로 왕자 검을 쳐낸 다음에 주먹으로 싸워.
  나   : 그게 말이 돼요?
  엄마 : 그 방법 밖에 없잖아.
  나   : 어떡해요? 지면 나 죽잖아요. 엄마는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걱정도 안 돼요?
  엄마 : 죽진 않을 거야. 칼에 찔려도 빨리 치료하면 살 수 있어. 환상의 나라에서 쓰는 치료 마법이 의외로 잘 들어. 바깥 세상 응급처치보다도 훨씬 낫다고.
  나   : 엄마, 진짜 짜증 나!
  엄마 : 네가 말실수해 놓고 왜 나한테 그러니?
  나   : 오늘 내가 죽으면 다 엄마 책임이야!

  ― 『양말 줍는 소년』 3권, 김이환 지음, 황금가지, 86쪽

  아이들이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동화적인 상상력도 많이 보이는 소설이다.(주의할 점은 주인공이 갓 고등학교에 진학한 소년이라 욕설이 그대로 나오는 경우도 있긴 하다.) 어렵지 않다는 게 역시 가장 큰 장점이다. 그리고 정감어린 시쳇말로 무심한 듯 쉬크한 대사들도 매력이다. 특히 주인공 엄마가 이런 대사를 잘 치는데 소설의 매력 중 하나이다. 1인칭 시점이라 주인공의 생각도 그대로 전달되는데 간결하면서도 피식피식 웃게 되는 해학이 살아있는 문체가 인상적이다. 또한 상황도 마찬가지다. 첫 도입부는 주인공의 부모님이 이혼을 결심하는 데서 시작하는데 법원에서 엄마와 아빠 중 한 분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자, 주인공은 둘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결정하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엄마, 아빠는 가위바위보를 바로 한다. 이런 황당무계한 상황과 유머가 곳곳에 존재한다. 앞에서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이 책은 이런 유치찬란하면서도 따뜻한 웃음이 가득 찬 소설이다.
  숨 가쁘게 끊임없이 터지는 사건들도 책의 흡인력을 높여준다. 주인공이 계속 곤경에 처하는 사건들은 꾸준히 흥미를 일으킨다. 주인공이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뒷장을 안 넘길 수가 없다. 예쁜 동화 같은 상상력이라고 무시했다가는 이 놀라운 재미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퍼즐처럼 논리적으로 딱딱 맞는 세계관은 정교하기까지 하다.
  아직 이 책을 접하지 않은 장르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국내에도 이런 독특한 상상력을 가진 환상 소설이 있다고.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장르 독자가 아닌 일반 독자에게 역시 마찬가지로 권하고 싶다. 환상의 나라에 가보는 것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경험일 테니까. 가는 방법도 전혀 어렵지 않다. 그저 눈앞에 있는 벽에 분필로 번호를 적고 이렇게만 외치면 된다. 당신을 환상의 나라로 초대합니다, 라고. 분필도 없고 번호를 모른다면, 환상의 나라 가이드북을 구입하면 된다. 국내판 제목은 『양말 줍는 소년』이다. 한 소년의 환상의 나라 체험기가 여러 분을 어느새 환상의 나라로 데려다 놓을 것이다. 거기엔 등대가 있고, 마법이 버젓이 존재하고, 연예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밝고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다. 바깥 세상에서 온 사람을 만나면 뽀뽀를 요청하고 집에 가서 콩을 심을 것이다. 왜 그런지는 소설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마법을 너에게, 혹은 세상의 모든 재미를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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