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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너머에』를 읽고

― jxk160 중단편집 『밤 너머에』 감상

written by wings


  『밤 너머에』는 환상문학 웹진 거울(http://mirror.pe.kr )에서 네 번째로 출간한 작가 중단편선집이다. 작가 jxk160은 거울 7호에 「꿈의 해석」이, 거울 9호에 「청혼」이 독자 우수 단편에 선정되면서 거울 필진으로 합류했다.
  이 중단편선집에는 총 7개의 글이 실려 있다. 책의 표지는 깔끔하고 크기는 일반적인 라이트노벨처럼 작은 편이다.
  일단 수록작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표제작이기도 한 「밤 너머에」이다. 이 작품을 중심으로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말해보고자 한다.

  「밤 너머에」

  “네 건의안은 사람의 시신에 관한 거였지? 그건 쓸모가 있지. 쓸모 있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거야. 사람도 쓸모가 없어지면 죽는 거야. 네가 바깥에서 살다 와서 헷갈리는 면도 있을 거야. 아세빈은 혈연이 없고, 가족도 없어. 보통 한 집에 한 명씩 살고 사생활 보호가 철저하지. 남의 생활에 간섭해서는 안 되고 간섭받아도 수치야. 육체노동은 아예 없고 지성만으로 존재 가치와 말하자면 계급이 결정돼. 신을 믿지도 않으니 물질적 형태에 내포된 신성함을 믿지도 않지. 정신과 육체의 이중성을 믿지도 않지. 육체는 주체가 사용하는 것이며 동시에 주체이지 않니. 주체로서가 아닌 육체는 망가진 것이고, 망가진 육체는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해. 더 길게 말하자면 그러니까 장례식도 필요할 리가 없지. 아세빈은 이런 곳이고 이런 곳에서 저런 것은 쓸모가 없는 거야. 넌 이제 이런 곳에 몸담고 있어. 그러니까 저런 사람들은 죽은 거야.”
- 『밤 너머에』, jxk160, 거울, 49~50쪽


  소설의 배경은 ‘아세빈’이라 지칭되는 공간이다. 그곳은 당연히 이 세계의 모습도 아니고 그동안 다른 어느 곳에서 본 적이 있는 세계도 아니다. 그야 말로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낯선 세계인 것이다. 이 낯선 세계를 과연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작가는 처음부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묘사도 지극히 적다. 특히 역사나 배경에 대해서 직접적인 설명은 없다 시피하고 외형적인 묘사도 찾아보기 힘들어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그리기가 어렵다. 도대체 얼마나 된 규모이고 사람들의 의상은 어떤 양식이며 어떤 공간에서 살아가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계속 일어나는 궁금증 때문에 글의 흡인력을 떨어트리고 읽는 진도를 더디게 만든다. 인용한 부분처럼 캐릭터들의 대사와 상황만으로 유추해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한 마디로 하자면 불친절한 모습이 많다.
  이 소설은 먼저 배경과 인물을 공들여 설명하고 이후에 상황과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일반적인 소설의 법칙과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그 때문에 이 소설은 쉽게 접근하기 힘든 면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독자들은 소통하기가 힘들어 중도에 포기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읽기 힘든 글이었다.
  쉽게 읽히지 않기 때문에 더 정성들여 읽어야 한다는 점. 작가가 창조한 새로운 세계를 세심히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은 이런 방식이 갖는 장점일 수 있다. 그러나 장점 보다는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또 크게 느껴졌다.

  “이게 뭔데?”
  “새로 얻은 거야. 난 곧 학위 논문을 써야 하니까, 바깥 책들도 제법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구.” 셴이 머리를 흔들면서 답했다. 굽슬굽슬한 갈색 머리가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더워. 널 보니까 덥다구. 짧은 소매 좀 입을 수 없어?”
  셴은 겨울햇살 같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소년에서 청년기를 가로지르는, 아직 덜 다듬어진 어깨가 조그맣게 떨리면서 그에게서 벗어났다. 샤뮌 페라틴―이 아름다운 소년은 나이는 셴보다 네 살이 어리지만 학년은 하나 위다.
- 『밤 너머에』, jxk160, 거울, 11쪽


  이 부분은 소설의 첫 도입부이다.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굽슬굽슬한 갈색 머리와 아름다운 소년이라는 점 등이다. 이런 묘사는 지극히 추상적이고 이미지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생략되어 있다. 이 때문에 머릿속에서 주요 인물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애를 먹는다. 결국 이 소설에서 나는 인물들을 그림자들처럼 불분명한 모습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세계이기 때문에 이들이 아무리 ‘소년’이라는 호칭이 붙는다 한들 우리가 아는 ‘인간’의 모습과 같은지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읽는 것은 더뎠고 정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이름도 비슷한 캐릭터들인지라 한참을 읽어야 구분이 확실히 갔고 그 전에는 대화마다 정확히 누가 말했는지 짚어주는 부분도 적어 항상 헷갈리곤 했다. 대화체 역시 비슷했기 때문에 더욱 구분이 안 갔다. 한 사람이 말하는 거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다들 비슷한 어투를 가졌다.
  이런 아쉬운 점들은 이 책에 실린 글들에 공통되게 퍼져있다. 읽기가 힘든 글, 묘사와 설명이 지극히 적은 글. 어떤 부분에서는 국내 작가 중에 이번에 『풀밭 위의 돼지』를 출간한 김태용 작가나 『달로』를 출간한 한유주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도 있다. 상황 설명이나 서사 중심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적은 듯한 부분이나 뜻 모를 문장들, 낯선 묘사가 적힌 문장들에서 읽기가 힘들다는 점 등이 말이다. 그럼에도 두 작가는 현실 세계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를 떠올리는 데 별달리 힘든 점이 없고 오직 메시지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이 작품집은 현실 세계가 아닌 독자적인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그 세계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지 독자는 확신하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더욱이 작가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모든 것을 유추해내야 하는데 이 점이 또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불안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일으킨다. 이 부분은 결국 외형적인 이미지들뿐만 아니라 작품의 내적 목소리 역시 제대로 듣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길게 서술했지만 결국 짧게 줄이자면 일반적인 친절한 소설쓰기의 규칙에서 벗어난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글쓰기를 적용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점을 받아들이고 읽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낯선 세계에 발을 내딛을 수 있으리라.
  차분한 배경설명이나 묘사가 자제된 글이긴 하지만 문장은 차분하고 깔끔하다. 한마디로 공력이 엿보이는 문장들이라 읽는 맛이 있다. 섬세한 문장들과 때론 빛나는 문장들도 보인다. 다만,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세계라고 했을 때, 너무나 다르고 독특한 세계들이 연결되어 있어서 혼란스러운 면도 있다. 약간 과잉이라고 느껴지는 문장들도 있었기 때문에 전부다 마음에 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첫 번째 매력을 찾는다면 문장들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 매력은 낯선 세계관이다. 환상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곳과 다른 세계를 접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소설은 기존에 장르적 관습에 매인 세계관이 아니라 작가가 창조한 고유의 세계관을 선보였다. 세세한 모습들까지 어디서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것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적응하기가 힘들지만 그만큼 읽는 재미가 있다. 「밤 너머에」 같은 단편도 서사보다도 먼저 세계관이 눈에 들어왔고 작품 중반부까지도 독자는 이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에 온 신경을 써야만 한다. 세계관은 독특하기 때문에 흥미로운 설정들도 많이 눈에 띈다. 이 세계관이 더 알고 싶다면 작가가 연재하고 있는 장편은 동일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삶은 나의 것뿐이고, 나의 지금 여기에 있는 몸뚱이뿐이고, 나머지는 스쳐가는 자극에 불과하다. 자극을 하나로 묶어주는 영원불멸한 근거를 믿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빨간 것과 둥그런 것은 내 감각에 있는 것이지, 그게 사과이며, 빨갛고 둥그런 것은 그 사과 자신의 존재론적 책임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다.
  바깥에서, 주술사들은 아주 오래 전에 세계를 제어하는 일을 포기해버렸다.
  (중략)
  기억은 아득하다. 셴은 이제 어떻게 자신이 질투를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내가 아닌 자에 나를 이입시키고 어떤 비교를 시도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푸르다. 그는 아름답다. 그는 높다.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주어진 것이지 그의 책임이 아니다. 세계를 질투하는 자는 없다. 신을 질투하는 자만이 있다. 사람들은 질투하기 위해 신을 만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정복욕이다.
(중략)
  그러나 미움은 얼마나 지독한 자기애인가.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것보다는 자해가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다.
  질투 받는 신들은 사멸한다, 신화가 무너질 때.
  질투 받는 타인은 사멸한다, 더 이상 그 사람을 알 수 없을 때.

   - 『밤 너머에』, jxk160, 거울, 98~99쪽


  이 소설의 세 번째 매력은 사유와 상징일 것이다. 다양한 사유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문장들 틈 속에서 캐릭터의 대사 속에서 또 세계관의 설정 속에서 숨어 있다. 이런 사유들은 소설을 정독하게 만들고 다시 재독하게 만든다.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더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이미지들이 정교하게 교차되고 결합된다. 첫 도입부부터 등장했던 신들에 대한 언급은 이후 몇 번 반복되다가 주인공의 꿈을 통해 토론까지 벌인다. 여기에 게덴이 계속 안건을 낸 시신 보관의 문제는 나중에 소설의 결말과 맞닿아 있다. 셴과 샤뮌의 관계는 처음부터 동경과 질투가 얽힌 감정이 엿보였다. 캐릭터들의 개성은 그렇게까지 매력적으로 살아나지 않았으나 둘의 관계만큼은 이 소설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나이는 네 살이나 어리지만 천재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외모까지 갖춘 샤뮌. 셴은 그를 동경하면서 질투하고 있다. 줄거리는 분량만큼이나 제법 복잡하다. 신, 도시, 질투, 동경, 살해, 숨겨진 진실, 죽음, 죽음 너머 어둠 속에 있는 것. 태양을 가려버린 어둠. 그 밤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처음에는 낯설고 혼란스러운 이야기들이 가득하지만 이야기를 읽어갈수록 가까스로 소설 속 세계에 적응하게 된다. 그리고 인물들의 모습이 명확히 잡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숨겨진, 혹은 피하고 있던 어둠 속의 진실이 드러나고 예정되어 있던 또는 낯선 충격이 다가온다.
  「별」은 「밤 너머에」 다음으로 많은 분량을 담고 있고 그만큼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액자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액자 안의 이야기는 거대한 시간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흡혈’이 소재로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에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소재별 중단편선집 중에 흡혈귀 소재들을 묶은 『혈중환상농도 13%』에 실리기도 했지만 일반적인 흡혈귀 소설과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영생, 불멸, 필멸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작품은 「별」을 통해 처음 접한 까닭인지 몰라도 가장 인상적인 글이었고 가장 놀라움을 받았던 글이었다. 즉, 아무런 대비 없이 충격을 맞았다고 할까? 전혀 알 수 없는 세계관을 독자에게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읽으면서 두통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데 힘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하나 의미가 있을 거라고 가정 하에 읽는 경향이 있다. 즉 새로운 설정이 나오면 거기에는 어떤 근원적인 의미가 있고 이 소설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며 지금 나에게 무얼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런 정보를 처리해야 할 것들이 잔뜩 있다. 그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까지 하는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쉽사리 답도 나오지 않는 것들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확신을 가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새로운 실험 소설, 새로운 글쓰기. 새로운 방식의 소설은 새로운 방식의 해석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별」의 매력은 한 세계의 멸망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다룬 스케일에 있다. 처음에 읽을 때는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도 없었다. 「밤 너머에」는 그나마 세계관이 아주 낯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셴을 중심으로 읽어나갔고 그들의 모습이나 습성 그리고 상식 등이 인간에서 아주 멀어진 것도 아니었다. 즉, 이해하고 읽는 것이 덜 어려운 편이었다. 게다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계속 셴과 샤뮌을 중심으로 보여줌으로써 어렴풋이 암시를 하는 부분이 많았다. 천재, 친구, 동경, 질투, 신, 그리고 재판정마다 나타나는 게덴과 휠체어. 시신을 보호하는 법을 계속 안건에 올리는 게덴. 마침내 결말까지.
  그러나 「별」은 하나하나 충격적이고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라 그 세계가 끝나고 새로운 역사, 세계가 시작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서 오는 경이감은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결말에 와서 제목의 의미와 많은 진실이 밝혀진다는 구조는 앞서 「밤 너머에」와 마찬가지지만, 「별」은 좀 더 희망차고 가슴 깊이 어떤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에 하는 대사들이 지금 우리 인간들을 지칭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전설과 환상의 시대가 끝나고 인간들의 시대가 시작되는 또 다른 신화를 읽은 듯한 감동마저 든 까닭일 것이다.
  「왕의 행방」은 좀 더 짧은 단편이다. 왕을 기다리며 미래를 알기에 마을을 도시로 바꾸는 쥴이 주인공이다. 총통과 왕, 그리고 쥴. 미래. 도시. 시계탑. 햇빛. 다양한 키워드가 얽히면서 소설을 이루고 있다. 약간은 부조리극 같은 느낌이 드는 단편이다. 이 소설에서 쥴은 끊임없이 왕을 기다린다. 자신이 만드는 도시는 왕에게 바쳐야 한다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에 ‘고도’처럼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환상과 현실이 결합되어 있다. 이미 지금 이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으면서 그 안에서도 쥴의 상상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환상적인 모습들이 이 소설의 강렬한 이미지, 신비한 이미지 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밤 너머에」, 「별」, 그리고 「왕의 행방」까지 묘사된 세계가 도시에 갇혀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별」은 마지막에서 열린 결말로 끝내는 듯하지만, 전체적으로 도시가 주요 배경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은 같다. 특히, 그런 세계관이 소설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밤 너머에」 역시 신과 도시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데 이는 「왕의 행방」에서 왕과 도시처럼 같은 연상으로 읽혀진다. 「날개의 피」 역시 이런 영향 하에 있어서인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모습은 결코 도시 이상의 세계는 그려지지 않는다.
  「왕의 행방」, 「인용」, 「에덴의 나무」 등에서는 각각 주인공 화자의 이야기가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구석 등이 있다. 안 그래도 배경이나 인물들의 모습이 명확히 그려지지 않고 모든 설정들이 머릿속에 박히지 않은 불분명한 상태에서 화자가 말하는 모습들조차 명확히 물질적인 것이 아닌 환상적이라는 것은 독자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둘을 결합시키는 매력은 글을 흥미롭게 만들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글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파악하려 들기는 어렵다. 서사가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미지가 더 뚜렷하게 다가오는 소설이다. 불분명한 이미지들의 나열. 알 수 없는 문장들. 정확하고 예리한 묘사가 아니라 약간은 뜬금없는 묘사들이 자주 보인다. 이는 낯선 경험인 만큼 신기하고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아쉬운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좀더 살이 붙어 있어도 좋을 듯하니 말이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집을 읽고 느낀 감상은 추상적인 만들어지고 있는 신화를 엿본 느낌이다. 완벽하게 읽히지 않는, 혹은 작가가 너무 많이 가리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듀나의 「용의 이」를 읽을 때도 처음부터 설명이 아니라 상황을 바로 보여줌으로써 혼란스러움이 가득했지만 일단 첫 부분에 주인공 화자의 외향 묘사를 바로 해놓고 이후에 주인공의 능력과 배경 설명을 틈틈이 자세하게 한 탓에 소설 전체 세계를 그리는 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본 적 없는 낯선 행성에 낯선 유령들이 등장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그러한 설명은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 여지 때문에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수 십 가지의 상징들을 그대로 머릿속에 품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따른다. 게다가 그 모든 게 물에 녹은 물감처럼 불분명하기까지 하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장치들과 서술시험은 그대로 밀고 나가면서도 약간은 타협을 해서 좀 더 독자에게 친절한 글쓰기가 된다면 더욱 많은 독자들이 이 낯선 세계를 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멋진 문장들을 맛볼 수 있었고, 새로운 세계관을 만난다는 건 언제나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다. 새로운 세계관은 환상소설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가장 큰 매력 중에 하나기 때문이다. 환상소설은 오직 세계관만으로도 주제를 나타낼 수 있는 장르가 아니던가.
  사실 감상을 쓰기 전에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내가 느낀 감정은 어렵게 읽었고 난해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 기뻤다는 점 등이니까. 읽은 소설에 대해서 주제에 대해서 메시지에 대해서 테마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기 힘들다는 점 때문에 감상을 쓸까 말까 고민이 많았다. 모르겠어요, 라고 백 번 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글을 읽는 과정은 오독의 과정이니까. 오독조차 하지 못할 것 같은 낯설고 새로운 소설이기는 하나 끝까지 읽은 감상 하나 정도는 남겨도 폐가 되지 않겠다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직 이 새로운 신화 속에 들어오지 않은 독자라면, 한 번 발을 내딛기를 추천해본다. 비록 낯설고 혼란스러운 세계일지라도,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세계 속에서 경이를 체험할 수 있기에.■
  
댓글 2
  • No Profile
    jxk 08.02.22 21:25 댓글 수정 삭제
    덧글을 달려다가 또 미루기 삼매경... 흑...
    읽고 리뷰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하튼 나름 재밌게 읽으신 듯 해서 사뭇 기쁩니다... 이번 달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리뷰를 두개나 받았네요. 풍성해라.


    * 저렇게 녹색 글씨로 인용된 것을 보니 왠지 같은 말이라도 멋져 보여서 당황했-_-;;
    * 특히 몇군데 찔리는 얘기가 있어서 찔리고 갑니다. 호호 -.-; 리뷰 감사합니다.
  • No Profile
    날개 08.02.23 15:48 댓글 수정 삭제
    jxk/ 네, 잘 읽었습니다.^^ 다음 작품들도 기대하겠습니다.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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